史記/世家

世家52-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耽古樓主 2023. 7. 8. 09:18


이篇은 30世家 중 22번째 편으로 前漢의 제후국인 齊悼惠王 劉肥와 그 후대에 대한 기록이다.
齊悼惠王 劉肥는 고조 유방의 서얼 장자로 생모는 曹씨이다. 고제6년(기원전201년), 韓信을 대신하여 제후국인 齊왕에 봉해졌고, 교동·교서·임치·제북·박양·성양 6군 73현을 통치하였다. 혜제6년(기원전189년)에 죽었다. 시호를 悼惠라 하였고, 아들 劉襄이 작위를 이었다. 齊는 기원전127년, 厲王이 죄를 지어 자결하면서 폐지되었다. 한때 무제의 아들 회왕이 책봉되어 부활하였으나, 기원전110년 회왕이 아들 없이 죽은 후 다시는 설치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천하는 평정되었으나 고조의 친족들이 적었다. 悼惠王 劉肥가 먼저 장성하여 동쪽 齊 땅을 지켰다. 齊哀王은 여씨 일족의 행위에 분노하여 자기 멋대로 군대를 일으켰으나 난폭한 그의 장인 駟鈞때문에 황제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厲王은 누이와 간통하다가 主父偃의 조사를 받고 자살하는 화를 당하였다. 황제의 손발과 같았던 劉肥를 기리며 제22편 ‘齊悼惠王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齊悼惠王劉肥者,高祖長庶男也。
齊悼惠王 劉肥는 고조 劉邦의 서얼 장자이다.

其母外婦也,曰曹氏。
그 어머니는 고조의 情婦였으며 성은 曹氏라 하였다.

高祖六年,立肥為齊王,食七十城,諸民能齊言者皆予齊王。
고조6(기원전201), 유비를 齊王으로 세우고 70 성을 식읍으로 주면서 지방의 방언을 할 줄 아는 백성도 모두 제왕에게 귀속시켰다.

▶ 齊悼惠王: 劉肥. 고조 유방의 서얼 장자로 생모는 曹씨다. 고제6년(기원전201년), 韓信을 대신하여 제후국인 齊나라 왕에 봉해졌고, 교동·교서·임치·제북·박양·성양의 6군 73현을 통치하였다. 혜제6년(기원전189년)에 죽었다. 시호를 悼惠라 하였고, 아들 劉襄이 작위를 이었다.
▶ 庶男: 정처 소생이 아닌 아들.
▶ 外婦: 情婦. 몰래 사통한 여자.
▶ 食: 食邑. 국가에서 공신에게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한 고을.
▶ 齊言: 제 지방의 方言.

齊王,孝惠帝兄也。
齊王 유비는 惠帝와는 어머니가 다른 형이다.

孝惠帝二年,齊王入朝。
효혜제2(기원전193), 제왕 유비가 입조하였다.

惠帝與齊王燕飲,亢禮如家人。
혜제는 제왕에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집안의 예를 따라 齊王을 상석에 앉혔다.

呂太后怒,且誅齊王。
여태후가 노하여 제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齊王懼不得脫,乃用其內史勳計,獻城陽郡,以為魯元公主湯沐邑。
제왕은 겁이 났으나 벗어날 수 없어서그의 內史 勳이 낸 계책을 채용하여 城陽郡을 魯元公主의 湯沐邑으로 바쳤다.

呂太后喜,乃得辭就國。
여태후가 좋아하자 곧 인사를 드리고 봉국인 로 돌아갔다.

▶ 孝惠帝: 漢高祖 劉邦의 차남으로 이름은 劉盈이다. 고조가 죽은 후 呂后의 소생 盈이 혜제로 즉위하였다.
▶ 齊王入朝: 혜제2년(기원전193년), 楚元王 劉交와 齊悼惠王 劉肥가 모두 입조하였다. 10월에 혜제와 齊王 劉肥는 여태후가 자리하며 연회를 베풀자, 혜제가 齊王이 형님이라 집안의 예를 따라 상석에 앉혔다. 여후가 노하여 독주 두 잔을 따르게 해서 앞에다 놓고 제왕에게 일어나 축수를 올리게 하였다. 제왕이 일어나자 혜제도 따라 일어나서 잔을 들고 함께 축수를 올리려 하였다. 여태후가 겁이 나서 벌떡 일어나 혜제의 술잔을 엎어버렸다. 제왕이 괴상하게 여겨 감히 마시지 못하고 취한 척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것이 독주라는 것을 나중에 들어서 알고 齊王은 두려워하며 자신이 장안을 벗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史記本紀]권09. 呂太后本紀>
▶ 燕飲: 연회를 베풀다. 燕은 宴과 통한다.
▶ 亢禮: 대등한 예를 취하다. 惠帝가 齊王이 형님이라 집안의 예를 따라 상석에 앉혔다.
▶ 湯沐邑: 周나라 때 생긴 제도로 제후의 사유 영지를 하사하여 그 읍의 수입으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목욕재계하는 비용을 충당하게 한 것이다.
▶ 魯元公主: 劉樂. 漢高祖 유방의 딸



悼惠王即位十三年,以惠帝六年卒。
도혜왕은 즉위한 지13혜제6(기원전189)에 죽었다.

子襄立,是為哀王。
아들 劉襄이 즉위하니 그가 哀王이다.

哀王元年,孝惠帝崩,呂太后稱制,天下事皆決於高后。
제애왕 원년(기원전188), 혜제가 崩御하여 여태후가 황제의 권력을 대행하니천하의 일은 모두 高后가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二年,高后立其兄子酈侯呂臺為呂王,割齊之濟南郡為呂王奉邑。
제애왕 2(기원전187), 고후는 자기 오빠의 아들인 酈侯 呂台를 呂王에 봉하고 의 濟南郡을 떼어내어 呂王의 봉읍으로 삼게 하였다.

▶ 哀王: 齊哀王 劉襄. 고조의 손자로 齊 왕이며, 부친은 고조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이다. 황실의 장손이고 여씨 정권 타도에 많은 공이 있어, 황제 자리를 두고 문제와 겨루었다.
▶ 呂太后: 前漢의 시조 劉邦의 황후. 이름은 稚이며, 자는 娥姁, 高后로도 불린다. 유방이 죽은 뒤 실권을 잡았다. 고조 사후, 황태후·태황태후가 되어, 여후·여태후 등으로 불린다.
▶ 稱制: 황제의 권력을 대행하다. 制는 황제의 조령.
▶ 呂臺(呂台): 呂肅王 呂台. 전한의 異姓 제후왕으로, 한고제의 외척인 여씨 일족이며 呂의 첫 왕이다. 여태후의 오빠 呂澤의 장자로, 아버지가 장수로서 공이 있고 전사하여 동생 呂產과 함께 작위를 받아 酈侯에 봉해졌다

哀王三年,其弟章入宿衛於漢,呂太后封為朱虛侯,以呂祿女妻之。
애왕3(기원전186), 애왕 劉襄의 동생 劉章이 도성으로 와서 황제를 호위하였는데여태후는 유장을 朱虛侯에 봉하고 呂祿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後四年,封章弟興居為東牟侯,皆宿衛長安中。
4년 후유장의 동생 劉興居를 東牟侯에 봉하니 모두 장안 궁중에서 황제를 호위 하였다.

▶ 劉章: 朱虛侯 劉章. 齊悼惠王 유비의 아들 劉章. 여후가 朱虛侯에 봉했으며 여록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 宿衛: 궁궐을 호위하기 위해 숙직을 하는 警衛
▶ 劉興居: 고조의 손자로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며, 제애왕 유양과 성양경왕 유장의 아우다.

哀王八年,高后割齊瑯邪郡立營陵侯劉澤為瑯邪王。
애왕8여후가 의 琅邪郡을 떼어내어 營陵侯 劉澤을 낭야왕으로 삼았다.

其明年,趙王友入朝,幽死于邸。
이듬해 趙王 劉友가 입조했다가 官邸에 감금되어 죽었다.

三趙王皆廢。
세 명의 趙王이 모두 폐위되었다.

高后立諸呂諸呂為三王,擅權用事。
고후는 여씨들을 세 왕으로 봉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멋대로 권력을 휘둘렀다.

▶ 營陵侯劉澤: 고제11년(기원전196년)에 유택은 장군이 되어 陳豨를 공격하여 王黃을 잡아 營陵侯에 봉해졌다. [史記世家]권51. 荊燕世家 (02/02 <燕敬王劉澤>
▶ 趙王友: 劉友. 고조의 여섯 번째 아들. 처음에 淮陽王에 봉해졌고, 후에 趙王이 되었으며 여후에 의해 幽禁되어 굶어 죽었으므로 시호를 幽王이라 하였다. 여후7년(기원전181년)정월, 태후가 趙王 劉友를 소환하였다. 유우는 여씨 일족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나 사랑하지 않고 다른 희첩을 사랑하였다. 여씨 딸이 질투로 화가 나서 태후에게 가서 헐뜯으며 유우를 무함하였다. 조왕이 도착하자 관저에 두고 만나지 않은 채 호위병에게 명해 지키게 하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史記本紀]권09. 呂太后本紀
▶ 幽: 가두다. 구금하다.
▶ 邸: 한나라 때 王侯가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도성에 머물던 관저.
▶ 三趙王: 劉如意, 劉友, 劉恢를 말한다. 모두 조왕이었는데, 여의는 여후에 의해 독살되었고, 유우는 감금된 채 굶어 죽었으며, 유회는 자살하였다. <사기 권09. 여태후본기>
▶ 諸呂為三王: 呂産은 여태후의 오빠인 여택의 아들로 梁王에 봉하였으며, 呂祿은 여태후의 작은 오빠 여석지의 아들로 趙王에 봉하였고, 여후의 오빠 여택의 손자이며 여태의 아들인 呂通이 燕王으로 책봉되었다.
▶ 擅權: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다.
▶ 用事: 정권을 잡다.

朱虛侯年二十,有氣力,忿劉氏不得職。
주허후 劉章은 스무 살로 氣力이 넘쳤는데유씨가 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을 분해하였다.

嘗入待高后燕飲,高后令朱虛侯劉章為酒吏。
술자리에서 고후를 모신 적이 있는데고후가 주허후 유장에게 술자리를 감독하게 하였다.

章自請曰:
「臣,將種也,請得以軍法行酒。」
유장이 청하하였다.
신은 장수의 후손이니 군법으로 술자리를 감독하고 싶습니다.”

高后曰:
「可。」
고후가 말하였다.
그렇게 하라.”

酒酣,章進飲歌舞。
술자리가 무르익자 유장이 술을 올리고 가무로 흥을 돋웠다.

已而曰:
「請為太后言耕田歌。」
얼마 후 유장이 말하였다.
태후를 위하여 밭갈이 노래를 부르고자 합니다.”

高后兒子畜之,笑曰:
「顧而父知田耳。
若生而為王子,安知田乎?」
고후는 그를 아이 취급하며 웃으면서 말하였다.
생각건대 너의 아버지나 밭갈이를 알지.
너는 왕자로 태어났는데 어찌 밭갈이를 안단 말이냐?”

▶ 朱虛侯: 齊悼惠王의 아들 劉章. 朱虛侯에 봉해졌으며 여록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았다. 齊悼惠王은 劉肥를 말하며 고조 劉邦의 서얼 장남이다.
▶ 有氣力: 기개가 있고 용기와 힘이 있다.
▶ 劉興居: 고조의 손자로 제도혜왕 劉肥의 아들이며, 제애왕 유양과 성양경왕 유장의 아우다.
▶ 酒吏: 주연시 술자리를 감독하고 집행하는 관리.
▶ 行酒: 술을 권하다.
▶ 畜: 대우하다. 아끼다.
▶ 顧: 생각건대. 보아하니.
▶ 而: 너.
▶ 若: 너.

章曰:
「臣知之。」
유장이 말하였다.
신도 밭갈이를 알고 있습니다.”

太后曰:
「試為我言田。」
태후가 말하였다.
나를 위해 밭갈이 노래를 한번 불러 보거라.”

章曰:
「深耕穊種,立苗欲疏,非其種者,鉏而去之。」
유장이 노래하였다.
땅을 깊이 파고 씨를 촘촘히 뿌리고싹이 나면 고루고루 옮겨 심고같은 종자가 아니면 호미로 뽑아 버린다네.”

呂后默然。
여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頃之,諸呂有一人醉,亡酒,章追,拔劍斬之,而還報曰:
「有亡酒一人,臣謹行法斬之。」
잠시 후 여씨인 사람이 술에 취해 술자리에서 달아나자 유장이 쫓아가 칼을 뽑아 목을 베고 돌아와 보고하였다.
술자리에서 달아나는 자가 있어서 신이 삼가 법대로 목을 베었습니다.”

太后左右皆大驚。
태후와 측근이 모두 크게 놀랐다.

業已許其軍法,無以罪也。
이미 군법에 따르기로 한 이상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因罷。
이로 인해 술자리가 끝났다.

自是之後,諸呂憚朱虛侯,雖大臣皆依朱虛侯,劉氏為益彊。
이 일 이후로 여씨는 주허후를 꺼리되그러나 대신들은 모두 주허후에게 의지하니 유씨는 더욱 강해졌다.

▶ 穊種: 씨를 촘촘하게 뿌리다. 穊는 촘촘하다.
▶ 鉏: 호미.
▶ 亡酒: 술자리에서 달아나다.
▶ 業: 이미. 기왕. 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虛詞) 業

한문의 허사(虛詞) 業 業已이미 已業벌써 業은 事業, 業績, 功業, 産業 등의 용례에 있어서와 같이 주로 명사로 쓰인다. 허사로서는 시간 부사로서 어떤 일이나 사건이 이미 개시되었거나,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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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憚: 꺼리다. 두려워하다.

 

其明年,高后崩。
이듬해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趙王呂祿為上將軍,呂王產為相國,皆居長安中,聚兵以威大臣,欲為亂。
조왕 여록이 상장군이 되고 呂王 呂産이 相國이 되어모두 長安에 거주하면서 병사들을 모아 대신들을 위협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朱虛侯章以呂祿女為婦,知其謀,乃使人陰出告其兄齊王,欲令發兵西,朱虛侯、東牟侯為內應,以誅諸呂,因立齊王為帝。
주허후 유장은 여록의 딸을 아내로 삼은지라 그 음모를 알게 되었다이에 몰래 사람을 보내 그의 형인 齊王 유양에게 이를 알리고 병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하게 하고주허후와 동모후는 안에서 호응하여 여씨들을 죽이고 齊王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하였다.

▶ 趙王呂祿: 7월 중순, 고후의 병세가 심해지자 趙王 呂祿을 상장군으로 삼아 북군을 통솔하게 하고, 呂王 呂產은 남군을 통솔하게 하였다. <여태후본기>
※여씨의 난: 呂太后는 유방이 죽은 뒤 혜제가 즉위하자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으며, 혜제가 죽자 어린 황제의 섭정으로서 劉氏만을 侯王으로 책봉하라는 유방의 遺訓을 어기고 그녀의 일족 9명을 王侯로 책봉하였는데 이것이 유씨 옹호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여후가 죽자 여씨 誅滅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여씨의 난이며, 여씨 정권이 붕괴되고 고조의 차남 劉恒이 文帝로 즉위하였다.

 

齊王既聞此計,乃與其舅父駟鈞、郎中令祝午、中尉魏勃陰謀發兵。
제왕이 이 계책을 들은 후 곧 그의 외삼촌 駟鈞과 郎中令 祝午中尉 魏勃과 함께 出兵을 비밀리에 모의하였다.

齊相召平聞之,乃發卒衛王宮。
제왕의 상국인 召平이 이를 듣고 곧 병사를 일으켜 왕궁을 포위하였다.

魏勃紿召平曰:
「王欲發兵,非有漢虎符驗也。
而相君圍王,固善。
勃請為君將兵衛衛王。」
위발이 소평에게 거짓으로 말하였다.
왕이 군대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한나라 조정의 虎符를 검증할 수가 없었소.
그런데 상국이 왕을 포위했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오.
이제 이 위발이 당신을 대신해 군대를 거느리고 왕을 지키겠소이다.”

▶ 駟鈞: 제애왕 유양의 외숙. 제애왕은 사균·낭중령 축오·중위 위발과 함께 병사를 일으켜, 여씨 일족이 齊에 감시역으로 파견한 승상 소평을 축출하고 사균을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여씨 일쪽이 주살된 후, 조정의 대신들은 다음 황제를 누구로 할지 논의하였는데, 제애왕의 외척 사균이 포악하니 여씨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제애왕 대신 대왕 유항을 황제로 추대하였다.
▶ 陰謀: 비밀리에 계략을 꾸미다.
▶ 召平: 전한 때의 齊相. 呂后가 죽은 뒤 齊王 劉襄이 군대를 보내 서쪽으로 京師로 들어가 呂氏일족을 주륙하려고 하였다. 소평이 군사를 일으켜 들어가 왕궁을 지키자 魏勃이 대신 병사를 이끌겠다고 요청하였다. 이에 그를 믿었는데, 위발이 병사로 相府를 포위하자 자살하였다.
▶ 紿: 속이다.
▶ 虎符: 兵符. 구리로 범 모양을 본떠 만든 병권과 徵兵의 標識.

召平信之,乃使魏勃將兵圍王宮。
소평이 그를 믿고 위발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왕궁을 포위하게 하였다.

勃既將兵,使圍相府。
위발이 군대를 거느리자 오히려 相府를 포위하게 하였다.

召平曰:
「嗟乎!道家之言『當斷不斷,反受其亂』,乃是也。」
소평이 말하였다.
도가의 말에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않으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라고 하더니 바로 이것이구나.”

遂自殺。
그리고는 자살하였다.

▶ 當斷不斷,反受其亂: 속담에 이르기를 ‘결단해야 할 때 결단하지 못하면, 도리어 화를 입는다.’고 하였다. <史記列傳권78春申君列傳>



於是齊王以駟鈞為相,魏勃為將軍,祝午為內史,悉發國中兵。
이에 제왕은 사균을 국상으로위발을 장군으로축오를 내사로 임명하고 나라 안의 군사를 모조리 징발하였다.

使祝午東詐瑯邪王曰:
「呂氏作亂,齊王發兵欲西誅之。
齊王自以兒子,年少,不習兵革之事,願舉國委大王。
大王自高帝將也,習戰事。
齊王不敢離兵,使臣請大王幸之臨菑見齊王計事,并將齊兵以西平關中之亂。」
축오를 동쪽의 瑯邪王에게 보내 거짓으로 말하게 하였다.
여씨들이 난을 일으켜서 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西進하여 이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제왕은 자신이 아직 어린아이이고나이가 어려 군대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나라 전부를 大王께 맡기고자 합니다.
大王께서는 고제 때부터 장수로서 군대 일에 익숙하십니다.
제왕께서는 감히 군대를 떠나지 못해서신을 보내어 대왕께서 임치로 가셔서 제왕을 만나 일을 논의하고 함께 齊軍을 서쪽으로 보내 관중의 난을 평정하자고 청하라 하셨습니다.”

瑯邪王信之,以為然,西[迺]馳見齊王。
낭야왕은 믿고 옳다고 생각하여 이에 서쪽으로 달려가 제왕을 만났다.

齊王與魏勃等因留瑯邪王,而使祝午盡發瑯邪國而并將其兵。
제왕과 위발 등은 그 기회에 낭야왕을 억류하고 축오에게 낭야국의 병력을 전부 징발하여 그 군대를 함께 이끌게 하였다.

▶ 瑯邪王: 劉澤. 고제11년(기원전196년)에 유택은 장군이 되어 陳豨를 공격하여 王黃을 잡아 營陵侯에 봉해졌다. 제애왕8년, 여후가 齊의 琅邪郡을 떼어내어 營陵侯 劉澤을 낭야왕으로 삼았다. [史記世家]권51. 荊燕世家 (02/02 <燕敬王劉澤>
▶ 兒子: 아이. 남자가 손윗사람에게 자신을 칭하는 말. 제애왕 유양은 고조의 손자이고 낭야왕 유택은 고조의 먼 형제이다.
▶ 兵革: 무기와 갑옷. 전쟁을 말한다.
▶ 迺: 乃와 같다. 이에.

瑯邪王劉澤既見欺,不得反國,乃說齊王曰:
「齊悼惠王高皇帝長子,推本言之,而大王高皇帝適長孫也,當立。
今諸大臣狐疑未有所定,而澤於劉氏最為長年,大臣固待澤決計。
今大王留臣無為也,不如使我入關計事。」
낭야왕 유택은 속았음을 알았으나그의 나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제왕을 설득하였다.
제도혜왕은 고황제의 맏아들이라 근본을 따져 말하면 大王은 고황제의 적장손이고 마땅히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하오.
지금 대신들은 의심하고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으나나 유택은 유씨들 중 가장 나이가 많으므로대신들은 틀림없이 나 유택의 결정을 기다릴 터이오.
지금 大王이 신을 억류해봤자 쓸모가 없으니나에게 入關하여 일을 꾸미게 하느니만 못하오.”

齊王以為然,乃益具車送瑯邪王。
제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수레를 많이 준비하여 낭야왕을 전송하였다.

▶ 適: 嫡과 같다.
▶ 狐: 의심하다.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다.

瑯邪王既行,齊遂舉兵西攻呂國之濟南。
낭야왕이 떠나고 나서제애왕은 군사를 일으켜 서쪽으로 진격하여 여씨의 나라인 濟南을 공격하였다.

於是齊哀王遺諸侯王書曰:
이때 齊哀王은 제후왕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高帝平定天下,王諸子弟,悼惠王於齊。
고제께서 천하를 평정하심에 자제들을 왕에 봉하여 도혜왕은 에 봉해졌습니다.

悼惠王薨,惠帝使留侯張良立臣為齊王。
도혜왕이 돌아가시자 혜제께서는 留侯 張良을 보내 신을 제왕으로 세우셨습니다.

惠帝崩,高后用事,春秋高,聽諸呂擅廢高帝所立,又殺三趙王,滅梁、燕、趙以王諸呂,分齊國為四。
혜제께서 崩御하시고 고후가 정권을 잡았지만 연세가 많으셔서 여씨들이 고제께서 세운 왕들을 마음대로 폐하도록 들어주고또 세 명의 조왕을 죽였으며··를 멸하고 여씨를 왕으로 삼았으며를 넷으로 분할했습니다.

忠臣進諫,上惑亂不聽。
충신들이 간언을 올려도 주상은 미혹하여 듣지 않았습니다.

今高后崩,皇帝春秋富,未能治天下,固恃大臣諸將[侯]
지금 고후가 붕어하고황제는 춘추가 어리시어 천하를 다스릴 수 없으니대신과 제후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今諸呂又擅自尊官,聚兵嚴威,劫列侯忠臣,矯制以令天下,宗廟所以危。
지금 여씨들이 또 제멋대로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병력을 모아 위엄을 보이며제후들과 충신들을 위협하고 황제의 명령을 사칭하여 천하를 호령하고 있으니종묘가 이 때문에 위태롭습니다.

今寡人率兵入誅不當為王者。」
금 과인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으로 들어가서부당하게 왕이 된 자들을 주벌하고자 합니다.”

▶ 瑯邪王: 劉澤.
▶ 遺: 전하다.
▶ 殺三趙王: 劉如意·劉友·劉恢를 말한다. 모두 조왕이었는데, 여의는 여후에 의해 독살되었고, 유우는 감금된 채 굶어 죽었으며, 유회는 자살하였다.
▶ 滅梁燕趙: 呂産은 梁王에 봉하였으며, 呂祿은 趙王에 봉하였고, 呂通을 燕王으로 봉하였다.
▶ 分齊國為四: 여후 집정시 齊를 濟南·琅邪·城陽·齊의 4개국으로 나누었다.
▶ 春秋富: 나이가 어리다. 富는 어리다는 뜻.
▶ 劫: 위협하다.
▶ 矯制: 황제의 명령이라고 사칭함.

 

漢聞齊發兵而西,相國呂產乃遣大將軍灌嬰東擊之。
한나라 조정은 가 군사를 일으켜 서진한다는 소식을 듣자상국 여산이 대장군 灌嬰에게 동진하여 齊軍을 공격하게 하였다.

灌嬰至滎陽,乃謀曰:
「諸呂將兵居關中,欲危劉氏而自立。
我今破齊還報,是益呂氏資也。」
관영이 滎陽에 이르러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여씨들이 군대를 關中에 집결시켜 유씨를 위협하여 황제로 자립하려 한다.
내가 지금 齊軍을 깨뜨리고 돌아와 보고함은 여씨의 밑천을 더해주는 짓이다.”

乃留兵屯滎陽,使使喻齊王及諸侯,與連和,以待呂氏之變而共誅之。
이에 병사를 형양에 주둔시킨 채 사신을 齊王과 제후들에게 보내어 알리기를서로 연합하여 여씨의 變亂을 기다렸다가 함께 주벌하자고 하였다.

齊王聞之,乃西取其故濟南郡,亦屯兵於齊西界以待約。
제왕이 듣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옛 제남군을 탈취하는 한편 군대를 齊 서쪽 경계에 주둔시킨 채 약속대로 기다렸다.

▶ 灌嬰: 전한 초기 睡陽사람으로 젊었을 때는 비단을 파는 일로 생업을 삼았다. 秦나라 말기 劉邦의 시종관으로 전공을 세워 執珪의 작위에 오르고 昌文侯로 불렸다. 呂后가 죽은 뒤 周勃·陳平 등과 함께 여씨 일족을 주살하였다. 文帝를 옹립한 뒤 太尉가 되었다가 얼마 후 주발을 대신해 丞相에 올랐다. 시호는 懿侯이다. <사기 권95樊酈滕灌列傳>
▶ 益: 증가하다.
▶ 資: 本錢.
▶ 喻: 알리다. 설명하다.

呂祿、呂產欲作亂關中,朱虛侯與太尉勃、丞相平等誅之。
여록·여산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자 주허후 유장과 太尉 周勃·丞相 陳平 등이 이들을 주살하였다.

朱虛侯首先斬呂產,於是太尉勃等乃得盡誅諸呂。
주허후가 먼저 여산의 목을 베었고이어 태위 주발 등은 여씨들을 모조리 주살하였다.

而瑯邪王亦從齊至長安。
그러자 낭야왕 역시 로부터 장안에 도착하였다.

大臣議欲立齊王,而瑯邪王及大臣曰:
「齊王母家駟鈞,惡戾,虎而冠者也。
方以呂氏故幾亂天下,今又立齊王,是欲復為呂氏也。
代王母家薄氏,君子長者;
且代王又親高帝子,於今見在,且最為長。
以子則順,以善人則大臣安。」
대신들이 논의하여 齊王을 황제로 세우려고 하자 낭야왕과 대신들이 말하였다.
왕 외가의 駟鈞은 모질고 사납기가 호랑이 중에서도 으뜸이라 합니다.
얼마 전까지 여씨 때문에 천하에 난리가 날 뻔했는데지금 또 제왕을 옹립함은 다시 여씨의 짓을 하려는 것입니다.
代王의 외가 薄氏는 충후한 군자입니다.
대왕은 고제의 친아들로 지금 현존하고 있으며또한 가장 연장자입니다.
아들로 따지면 순리이고선한 사람으로 따지면 대신이 안심할 수 있습니다.”

於是大臣乃謀迎立代王,而遣朱虛侯以誅呂氏事告齊王,令罷兵。
이에 대신들은 代王을 맞아들여 황제로 옹립하기로 모의하고주허후를 보내 여씨를 주살한 일을 제왕에게 알리고 군대를 해산하도록 명령하였다.

▶ 駟鈞: 제애왕 유양의 장인.
▶ 戾: 흉포하다.
▶ 代王: 劉恒. 高祖劉邦의 넷째 아들로 처음에 代王에 책봉되어 中都에 도읍했다가 呂氏의 난이 평정된 뒤 太尉周勃과 승상 陳平등 중신의 옹립으로 제위에 올랐다.
▶ 薄氏: 薄太后. 유항의 모친 薄씨. 유방의 첩으로 薄姬라고 불렀다. 고조 유방 때 아들 劉恒이 있는 代로 가서 代王의 태후가 되었다.
▶ 長者: 충후하고 덕이 있는 사람.
▶ 見在: 見子. 현존하는 아들. 見은 現과 같다.

 

 

灌嬰在滎陽,聞魏勃本教齊王反,既誅呂氏,罷齊兵,使使召責問魏勃。
灌嬰이 형양에 있을 때 魏勃이 본래 제왕에게 모반을 교사하였음을 듣고여씨를 주벌 한 후 군을 거두자 사신을 시켜 위발을 불러들여 문책하였다.

勃曰:
「失火之家,豈暇先言大人而後救火乎!」
위발이 말하였다.
집에 불이 남에무슨 겨를에 먼저 가장에게 알린 다음 불을 끄겠습니까!”

因退立,股戰而栗,恐不能言者,終無他語。
하며 물러나 섰는데다리를 벌벌 떨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 두려워하더니끝내 다른 말은 하지 못하였다.

灌將軍熟視笑曰:
「人謂魏勃勇,妄庸人耳,何能為乎!」
관장군은 한참을 쳐다보다가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들은 위발이 용감하다고 하던데한갖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구나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乃罷魏勃。
이에 위발을 파면하였다.

▶ 魏勃: 서한 제후국 齊의 中尉. 齊王의 신임을 얻어 여씨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다. 멋대로 군사를 일으킨 죄로 관영에게 파면당하였다.
▶ 大人: 家長.
▶ 股: 넓적다리.
▶ 戰而栗: 戰栗. 부들부들 떨다.
▶ 妄庸: 평범하고 평범하다.

魏勃父以善鼓琴見秦皇帝。
위발의 부친은 거문고를 잘 타서 秦始皇을 알현했었다.

及魏勃少時,欲求見齊相曹參,家貧無以自通,乃常獨早夜埽齊相舍人門外。
위발은 젊어서 齊 국상 曹參을 만나려고 했으나 집이 가난하여 자신을 소통할 수가 없어 늘 혼자 이른 새벽 국상의 舍人집 문앞을 청소하였다.

相舍人怪之,以為物,而伺之,得勃。
국상의 사인이 괴이하게 여겨어떤 사람인지 몰래 엿보고 위발을 발견하였다.

▶ 曹參: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2번째, 平陽侯로 책봉되었다.
▶ 埽: 쓸다. 掃와 같다.
▶ 舍人: 侍從.
▶ 物: 괴물.
▶ 伺: 엿보다.

勃曰:
「願見相君,無因,故為子埽,欲以求見。」
위발이 말하였다.
상국을 뵙고자 했으나 이유가 없어서당신의 집 앞을 청소함으로써 재상을 뵐 기회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於是舍人見勃曹參,因以為舍人。
이에 사인이 위발을 조참과 만나게 하였고이로 인하여 사인이 되었다.

一為參御,言事,參以為賢,言之齊悼惠王。
한 번은 조참의 수레를 몰다가어떤 일에 대해 말했고조참이 유능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제도혜왕에게 추천하였다.

悼惠王召見,則拜為內史。
도혜왕이 불러 만나보고 그를 內史로 삼았다.

始,悼惠王得自置二千石。
당초 도혜왕은 스스로 2천 석의 봉록을 받는 관리를 임명할 권한이 있었다.

及悼惠王卒而哀王立,勃用事,重於齊相。
도혜왕이 죽고 애왕이 즉위하자 위발이 政事를 장악하니 齊 국상보다 권력이 하였다.

▶ 因: 기회.
▶ 二千石: 이천석의 녹봉을 받는 大臣.

 

 

王既罷兵歸,而代王來立,是為孝文帝。
제왕이 군대를 해산하여 돌아가고대왕이 장안으로 와서 즉위하니 그가 孝文帝이다.

孝文帝元年,盡以高后時所割齊之城陽、瑯邪、濟南郡復與齊,而徙瑯邪王王燕,益封朱虛侯、東牟侯各二千戶。
효문제 원년(기원전179), 고후 때 분할되었던 의 城陽·琅邪·濟南郡은 모두 에 복귀시켰고낭야왕은 燕王으로 옮겨졌으며주허후·동모후에게는 2천 호의 봉지가 더해졌다.

是歲,齊哀王卒,太子側[則]立,是為文王。
이 해에 齊哀王이 죽고 태자 劉則이 즉위하니 그가 文王이다.

▶ 益封: 封地가 증가하다.
▶ 齊哀王: 劉襄. 고조의 손자이며, 부친은 고조의 서장자인 제도혜왕 유비이다. 황실의 장손이고 여씨 정권 타도에 많은 공이 있어, 황제 자리를 두고 문제와 겨루었다.
▶ 太子則: 齊文王劉則. 아버지 애왕이 죽자 봉지를 이어받았다. 문제15년(기원전165년)에 죽었으나, 자식이 없어 후사가 끊겼다. 시호를 文이라 하였다. 齊는 폐지돼 한나라의 직할지가 되었다.

 

 

齊文王元年,漢以齊之城陽郡立朱虛侯為城陽王,以齊濟北郡立東牟侯為濟北王。
제문왕 원년(기원전178), 한나라 조정은 의 城陽郡을 朱虛侯 劉章을 봉하여 성양왕으로 세우고의 濟北郡을 東牟侯 劉興居를 봉하여 제북왕으로 세웠다.

▶ 朱虛侯: 劉章. 漢高祖 劉邦의 손자이며, 齊悼惠王 劉肥의 아들이다. 高后때 朱虛侯에 봉해지고, 呂祿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 東牟侯: 濟北王 劉興居. 전한 고제의 손자로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며, 제애왕 유양과 성양경왕 유장의 아우다. 고황후6년(기원전182년), 東牟侯에 봉해져 장안으로 들어왔다.

 

 

二年,濟北王反,漢誅殺之,地入于漢。
제문왕2(기원전177), 濟北王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나라는 그를 誅殺하고 땅을 한나라 조정에 편입하였다.

▶ 濟北王: 劉興居. 문제2년(기원전178년), 문제는 원래 유장과 유흥거의 공이 크다 하여 趙와 梁의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이들이 제왕 유양을 황제로 세우려 한 것을 알자 공적을 폄하해 齊를 나누어 만든 성양왕과 제북왕으로 삼았다. 제북왕은 불만을 품었고, 문제3년(기원전177년)에 흉노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한나라에서 대군을 내어 관영에게 맡겨 치게 하고 문제도 친히 태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반란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려 하였다. 문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군대를 파하고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시무를 장군으로 삼아 형양에 주둔하게 하고 제북왕을 치게 하였다. 제북왕은 패해 사로잡히자 자결했고, 제북은 폐하여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

 

 

後二年,孝文帝盡封齊悼惠王子罷軍等七人皆為列侯。
2년 뒤문제는 제도혜왕의 아들 劉罷軍등 일곱 명을 모두 列侯에 봉했다

▶ 罷軍: 劉罷軍. 제도혜왕의 아들로 문제4년(기원전175년), 管侯에 봉해졌다. 문제6년(기원전174년)에 죽으니 시호를 恭이라 하였고, 작위는 아들 유융노가 이었다.
▶ 列侯: 작위명. 왕의 아들이 봉해져 왕이나 侯가 된 경우는 諸侯라 이르고, 성씨가 다른 신하들이 공을 세워 봉해진 경우는 列侯 또는 徹侯라 하였다. 뒷날 武帝劉徹의 이름을 피하여 通侯라고 하였다.

 

齊文王立十四年卒,無子,國除,地入于漢。
제문왕은 즉위14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어 나라는 폐지되고 땅은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었다.

後一歲,孝文帝以所封悼惠王子分齊為王,齊孝王將閭以悼惠王子楊虛侯為齊王。
1년 뒤문제는 齊 땅을 나누어 원래 봉하였던 도혜왕의 아들들을 왕으로 봉했는데齊孝王 將閭는 도혜왕의 아들인 楊虛侯의 신분으로 齊王이 되었다.

故齊別郡盡以王悼惠王子:
子志為濟北王,子辟光為濟南王,子賢為菑川王,子卬為膠西王,子雄渠為膠東王,與城陽、齊凡七王。
옛 의 다른 군들을 모두 도혜왕의 아들들이 다스리게 하였으니,
劉志는 濟北王으로劉辟光은 濟南王으로劉賢은 菑川王으로劉卬은 膠西王으로劉雄渠는 膠東王이 되어城陽王 유장과 齊王 유장려와 함께 모두 七王이었다.

齊孝王十一年,吳王濞、楚王戊反,興兵西,告諸侯曰:
「將誅漢賊臣晁錯以安宗廟」。
제효왕11(기원전154), 吳王 劉濞와 楚王 劉戊가 모반하여 군대를 일으켜 서진하면서 제후들에게 고하기였다.
한나라 조정의 賊臣 晁錯를 誅殺하여 종묘를 안정시키겠다.”

膠西、膠東、菑川、濟南皆擅發兵應吳楚。
교서왕·교동왕·치천왕·제남왕이 모두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켜 吳楚에 호응하였다.

欲與齊,齊孝王狐疑,城守不聽,三國兵共圍齊。
또한 와 연합하려 했으나 齊孝王이 의심하여 성을 지키며 듣지 않자 세 나라의 군대가 함께 를 포위하였다.

齊王使路中大夫告於天子。
제왕은 路中大夫를 보내 천자에게 알렸다.

天子復令路中大夫還告齊王:
「善堅守,吾兵今破吳楚矣。」
천자는 또 노중대부에게 명령하여 돌아가서 제왕에게 고하게 하였다.
잘 지키고 있으면 우리 군대가 오와 초를 격파할 터이다.”

▶ 齊孝王: 齊孝王 劉將閭. 전한 고제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문제4년(기원전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 문제에게서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져 楊虛侯가 되었다. 문제16년(기원전164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齊를 제·교서·교동·치천·제북·제남 여섯 나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을 봉하면서 齊왕이 되었다.
▶ 吳王濞: 吳王 劉濞. 漢高祖 劉邦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하는 것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오초칠국의 난은 前漢 景帝 치세인 기원전154년 전한의 제후국 吳의 왕 劉濞가 주축이 되어 楚왕 劉戊, 趙왕 劉遂, 濟南王劉辟光, 菑川王劉賢, 膠西王劉卬, 膠東王劉雄渠 등이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이 제후왕의 반란은 태위 周亞夫가 거느린 정부군의 교묘한 전략에 의해 吳王은 살해당하고, 오와 공모한 제후왕도 모두 살해당하여 전란은 불과 3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史記列傳]권106. 吳王濞列傳
▶ 楚王: 劉戊. 楚夷王劉程의 아들이다. 文帝 6년(기원전174년) 王位를 이어받았다. 晁錯가 초왕 劉戊가 薄太后의 喪中에 상가에서 몰래 간음한 죄를 물어 그에게 죽음을 내리기를 청원했었다.
▶ 晁錯: 文帝 때 후일 景帝가 된 太子의 舍人으로 있다가 家令이 되어 태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각박한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景帝가 즉위하자, 內史에 임명되고 자주 景帝와 독대하여 자신의 계책을 실현하였으며, 御史大夫가 되자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 강성해서 장차 나라의 큰 우환이 될 것을 우려하여 제후들의 봉지를 삭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 吳·楚 등 7국이 조조를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다.[史記列傳]권101袁盎鼂錯列傳
▶ 齊孝王狐疑: 경제 전3년(기원전154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교동왕 유웅거, 교서왕 유앙, 치천왕 유현, 제남왕 유벽광이 호응하고 齊와도 함께하고자 했으나 제효왕이 의심하여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교서왕, 치천왕, 제남왕의 공격을 받아 임치에서 포위당하였다.
▶ 狐疑: 의심하다. 의심이 많다.
▶ 路中大夫: 한나라의 제후국인 齊의 관원으로 성이 路이며 관직이 中大夫이다.

世家52-齊悼惠王世家(제도혜왕세가)



路中大夫至,三國兵圍臨菑數重,無從入。
노중대부가 에 이르렀을 때 삼국의 군대가 임치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어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三國將劫與路中大夫盟,曰:
「若反言漢已破矣,齊趣下三國,不且見屠。」
세 나라의 장수들이 노중대부를 협박하여 맹약하고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서 말하기를한나라가 이미 무너졌으니 도 서둘러 세 나라에 투항하지 않으면 성이 도륙당하겠다고 하라.”

路中大夫既許之,至城下,望見齊王,曰:
「漢已發兵百萬,使太尉周亞夫擊破吳楚,方引兵救齊,齊必堅守無下!」
노중대부가 허낙하고 성 아래에 이르러 제왕을 올려다보고 말하였다.
한나라가 이미 백만 대군을 징발하여 태위 周亞夫에게 오와 초를 격파토록 하여지금 군대를 이끌고 를 구원하러 오고 있으니는 단단히 지키면서 항복하지 마시오!”

三國將誅路中大夫。
세 나라의 장수들이 노중대부를 죽였다.

▶ 三國: 膠西, 菑川, 濟南을 말한다.
▶ 趣: 促과 통용된다. 서두르다.
▶ 下: 항복하다.
▶ 周亞夫: 沛郡사람으로 西漢의 武將이자 군사가, 정치가이다. 周勃의 차남으로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아 絳侯가 되었다. 벼슬은 河內郡守·車騎將軍·太尉·丞相 등을 역임하였다. 吳楚七國의 난 때 군사를 이끌고 3개월 만에 반군을 평정하였다. 한경제 때 억울하게 반란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史記권57. 絳侯周勃世家>



齊初圍急,陰與三國通謀,約未定,會聞路中大夫從漢來,喜,及其大臣乃復勸王毋下三國。
는 당초 포위당해 위급해지면 세 나라와 몰래 내통하려고 했는데맹약을 정하기 전에 때마침 노중대부가 한나라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대신들이 다시 제왕에게 세 나라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권하였다.

居無何,漢將欒布、平陽侯等兵至齊,擊破三國兵,解齊圍。
오래지 않아 한나라의 장군 欒布·平陽侯 曹奇 등이 군사를 이끌고 에 도착하여 세 나라의 군대를 격파하고 의 포위를 풀었다.

已而復聞齊初與三國有謀,將欲移兵伐齊。
얼마 후 다시 듣기를가 당초 세 나라와 음모를 꾸몄다고 하여병사를 이동시켜 를 토벌하려 하였다.

齊孝王懼,乃飲藥自殺。
제효왕은 두려워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 居無何: 얼마 지나지 않아.
▶ 已而: 머지않아. 곧.

 

景帝聞之,以為齊首善,以迫劫有謀,非其罪也,乃立孝王太子壽為齊王,是為懿王,續齊後。
景帝는 소식을 듣고 가 가장 모범적이었지만 겁박 때문에 음모에 가담하였으니 그의 죄가 아니라 여겨서효왕의 태자 劉壽를 齊王으로 세우니 그가 懿王으로 의 후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而膠西、膠東、濟南、菑川王咸誅滅,地入于漢。
그러나 교서·교동·제남·치천의 왕은 모두 주살되었고 봉지는 한나라 조정에 편입되었다

徙濟北王王菑川。
제북왕은 옮겨서 치천왕으로 봉하였다.

齊懿王立二十二年卒,子次景立,是為厲王。
齊懿王은 즉위22년 만에 죽었고아들인 次景이 즉위하니 그가 厲王이다.

▶ 太子壽: 齊懿王 劉壽. 제효왕 유장려의 아들이다. 경제3년(기원전154년), 오초칠국의 난에 아버지 제효왕이 가담하려다가 철회했으나, 진압군의 추궁을 받아 자결하였다. 경제는 제효왕이 반란군의 협박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가담하려 한 것이라 하여 가련히 여겼다. 그래서 제의왕은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원광3년(기원전132년), 재위22년 만에 죽어 아들 여왕 次景이 뒤를 이었다
▶ 次景: 齊厲王 劉次昌 또는 劉次景. 제의왕의 아들로, 도혜왕 계통의 마지막 제왕이다. 원광3년(기원전132년), 아버지가 죽자 齊왕이 되었다.

 

齊厲王,其母曰紀太后。
齊厲王은 그 어머니가 紀太后였다.

太后取其弟紀氏女為厲王后。王不愛紀氏女。
태후는 자신의 동생인 紀氏의 딸을 厲王의 왕후로 삼았지만 왕이 기씨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太后欲其家重寵,令其長女紀翁主入王宮,正其後宮,毋令得近王,欲令愛紀氏女。
기태후는 기씨 집안이 대대로 총애를 받게 하고자 장녀 紀翁主를 왕궁에 들여보내
후궁들을 단속하여 왕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고 기씨의 딸만 사랑하게 하려 하였다.

王因與其姊翁主姦。
제왕은 이 때문에 그 누이인 옹주와 간통하였다.

▶ 重寵: 대대로 총애를 받다.

齊有宦者徐甲,入事漢皇太后。
의 환관 徐甲이 한나라의 황실에 들어가서 皇太后를 모시게 되었다.

皇太后有愛女曰修成君,修成君非劉氏,太后憐之。
황태후에게는 修成君이라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는데수성군은 유씨가 아니어서 태후가 그녀를 가련하게 여겼다.

修成君有女名娥,太后欲嫁之於諸侯,宦者甲乃請使齊,必令王上書請娥。
수성군에게는 라는 딸이 있어태후는 그녀를 제후에게 시집보내고 싶었는데환관 서갑이 에 사신으로 가기를 청하며반드시 齊王이 글을 올려 를 청하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皇太后喜,使甲之齊。
황태후가 기뻐하며 서갑을 에 보냈다.

▶ 皇太后: :무제의 생모 王太后. 전한의 제6대 황제 景帝의 부인이자 제7대 황제 武帝 유철의 생모이다. 궁에 들어오기 전에 왕지는 金王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었다. <史記世家권49. 外戚世家>
▶ 修成君: 武帝가 왕태후의 딸을 찾아와 왕태후를 만나게 하여 수성군이라 불리게 되었다. 즉 무제의 배다른 누이이다. 수성군에게는 아들 하나, 딸 하나가 있었다.

 

 

是時齊人主父偃知甲之使齊以取后事,亦因謂甲:
「即事成,幸言偃女願得充王後宮。」

이때 齊 사람 主父偃서갑이 에 사신으로 가서 황후의 일을 처리함을 알았으므로 서갑에게 말하였다.
일이 성사되면 저의 딸이 제왕의 후궁이 되도록 말씀해주십시오.”


甲既至齊,風以此事。
서갑이 에 도착한 후 이 일을 은밀히 퍼뜨렸다.

紀太后大怒,曰:
「王有后,後宮具備。
且甲,齊貧人,急乃為宦者,入事漢,無補益,乃欲亂吾王家!
且主父偃何為者?

乃欲以女充後宮!」
기태후가 매우 노하여 말하였다.
왕에게는 왕후가 있고후궁도 具備되었다.
저 서갑이라는 의 가난한 자가 급한 김에 환관이 되어 한나라 황실을 섬기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자 우리 王家를 어지럽히려 하는구나!
또 주보언이란 자는 무엇을 하는 자인가?

딸을 후궁에 넣고 싶어 하다니!”

▶ 主父偃: 齊 임치현 사람으로 종횡가의 학술을 익혔으나 채용되지 않았으나, 한무제에게 상소한 것이 인정을 받아 낭중이 된 후 일 년 만에 중대부로 승진하였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齊 재상이 된 후 주보언이 齊왕 유차경이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황제에게 간한 것으로 인해 일족이 멸족되었다<史記列傳권112. 平津侯·主父列傳>
▶ 充: 충당하다.
▶ 風: 諷과 통용된다. 풍자하다. 암시하거나 권유하다.

 

 

徐甲大窮,還報皇太后曰:
「王已願尚娥,然有一害,恐如燕王。」

서갑은 아주 난처하여 돌아와 황태후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를 아내로 맞기를 원하지만한 가지 걸림돌이 있으니 燕王과 같을까 걱정합니다.”


燕王者,與其子昆弟姦,新坐以死,亡國,故以燕感太后。
燕王이 자신의 딸들과 간통하여최근 죄를 따져 죽임을 당하고 나라도 망친 까닭에이런 의 일로써 태후에게 느낌을 주려 하였다.

太后曰:
「無復言嫁女齊事。」

태후가 말하였다.
손녀 딸을 로 시집보내는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事浸潯[不得]聞於天子。
그러나 이 일은 점점 퍼져나가 천자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主父偃由此亦與齊有卻。
주보언은 이 일로 와 사이가 벌어졌다.

▶ 窮: 난처하다.
▶ 尚: 제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다.
▶ 子: 딸.
▶ 昆弟: 형제. 여기서는 자매를 말한다. 燕王 劉定國은 아버지 연강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했는데, 아버지의 첩과 간통해 아들 하나를 낳았고, 아우의 아내를 빼앗아 첩으로 들였고, 또 딸 셋과 간통하였다. 원삭 연간에 영인의 형제들이 유정국의 행태를 무제에게 고발하자 유정국은 자결하였다. 燕는 폐지되어 군이 되었다. <史記世家권51. 荊燕世家>
▶ 坐: 죄를 따지다.
▶ 浸潯: 점점.
▶ 郤: 틈. 사이.

 

主父偃方幸於天子,用事,因言:
「齊臨菑十萬戶,市租千金,人眾殷富,巨於長安,此非天子親弟愛子不得王此。

今齊王於親屬益疏。」
주보언은 당시 천자의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그 일로 인하여 천자에게 말하였다.
齊 임치에는 10만 호가 있는데 교역의 세금만 매일 천금에 달하며사람은 많고 물산은 풍족하여 장안보다 크니천자의 친동생이나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고서는 그곳의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제왕은 친척들과 갈수록 소원해지고 있습니다.”

乃從容言:
「呂太后時齊欲反,吳楚時孝王幾為亂。

今聞齊王與其姊亂。」
이어 차분하게 말하였다.
여태후 때 는 모반을 꾀했고오초의 반란 때 효왕은 거의 반란에 가담할 뻔했습니다.

지금 듣자 하니 제왕은 그 누이와 亂淫한다고 합니다.”

▶ 主父偃: 齊 임치현 사람으로 종횡가의 학술을 익혔으나 기용되지 못하다가, 한무제에게 상소한 것이 인정을 받아 낭중이 된 후 일 년 만에 중대부로 승진하였다. 남의 비밀을 폭로하기 좋아하므로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뇌물을 바쳤으며, 齊 재상이 된 후 주보언이 齊왕 유차경이 기옹주와 간통한 사실을 황제에게 간한 것으로 인해 일족이 멸족되었다.
▶ 殷富: 풍족하다. 殷은 부유하다.
▶ 從容: 차분하다. 침착하다.
▶ 幾: 하마터면.
▶ 齊厲王: 劉次昌 또는 劉次景. 제의왕의 아들로, 도혜왕 계통의 마지막 齊王이다. 원광3년(기원전132년), 아버지가 죽자 齊왕이 되었다.

 

 

於是天子乃拜主父偃為齊相,且正其事。
이에 천자는 주보언을 의 승상에 임명하여 그 일을 바로잡게 하였다.

主父偃既至齊,乃急治王後宮宦者為王通於姊翁主所者,令其辭證皆引王。
주보언은 에 도착한 후급히 왕의 후궁과 환관 가운데 제왕을 도와 누이 옹주와 간통하게 만든 자를 심문하여그 말과 증거를 모두 齊王에 끌어다 대었다.


王年少,懼大罪為吏所執誅,乃飲藥自殺。

왕은 어렸으므로죄가 커서 관리에게 붙잡혀 죽을까 두려워하여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렸다.

 

絕無後。
이로 인해 후세가 단절되었다.

▶ 正: 바로잡다.
▶ 引: 연루되다.

 

是時趙王懼主父偃一出廢齊,恐其漸疏骨肉,乃上書言偃受金及輕重之短。
이때 조왕 劉遂는 주보언이 한번 나서서 를 없앰을 두려워하였고그가 골육을 소원하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하고 上書하여 말하기를주보언이 뇌물을 받고 일처리의 경중에 잘못이 있다고 하였다.

天子亦既囚偃。
천자 또한 이미 그렇게 여겼으므로 주보언을 옥에 가두었다.

公孫弘言:
「齊王以憂死毋後,國入漢,非誅偃無以塞天下之望。」

公孫弘이 아뢰었다.
제왕이 근심 때문에 죽어 후계자가 없고 나라가 한나라에 편입되었으니주보언을 죽이지 않으면 천하의 원망을 막을 수 없겠습니다.”


遂誅偃。
마침내 주보언을 죽였다.

▶ 趙王: 趙王 劉遂. 고조의 아들인 趙幽王 劉友의 아들로, 아버지 유우가 태황태후 여씨에게 감금되어 굶어 죽고 趙왕 자리도 공왕을 거쳐 여씨 일족인 呂祿에게 넘어갔다. 고황후8년(기원전180년)에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고 文帝가 즉위하자 죽은 여록을 대신해 趙왕이 되었다.
▶ 望: 원망.

 

齊厲王立五年死,毋後,國入于漢。
제여왕은 재위5년 만에 죽었고 후사가 없어 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齊悼惠王後尚有二國,城陽及菑川。
제도혜왕의 후손으로 아직 두 나라가 남아 있었는데 城陽과 菑川이었다.

菑川地比齊。
치천의 땅은 齊 바로 옆에 있었다.

天子憐齊,為悼惠王冢園在郡,割臨菑東環悼惠王冢園邑盡以予菑川,以奉悼惠王祭祀。

천자가 를 가련하게 여기고도혜왕 무덤이 에 있으므로임치 동쪽에 도혜왕 묘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읍을 분할하여 전부 치천국에게 주어도혜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 比: 바로 옆에 있다. 바짝 붙어 있다.
▶ 冢園: 墓园. 묘지.



城陽景王章,齊悼惠王子,以朱虛侯與大臣共誅諸呂,而章身首先斬相國呂王產於未央宮。
성양 景王 劉章은 도혜왕의 아들이며주허후의 신분으로 대신들과 함께 여씨를 주살하였는데유장 자신이 먼저 미앙궁에서 상국 呂王産을 참수하였다.

孝文帝既立,益封章二千戶,賜金千斤。
문제가 즉위한 뒤 유장에게 2천 호의 봉지를 더해주고 금 천 근을 하사하였다.

孝文二年,以齊之城陽郡立章為城陽王。
문제2(기원전178), 의 城陽郡을 유장에게 주어 성양왕에 봉하였다.

立二年卒,子喜立,是為共王。
재위2년 만에 죽고 아들 가 즉위하니 그가 共王이다.

▶ 城陽景王章: 城陽景王 劉章. 고제의 손자이자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며 제애왕 유양의 아우로 초대 성양왕이다. 시호는 景이다. 성양은 지금의 산동성 莒縣일대이다.

 

 

共王八年,徙王淮南。
공왕8(기원전168), 공왕은 淮南王으로 옮겨졌다.

四年,復還王城陽。
4년 후 다시 돌아와 성양의 왕이 되었다.

凡三十三年卒,子[建]延立,是為頃王。
공왕은 재위33년 만에 죽고 아들 이 즉위하니 그가 頃王이다.

頃王二十八[六]年卒,子義立,是為敬王。
경왕은 재위26년 만에 죽고 아들 가 즉위하니 그가 敬王이다.

敬王九年卒,子武立,是為惠王。
경왕은 재위9년 만에 죽고 아들 가 즉위하니 그가 惠王이다.

惠王十一年卒,子順立,是為荒王。
혜왕이 재위11년 만에 죽고 아들 이 즉위하니 그가 荒王이다.

荒王四十六年卒,子恢立,是為戴王。
황왕이 재위46년 만에 죽고 아들인 가 즉위하니 그가 戴王이다.

戴王八年卒,子景立,至建始三年,十五歲,卒。
대왕은 재위8년 만에 죽고 아들 이 즉위했으나 建始 3(기원전30) 15세에 죽었다.

▶ 共王: 城陽共王 劉喜. 성양경왕 유장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성양왕이 되었다.

▶ 建始: 한나라의 成帝가 사용한 기원전32~28년. 건시3년은 기원전30년이다.
▶ 子景立: 城陽孝王 劉景. 성양대왕 유회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성양대왕이 죽자 성양왕을 계승하였다. <漢書>
※城陽哀王: 城陽哀王 劉雲. 성양효왕 유경의 아들이다. 아버지 성양효왕이 죽자 성양왕을 계승하였다. 성양애왕이 죽자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됐다. 후에 성양효왕의 아들 劉俚를 왕으로 삼아 성양국을 다시 세워주었다. <漢書>
※劉俚: 城陽王 劉俚. 西漢 때의 마지막 성양왕이다. 성양효왕 유경의 아들(유운의 형)으로 성양애왕이 아들이 없이 죽어 봉국이 폐지되자, 영시 원년(기원전16년)에 전한 성제에게서 성양국을 다시 받아 왕으로 세워졌다. 기원전9년, 왕망이 전한을 멸하고 신나라를 세우면서 공작으로 작위가 깎였고, 이듬해 봉국이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 <漢書>

 

濟北王興居,齊悼惠王子,以東牟侯助大臣誅諸呂,功少。
濟北王 劉興居는 도혜왕의 아들이며東牟侯의 신분으로 대신들을 도와 여씨를 주살하였으나 공은 적었다.

及文帝從代來,興居曰:
「請與太仆嬰入清宮。」

문제가 에서 장안으로 들어오자 유흥거가 말하였다.
太僕 夏侯嬰과 함께 들어가서 황궁을 깨끗이 정리하십시오.”

廢少帝,共與大臣尊立孝文帝。
少帝를 폐하고대신들과 함께 효문제를 받들어 옹립하였다.

▶ 濟北王 興居: 劉興居. 고조의 손자로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며, 제애왕 유양과 성양경왕 유장의 아우다.
▶ 嬰: 夏侯嬰. 沛縣사람으로 西漢시기의 개국공신이다. 원래는 패현 관청의 마구간지기인데 패현의 사상정을 지나다니면서 정장이었던 유방과 친분을 맺었다. 진나라와 전투를 할 때 兵車를 질풍처럼 몰아쳐 용감히 싸워 滕公의 작위를 받았다.
▶ 清宮: 황궁을 정리하다. 궁에 있는 여씨의 잔여 세력을 정리한다는 뜻.

 

 

 

孝文帝二年,以齊之濟北郡立興居為濟北王,與城陽王俱立。
문제2(기원전178), 의 濟北郡을 봉지로 유흥거를 제북왕에 봉하니 성양왕과 함께 모두 왕이 되었다.

立二年,反。
유흥거가 재위2년에 모반하였다.

始大臣誅呂氏時,朱虛侯功尤大,許盡以趙地王朱虛侯,盡以梁地王東牟侯。
당초 대신들이 여씨를 죽임에 朱虛侯의 공이 아주 커서趙 땅 전부를 주허후에게 주어 왕으로 삼고梁 땅은 전부 동모후에게 주어 왕으로 삼도록 허락했었다.

及孝文帝立,聞朱虛、東牟之初欲立齊王,故絀其功。
문제가 즉위한 뒤 주허후와 동모후가 처음에는 齊王 劉襄을 옹립하려 했음을 알고 그들의 공을 깎았다.

▶ 朱虛侯 劉章: 齊悼惠王의 아들 劉章. 朱虛侯에 봉해졌으며 여록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 東牟侯: 濟北王 劉興居. 齊悼惠王 劉肥의 아들이며 劉章의 아우이다. 제북왕으로 임명되어 불만을 품었으며, 문제3년(기원전177년)에 흉노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한나라에서 대군을 내어 관영에게 맡겨 치게 하고 문제도 친히 태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반란을 일으켜 형양을 공격하려 하였다. 文帝는 흉노를 치기 위한 군대를 철수하여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시무를 장군으로 삼아 형양에 주둔하게 하고 제북왕을 치게 하였다. 제북왕은 패해 사로잡히자 자결했고, 제북은 폐해져 한나라의 군으로 편입되었다.
▶ 齊王: 劉襄.
▶ 絀: 감하다.

 

 

及二年,王諸子,乃割齊二郡以王章、興居。
문제2년에 이르러 아들들을 왕으로 삼으면서 의 二郡을 떼어 유장·유흥거를 왕으로 삼았다.

章、興居自以失職奪功。
유장·유흥거는 이로써 조왕과 양왕의 자리를 잃고 그들의 공로도 빼앗겼다.

章死,而興居聞匈奴大入漢,漢多發兵,使丞相灌嬰擊之,文帝親幸太原,以為天子自擊胡,遂發兵反於濟北。
유장은 죽었고유흥거는 흉노가 대거 한나라를 침입하여한나라가 대거 군대를 징발하고 승상 灌嬰에게 이들을 물리치게 하고문제가 친히 太原으로 행차하여 천자가 직접 흉노를 공격함을 알고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제북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天子聞之,罷丞相及行兵,皆歸長安。
천자가 알고 승상과 군대의 행군을 중지시키고 모두 장안으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使棘蒲侯柴將軍擊破虜濟北王,王自殺,地入于漢,為郡。
棘蒲侯 柴將軍에게 제북왕을 공격하게 하여 포로로 잡아 오게 하니제북왕은 자살하고 봉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어 이 되었다.

▶ 章死: 유장이 죽음. 기원전177년에 유장은 재위2년 만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나이 24세였고 아들 유희가 뒤를 이었다.
▶ 灌嬰: 呂后가 죽은 뒤 周勃·陳平 등과 함께 여씨 일족을 주살하였다. 文帝를 옹립한 뒤 太尉가 되었다가 얼마 후 주발을 대신해 丞相에 올랐다. 시호는 懿侯이다. <사기 권95樊酈滕灌列傳>
▶ 幸: 황제가 친히 행차하다.
▶ 罷: 중지하다.
▶ 棘蒲侯 柴將軍: 柴武 혹은 陳武라고도 하며 진나라 말에서 전한 초기의 무장으로 전한 고제의 개국 공신이다.

 

後十二[三]年,文帝十六年,復以齊悼惠王子安都侯志為濟北王。
13년 후 문제16(기원전164), 다시 제도혜왕의 아들 安都侯 劉志를 濟北王에 봉하였다.

十一年,吳楚反時,志堅守,不與諸侯合謀。
11년 뒤오초의 반란 때 유지는 굳건히 지키면서 7국의 제후들과 함께 모반하지 않았다.

吳楚已平,徙志王菑川。
오초의 난이 평정된 후 劉志를 菑川王으로 옮겼다.

▶ 安都侯志: 菑川懿王 劉志.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 당시에는 제북왕이었고, 난에 가담하지 않아 菑川王으로 옮겨졌다.

 

 

濟南王辟光,齊悼惠王子,以勒侯孝文十六年為濟南王。
濟南王 劉辟光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며勒侯의 신분으로 한문제16(기원전164)에 제남왕이 되었다.

十一年,與吳楚反。
11년 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漢擊破,殺辟光,以濟南為郡,地入于漢。
한나라는 반군을 격파하여 벽광을 죽이고제남을 으로 만들고 봉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 濟南王辟光: 濟南王 劉辟光.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였다. 문제4년(기원전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에 문제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해 朸侯 혹은 扐侯가 되었다. 문제16년(기원전164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齊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제남왕이 되었다
▶ 勒侯: <사기> ‘漢興以來諸侯年表’에서는 初侯라 기록하였다.

 

菑川王賢,齊悼惠王子,以武城侯文帝十六年為菑川王。
菑川王 劉賢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며武城侯의 신분으로 한문제16(기원전164)에 치천왕에 봉해졌다.

十一年,與吳楚反,漢擊破,殺賢。
11년 뒤·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나라는 반군을 격파하고 劉賢을 죽였다.

▶ 菑川王賢: 菑川王 劉賢.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였다. 문제4년(기원전176년), 제북왕 유흥거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살한 이듬해에 문제가 그의 형제들과 함께 열후로 봉하여 武成侯, 武城侯가 되었다. 문제16년(기원전164년), 제문왕 유칙이 후사 없이 죽어 폐지된 齊를 일곱으로 나누어 제도혜왕의 아들들과 성양공왕을 봉하면서 새로 세워진 치천의 왕이 되었다.

 

 

天子因徙濟北王志王菑川。
천자는 이로 인해 제북왕 劉志를 치천왕으로 옮겼다.

志亦齊悼惠王子,以安都侯王濟北。
유지 역시 제도혜왕의 아들이며 安都侯의 신분으로 제북왕에 봉해졌었다.

菑川王反,毋後,乃徙濟北王王菑川。
치천왕 劉賢이 반란을 일으켜 후사가 없어지자 제북왕을 치천왕으로 옮긴 것이다.

凡立三十五年卒,謚為懿王。
35년 동안을 재위하고 죽었는데시호는 懿王이다.

子建代立,是為靖王。
아들 劉建이 즉위했는데 그가 靖王이다.

二十年卒,子遺代立,是為頃王。
정왕은 재위20년 만에 죽고 아들 劉遺가 뒤를 이으니 그가 頃王이다.

三十六年卒,子終古立,是為思王。
경왕은 재위36년 만에 죽고 아들 劉終古가 즉위하니 그가 思王이다.

二十八年卒,子尚立,是為孝王。
사왕은 재위28년 만에 죽고 아들 劉尙이 즉위하니 그가 孝王이다.

五年卒,子橫立,至建始三年,十一歲,卒。
효왕은 재위5년 만에 죽고 아들 劉橫이 즉위하였으나 建始 3(기원전30) 11세에 죽었다.

▶ 濟北王志: 제북왕 劉志.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지 않았다.
▶ 頃王: 경왕 이후의 기록은 사마천이 죽은 뒤이므로 褚少孫이 보충한 것으로 추정된다.
▶ 建始: 한나라의 成帝가 사용한 기원전32~28년. 건시3년은 기원전30년이다.

 

膠西王卬,齊悼惠王子,以昌平侯文帝十六年為膠西王。
膠西王 劉卬은 제도혜왕의 아들이며昌平侯의 신분으로 한 문제16(기원전164)에 교서왕이 되었다.

十一年,與吳楚反。
11년 후·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漢擊破,殺卬,地入于漢,為膠西郡。
한나라가 반군을 격파하고 유앙을 죽였으며 봉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어 교서군이 되었다.

▶ 膠西王卬: 膠西王 劉卬.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였다.

 

 

膠東王雄渠,齊悼惠王子,以白石侯文帝十六年為膠東王。
膠東王 劉雄渠는 제도혜왕의 아들이며白石侯의 신분으로 한문제 16년에 교동왕이 되었다

十一年,與吳楚反,漢擊破,殺雄渠,地入于漢,為膠東郡。
11년 후·초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한나라가 반군을 격파하고 유웅거를 죽였으며봉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어 교동군이 되었다.

▶ 膠東王 雄渠: 膠東王 劉雄渠. 漢高祖의 손자이며 제도혜왕 유비의 아들이다.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하였다.

 

 

太史公曰:
諸侯大國無過齊悼惠王。
以海內初定,子弟少,激秦之無尺土封,故大封同姓,以填萬民之心。
及後分裂,固其理也。
태사공은 말한다.
제후들의 대국 중에서 제도혜왕을 넘어설 것은 없었다.
천하가 막 평정되었으나 유씨의 자제들 수가 적었고천자는 나라가 한 자의 땅도 봉하지 않음에 느끼는 바가 있었으므로同姓을 대대적으로 봉하여 만민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 뒤 가 분열함은 본래 이치상 당연한 것이었다.”

▶ 激: 감동하다.
▶ 填: 안정시키다. 진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