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40-楚世家(초세가)

耽古樓主 2023. 6. 23. 12:13

이篇은 30世家 중 열 번째 편으로 周나라의 제후국인 楚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楚는 顓頊高陽氏의 후예이다. 帝嚳시절 重黎가 火正이 되어 천하를 밝힌 공으로 祝融의 칭호를 얻었다. 吳回가 그 뒤를 이어받았으며, 오회의 아들 陸終의 여섯째 아들 季連은 성을 羋라 하였으며, 楚는 그의 후손이다.

계련의 후손인 熊繹 때에 周成王으로부터 楚에 봉해져, 丹陽에 정착한 뒤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熊渠가 잠시 아들들에게 왕의 칭호를 쓰게 하면서 남쪽 오랑캐 지역에서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기원전704년 熊通은 스스로 武王이라 칭하였는데, 아들 文王이 郢으로 천도한 뒤 더욱 국세가 신장하였다.

특히 莊王은 기원전597년 晉軍을 邲에서 격파하여 결국 중원의 覇者가 되었다. 그 후 越이 쇠퇴하자 楚는 다시 세력을 회복, 양쯔강 중·하류를 모두 차지하는 강국으로서 전국칠웅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 秦의 압박을 받아 기원전278년 수도 영이 함락되자 陳으로 천도하였고, 다시 기원전241년 壽春으로 옮겼으나 기원전223년 결국 秦에게 멸망하였다.

사마천은 태사공 自序에서

“重黎가 火正이 되었으며 吳回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은나라 말년에 鬻熊이 楚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周成王이 熊繹을 기용하고 熊渠가 계속 그 일을 이었다.

현명한 楚莊王은 陳의 사직을 복구시켜 주고, 鄭伯의 죄를 용서했으며, 宋을 포위했다가 宋의 右師 華元의 말을 듣고 軍隊를 돌렸다.

楚懷王은 秦에서 객사했고, 子蘭은 屈原을 책망하였다.

초회왕은 아첨하는 말을 좋아하고 모함하는 자를 믿었기 때문에 楚는 秦에 합병되었다.

초장왕의 의로운 뜻을 기리어 제10편 ‘楚世家’를 지었다. ”

라고 기술하였다.

楚之先祖出自帝顓頊高陽。
楚의 선조는 顓頊高陽氏로부터 나왔다.
高陽者,黃帝之孫,昌意之子也。
고양은 黃帝의 손자이자 昌意의 아들이다.
高陽生稱,稱生卷章,卷章生重黎。
고양은 稱을 낳았고, 칭은 卷章을 낳았으며 권장은 重黎를 낳았다.
重黎為帝嚳高辛居火正,甚有功,能光融天下,帝嚳命曰祝融。
중려는 帝嚳高辛氏의 火正이 되어 큰 공을 세워 천하를 밝게 비추었으므로 제곡은 그를 祝融이라 부르게 하였다.
共工氏作亂,帝嚳使重黎誅之而不盡。
共工氏가 난을 일으키자 제곡이 중려에게 반란자들을 토벌하게 했지만 다 죽이지는 못하였다.
帝乃以庚寅日誅重黎,而以其弟吳回為重黎後,復居火正,為祝融。
이에 제곡은 경인일에 重黎를 죽이고 그 동생 吳回에게 중려의 뒤를 잇게 하고 다시 화정 자리에 앉히고 축융이라 하였다.

▶ 顓頊高陽: 黃帝의 손자이며 昌意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은 鯀, 손자는 禹王이다. 姓은 姬, 고양을 지배하여 高陽氏가 되었다. 明君으로서 이름이 높아 후일 夏나라와 楚는 그를 자기들의 遠祖로 섬겼다. [史記 本紀]권01. 五帝本紀
▶ 帝嚳高辛: 高辛사람으로 姓은 姬이고, 이름은 俊, 호는 嚳, 高辛氏이다. 상고 시대의 부족장이자 제왕으로 皇帝의 曾孫이다. 5세에 辛侯에 봉해졌다. 顓頊이 죽은 후에 제왕으로 등극하였다.
▶ 火正: 불을 관리하는 관리.
▶ 祝融: 赤帝. 중국 신화의 불의 신이자 남쪽의 신이다. 축융은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커다란 호랑이를 탄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 共工: 공공은 관직명으로 窮奇를 말한다. 궁기는 神獸의 이름으로 모습은 소와 같고 고슴도치 같은 털을 가지고 있으며 개 짖는 소리를 내는 신화 속의 괴물이다. 驩兜가 堯에게 추천하였을 때 堯는
“말은 번드레하지만 행실은 어긋난다.”
라고 비판하고 그의 천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神農氏의 후예로 물의 신으로 물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한 水官, 9개의 머리
뱀의 몸을 가진 하인 相繇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 重黎: 고대 중국의 전설에 楚의 선조 顓頊의 후손으로 제곡이 즉위한 뒤에 火正을 맡았다. 중려는 불빛으로 천하를 밝게 비추어 큰 공을 세웠으므로 제곡이 그를 祝融이라 부르도록 명하였다. 祝融의 후손이 己씨라고 전하기도 하는데, 周시대에 蘇씨가 되었다.
▶ 吳回: 重黎의 동생.


吳回生陸終。
吳回는 陸終을 낳았다.
陸終生子六人,坼剖而產焉。
육종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배를 갈라 낳았다.
其長一曰昆吾;
二曰參胡;
三曰彭祖;
四曰會人;
五曰曹姓;
六曰季連,羋姓,楚其後也。
맏이는 昆吾,
둘째는 參胡,
셋째는 彭祖,
넷째는 會人,
다섯째는 曹姓이라 하였다.
여섯째는 季連인데 성을 羋라 했고, 楚는 그의 후손이다.

▶ 陸終: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로 楚의 선조 불의 신인 吳回의 아들이다.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장남은 昆吾, 둘째는 參胡이고, 셋째는 彭祖, 넷째는 會人, 다섯째는 曹氏姓의 시조이고, 막내는 季連으로 羋氏姓의 시조이다. 여섯 명은 모두 후손이 있어 그 후손들이 각각 나뉘어 여러 姓이 되었다.
▶ 坼剖: 난산하다. 배를 갈라 낳다.
▶ 季連: 상고시대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 楚의 선조. 吴回의 손자이며 육종의 여섯째 아들이다.
▶ 羋(미): 羋姓. 춘추시대 楚의 선조 가문의 姓으로 계련이 羋姓의 시조이다.


昆吾氏,夏之時嘗為侯伯,桀之時湯滅之。
곤오씨는 夏나라 시대에 侯伯을 지낸 적이 있고, 桀왕 때 湯왕이 멸망시켰다.
彭祖氏,殷之時嘗為侯伯,殷之末世滅彭祖氏。
팽조씨는 殷나라 시대에 侯伯을 지낸 적이 있고, 은나라 말기에 멸망하였다.
季連生附沮,附沮生穴熊。
계련은 附沮를 낳았고, 부저는 穴熊을 낳았다.
其後中微,或在中國,或在蠻夷,弗能紀其世。
그 뒤 중도에 쇠약해져 중원에 살기도 하고, 蠻夷에 살기도 했는데 史書에는 그 世系를 기록할 수 없다.

▶ 昆吾: 육종의 맏아들. 夏나라 때 昆吾는 제후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은나라를 거치면서 곤오의 후손은 알려진 것이 없다. 처음 姓이 己氏였으며 그 뒤에 蘇氏‧顧氏‧溫氏‧董氏가 되었다.
▶ 中微: 도중에 쇠해지다.
▶ 中國: 中原을 말한다.
▶ 蠻夷: 고대에 中原밖의 소수 민족을 중원 사람들에 비하여 만이라고 칭하였다.
▶ 紀: 記와 통용된다.
▶ 世: 世系. 조상으로부터의 代代의 系統.


周文王之時,季連之苗裔曰鬻熊。
周文王 때, 季連의 후예를 鬻熊이라 하였다.
鬻熊子事文王,蚤卒。
육웅은 자식의 예로 문왕을 섬겼으나 일찍 죽었다.
其子曰熊麗。
그의 아들은 熊麗라 하였다.
熊麗生熊狂,熊狂生熊繹。
웅려는 熊狂을 낳았으며, 웅광은 熊繹을 낳았다.
熊繹當周成王之時,舉文、武勤勞之後嗣,而封熊繹於楚蠻,封以子男之田,姓羋氏,居丹陽。
웅역은 周成王 때에 해당하는데, 문왕과 무왕 때 애썼던 유공자의 후손을 뽑아, 웅역을 楚蠻에 봉하고 자작과 남작에 해당하는 땅에 봉하니, 성을 羋라 하고 丹陽에 살았다.
楚子熊繹與魯公伯禽、衛康叔子牟、晉侯燮、齊太公子呂伋俱事成王。
楚의 웅역은 魯公 伯禽, 衛康叔의 아들 牟, 晉侯 燮, 齊太公의 아들 呂伋과 함께 성왕을 섬겼다.

▶ 鬻熊: 鬻子. 芈姓,이름은 熊이며 鬻熊子라고도 한다. 楚의 개국 군주 웅역의 증조부이다. 周나라 때 사람으로 楚의 선조이며 나이 아흔에 도를 깨달아 周文王의 스승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그가 남긴 말을 모아 만든 <鬻子> 1권이 전한다.
▶ 蚤: 早와 통용된다.
▶ 熊繹: 西周때 楚의 先祖로 鬻熊의 증손이고, 熊狂의 아들이다. 周成王에 의해 처음으로 楚의 제1대 군주가 되었다.
▶ 子男: 자작과 남작의 爵号. 고대 제후의 작위를 公 · 侯 · 伯 · 子 · 男의 다섯 등급으로 나누어 천자와 諸侯, 또 제후와 卿 및 大夫 계층을 구분하였다.


熊繹生熊艾,熊艾生熊亶,熊亶生熊勝。
웅역은 熊艾를 낳고, 웅애는 웅단을 낳고, 웅단은 熊勝을 낳았다.
熊勝以弟熊楊為後。
웅승은 동생 熊楊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였다.
熊楊生熊渠。
웅양은 熊渠를 낳았다.

▶ 熊亶: 다른 기록에는 熊䵣 또는 熊黵으로 기록되어 있다.
▶ 熊渠: 楚의 제6대 군주로 웅양의 아들이다.

熊渠生子三人。
熊渠는 아들 셋을 낳았다.
當周夷王之時,王室微,諸侯或不朝,相伐。
周夷王 때 왕실이 쇠미해지자 조회하지 않는 제후도 있었으며 서로 공격하였다.
熊渠甚得江漢閒民和,乃興兵伐庸、楊蠆,至于鄂。
웅거는 長江과 漢水 일대 백성들과 화목하였고, 병사를 일으켜 庸과 楊蠆을 공격하여 鄂땅에까지 이르렀다.

▶ 熊渠: 楚의 제6대 군주이다. 웅양의 아들이다. 아들인 웅무강이 뒤를 이었으나 웅무강이 일찍 죽어서 웅무강의 동생인 웅지홍이 뒤를 이었다.
▶ 三人: 원문에는 ‘三年’으로 기록되어 있어 오류로 보아 삼인으로 수정하였다. 삼인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도 있다.
▶ 周夷王: 西周의 왕으로 성은 姬씨고, 이름은 燮이다. 懿王의 아들이다. 의왕이 죽자 叔孝가 왕이 되었는데, 그가 죽자 諸侯들이 왕으로 세웠다.
▶ 微: 쇠락하다.
▶ 楊蠆: 楊粤. 南越(: 南粵)로도 표기한다. 지금의 廣東‧廣西 일대이다.
▶ 鄂: 楚, 荆楚로 지금의 湖北省.


熊渠曰:
「我蠻夷也,不與中國之號謚。」
웅거가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蠻夷이니, 중원의 명칭 · 시호를 따르지 않겠다. ”
乃立其長子康為句亶王,中子紅為鄂王,少子執疵為越章王,皆在江上楚蠻之地。
이에 맏아들 康을 句亶王에, 가운데 아들 紅을 鄂王에, 막내아들 執疵를 越章王으로 세우고, 모두가 장강 연안의 楚蠻지역에 살았다.
及周厲王之時,暴虐,熊渠畏其伐楚,亦去其王。
周厲王 때에 이르러 주여왕이 포학하자, 웅거는 楚를 토벌할까 두려워하여 王號를 없앴다.

▶ 與: 따르다. 좇다
▶ 謚: 諡號. 제왕 등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칭송하여 追贈하는 칭호.
▶ 周厲王: 춘추시대 周나라의 군주로 성은 姬씨고, 이름은 胡다. 夷王의 아들이고, 周穆王의 4대손이다. 포학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오만한 성격이라 諸侯는 조회하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화가 난 백성이 들고일어나 공격하니 彘로 달아났다. 14년 뒤 체에서 죽었다.
▶ 去: 제거하다.

後為熊毋康,毋康蚤死。
웅거의 후계자 熊毋康은 일찍 죽었다.
熊渠卒,子熊摯紅立。
웅거가 죽자 둘째 아들 熊摯紅이 즉위하였다.
摯紅卒,其弟弒而代立,曰熊延。
지홍이 죽자 웅거의 동생이 지홍의 아들을 시해하고 자신이 즉위하니 熊延이다.
熊延生熊勇。
웅연은 熊勇을 낳았다.

▶ 熊毋康: 웅거의 아들이다. 일찍 죽어 웅거의 뒤를 잇지 못했고, 동생인 웅지홍이 웅거의 뒤를 이었다.
▶ 熊摯紅: 楚의 제7대 군주이다. 웅거의 아들이고, 웅무강의 동생이자 웅연의 형이다. 웅무강이 일찍 죽어서 웅거의 뒤를 이었다. 웅지홍이 죽자 동생인 웅연이 웅지홍의 아들을 죽이고 뒤를 이었다.

熊勇六年,而周人作亂,攻厲王,厲王出奔彘。
웅용6년(기원전841년)에 주나라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周厲王을 공격하자 여왕은 彘로 달아났다.
熊勇十年,卒,弟熊嚴為後。
웅용10년(기원전837년)에 웅용이 죽고 동생 熊嚴이 계승하였다.

▶ 熊嚴: 楚의 제10대 군주. 웅연의 아들이고 웅용의 동생이다. 웅용이 죽자 뒤를 이었고, 웅엄이 죽자 아들인 웅상이 뒤를 이었다.

熊嚴十年,卒。
웅엄이 재위10년(기원전828년) 만에 죽었다.
有子四人,長子伯霜,中子仲雪,次子叔堪,少子季徇。
웅엄에게는 아들 넷이 있었는데, 맏아들은 伯霜, 둘째 아들은 仲雪, 셋째 아들은 叔堪, 막내아들은 季徇이었다.
熊嚴卒,長子伯霜代立,是為熊霜。
웅엄이 죽자 맏아들 伯霜이 즉위하니 그가 熊霜이다.

▶ 熊霜: 楚의 제11대 군주. 웅엄의 아들이고 웅순의 형이다. 웅엄이 죽자 뒤를 이었고, 웅상이 죽자 웅순이 뒤를 이었다.

熊霜元年,周宣王初立。
熊霜원년(기원전827년)에 周宣王이 새로 즉위하였다.
熊霜六年,卒,三弟爭立。
웅상6년(기원전822년)에 웅상이 죽자 세 명의 동생들이 서로 자리에 오르려고 다투었다.
仲雪死;叔堪亡,避難於濮;而少弟季徇立,是為熊徇。
仲雪이 죽고 叔堪은 濮으로 난을 피해 망명하였고 막내 동생 季徇이 즉위하니 그가 熊徇이다.
熊徇十六年,鄭桓公初封於鄭。
웅순16년(기원전806년)에 鄭桓公이 처음으로 鄭에 봉해졌다.
二十二年,熊徇卒,子熊咢立。
웅순22년(기원전800년)에 웅순이 죽고, 아들 熊咢이 즉위하였다.
熊咢九年,卒,子熊儀立,是為若敖。
웅악이 재위9년(기원전791년) 만에 죽고, 아들 熊儀가 즉위하니 그가 若敖이다.

▶ 周宣王: 西周의 군주로 성은 姬씨고, 이름은 靜, 靖이며, 厲王의 아들이다. 여왕이 나라 사람들에 의해 쫓겨났을 때 召公의 虎家에 숨어 있었다. 여왕이 죽자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 鄭桓公: 西周말기 鄭의 군주로, 이름은 友이다. 周厲王의 아들이고, 宣王의 庶弟다. 처음으로 鄭에 봉해졌다. 周幽王이 失德하여 제후 여럿이 반란을 일으키자 정환공은 그 백성들을 鄶와 東虢사이로 옮겨 鄭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若敖二十年,周幽王為犬戎所弒,周東徙,而秦襄公始列為諸侯。
약오20년(기원전771년)에 周幽王이 犬戎에게 시해되어 주나라는 동쪽으로 천도하였으며, 秦襄公이 제후 반열에 올랐다.

▶ 若敖: 楚 若敖. 楚의 제14대 군주로 이름은 儀이다. 웅악의 아들이다. 아들인 熊坎霄敖가 뒤를 이었다.
▶ 周幽王: 주나라의 12대 왕.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사기 권04. 주본기>
▶ 周東徙: 주나라는 犬戎에 의해 수도 鎬京이 함락되고, 洛邑으로 遷都하게 되어 西周시대가 끝나고 東周시대가 이어지게 되었다.
▶ 秦襄公始列為諸侯: 秦襄公 7년 西戎과 犬戎이 申侯와 함께 周王室을 공격하여 酈山아래에서 幽王을 살해하자 西周가 멸망하고 말았다. 양공이 軍隊를 이끌고 주나라를 구하고 平王을 호송해 東遷하는 데 공을 세워 주나라에서 秦岐 서쪽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秦이 附庸國에서 제후국이 되었다. <사기 권05. 秦本紀>

 

二十七年,若敖卒,子熊坎立,是為霄敖。
약오27년(기원전764년)에 약오가 죽고, 아들 熊坎이 즉위하니 그가 霄敖이다.
霄敖六年,卒,子熊眴立,是為蚡冒。
소오가 재위6년(기원전758년) 만에 죽고, 아들 熊眴이 즉위하니 그가 蚡冒이다.
蚡冒十三年,晉始亂,以曲沃之故。
분모13년(기원전745년)에 晉에 난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曲沃 때문이었다.
蚡冒十七年,卒。
분모가 재위17년(기원전741년) 만에 죽었다.
蚡冒弟熊通弒蚡冒子而代立,是為楚武王。
분모의 동생 熊通이 분모의 아들을 시해하고 즉위하니 그가 楚武王이다.

▶ 霄敖: 楚霄敖. 楚霄王, 楚王坎이라고도 한다. 芈姓, 熊氏, 이름은 坎이다. 若敖의 장남이다. 춘추시대 楚의 15대 군주이며 6년간 재위하였다.
▶ 蚡冒: 楚 蚡冒. 楚厲王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楚의 제16대 군주로 이름은 眴이다. 시호는 厲王이며, 霄敖의 아들이다. 17년간 재위하였다.
분모가 죽자 분모의 동생인 웅통이 분모의 아들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 曲沃: 晉昭侯원년(기원전745년)에 문후의 동생 成師를 曲沃에 봉하였다. 곡옥의 城邑이 晉의 도읍인 翼城보다 커졌다. 成師는 곡옥에 봉해져 桓叔으로 불렸다. 소후7년(기원전739년), 晉의 대신 潘父가 그의 군주 昭侯를 시해하고, 곡옥 환숙을 맞아들였다. <사기 세가39. 晉世家>
▶ 熊通: 楚武王. 姓은 羋, 氏는 熊, 이름은 通이다. 熊儀의 손자이자 熊坎의 차남이고, 熊旬의 아우이다. 웅통은 그 형 웅순의 아들을 죽이고 자립하여 楚의 군주가 되었다.

武王十七年,晉之曲沃莊伯弒主國晉孝侯。
무왕17년(기원전724년), 晉 曲沃莊白이 종주국의 군주인 晉 孝侯를 시해하였다.
十九年,鄭伯弟段作亂。
무왕19년(기원전722년), 鄭伯의 동생 段이 난을 일으켰다.
二十一年,鄭侵天子之田。
무왕21년(기원전720년), 鄭이 천자의 밭을 침범하였다.
二十三年,衛弒其君桓公。
무왕23년(기원전718년), 衛가 그들의 군주 桓公을 시해하였다.
二十九年,魯弒其君隱公。
무왕29년(기원전712년), 魯가 그들의 군주 隱公을 시해하였다.
三十一年,宋太宰華督弒其君殤公。
무왕31년(기원전710년), 宋의 太宰 華督이 그의 군주 殤公을 시해하였다.

▶ 曲沃莊伯: 晉文侯의 동생인 桓叔 成師의 아들로 이름은 鱓이다. 부친 환숙이 文侯 아들이자 조카인 昭侯에게서 曲沃땅을 분봉받아 영주가 되자 후에 그 자리를 계승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晉 공실을 사실상 능가하는 실력자로 성장하였다. 곡옥을 분봉해준 후 晉 公室은 도읍 絳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국호를 翼으로 개명함으로써, 晉은 환숙 가문이 영유한 곡옥과 공실이 영유한 翼으로 이분되었다. 孝侯 15년(기원전724년)에 효후를 시해했으나 翼의 都邑人들이 장백을 공격해 곡옥으로 쫓아버린 뒤 효후의 아들 郄을 鄂侯로 옹립하였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鄭伯弟段: 鄭伯의 아우 段. 鄭武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寤生이다. 鄭莊公의 동복아우로 어머니 武姜이 莊公을 미워하고 段을 편애하여 武公에게 段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무공이 허락하지 않았다. 莊公이 즉위하자 장공과의 불화가 심해져 段이 마침내 반란을 획책하고 도성을 기습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장공은 鄢땅을 공격하여 마침내 段을 죽였다. <春秋左氏傳 魯隱公 元年>
▶ 鄭侵天子之田: 노은공3년(기원전720년) 4월에 鄭의 祭足이 軍隊를 이끌고 가서 溫에 침입하여 보리를 취하고, 가을에 또 成周에 침입해 벼를 취하니, 주나라와 鄭이 서로 미워하였다. <춘추좌씨전魯隱公3기원전720년>
▶ 衛殺其君州吁: 州吁는 衛의 14대 군주로, 莊公의 아들이자 衛桓公의 동생이다. 위환공16년(기원전719)봄, 주우는 위나라의 도망자들과 함께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위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주우는 측근 石厚와 함께 陳에 붙잡혀 濮땅에서 처형되었다. <사기 세가 권37. 衛康叔世家>
▶ 魯弒其君隱公: 隱公은 魯의 제14대 군주로 이름은 息姑이다. 노혜공의 서장자로 어머니는 聲子이며, 혜공이 죽자 태자인 아우 윤의 나이가 어려 魯 사람들에게 옹립되어 섭정하였다. 은공이 鍾巫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社圃에서 재계한 다음 蔿氏집에 머물렀다. 공자휘가 사람을 위씨 집으로 보내 은공을 살해하고, 태자 윤을 군주로 옹립하니 그가 魯桓公이다. <춘추좌씨전魯隱公11기원전712년>
▶ 太宰華督: 華父督. 춘추시대 宋戴公의 손자이다. 太宰가 되었다. 宋殤公 10년 大夫 孔父嘉를 살해한 뒤 그 아내를 취하였다. 다시 殤公을 시해한 뒤 鄭에 있던 공자 公子 馮을 데려다 宋莊公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閔公때 대부 南宮萬에게 살해당하였다.<[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三十五年,楚伐隨。
무왕35년(기원전706년)에 楚가 隨를 공격였다.
隨曰:
「我無罪。」
隨군주가 말하였다.
“우리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
楚曰:
「我蠻夷也。
今諸侯皆為叛相侵,或相殺。
我有敝甲,欲以觀中國之政,請王室尊吾號。」
초왕이 말하였다.
“우리는 만이 지역에 있다.
지금 제후들이 모두 배반하여 서로를 침략하거나 죽이고 있다.
내가 가진 軍으로 중원의 정치에 참여하여 주왕실에 나의 호칭을 높여달라고 요청할 터이다. ”
隨人為之周,請尊楚,王室不聽,還報楚。
隨군주가 주나라로 가서 楚를 높여 줄 것을 청했으나 주왕실이 듣지 않았으므로 돌아와 楚에 보고하였다.

▶ 隨: 隨. 姬姓의 나라로 侯爵이다. 지금의 義陽隨縣이다.
▶ 敝甲:軍.


三十七年,楚熊通怒曰:
「吾先鬻熊,文王之師也,蚤終。
成王舉我先公,乃以子男田令居楚,蠻夷皆率服,而王不加位,我自尊耳。」
무왕37년(기원전704년)에 楚의 熊通(:초무왕)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우리 선조 鬻熊은 문왕의 스승으로 일찍 돌아가셨다.
周成王은 내 선조를 추천하여 자작과 남작의 대우로 땅을 하사하고 초 땅에 살게 하여 蠻夷가 모두 복종했는데, 주왕이 작위를 더해주지 않으니 내 스스로 높일 터이다. ”
乃自立為武王,與隨人盟而去。
그리고는 스스로 즉위하여 武王이라 칭하고 隨군주와 맹약하고 돌아갔다.
於是始開濮地而有之。
이렇게 해서 濮땅을 개척하여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 子男田: 子爵과 男爵의 爵號에 해당하는 땅.
▶ 率服: 복종하다.

五十一年,周召隨侯,數以立楚為王。
무왕51년(기원전690년)에 주나라가 隨侯를 불러 楚가 稱王함을 나무랐다.
楚怒,以隨背己,伐隨。
楚가 노하여 隨가 배반했다고 여겨 隨를 공격하였다.
武王卒師中而兵罷。
무왕이 출병 중에 죽자 軍隊를 철수하였다.
子文王熊貲立,始都郢。
아들 文王 熊貲가 즉위하여 처음으로 郢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 數: 책망하다.
▶ 始都郢: 문왕이 丹陽에서 郢으로 천도하였다. 郢은 지금의 湖北省 江陵縣 부근이다.
▶ 文王熊貲: 楚의 18대 군주로 武王 熊通의 아들로 이름은 熊貲이다. 무왕의 뒤를 이어 내치에 공을 세웠으나 息 제후의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식을 멸하고 그를 사주한 蔡의 哀侯를 포획하였다. 郢에 도읍한 후 북진을 추진하여 漢水 일대 소국들을 점령해 長江 이북의 넓은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증손 楚莊王이 패업을 달성하는 기초를 마련하였다.

 


文王二年,伐申過鄧,鄧人曰
「楚王易取」,
鄧侯不許也。
문왕2년(기원전688년)에 申을 공격하고 鄧을 지나는데 鄧 사람들이
“초왕을 쉽게 잡을 수 있습니다. ”
라 했으나 鄧侯가 허락하지 않았다.
六年,伐蔡,虜蔡哀侯以歸,已而釋之。
문왕6년(기원전684년)에 蔡를 공격하여 蔡哀侯를 잡아 돌아와서 얼마 뒤 풀어주었다.
楚彊,陵江漢閒小國,小國皆畏之。
楚가 강성하여 장강과 한수 사이의 小國을 괴롭히니, 小國들이 모두 楚를 두려워하였다.
十一年,齊桓公始霸,楚亦始大。
문왕11년(기원전679년)에 齊桓公이 처음으로 패주가 되고, 楚 역시 커지기 시작하였다.

▶ 申: 주선왕 때 봉해진 姜姓의 제후국.
▶ 鄧: 은나라, 서주, 춘추시대 때 존재했던 제후국. 성씨는 曼이다. 은나라의 武丁이 그의 숙부 등후를 봉하여 鄧이 세워졌다.
▶ 鄧侯: 춘추시대 鄧의 제후. 조카인 楚文王에게 멸망하였다.
鄧 군주인 鄧祁侯는 楚문왕의 외삼촌이었다. 기원전688년에 초문왕은 鄧을 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申를 먼저 공격한 뒤, 등에 가자 당시 鄧의 騅甥, 聃甥, 養甥 세 대신은 鄧이 楚에 이웃하여서 멸망시키기에 편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등기후에게 초문왕을 죽이라고 간하며
“鄧을 멸망시킬 자는 바로 이 사람인데 만약 일찍이 도모하지 않는다면 이후에 임금께서는 후회한다 하여도 어찌 다시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으나 등기후는 듣지 않았다. 이후 초문왕은 鄧을 경유하여 신을 습격해 힘을 쓸 수 없게 했고, 軍隊를 돌려 鄧을 공격하였다. 기원전678년에 鄧은 楚에게 멸망하였다.
▶ 伐蔡: 楚가 莘에서 蔡軍을 패배시키고 蔡侯獻舞를 데리고 돌아왔다.


十二年,伐鄧,滅之。
문왕12년(기원전678년)에 鄧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十三年,卒,子熊艱立,是為莊敖。
문왕13년(기원전677년)에 문왕이 죽고, 아들 熊艱이 즉위하니 그가 莊敖이다.
莊敖五年,欲殺其弟熊惲,惲奔隨,與隨襲弒莊敖代立,是為成王。
장오5년(기원전672년)에 장오의 동생 熊惲을 죽이려 하자, 운은 隨로 달아나서 隨와 함께 장오를 습격하여 죽이고 즉위하니 그가 成王이다.

▶ 莊敖: 楚 堵敖. 楚의 제19대 군주로 이름은 囏이다. 시호가 <춘추좌씨전>과 <楚辭> <天問>에는 堵敖, <사기>에는 熊艱莊敖로 나와 있다. 문왕의 아들이자 성왕의 형이다. 재위 시에 문왕의 정책을 이어 계속 부국강병을 꾀했으며, 중원의 국가들과 천하를 쟁탈하였다.
▶ 奔: 도망하다.
▶ 成王: 楚成王. 楚의 제20대 군주로 이름은 惲이다. 초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楚堵敖가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해서 죽이고 즉위하였다. 즉위한 초에 안으로는 덕정을 베풀었고, 밖으로는 諸侯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남쪽으로 국토 1천 리를 개척하였다. 여러 차례 軍隊를 이끌고 中原으로 가 齊와 패권을 다투었다.

成王惲元年,初即位,布德施惠,結舊好於諸侯。
成王 惲 원년(기원전671년), 성왕은 즉위하자 덕과 은혜를 베풀며 제후들과 예전의 우호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使人獻天子,天子賜胙,曰:
「鎮爾南方夷越之亂,無侵中國。」
사람을 보내 천자에게 예물을 올리자 천자는 제사 고기를 내리면서 말하였다.
“너희 남쪽 夷越지역의 난을 진압하여 중원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라. ”
於是楚地千里。
이에 楚의 땅은 사방 천리가 되었다.

▶ 成王惲: 楚成王. 楚의 제20대 군주로 이름은 惲이다. 초문왕의 차남으로, 형인 楚堵敖가 사냥을 나갔을 때 습격해서 죽이고 즉위하였다. 즉위한 초에 안으로는 덕정을 베풀었고, 밖으로는 諸侯들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남쪽으로 국토 1천 리를 개척하였다. 여러 차례 軍隊를 이끌고 中原으로 가 齊와 패권을 다투었다. 말년에 태자 商臣을 폐하고 소실 소생인 職을 태자로 삼으려 하여 상신이 반란을 일으켜 성왕은 자살하였고, 商臣이 제위에 올라 穆王이 되었다.
▶ 胙: 제사를 지낸 고기.
▶ 爾: 너. 그대.


十六年,齊桓公以兵侵楚,至陘山。
성왕16년(기원전656년)에 齊桓公이 군대를 이끌고 楚를 침범하여 陘山에 이르렀다.
楚成王使將軍屈完以兵御之,與桓公盟。
楚성왕은 장군 屈完에게 軍隊를 이끌고 막게 하고 제환공과 맹약을 맺었다.
桓公數以周之賦不入王室,楚許之,乃去。
제환공은 주나라가 부과한 공물을 楚가 왕실에 보내지 않았음을 나무랐으며, 楚가 이를 받아들이자 곧 물러났다.

▶ 齊桓公以兵侵楚: 제환공 30년(기원전656년), 제환공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蔡를 정벌하니 蔡가 대패하였다. 이어 楚를 정벌하였다.<[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屈完: 楚의 장군.
▶ 數: 책망하다.


十八年,成王以兵北伐許,許君肉袒謝,乃釋之。
성왕18년(기원전654년)에 성왕은 軍隊를 이끌고 북쪽 許를 공격하고, 許의 군주가 肉袒하고 사죄하자 곧 풀어주었다.
二十二年,伐黃。
성왕22년(기원전650년)에 黃을 공격하였다.
二十六年,滅英。
성왕26년(기원전646년)에 英을 멸망시켰다.

▶ 許: 서주 초기 周成王이 許文叔을 許땅에 봉하여 세워진 제후국으로 姜姓이며 작위는 男爵이다.
▶ 肉袒: 웃통을 벗어 상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복종, 사죄 등의 뜻을 나타낸다.

三十三年,宋襄公欲為盟會,召楚。
성왕33년(기원전639년), 宋襄公이 회맹을 하고자 楚를 불렀다.
楚王怒曰:
「召我,我將好往襲辱之。」
초왕이 화가 나서 말하였다.
“나를 부르다니, 내가 우호적으로 가서 기습하여 모욕을 줄 터이다. ”
遂行,至盂,遂執辱宋公,已而歸之。
이에 출병하여 盂에 이르러 宋양공을 붙잡아 모욕을 준 다음 얼마 후 돌려보냈다.
三十四年,鄭文公南朝楚。
성왕34년(기원전638년), 鄭文公이 남쪽의 초에 조회하였다.
楚成王北伐宋,敗之泓,射傷宋襄公,襄公遂病創死。
楚성왕이 북쪽으로 宋을 공격하여 泓水에서 패배시키고, 宋양공에게 활을 쏘아 부상을 입히니 송양공은 결국 創傷을 앓다가 죽었다.

▶ 宋襄公: 춘추시대 宋의 군주. 기원전638년 송양공은 적은 병력으로 楚와 싸웠는데, 楚의 軍隊가 泓水를 반쯤 건넜을 때 司馬인 子魚(:목이)가 공격하기를 청했으나, 양공은 正道가 아니라 하여 듣지 않았으며, 楚軍이 홍수를 건너고 나서 미처 대열을 정리하기 전에 다시 공격하자고 청했으나 역시 듣지 않다가, 楚의 軍대가 대열을 갖추기를 기다려 싸웠으나 부상하고 크게 패하였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 양공14년(기원전637년) 여름에 양공이 泓水의 부상 때문에 결국 죽었다.<[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 襲辱之: 습격해 송양공을 욕보이다.
▶ 泓: 泓水. 지금의 河南 柘城縣 서북쪽.
▶ 創: 상처. 송양공은 화살을 맞고 넓적다리에 상처를 입었었다.


三十五年,晉公子重耳過楚,成王以諸侯客禮饗,而厚送之於秦。
성왕35년(기원전637년), 晉 공자 重耳가 楚를 지남에, 성왕은 제후와 客卿의 예로 대접하고 후한 예물을 딸려 秦으로 보냈다.

▶ 晉公子重耳: 晉文公.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의 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晉을 떠나 翟으로 망명하였다.
19년간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軍隊를 이끌고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망명생활 중에 楚成王이 周나라의 예법으로 중이에게 연향을 베푸니 뜰 안에 진설한 예물이 백 가지로 많았다. <國語晉語>

三十九年,魯僖公來請兵以伐齊,楚使申侯將兵伐齊,取穀,置齊桓公子雍焉。
성왕39년(기원전633년)에 魯僖公이 와서 軍隊를 내어 齊를 정벌해달라고 요청하자 楚는 申侯에게 軍隊를 거느리고 齊를 정벌하게 하여 穀邑을 빼앗고, 齊환공의 아들 姜雍을 그곳에 배치하였다.
齊桓公七子皆奔楚,楚盡以為上大夫。
齊환공의 일곱 아들이 모두 楚로 도망쳐 오자, 楚는 그들 모두를 상대부로 삼았다.
滅夔,夔不祀祝融、鬻熊故也。
夔를 멸망시켰는데, 夔가 祝融과 鬻熊의 제사를 모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穀: 谷(: 齊의 땅)
▶ 置: 배치하다.
▶ 夔: 楚의 부용국.

夏,伐宋,宋告急於晉,晉救宋,成王罷歸。
여름에 楚가 宋을 공격하자 宋이 晉에 위급함을 알렸고, 晉이 宋을 구원하러 나서자 성왕은 철군하려 하였다.
將軍子玉請戰,成王曰:
「重耳亡居外久,卒得反國,天之所開,不可當。」
장군 子玉이 싸울 것을 청하자 성왕이 말하였다.
“重耳가 오랫동안 외지에서 망명하다가 끝내 晉으로 돌아간 것은 하늘이 도우신 것이라 當敵할 수 없다. ”
子玉固請,乃與之少師而去。
자옥이 한사코 요청하자 小軍을 주어 보냈다.
晉果敗子玉於城濮。
晉이 과연 城濮에서 자옥을 물리쳤다.
成王怒,誅子玉。
성왕이 노하여 자옥을 죽였다.

▶ 子玉: 楚의 令尹成得臣. 楚成王에게 공자 重耳를 죽이라고 간하였었다.[史記世家]권39. 晉世家
▶ 重耳: 춘추전국시대 제후국인 晋獻公의 둘째 아들이다. 헌공의 후처로 들어온 驪姬의 계략에 빠져 형인 申生이 사망하고 자신은 晉을 떠나 翟로 망명하였다. 19년간 긴 망명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秦의 도움으로 軍隊를 이끌고 귀국하여 晉文公에 올랐다.
▶ 當: 擋과 같다. 막다.
▶ 少師: 적은 수의 軍.


四十六年,初,成王將以商臣為太子,語令尹子上。
성왕46년(기원전626년)에 당초 성왕은 商臣을 태자로 삼으려고 令尹 子上에게 의견을 물었다.
子上曰:
「君之齒未也,而又多內寵,絀乃亂也。
楚國之舉常在少者。
且商臣蜂目而豺聲,忍人也,不可立也。」
자상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아직 젊고 궁중에 총애하는 처첩도 많으신데 그를 태자로 세웠다가 폐출하면 난이 일어날 터입니다.
楚는 태자로 세워진 분은 늘 나이가 어린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상신은 벌의 눈과 승냥이의 목소리를 가져 잔인한 사람이니, 세워서는 안 됩니다.

▶ 商臣: 楚穆王.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商臣이며, 成王의 아들이다. 태자로 있을 때 폐위될까 두려워 宮衛兵으로 아버지인 성왕을 포위하여 자살하게 한 뒤 군주에 올랐다.
▶ 令尹子上: 斗勃. 字는 子上. 若敖氏의 후예이다. 초성왕 때 영윤이었다.
▶ 齒未也: 나이가 어리다. 齒는 나이. 아직 젊다는 말이다
▶ 絀: 폐출하다.
▶ 忍人: 잔인하게 不義를 행할 것이라는 뜻이다.
▶ 豺: 승냥이.


王不聽,立之。
왕이 듣지 않고 상신을 태자로 세웠다.
後又欲立子職而絀太子商臣。
그 후 다시 왕자 職을 태자로 세우고 상신을 태자에서 폐출하고자 하였다.
商臣聞而未審也,告其傅潘崇曰:
「何以得其實?」
상신이 이 소문을 듣고 미심쩍어서 태자의 사부 潘崇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崇曰:
「饗王之寵姬江羋而勿敬也。」
반숭이 대답하였다.
“왕의 寵姬 江羋를 식사에 초대하여 불경스럽게 대하십시오. ”
商臣從之。
상신이 그의 말을 따랐다.
江羋怒曰:
「宜乎 王之欲殺若而立職也。」
江羋가 화가 나서 말하였다.
“왕께서 너를 죽이고 職을 세우시려 함이 당연하구나!”

▶ 傅: 태자의 스승.
▶ 潘崇: 태자 상신의 스승.
▶ 江羋: 成王의 누이로 江으로 출가하였다.
▶ 若: 너.


商臣告潘崇曰:
「信矣。」
상신이 반숭에게 말하였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
崇曰:
「能事之乎?」
반숭이 물었다.
“職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曰:
「不能。」
상신이 대답하였다.
“못합니다. ”
「能亡去乎?」
반숭이 물었다.
“망명하실 수는 있겠습니까?”
曰:
「不能。」
상신이 말하였다.
“못합니다. ”
「能行大事乎?」
반숭이 말하였다.
“큰일을 일으킬 수는 있겠습니까?”
曰:
「能。」
상신이 말하였다.
“할 수 있습니다. ”
冬十月,商臣以宮衛兵圍成王。
겨울10월에 상신이 궁중의 衛兵을 이끌고 성왕을 포위하였다.
成王請食熊蹯而死,不聽。
성왕이 곰발바닥 요리를 먹고 죽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丁未,成王自絞殺。
정미일, 성왕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商臣代立,是為穆王。
상신이 즉위하니 그가 穆王이다.

▶ 熊蹯: 곰 발바닥.
▶ 穆王: 楚穆王. 楚의 제21대 군주로 이름은 商臣, 초 성왕의 장남이다. 투발을 참소한 사건을 계기로 부왕의 미움을 받게 되어 이복동생 職에게 세자위를 빼앗길 지경이 되자 사부 潘崇의 계책으로 선수를 쳐 부왕을 시해한 후 즉위하였다. 즉위 후 江·六·蓼 등 중원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위치한 淮水유역 소국들을 차례로 정벌하여 중원 제후들을 위협하는 한편, 중원의 陳, 鄭 등을 침입하여 楚의 영역과 세력 범위를 더욱 넓혔다.


穆王立,以其太子宮予潘崇,使為太師,掌國事。
목왕이 즉위하여 태자궁을 반숭에게 주고 太師로 삼아 국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穆王三年,滅江。
목왕3년에 江을 멸망시켰다.
四年,滅六、蓼。
목왕4년(기원전622년)에 六과 蓼를 멸망시켰다.
六、蓼,皋陶之後。
육과 요는 皐陶의 후예이다.
八年,伐陳。
목왕8년(기원전618년)에 陳을 침공하였다.
十二年,卒。子莊王侶立。
목왕12년(기원전614년)에 목왕이 죽고, 아들 莊王熊侶가 즉위하였다.

▶ 江: 은나라에서 춘추시대까지 하남 일대에 세워진 제후국이다.
▶ 皋陶: 순임금 때 형옥을 관장하던 관리. 帝禹가 즉위한 후에 고요를 등용하여 하늘에 추천하여 정권을 맡기려 했으나 고요가 죽었다. 고요의 후손을 英과 六 또는 許에 봉하였다.[史記本紀]권02. 夏本紀


莊王即位三年,不出號令,日夜為樂,令國中曰:
「有敢諫者死無赦!」
장왕이 즉위하고 3년 동안 號令도 내리지 않고 밤낮으로 향락에 젖어 국내에 명령하였다.
“감히 간하는 자는 죽이고 용서하지 않겠다!”
伍舉入諫。
伍擧가 들어가 간하였다.
莊王左抱鄭姬,右抱越女,坐鐘鼓之閒。
장왕은 왼팔로는 鄭姬를 껴안고 오른팔로는 越女를 껴안은 채 종과 북 사이에 앉아 있었다.
伍舉曰:
「願有進隱。」
오거가 말하였다.
“제가 수수께끼를 내고자 합니다. ”
曰:
「有鳥在於阜,三年不蜚不鳴,是何鳥也?」
오거가 말하였다.
“어떤 새가 언덕에 앉아 있는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니, 무슨 새입니까?”
莊王曰:
「三年不蜚,蜚將沖天;三年不鳴,鳴將驚人。
舉退矣,吾知之矣。」
장왕이 말하였다.
“3년 동안 날지 않았으니 날았다 하면 하늘을 뚫고 오를 터이고, 3년 동안 울지 않았으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터이다.
오거는 물러가라, 내가 무슨 말인지 알았노라. ”

▶ 隱: 隱語. 수수께끼.
▶ 阜: 언덕.
▶ 蜚: 飛와 같다.


居數月,淫益甚。
몇 달이 지났지만 음란함이 더 심해졌다.
大夫蘇從乃入諫。
대부 蘇從이 들어와서 간하였다.
王曰:
「若不聞令乎?」
장왕이 말하였다.
“그대는 내 명령을 듣지 못했는가?”
對曰:
「殺身以明君,臣之願也。」
소종이 대답하였다.
“이 몸이 죽어 군주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신의 소원이옵니다. ”
於是乃罷淫樂,聽政,所誅者數百人,所進者數百人,任伍舉、蘇從以政,國人大說。
이에 음탕함과 쾌락을 물리치고 정사를 보기 시작하니 죽임을 당한 자가 수백이요, 기용된 자도 수백이었으며, 오거와 소종을 임용하여 국정을 맡기니 국인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是歲滅庸。
이 해에 庸을 멸망시켰다.
六年,伐宋,獲五百乘。
장왕6년(기원전608년)에 宋을 침공하여 전차 500승을 획득하였다.

▶ 蘇從: 춘추시대 楚의 大夫.
▶ 明君: 군주를 깨닫게 하다.
▶ 大說: 大悦. 크게 기뻐하다

八年,伐陸渾戎,遂至洛,觀兵於周郊。
장왕86년(기원전606년)에 陸渾의 戎을 정벌하고, 洛水에 이르러 周나라의 교외에서 軍隊를 사열하였다.
周定王使王孫滿勞楚王。
周定王은 王孫 滿을 보내 초왕을 위로하였다.
楚王問鼎小大輕重,對曰:
「在德不在鼎。」
초왕이 九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자 왕손 만이 대답하였다.
“王者가 되는 것은 덕에 달렸지 鼎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
莊王曰:
「子無阻九鼎!
楚國折鉤之喙,足以為九鼎。」
장왕이 말하였다.
“너희들은 구정을 믿지 마라!
楚는 창끝만 부러뜨려도 충분히 구정을 만들 수 있다. ”

▶ 陸渾戎: 戎族의 일파. 대대로 육혼에 살았다. (지금의 하남 낙양의 남동쪽 일대)
▶ 王孫滿: 주나라의 大夫. 周共王의 玄孫. 왕손만이 초장왕이 구정에 대해 묻자
‘왕자가 되는 것은 덕에 달린 것이지 정에 달린 것이 아니다. ’
라고 하였으며,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약해졌지만 천명이 바뀌지 않았다. ’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楚軍이 철군하였다. <춘추좌씨전 魯宣公上 三年(기원전606년>
▶ 問鼎: 九鼎의 輕重大小를 물어보아 천하를 도모할 뜻을 보인 것이다. 九鼎은 하나라 우왕이 천하의 쇠를 바치게 하여 아홉 개의 鼎을 주조한 것으로 왕권을 잡은 나라의 국보가 되었다.
▶ 折鉤之喙: 창끝을 부러뜨리다.

 

王孫滿曰:
「嗚呼!君王其忘之乎?
昔虞夏之盛,遠方皆至,貢金九牧,鑄鼎象物,百物而為之備,使民知神姦。
桀有亂德,鼎遷於殷,載祀六百。
殷紂暴虐,鼎遷於周。
德之休明,雖小必重;
其姦回昏亂,雖大必輕。
昔成王定鼎于郟鄏,卜世三十,卜年七百,天所命也。
周德雖衰,天命未改。
鼎之輕重,未可問也。」
楚王乃歸。
왕손 만이 말하였다.
“오호! 군왕께서는 잊으셨습니까?
옛날 우나라와 하나라가 번성하자 먼 나라가 모두 조회하니 구주의 牧伯에게 청동을 바치게 하여, 구정을 주조하여 물상과 백물을 새겨 넣어 백성들로 하여금 귀신의 간사한 정상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桀이 덕을 어지럽히자 鼎은 은나라로 옮겨가 600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은나라 주왕이 포학하자 정은 주나라로 옮겨갔습니다.
군주의 덕이 아름답고 밝으면 정이 작아도 반드시 무거우며, 군주의 덕이 간사하고 혼미하면 정이 커도 반드시 가볍습니다.
지난날 성왕께서 郟鄏에 구정을 모시고 점을 쳤더니 ‘30대 700년을 누릴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으니 이는 하늘이 명한 바입니다.
주나라의 덕이 비록 쇠퇴하긴 했습니다만 천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이 무게를 물으시면 안 됩니다. ”
초왕이 이에 돌아갔다.

▶ 虞夏: 虞나라와 夏나라. 虞는 帝舜 有虞氏를 말하며, 夏는 요순시대 이후 禹가 세운 왕조이다.
▶ 九牧: 九州의 牧伯.
▶ 象物: 鼎에 새겨놓은 각종의 物象.
▶ 知神奸: 백성으로 하여금 鬼神의 간사한 情狀을 알게 한 것이다.
▶ 載祀六百: 은왕조가 600년 계속되다. 載와 祀는 모두 年이다.
<爾雅>에 “商나라는 ‘祀’라 하고, 唐虞는 ‘載’라 하고, 周나라는 ‘年’이라 하고, 夏나라는 ‘歲’라 하였다. ”고 하였다.
▶ 奸回: 간사함.
▶ 郟鄏: 地名. 周때 雒邑. 지금의 낙양. 武王이 鼎을 이곳으로 옮기고, 成王이 鼎을 이곳에 안치하였다.
▶ 卜: 점을 치다.

九年,相若敖氏。
장왕9년(기원전605년)에 若敖氏를 재상으로 삼았다.
人或讒之王,恐誅,反攻王,王擊滅若敖氏之族。
누군가 왕에게 약오씨를 참소하자 약오씨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오히려 왕을 공격하니, 왕이 약오씨의 종족을 공격하여 멸하였다.
十三年,滅舒。
장왕13년(기원전603년), 舒를 멸망시켰다.

▶ 若敖氏: 鬪子文의 종족인 若敖氏. 若敖族이라고도 한다. 기원전605년에 子文의 조카 鬪椒(: 월초)가 반란을 일으켜 楚莊王과 싸워 鬪椒가 패배하자 초장왕이 若敖氏를 멸족시켰다. <춘추좌씨전 노선공4년>

十六年,伐陳,殺夏徵舒。
장왕16년(기원전598년)에 楚가 陳을 토벌하여 夏徵舒를 죽였다.
徵舒弒其君,故誅之也。
하징서가 그의 군주를 시해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다.
已破陳,即縣之。
陳을 격파한 후 縣으로 삼았다.
群臣皆賀,申叔時使齊來,不賀。
신하들이 모두 賀禮하는데, 申叔時가 齊에 사신으로 다가 돌아와서는 하례하지 않았다.
王問,對曰:
「鄙語曰,牽牛徑人田,田主取其牛。
徑者則不直矣,取之牛不亦甚乎?
且王以陳之亂而率諸侯伐之,以義伐之而貪其縣,亦何以復令於天下!」
왕이 물으니 신숙시가 대답하였다.
“속담에 ‘소를 끌고 남의 밭을 밟았더니 밭주인이 그 소를 빼앗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밭을 밟은 것은 잘못이지만 소를 빼앗음은 또한 심하지 않습니까?
또 왕께서 陳의 난리 때문에 제후들을 이끌고 토벌하심은 의리로 정벌하신 것인데, 그 땅을 탐내시면 어떻게 다시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莊王乃復國陳後。
장왕은 이에 陳의 후손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었다.

▶ 夏徵舒: 춘추시대 陳의 대부. 어머니는 음녀로 유명하였던 夏姬인데, 수년간 어머니 하희가 陳靈公 등과 음란한 짓을 계속하고 자신마저 욕보이자, 화가 난 하징서는 진영공을 죽였다. 경공2기원전598년)에 楚莊王이 陳을 토벌하여 하징서를 죽였다.[史記世家]권39. 晉世家
▶ 申叔時: 춘추시대 초장왕 때 楚의 公族이다.
▶ 鄙語: 속담.
※蹊田奪牛: 남의 소가 내 밭을 짓밟았다고 그 소를 빼앗다. 가벼운 죄에 대한 처벌이 혹독하다는 뜻.
▶ 不直: 이치에 닿지 않다.


十七年春,楚莊王圍鄭,三月克之。
장왕17년(기원전597년봄에 초장왕이 鄭을 포위하여 석 달 만에 함락시켰다.
入自皇門,鄭伯肉袒牽羊以逆,曰:
「孤不天,不能事君,君用懷怒,以及敝邑,孤之罪也。
敢不惟命是聽!
賓之南海,若以臣妾賜諸侯,亦惟命是聽。
若君不忘厲、宣、桓、武,不絕其社稷,使改事君,孤之願也,非所敢望也。
敢布腹心。」
皇門으로 들어가니 鄭伯이 肉袒牽羊하고 맞이하며 말하였다.
“제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군왕을 섬기지 않아, 군왕께서 노하시어 몸소 저희 나라까지 오시게 했으니 저의 죄입니다.
어찌 감히 명하는 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
저를 南海로 내쫓거나 누구든 제후의 노예로 주신다 해도 오직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만약 군왕께서 厲王, 宣王, 桓公, 武公을 잊지 않으셨다면 그분들의 사직이 끊어지지 않게 하여, 다시 군왕을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는 바라지 않겠습니다.
감히 저의 속마음을 내보입니다. ”

▶ 皇門: 鄭의 성문.
▶ 鄭伯: 鄭襄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堅이다.
▶ 肉袒牽羊以逆: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간 것은 항복하고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逆은 맞이하다.
▶ 孤: 나. 제후가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不天: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다.
▶ 宾: 賓. 摈과 통용된다. 물리치다. 버리다.
▶ 若以臣妾賜諸侯: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妾이 되게 하더라도 楚 군주의 명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若은 어떤 자.
▶ 厲, 宣, 桓, 武: 周厲王과 周宣王은 鄭이 나온 조상이고, 鄭桓公과 鄭武公은 처음 봉해진 鄭의 賢君이니, 楚가 이 네 임금에게 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鄭의 사직을 멸망하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心: 腹心. 마음 속 깊은 곳.


楚群臣曰:
「王勿許。」
楚의 신하들이 말하였다.
“왕께서는 허락하지 마십시오. ”
莊王曰:
「其君能下人,必能信用其民,庸可絕乎!」
장왕이 말하였다.
“그 군주가 자신을 낮출 수 있어 그 백성들에게 틀림없이 신임을 얻었을 터이니, 어찌 멸망시키겠는가!”
莊王自手旗,左右麾軍,引兵去三十里而舍,遂許之平。
장왕은 몸소 군의 깃발을 들고 좌우로 軍을 지휘하여 軍을 30리 떨어진 곳으로 물리고는 마침내 鄭과의 강화를 허락하였다.
潘尪入盟,子良出質。
楚 潘尫이 鄭에 들어가 맹약을 하고 鄭 子良을 楚에 인질로 보냈다.
夏六月,晉救鄭,與楚戰,大敗晉師河上,遂至衡雍而歸。
여름 6월에 晉이 鄭을 구원하러 와서 楚와 싸웠으며, 晉을 황하 가에서 대패시키고 衡雍에 이르러 되돌아갔다.

▶ 庸: 어찌.
▶ 平: 강화하다.
▶ 潘尪: 楚의 大夫.
▶ 子良: 鄭伯정양공의 아우.
▶ 出質: 楚의 인질이 되다.


二十年,圍宋,以殺楚使也。
장왕20년(기원전594년)에 楚가 宋을 포위했으니, 宋이 楚의 사신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圍宋五月,城中食盡,易子而食,析骨而炊。
다섯 달 동안 宋을 포위하자, 성에 먹을 것이 다 떨어져 자식을 바꿔 잡아먹고, 뼈를 쪼개 불쏘시개로 썼다.
宋華元出告以情。
宋의 華元이 나와서 이 사정을 알렸다.
莊王曰:
「君子哉!」
遂罷兵去。
장왕이
“군자로구나!”하며 軍을 물렸다.

▶ 以殺楚使也: 楚가 송문공10년에 孟諸에서 사냥할 때 문공의 마부를 매질한 적이 있어 그 원한으로 宋이 楚 사신인 申舟를 체포하여 죽였다. 이로 인해 초장왕이 宋을 포위하였다. <춘추좌씨전 노선공14년>
▶ 華元: 춘추시대 宋의 대신으로 宋戴公의 5대손이다.

二十三年,莊王卒,子共王審立。
장왕23기원전591년)에 장왕이 죽고, 아들 共王熊審이 즉위하였다.

▶ 共王審: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審이며, 莊王의 아들이다. 오랜 기간 동안 晉과 패권을 다투었다. 공왕16년 楚가 鄭을 구원하러 鄢陵에서 晉과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공왕은 적의 화살에 눈 하나를 잃었다. 장군 子反이 술을 좋아했는데, 왕이 자반을 불러 그가 취한 것을 보고 화를 내며 활로 쏘아 죽이고는 철군하여 귀국하였다.

 

共王十六年,晉伐鄭。
공왕16년(기원전575년)에 晉이 鄭을 정벌하였다.
鄭告急,共王救鄭。
鄭이 위급함을 알려오니 共王이 鄭을 구원하러 나섰다.
與晉兵戰鄢陵,晉敗楚,射中共王目。
晉의 軍隊와 鄢陵에서 싸웠으며, 晉이 楚를 물리쳤고, 화살로 공왕의 눈을 맞췄다.
共王召將軍子反。
공왕이 장군 子反을 불렀다.
子反嗜酒,從者豎陽穀進酒醉。
자반이 술을 좋아하여 가신 豎陽穀이 주는 술을 마시고 취해버렸다.
王怒,射殺子反,遂罷兵歸。
공왕은 노하여 자반을 쏘아 죽이고 撤軍하여 楚로 돌아갔다.

▶ 鄢陵: 鄭 땅으로 지금 潁川郡에 속한다.
▶ 子反: 초 장왕의 동생으로 楚의 司馬이다.
▶ 豎陽穀: 子反의 집안에서 부리는 家臣.

三十一年,共王卒,子康王招立。
공왕31년(기원전560년)에 공왕이 죽고, 아들 康王 熊招가 즉위하였다.
康王立十五年卒,子員立,是為郟敖。
강왕이 재위15년(기원전545년) 만에 죽고, 아들 熊員이 즉위하니 그가 郟敖이다.

▶ 共王審: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審이며, 莊王의 아들이다.
▶ 康王 招: 楚康王. 춘추시대 楚의 24대 군주로 이름은 招. 초공왕의 아들이며, 초영왕의 형이다.
▶ 郟敖: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麏 또는 員이다. 康王의 아들이다. 숙부 公子圍를 令尹으로 임명하여 兵事를 담당하게 하였다. 숙부인 공자위가 鄭으로 사신을 갔다가 겹오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궁에 들어가 문병을 하면서 겹오을 살해하고 그의 아들도 죽인 뒤 왕위에 올랐다. 겹 땅에 왕을 장사지내 겹오라 부른다.
楚 사람들은 군주로서 그 지위가 고정되기 전에 죽은 자를 ‘敖’라 하였다.


康王寵弟公子圍、子比、子皙、棄疾。
康王은 동생인 공자 圍, 子比, 子晳, 棄疾을 총애하였다.
郟敖三年,以其季父康王弟公子圍為令尹,主兵事。
겹오3기원전542년)에 숙부인 강왕의 동생 공자 圍를 令尹으로 삼아軍隊를 주관하게 하였다.
四年,圍使鄭,道聞王疾而還。
겹오4기원전541년)에 공자 위가 鄭에 사신으로 가는 길에 왕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돌아왔다.

▶ 公子圍: 초강왕의 동생. 겹오의 숙부. 초공왕의 아들. 형인 강왕이 죽고 강왕의 아들인 郟敖가 왕위를 계승하자 令尹직을 장악하여 연소한 왕을 겁박하면서 막강한 실권을 누렸다. 후일 楚 靈王에 즉위한다.

十二月己酉,圍入問王疾,絞而弒之,遂殺其子莫及平夏。
12월 기유일에 공자 圍가 왕궁으로 들어와 왕의 병세를 물으면서 왕의 목을 졸라 시해하고 이어 왕의 아들 莫과 平夏까지 죽였다.
使使赴於鄭。
사신을 鄭에 보내 상을 알리려 하였다.
伍舉問曰:
「誰為後?」
伍擧가 사신에게 물었다.
“누가 후계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對曰:
「寡大夫圍。」
사신이 대답하였다.
“우리의 대부 圍라 하겠습니다. ”
伍舉更曰:
「共王之子圍為長。」
오거가
“공왕의 아들 중에 圍가 맏이다. ”
라고 말을 바꾸게 하였다.
子比奔晉,而圍立,是為靈王。
子比는 晉으로 달아났고, 공자 圍가 즉위하니 그가 靈王이다.

▶ 伍擧: 椒擧. 춘추시대 楚 대부로 伍子胥의 조부이다. 식읍이 椒이었기 때문에 椒擧라고도 한다. <國語 楚語>
▶ 伍舉更曰: 伍擧가 赴告하는 말을 고쳐 禮를 따르게 한 것이다. 군주를 시해하고서 君位를 찬탈한 것을 제후에게 부고하지 않은 것이다.
▶ 寡大夫: 公子圍가 영윤으로서 계승하여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寡大夫’라고 칭한 것이다
▶ 靈王: 楚의 제27대 왕. 원래 이름은 圍였으나, 왕이 된 뒤 虔으로 고쳤다. 초공왕의 차남. 자신의 조카이자 전대 초왕인 겹오 웅균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초영왕은 대외적으로 蔡와 陳을 멸해 그곳을 楚의 행정 구역으로 만들었으나 반란이 일어나 쫓기는 신세가 되어 우윤인 신해의 집에 머물다가 결국 잡히면 죽는다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靈王三年六月,楚使使告晉,欲會諸侯。
영왕3년(기원전538년 6월에 楚가 사신을 晉에 보내 제후들과 회맹하려 한다고 알렸다.
諸侯皆會楚于申。
제후들이 모두 楚의 申에서 회맹하였다.
伍舉曰:
「昔夏啟有鈞臺之饗,商湯有景亳之命,周武王有盟津之誓,成王有岐陽之閒,康王有豐宮之朝,穆王有涂山之會,齊桓有召陵之師,晉文有踐土之盟,君其何用?」
伍舉가 말하였다.
“옛날 夏啓는 鈞臺에서 술자리를 베풀었고, 商湯은 景亳에서 명령을 내렸으며, 周 武王은 盟津에서 맹세했으며, 周成王은 岐陽에서 사냥을 했고, 周康王은 豐邑의 궁에서 조회를 받았으며, 周穆王은 塗山에서 회합했으며, 齊桓公은 召陵에서 맹약을 했고, 晉文公은 踐土에서 회맹했으니, 군주께서는 어떤 것을 따르시렵니까?”
靈王曰:
「用桓公。」
영왕이 말하였다.
“환공의 禮를 따르겠소. ”

▶ 楚使使告晉: 楚靈王이 단독으로 제후의 회맹을 주재하고자 하여 椒擧(: 오거)를 사자로 보내어 晉에 가서 동의를 구하게 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노소공4년>
▶ 申: 地名. 예전의 申의 땅이었다.
▶ 夏啟有鈞臺之饗: 啓는 夏禹의 아들이다. 河南禹縣 남쪽에 鈞臺陂가 있는데, 이곳에서 연회를 열었다. 鈞臺는 均台라고도 한다.
▶ 商湯有景亳之命: 상나라의 탕임금이 景亳에서 제후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경박은 河南鞏縣서남쪽.
▶ 周武王有盟津之誓: 은나라 紂왕을 정벌하려 할 때 맹진에서 軍士들에게 선포한 글을 말한다.
▶ 成王有岐陽之閒: 周成王이 奄에서 돌아와 岐山 남쪽에서 대대적으로 열병하였다. 岐山은 扶風美陽縣서북쪽에 있다.
▶ 康王有豐宮之朝: 酆은 始平鄠縣 동쪽에 靈臺가 있다. 周康王이 이곳에서 제후의 조회를 받았다.
▶ 穆王有涂山之會: 周穆王이 塗山에서 제후를 회합하였다. 塗山은 壽春 동북쪽에 있다.
▶ 齊桓有召陵之師: 제환공은 소릉에서 맹약을 하였다. 召陵은 楚의 지명이다.
▶ 晉文有踐土之盟: 晉文公은 踐土에서 회맹하였다. 践土는 鄭의 땅이름이다.
▶ 用桓公: 齊桓公이 召陵에서 회합했던 禮를 사용하겠다는 뜻이다.
이 問答은 伍舉가 제후를 얻었으니 禮를 신중히 하라고 충고한 것이다.


時鄭子產在焉。
당시 鄭의 子産이 그 자리에 있었다.
於是晉、宋、魯、衛不往。
그러나 晉, 宋, 魯, 衛는 그 회맹에 가지 않았다.
靈王已盟,有驕色。
영왕이 회맹을 끝내자 교만한 기색을 드러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盟,戎、翟叛之。
君其慎終!」
伍舉가 말하였다.
“桀왕이 有仍에서 회맹을 때 有緡이 배반했고,
紂왕이 黎山에서 회맹했을 때는 東夷가 배반했으며,
幽王이 太室에서 회맹하자 戎과 翟이 배반했습니다.
군주께서는 신중하게 마무리하십시오!”

▶ 鄭子産: 姓은 公孫, 이름은僑, 字는 子産, 鄭의 현명한 大夫로 春秋時代 후기의 뛰어난 정치가이다. 당시 楚와 晉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압박받던 鄭을 교묘한 외교정책과 내정개혁을 통해 유지함으로써 공자가 군자로 칭송하였다.
▶ 桀為有仍之會: 夏나라 桀왕이 仍에서 제후를 회합할 때 緡國이 배반하였다. 仍과 緡은 모두 나라이름이다.
▶ 紂為黎山之會: 商나라의 紂왕이 黎에서 열병할 때 東夷가 배반하였다. 黎는 東夷의 黎国을 말한다.
▶ 幽王為太室之盟: 周幽王이 太室에서 회맹할 때 戎狄이 배반하였다. 太室은 嵩山이다.
▶ 君其慎終: 위의 사례들은 모두 제후들에게 오만함을 보여 제후들이 命을 어겼기 때문이므로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뜻이다.


七月,楚以諸侯兵伐吳,圍朱方。
7월에 楚가 제후의 軍을 이끌고 吳를 정벌하여 朱方을 포위하였다.
八月,克之,囚慶封,滅其族。
8월에 주방을 함락하고 慶封을 가둔 뒤 그의 일족을 멸하였다.
以封徇,曰:
「無效齊慶封弒其君而弱其孤,以盟諸大夫!」
경봉을 묶어 軍中을 돌아다니며 말하였다.
“齊경봉처럼 그 군주를 시해하고, 어린 군주의 권한을 약하게 만들어 여러 대부들과 맹서한 일을 본받지 마라!”
封反曰:
「莫如楚共王庶子圍弒其君兄之子員而代之立!」
경봉은 말하였다.
“楚공왕의 서자 위가 군주인 형님의 아들 員을 시해하고 자리를 대신 것처럼 하지 말라!”
於是靈王使 棄疾殺之。
이에 영왕은 기질을 보내 그를 죽였다.

▶ 朱方: 吳의 邑으로 齊慶封에게 吳의 군주 구여가 봉해 준 곳이다.
▶ 慶封: 齊의 간신. 崔杼와 공모하여 齊莊公을 시해한 후 左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徇: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보이다.
▶ 其君兄之子員: 康王의 아들 郏敖.
▶ 棄疾: 楚의 공자 棄疾. 楚平王. 楚의 군주가 된다. 熊氏이며 이름은 居 또는 子居, 자는 棄疾이다. 楚靈王이 晉을 멸하고 5년 뒤 楚公子 棄疾이 영왕을 살해하고 자립하여 平王이 되었다.


七年,就章華臺,下令內亡人實之。
영왕7년(기원전534년)에 章華臺를 지으려고 도망자들을 받아들여 공사에 채우라고 명령하였다.

▶ 章華臺: 章臺. 춘추시대 楚 靈王이 華容縣 부근에 세운 臺. 지금의 호북성 감리현 서북쪽.
▶ 内亡人: 楚로 도망온 자들을 받아들이다.


八年,使公子棄疾將兵滅陳。
영왕8년(기원전533년)에 공자 棄疾에게 軍을 이끌고 가서 陳을 멸망시키라고 하였다.
十年,召蔡侯,醉而殺之。
영왕10년(기원전531년)에 蔡侯를 불러 술에 취하게 해서 죽였다.
使棄疾定蔡,因為陳蔡公。
기질에게 蔡를 평정하게 하고 陳과 蔡의 公으로 명하였다.

▶ 蔡侯: 蔡 靈侯. 3월에 楚가軍을 매복시켜 놓고 申에서 蔡侯를 접대하다가 채후가 술에 취하자 체포하여, 여름 4월에 蔡侯를 죽이고, 그 수행원70인까지 함께 죽였다. <춘추좌씨전 노소공11기원전531년>

十一年,伐徐以恐吳。
영왕11년(기원전530년)에 徐를 정벌하여 吳를 위협하였다.
靈王次於乾豀以待之。
영왕이 乾谿에 주둔하면서 기다렸다.
王曰:
「齊、晉、魯、衛,其封皆受寶器,我獨不。
今吾使使周求鼎以為分,其予我乎?」
영왕이 <析父에게> 말하였다.
“齊, 晉, 魯, 衛는 제후로 봉해질 때 모두 보물을 받았는데 나만 받지 못하였다.
지금 내가 周나라로 사신을 보내 鼎을 요구하여 분봉 때 나누어 준 보물로 삼으려 하는데 주 왕실에서 내게 주겠는가?”

▶ 次: 주둔하다.
▶ 乾谿: 乾溪. 춘추시대 楚 땅으로 지금의 安徽省 亳縣 동남쪽이다.


析父對曰:
「其予君王哉!
昔我先王熊繹辟在荊山,蓽露藍蔞以處草莽,跋涉山林以事天子,唯是桃弧棘矢以共王事。
齊,王舅也;晉及魯、衛,王母弟也:
楚是以無分而彼皆有。
周今與四國服事君王,將惟命是從,豈敢愛鼎?」
析父가 대답하였다.
“주왕실에서 왕께 줄 터입니다!
옛날 우리 선왕 熊繹께서는 궁벽한 荊山에 사실 때, 허름한 수레와 남루한 옷으로 초목이 우거진 땅에 계시면서 산을 넘고 숲을 지나 천자를 섬기셨으나, 단지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만을 周왕실에 바치셨을 뿐입니다.
齊는 왕실의 외삼촌뻘이고, 晉과 魯와 衛는 왕실과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동생뻘입니다.
그래서 楚가 나눠 받지 못한 것을 저들은 모두 갖고 있습니다.
주나라가 지금은 네 나라와 더불어 왕께 복종하며 섬기고 있으니 오로지 명령하는 대로 따르려 하니 어찌 鼎을 아까워하겠습니까?”

▶ 析父: 楚의 대부. 춘추좌씨전에는‘右尹子革(鄭丹)’으로 기록되어 있다.
熊繹熊繹은 중국 楚의 제1대 군주이다. 서주 문왕과 서주 무왕의 스승인 육웅의 증손이며 웅려의 손자이자 웅광의 아들이다.
▶ 辟在荊山: 궁벽한 荊山에서 살다.
▶ 蓽露藍蔞: 篳路襤褸. 섶나무로 만든 초라한 수레와 누덕누덕 기운 해진 옷. 가시나무로 수레를 만들어 타고 해진 옷을 입고서 초목이 우거진 산야에 거처하였다. 藍蔞는 襤褸. 남루하다.
▶ 草莽: 초목이 우거진 산야.
▶ 跋涉: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
▶ 桃弧棘矢: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 상서롭지 못한 요괴를 물리치는 데 사용하였다. 楚는 산림 가운데 있어서 생산물이 적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齊王舅也: 周成王의 어머니가 齊太公의 딸이다. 舅는 외삼촌.
▶ 晉及魯, 衛, 王母弟也: 晉唐叔은 주 成王의 同母弟이고, 周公과 衛康叔은 武王의 同母弟이다.


靈王曰:
「昔我皇祖伯父昆吾舊許是宅,今鄭人貪其田,不我予,今我求之,其予我乎?」
영왕이 말하였다.
“옛날 나의 조상의 큰아버지 昆吾께서는 옛 許의 땅에 사셨는데 지금 鄭 사람들이 그 땅을 탐내 나한테 주지 않았는데 지금 내가 그것을 요구하면 그들이 내게 주겠는가?”
對曰:
「周不愛鼎,鄭安敢愛田?」
석보가 대답하였다.
“주나라가 鼎을 아까워하지 못하는데, 鄭이 어찌 감히 許 땅을 아까워하겠습니까?”
靈王曰:
「昔諸侯遠我而畏晉,今吾大城陳、蔡、不羹,賦皆千乘,諸侯畏我乎?」
영왕이 말하였다.
“과거 제후들은 우리나라를 멀리하고 晉을 두려워하였으나, 지금 우리가 陳, 蔡, 不羹에 높은 성을 쌓고 그곳에 각기 모두 千乘의 軍을 가지고 있는데 제후들이 우리나라를 두려워하겠는가?”
對曰:
「畏哉!」
석보가 대답하였다.
“두려워합니다!”
靈王喜曰:
「析父善言古事焉。」
영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석보는 옛날 일을 잘 말하는구나. ”

▶ 皇祖伯父昆吾: 陸終氏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昆吾이고 막내가 季連이었다. 季連이 楚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곤오를 일러 伯父라 한 것이다.
▶ 舊許是宅: 곤오가 일찍이 許 땅에 살았기 때문에 ‘舊許是宅’이라 한 것이다.
▶ 鄭人貪其田: 이 당시 옛 許 땅이 鄭에 귀속되었다. 그러므로 ‘鄭 사람들이 그 토지의 이익을 탐하여 그 땅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 不羹: 楚靈王은 陳의 도성인 宛丘와 蔡의 都城인 新蔡와 西不羮의 古城을 확대해서 쌓았다.
▶ 賦:軍.

 

十二年春,楚靈王樂乾豀,不能去也。
영왕12년(기원전529년봄에 楚 영왕은 乾豀를 좋아해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國人苦役。
백성들은 노역에 시달렸다.
初,靈王會兵於申,僇越大夫常壽過,殺蔡大夫觀起。
당초 영왕은 申邑에서 제후들과 회합하면서 越의 대부 常壽過를 모욕하고 蔡의 대부 觀起를 죽였다.
起子從亡在吳,乃勸吳王伐楚,為閒越大夫常壽過而作亂,為吳閒。
관기의 아들 觀從이 吳로 도망쳐서 오왕에게 楚를 치게 권하고, 越 대부 상수과에게는 내란을 일으키라고 권하면서 吳를 위해 간첩 노릇을 하였다.
使矯公子棄疾命召公子比於晉,至蔡,與吳、越兵欲襲蔡。
그리고는 사람을 보내 공자 기질의 명령을 사칭하여 晉에 있는 공자 比를 불러들였으며, 공자 비가 채읍에 이르자 吳와 越의 軍隊와 함께 채읍을 습격하려 하였다.

▶ 僇: 욕보이다.
▶ 常壽過: 越나라의 대부.
▶ 觀起: 蔡의 대부.
▶ 觀從: 蔡 대부 觀起의 아들.
▶ 閒: 이간하다.
▶ 矯: 속이다. 사칭하다.
▶ 公子比: 楚 訾敖. 초공왕의 셋째 아들로 이름 比이며 字는 子干으로 강왕과 영왕의 동생이자 평왕의 형이다. 영윤 공자위가 정변을 일으켜 협오를 죽이고 초영왕이 되었을 때 대신인 伯州犁를 죽이자 영왕의 동생인 공자 비와 黑肱은 두려워서 각각 晉, 鄭으로 망명하였다. 기원전529년에 영왕이 국내에 없을 때 공자 비가 동생인 공자 흑굉, 공자 棄疾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켜 궁을 점령하였다. 비는 스스로 왕이 되었고, 흑굉은 영윤, 기질은 사마로 삼았다. 이후 기질이 고립무원에 처한 영왕이 돌아오지 못하리라 깨닫고, 거짓으로 소동을 일으켜 영왕이 돌아왔다고 알리니 비와 흑굉은 두려워 자살하였다. 기질이 뒤를 이으니 평왕이다. 訾땅에 묻혔으므로 訾敖라 하였다.


令公子比見棄疾,與盟於鄧。
公子 比에게 棄疾을 만나 鄧邑에서 맹약하게 하였다.
遂入殺靈王太子祿,立子比為王,公子子皙為令尹,棄疾為司馬。
마침내 靈王의 태자 祿을 죽이고, 공자 비를 왕으로 공자 子皙을 영윤으로 기질을 司馬로 세웠다.
先除王宮,觀從從師于乾豀,令楚眾曰:
「國有王矣。先歸,復爵邑田室。
後者遷之。」
먼저 왕궁을 깨끗하게 정리한 후 觀從은 軍隊를 이끌고 건계로 가서 楚軍에게 선포하였다.
“나라에 왕이 생겼다. 먼저 돌아가는 자에게는 작위와 땅과 집을 되돌려 주겠지만
늦게 가는 자는 추방하겠다. ”
楚眾皆潰,去靈王而歸。
楚軍은 모두 흩어져 영왕을 버리고 돌아갔다.

▶ 子皙: 公子黑肱. 字는 子皙이다. 춘추시대 楚의 왕자로 초공왕의 아들이다.

靈王聞太子祿之死也,自投車下,而曰:
「人之愛子亦如是乎?」
영왕은 태자 祿의 죽음을 듣고 수레 밑으로 몸을 던지며 시종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자식을 사랑함이 이와 같으냐?”
侍者曰:
「甚是。」
시종이 대답하였다.
“이보다 심합니다. ”
王曰:
「余殺人之子多矣,能無及此乎?」
영왕이 말하였다.
“내가 남의 자식을 죽임이 많으니,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右尹曰:
「請待於郊以聽國人。」
右尹이 말하였다.
“교외에서 국인들의 처분을 기다리십시오. ”
王曰:
「眾怒不可犯。」
왕이 말하였다.
“대중의 분노는 거스를 수 없다. ”
曰:
「且入大縣而乞師於諸侯。」
우윤이 말하였다.
“만약 큰 현으로 들어가면 제후들에게 원군을 청할 수 있겠습니다. ”
王曰:
「皆叛矣。」
왕이 말하였다.
“모두가 배반하였다.”

▶ 右尹: 右尹 子革. 楚의 대부.

又曰:
「且奔諸侯以聽大國之慮。」
우윤이 다시 말하였다.
“우선 제후국으로 망명하여 大國의 의사를 따르십시오.”
王曰:
「大福不再,祗取辱耳。」
영왕이 말하였다.
“큰 복은 두 번 오지 않으며 단지 치욕만을 부를 뿐이다. ”
於是王乘舟將欲入鄢。
이에 영왕은 배를 타고 鄢城으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右尹度王不用其計,懼俱死,亦去王亡。
우윤은 왕이 자신의 계책을 쓰지 않으리라 짐작하고, 같이 죽을 것이 두려워, 역시 영왕을 버리고 도망갔다.

▶ 慮: 꾀하다. 결단하다.
▶ 祗: 다만.
▶ 鄢: 지금의 湖北省 宜城.
▶ 度: 추측하다.


靈王於是獨傍偟山中,野人莫敢入王。
이리하여 영왕은 혼자 몸으로 산속을 헤맸지만, 촌민들은 감히 왕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王行遇其故鋗人,謂曰:
「為我求食,我已不食三日矣。」
왕이 길을 가다가 옛날 궁을 청소하던 사람을 만나서 말하였다.
“내게 먹을 것을 좀 다오, 내가 먹지 못한 지 사흘이 넘었다. ”
鋗人曰:
「新王下法,有敢閒王從王者,罪及三族,且又無所得食。」
청소부가 말하였다.
“새 왕께서 명을 내려 왕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함께 도망하는 자는 죄가 삼족에 미칠 것이라고 하였으며, 게다가 먹을 것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

▶ 鋗人: 궁중에서 청소를 하던 사람.

王因枕其股而臥。
이에 영왕은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잠이 들었다.
鋗人又以土自代,逃去。
청소부는 흙을 가져다 자신의 허벅지를 대신하고는 도망쳤다.
王覺而弗見,遂饑弗能起。
왕이 깨어나니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배가 고파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芋尹申無宇之子申亥曰:
「吾父再犯王命,王弗誅,恩孰大焉!」
芋지방의 관리 申無宇의 아들 申亥가 말하였다.
“우리 아버지가 왕명을 두 번이나 어겼으나 왕께서는 죽이지 않으셨으니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는가!”
乃求王,遇王饑於釐澤,奉之以歸。
이에 왕을 찾다가 釐澤에서 왕이 굶주림을 보고 모시고 돌아왔다.
夏五月癸丑,王死申亥家,申亥以二女從死,并葬之。
여름5월 계축일에 왕이 신해의 집에서 죽었는데, 신해는 자신의 두 딸을 따라 죽게 하고 또 장례를 지냈다.

▶ 芋尹: 范無宇. 楚 대부로 芋땅의 수령인 申無宇.
▶ 再犯王命: 靈王이 令尹으로 있을 때 왕의 旌旗를 만들어 사냥에 사용하자 芋尹無宇가 그 깃발을 잘라내며 말하기를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있다면 그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靈王이 즉위한 뒤에 章華宮을 세워 도망자들을 받아들이니, 無宇의 문지기가 그곳으로 도망해 들어가자 無宇가 장화궁으로 가서 그 문지기를 잡아온 일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노소공7기원전535년>
▶ 王死申亥家: 靈王이 芋尹申亥氏의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춘추좌씨전 노소공13기원전529년>
▶ 申亥以二女從死: 申亥가 靈王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기의 두 딸을 殉葬한 것이다.

是時楚國雖已立比為王,畏靈王復來,又不聞靈王死,故觀從謂初王比曰:
「不殺棄疾,雖得國猶受禍。」
이때 楚는 비록 공자 比를 초왕으로 옹립하였으나, 영왕이 다시 올까 두려워하였었는데, 영왕이 죽었다는 소식도 없는 까닭에 觀從은 새로 왕이 된 比에게 말하였다.
“기질을 죽이지 않으면 비록 나라를 얻어도 도리어 화를 입을 터입니다. ”
王曰:
「余不忍。」
왕이 말하였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
從曰:
「人將忍王。」
관종이 말하였다.
“그 사람은 장차 왕께 그럴 수 있을 터입니다. ”
王不聽,乃去。
왕이 듣지 않자 관종은 이에 떠나버렸다.

▶ 觀從: 蔡 대부 觀起의 아들.
▶ 比: 公子比. 楚 訾敖. 초공왕의 셋째 아들로 이름 比이며 字는 子干으로 강왕과 영왕의 동생이자 평왕의 형이다.
▶ 棄疾: 楚의 공자 棄疾. 공자 比의 동생이다.
▶ 人將忍王: 棄疾이 왕을 잔인하게 대할 것이다.


棄疾歸。
棄疾이 도성으로 돌아왔다.
國人每夜驚,曰:
「靈王入矣!」
도성의 사람들은 매일 밤 놀라며 말하였다.
“영왕이 들어왔다!”
乙卯夜,棄疾使船人從江上走呼曰:
「靈王至矣!」
을묘일 밤에 기질은 뱃사람에게 강을 오가며 고함을 지르게 하였다.
“영왕이 왔다!”
國人愈驚。
도성 사람들은 더욱 놀랐다.
又使曼成然告初王比及令尹子皙曰:
「王至矣!
國人將殺君,司馬將至矣!
君蚤自圖,無取辱焉。
眾怒如水火,不可救也。」
또 曼成然을 시켜 새 왕 比와 영윤 子晳에게 다음과 같이 알리게 하였다.
“왕이 돌아왔습니다!
도성 사람들이 군왕을 죽이려 할 터이고 司馬도 곧 올 터입니다!
왕께서 일찍 자신을 도모하시어 치욕을 당하지 마십시오.
대중의 분노는 물불 같아 끌 수가 없습니다. ”
初王及子皙遂自殺。
새 왕 比와 子皙은 마침내 자살하였다.
丙辰,棄疾即位為王,改名熊居,是為平王。
병진일에 棄疾이 왕으로 즉위하여 熊居로 이름을 고치니 그가 平王이다.

▶ 靈王入矣: 백성들이 서로 靈王이 돌아왔다는 말로 겁을 준 것이다.
▶ 曼成然: 이름은 成然이고 字는 子旗이다. 후에 초평왕이 令尹으로 삼았다.
▶ 司馬: 공자 弃疾을 말한다.
▶ 初王及子皙遂自殺: 군주를 시해했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子干의 君位가 정해지기 전에 자살하였기 때문이다. 子干을 訾에 장사지냈으므로 訾敖라고 하였다. 군주의 지위가 고정되기 전에 죽어 諡號가 없는 자를 楚는 모두 ‘敖’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 노소공13기원전529년>


平王以詐弒兩王而自立,恐國人及諸侯叛之,乃施惠百姓。
평왕은 속임수로 두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과 제후들의 배반을 두려워하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復陳蔡之地而立其後如故,歸鄭之侵地。
陳과 蔡의 땅을 되돌려 주고 예전처럼 그 후손을 군주로 세웠으며, 빼앗은 鄭의 땅도 되돌려 주었다.
存恤國中,修政教。
나라 안을 위로하고 구휼하며 정치와 교화를 정돈하였다.
吳以楚亂故,獲五率以歸。
吳가 楚의 혼란을 틈타 楚의 장수 다섯을 잡아 돌아갔다.
平王謂觀從:
「恣爾所欲。」
평왕이 觀從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겠다. ”
欲為卜尹,王許之。
관종은 卜尹을 원한다고 하여 평왕이 허락하였다.

▶ 五率: 다섯 장수. 楚의 蕩侯, 潘子, 司馬智, 嚣尹午, 陵尹喜를 말한다. 率는 將帥.
▶ 卜尹: 卜人을 도와 櫃를 열고서 龜卜의 占書를 열람하는 관직.

初,共王有寵子五人,無適立,乃望祭群神,請神決之,使主社稷,而陰與巴姬埋璧於室內,召五公子齋而入。
당초 共王에게는 총애하는 아들 다섯이 있었지만, 태자로 세울 적자가 없었으므로, 신들에게 望祭를 올려 신이 결정토록 청하여 사직을 맡기려 하였는데, 몰래 巴姬와 함께 실내에다 벽옥을 묻어두고 다섯 공자를 불러 목욕재계하고 들어오도록 하였다.
康王跨之,靈王肘加之,子比、子皙皆遠之。
강왕은 벽옥을 타고 넘었고, 영왕은 팔꿈치가 벽옥에 닿았고, 자비와 자석은 모두 벽옥과 거리가 멀었다.
平王幼,抱其上而拜,壓紐。
평왕은 어려서 안고 들어와서 절을 하는데 이마가 벽옥의 끈을 맨 곳에 닿았다.

▶ 寵子五人: 총애하는 아들 다섯이 모두 서자였으므로 적자가 없었다. 아들 다섯은 熊昭: 康王, 圍: 靈王, 子比, 子皙, 弃疾: 平王이다.
▶ 望祭: 먼 곳에서 신들을 바라보고 지내는 제사.
▶ 巴姬: 共王의 妾.
▶ 室內: 太室. 祖廟.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
▶ 齋: 齋戒하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 康王跨之: 웅초가 절을 할 때 이마가 벽옥의 위를 지나쳐 간 것이다. 跨는 타고 넘다.
▶ 靈王肘加之: 공자 圍의 팔꿈치가 벽옥을 묻어 놓은 곳 상단에 닿은 것이다.
▶ 壓紐: 벽옥의 끈이 약간 보이도록 묻어 절하는 것을 살펴 이마가 어디에 닿았는지를 살핀 것으로 棄疾은 두 번의 절이 모두 끈 위에 닿은 것이다. 紐는 인끈. 매듭.

 


故康王以長立,至其子失之;
圍為靈王,及身而弒;
子比為王十餘日,子皙不得立,又俱誅。
그리하여 강왕은 장자로 즉위하였으나 그 아들에 이르러 자리를 빼앗겼고,
공자 圍는 靈王이 되었으나 시해당했고,
子比는 열흘 남짓 왕 노릇을 했고, 子皙은 왕위에 오르지도 못하고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四子皆絕無後。
네 아들이 모두 후손이 끊어졌다.
唯獨棄疾後立,為平王,竟續楚祀,如其神符。
유독 棄疾이 훗날 즉위하여 평왕이 되어 끝내 楚의 제사를 이었으니 신의 조짐과 같았다.

▶ 至其子失之: 강왕의 아들인 겹오는 숙부인 공자 위에게 시해당하였다.
▶ 圍為靈王,及身而弒: 겹오를 시해하고 즉위한 초 영왕은 반란이 일어나 쫓기는 신세가 되어 자살하였다.
▶ 符: 조짐, 징조


初,子比自晉歸,韓宣子問叔向曰:
「子比其濟乎?」
당초 공자 比가 晉에서 楚로 돌아가자 韓宣子가 叔向에게 물었다.
“자비가 성공하겠습니까?”
對曰:
「不就。」
숙향이 대답하였다.
“성공하지 못할 터입니다. ”
宣子曰:
「同惡相求,如市賈焉,何為不就?」
선자가 말하였다.
“같은 증오심을 가지고 서로를 구함이 마치 장사치가 이익을 구하듯 하니 어찌 성공하지 못하겠는가?”

▶ 韓宣子: 春秋시대 晉 대부 韓起를 말한다. 宣은 그의 시호이다.
▶ 叔向: 춘추시대 晉의 賢者. 성은 羊舌이고, 이름은 肹 또는 숙힐이며, 字가 숙향이다. 晉平 公의 사부로서 박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辭令에 밝았다. 齊의 晏嬰, 吳의 季札, 鄭의 자산과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현인으로 불렸다.
▶ 濟: 성공하다.
▶ 賈: 장사하다.

 


對曰:
「無與同好,誰與同惡?
取國有五難:
有寵無人,一也;
有人無主,二也;
有主無謀,三也;
有謀而無民,四也;
有民而無德,五也。
숙향이 대답하였다.
“자간에게 뜻을 같이하는 자가 없으니 누가 그와 증오를 함께 하겠습니까?
나라를 얻는 데는 다섯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귀한 신분은 가졌으되 보좌할 인재가 없는 것이 그 하나요.
인재는 있는데 의지할 주인이 없는 것이 그 둘이요.
의지할 세력은 있는데 지모가 없는 것이 그 셋이요.
지모는 있는데 백성의 지지가 없는 것이 그 넷이요.
백성의 지지는 있으나 덕이 없는 것이 그 다섯입니다.

▶ 無與同好,誰與同惡: 棄疾이 본래 子干과 뜻을 같이하지 않았으니 증오를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 有寵無人: 귀한 신분은 가졌으되 보좌할 인재가 없다. 寵은 존귀하고 이름이 높음.
▶ 謀: 策謀.

 


子比在晉十三年矣,晉、楚之從不聞通者,可謂無人矣;
族盡親叛,可謂無主矣;
無釁而動,可謂無謀矣;
為羈終世,可謂無民矣;
亡無愛徵,可謂無德矣。
子比는 晉에서 13년을 있었지만 晉과 楚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 중 현달한 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인재가 없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가족은 모두 죽고 친척이 배반했으니 의지할 세력이 없다고 이를 수 있고,
楚에 이용할 만한 틈이 없는데도 함부로 움직였으니 지모가 없다고 이를 수 있고,
일생을 나그네로 외국에서 지냈으니 백성이 없다고 이를 수 있고,
망명하였는데도 楚에 그를 애석해하는 징상이 없으니 덕이 없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 通者: 명성이 사방에 알려진 자. 顯達한 자.
▶ 釁: 틈. 간격.
▶ 為羈終世: 자비가 종신토록 나그네로 晉에 있었다. 羈는 나그네.

 


王虐而不忌,子比涉五難以弒君,誰能濟之!
有楚國者,其棄疾乎?
君陳、蔡,方城外屬焉。
苛慝不作,盜賊伏隱,私欲不違,民無怨心。
先神命之,國民信之。
羋姓有亂,必季實立,楚之常也。
子比之官,則右尹也;數其貴寵,則庶子也;
以神所命,則又遠之;民無懷焉,將何以立?」
초영왕이 비록 포학하지만 각박하지 않았으니, 자비가 이 다섯 가지 난관을 건너 군주를 시해하려 하면 누가 그의 성공을 돕겠습니까!
楚를 얻을 자는 기질이 아닐까요?
陳과 蔡를 통치했고, 方城 밖의 지역도 그에게 귀속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가혹하거나 사악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도적들은 모두 몸을 숨겼으며, 사욕으로 인해 민심을 거스르지 않았기에 백성들도 원한이 없습니다.
조상과 신명이 그를 임명했고, 백성들도 그를 신임합니다.
또 미씨 성의 楚 왕실은 난이 발생하면 반드시 막내를 군주로 세웠으니, 이것이 楚의 상규였습니다.
자비의 관직은 右尹이고, 그의 존귀와 은총을 따지자면 서자입니다.
신이 명한 대로 말하면 벽옥에서 멀었으며, 백성들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으니 어찌 군주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

▶ 王虐而不忌: 靈王이 비록 포학하지만 그래도 각박하지는 않았다.
▶ 方城: 方城山. 이때 穿封戌이 죽었기 때문에 棄疾이 陳의 일까지 관리하였다.
▶ 苛慝: 포학하고 사악하다.
▶ 常: 常制. 항상 정해 있는 제도.
▶ 右尹: 낮은 官職이다.

 


宣子曰:
「齊桓、晉文不亦是乎?」
선자가 말하였다.
“齊桓公이나 晉文公도 서자로써 망명하지 않았던가?”
對曰:
「齊桓,衛姬之子也,有寵於釐公。
有鮑叔牙、賓須無、隰朋以為輔,有莒、衛以為外主,有高、國以為內主。
從善如流,施惠不倦。
有國,不亦宜乎?
昔我文公,狐季姬之子也,有寵於獻公。
好學不倦。
숙향이 대답하였다.
“齊桓公은 衛姬의 아들로 釐公의 총애가 있었습니다.
鮑叔牙와 賓須無와 隰朋이 보좌했고, 莒와 衛가 밖에서 도왔으며, 高氏와 國氏가 안에서 도왔습니다.
좋은 말을 따름을 물 흐르듯이 하고, 은혜를 베풂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소유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지난날 우리 文公은 狐季姬의 아들로 獻公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 齊桓, 晉文: 齊桓公과 晉文公은 모두 庶子출신이었다.
▶ 衛姬: 齊僖公의 첩.
▶ 有莒、衛以為外主: 齊桓公이 莒로 달아났을 때 衛外家의 도움이 있었다. 外主는 국외에서의 도움.
▶ 有高, 國以為內主: 國氏와 高氏는 齊의 上卿.
▶ 文公: 晋 文公重耳. 狐姬의 아들이다.


生十七年,有士五人,有先大夫子餘、子犯以為腹心,有魏犫、賈佗以為股肱,有齊、宋、秦、楚以為外主,有欒、郤、狐、先以為內主。
문공은 17세 때 인재 다섯을 얻었고, 선대부 子餘와 子犯이 심복이 되고, 魏犨와 賈佗가 팔다리처럼 보좌하였고, 齊, 宋, 秦, 楚가 밖에서 지지했고, 欒, 郤, 狐, 先씨 네 집안이 안에서 도왔습니다.
亡十九年,守志彌篤。
망명 19년에 지키고자 하는 뜻은 더욱 도타워졌습니다.
惠、懷棄民,民從而與之。
惠公과 懷公이 백성을 돌보지 않으니 백성들이 문공을 따르면서 도왔습니다.
故文公有國,不亦宜乎?
따라서 문공이 나라를 얻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子比無施於民,無援於外,去晉,晉不送;
歸楚,楚不迎。
何以有國!」
子比는 백성에게 베풂이 없고, 외부의 도움도 없으며, 晉을 떠남에 晉는 호송하지 않았습니다.
楚로 돌아감에 楚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나라를 소유하겠습니까!”
子比果不終焉,卒立者棄疾,如叔向言也。
자비는 과연 끝이 좋지 않았고, 끝내 즉위한사람은 기질이었으니 숙향이 말한 대로였다.

▶ 有士五人: 晉文公 重耳는 晉獻公의 아들이며, 젊어서부터 선비를 좋아하여 17세에 유능한 선비 다섯을 얻으니 趙衰, 문공의 외삼촌인 狐偃咎犯, 賈佗, 先軫, 魏武子가 그들이었다. <사기 세가 권39. 晉世家>
▶ 子餘, 子犯: 자여는 晉 中軍長趙衰이고 子犯은 舅犯즉 중이의 외삼촌 狐偃을 말한다.
▶ 腹心: 心腹.
▶ 魏犫: 魏武子.
▶ 股肱: 다리와 팔. 股肱之臣은 임금이 가장 믿고 중하게 여기는 신하를 말한다.
▶ 有欒, 郤, 狐, 先以為內主: 晋나라 大夫欒枝, 郤穀, 狐突, 先軫을 말한다.
▶ 彌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더욱 도탑게 함.
▶ 惠, 懷棄民: 晋惠公과 晉懷公이 백성을 救恤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平王二年,使費無忌如秦為太子建取婦。
평왕2년(기원전527년)에 費無忌를 秦에 보내 태자 建을 위해 태자비를 맞게 하였다.
婦好,來,未至,無忌先歸,說平王曰:
「秦女好,可自娶,為太子更求。」
태자비는 미색이 뛰어났으며, 태자비가 도착하기 전에 비무기가 먼저 돌아와 평왕을 부추겼다.
“秦의 여자가 아름다우니 왕께서 아내로 삼으시고 태자를 위해서는 다시 구하십시오. ”
平王聽之,卒自娶秦女,生熊珍。
평왕이 그 말을 따라 끝내 자신이 晉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熊珍을 낳았다.
更為太子娶。
태자를 위해서는 다시 아내를 얻게 하였다.

▶ 平王: 楚平王.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棄疾이었는데, 즉위한 뒤에 居로 이름을 고쳤다. 초공왕의 다섯째 아들이며, 강왕, 영왕, 자비의 동생이다.
▶ 費無忌: 費無極이라고도 하며, 춘추시대 楚의 대부. 楚平王 2년 왕명을 받들어 秦에 가서 태자 建을 위해 아내감을 구해 돌아왔는데, 여자의 미모가 뛰어나자 평왕에게 아내로 삼을 것을 권하였다. 그로 인해 여러 차례 태자 건을 헐뜯으며 평왕에게 태자 건을 살해하게 하여, 태자 건이 宋으로 달아났다. 이에 평왕에게 태자의 스승 伍奢(: 오자서의 아버지)와 그의 아들 伍尙을 살해하게 하였다. 평왕이 죽은 뒤 令尹 子常에게 참언하여 郤宛을 죽이게 하였다. 楚 사람이 이를 원망해 결국 영윤 자상에게 살해당하였다.
▶ 取: =娶. 장가들다. 아내를 얻다.
▶ 更: 다시. 따로.


是時伍奢為太子太傅,無忌為少傅。
이때 伍奢는 태자의 太傅였고 비무기는 少傅였다.
無忌無寵於太子,常讒惡太子建。
비무기가 태자의 총애를 얻지 못하자 늘 태자 建을 참소하며 헐뜯었다.
建時年十五矣,其母蔡女也,無寵於王,王稍益疏外建也。
태자 건은 당시 15세였으며, 그의 어머니는 蔡 여자였는데, 왕의 총애를 얻지 못했고, 왕은 점점 더 태자 건을 멀리하기에 이르렀다.

▶ 伍奢: 伍子奢. 춘추시대 楚의 大夫로 伍擧의 아들이고, 伍子胥의 아버지다. 楚平王이 즉위하자 태자 건의 스승인 太傅에 올랐다. 少傅 費無忌가 태자를 譖訴하자 강력하게 諫했는데, 평왕의 노여움을 사서 아들 伍尙과 함께 피살되었다.
▶ 讒惡: 참소하며 헐뜯다. 惡는 헐뜯다. 중상하다.
▶ 太子建: 초평왕의 아들. 楚平王이 費無忌의 참언을 믿고 그에게 太子 建을 죽이도록 하자 태자는 宋으로 달아났다. 당시 초평왕에게 쫓겨난 태자 건은 宋에 망명 갔다가 宋의 혼란상을 보고 송원공 편에 가담하였고, 다시 鄭으로 달아났다가 鄭定公과 재상인 子產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稍: 점점.

아래의 내용은 사기<오자서열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六年,使太子建居城父,守邊。
평왕6년(기원전523년)에 태자 건을 시켜 城父에 머무르며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無忌又日夜讒太子建於王曰:
「自無忌入秦女,太子怨,亦不能無望於王,王少自備焉。
且太子居城父,擅兵,外交諸侯,且欲入矣。」
비무기는 또 밤낮으로 평왕에게 태자 건을 헐뜯었다.
“제가 秦 여자를 데려온 이후로 태자가 저를 원망하고 있는데, 왕에 대한 원망도 없을 수 없으니, 왕께서는 스스로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게다가 태자는 성보에 있으면서 병권을 쥐고 밖으로 제후들과 교제하면서 도성으로 쳐들어오려고 합니다. ”
平王召其傅伍奢責之。
평왕은 태부 伍奢를 불러들여 이를 꾸짖었다.

▶ 城父: 楚 북방의 성.
▶ 望: 원망하다.


伍奢知無忌讒,乃曰:
「王柰何以小臣疏骨肉?」
오사는 비무기의 참소를 알고 말하였다.
“왕께서는 어찌하여 소인배로 인하여 골육을 멀리하십니까?”
無忌曰:
「今不制,後悔也。」
비무기가 말하였다.
“지금 막지 않으면 후회하실 터입니다. ”
於是王遂囚伍奢。
乃令司馬奮揚召太子建,欲誅之。
이에 평왕은 오사를 감옥에 가두었다.
(두 아들을 불러들여 아버지의 죽음을 면해주겠다고 하고)
司馬奮揚에게는 태자 건을 불러들여 죽이도록 하였다.
太子聞之,亡奔宋。
태자는 이를 듣고 황급히 宋으로 달아났다.
無忌曰:
「伍奢有二子,不殺者為楚國患。
盍以免其父召之,必至。」
비무기가 말하였다.
“오사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죽이지 않으면 楚의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어찌 아버지를 용서한다고 하여 불러들이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반드시 올 터입니다. ”
於是王使使謂奢:
「能致二子則生,不能將死。」
이에 평왕은 사람을 보내 오사에게 말하였다.
“두 아들을 오게 하면 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을 터이다. ”
奢曰:
「尚至,胥不至。」
오사가 말하였다.
“尙은 오겠지만 胥는 오지 않을 터이오. ”

▶ 盍: 어찌~않는가?
▶ 免: 죽음을 면하다.
▶ 尚至,胥不至: 尚은 오사의 장남이며, 胥는 伍子胥로 오사의 둘째 아들이다.

 


王曰:
「何也?」
왕이 물었다
‘왜 그런가?”
奢曰:
「尚之為人,廉,死節,慈孝而仁,聞召而免父,必至,不顧其死。
胥之為人,智而好謀,勇而矜功,知來必死,必不來。
然為楚國憂者必此子。」
오사가 대답하였다.
“尙은 사람됨이 곧아서 절개를 위해 죽을 수 있고, 효성스럽고 인자하여 부름을 받들어 아버지가 사면된다면, 틀림없이 오되 죽음을 돌보지 않을 터이오.
아들 胥는 사람됨이 지혜롭고 무슨 일을 꾀하길 좋아하고, 용감하고 공명을 중시하여 오면 죽음을 알 터이니 틀림없이 오지 않을 터이오.
그러니 楚에 걱정을 끼칠 사람은 분명 이 아들일 터이오. ”
於是王使人召之,曰:
「來,吾免爾父。」
이에 평왕은 그들을 불러들이려고 사람을 보내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오면 내가 너희 아버지를 사면할 터이다. ”
伍尚謂伍胥曰:
「聞父免而莫奔,不孝也;
父戮莫報,無謀也;度能任事,知也。
子其行矣,我其歸死。」
오상이 동생 오서에게 말하였다.
“아버지를 사면한다는 말을 듣고도 달려가지 않음은 불효이다.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는데 보복하지 않는다면 꾀가 없는 것이니 능력을 헤아려 일을 맡는 것이 지혜이다.
너는 달아나고 나는 가서 죽겠다.”
伍尚遂歸。
오상은 마침내 楚로 돌아갔다.
伍胥彎弓屬矢,出見使者,曰:
「父有罪,何以召其子為?」
오서는 활에 화살을 메긴 채 밖으로 나가 사신을 만나서 말하였다.
“아버지에게 죄가 있다면서 어째서 그 자식들을 부르는가?”
將射,使者還走,遂出奔吳。
화살을 쏘려 하자 사신은 달아났고 오서는 마침내 吳로 달아났다.
伍奢聞之,曰:
「胥亡,楚國危哉。」
오사가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오서가 도망쳤으니, 楚가 위태롭겠구나. ”
楚人遂殺伍奢及尚。
楚의 군주가 끝내 오사와 오상을 죽였다.

▶ 伍子胥: 춘추시대의 정치가로 이름은 員이며 子胥는 字이다. 楚 출신이나 아버지가 費無忌의 흉계로 인하여 楚平王의 노여움을 사서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니 楚를 탈출하였다.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吳로 망명하여 오왕 闔閭에게 등용되어 손무와 함께 楚를 격파하고 복수하였으나, 오왕 합려가 죽고 아들인 夫差가 즉위하자 사이가 벌어지고 모함을 받아 자살하였다.<史記列傳권66. 伍子胥列傳>

十年,楚太子建母在居巢,開吳。
평왕10년(기원전519년)에 楚 태자 건의 어머니가 居巢에 있었는데 吳 사람들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다.
吳使公子光伐楚,遂敗陳、蔡,取太子建母而去。
吳는 공자 光에게 楚를 정벌하게 하여 陳과 蔡를 물리치고 태자 건의 어머니를 데리고 갔다.
楚恐,城郢。
楚는 두려워 도성인 郢에 성을 쌓았다.
初,吳之邊邑卑梁與楚邊邑鐘離小童爭桑,兩家交怒相攻,滅卑梁人。
당초 吳의 변경 마을 卑梁과 楚의 변경 마을 鍾離의 아이들이 뽕나무를 차지하려고 싸웠으며, 두 집안 사람들이 화가 나서 서로를 공격한 끝에 종리사람들이 비량 사람들을 죽였다.
卑梁大夫怒,發邑兵攻鐘離。
비량의 대부가 노하여 읍의 병사들을 일으켜 종리를 공격하였다.
楚王聞之怒,發國兵滅卑梁。
楚왕이 이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軍隊를 징발하여 비량을 점령하였다.
吳王聞之大怒,亦發兵,使公子光因建母家攻楚,遂滅鐘離、居巢。
吳왕도 이를 듣고 크게 화가 나서 역시 軍隊를 일으켜, 공자 광으로 하여금 태자 건의 어머니의 집이 楚에 있다는 이유로 楚를 공격하여 종리와 거소를 점령하였다.
楚乃恐而城郢。
이에 楚가 두려워 郢에 성을 쌓은 것이다.

▶ 居巢: 지금의 安徽省巢縣 서남쪽.
▶ 吳使公子光伐楚: 오왕 요8년(기원전519년), 吳는 공자 광에게 楚를 치게 하여 楚軍을 패배시키고 지난날 楚 태자였던 建의 어머니를 居巢에서 모시고 돌아왔다. <사기 권31. 오태백세가>
▶ 城郢: 郢에 성을 쌓다. 郢은 楚의 국도이다.
▶ 吳之邊邑卑梁: 楚의 변경읍인 卑梁氏의 처녀들과 吳의 변경 읍에 사는 여자들이 뽕나무를 놓고 다투었으며, 양쪽 여자들의 집안사람들까지 성이 나서 서로를 없애려 하자, 두 나라 변경의 읍장들이 이를 듣고 화를 내며 서로를 공격한 끝에 吳의 변경 읍을 멸하였다. 이에 오왕이 노한 까닭에 楚를 공격하여 두 마을을 함락시키고 돌아온 것이다.[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 鐘離: 楚 변방의 읍.
▶ 爭桑: 뽕잎의 채집으로 싸우다.

 


十三年,平王卒。
평왕13년(기원전516년)에 평왕이 죽었다.
將軍子常曰:
「太子珍少,且其母乃前太子建所當娶也。」
欲立令尹子西。
장군 子常이 말하기를
“태자 珍이 어리고 또 그 어머니는 이전에 태자 건이 아내로 맞았어야 할 사람입니다. ”
라고 하며 令尹 子西를 세우려고 하였다.
子西,平王之庶弟也,有義。
자서는 평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의리가 있었다.
子西曰:
「國有常法,更立則亂,言之則致誅。」
자서가 말하였다.
“나라에는 정해진 법이 있으니 왕을 바꾸어 세우면 반란이 생길 터이다, 자상이 그렇게 말했다면 죽어 마땅하다. ”
乃立太子珍,是為昭王。
이에 태자 진을 옹립하니 그가 昭王이다.

▶ 令尹 子常: 子常. 楚昭王 때의 令尹. 이름은 囊瓦. 子囊의 손자. 두터운 충정과 명철함을 지닌 賢臣으로 吳軍의 침입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국란을 극복하고 망국 직전의 楚를 일으켜 세우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다.
▶ 子西: 平王의 庶長子이다.
▶ 昭王: 楚昭王. 楚의 군주로 卲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珍이었다가 즉위 후 軫으로 고쳤고, 이후 다시 壬으로 고쳤다. 평왕의 아들이다. 평왕이 태자 건을 위해 秦에서 그 태자비를 구하였는데, 신부가 될 孟嬴이 아름다운데다 費無忌의 책동을 받아 평왕이 妃로 삼아 아들을 낳았는데, 보배처럼 귀한 자식이란 뜻으로 이름을 珍으로 하였다.

昭王元年,楚眾不說費無忌,以其讒亡太子建,殺伍奢子父與郤宛。
소왕 원년(기원전515년), 楚 사람들이 비무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비무기의 모함으로 태자 건이 달아났고 伍奢부자와 郤宛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宛之宗姓伯氏子及子胥皆奔吳,吳兵數侵楚,楚人怨無忌甚。
극완과 종친인 伯氏의 아들 嚭와 오자서가 함께 吳로 달아났고, 吳의 軍이 자주 楚를 침략하자 楚 사람들은 비무기를 더욱 미워하였다.
楚令尹子常誅無忌以說眾,眾乃喜。
楚의 영윤 子常이 비무기를 죽여 사람들을 달래니 사람들은 그때서야 기뻐하였다.

▶ 昭王: 楚昭王. 楚의 군주로 이름은 珍이었다가 즉위 후 軫으로 고쳤고, 이후 다시 壬으로 고쳤다. 평왕의 아들이다.
▶ 郤宛: 費無忌가 좌윤을 지낸 백극완을 꺼려 영윤 囊瓦(: 자상)에게 그를 모함해 낭와가 극완을 죽이고 극완의 동성인 극씨, 백씨, 진씨를 몰살시켰다.
▶ 伯氏子: 伯嚭. 백주리의 손자. 간신 費無忌가 아버지인 백극완을 영윤 囊瓦(: 자상)에게 모함하여 그의 일가족과 함께 살해당하게 만들었다. 伯嚭는 죽음을 피해 吳로 도망쳐 망명하고 있던 오자서를 찾았다. 오왕 합려는 백비를 大夫로 삼았다.
▶ 子常: 楚昭王때의 令尹. 囊瓦. 子囊의 손자.
▶ 說: 달래다.

四年,吳三公子奔楚,楚封之以捍吳。
소왕4년(기원전512년)에 吳의 공자 셋이 楚로 달아났고, 楚는 그들에게 땅을 주어 吳를 막게 하였다.
五年,吳伐取楚之六、潛。
소왕5년(기원전511년)에 吳가 楚의 六과 潛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七年,楚使子常伐吳,吳大敗楚於豫章。
소왕7년(기원전509년)에 楚가 자상에게 吳를 공격하게 했으나 吳는 豫章에서 楚를 크게 물리쳤다.

▶ 吳三公子: 춘추좌씨전에는 二公子로 기록되어 있다.
2공자는 掩餘와 燭庸이다. 이들은 吳王僚의 同母弟로 僚의 명으로 출정하여 楚의 潛邑을 포위하고 있었는데, 이때 국내에 정변이 일어나 公子光(: 闔廬)이 僚를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掩餘는 徐國으로 도망가고 燭庸은 鍾吾國으로 도망갔다. 오왕 합려가 徐人을 보내 엄여를 잡게 하고, 鍾吾人을 보내 燭庸을 잡게 하니 두 公子는 楚로 도망갔다. <춘추좌씨전魯昭公31기원전512년>
▶ 捍: 막다. 방어하다.
▶ 六: 六城. 지금의 安徽省六安.
▶ 潜: 潜城. 楚의 읍. 지금의 安徽省霍山縣동쪽.
▶ 豫章: 漢水 동쪽과 長江 북쪽의 지명.

 


十年冬,吳王闔閭、伍子胥、伯與唐、蔡俱伐楚,楚大敗,吳兵遂入郢,辱平王之墓,以伍子胥故也。
소왕10년(기원전506년) 겨울에 오왕 闔閭, 伍子胥, 伯嚭가 唐, 蔡와 함께 楚를 공격하여 楚가 대패했으며, 吳의 軍이 郢으로 진입해 平王의 무덤에 욕보이니 이는 오자서 때문이었다.
吳兵之來,楚使子常以兵迎之,夾漢水陣。
吳의 軍이 오자 楚는 子常에게 軍을 이끌고 맞게 하여 漢水를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吳伐敗子常,子常亡奔鄭。
吳가 자상의 軍隊를 물리치니 자상은 鄭으로 달아났다.
楚兵走,吳乘勝逐之,五戰及郢。
楚의 軍이 도주하자 吳는 승기를 잡아 추격하여 다섯 번 싸운 끝에 郢都에 이르렀다.
己卯,昭王出奔。庚辰,吳人入郢。
기묘일에 소왕이 달아났다. 경진일에 吳軍이 郢으로 진입하였다.

▶ 郢: 楚의 首都. 당초 초 문왕이 丹陽에서 郢으로 천도하였었다. 郢은 지금의 湖北省 江陵縣 부근이다.
▶ 辱平王之墓: 오자서와 백비는 평왕의 시신을 무덤에서 꺼내어 채찍으로 때려 그 부친의 원수를 갚았다. 吳軍이 영을 공격하였을 때 오자서는 초소왕을 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쳐서 시체를 꺼내어 채찍질을 3백 번 가한 뒤에 그만두었다.<사기 열전 권66. 오자서열전>

 


昭王亡也至雲夢。
소왕은 달아나 雲夢에 이르렀다.
雲夢不知其王也,射傷王。
운몽 사람들은 그들의 왕인지 모르고 활을 쏘아 부상을 입혔다.
王走鄖。
소왕은 鄖邑으로 도망쳤다.
鄖公之弟懷曰:
「平王殺吾父,今我殺其子,不亦可乎?」
鄖公의 동생 懷가 말하였다.
“평왕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지금 내가 그 아들을 죽인다고 안 될 것은 없겠지요?”
鄖公止之,然恐其弒昭王,乃與王出奔隨。
운공이 그를 말렸고, 그가 소왕을 시해할까 염려하여 소왕과 함께 隨로 달아났다.
吳王聞昭王往,即進擊隨,謂隨人曰:
「周之子孫封於江漢之閒者,楚盡滅之。」
오왕은 소왕이 도망쳤다는 말을 듣고 즉시 隨로 진격하여 隨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주나라의 자손이 長江과 漢水사이에 제후로 봉해졌으나, 楚가 그들을 전부 멸망시켰다. ”
欲殺昭王。
그리고는 소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 鄖: 서주 초기에서 춘추시대까지의 周나라의 제후국으로 楚에 의해 멸망하였다.
▶ 隨: 隨. 姬姓의 나라로 侯爵이다. 지금의 義陽隨縣이다.

 


王從臣子綦乃深匿王,自以為王,謂隨人曰:
「以我予吳。」
소왕을 따르던 신하 子綦가 소왕을 깊이 숨겨 놓고 자신이 소왕이라 칭하며 隨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吳에 넘기시오. ”
隨人卜予吳,不吉,乃謝吳王曰:
「昭王亡,不在隨。」
隨의 군주가 점을 쳐보니 吳에 넘겨줌이 불길했으므로 오왕에게 사죄하였다.
“소왕은 도망쳐서 隨에 없습니다. ”
吳請入自索之,隨不聽,吳亦罷去。
吳가 들어가서 직접 수색하겠다고 했으나 隨가 들어주지 않자 吳도 물러갔다.

▶ 索: 수색하다.

 

昭王之出郢也,使申鮑胥請救於秦。
소왕은 郢에서 도망치면서 申包胥를 秦에 보내 구원을 청하게 하였다.
秦以車五百乘救楚,楚亦收餘散兵,與秦擊吳。
秦은 500승의 전차로 楚를 구원하러 나섰고, 楚 역시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秦과 함께 吳를 공격하였다.
十一年六月,敗吳於稷。
소왕11년(기원전505년) 6월에 稷에서 吳를 물리쳤다.
會吳王弟夫概見吳王兵傷敗,乃亡歸,自立為王。
마침 오왕의 동생 夫槪가 오왕의 軍이 사상자를 내고 패하는 것을 보고는 도망쳐 吳로 돌아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闔閭聞之,引兵去楚,歸擊夫概。
이 소식을 들은 오왕 합려는 병사를 이끌고 楚를 떠나 吳로 돌아와 부개를 공격하였다.
夫概敗,奔楚,楚封之堂谿,號為堂谿氏。
부개는 패하여 楚로 달아났으며, 초소왕은 그를 堂谿땅에 봉하여 堂谿氏라 불렀다.

▶ 申鮑胥: 楚의 大夫. 申包胥가 秦에 가서 軍隊를 내어 구원해 주기를 빌었다. 秦哀公은 처음엔 응답하지 않았지만, 신포서가 조정의 뜰에서 꿇어앉고 곡을 한 지 7일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자 마침내 그 충성에 감동하여 軍隊를 내어 楚를 구원하였다. <춘추좌씨전魯定公4기원전506년>
▶ 稷: 楚의 땅.
▶ 夫槪: 오왕 제번의 아들이며 오왕 합려의 동생.
▶ 堂谿: 지금의 하남성 西平縣 서남. [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楚昭王滅唐九月,歸入郢。
초소왕이 唐를 멸망시키고 9월에 郢으로 돌아왔다.
十二年,吳復伐楚,取番。
소왕12년(기원전504년)에 吳가 다시 楚를 정벌하여 番邑을 점령하였다.
楚恐,去郢,北徙都鄀。
楚는 두려워하여 영도를 버리고 북쪽 鄀邑으로 옮겼다.

▶ 番: 지금의 江西省波陽縣.
▶ 鄀: 楚의 邑. 지금의 湖北省宜城縣.

十六年,孔子相魯。
소왕16년(기원전500년), 孔子가 魯의 재상이 되었다.
二十年,楚滅頓,滅胡。
소왕20년(기원전496년), 楚가 頓과 胡를 멸망시켰다.
二十一年,吳王闔閭伐越。
소왕21년(기원전495년), 오왕 합려가 越를 공격하였다.
越王句踐射傷吳王,遂死。
월왕 句踐이 오왕 합려를 화살로 쏘아 상처을 입혔고 오왕이 마침내 죽었다.
吳由此怨越而不西伐楚。
吳는 이 일로 越에 원한을 품었고, 이로써 서쪽 楚에 대한 공격을 멈추었다.

▶ 頓: 頓子國.
▶ 胡: 胡國.

 


二十七年春,吳伐陳,楚昭王救之,軍城父。
소왕27년(기원전489년) 봄에 吳가 陳 정벌에 나서자 초소왕이 구원하고자 城父에 軍隊를 주둔시켰다.
十月,昭王病於軍中,有赤雲如鳥,夾日而蜚。
10월에 소왕이 진중에서 병이 나자 붉은 새 모양을 한 구름이 해를 끼고 나는 모습이 있었다.
昭王問周太史,太史曰:
「是害於楚王,然可移於將相。」
소왕이 周太史에게 물었더니 태사가 말하였다.
“이는 昭王께 해로운 징조입니다만 장수와 재상들에게 옮겨가게 할 수 있습니다. ”
將相聞是言,乃請自以身禱於神。
장수와 재상들이 이 말을 듣고 자신들을 대신하라고 신에게 기도하겠다고 청하였다.

▶ 害於楚王: 태양은 군주를 상징하는데, 妖氣가 태양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왕의 신상에 해당한다고 한 것이다.

 

昭王曰:
「將相,孤之股肱也,今移禍,庸去是身乎!」
소왕이 말하였다.
“장수와 재상은 나의 팔다리와 같거늘 지금 화를 옮겨가게 한다고 해서 어찌 병이 내 몸을 떠나겠는가!”
弗聽。
듣지 않았다.
卜而河為祟,大夫請禱河。
점을 쳐보니 황하의 신 때문이라 하여 대부들이 황하에 제사 지내기를 청하였다.
昭王曰:
「自吾先王受封,望不過江、漢,而河非所獲罪也。」
소왕이 말하였다.
“우리 선왕께서 제후에 봉해진 이래 望祭를 드린 강은 장강과 한수 밖에 없고, 황하의 신께 지은 죄가 없다. ”
止不許。
허락하지 않았다.
孔子在陳,聞是言,曰:
「楚昭王通大道矣。
其不失國,宜哉!」
공자가 陳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초소왕은 대도를 알았다.
그가 나라를 잃지 않음은 당연하다!”

▶ 祟: 빌미. 양화를 입히다.
▶ 望: 望祭. 고대 제사명으로 멀리서 산천을 바라보면서 산천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당시 제후는 망제를 행하였다.

 


昭王病甚,乃召諸公子大夫曰:
「孤不佞,再辱楚國之師,今乃得以天壽終,孤之幸也。」
소왕의 병이 깊어지자 공자들과 대부들을 불러 말하였다.
“내가 무능하여 두 번이나 楚軍에게 치욕을 당했으나 지금 천수를 누리고 떠나니 나의 행운이다. ”
讓其弟公子申為王,不可。
그리고는 동생 공자 申게 왕위를 양보했으나 안된다고 하였다.
又讓次弟公子結,亦不可。
다시 그 다음 동생인 공자 結에게 양위했으나 역시 안된다고 하였다.
乃又讓次弟公子閭,五讓,乃後許為王。
다시 다음 동생 공자 閭에게 양위했는데, 다섯 번 양보한 뒤에 허락하여 왕이 되었다.

▶ 不佞: 재주가 없다. 무능하다.
▶ 公子申: 申은 子西, 結은 子期, 閭는 啓이다. 子閭가 다섯 차례 사양하여 명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뒤에 昭王에게 자기를 왕으로 세우라고 허락한 것이다.


 

將戰,庚寅,昭王卒於軍中。
전쟁을 하려는데, 경인일에 소왕이 군중에서 죽었다.
子閭曰:
「王病甚,捨其子讓群臣,臣所以許王,以廣王意也。
今君王卒,臣豈敢忘君王之意乎!」
공자 閭가 말하였다.
“왕께서 병이 심하여 자신의 아들을 놓아두고 신하들에게 양위하셨으며, 신이 왕이 되기를 허락한 까닭은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제 군왕께서 세상을 뜨셨으니 신이 어찌 감히 군왕의 마음을 잊겠습니까!”
乃與子西、子綦謀,伏師閉涂,迎越女之子章立之,是為惠王。
이에 子西, 子綦와 의논하여 軍을 매복시켜 길을 막고 越 여자가 낳은 아들 子章을 맞이하여 세우니 그가 惠王이다.
然後罷兵歸,葬昭王。
그런 다음 撤軍하여 돌아와 소왕의 장례를 지냈다.

▶ 閉塗: 변경의 관문을 막아 외국 사신의 통행을 막았다.


▶ 越女: 昭王의 첩.

惠王二年,子西召故平王太子建之子勝於吳,以為巢大夫,號曰白公。
혜왕2년(기원전487년)에 子西가 吳에 있는 죽은 평왕의 태자 建의 아들 勝을 불러 巢邑의 대부로 삼고 白公이라 불렀다.
白公好兵而下士,欲報仇。
백공이 용병을 좋아하였고 선비들을 예우하면서 아버지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다.
六年,白公請兵令尹子西伐鄭。
혜왕6년(기원전483년)에 백공은 영윤 자서에게 출병하여 鄭을 토벌하자고 청하였다.
初,白公父建亡在鄭,鄭殺之,白公亡走吳,子西復召之,故以此怨鄭,欲伐之。
당초 백공의 아버지 건이 도망해 鄭에 있을 때 鄭이 그를 죽이자 백공은 吳로 도망쳤는데, 子西가 그를 다시 부른 까닭에 鄭에 원한을 품고 공격하려 한 것이다.
子西許而未為發兵。
子西가 허락했지만 軍隊를 일으키지는 못하였다.

▶ 惠王: 초혜왕.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章이며, 昭王의 아들이다. 혜왕10년 白公 勝의 위협을 받았는데, 葉公 子高의 도움으로 구조를 받고 백공 승을 죽인 뒤 비로소 복위할 수 있었다. 나중에 陳과 蔡, 杞 등을 멸망시켰다.
▶ 太子建: 초평왕의 아들. 비무기의 참소로 鄭으로 달아났다가 피살되었다.
▶ 子西: 楚의 令尹. 平王의 庶長子이다.
▶ 白公勝: 춘추시대 楚 사람으로 이름이 勝이고, 楚平王의 손자라서 王孫 勝으로도 불린다. 白에 봉해지고 大夫가 되었다. 아버지 太子 建이 음해를 입어 鄭으로 달아났다가 피살되었다. 백공승은 伍子胥를 따라 吳로 달아났다. 楚惠王 2년 그를 불러 백읍의 대부로 삼고 白公이라 하였다. 혜왕6년 원수를 갚고자 令尹子西에게 鄭을 공격할 병사를 청했는데, 자서가 허락하였다. 병사를 일으키기 전에 晉이 鄭을 공격했고, 楚는 鄭을 구원하여 두 나라는 동맹을 맺었다. 화가 난 백공 승은 子西와 司馬 子期를 죽이고 초혜왕을 습격하여 楚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나중에 葉公子高와 싸우다가 패하자 목을 매 자살하였다. <춘추좌씨전 魯哀公 17기원전478년>

 


八年,晉伐鄭,鄭告急楚,楚使子西救鄭,受賂而去。
혜왕8년(기원전481년)에 晉이 鄭을 공격하자 鄭은 楚에 위급함을 알렸으며, 楚는 子西를 시켜 鄭을 구원하게 했으나, 자서는 뇌물을 받고 돌아와 버렸다.
白公勝怒,乃遂與勇力死士石乞等襲殺令尹子西、子綦於朝,因劫惠王,置之高府,欲弒之。
백공 승이 노하여 용기와 힘을 갖추고 죽음도 불사하는 무사 石乞 등과 함께 영윤 子西와 子綦를 조정에서 습격하여 죽이고, 혜왕을 겁박하여 高府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다.
惠王從者屈固負王亡走昭王夫人宮。
혜왕의 시종 屈固가 왕을 업고 昭王의 부인이 있는 궁으로 달아났다.
白公自立為王。
백공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
月餘,會葉公來救楚,楚惠王之徒與共攻白公,殺之。
한 달 남짓 지나 葉公이 楚를 구하러 오자 초혜왕의 무리들은 함께 백공을 공격하여 죽였다.
惠王乃復位。
혜왕이 復位하였다.
是歲也,滅陳而縣之。
이해 陳을 멸망시키고 縣으로 삼았다.

▶ 屈固: 석기의 시종.
▶ 石乞: 백공 勝의 부하.
▶ 子期: 公子 結.
▶ 葉公: 성은 沈, 이름은 諸梁, 자는 子高. 楚의 대부로 섭현을 다스렸다.

 


十三年,吳王夫差彊,陵齊、晉,來伐楚。
혜왕13년(기원전476년)에 오왕 夫差가 강성하여 齊와 晉을 깔보고 楚까지 공격해왔다.
十六年,越滅吳。
혜왕16년(기원전473년)에 越이 吳를 멸망시켰다.
四十二年,楚滅蔡。
혜왕42년(기원전447년)에 楚가 蔡를 멸망시켰다.
四十四年,楚滅杞。與秦平。
혜왕44년(기원전445년)에 楚가 杞를 멸망시키고 秦과 강화하였다.
是時越已滅吳而不能正江、淮北;
楚東侵,廣地至泗上。
이 무렵 越은 吳를 멸망시켰지만 장강와 회수 북쪽까지는 통치하지 못하였는데, 楚가 동쪽을 공략하여 땅을 泗水부근까지 넓혔다.

▶ 正: 통치하다.

 

五十七年,惠王卒,子簡王中立。
혜왕57년(기원전432년)에 혜왕이 죽고, 아들 簡王中이 뒤를 이었다.

▶ 簡王中: 楚 簡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중이며, 초혜왕의 아들이다.

 

簡王元年,北伐滅莒。
간왕 원년(기원전431년), 북쪽으로 莒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八年,魏文侯、韓武子、趙桓子始列為諸侯。
간왕8년(기원전424년)에 魏文侯, 韓武子, 趙桓子가 제후의 반열에 들었다.

▶ 魏文侯, 韓武子, 趙桓子始列為諸侯: 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趙・魏의 세 나라의 大夫魏斯, 韓虔, 趙籍이 諸侯의 반열에 들었다.
실제로는 기원전403년에 周威烈王이 趙, 韓, 魏 모두를 제후로 임명하였다.

二十四年,簡王卒,子聲王當立。
간왕24년(기원전408년), 간왕이 죽고, 아들 聲王當이 즉위하였다.
聲王六年,盜殺聲王,子悼王熊疑立。
성왕6년(기원전402년)에 도적이 성왕을 살해하여 아들 悼王 熊疑가 즉위하였다.
悼王二年,三晉來伐楚,至乘丘而還。
도왕2년(기원전400년), 三晋이 楚를 쳐들어와서 乘丘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갔다.
四年,楚伐周。
도왕4년(기원전398년)에 楚가 주나라를 공격하였다.
鄭殺子陽。
鄭은 子陽을 죽였다.
九年,伐韓,取負黍。
도왕9년(기원전393년)에 韓을 공격하여 負黍를 점령하였다.
十一年,三晉伐楚,敗我大梁、榆關。
도왕11년(기원전391년)에 三晋이 楚를 공격하여 大梁과 楡關에서 楚를 패퇴시켰다.
楚厚賂秦,與之平。
楚가 秦에 후한 뇌물을 주며 강화하였다.
二十一年,悼王卒,子肅王臧立。
도왕21년(기원전381년)에 도왕이 죽고, 아들 肅王 藏이 즉위하였다.

▶ 悼王: 楚悼王. 楚의 군주로 이름은 疑이며, 성왕의 아들이다.
▶ 三晉: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趙・魏의 세 나라.
▶ 鄭殺子陽: 鄭繻公은 鄭의 제22대 군주로 이름은 駘다. 수공25년에 수공이 재상 子陽을 죽였고, 2년 후 자양의 당파가 수공 태를 시해하고, 유공의 동생 乙을 세우니 그가 鄭君이다.
▶ 肅王: 楚肅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藏이며, 悼王의 아들이다.


肅王四年,蜀伐楚,取茲方。
숙왕4년(기원전377년)에 蜀이 楚를 공격하여 玆方을 점령하였다.
於是楚為捍關以距之。
이에 楚는 扞關을 거점으로 촉을 막았다.
十年,魏取我魯陽。
숙왕10년(기원전371년)에 魏가 楚의 魯陽을 점령하였다.
十一年,肅王卒,無子,立其弟熊良夫,是為宣王。
숙왕11년(기원전370년)에 숙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어서 그의 동생 熊良夫를 세우니 그가 宣王이다.

 

宣王六年,周天子賀秦獻公。
선왕6년(기원전364년)에 周천자가 秦獻公에게 승리를 축하하였다.
秦始復彊,而三晉益大,魏惠王、齊威王尤彊。
秦은 다시 강대해지기 시작했고 三晉도 더욱 커졌으며, 魏惠王과 齊威王이 더욱 강성해졌다
三十年,秦封衛鞅於商,南侵楚。
선왕30년(기원전340년)에 秦이 衛鞅을 商땅에 봉하고, 남쪽으로 楚를 침략하였다.
是年,宣王卒,子威王熊商立。
이해에 宣王이 죽고, 아들 威王 熊商이 즉위하였다.

▶ 宣王: 楚宣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良夫이다. 도왕의 아들로 전대 숙왕이 아들이 없어 숙왕의 동생인 양부가 왕이 되었다.
▶ 周天子賀秦獻公: 秦獻公 21년(기원전364년), 晉과 石門에서 교전하여 6만 명의 목을 베자 周천자가 수놓은 예복을 보내 축하하였다. <사기 본기 권05. 秦本紀>
▶ 衛鞅: 商鞅. 商君. 전국시대 法家를 대표하는 인물로 衛 공실의 후예이다.
위나라에서 관직을 구하다 쓰이지 않자 秦으로 가서 孝公에게 패업을 달성하는 방법을 유세하고 큰 신임을 얻어 左庶長에 임명되었다. 河西의 전쟁 중에 공을 세워 商邑을 하사받아서 商君, 혹은 商鞅으로 일컫게 되었다. 그는 秦의 富國強兵을 위해 變法을 시행하였다.
▶ 威王熊商: 楚威王 熊商.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商이며, 宣王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중에 齊의 田嬰이 楚를 속이자 병사를 일으켜 齊를 공격하여 齊軍을 徐州에서 격파하였다.

 


威王六年,周顯王致文武胙於秦惠王。
위왕6년(기원전334년)에 周顯王이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에 올린 고기를 秦惠王에게 보냈다.

▶ 周顯王: 전국시대 周나라의 군주로 성은 姬씨고, 이름은 扁으로, 威烈王의 손자다. 현왕5년 秦이 晉과 싸워 이기자 黼黻을 秦獻公에게 바치며 축하하니, 헌공이 伯이라 칭하였다. 현왕35년 秦惠公에게 胙를 보내니 혜공이 王이라 칭하였다.
▶ 胙: 제사를 지낸 고기.
▶ 秦惠王: 惠文君. 전국시대 晉의 제26대 군주로 惠文君, 惠王, 秦惠王, 秦惠文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嬴, 名은 駟이다. 秦의 제25대 군주인 孝公의 아들이며, 제27대 武王과 제28대 昭襄王의 아버지이다. 기원전324년에 秦의 군주로는 처음으로 王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七年,齊孟嘗君父田嬰欺楚,楚威王伐齊,敗之於徐州,而令齊必逐田嬰。
위왕7년(기원전333년)에 齊 孟嘗君의 아버지 田嬰이 楚를 기만하자 초위왕이 齊를 공격하여 徐州에서 齊를 이기고 齊에게 전영을 반드시 축출하라고 명령하였다.
田嬰恐,張丑偽謂楚王曰:
「王所以戰勝於徐州者,田盼子不用也。
盼子者,有功於國,而百姓為之用。
嬰子弗善而用申紀。
申紀者,大臣不附,百姓不為用,故王勝之也。
今王逐嬰子,嬰子逐,盼子必用矣。
復搏其士卒以與王遇,必不便於王矣。」
전영이 두려워 하였고, 張丑이 거짓으로 초왕에게 말하였다.
“왕이 서주에서 승리한 것은 齊가 田盼子를 기용하지 않아서입니다.
반자는 齊에 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그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전영이 그를 좋아하지 않아 申紀를 기용했던 것입니다.
申紀란 자는 대신들이 따르지 않고,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왕이 승리하신 것입니다.
지금 왕께서 전영을 내쫓으라고 해서 전영이 쫓겨난다면 전반자가 기용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다시 병사들을 수습하여 왕에 맞선다면 틀림없이 왕께 불리할 터입니다. ”
楚王因弗逐也。
초왕이 이 때문에 전영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았다.

▶ 孟嘗君: 齊의 孟嘗君 田文. 戰國時代의 정치가로 전국시대의 戰國四君(: 全國 4公子)의 한 사람이다. 성은 嬀, 氏는 田, 이름은 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諡號이다.
▶ 田嬰: 孟嘗君의 아버지. 성은 嬀, 氏는 田, 이름은 嬰으로 嬰子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齊의 대신. 처음 장수가 되어 馬陵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薛公이라 불렸고, 靖郭君이라 불려졌다.
▶ 田嬰欺楚: 제선왕9년(기원전334년), 전영이 齊 재상이 되었다. 제선왕과 위양왕이 徐州에서 만나 서로 왕으로 칭하기로 하였다. 楚威王이 이를 듣고 전영을 꾸짖었다. 이듬해 楚가 서주에서 齊軍을 물리치고 사자를 보내 전영을 쫓아내라고 하였다. 전영이 대신 張丑을 보내 초위왕을 설득하니 초위왕이 생각을 거두었다. <사기 권75. 맹상군열전>
▶ 田盼子: 齊宣王 때의 장군.
▶ 搏: 撫와 통용되어 위로하다.

 


十一年,威王卒,子懷王熊槐立。
위왕11년(기원전329년)에 위왕이 죽고, 아들 懷王 熊槐가 즉위하였다.
魏聞楚喪,伐楚,取我陘山。
魏는 楚에 국상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楚를 공격하여 楚의 陘山을 빼앗았다.

▶ 陘山: 지금의 하남성 신정현 서남쪽.

懷王元年,張儀始相秦惠王。
회왕원년(기원전328년)에 張儀가 처음으로 秦혜왕의 재상이 되었다.
四年,秦惠王初稱王。
회왕4년(기원전325년)에 秦혜왕이 처음으로 왕을 칭하였다.

▶ 懷王: 楚懷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성은 熊氏고, 이름은 槐며, 威王의 아들이다. 재위 기간 중에 정치는 부패하고 賢臣들은 배척을 당하였다. 회왕16년 張儀가 秦에서 와서 영토6백 리를 할애하겠다고 하면서 秦과 우호를 맺고 齊와는 관계를 끊으라고 권했는데, 이를 믿었다. 다음 해 秦이 땅을 주지 않자 공격했지만 대패하고 漢中의 땅까지 잃은 데다 병사8만 명이 전사하였다. 회왕30년 屈原의 만류를 뿌리치고 秦에 들어갔다가 억류된 뒤 그곳에서 죽었다.
▶ 張儀: 전국시대 魏의 모사. 蘇秦의 주선으로 秦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魏·趙·韓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秦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六年,楚使柱國昭陽將兵而攻魏,破之於襄陵,得八邑。
회왕6년(기원전323년)에 楚는 柱國인 昭陽에게 軍을 이끌고 魏를 공격하게 하여 襄陵에서 격파하고 여덟 개 성읍을 탈취하였다.
又移兵而攻齊,齊王患之。
다시 軍을 이동시켜 齊를 공격하니 齊왕이 걱정하였다.
陳軫適為秦使齊,齊王曰:
「為之柰何?」
陳軫이 마침 秦의 사신으로 齊에 오자 齊王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陳軫曰:
「王勿憂,請令罷之。」
진진이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제가 楚를 물러가게 하겠습니다. ”
即往見昭陽軍中,曰:
「願聞楚國之法,破軍殺將者何以貴之?」
진진이 곧 楚 군영으로 가서 소양을 만나 말하였다.
“楚의 국법을 듣고 싶습니다. 적군을 물리치거나 적장을 죽이는 자에게는 어떻게 귀하게 대접합니까?”
昭陽曰:
「其官為上柱國,封上爵執珪。」
소양이 말하였다.
“관직은 上柱國에 임명하고, 최고 작위인 執珪에 봉하오. ”
陳軫曰:
「其有貴於此者乎?」
진진이 물었다.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까?”
昭陽曰:
「令尹。」
소양이 말하였다.
“영윤이오.”

▶ 柱國: 上柱國. 令尹 아래의 최고의 관직.
▶ 昭陽: 전국시대 楚의 令尹. 懷王때 재상이 되었다. 이름은 云이고 字는陽이다.
▶ 襄陵: 지금의 산서성 양릉현.
▶ 陳軫: 춘추시대 陳의 후손. 뛰어난 유세객으로 처음 秦을 섬겼는데, 당시 秦의 사자로 齊에 왔다가 昭陽을 軍中에서 만나 담판하였다. 뒤에 楚에서 벼슬하여 재상이 되었으며 潁川侯에 봉해졌다.
▶ 上柱国: 전국시대 楚 관직명으로 楚의 최고의 武官으로 令尹 다음이다.
▶ 上爵: 최고의 爵位.
▶ 執珪: 楚 최고의 官爵. 공이 가장 크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주었다. 珪는 조회나 의식에 잡는 笏의 일종.
▶ 令尹: 楚의 최고 관직명. 다른 나라의 재상에 해당한다.

 


燕、韓君初稱王。
燕과 韓의 군주가 처음으로 칭왕하였다.
秦使張儀與楚、齊、魏相會,盟齧桑。
秦이 張儀에게 楚, 齊, 魏의 재상들과 만나 齧桑에서 맹약을 맺게 하였다.

▶ 齧桑: 지금의 강소성 沛縣서남쪽.
▶ 張儀: 전국시대 魏의 모사. 蘇秦의 주선으로 秦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위·조·한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晉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十一年,蘇秦約從山東六國共攻秦,楚懷王為從長。
회왕11년(기원전318년)에 蘇秦은 山東 6국이 함께 秦을 공격하는 合縱의 약속을 받아냈고, 초회왕이 합종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至函谷關,秦出兵擊六國,六國兵皆引而歸,齊獨後。
연합군이 函谷關에까지 이르자 秦이 출병하여 6국을 공격하였으며, 6국은 모두 軍隊를 이끌고 돌아갔고 齊만 최후에 철군하였다.
十二年,齊湣王伐敗趙、魏軍,秦亦伐敗韓,與齊爭長。
회왕12년(기원전317년)에 齊湣王이 趙와 魏의 軍隊를 물리쳤고, 秦도 韓을 물리치고 齊와 패권을 다투었다.

▶ 蘇秦: 전국시대 중엽의 정치가. 강국 秦에 대적하기 위해 나머지 6국이 연합하는 합종설을 주장하였다.
▶ 山東六國: 전국시대 崤山 동쪽에 자리 잡고 있던 여섯 나라를 말한다. 효산은 河南省洛寧縣북쪽에 위치한 산으로 고대 군사 지리적인 요충지였다. 6국은 燕․趙․韓․魏․齊․楚를 말한다.
▶ 從: 合從. 전국시대 山東의 남북에 걸쳐 자리 잡은 여섯 나라가 동맹을 맺고, 그들의 서쪽에 있는 秦에 공동 대응해야 한다는 외교적 방책으로 蘇秦이 제창하였다. 從은 縱과 통용된다.
▶ 從長: 6국 합종의 우두머리. 즉 제후의 盟主를 말한다.

 


十六年,秦欲伐齊,而楚與齊從親,秦惠王患之,乃宣言張儀免相,使張儀南見楚王,謂楚王曰:
「敝邑之王所甚說者無先大王,雖儀之所甚願為門闌之廝者亦無先大王。
敝邑之王所甚憎者無先齊王,雖儀之所甚憎者亦無先齊王。
而大王和之,是以敝邑之王不得事王,而令儀亦不得為門闌之廝也。
王為儀閉關而絕齊,今使使者從儀西取故秦所分楚商於之地方六百里,如是則齊弱矣。
是北弱齊,西德於秦,私商於以為富,此一計而三利俱至也。」
회왕16년(기원전313년)에 秦이 齊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楚는 齊와 합종하여 친선을 맺었으므로, 진혜왕은 이를 염려하여 張儀를 재상에서 파면한다고 선언하고,장의를 남쪽으로 보내 초왕을 만나게 하여 초왕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 왕께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으로 대왕보다 앞설 사람은 없으며, 저 장의가 누군가의 문지기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고 해도 대왕보다 앞설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왕께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으로는 齊王에 앞설 사람은 없으며, 이 장의가 가장 미워하는 사람 역시 齊王에 앞설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齊와 화친하신다면 우리나라 왕은 왕을 모실 수 없고, 저 장의 또한 대왕의 문지기가 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저 장의를 위하여 관문을 폐쇄하고 齊와 절교하시고, 사자로 하여금 이 장의를 따라서 서쪽으로 가서 과거 秦이 빼앗은 楚의 商於 땅 600리를 되돌려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齊의 세력이 약해질 터입니다.
북쪽으로는 齊를 약화시키고, 서쪽으로는 秦에 덕을 베풀고 자신은 상어 땅으로 부유하게 되니 하나의 계책으로 세 가지 이익을 온전히 얻게 됩니다. ”

▶ 從親: 합종하여 친선을 맺다.
▶ 門闌之廝: 楚 왕의 신하가 됨을 말한다. 문란의 문의 난간. 厮는 하인.
▶ 商於: 秦과 楚의 변경 지역의 땅. 상과 어를 합쳐 육백리의 땅을 합칭한다.

 


懷王大悅,乃置相璽於張儀,日與置酒,宣言「吾復得吾商於之地」。
懷王은 크게 기뻐하면서 재상의 도장을 장의에게 주고,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어“내가 내 상어의 땅을 되찾았다.”고 선언하였다.
群臣皆賀,而陳軫獨弔。
신하들이 모두 축하를 드렸는데 유독 진진이 홀로 상심하였다.
懷王曰:
「何故?」
회왕이 물었다.
“무엇 때문인가?”

▶ 璽: 도장.
▶ 吊: 애도를 표함. 상심하다.

 


陳軫對曰:
「秦之所為重王者,以王之有齊也。
今地未可得而齊交先絕,是楚孤也。
夫秦又何重孤國哉,必輕楚矣。
且先出地而後絕齊,則秦計不為。
先絕齊而後責地,則必見欺於張儀。
見欺於張儀,則王必怨之。
怨之,是西起秦患,北絕齊交。
西起秦患,北絕齊交,則兩國之兵必至。
臣故弔。」
陳軫이 대답하였다.
“秦이 왕을 중시하는 까닭은 왕께는 齊와 친선을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땅을 아직 얻지 않았는데 齊와의 외교를 먼저 끊으면 楚가 고립됩니다.
晉이 또 어찌 고립된 나라를 중시하겠습니까? 틀림없이 楚를 얕잡아 볼 터입니다.
그러니 먼저 땅을 내놓게 한 다음 齊와 절교하시면 秦의 계책은 허사가 될 터입니다.
먼저 齊와 절교한 다음 땅을 내놓으라 독촉하면 분명 장의에게 속게 됩니다.
장의에게 속으면 왕께서는 틀림없이 그를 원망하게 될 터입니다.
그를 원망하게 되면 서쪽으로는 秦이 근심거리가 되고, 북쪽으로는 齊와 절교하게 됩니다.
서쪽으로 晉이 근심거리가 되고, 북쪽으로 齊와 절교하면 틀림없이 韓·魏 두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올 터입니다.
그래서 신이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
楚王弗聽,因使一將軍西受封地。
초왕은 듣지 않고 (齊에 대한 관문을 닫고 합종의 약속을 끊고) 장군 하나를 서쪽 秦으로 보내 땅을 받아오게 하였다.

▶ 責: 요구하다. 받아내려 독촉하다.

 

張儀至秦,詳醉墜車,稱病不出三月,地不可得。
장의가 秦에 도착하여 술에 취한 척하며 마차에서 떨어져서, 병을 구실로 석 달 동안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땅을 받을 수 없었다.
楚王曰:
「儀以吾絕齊為尚薄邪?」
초회왕이 말하였다.
“장의는 우리와 齊의 절교한 것이 아직 미흡하다고 여기는가?”
乃使勇士宋遺北辱齊王。
곧 용사 宋遺를 북쪽으로 보내 齊왕에게 모욕을 주었다.
齊王大怒,折楚符而合於秦。
齊 왕이 대노하여 楚의 符節을 끊고 秦과 연합하였다.
秦齊交合,張儀乃起朝,謂楚將軍曰:
「子何不受地?
從某至某,廣袤六里。」
晉과 齊가 연합하자, 장의는 그때서야 일어나 조정에 나와 楚 장군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왜 땅을 받지 않습니까?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사방6리 입니다. ”

▶ 詳: 가장하다.
▶ 符: 符節. 齊와 楚 간의 합종의 증표.
▶ 廣袤: 東西의 길이를 廣이라 하고, 南北의 길이를 袤라고 한다.

 


楚將軍曰:
「臣之所以見命者六百里,不聞六里。」
楚의 장군이 말하였다.
“신이 명령을 받은 것은 600리이고, 6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即以歸報懷王。
곧 귀국하여 회왕에게 보고하였다.
懷王大怒,興師將伐秦。
회왕은 크게 노하여 軍隊를 일으켜 秦을 공격하려 하였다.
陳軫又曰:
「伐秦非計也。
不如因賂之一名都,與之伐齊,是我亡於秦,取償於齊也,吾國尚可全。
今王已絕於齊而責欺於秦,是吾合秦齊之交而來天下之兵也,國必大傷矣。」
진진이 또 말하였다.
“秦을 공격함은 계책이 아닙니다.
秦에 이름난 도읍 하나를 뇌물로 주어 秦과 함께 齊를 공격하느니만 못합니다.
秦에 우리 땅을 잃긴 하겠지만 齊로부터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우리나라 또한 안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 왕께서 이미 齊와 절교해놓고 秦에게 속았다고 책임을 추궁하면, 우리가 秦과 齊의 교분을 더 좋게 하고 천하의 軍隊를 끌어들여 나라가 크게 상할 것이 뻔합니다. ”
楚王不聽,遂絕和於秦,發兵西攻秦。
초왕은 듣지 않고 秦과의 화친을 끊고 軍을 일으켜 서쪽으로 秦을 공격하였다.
秦亦發兵擊之。
秦 역시軍을 동원하여 楚를 공격하였다.

▶ 見命: 명을 받다.
▶ 名都: 이름난 도읍.

十七年春,與秦戰丹陽,秦大敗我軍,斬甲士八萬,虜我大將軍屈丐、裨將軍逢侯丑等七十餘人,遂取漢中之郡。
회왕17년(기원전312년) 봄에 秦과 丹陽에서 교전하여 秦이 楚軍을 대파했는데, 병사8만 명을 참수하고 楚의 대장군 屈丐, 부장군 逢侯丑 등 70여 명을 포로로 잡는 한편 漢中의 각 郡을 빼앗았다.
楚懷王大怒,乃悉國兵復襲秦,戰於藍田,大敗楚軍。
초회왕이 대노하여 나라의 병사를 모두 끌어모아 다시 秦을 공격하여 藍田에서 싸웠으나 楚軍이 또 대패하였다.
韓、魏聞楚之困,乃南襲楚,至於鄧。
韓와 魏는 楚가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楚를 기습하여 鄧邑에까지 이르렀다.
楚聞,乃引兵歸。
초회왕은 이 소식을 듣자 軍隊를 이끌고 돌아오고 말았다.

▶ 丹陽: 한중의 단양. 丹水의 북쪽.
▶ 屈丐: 楚의 대장군. 秦에 가서 相벼슬을 지냈다.
▶ 漢中: 지금의 섬서성 동남부와 호북성 서북쪽 한 모퉁이와 하남성 서남쪽 한 모퉁이.


十八年,秦使使約復與楚親,分漢中之半以和楚。
초왕18년(기원전311년), 秦이 사신을 보내어 다시 楚와 화친하고자, 한중의 절반을 나눔으로써 강화하자고 하였다.
楚王曰:
「願得張儀,不願得地。」
초왕이 말하였다.
“장의를 원할 뿐 땅은 원하지 않는다. ”
張儀聞之,請之楚。
장의가 이를 듣고 楚로 가기를 청하였다.
秦王曰:
「楚且甘心於子,柰何?」
진왕이 말하였다.
“초왕은 그대를 잡아야만 만족할 터인데 어찌 가겠는가?”

▶ 願得張儀: 張儀에게 속은 楚懷王이 단양에서 秦과 싸워 대패하였다. 더욱 노한 懷王이 楚軍隊를 다 모아 藍田에서 다시 싸웠으나 크게 패하고 말았기 때문에 장의에게 복수하고자 장의를 원한 것이다.
▶ 甘心: 만족해하다. 흡족해하다.


張儀曰:
「臣善其左右靳尚,靳尚又能得事於楚王幸姬鄭袖,袖所言無不從者。
且儀以前使負楚以商於之約,今秦楚大戰,有惡,臣非面自謝楚不解。
且大王在,楚不宜敢取儀。
誠殺儀以便國,臣之願也。」
장의가 말하였다.
“신이 초왕의 측근 靳尙과 친하며, 靳尚은 또 초왕의 寵姬 鄭袖의 신임을 얻을 수 있으며, 초왕은 鄭袖의 말은 안 들어주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지난번 楚에 가서 商於땅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지금 秦과 楚가 크게 싸우며 미워하고 있으니 신이 직접 초왕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터입니다.
또 대왕이 계시기 때문에 楚가 감히 이 장의를 어찌하지 못할 터입니다.
정말 이 장의를 죽여서 나라가 편안해진다면 신의 소원입니다.”
儀遂使楚。
장의가 마침내 楚에 사신으로 갔다.

▶ 靳尙: 楚의 上官大夫. 三閭大夫인 屈原과 다투어 굴원을 축출하였다.
▶ 鄭袖: 楚懷王의 애첩. 기지와 질투로 널리 알려진 여인이다.
▶ 有惡: 미워하다.


至,懷王不見,因而囚張儀,欲殺之。
장의가 楚에 이르렀으나 회왕은 만나지도 않고 장의를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하였다.
儀私於靳尚,靳尚為請懷王曰:
「拘張儀,秦王必怒。
天下見楚無秦,必輕王矣。」
장의는 몰래 근상에게 연락했고, 근상이 회왕에게 간청하였다.
“장의를 구금하면 진왕이 노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천하는 楚에게 秦의 도움이 없음을 알게 되면 분명 왕을 깔볼 터입니다. ”
又謂夫人鄭袖曰:
「秦王甚愛張儀,而王欲殺之,今將以上庸之地六縣賂楚,以美人聘楚王,以宮中善歌者為之媵。
楚王重地,秦女必貴,而夫人必斥矣。
夫人不若言而出之。」
또 부인 鄭袖에게 말하였다.
“진왕은 장의를 몹시 아끼는데 지금 왕께서 그를 죽이려 하십니다. 지금 秦은 上庸의 여섯 현을 楚에 뇌물로 주고 미인을 초왕에게 시집보내는 한편 궁중의 춤과 노래에 뛰어난 사람을 몸종으로 주려고 합니다.
초왕께서는 땅을 중시하고 秦의 여자를 분명 귀하게 여기시면 부인께서는 배척당할 것이 뻔합니다.
부인께서 말씀하셔서 장의를 내보내는 편이 나을 터입니다. ”

▶ 上庸: 고대의 庸國. 지금의 湖北省竹山縣근처.
▶ 聘: 장가들다.
▶ 媵: 媵臣. 고대 제후의 딸이 시집갈 때 데리고 가던 하인이나 몸종.
▶ 斥: 배척하다. 내쫓다.


鄭袖卒言張儀於王而出之。
정수가 끝내 초왕에게 장의를 잘 말해서 그를 풀려나게 하였다.
儀出,懷王因善遇儀,儀因說楚王以叛從約而與秦合親,約婚姻。
장의가 풀려나자 회왕은 장의를 잘 대접했고, 장의는 이 틈에 초왕에게 합종 맹약을 배반하고 혼인 약속을 통해 秦과 화친하라고 유세하였다.
張儀已去,屈原使從齊來,諫王曰:
「何不誅張儀?」
장의가 떠난 뒤 齊에 사신으로 갔던 屈原이 돌아와 초왕에게 간하였다.
“어찌하여 장의를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懷王悔,使人追儀,弗及。
회왕이 후회하며 사람을 보내 장의를 뒤쫓게 했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是歲,秦惠王卒。
이해(기원전311년)에 秦惠王이 죽었다.

▶ 屈原: 戰國时代 楚의 충신이며 시인. 자는 原, 이름은 平. 왕족 출신으로 懷王의 左徒가 되어 내정과 외교에 우수한 능력을 발휘했으나 다른 신하들의 미움을 받았으며, 頃襄王때 大夫의 참언으로 영도에서 추방된 뒤 楚와 경양왕을 걱정하며 洞庭湖근처를 방랑하다가 汨罗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二十[六]年,齊湣王欲為從長,惡楚之與秦合,乃使使遺楚王書曰:
「寡人患楚之不察於尊名也。
今秦惠王死,武王立,張儀走魏,樗裏疾、公孫衍用,而楚事秦。
夫樗裏疾善乎韓,而公孫衍善乎魏;
楚必事秦,韓、魏恐,必因二人求合於秦,則燕、趙亦宜事秦。
四國爭事秦,則楚為郡縣矣。
회왕20년(기원전309년)에 齊湣王이 합종의 맹주가 되고 싶어, 楚와 秦의 연합을 싫어하여, 이에 사신을 통하여 초왕에게 서신을 보냈다.
“과인은 楚가 존엄한 명성을 살피지 않는 것을 우려합니다.
지금 秦에는 혜왕이 죽고 무왕이 즉위했으며, 장의는 위나라로 도망쳤고, 樗里疾과 公孫衍이 중용되었는데도 楚는 秦을 섬기고 있습니다.
저리질은 韓와 친하고, 공손연은 魏와 친합니다.
楚가 굳이 秦을 섬기면 韓과 魏는 두려워하여 필시 두 사람을 통해 秦과 연합을 추구할 터인즉 燕과 趙도 秦을 섬기게 될 것이 뻔합니다.
네 나라가 다투어 秦을 섬기면 楚는 일개 군현 정도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 齊湣王: 전국시대 齊의 군주로 성은 田씨고, 이름은 地 또는 遂다. 齊閔王 또는 齊愍王이라고 부른다. 宣王의 아들이다. 재위하면서 孟嘗君을 재상으로 삼고, 匡章을 장군으로 삼았다. 일찍이 여러 차례 楚軍을 격파했고, 韓, 魏와 연합해 秦을 공격하여 函谷關으로 들어갔다.
▶ 樗里疾: 秦惠王과 어머니가 다른 형제. 秦武王 때 감무는 좌승상, 저리질은 우승상이었는데 소왕 때에는 저리질이 더 존중을 받았다.
▶ 公孫衍: 魏 사람으로 號는 首이다. 이 당시 秦의 大良造가 되어 蘇秦의 합종책을 깨뜨렸다. 나중에 魏로 들어가 재상이 되어 제후들과 합종하여 張儀의 연횡책에 맞섰다.

 


王何不與寡人并力收韓、魏、燕、趙,與為從而尊周室,以案兵息民,令於天下?
莫敢不樂聽,則王名成矣。
王率諸侯并伐,破秦必矣。
王取武關、蜀、漢之地,私吳、越之富而擅江海之利,韓、魏割上黨,西薄函谷,則楚之彊百萬也。
且王欺於張儀,亡地漢中,兵銼藍田,天下莫不代王懷怒。
今乃欲先事秦, 願大王孰計之。」
왕께서는 어째서 과인과 힘을 합쳐 韓, 魏, 燕, 趙를 거두어 함께 합종하여 주 왕실을 받듦으로써 軍과 백성을 쉬게 하면서도 천하를 호령하려 하지 않습니까?
기꺼이 명을 듣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인즉 왕께서도 명성을 얻게 될 터입니다.
왕께서 제후들을 이끌고 토벌하면 틀림없이 秦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武關, 蜀, 漢中 땅을 취하고, 오와 월의 풍요로운 재물을 향유하고, 강과 바다의 이로움을 마음껏 누리고, 韓와 魏에게는 上黨을 떼어 주고, 서쪽으로 函谷關을 압박한다면 楚의 강함은 백만 배가 되겠습니다.
또 왕께서 장의에게 속아 한중 땅을 잃고 남전에서 패하니 천하에 왕을 대신하여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秦을 먼저 섬기려는 일을 대왕께서는 熟慮하시기 바랍니다. ”

▶ 私: 자기의 생각대로 향유하다.
▶ 薄: 접근하다.
▶ 挫: 좌절하다.
▶ 孰計: 熟計. 깊이 생각하다.

 


楚王業已欲和於秦,見齊王書,猶豫不決,下其議群臣。
초회왕은 이미 秦과 화친하려 했는데 제민왕의 글을 보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신하들에게 이 일을 내려보내 의논하게 되었다.
群臣或言和秦,或曰聽齊。
신하들 중 어떤 자는 秦과 화친하자고 했고, 어떤 자는 齊의 제안을 듣자고 하였다.
昭雎曰:
「王雖東取地於越,不足以刷恥;
必且取地於秦,而後足以刷恥於諸侯。
王不如深善齊、韓以重樗裏疾,如是則王得韓、齊之重以求地矣。
秦破韓宜陽,而韓猶復事秦者,以先王墓在平陽,而秦之武遂去之七十里,以故尤畏秦。
昭雎가 말하였다.
“왕께서 비록 동쪽 변방 越의 땅을 취한다 하더라도 치욕을 씻기에는 부족합니다.
기어이 秦으로부터 땅을 돌려받은 다음이라야 제후들 앞에서 치욕을 씻을 수 있습니다.
왕께서는 齊와 韓과 깊이 친선을 맺어 樗裏疾을 중시하는 쪽이 나으며, 그럴 경우 왕께서는 韓와 齊의 지지를 받아 빼앗긴 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秦이 宜陽에서 韓를 공격했음에도 韓이 여전히 秦을 섬기고 있는 까닭은 선왕의 무덤이 平陽에 있고, 秦의 武遂 땅에서 불과 70리이기 때문에 더욱 秦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 業已: 이미. 어조사 業 참조
▶ 樗裏疾: 전국시대 秦 사람. 秦 惠文君의 이복동생이고, 이름은 疾이다. 渭南陰鄕의 樗里에서 살아 樗里子라고 한다. 辨說에 능하고 해학이 풍부하면서 지혜가 많아 秦 사람들이 智囊으로 불렸다. 진 혜문군8년 右更이 되었으며, 秦武王 2년 右丞相이 되었다.
▶ 刷耻: 치욕을 씻다. 설욕하다.
▶ 去: 거리.
▶ 重: 중시하다.

 


不然,秦攻三川,趙攻上黨,楚攻河外,韓必亡。
楚之救韓,不能使韓不亡,然存韓者楚也。
韓已得武遂於秦,以河山為塞,所報德莫如楚厚,臣以為其事王必疾。
齊之所信於韓者,以韓公子眛為齊相也。
韓已得武遂於秦,王甚善之,使之以齊、韓重樗裏疾,疾得齊、韓之重,其主弗敢棄疾也。
今又益之以楚之重,樗里子必言秦,復與楚之侵地矣。」
그렇게 하지 않으면 秦이 三川을 공격하고, 趙는 上黨을 공격하고, 楚는 河外를 공격하여 韓은 틀림없이 망할 것입니다.
楚가 韓를 구원하면 韓을 멸망시키지 못하므로 韓를 보존할 나라는 楚입니다.
韓은 秦으로부터 武遂를 얻은 뒤 강과 산을 요새로 삼게 되어, 갚아야 할 은덕으로 따지자면 楚보다 큰 나라는 없을 터이니, 신은 韓이 틀림없이 서둘러 왕을 섬기리라 생각합니다.
齊가 韓을 믿는 것은 韓의 공자 眛가 齊의 재상으로 있기 때문입니다.
韓이 秦으로부터 무수를 얻고 나면 왕께서 잘 대해서 齊와 韓에게 저리질을 중히 여기게 하시고, 저리질이 齊와 韓의 존중을 받으면 그의 왕이 감히 저리질을 버리지 못할 터입니다.
지금 또 楚의 존중까지 얻고 나면 저리질이 분명 秦 왕에게 말하여, 결국 빼앗긴 楚의 땅을 돌려줄 터입니다. ”
於是懷王許之,竟不合秦,而合齊以善韓。
이에 회왕은 이 말을 받아들여 결국 秦과 연합하지 않고 齊와 연합함으로써 韓과 잘 지내려 하였다.

▶ 三川: 伊水, 洛水, 黄河를 말한다.
▶ 河外: 黄河의 북쪽. 韓가 황하의 북쪽에 있었다.

 


二十四年,倍齊而合秦。
회왕24년(기원전305년), 楚가 齊를 배반하고 秦과 연합하였다.
秦昭王初立,乃厚賂於楚。
진소왕이 막 즉위하여 楚에 후한 뇌물을 보냈다.
楚往迎婦。
楚가 秦에 가서 신부를 맞아들였다.
二十五年,懷王入與秦昭王盟,約於黃棘。
회왕25년(기원전304년), 회왕이 秦으로 들어가서 진소왕과 黃棘에서 맹약하였다.
秦復與楚上庸。
秦은 楚의 常庸땅을 돌려주었다.
二十六年,齊、韓、魏為楚負其從親而合於秦,三國共伐楚。
회왕26년(기원전303년), 齊·韓·魏는 楚가 합종을 저버리고 秦과 연합하자 세 나라가 함께 楚를 정벌하였다.
楚使太子入質於秦而請救。
楚는 태자를 秦에 인질로 보내며 구원을 청하였다.
秦乃遣客卿通將兵救楚,三國引兵去。
秦은 곧 객경 通에게 軍隊를 이끌고 가서 楚를 구원하게 하니, 삼국은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 倍: 背와 통용된다. 배반하다.
▶ 黄棘: 楚의 땅으로 지금의 하남성 신야현 동북쪽이다.
▶ 上庸: 지금의 호북성 죽산현.
▶ 客卿通: 타국 출신의 대신인 通. 通은 人名.


二十七年,秦大夫有私與楚太子鬬,楚太子殺之而亡歸。
회왕27년(기원전302년), 秦 대부가 사사로이 楚 태자와 다투었는데, 楚 태자가 그를 죽이고 도망쳐 돌아왔다.
二十八年,秦乃與齊、韓、魏共攻楚,殺楚將唐眛,取我重丘而去。
회왕28년(기원전301년), 秦이 제·한·위와 함께 楚를 공격하여 楚의 장수 唐眛를 죽이고 楚의 重丘를 빼앗고 물러났다.
二十九年,秦復攻楚,大破楚,楚軍死者二萬,殺我將軍景缺。
회왕29년(기원전300년), 秦이 다시 楚를 공격하여 楚를 대파하니, 楚는 전사자가 2만 명이었으며, 장군 景缺을 죽였다.
懷王恐,乃使太子為質於齊以求平。
회왕은 두려워 태자를 齊에 인질로 보내며 강화를 청하였다.
三十年,秦復伐楚,取八城。
회왕30년(기원전299년), 秦이 다시 楚를 공격하여 여덟 개 성을 빼앗았다.

▶ 楚太子殺之而亡歸: 楚太子 橫이 秦 대부를 죽이고 도망하여 돌아왔다.
▶ 重丘: 楚 땅. 지금의 하남성 泌陽縣 북쪽.
▶ 唐眛: 전국시대 楚의 장수.
▶ 太子為質於齊: 楚가 태자 橫을 齊에 인질로 보내고 강화를 청하였다.

 


秦昭王遺楚王書曰:
「始寡人與王約為弟兄,盟于黃棘,太子為質,至驩也。
太子陵殺寡人之重臣,不謝而亡去,寡人誠不勝怒,使兵侵君王之邊。
今聞君王乃令太子質於齊以求平。
寡人與楚接境壤界,故為婚姻,所從相親久矣。
而今秦楚不驩,則無以令諸侯。
寡人願與君王會武關,面相約,結盟而去,寡人之願也。
敢以聞下執事。」
진소왕이 초회왕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당초 과인은 왕과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여 황극에서 회맹하고 태자를 인질로 보내와서 매우 화락하였습니다.
태자가 과인의 중신을 죽이고 사과도 없이 도망감에, 과인은 참으로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軍대를 보내어 군왕의 변경을 침범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군왕이 태자를 齊에 인질로 보내 강화를 청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과인과 楚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데다 혼인까지 맺은 사이라 서로 친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秦과 楚의 사이가 나쁘면 제후들을 호령할 수 없습니다.
과인은 군왕과 무관에서 만나 얼굴을 맞대고 맹약을 맺고 물러가는 것이 과인의 소원입니다.
감히 과인의 생각을 관원에게 전하는 바입니다. ”

▶ 武關: 秦의 남쪽 관문.
▶ 執事: 官員.

 


楚懷王見秦王書,患之。
초회왕이 진왕의 편지를 보고는 걱정이 되었다.
欲往,恐見欺;無往,恐秦怒。
가려 하니 속을까 염려되고, 가지 않으려니 秦이 노할까 염려하였다.
昭雎曰:
「王毋行,而發兵自守耳。
秦虎狼,不可信,有并諸侯之心。」
昭雎가 말하였다.
“왕께서는 가시지 마시고 軍士을 일으켜 자신을 지킬 뿐입니다.
秦은 호랑이나 이리와 같아 믿어선 안 되며, 제후들을 합병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
懷王子子蘭勸王行,曰:
「柰何絕秦之驩心!」
회왕의 아들 子蘭은 왕에게 가라고 권하였다.
“秦의 호의를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於是往會秦昭王。
이에 진소왕을 만나러 갔다.

▶ 子蘭: 楚懷王의 아들이다. 秦昭王이 거짓으로 회왕에게 武關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가기를 권하였다. 회왕이 秦에 가서 客死하자 楚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頃襄王이 즉위하자 令尹이 되었다. 일찍이 上官大夫를 시켜 경양왕에게 屈原을 헐뜯었고, 이 때문에 굴원은 三閭大夫를 사직하고 떠나게 되었다.

 

楚大臣患之,乃相與謀曰:
「吾王在秦不得還,要以割地,而太子為質於齊,齊、秦合謀,則楚無國矣。」
楚의 대신들은 걱정이 되어 서로 의논하였다.
“우리 왕이 秦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계신데 秦은 땅을 떼어달라고 강요하고, 태자는 齊에 인질로 있으니 만약 齊와 秦이 함께 모의한다면 楚는 멸망하겠습니다. ”
乃欲立懷王子在國者。
그리고는 국내에 있는 회왕의 아들을 옹립하려고 하였다.
昭雎曰:
「王與太子俱困於諸侯,而今又倍王命而立其庶子,不宜。」
昭雎가 말하였다.
“왕과 태자 모두가 제후국에서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 지금 다시 왕명을 배반하고 그 서자를 세움은 옳지 않습니다. ”
乃詐赴於齊,齊湣王謂其相曰:
「不若留太子以求楚之淮北。」
이에 거짓으로 齊에 國喪을 알렸더니, 齊湣王이 그의 재상에게 말하였다.
“태자를 억류하는 것보다 楚의 회북 땅을 요구하는 편이 낫겠소. ”
相曰:
「不可,郢中立王,是吾抱空質而行不義於天下也。」
재상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郢中에서 왕을 세운다면 우리는 쓸모없는 인질을 붙잡고 천하에 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
或曰:
「不然。郢中立王,因與其新王市曰
『予我下東國,吾為王殺太子,不然,將與三國共立之』,然則東國必可得矣。」
누군가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楚가 왕을 세우게 되면 그 새 왕과 거래를 하면서 이르기를,
‘우리에게 下東國을 준다면 우리가 楚왕을 위해 태자를 죽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齊·韓·魏 세 나라가 함께 태자를 옹립할 것이다. ’라고 하면 틀림없이 하동국을 얻을 터입니다. ”
齊王卒用其相計而歸楚太子。
齊 왕은 결국 그 재상의 계책에 따라 楚태자 횡을 귀국시켰다.
太子橫至,立為王,是為頃襄王。
태자 橫이 楚에 이르러 왕으로 즉위하니 그가 頃襄王이다.
乃告于秦曰:
「賴社稷神靈,國有王矣。」
곧 秦에 알렸다.
“사직의 신령함에 힘입어 나라에 왕이 생겼습니다. ”

▶ 詐赴於齊: 齊에 초회왕이 죽었다고 거짓으로 알리다. 赴는 訃와 같으며 죽음을 알리는 것을 말한다.
▶ 留: 억제하다.
▶ 郢: 楚 도성.
▶ 市: 거래하다.
▶ 下東國: 楚에 속한 徐夷지역. 楚가 陳과 蔡를 멸망시키고 汝에 국경을 만들고, 越나라를 멸망시키고 吳의 옛땅을 빼앗았으며, 아울러 옛 徐夷의 땅을 가졌는데 모두 淮北에 있다. 이것이 楚의 下東國이다.
▶ 頃襄王: 楚 頃襄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橫이다. 초회왕의 적출 아들이며 기원전303년에 王太子로 책봉되었고 이후 기원전299년에 부왕 회왕이 秦의 계략과 趙의 배신에 휘말려 폐위되자 부왕의 선위를 받는 형식으로써 기원전299년부터 이듬해 기원전298년까지 楚의 代理執政公을 지내다가 기원전298년에 楚 군주로 보위 등극하였다.

頃襄王橫元年,秦要懷王不可得地,楚立王以應秦,秦昭王怒,發兵出武關攻楚,大敗楚軍,斬首五萬,取析十五城而去。
경양왕원년(橫기원전298년), 秦이 회왕에게 땅을 강요해도 얻지 못한 데다, 楚가 왕을 옹립해 秦에 대응하자 秦昭王은 화가 나서 軍을 일으켜 무관에서 楚를 공격하여 楚軍을 대패시키고, 5만 명을 참수하고 析邑등 15개 성을 빼앗고 물러갔다.
二年,楚懷王亡逃歸,秦覺之,遮楚道,懷王恐,乃從閒道走趙以求歸。
경양왕2년(기원전297년), 초회왕이 도망쳐 귀국하려 했지만 秦이 이를 알아채고, 楚로 가는 길을 막으니, 초회왕이 두려워 샛길로 趙로 달아나 귀국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趙主父在代,其子惠王初立,行王事,恐,不敢入楚王。
趙의 주보는 代땅에 있었고, 그의 아들 혜왕이 막 즉위하여 王事를 대행하던 차라 겁을 먹고 초회왕을 감히 들이지 못하였다.
楚王欲走魏,秦追至,遂與秦使復之秦。
초회왕이 魏로 도망치려 했으나 秦이 추격하여 마침내 秦의 사신과 함께 秦으로 돌아왔다.
懷王遂發病。
회왕은 마침내 병이 났다.

▶ 析: 楚의 읍.
▶ 閒道: 間道. 샛길.
▶ 趙主父在代: 趙의 무령왕이 代땅에 있었다. 기원전298년, 趙 무령왕은 태자였던 공자 章을 폐하고 공자 하를 태자로 세운 뒤 하에게 양위하였지만, 스스로 ‘主父’라 일컬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그대로 유지했다.

 


頃襄王三年,懷王卒于秦,秦歸其喪于楚。
경양왕3년(기원전296년), 회왕이 秦에서 죽어, 秦은 그의 상여를 楚로 돌려보냈다.
楚人皆憐之,如悲親戚。
楚 사람들이 모두 친척을 잃은 듯 슬퍼하며 가엾게 여겼다.
諸侯由是不直秦。
제후들은 이 때문에 秦을 정직하게 여기지 않았다.
秦楚絕。
秦과 楚는 절교하였다.

▶ 直: 정직.

六年,秦使白起伐韓於伊闕,大勝,斬首二十四萬。
경양왕6년(기원전293년), 秦은 白起로 하여금 伊闕에서 韓을 공격하게 하여 대승하였으며, 24만 명을 참수하였다.
秦乃遺楚王書曰:
「楚倍秦,秦且率諸侯伐楚,爭一旦之命。
願王之飭士卒,得一樂戰。」
秦은 이에 초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楚가 秦을 배신하여 秦은 제후들을 이끌고 楚를 토벌하여 목숨을 걸고 일전을 겨루고자 한다.
원컨대 왕은 병사들을 정돈하여 통쾌하게 싸우길 바란다. ”
楚頃襄王患之,乃謀復與秦平。
초경양왕은 걱정이 되어 秦과 다시 강화를 꾀하였다.
七年,楚迎婦於秦,秦楚復平。
경양왕7년(기원전292년), 楚가 秦에서 신부를 맞이함으로써 秦과 楚가 다시 강화하였다.

▶ 白起: 戰國時代 秦의 名將. 진소왕 13년에 백기는 左庶長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韓의 新城을 공격하였다. 진소왕 14년에 백기는 左更이 되어 伊闕에서 韓, 魏를 공격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었으며, 魏의 장수 公孫喜를 포로로 잡았고 성 다섯 개를 함락시켰다. <사기 권73. 白起王翦列傳>
▶ 爭一旦之命: 목숨을 걸고 1전을 겨루다. 하루아침의 목숨을 다투다.
▶ 飭: 정돈하다.
▶ 伊闕: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남쪽.

 


十一年,齊秦各自稱為帝;
月餘,復歸帝為王。
경양왕11년(기원전288년), 齊와 秦이 각자 帝를 칭했으나 한 달 후 帝 칭호를 버리고 왕으로 돌아갔다.

▶ 齊秦各自稱為帝: 진 소양왕19년(기원전288년), 진昭王이 西帝를, 齊閔王이 東帝를 칭했다가 모두 취소하였다.[史記本紀]권05. 秦本紀

 


十四年,楚頃襄王與秦昭王好會于宛,結和親。
경양왕14년(기원전285년), 초경양왕과 진소왕은 宛邑에서 우호적인 만남을 갖고 화친을 맺었다.
十五年,楚王與秦、三秦、燕共伐齊,取淮北。
경양왕15년(기원전234년), 초경양왕이 秦·三晉·燕과 함께 齊를 토벌하여 淮北을 빼앗았다.
十六年,與秦昭王好會於鄢。
경양왕16년(기원전283년), 진 소왕과 鄢에서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其秋,復與秦王會穰。
그 해 가을, 다시 진왕과 穰邑에서 만났다.

▶ 三晉: 韓, 魏, 趙.
▶ 穰: 韓의 땅. 지금의 하남성 鄧縣.

十八年,楚人有好以弱弓微繳加歸鴈之上者,頃襄王聞,召而問之。對曰:
「小臣之好射鶀鴈,羅鸗,小矢之發也,何足為大王道也。
且稱楚之大,因大王之賢,所弋非直此也。
昔者三王以弋道德,五霸以弋戰國。
故秦、魏、燕、趙者,鶀鴈也;
齊、魯、韓、衛者,青首也;
騶、費、郯、邳者,羅鸗也。
外其餘則不足射者。
초 경양왕18년(기원전281년), 楚 사람으로 가는 활과 주살로 북쪽으로 돌아가는 기러기를 쏘아 잘 맞추는 사람이 있었다.
경양왕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소신은 작은 기러기나 작은 새 따위를 잘 맞추며, 이는 작은 화살의 작용에 불과한데 대왕께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楚의 커다란 땅과 대왕의 현명함에 비춘다면 얻을 수 있는 수확은 이 정도가 아닐 터입니다.
옛날 三王께서는 도덕을 얻으셨고, 五覇는 여러 나라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따라서 秦·魏·燕·趙는 작은 기러기와 같고,
齊·魯·韓·衛는 들새와 같으며,
騶·費·郯·邳는 작은 새들과 같습니다.
그 밖에 나머지는 쏘아서 잡을 가치도 없습니다.

▶ 弱弓微繳: 약한 활에 가는 줄을 매단 주살. 繳은 주살의 줄. 여기서는 화살을 의미한다.
▶ 加: 쏘아 맞히다. 명중하다.
▶ 鶀鴈: 작은 기러기.
▶ 羅鸗: 작은 새. 들새.
▶ 弋: 주살. 쏘아 잡다.
▶ 非直: 이것 뿐이 아니다. 直은 다만.

[한문의 허사] - 한문의 허사(虛詞) 直


▶ 三王: 중국 古代의 세 임금. 夏의 禹王과 殷의 湯王과 周의 文王, 또는 武王을 일컫는다.
▶ 五霸: 春秋시대 다섯 명의 覇者로, 齊桓公·秦文公·宋襄公·楚莊王·秦穆公을 일컫는다.
▶ 青首: 푸른 머리의 작은 기러기.
▶ 戰國: 전국시대의 각 나라들.
▶ 騶: 춘추시대의 邾나라였으며 전국시대의 騶나라이다.
▶ 費: 고대의 費나라. 춘추시대 魯 季孫氏의 읍이다.
▶ 郯: 고대의 郯나라. 지금의 산동성 담성현.
▶ 邳: 고대의 나라 이름. 춘추시대에 薛이라 칭하였다.

 


見鳥六雙,以王何取?
王何不以聖人為弓,以勇士為繳,時張而射之?
此六雙者,可得而囊載也。
其樂非特朝昔之樂也,其獲非特鳧鴈之實也。
王朝張弓而射魏之大梁之南,加其右臂而徑屬之於韓,則中國之路絕而上蔡之郡壞矣。
이 여섯 쌍의 새들을 보고 왕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잡으시겠습니까?
왕께서는 어찌하여 聖人을 활로, 용사를 화살로 삼아 때맞추어 활을 당겨 이들을 맞춰 잡지 않으십니까?
이 여섯 쌍의 새들을 잡아 자루에 담아 싣고 오실 수 있습니다.
그 즐거움이란 단지 일조일석의 즐거움에 비할 바 아니며, 그 수확은 단지 기러기 같은 사냥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왕께서 아침에 활을 당겨 魏의 大梁 남쪽을 쏘시고, 다시 그 오른팔을 쏘아 맞혀 韓에 직속시키면 중원으로 가는 길은 끊어지고 上蔡지역의 군현은 저절로 무너질 터입니다.

▶ 見鳥六雙: 秦과 趙 등12개국을 말한다.
▶ 朝昔: 일조일석. 매우 짧은 시간. 昔은夕과 통용된다.
▶ 鳧鴈: 들오리와 기러기.
▶ 右臂: 오른팔. 大梁의 남쪽. 즉 魏의 오른쪽.
▶ 加: 쏘아 맞히다.
▶ 徑屬: 직속시키다.

 


還射圉之東,解魏左肘而外擊定陶,則魏之東外棄而大宋、方與二郡者舉矣。
且魏斷二臂,顛越矣;
膺擊郯國,大梁可得而有也。
王綪繳蘭臺,飲馬西河,定魏大梁,此一發之樂也。
몸을 돌려 圉지방의 동쪽을 쏘아 魏의 왼쪽 팔꿈치를 자르고 밖으로 定陶를 공격하시면 魏는 동쪽 밖을 포기할 터이니 大宋과 方與 두 군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魏의 두 팔이 잘리면 곧 무너지고, 정면으로 郯을 공격하면 대량은 楚의 차지가 될 터입니다.
왕께서는 蘭臺에서 활과 화살 줄을 거두고, 魏의 西河에서 말들에게 물을 먹인 다음에 위나라의 대량을 평정하게 될 터이니 이것이 첫 발의 기쁨입니다.

▶ 肘: 팔꿈치.
▶ 圉: 지명. 지금의 하남성 옹구현 동쪽.
▶ 顛越: 전복하다. 멸망시키다.
▶ 膺: 가슴. 여기서는 정면을 말한다.
▶ 綪繳: 활과 화살을 걷다. 綪은 걷다.
▶ 擧: 점령하다.
▶ 蘭臺: 楚의 台이름. 지금의 호북성 종상현 동쪽.
▶ 西河: 魏의 땅. 지금의 섬서성 동부 황하 서쪽 지역.

 


若王之於弋誠好而不厭,則出寶弓,碆新繳,射噣鳥於東海,還蓋長城以為防,朝射東莒,夕發浿丘,夜加即墨,顧據午道,則長城之東收而太山之北舉矣。
西結境於趙而北達於燕,三國布鶴,則從不待約而可成也。
北遊目於燕之遼東而南登望於越之會稽,此再發之樂也。
만약 왕께서 사냥을 정말 좋아하셔서 싫증내지 않으신다면 보궁을 꺼내 새 화살줄에 돌화살촉을 매겨 동해에서 큰 새를 쏘아서 잡고, 수레의 덮개를 씌우고 장성을 방어선으로 삼으신 다음. 아침에 東莒를 쏘아 취하시고, 저녁에 浿丘에 쏘아 취하시며, 밤에는 卽墨을 탈취하시고 돌아오는 길에 午道까지 차지하면 장성의 동쪽은 거두어지고 태산의 북쪽도 점거할 수 있습니다.
齊는 서쪽으로 趙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북쪽으로 燕에 도달하게 되어 楚·趙·燕의 세 나라가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는 듯하여 합종의 맹약은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성사됩니다.
북쪽으로 눈을 돌려 연의 요동을 유람하시고, 남쪽으로 산에 올라 越의 會稽를 살펴보실 수 있으니 이것이 두 번째 화살을 쏘는 즐거움입니다.

▶ 噣: 갈고리 모양의 부리를 가진 큰 새. 齊를 비유함.
▶ 還蓋: 덮개를 씌우다.
▶ 顧: 돌아오다.
▶ 東莒: 莒.
▶ 午道: 당시 齊의 서쪽 경계.

 


若夫泗上十二諸侯,左縈而右拂之,可一旦而盡也。
今秦破韓以為長憂,得列城而不敢守也;
伐魏而無功,擊趙而顧病,則秦魏之勇力屈矣,楚之故地漢中、析、酈可得而復有也。
王出寶弓,碆新繳,涉鄳塞,而待秦之倦也,山東、河內可得而一也。
勞民休眾,南面稱王矣。
泗水지역의 12명의 제후들로 말하면 왼손을 휘감고 오른손을 털어 하루아침에 모두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 秦이 韓을 격파했지만 오랜 걱정거리가 된 것은 여러 개의 성을 얻었지만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魏를 정벌했지만 공을 세우지도 못하고, 趙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고 말았으니, 秦과 魏의 용맹함과 병력은 힘이 다하게 될 터이므로 楚의 옛 땅인 漢中·析·酈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왕께서 보궁을 꺼내시고 새 주살 끈에 돌화살촉을 마련하여 鄳塞로 가셔서, 秦이 지친 틈을 기다리시면 산동과 하내를 얻어 통일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백성을 위로하시고 병사들을 쉬게 하시면 남면하여 왕을 칭하실 수 있습니다.

▶ 縈: 휘감다. 얽히다.
▶ 拂: 털다. 치다. 손쉬움을 말한다.
▶ 顧病: 오히려 걱정거리가 되다.
▶ 屈: 다하다. 쇠퇴하다.
▶ 碆: 돌로 만든 화살촉. 주살에 매는 돌.
▶ 鄳塞: 楚의 요새 이름.
▶ 河内: 황하 이남을 말한다.
▶ 山東: 崤山의 동쪽.

故曰秦為大鳥,負海內而處,東面而立,左臂據趙之西南,右臂傅楚鄢郢,膺擊韓魏,垂頭中國,處既形便,勢有地利,奮翼鼓鶴,方三千里,則秦未可得獨招而夜射也。」
그래서 말하기를 秦은 큰 새가 되어 대륙을 등에 지고 살며, 얼굴은 동쪽을 향하여 서 있으며, 왼쪽 팔로는 조의 서남쪽을 누르고, 오른쪽 팔은 楚의 鄢과 郢에 바싹 붙어있고, 가슴은 韓와 魏를 마주하고 있고, 머리를 숙여 중원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형세가 편리하고 유리하여 날개를 펼치고 날아서 사방3천 리를 갈 수 있다고 하니, 秦은 혼자 머물러 하룻밤에 쏠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

▶ 傅: 附와 통용된다. 붙다. 가까이하다.

欲以激怒襄王,故對以此言。
그는 경양왕을 매우 노하게 할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한 것이었다.
襄王因召與語,遂言曰:
「夫先王為秦所欺而客死於外,怨莫大焉。
今以匹夫有怨,尚有報萬乘,白公、子胥是也。
今楚之地方五千里,帶甲百萬,猶足以踴躍中野也,而坐受困,臣竊為大王弗取也。」
경양왕이 이로 인해 그를 불러서 묻자 이렇게 말하였다.
“선왕께서 秦에 속아서 외지에서 객사하셨으니, 원통함이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지금 필부조차 한을 품고 있지만 그래도 萬乘의 나라에 보복할 사람은 白公이나 伍子胥 정도입니다.
지금 楚 땅은 사방5천 리에 백만 대군으로 전쟁터에서 얼마든지 위세를 떨칠 수 있는데, 앉아서 곤욕을 치르고 있으니, 제가 생각건대 이는 대왕께서 취할 바가 아닙니다. ”
於是頃襄王遣使於諸侯,復為從,欲以伐秦。
이에 경양왕은 사신을 제후국에 보내 다시 합종하여 秦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秦聞之,發兵來伐楚。
秦은 이 소식을 듣고 軍士를 일으켜 楚를 정벌하러 왔다.

▶ 報萬乘: 만승의 대국에게 보복하다. 萬乘은 전차가 1만 대인 대국을 말한다.

楚欲與齊韓連和伐秦,因欲圖周。
楚는 齊, 韓과 연합하여 秦을 정벌하고 내친 김에 주나라까지 도모하려고 하였다.
周王赧使武公謂楚相昭子曰:
「三國以兵割周郊地以便輸,而南器以尊楚,臣以為不然。
夫弒共主,臣世君,大國不親;
以眾脅寡,小國不附。
大國不親,小國不附,不可以致名實。
名實不得,不足以傷民。
夫有圖周之聲,非所以為號也。」
주赧王이 武公을 楚에 보내 재상 昭子에게 말하였다.
“세 나라가 무력으로 주나라의 교외 땅을 나누어 물자 수송을 편리하게 하여 주나라의 보물을 남쪽으로 옮겨 楚를 받들려고 하는데 신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의 종주를 시해하고 代代의 군주를 신하로 삼는다면 대국은 가까이하지 않고, 많다고 적은 수를 협박하면 소국은 따르지 않을 터입니다.
대국이 가까이하지 않고, 소국이 따르지 않으면 명분과 실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명분과 실리를 얻지 못하면서 백성을 상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주나라를 도모했다는 명성을 가지고는 천하를 호령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 圖: 도모하다.
▶ 周王赧: 周赧王. 전국시대 西周의 군주로 주나라의 마지막 왕이다.
▶ 武公: 西周 武公. 전국시대 西周의 제4대 군주로 惠公의 맏아들이다. 周赧王 말기에 秦이 침입하자 무공이 秦에 가서 땅을 헌납하였다.
▶ 昭子: 楚의 재상.
▶ 輸: 운송하다.
▶ 南器: 주나라의 九鼎을 남쪽으로 옮기다.
▶ 共主: 제후들이 공동으로 받드는 宗主. 주나라를 말한다.
▶ 世君: 대대로 내려오는 천하의 군주. 周군주를 말한다.
▶ 號: 천하를 호령하다.


昭子曰:
「乃圖周則無之。
雖然,周何故不可圖也?」
소자가 말하였다.
“주나라를 도모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찌하여 주나라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對曰:
「軍不五不攻,城不十不圍。
夫一周為二十秦,公之所知也。
韓嘗以二十萬之眾辱於秦之城下,銳士死,中士傷,而秦不拔。
公之無百韓以圖周,此天下之所知也。
무공이 대답하였다.
“병력이 적의 다섯 배가 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고, 열배가 넘지 않으면 성을 포위하지 않습니다.
무릇 周하나가 秦 스무 개에 해당하는 것은 공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韓이 일찍이 20만의 병력으로 秦의 성 아래에서 굴욕을 당하여, 정예병은 죽고 병사들은 부상당했으나 秦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공이 韓 병력 백배로 周 하나를 도모할 수 없음은 천하가 다 아는 일입니다.

▶ 不五不攻: 상대방의 軍士力이 5배가 넘지 않으면 공격하지 않는다.
▶ 一周為二十秦: 주나라가 비록 작지만 제후의 존중을 받는 까닭에 秦 20개에 해당된다고 한 것이다.


夫怨結兩周以塞騶魯之心,交絕於齊,聲失天下,其為事危矣。
서주 및 동주와 원한을 맺어 騶魯의 마음을 손상시키고, 齊와 절교하면 楚는 천하에 명성을 잃고 일마다 위험에 처할 터입니다.
夫危兩周以厚三川,方城之外必為韓弱矣。
서주와 동주를 위험에 빠뜨려 삼천을 강하게 하다면 方城 밖은 반드시 韓에 약해질 터입니다.
何以知其然也?
어떻게 그렇게 될 줄 알겠습니까?
西周之地,絕長補短,不過百里。
서주 땅은 긴 곳을 잘라 짧은 곳에 보태어도 백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名為天下共主,裂其地不足以肥國,得其眾不足以勁兵。
이름이 천하의 공동 군주이지 그 땅을 찢어 가져도 나라는 부유해질 수 없고, 그軍隊를 얻어도 강한 軍隊로 만들지 못합니다.

▶ 兩周: 東周와 西周.
▶ 交絕於齊: 齊가 楚와 절교하다.
▶ 厚三川: 三川은 韓을 말한다. 동주와 서주의 땅이 당시 韓가 많이 차지했으므로 韓이 비대해졌다는 뜻이다.
▶ 勁: 강하다. 굳세다.


雖無攻之,名為弒君。
비록 주나라를 공격하지 않아도 명분상 군주를 시해함이 됩니다.
然而好事之君,喜攻之臣,發號用兵,未嘗不以周為終始。
그런데도 일벌이기를 좋아하는 군주와 침략을 좋아하는 신하가 호령을 내려 軍을 지휘하여 시종 周나라를 도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是何也?
왜 그렇겠습니까?
見祭器在焉,欲器之至而忘弒君之亂。
祭器가 주나라에 있음을 보고 그것을 가지고 와서 군주를 시해하는 난을 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今韓以器之在楚,臣恐天下以器讎楚也。
지금 韓이 제기를 楚로 옮기려 한다면 신은 천하가 이 제기 때문에 楚를 원수로 삼을까 걱정입니다.

▶ 祭器: 주나라의 九鼎을 말한다.

臣請譬之。
夫虎肉臊,其兵利身,人猶攻之也。
若使澤中之麋蒙虎之皮,人之攻之必萬於虎矣。
裂楚之地,足以肥國;詘楚之名,足以尊主。
今子將以欲誅殘天下之共主,居三代之傳器,吞三翮六翼,以高世主,非貪而何?
《周書》曰『欲起無先』,故器南則兵至矣。」
신이 비유해 보겠습니다.
호랑이의 고기는 노리고 발톱으로 자신을 지키는데, 사람들은 그래도 호랑이를 사냥하려 합니다.
만약 못에 사는 큰 사슴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워 잡으면 호랑이를 사냥하는 것보다 만 배의 이익이 됩니다.
楚의 땅을 나누면 나라는 충분히 부유해지고, 楚의 명성을 질책하면 각 나라의 군주를 높이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그대가 천하 공동의 군주를 시해하여 삼대에 걸쳐 전해오는 九鼎을 차지하고, 구정을 삼킴으로써 代代의 군주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데 이것이 탐욕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
<周書>에 이르기를
‘집안일을 일으키려 한다면 먼저 난이 없도록 하라.’
라고 했으므로 구정이 남쪽으로 가면 공격하는 軍隊가 올 터입니다. ”
於是楚計輟不行。
이에 楚는 계획을 중지하고 시행하지 않았다.

▶ 麋蒙虎之皮: 큰 사슴에게 호랑이 가죽을 씌우다.
▶ 詘: 질책하다.
▶ 傳器: 九鼎을 말한다.
▶ 三翮六翼: 九鼎을 말한다. 날개3개와 6개의 눈. 鼎은 발이 세 발이고 여섯 개의 귀를 가지고 있다는 뜻. 六翼은 여섯 개의 耳.
▶ 輟: 정지하다.


十九年,秦伐楚,楚軍敗,割上庸、漢北地予秦。
경양왕19년(기원전280년), 秦이 楚를 공격하니, 楚軍이 패하여 上庸과 漢北땅을 秦에게 떼어주었다.
二十年,秦將白起拔我西陵。
경양왕20년(기원전279년), 秦의 장수 白起가 楚의 西陵을 쳐서 빼앗았다.
二十一年,秦將白起遂拔我郢,燒先王墓夷陵。
경양왕21년(기원전278년), 秦의 장수 백기가 楚의 郢都를 쳐서 빼앗고 先王의 무덤이 있는 夷陵에 불을 질렀다.
楚襄王兵散,遂不復戰,東北保於陳城。
초 경양왕의 軍은 흩어져서 더이상 싸울 수 없으므로 동북으로 물러나 陳城을 지켰다.
二十二年,秦復拔我巫、黔中郡。
경양왕22년(기원전277년), 秦이 다시 楚의 巫郡과 黔中郡을 쳐서 빼앗았다.

▶ 楚襄王: 楚 頃襄王. 楚의 군주로 이름은 橫이다. 楚懷王이 죽은 뒤 큰아들인 頃襄王이 즉위하였다.
▶ 白起攻楚: 楚 頃襄王 20년(기원전278년)에 秦 장군 白起가 楚 西陵 땅을 점령하고 다시 鄢‧郢‧夷陵을 정복하여 楚 先王의 묘까지 불태웠다. <戰國策 秦策>
▶ 夷陵: 춘추시대 楚 先王의 묘지.
▶ 鄢郢: 鄢은 鄢城. 지금의 호북성 宜城縣이며, 郢은 당시 楚의 도읍으로 지금의 胡北省 江陵縣이다.
▶ 陳城: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 楚가 秦과 싸울 때 이곳으로 피해 잠시 도읍으로 정하였다.

 


二十三年,襄王乃收東地兵,得十餘萬,復西取秦所拔我江旁十五邑以為郡,距秦。
경양왕23년(기원전276년), 경양왕이 동쪽 지역 병사를 수습하여 10여만 명을 얻고, 다시 서쪽으로 秦에게 빼앗긴 장강 연안 15개 읍을 취하여 군으로 삼고 秦에 저항하였다.
二十七年,使三萬人助三秦伐燕。
경양왕27년(기원전272년), 楚가 3만 명의 병력으로 三晉을 도와 燕을 공격하였다.
復與秦平,而入太子為質於秦。
다시 秦과 강화하고 태자를 秦에 인질로 보냈다.
楚使左徒侍太子於秦。
초가 左徒로 하여금 秦에 인질로 있는 태자 完을 모시게 하였다.

▶ 左徒: 春申君 黄歇.

三十六年,頃襄王病,太子亡歸。
경양왕36년(기원전263년), 경양왕이 병이 들자 태자가 도망쳐 돌아왔다.
秋,頃襄王卒,太子熊元代立,是為考烈王。
이해 가을, 경양왕이 죽고 태자 熊元이 뒤를 이으니 그가 考烈王이다.
考烈王以左徒為令尹,封以吳,號春申君。
고열왕은 左徒를 영윤에 봉하고 吳땅에 봉하여 春申君이라 불렀다.

▶ 考烈王: 楚 考烈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完이다. 경양왕의 아들이며, 유왕이 뒤를 이었다.
▶ 春申君: 전국시대 楚의 정치가이며, 성은 黃, 이름은 歇이다. 전국시대 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식객 수천을 거느렸다. 楚의 태자 完과 秦에 볼모로 갔었으며, 뒤에 完이 돌아와 즉위하여 考烈王이 되자 春申君이 되었다. 기원전238년 고열왕이 병사하여 장례식에 가던 춘신군은 棘門에서 매복하고 있던 李園의 자객에게 종자와 함께 살해되어 그 목이 성 밖에 버려졌고, 일족과 따르던 무리도 모두 살해되었다.[史記列傳]권78春申君列傳


考烈王元年,納州于秦以平。
고열왕 원년(기원전262년), 州邑을 秦에 바치고 강화하였다.
是時楚益弱。
이 무렵 楚는 더욱 약해졌다.

▶ 納: 바치다.
▶ 州: 지명. 고대의 호북성 강릉 일대.


六年,秦圍邯鄲,趙告急楚,楚遣將軍景陽救趙。
고열왕6년(기원전257년), 秦이 邯鄲을 포위하니 趙가 楚에 위급을 알려왔으며, 楚는 장군 景陽을 보내 趙를 구원하였다.
七年,至新中。秦兵去。
고열왕7년(기원전256년), 楚 구원병이 新中에 이르자 秦軍이 물러갔다.
十二年,秦昭王卒,楚王使春申君弔祠于秦。
고열왕12년(기원전251년), 진소왕이 죽자 고열왕은 춘신군을 秦에 조문 사절로 보냈다.
十六年,秦莊襄王卒,秦王趙政立。
고열왕16년(기원전247년), 秦 莊襄王이 죽고 진왕 趙政이 즉위하였다.
二十二年,與諸侯共伐秦,不利而去。
고열왕22년(기원전241년), 제후들과 함께 秦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楚東徙都壽春,命曰郢。
楚가 동쪽 壽春으로 도읍을 옮겨 郢이라 불렀다.
二十五年,考烈王卒,子幽王悍立。
고열왕25년(기원전238년), 고열왕이 죽고 아들 幽王 悍이 즉위하였다.
李園殺春申君。
李園이 春申君을 죽였다.
幽王三年,秦、魏伐楚。
유왕3년(기원전235년), 秦과 魏가 楚를 공격해왔다.
秦相呂不韋卒。
秦의 승상 呂不韋가 죽었다.
九年,秦滅韓。
유왕9년(기원전229년), 秦이 韓을 멸망시켰다.
十年,幽王卒,同母弟猶代立,是為哀王。
유왕10년(기원전228년), 유왕이 죽고 同母弟 猶가 뒤를 이으니 그가 哀王이다.
哀王立二月餘,哀王庶兄負芻之徒襲殺哀王而立負芻為王。
애왕이 즉위한 지 두 달여 만에 애왕의 庶兄 負芻의 무리가 애왕을 습격하여 죽이고 부추를 왕으로 세웠다.
是歲,秦虜趙王遷。
이 해에 秦이 趙왕 遷을 포로로 잡았다.

▶ 幽王悍: 楚幽王. 전국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悍이다. 어머니가 李園의 누이인데, 처음에는 春申君에게 시집을 갔다가 아이를 밴 상태로 考烈王에게 바쳐져 왕후가 되었다. 아이 悍을 낳았는데 태자가 되었다. 고열왕이 죽은 뒤 이원이 춘신군을 찔러 죽이고 한을 왕으로 세웠다.
▶ 李園殺春申君: 고열왕이 아들이 없어서 춘신군이 이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趙 사람인 이원이 자신의 여동생을 춘신군에게 바쳤다. 이원의 여동생이 임신한 후 춘신군과 모의하여 고열왕에게 바쳤다. 얼마 후 이원의 여동생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유왕 한이다. 이원은 그 여동생이 입궁해 왕후가 되고 아들이 태자가 되자, 춘신군이 누설하거나 더욱 교만해질까 두려워 은밀히 죽음을 각오한 병사를 길러 춘신군을 찔러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극문 밖으로 던졌다.[史記列傳]권78春申君列傳
▶ 負芻: 楚王 負芻. 전국시대 말기 楚의 군주로 考烈王의 庶子이다. 부추4년 秦 장군 王翦이 楚軍을 격파하고, 項燕을 살해하였다. 다음 해 秦에 포로가 되고, 楚는 멸망하였다. 楚 영토는 쪼개져 3개 郡이 되었다.


王負芻元年,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
부추왕원년(기원전227년), 燕태자 丹이 荊軻를 시켜 진왕을 찔러 죽이려 하였다.
二年,秦使將軍伐楚,大破楚軍,亡十餘城。
부추왕2년(기원전226년), 秦이 장군을 보내 楚를 정벌하여 楚軍을 대파하니 10여 개의 성이 무너졌다.
三年,秦滅魏。
부추왕3년(기원전225년), 秦이 魏를 멸망시켰다.
四年,秦將王翦破我軍於蘄,而殺將軍項燕。
부추왕4년(기원전224년), 秦의 장군 王翦이 蘄에서 楚軍을 격파하고 장군 項燕을 죽였다.

▶ 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 燕太子 丹은 연나라의 마지막 태자로, 燕王 喜의 아들이다. 秦 政(: 후일 진시황제)은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燕 태자 丹과 함께 趙에 볼모로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여 즉위한 다음 태자 단을 무시하자, 태자 丹은 진왕 政에게 복수할 것을 꾀하여 荊軻에게 진왕 정을 죽이도록 했으나 형가가 실패하였다.[史記列傳]권86刺客列傳
▶ 王翦: 전국시대 秦의 장수로서 趙와 楚 등을 점령해 진의 천하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
▶ 項燕: 戰國時代 말기 楚의 장군으로, 기원전208년 反秦봉기를 일으켜 楚를 재건한 項梁의 아버지이다.


五年,秦將王翦、蒙武遂破楚國,虜楚王負芻,滅楚名為[楚]郡云。
부추왕5년(기원전223년), 秦의 장군 왕전과 蒙武가 마침내 楚를 격파하고 초왕 부추를 포로로 잡음으로써 楚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군 등을 설치하였다.

▶ 滅楚名為[楚]郡: 秦은 楚를 멸망시키고 楚를 3郡으로 나누었다. 초한 쟁패기에 楚 義帝를 군주로 세워 楚가 재건되었으나, 의제가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당했고 항우도 漢 유방에게 패망했으며 잔존 세력은 漢에게 항복하여 楚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사기 본기 권07. 항우본기>

太史公曰:
楚靈王方會諸侯於申,誅齊慶封,作章華臺,求周九鼎之時,志小天下;
及餓死于申亥之家,為天下笑。
操行之不得,悲夫!
勢之於人也,可不慎與?
棄疾以亂立,嬖淫秦女,甚乎哉,幾再亡國!
태사공은 말한다.
“楚靈王은 申邑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여 齊의 慶封을 죽이고, 章華臺를 지었으며, 周왕실의 九鼎을 요구할 때는 그 기세가 천하를 깔볼 정도였다.
그러나 申亥의 집에서 굶어죽자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지조와 품행을 갖추지 못하였으니 서글프구나!
위세가 사람에게 주어짐에 신중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기질이 반란으로 즉위하여 秦 여자를 총애함이 지나쳤으니 하마터면 또 나라가 망할 뻔했도다!”

▶ 慶封: 齊의 간신. 崔杼와 공모하여 齊 莊公을 시해한 후 左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초 영왕이 경봉이 도망하여 있는 吳 주방을 함락시키고 경봉을 죽였다.
▶ 餓死于申亥之家: 靈王이 芋尹申亥氏의 집에서 목을 매고 죽었다. <춘추좌씨전 노소공13기원전529년>
▶ 棄疾: 楚平王. 楚의 공자 棄疾. 공자 比의 동생이다. 楚靈王이 陳을 멸하고 5년 뒤 楚公子 棄疾이 영왕을 살해하고 平王이 되었다. 평왕이 태자 建을 위해 秦에서 그 태자비를 구하였는데, 신부가 될 孟嬴이 아름다운 데다, 費無忌의 책동을 받아 평왕이 妃로 삼아 아들을 낳았다.
▶ 嬖淫秦女: 초평왕은 태자 건의 부인이 될 여자를 차지하여 총애하였다. 嬖는 총애하다.
▶ 幾: 하마터면.


 

한문의 허사(虛詞) 直

한문의 허사(虛詞) 直 直은 비허사적 용법으로서 “是非曲直”과 “直言” 및 “値”자의 假借字로 쓰이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直五百文” 즉 “當五百錢”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상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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