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篇은 30世家 중 20번째 편으로 漢나라의 楚元王 劉交 및 그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다.
楚元王 劉交는 前漢 초기의 황족이자 제후왕이다. 자는 游이며 元으로 漢高祖 劉邦의 동생이다. 유방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入關한 뒤 文信君에 봉해졌으며, 유방을 따라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고조6년(기원전201년), 楚王 韓信을 모반 혐의로 잡아들여 봉국을 폐하고 淮陰侯로 격하시키고, 한신의 봉국 중 36현을 받아 楚王이 되었다. 재위23년 만에 죽었고, 맏아들 劉辟非가 일찍 죽었으므로 劉郢客이 뒤를 이었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漢高祖는 속임수로 韓信을 陳縣에서 사로잡았다. 월나라와 楚 사람들은 민첩하고 용맹한 고조의 동생 劉交를 초왕으로 봉하고 팽성에 도읍하여 회수와 사수 유역의 통치를 강화하니 한나라 종실의 울타리가 되었다. 劉戊가 사악함에 빠졌으나 劉禮를 초왕으로 봉하여 왕업을 다시 잇게 하였다. 楚元王游(: 劉交)가 고조를 보필한 공을 칭찬하여 제20편 ‘楚元王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楚元王劉交者,高祖之同母少弟也,字游。
楚元王劉交는 漢高祖와 어머니가 같은 막내 동생으로 字는 游이다.
▶ 高祖: 漢高祖 劉邦. 유방은 아버지 劉太公과 어머니 劉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위로는 형 劉伯과 劉喜(: 劉仲)가 있었고 아래로 劉交(漢書에서는 同父少弟로 됨)가 있었다. <漢書>
高祖兄弟四人,長兄伯,伯蚤卒。
고조의 형제는 네 명이었는데, 맏형 劉伯은 젊어서 죽었다.
始高祖微時,嘗辟事,時時與賓客過巨嫂食。
당초 고조가 미천한 신분이었을 때 늘 사고를 치고 숨어다니면서 수시로 빈객들과 큰 형수의 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었다.
嫂厭叔,叔與客來,嫂詳為羹盡,櫟釜,賓客以故去。
형수는 시숙을 싫어하여, 그가 손님과 함께 오면 거짓으로 음식이 다한 양 주걱으로 솥을 긁었고, 손님이 이 때문에 돌아갔다.
已而視釜中尚有羹,高祖由此怨其嫂。
손님들이 돌아간 후 솥 안에 아직 음식이 남아 있음을 보고, 고조가 이 때문에 형수를 원망하였다.
▶ 蚤: 早와 같다.
▶ 微: 천하다. 미천하다.
▶ 辟: 避와 같다. 도피하다.
▶ 巨嫂: 큰 형수.
▶ 詳: 佯과 통용된다. 가장하다.
▶ 櫟釜: 솥을 긁어 소리를 내다. 櫟는 긁다.
及高祖為帝,封昆弟,而伯子獨不得封。
고조가 황제가 되자 형제들을 제후로 봉했는데 오직 劉伯의 아들만 봉하지 않았다.
太上皇以為言,高祖曰:
「某非忘封之也,為其母不長者耳。」
태상황이 이를 말하자 고조가 말하였다.
“제가 조카를 봉함을 잊은 것이 아니라 그의 어미가 후덕하지 못해서입니다. ”
於是乃封其子信為羹頡侯。
그리고는 형 유백의 아들 信을 羹頡侯로 봉하였다.
而王次兄仲於代。
그리고 둘째 형 劉仲을 代왕에 봉하였다.
▶ 昆弟: 형제. 。
▶ 太上皇: 황제의 부친을 太上皇이라 한다. 즉 고조 유방의 부친으로 劉煓이라고 전해진다.
▶ 某: 자기의 겸칭.
▶ 不長者: 손윗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長者는 나이가 많고 덕이 있는 사람.
▶ 羹頡侯: 고조는 유신을 羹頡侯에 봉하였다. '갱갈'은 국그릇을 긁는다는 뜻으로, 결국 형수를 비꼰 것이다. 頡(갈)은 마찰하는 소리 ‘갈’.
▶ 次兄: 둘째 형 劉仲. 이름은 喜. 그의 아들이 劉濞이다.
▶ 代: 한나라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북성 경계.
高祖六年,已禽楚王韓信於陳,乃以弟交為楚王,都彭城。
漢高祖6년(기원전201년), 고조는 초왕 韓信을 陳縣에서 사로잡고 동생 유교를 초왕으로 삼으니, 彭城에 도읍하였다.
即位二十三年卒,子夷王郢立。
유교는 즉위 23년 만에 죽고, 아들인 夷王 郢이 즉위하였다.
夷王四年卒,子王戊立。
이왕은 4년 만에 죽고 아들 戊가 왕위를 이었다.
▶ 禽: 사로잡다.
▶ 楚王韓信: 淮陰侯 韓信. 高帝 6년에 어떤 자가 楚王韓信이 모반한다고 고발하자, 고제가 陳平의 계책을 사용하여 거짓으로 雲夢에 유람한다고 하고 제후들을 陳땅에 모이게 하여 한신을 사로잡았다. <史記列傳권92淮陰侯列傳>
▶ 郢: <漢書>에는 郢客으로 기록하고 있다.
王戊立二十年,冬,坐為薄太后服私姦,削東海郡。
초왕 戊는 즉위한 지 20년 겨울에 박태후의 복상 때 궁녀와 간통한 사건에 연루되어 東海郡을 삭감당하였다.
春,戊與吳王合謀反,其相張尚、太傅趙夷吾諫,不聽。
이듬해 봄에 유무는 吳王 劉濞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으며, 그의 재상 張尙·太傅 趙夷吾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戊則殺尚、夷吾,起兵與吳西攻梁,破棘壁。
유무는 즉시 장상·조이오를 죽이고, 군대를 일으켜 오왕과 함께 서쪽의 梁을 공격하여 棘璧을 격파하였다.
至昌邑南,與漢將周亞夫戰。
昌邑의 남쪽에 이르러 한나라의 장수 周亞夫와 싸웠다.
漢絕吳楚糧道,士卒饑,吳王走,楚王戊自殺,軍遂降漢。
한나라가 오와 초의 군량 보급로를 끊으니 병사들은 굶주렸고, 오왕은 달아났으며, 초왕 무는 자살하였고, 군사들은 마침내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 坐: 죄에 대하여 벌을 받다. 연좌되다.
▶ 薄太后: 고조 劉邦의 후궁. 文帝의 생모.
▶ 服: 服喪. 상중.
▶ 削東海郡: 경제3년(기원전154년)겨울, 楚王이 입조하자 晁錯는 이 기회에 초왕 劉戊가 지난해 薄太后의 喪中에 상가에서 몰래 간음한 죄를 물어 그에게 죽음을 내리기를 청원하였다. 경제는 詔書를 내려 사면하였으나 벌로써 東海郡을 삭감하였다. <史記列傳권106. 吳王濞列傳>
▶ 吳王合謀反: 吳王 劉濞는 前漢의 제후왕으로 漢高祖 劉邦의 형 劉仲의 아들이다. 황실이 제후국을 견제하는 것에 반발하여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오초칠국의 난은 前漢 景帝치세인 기원전154년 전한의 제후국 吳의 왕 劉濞가 주축이 되어 楚왕 劉戊, 趙왕 劉遂, 濟南王劉辟光, 菑川王劉賢, 膠西王劉卬, 膠東王劉雄渠 등이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史記列傳권106. 吳王濞列傳>
▶ 周亞夫: 沛郡 사람으로 西漢의 武將이자 군사가, 정치가이다. 周勃의 차남으로 부친의 작위를 이어받아 絳侯가 되었다. 벼슬은 河內郡守, 車騎將軍, 太尉, 丞相 등을 역임하였다. 吳楚七國의 난 때 군사를 이끌고 3개월 만에 반군을 평정하였다. 한경제 때 억울하게 반란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서 굶어죽었다. <史記권57. 絳侯周勃世家>
漢已平吳楚,孝景帝欲以德侯子續吳,以元王子禮續楚。
한나라가 오와 초의 반란을 평정한 뒤 孝景帝는 德侯 유광의 아들에게 吳의 왕위를 잇게 하고, 원왕 유교의 아들 劉禮에게 楚의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다.
竇太后曰:
「吳王,老人也,宜為宗室順善。
今乃首率七國,紛亂天下,柰何續其後!」
두태후가 말하기를,
“오왕 그 늙은이는 종실을 위해 모범을 보여야 하였다.
이번에 7국의 우두머리가 되어 천하를 어지럽혔거늘 무엇 때문에 그의 후사를 잇게 하는가!”
不許吳,許立楚後。
오왕의 후계를 허락하지 않고 楚의 후계만 허락하였다.
是時禮為漢宗正。
이때 유례는 한나라 조정의 宗正이었다.
乃拜禮為楚王,奉元王宗廟,是為楚文王。
이에 유례를 초왕으로 삼고 초원왕의 종묘를 받들게 하니 그가 楚文王이다.
▶ 孝景帝: 漢景帝. 劉啓. 漢나라의 6대 皇帝이다. 漢나라 文帝劉恒의 다섯째아들이다. 모친은 한문제의 皇後 竇氏이다.
▶ 德侯: 劉廣. 전한 초기의 제후로, 고제의 형 劉仲의 아들이자 오왕 유비의 동생이다. 개국공신 서열127위로 德侯에 봉해졌다.
▶ 劉禮: 楚文王. 초원왕 劉交의 아들. 종정을 맡고 있다가 경제가 즉위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작위를 받아 平陸侯에 봉해졌다. 초왕의 작위를 이은 조카 유무가 오초칠국의 난에 가담했다가 패배하고 자결했기에 景帝는 다시 초元王의 막내아들 平陸侯 劉禮를 초왕으로 삼아 원왕의 뒤를 잇게 하였다. 재위3년 만에 죽었고, 시호를 文이라 하였다.
▶ 竇太后: 한문제의 황후. 한경제의 모친.
▶ 率: 거느리다.
▶ 順善: 선행의 법도를 준수하다.
▶ 宗正: 관직명.
文王立三年卒,子安王道立。
문왕은 재위3년 만에 죽고 아들인 安王 劉道가 즉위하였다.
安王二十二年卒,子襄王注立。
안왕은 22년 만에 죽고 아들 襄王 劉注가 즉위하였다.
襄王立十四年卒,子王純代立。
양왕은 재위14년 만에 죽고 아들인 劉純이 뒤를 이었다.
王純立,地節二年,中人上書告楚王謀反,王自殺,國除,入漢為彭城郡。
유순이 즉위한 후 地節 2년(기원전68년)에 中人이 글을 올려 초왕 유순이 반역을 꾀한다고 고하자 초왕은 자살하였고, 楚는 폐지되어 한나라의 彭城郡으로 편입되었다.
▶ 地節二年: 기원전68년. 地節은 漢宣帝가 사용한 연호이다. 선제는 기원전69년을 연호를 本始에서 ‘地節’로 바꾸고, 그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 中人: 궁녀.
▶ 劉純: 초양왕 유주의 아들로, 아버지가 죽자 초왕의 작위를 이었다.
趙王劉遂者,其父高祖中子,名友,謚曰「幽」。
趙王 劉遂는 그의 아버지가 고조의 가운데 아들로 이름은 友, 시호는 幽이다.
幽王以憂死,故為「幽」。
유왕이 근심하고 슬퍼하며 죽었기 때문에 ‘幽’라고 하였다.
高后王呂祿於趙,一歲而高后崩。
高后가 呂祿을 조왕으로 봉하고 1년 뒤 고후가 세상을 떠났다.
大臣誅諸呂呂祿等,乃立幽王子遂為趙王。
대신들은 여씨들과 여록 등을 죽이고 유왕의 아들 유수를 趙王으로 세웠다.
▶ 劉遂: 趙王 劉遂. 고조의 아들인 趙幽王 劉友의 아들로, 아버지 유우가 태황태후 여씨에게 감금되어 굶어죽고 趙왕 자리도 공왕을 거쳐 여씨 일족인 呂祿에게 넘어갔다. 고황후8년(기원전180년)에 고황후 사후 여씨 일족이 몰락하고 文帝가 황제가 되면서, 죽은 여록을 대신해 趙왕이 되었다.
▶ 劉友: 趙幽王 劉友. 漢高帝의 여섯 번째 아들. 처음에 淮陽王에 봉해졌으나 趙왕 유여의가 여태후에게 독살당하면서 趙王으로 옮겨졌다. 여후에 의해 幽禁되어 굶어 죽었으므로 시호를 幽王이라 하였다. <史記本紀권09. 呂太后本紀>
▶ 高后: 여태후. 漢高祖 유방의 처.
▶ 王: 왕으로 봉하다.
孝文帝即位二年,立遂弟辟彊,取趙之河閒郡為河閒王,以[是]為文王。
孝文帝 즉위 2년에 유수의 동생 辟疆을 왕으로 봉하고, 趙의 河間郡을 떼어내어 하간왕으로 삼으니 그가 文王이다.
立十三年卒,子哀王福立。
조문왕은 재위13년 만에 죽고 아들 哀王 劉福이 즉위하였다.
一年卒,無子,絕後,國除,入于漢。
유복은 1년 만에 죽고 자식이 없어 후손이 끊어졌으므로 나라는 없어졌고 봉지는 한나라에 편입되었다.
▶ 孝文帝: 文帝. 前漢의 5대 황제 劉恒, 시호가 孝文皇帝이다. 한나라는 惠帝이후 ‘효로써 천하를 다스린다.’라는 뜻으로 시호 앞에 ‘孝’를 붙였다.
遂既王趙二十六年,孝景帝時坐晁錯以適削趙王常山之郡。
유수가 趙의 왕이 된 지 26년, 景帝 때 晁錯에 연좌되니 常山郡을 삭감하였다.
吳楚反,趙王遂與合謀起兵。
오초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왕 유수는 그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其相建德、內史王悍諫,不聽。
그의 재상 建德과 內史 王悍이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遂燒殺建德、王悍,發兵屯其西界,欲待吳與俱西。
유수는 건덕과 왕한을 태워 죽이고 군대를 일으켜 서쪽 경계에 주둔시키고는 吳를 기다렸다가 함께 서쪽으로 진격하려고 하였다.
北使匈奴,與連和攻漢。
북쪽으로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연합하여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 晁錯: 漢나라 文帝와 景帝 때의 문신으로 潁川사람이다. 성품이 강하고 위엄을 앞세웠으나 재주와 식견이 뛰어나 좋은 계책을 많이 내었다. 文帝 때에 후일 景帝가 된 太子의 舍人으로 있다가 家令이 되어 태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나, 각박한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조조는 趙王 劉遂가 지은 죄를 물어 趙의 河間郡을 삭감하였다. <史記列傳권106. 吳王濞列傳>
▶ 吳楚反: 오초칠국의 난은 前漢 景帝 치세인 기원전154년 전한의 제후국 吳의 왕 劉濞가 주축이 되어 楚왕 劉戊, 趙왕 劉遂, 濟南王劉辟光, 菑川王劉賢, 膠西王劉卬, 膠東王劉雄渠등이 전한 중앙 정부에 일으킨 반란이다.
漢使曲周侯酈寄擊之。
한나라는 曲周侯 酈寄에게 유수를 공격하게 하였다.
趙王遂還,城守邯鄲,相距七月。
조왕 유수는 돌아와서 한단성을 지키면서 서로 일곱 달을 대치하였다.
吳楚敗於梁,不能西。
오초가 梁에서 패하여 西進할 수 없었다.
匈奴聞之,亦止,不肯入漢邊。
흉노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군대를 멈추고 한나라의 변경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欒布自破齊還,乃并兵引水灌趙城。
欒布가 齊를 격파하고 돌아오다가 군사를 합치고 물을 끌어들여 趙의 도성에 흘려보냈다.
趙城壞,趙王自殺,邯鄲遂降。
趙의 도성은 무너지고 조왕이 자살하니, 마침내 한단은 투항하였다.
趙幽王絕後。
趙幽王은 후손이 끊어졌다.
▶ 曲周侯酈寄: 酈寄. 곡주후 酈商의 아들로 자는 況이다. 酈寄가 趙를 공격하여 7개월이 되어도 함락하지 못했는데, 난포가 돌아와 병력을 합치고 물을 끌어다가 城에 주입하니 趙王 유수가 마침내 자살하였다
▶ 邯鄲: 趙의 수도. 지금의 河北省 한단시.
▶ 欒布: 梁 사람으로 梁왕 彭越이 왕이 되기 전에 친분이 있었다. 文帝 때 난포는 燕의 재상이 되었고 장군에까지 이르렀다. 역기가 반란에 가담한 조왕 유수를 공격하여 수도 邯鄲을 포위하였으나 조왕은 일곱 달을 항전하였고, 齊를 구원하고 돌아오던 길인 난포가 합류하여 한단을 함락하였다. <史記列傳권100季布欒布列傳>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國之將興,必有禎祥,君子用而小人退。
“나라가 흥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고, 군자는 쓰이고 소인은 쫓겨난다.
國之將亡,賢人隱,亂臣貴。
나라가 망하려면 현인은 숨고 亂臣이 귀인이 된다.
使楚王戊毋刑申公,遵其言,趙任防與先生,豈有篡殺之謀,為天下僇哉?
만약 초왕 劉戊가 申公을 벌하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더라면, 또 趙가 防與선생을 등용했더라면 어찌 찬탈의 음모를 품어 천하의 죄인이 되었겠는가?
賢人乎,賢人乎!
어진 사람이여!어진 사람이여!
非質有其內,惡能用之哉?
그릇된 바탕이 군주의 마음속에 있는데, 어찌 그들을 기용할 수 있겠는가?
甚矣,「安危在出令,存亡在所任」,誠哉是言也!
심하구나!
‘나라의 안위는 명령을 내림에 있고, 나라의 존망은 사람을 기용함에 있다.’라고 하니 정말이지 옳은 말이다!”
▶ 亂臣: 나라의 政治를 어지럽게 하는 逆臣
▶ 使: 만약. 가령. 假使
▶ 申公: 前漢시대의 유학자로 이름은 培. 魯 사람이다. 이름 대신 존칭인 公을 대신 붙여 申公이라고 일컬으며 申培公이라고 한다. 순자의 제자인 齊 사람 浮丘伯의 밑에서 <시경>을 배웠다. 유영이 楚王이 되자 신공을 태자 劉戊의 스승으로 명하였다. 유무는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 신공을 미워하였다. 유영이 죽고 유무가 초왕이 되자 신공을 감금하고 죄인으로 만들었다. <史記列傳권121. 儒林列傳>
▶ 僇: 치욕. 모욕. 여기서는 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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