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53-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耽古樓主 2023. 7. 8. 09:29

이篇은 30世家 중 23번째 편으로 前漢高祖 劉邦의 중요한 謀臣인 相國 蕭何에 대한 기록이다.
蕭何는 沛縣의 말단 관리였으나 나중에 고조 유방의 재상이 되었다. 한나라 유방과 楚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며, 한왕조의 건립과 정권을 공고히 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그의 탁월한 공훈을 이편에 기록한 것이다. 소하에 대한 기록은 高祖本紀에도 기록되어 있다. [史記本紀]권08. 高祖本紀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초패왕의 군대가 漢나라를 滎陽에서 포위하여 3년 동안 서로 대치한 것은 蕭何가 關中을 안정시키고 인구를 계산하여 군사를 보충하고 식량이 끊어지지 않게 보급하였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한나라를 사랑하고 楚를 못마땅하게 여기게 만든 때문이었다. 이에 제23편 ‘蕭相國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世家53-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蕭相國何者沛豐人也
蕭相國何 沛縣 豐邑사람이다.

以文無害為沛主吏掾
법률에 정통하여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공평한 관리로 패현 현령의 하급관리였다.

▶ 蕭相國何: 蕭何. 패현의 말단 관리였으나 나중에 고조 유방의 재상이 되었다. 한나라 유방과 楚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酇侯로 봉해졌다.
▶ 相國: 관직이름. 나라의 정승. 재상.
▶ 無害: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
▶ 主吏: 패현 현령의 관리.
▶ 掾: 하급관리

高祖為布衣時何數以吏事護高祖
高祖가 평민이었을 때 소하는 여러 차례 관리의 신분으로 고조를 보호하였다.

高祖為亭長常左右之
고조가 亭長이 되었을 때도 늘 그를 도와주었다.

高祖以吏繇咸陽吏皆送奉錢三何獨以五
고조가 관리로서 咸陽에 부역을 갈 때 관원들은 모두 300전의 송별금을 주었으나 소하만이 500전을 주었다.

▶ 高祖: 劉邦. 字는 季이며 江蘇省 豊邑의 농민으로 태어나 한때 도둑의 두목이 되었다가 秦始皇이 죽은 다음 해에 군사를 일으켜 項羽 등과 합세하여 咸陽을 점령하고 漢王이 되었다.
▶ 布衣: 평민
▶ 亭長: 유방은 장년이 되어 시험을 쳐서 관리가 되었는데, 泗水亭의 亭長이 되었다. <사기본기 권08. 高祖本紀>
▶ 繇: 徭와 같다. 徭役, 부역

 

秦御史監郡者與從事常辨之
나라의 어사가 사수군의 공무를 감독함에 소하가 從事하였는데, 늘 일을 잘 처리하였다.

何乃給泗水卒史事第一
이에 소하에게 泗水郡 卒史라는 직책을 주었는데, 성적이 제일이었다.

秦御史欲入言徵何何固請得毋行
진나라의 어사가 입조시키려 소하를 말로서 불렀으나, 소하는 한사코 사양하여 가지 않을 수 있었다.

▶ 辨: 처리하다

及高祖起為沛公何常為丞督事
고조가 起兵하여 沛公이 되자 소하는 보좌관이 되어 공무를 감독하였다.

沛公至咸陽諸將皆爭走金帛財物之府分之何獨先入收秦丞相御史律令圖書藏之
패공이 함양에 도착하자, 장수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金帛 財物 창고로 달려가서 나누어 가졌지만, 소하는 유독 먼저 입궁하여 진나라의 승상과 어사의 법령과 지도와 서적을 수집하여 보관하였다.

沛公為漢王以何為丞相
패공이 漢王이 되자 소하를 승상으로 삼았다.

項王與諸侯屠燒咸陽而去
項王과 제후들은 함양을 도륙하고 불태우고 떠났다.

漢王所以具知天下阸塞戶口多少彊弱之處民所疾苦者以何具得秦圖書也
한왕이 천하의 험요한 요새, 인구의 많고 적음, 강약의 장소, 백성의 고통을 자세히 알 수 있었던 까닭은 소하가 진나라의 지도와 서적을 모두 얻었기 때문이다.

何進言韓信漢王以信為大將軍
소하가 한신을 추천하자 한왕은 韓信을 대장군으로 삼았다.

語在淮陰侯事中
이 일은 淮陰侯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 丞: 보좌관.
▶ 項王: 項羽. 秦나라 말기에 陳勝과 吳廣이 난을 일으키자 숙부 項梁과 吳中郡에서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스스로 西楚의 覇王이라 일컬었으며. 漢高祖 劉邦과 천하를 다투다가 垓下전투에서 패하여 죽었다.
▶ 阸塞: 험요한 요새.
▶ 韓信: 前漢의 장군이자 제후이다. 회음현 출신으로 유방의 부하로 있을 때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해 유방의 패권을 결정지었다.
▶ 語在淮陰侯事中: [史記列傳]권92淮陰侯列傳

漢王引兵東定三秦何以丞相留收巴蜀填撫諭告使給軍食
한왕이 군사를 이끌고 동진하여 三秦을 평정함에, 소하는 승상의 신분으로 巴蜀에 남아 지키면서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정령을 공포하고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였다.

漢二年漢王與諸侯擊楚何守關中侍太子治櫟陽
한나라 2(기원전205)에 한왕이 제후들과 함께 나라를 공격함에, 소하는 關中을 지키고 태자를 모시며 櫟陽을 다스렸다.

為法令約束立宗廟社稷宮室縣邑輒奏上許以從事
即不及奏上輒以便宜施行上來以聞
법령과 규약을 만들고 종묘·사직·궁실·현읍을 세움에, 그때마다 왕에게 가부를 아뢰고 허락을 얻어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만약 위에 아뢸 경황이 없으면, 그때마다 편의에 따라 시행하고, 주상이 오면 그것을 보고하였다.

關中事計戶口轉漕給軍漢王數失軍遁去何常興關中卒輒補缺
관중의 정사에 戶口를 헤아려 軍糧을 공급하였고, 한왕이 수차 군사를 잃고 도망함에, 소하는 늘 관중의 병졸을 징발하여 그때마다 결손을 보충하였다.

上以此專屬任何關中事
한왕은 이 때문에 전적으로 소하에게 관중의 정사를 맡겼다.

▶ 三秦: 항우가 秦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 땅을 셋으로 분봉하고 雍王, 塞王, 翟王이라 이름하고 三秦이라 불렀다. 〈秦始皇本紀〉
▶ 填撫: 鎭撫. 민심을 가라앉히다. 안정시키다.
▶ 諭告: 나라에서 시행할 일을 백성에게 공포함.
▶ 轉漕: 양곡을 운송함. 육로로 운반함을 轉이라 하고 水路로 운송함을 漕라고 한다.
▶ 輒: 언제나. 항상.
▶ 即: 만약. 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虛詞) 卽

한문의 허사(虛詞) 卽 即은 크게 나누어 네 가지 용법이 있다. 형용사, 부사, 전치사 그리고 접속사적 용법이 그것이다. 형용사적 용법은 현대 중국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即자의 주요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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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三年漢王與項羽相距京索之閒上數使使勞苦丞相
한왕3(기원전204), 한왕과 항우가 京縣 索亭 사이에서 서로 대치함에, 한왕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승상 소하를 위로하였다.

鮑生謂丞相曰
王暴衣露蓋數使使勞苦君者有疑君心也
為君計莫若遣君子孫昆弟能勝兵者悉詣軍所上必益信君。」
鮑生이 승상에게 말하였다.
왕께서 햇빛을 받으며 노숙하면서도 자주 사신을 보내 승상을 위로함은 승상의 마음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승상을 위한 계책으로, 승상의 자손과 형제 중 싸울 수 있는 자를 모두 군으로 보냄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주상은 틀림없이 승상을 더욱 신임할 터입니다.”

於是何從其計漢王大說
이에 소하가 그 계책을 따르니, 한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 勞苦: 위로하다.
▶ 暴衣露蓋: 風餐露宿.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다. 바삐 뛰어다니며 수고하다.
▶ 勝兵: 싸울 수 있다. 싸움을 감당하다.
▶ 詣: 이르다. 가다.
▶ 說: 悦과 같다.

漢五年既殺項羽定天下論功行封
한왕5(기원전202)에 항우를 죽이고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논공행상을 하였다.

群臣爭功歲餘功不決
신하들이 서로 공을 다투니, 해를 넘기도록 공훈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高祖以蕭何功最盛封為酂侯所食邑多
고조는 소하의 공이 가장 크다고 여겨 酇侯로 봉하고 식읍도 가장 많았다.

功臣皆曰
臣等身被堅執銳多者百餘戰少者數十合攻城略地大小镑有差
今蕭何未嘗有汗馬之勞徒持文墨議論不戰顧反居臣等上何也?」
공신들이 모두 말하였다.
신들은 몸소 被堅執銳(견고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병기를 잡음)한 채, 많게는 100여 번 전투하였고 적게는 수십 을 싸우며,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았으므로 공로의 大小에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소하는 汗馬之勞도 없이 단지 문서만 가지고 의론하였을 뿐 싸우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신들보다 위에 있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 被: 披와 같다.
▶ 鎊: 깍다.
▶ 汗馬之勞: 말을 달려 땀투성이가 되는 勞苦라는 뜻으로, 혁혁한 戰功을 이르는 말.

高帝曰
諸君知獵乎?」
고제가 말하였다.
그대들은 사냥에 관하여 아는가?”


知之。」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압니다.”

知獵狗乎?」
사냥개도 아는가?”


知之。」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압니다.”

高帝曰
夫獵追殺獸兔者狗也而發蹤指示獸處者人也
今諸君徒能得走獸耳功狗也
至如蕭何發蹤指示功人也
且諸君獨以身隨我多者兩三人
今蕭何舉宗數十人皆隨我功不可忘也。」
고제가 말하였다.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를 뒤쫓아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지만, 發蹤指示(종적을 발견하고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함)하는 것은 사람이다.
지금 그대들은 한갓 달리는 짐승을 잡았을 뿐이니, 공로가 사냥개에 해당한다.
소하로 말하면 發蹤指示하였으니, 공로가 사람에 해당한다.
또 그대들은 一身으로 나를 따랐거나 많아야 두세 사람이었지만, 저 소하는 一族 수십 인을 내게 딸려 보냈으니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된다.”

群臣皆莫敢言
신하들은 아무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 发踪指示: 成语,典出《史记》卷五十三〈萧相国世家〉。踪,踪迹。发现野兽的踪迹,指示猎狗跟踪追捕。比喻在幕后操纵指挥。
▶ 宗: 一族.

 

列侯畢已受封及奏位次皆曰
平陽侯曹參身被七十創攻城略地功最多宜第一。」
열후가이 모두 봉해지자 순위를 정하기를 주청하며 모두 말하였다.
平陽侯 曹參 70여 군데나 상처를 입었고, 성을 공격하고 땅을 빼앗아 전공이 가장 크니, 마땅히 第一입니다.”

上已橈功臣多封蕭何至位次未有以復難之然心欲何第一
주상은 이미 공신들을 굴복시키면서 소하를 높여서 봉하였으므로, 순위 때문에 다시 난처하게 하지 않으려 했으나, 마음속으로는 소하를 第一位에 두고 싶었다.

關內侯鄂君進曰
關內侯 鄂千秋가 진언하였다.
群臣議皆誤
신하들의 논의는 모두 잘못되었습니다.

夫曹參雖有野戰略地之功此特一時之事
저 조참에게 비록 야전에서 땅을 빼앗은 공이 있지만, 이는 단지 한때의 일에 불과합니다.

夫上與楚相距五歲常失軍亡眾逃身遁者數矣
주상께서  5년을 서로 대치함에, 일찍이 군사를 잃고 몸을 피해 달아나신 적이 여러 차례였습니다.

▶ 平陽侯曹參: 曹參.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번, 平陽侯로 책봉되었다.
▶ 創: 상처.
▶ 桡(요, 뇨: 굴복시키다.
▶ 關內侯鄂君: 關內侯鄂千秋. 漢高祖때 安平侯.
▶ 常: 일찍이(≒嘗).

 

 

然蕭何常從關中遣軍補其處非上所詔令召而數萬眾會上之乏絕者數矣
그러나 소하는 늘 관중에서 군사를 보내어 그곳에 보충하였고, 주상께서 명령하여 소집한 것도 아닌데, 주상께서 乏絶함에 때맞추어 수만의 병사를 보낸 것도 여러 차례입니다.

夫漢與楚相守滎陽數年軍無見糧蕭何轉漕關中給食不乏
한과  滎陽을 지키려 몇 년 동안 대치함에, 군에 양식이 떨어지면, 소하가 관중에서 육로와 수로로 운반하여 給食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陛下雖數亡山東蕭何常全關中以待陛下此萬世之功也
폐하께서는 비록 여러 차례 山東지역을 잃기도 했지만, 소하는 늘 관중을 온전히 보존하여 폐하를 기다렸으니 이는 만세에 빛날 공훈입니다.

▶ 見: 現과 같다. 현존하다.
▶ 亡: 잃다.
▶ 轉漕: 양곡을 운송함. 육로로 운반하는 것을 轉이라 하고 水路로 운송하는 것을 漕라고 한다.

 

今雖亡曹參等百數何缺於漢
지금 비록 조참과 같은 사람 백명이 없다고 한들, 한나라에 무슨 손실이 있겠습니까?

漢得之不必待以全
한나라가 저들이 얻음이, 나라를 보전하는 데 꼭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柰何欲以一旦之功而加萬世之功哉
어찌 하루아침의 공훈을 가지고 만세의 공훈을 능가하려 합니까!

蕭何第一曹參次之。」
소하가 제일이고 조참이 그 다음입니다.”

高祖曰
。」
고조가 말하였다.
옳다.”

於是乃令蕭何[第一]賜帶劍履上殿入朝不趨
이에 명령을 내려 소하의 공을 제일로 삼고,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大殿에 오르며 조정에 듦에 종종걸음치지 않는 특혜를 내렸다.

▶ 趨: 공경의 표시로 종종걸음치다.

上曰
吾聞進賢受上賞
蕭何功雖高得鄂君乃益明。」
고조가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현자를 추천하면 큰상을 받는다고 하였소.
소하의 공이 비록 높지만, 악천추로 인해 더 분명해졌소.”

於是因鄂君故所食關內侯邑封為安平侯
이로 인하여 악천추에게 원래 봉하였던 관내후 식읍에 安平侯를 더해 주었다.

是日悉封何父子兄弟十餘人皆有食邑
그날 소하의 부자 형제 10여 명도 모두 식읍을 봉하였다.

乃益封何二千戶以帝嘗繇咸陽時何送我獨贏錢二也
그 후 소하에게 2천 호를 더 봉했는데 황제가 일찍이 함양으로 요역갈 때 소하만 황제에게 200전을 더 주었기 때문이다.

▶ 赢: 많다.


漢十一年陳豨反高祖自將至邯鄲
고조11(기원전196), 陳豨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邯鄲에 이르렀다.

未罷淮陰侯謀反關中呂后用蕭何計誅淮陰侯語在淮陰事中
정벌을 끝내지 못했는데 淮陰侯 韓信이 관중에서 모반함에, 呂后가 소하의 계책을 채용하여 회음후를 죽였으니, 이 일은 <淮陰侯列傳>에 기록되어 있다.

上已聞淮陰侯誅使使拜丞相何為相國益封五千戶令卒五百人一都尉為相國衛
주상은 회음후가 주살되었다는 말을 듣자, 사신을 보내 승상 소하를 相國으로 임명하고 5천 호의 식읍을 더 봉하면서, 군사 500명과 도위 一人을 상국의 衛兵으로 삼았다.

諸君皆賀召平獨弔
사람들이 모두 축하했지만 召平은 유독 조의를 표하였다.

召平者故秦東陵侯
소평은 옛 나라의 東陵侯였다.

秦破為布衣種瓜於長安城東瓜美故世俗謂之東陵瓜」,從召平以為名也
진나라가 멸망하자 평민이 되어 가난하게 長安城 동쪽에서 오이를 길렀으며 오이가 맛이 좋았으므로 세속에서 그것을 東陵瓜라 불렀으니, 소평의 작위를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 陳豨: 漢나라의 개국공신으로 漢高祖 劉邦을 따라 燕王 藏荼를 평정하여 陽夏侯에 봉해졌다. 고조7년(기원전200년)에 代의 相國이 되어 趙·代의 군사를 관할하였다. 고조10년(기원전197년) 韓信과 모반을 도모하여 王黃·曼丘臣 등과 반란을 일으키고 代王으로 자칭하였다. 고제의 親征으로 진압되었다. 고조12년(기원전196년) 한나라의 진압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史記列傳권93韓信盧綰列傳>
▶ 誅淮陰侯: 韓信이 진희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呂后가 蕭何와 모의하였다. 상국 소하가 한신을 속여서 궁으로 들어오게 하자 여후가 무사를 시켜 한신을 포박해 長樂宮 鍾室에서 목을 베었다. <史記列傳권92淮陰侯列傳>
▶ 召平: 秦나라의 東陵侯였다가 진나라가 망하자 포의로 가난하게 살며 長安城 동쪽에 오이를 심었다. 그 오이가 맛이 좋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東陵瓜’라 하였다.

 

召平謂相國曰:
「禍自此始矣。
上暴露於外而君守於中,非被矢石之事而益君封置衛者,以今者淮陰侯新反於中,疑君心矣。
夫置衛衛君,非以寵君也。
願君讓封勿受,悉以家私財佐軍,則上心說。」
소평이 상국 소하에게 말하였다.
재난이 이로부터 시작될 터입니다.
주상께서는 외지에서 야영하시고, 군께서는 궁중을 지키고 있어 화살이나 돌을 맞는 일도 아닌데, 군께 봉읍을 더 내리고 호위를 배치함은, 회음후가 최근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군을 마음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호위병을 두어 군을 지키게 함은 군을 총애해서가 아닙니다.
군께서는 봉지를 사양하며 받지 마시고, 집안의 사재를 전부 군에 보태시면 주상께서 마음으로 기뻐하시겠습니다.”

相國從其計,高帝乃大喜。
상국이 그 계책에 따르니 고제가 매우 기뻐하였다.

▶ 暴露於外: 밖에서 햇볕을 쬐고 비를 맞음. 노천에서 따가운 햇볕과 비바람에 시달리며 野營함을 말한다.
▶ 讓: 사양하다.

 

漢十二年秋,黥布反,上自將擊之,數使使問相國何為。
고조12(기원전195) 가을에 黥布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조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경포를 공격하면서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상국 소하가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相國為上在軍,乃拊循勉力百姓,悉以所有佐軍,如陳豨時。
상국은 주상이 군중에 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한편, 가진 재산을 모두 군비에 보태었으며, 진희의 반란 때와 똑같이 하였다.

▶ 黥布: 본명이 英布이며, 前漢 六安 六縣 사람으로 법을 어겨 黥刑을 당해 黥布로 불렸다. 항우를 따라 入關한 뒤 九江王에 봉해졌으며, 楚漢전쟁 중에 한나라가 그를 설득하자 한나라로 귀순하였다. 漢나라가 세워진 뒤 韓信과 彭越 등 개국 공신들이 하나하나 피살되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강남으로 달아났다가 長沙王에게 유인되어 誅殺당하였다. <사기 권91. 黥布列傳>
▶ 拊循勉力: 위로하며 격려하다. 拊循은 撫循과 통용되어 위로하다. 위무하다의 뜻.

 

客有說相國曰:
「君滅族不久矣。
夫君位為相國,功第一,可復加哉?
然君初入關中,得百姓心,十餘年矣,皆附君,常復孳孳得民和。
上所為數問君者,畏君傾動關中。
今君胡不多買田地,賤貰貸以自汙?
上心乃安。」
어떤 객이 상국에게 권유하였다.
군의 멸족이 멀지 않습니다.
군의 지위는 상국이고 공로는 제일이니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군께서 처음 관중에 들어가서 백성의 마음을 얻은 지 10여 년이 되어, 백성은 모두 군을 따르며, 항상 부지런히 일을 처리하여 백성의 화목을 얻었습니다.
주상께서 여러 차례 군에 대해 물으심은, 군께서 관중을 동요시킬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지금 군께서는 어찌하여 밭을 많이 사서 헐값으로 세를 받고 빌려주어 자신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않으십니까?
그리하면 주상께서 비로소 안심하실 것입니다.”

於是相國從其計,上乃大說。
이에 상국은 그 계책을 따랐고 주상은 매우 기뻐하였다.

▶ 孳孳: 부지런한 모습.
▶ 胡: 어찌.

 

上罷布軍歸民道遮行上書言相國賤彊買民田宅數千萬
주상이 경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오는데 백성이 길을 막고 상소문 올려 말하기를, 상국이 백성의 田宅 수천만전 어치를 강제로 싸게 샀다고 고발하였다.

上至相國謁
주상이 조정에 이르자 상국이 알현하였다.

上笑曰
夫相國乃利民!」
주상이 웃으며 말하였다.
상국이 백성을 이롭게 해주었구려!”

民所上書皆以與相國
君自謝民。」
백성들이 올린 상소문을 모두 상국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상국이 직접 백성들에게 사죄하시오.”

▶ 遮: 저지하다.
▶ 相國乃利民: 상국의 신분으로 결국 백성을 해롭게 했다는 반어적 표현. 乃는 결국, 마침내.
▶ 謝: 사죄하다.

 

相國因為民請曰
長安地狹上林中多空地願令民得入田毋收槁為禽獸食。」
상국은 이 기회에 백성들을 위해 청하였다.
장안의 땅은 좁은데 上林苑에는 빈터가 많고 버려져 있으니 백성들이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하되, 볏짚은 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거두지 말도록 윤허해주십시오.”

上大怒曰
相國多受賈人財物乃為請吾苑!」
주상이 대노하여 말하였다.
상국이 상인들의 재물을 많이 받고 그들을 위해 내 상림원을 요구하다니!”

乃下相國廷尉械系之
이에 상국을 廷尉에게 넘겨 형구를 채워 감금하였다.

▶ 稿: 볏짚.
▶ 械系: 형구를 채우다. 족쇄와 수갑을 채워 감금하다.

數日王衛尉侍前問曰
相國何大罪陛下系之暴也?」
며칠 뒤 씨인 衛尉가 고조를 모시다가 나서서 물었다.
상국이 무슨 큰 죄를 저질렀기에 폐하께서 그토록 가혹하게 구금하셨습니까?”

上曰
吾聞李斯相秦皇帝有善歸主有惡自與
今相國多受賈豎金而為民請吾苑以自媚於民故系治之。」
주상이 말하였다.
내가 듣기에 李斯가 진시황제를 보좌하면서 좋은 일은 군주에게 돌리고 나쁜 일은 자신에게 돌렸다.
지금 상국이 장사치들에게 돈을 많이 받고 그들을 위해 내 상림원을 요청하여 자신이 백성에게 아부하려고 한 까닭에 그를 가두어 죄를 다스리려 한다.”

▶ 衛尉: 관직. 구경의 하나로 궁궐 문을 지키는 군사를 관할하는 관직.
▶ 相: 보좌하다.
▶ 賈豎: 商人을 비하하는 말. 장사치.
▶ 媚: 아첨하다.

王衛尉曰
夫職事茍有便於民而請之真宰相事陛下柰何乃疑相國受賈人錢乎
且陛下距楚數歲陳豨黥布反陛下自將而往當是時相國守關中搖足則關以西非陛下有也
相國不以此時為利今乃利賈人之金乎
且秦以不聞其過亡天下李斯之分過又何足法哉
陛下何疑宰相之淺也。」
왕위위가 말하였다.
직책상 만약 백성들에게 이로움이 있으면 요청함은 진정 재상의 일인데,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상국이 상인에게 돈을 받았다고 의심하십니까!
또한 폐하께서는 몇 해 동안 와 대치하셨고, 진희와 경포가 반란을 일으키자, 폐하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시고 당시 상국은 관중을 지켰는데, 만약 상국이 발을 뺐더라면 함곡관 서쪽은 폐하의 차지가 아닐 터입니다.
상국은 그때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는데, 지금 상인의 돈을 이익으로 삼았겠습니까?
또 진시황은 자신의 잘못을 듣지 않아 천하를 잃은 것이거늘, 이사가 잘못을 떠맡음이 무슨 본받을 바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 재상을 그렇게 낮추어 의심하십니까?”

高帝不懌
고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是日使使持節赦出相國
이날 符節을 소지한 사신을 보내 상국을 사면하고 석방하였다.

▶ 茍: 만약.
▶ 懌: 즐거워하다.
▶ 節: 符節. 사신이 소지한 일종의 증표.

相國年老素恭謹徒跣謝
상국은 나이가 많았고 평소에도 공손하고 신중하였는데, 입궁하여 맨발로 걸어와 사죄하였다.

高帝曰
相國休矣
相國為民請苑吾不許我不過為桀紂主而相國為賢相
吾故系相國欲令百姓聞吾過也。」
고제가 말하였다.
상국, 됐소이다!
상국은 백성을 위해 상림원을 청구했고 나는 허락하지 않았으니 나는  와 같은 군주에 불과했고 상국은 어진 재상이 되었소.
내가 상국을 구금한 까닭은 백성들에게 내 잘못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소.”

▶ 徒跣: 맨발로 걷다. 죄를 청하는 표시.
▶ 桀紂: 폭군. 하나라의 桀왕과 은나라의 紂왕.

 

 

何素不與曹參相能及何病孝惠自臨視相國病因問曰
君即百歲後誰可代君者?」
소하는 평소 조참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소하가 병들자 惠帝가 친히 상국의 병세를 보러 와서 물었다.
그대가 만약 세상을 떠나면 누가 그대를 대신해야 되겠소?”

對曰
知臣莫如主。」
소하가 대답하였다.
신하를 아는 데는 군주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孝惠曰
曹參何如?」
혜제가 물었다.
曹參이 어떻소?”

何頓首曰
帝得之矣
臣死不恨矣!」
소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폐하께서 잘 택하셨습니다!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 曹參: 전한의 군인이자 개국 공신으로, 자는 敬伯이다. 원래 진나라의 옥리였으나, 고조 유방의 거병 시에 뜻을 같이하였다. 한신과 더불어 군사면에서 활약을 하였다. 진나라와 항우를 공략하여 한나라의 통일대업에 이바지한 공으로 건국 후에는 공신서열 2위로 平陽侯로 책봉되었다.
▶ 能: 화목하다.
▶ 惠帝: 漢高祖 劉邦의 차남으로 이름은 劉盈이다. 고조가 죽은 후 呂后의 소생 盈이 혜제로 즉위하였다.
▶ 百歲後: 죽은 뒤. 百歲之後로 지체 높은 사람이 죽은 뒤의 뜻.
▶ 恨: 遺恨. 遺憾.

 

何置田宅必居窮處為家不治垣屋
소하는 전택의 위치를 반드시 외딴곳에 두었고, 집을 지음에 담장을 치지 않았다.


後世賢師吾儉不賢毋為勢家所奪。」
그러면서 말하였다.
후손이 현명하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터이고, 현명하지 못하여도 권세가에게 빼앗길 일이 없을 터이다.”

▶ 垣屋: 담이 있는 집.

孝惠二年相國何卒謚為文終侯
혜제2(기원전193)에 상국 소하가 죽었으며, 시호를 文終侯라 하였다.

後嗣以罪失侯者四世天子輒復求何後封續酂侯功臣莫得比焉
소하의 후대가 죄를 지어 의 작위를 잃음이 4대였고, 계승할 사람이 끊어짐에 천자는 그때마다 소하의 후손을 다시 찾아 계속하여 酇侯에 봉하니, 공신으로 소하와 비견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輒: 번번이. 언제나.

世家53-蕭相國世家(소상국세가)



太史公曰
蕭相國何於秦時為刀筆吏錄錄未有奇節
及漢興依日月之末光何謹守管籥因民之疾奉[]順流與之更始
淮陰黥布等皆以誅滅而何之勳爛焉
位冠群臣聲施後世與閎夭散宜生等爭烈矣
태사공은 말한다.
상국 소하는 진나라 때에는 刀筆吏로서 평범하여 특별한 節目이 없었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황제의 후광에 힘입어 소하는 직책을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백성이 秦法을 증오함을 알고, 순리에 따라 함께하며 새로운 정책을 시행하였다.
회음후·경포 등이 모두 주멸됨에, 소하의 공적은 더욱 빛났다.
지위는 신하 중 으뜸이었고 명성은 후대에까지 연속되었으니, 閎夭·散宜生 등과 공업을 다툴 만하다.”

▶ 刀筆吏: 刀筆은 대쪽에 글씨를 쓰는 붓과 잘못된 글씨를 깎아내는 칼을 가리키며, 도필리는 문서를 작성하는 낮은 벼슬아치를 말한다.
▶ 錄錄: 평범한 모양. 보잘것없는 모양.
▶ 日月: 황제를 비유한 말.
▶ 管籥: 笙篁·短簫등의 관악기를 말하며, 여기서는 직책을 말한다.
▶ 施: 연속하다.
▶ 閎夭, 散宜生: 周나라의 文王과 武王때의 명신들. 殷나라의 紂왕이 문왕을 가두었을 때 有莘氏의 미녀와 驪戎의 명마, 기타 귀중한 물품을 구해 紂왕에게 헌납하고 문왕을 구해냈다. 나중에 무왕을 따라 주왕을 멸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史記本紀]권04. 周本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