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42. 鄭世家(정세가)

耽古樓主 2023. 6. 27. 19:58


이편은 30세가 중 열두 번째 편으로 周나라의 제후국인 鄭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鄭은 周나라 姬姓의 제후국으로 周厲王의 아들이자 周宣王의 동생인 桓公友가 기원전806년 서주의 鄭 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다.
그 후 周幽王이 무도한 짓을 행하자 鄭桓公이 처자를 虢과 鄶 사이에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기원전771년 西周가 망할 때 환공이 난에 휩싸여 죽자 아들 武公이 東虢과 鄶를 멸망시키고서 新鄭을 수도로 정하여 나라를 이어 갔다.
鄭莊公때에는 춘추시대의 강국으로 패주로 칭해지기도 하였다. 기원전607년 晉, 陳, 衛, 宋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鄭簡公 시기에는 자산을 등용하여 법 체계를 정비하는 등 국력을 유지하였다.그러나 전국시대 초기인 기원전375년 鄭의 내란을 틈탄 韓에 의해 멸망되었다.

世家42. 鄭世家(정세가)

鄭桓公友者,周厲王少子而宣王庶弟也。
鄭桓公 友는 주厲王의 작은아들이자, 宣王 庶弟이다.

宣王立二十二年,友初封于鄭。
주선왕 재위22년에 가 처음으로 땅에 봉해졌다.

封三十三歲,百姓皆便愛之。
봉해진 지 33년이 지나자 백성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였다.

幽王以為司徒。
幽王이 그를 司徒로 임명하였다.

和集周民,周民皆說,河雒之閒,人便思之。
주나라 백성들을 화목하게 단결시키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했고, 黃河 洛水 유역의 백성들도 모두 그를 사모하였다.

為司徒一歲,幽王以褒后故,王室治多邪,諸侯或畔之。
사도가 된 지 1년 후에 유왕이 褒姒를 총애하는 바람에 왕실의 정치에 많은 폐단이 생겨, 제후 일부가 유왕을 배반하였다.

▶ 鄭桓公友: 鄭桓公. 西周말기 鄭의 군주로 이름은 友이다. 周厲王의 아들이고, 周宣王의 庶弟이다. 처음에 鄭땅에 봉해졌다. 周幽王때 司徒에 임명되었다. 유왕이 失德하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환공이 그 백성들을 鄶와 東虢사이로 옮겨 鄭 건국의 기초를 다졌다.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驪山에서 유왕을 죽이면서 환공도 함께 살해하였다.
▶ 厲王: 周厲王. 춘추시대 周나라의 군주로 성은 姬씨고, 이름은 胡다. 夷王의 아들이고, 周穆王의 4대손이다. 탐욕스럽고 잔인하며 이익만 좇았고, 榮夷公을 卿士로 삼았다. 포학하고 사치스러운 데다 오만한 성격이라 諸侯는 조회를 오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은 그를 비방하였다. 나중에 화가 난 백성이 들고일어나 공격하니 彘로 달아났다. 14년 뒤 체에서 죽었다.
▶ 幽王: 周幽王. 주나라의 제12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宮湦이다. 주선왕의 아들이다. 성격이 난폭하고 주색을 좋아하였고, 褒姒로 인하여 견융에게 공격당해 아들 백복과 함께 驪山기슭에서 살해되었다
▶ 司徒: 교육을 관장하는 관리.
▶ 畔: 叛과 통용된다. 배반하다.

 

於是桓公問太史伯曰
王室多故予安逃死乎?」
이에 환공은 太史伯에게 물었다.
왕실에 사고가 빈번하니, 내가 어찌하면 죽음을 피할 수 있겠소?”

太史伯對曰
獨雒之東土河濟之南可居。」
태사 백이 대답하였다.
오직 낙수 동쪽 땅과 황하와 濟水 남쪽이 살 만합니다. ”

公曰
何以?」
환공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소?”

對曰
地近虢鄶之君貪而好利百姓不附
今公為司徒民皆愛公公誠請居之鄶之君見公方用事輕分公地
公誠居之鄶之民皆公之民也。」
태사 백이 대답하였다.
땅이 , 와 가까운데, 괵과 회의 군주는 욕심이 많고 이익을 밝혀서 백성이 따르지 않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사도로서 백성들이 모두 공을 사랑하니, 공께서 진심으로 살기를 청하면, 괵과 회의 군주는 공께서 실권을 장악하심을 보고 쉽게 공에게 땅을 나눠 줄 터입니다.
공께서 그곳에 정성들여 사시면 괵과 회의 백성들이 모두 공의 백성들이 될 터입니다. ”

▶ 太史伯: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는 태사 伯. 이름은 穎, 字는 碩父라는 설과 伯陽이라는 설이 있다.
▶ 逃死: 죽음을 피하다.
▶ 虢, 鄶: 虢은 東虢으로 虢仲의 후예이며 姬姓의 나라이고, 鄶는 妘姓의 나라이다. 周幽王시절 두 나라가 子爵과 男爵의 국가 중 비교적 큰 나라 축에 끼었다.
▶ 用事: 정권을 장악하다.

 

公曰
吾欲南之江上何如?」
환공이 물었다.
내가 남쪽 長江유역에 살려고 하면 어떻겠소?”

對曰
昔祝融為高辛氏火正其功大矣而其於周未有興者楚其後也
周衰楚必興
非鄭之利也。」
태사 백이 대답하였다.
옛날 祝融 高辛氏 火正으로 그 공이 컸으나, 그 후손이 주나라에서는 흥성하지 못했으니 초가 그 후손입니다.
주 왕실이 쇠약해지면 는 필시 흥성할 터입니다.
의 흥성은 의 이로움이 아닐 터입니다.”

公曰
吾欲居西方何如?」
환공이 물었다.
내가 서쪽에 살려고 하면 어떻겠소?”

對曰
其民貪而好利難久居。」
태사 백이 대답하였다.
그곳 백성들은 욕심이 많고 이익을 밝히니 오래 살기 힘듭니다. ”

▶ 祝融: 顓頊의 후손으로, 이름은 重黎다. 高辛氏의 火正이 되었다. 高辛은 帝嚳氏의 號로 堯임금의 아버지이다. 火正은 불을 담당하는 관아의 우두머리 벼슬이다.

 

 

公曰:
「周衰,何國興者?」
환공이 물었다.
주나라가 쇠약해지면 어느 나라가 흥성해지겠소?”

對曰:
「齊、秦、晉、楚乎?
夫齊,姜姓,伯夷之後也,伯夷佐堯典禮。
秦,嬴姓,伯翳之後也,伯翳佐舜懷柔百物。
及楚之先,皆嘗有功於天下。
而周武王克紂後,成王封叔虞于唐,其地阻險,以此有德與周衰并,亦必興矣。」
태사백이 대답하였다.
, , ,  아니겠습니까?
 姜姓이고 伯夷의 후손이며, 백이는 일찍이 임금을 보좌하여 典禮를 주관했습니다.
 嬴姓으로 伯翳의 후손이며, 백예는 임금을 도와 만물을 회유하였습니다.
 의 선조들과 함께 천하에 공을 세운 바 있습니다.
그리고 주武王이 은나라 紂王을 물리친 뒤 주成王 叔虞 에 봉했으며, 그 땅은 험한 곳이지만 덕 있는 자손이 주왕실의 쇠락과 함께함을 보면  역시 틀림없이 흥할 터입니다. ”

桓公曰:
「善。」
환공이 말하였다.
좋은 말씀이오. ”

於是卒言王,東徙其民雒東,而虢、鄶果獻十邑,竟國之。
이에 갑자기 주유왕에게 그의 백성들을 낙수 동쪽으로 이주시키겠다고 청하니 과연 괵나라와 회나라가 각각 열 개의 읍을 바쳐서 마침내 을 세웠다.

▶ 典禮: 제도와 예의.
▶ 伯夷: 요임금 시대에 제사를 관장하는 秩宗벼슬을 지냈으며 炎帝의 후손이다.
▶ 伯翳: 伯益이라고도 하며 舜임금 시절 초목과 鳥獸를 관장하는 虞官을 지냈다.
▶ 伯翳佐舜懷柔百物: 백예는 온갖 초목과 새와 짐승들이 각기의 삶을 잘 누리도록 하는 일로써 舜임금을 보좌하였다.
▶ 卒: 猝과 통용되어 돌연히.

 

二歲,犬戎殺幽王於驪山下,并殺桓公。
환공2(기원전771) 犬戎 驪山에서 유왕을 죽이고 정환공까지 죽였다.

鄭人共立其子掘突,是為武公。
 사람들이 함께 그의 아들 掘突을 세우니 그가 武公이다.

▶ 犬戎殺幽王於驪山下: 周幽王은 주나라의 12대 왕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서주 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애첩 褒似를 총애한 나머지 정비 申后와 그 소생인 태자 宜臼를 폐하고 포사와 그 소생 伯服을 정비와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申侯를 격분시켰고, 결국 견융과 신후의 연합 공격을 받고 사살되었다. <사기 권04. 周本紀>
▶ 武公: 鄭武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掘突이고, 桓公의 아들이다. 周平王의 卿士가 되었다.

 

 

武公十年,娶申侯女為夫人,曰武姜。
무공10(기원전761) 申侯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니 武姜이라 하였다.

生太子寤生,生之難,及生,夫人弗愛。
무강이 태자 寤生을 낳았는데 난산이었으므로 오생이 태어나자 부인은 오생을 좋아하지 않았다.

後生少子叔段,段生易,夫人愛之。
그 후 작은아들 叔段을 낳았는데 단은 쉽게 낳았기 때문에 부인이 숙단을 예뻐하였다.

二十七年,武公疾。
무공27(기원전744)에 무공이 병이 났다.

夫人請公,欲立段為太子,公弗聽。
부인이 무공에게 청하여 숙단을 태자로 세우고자 했으나 무공이 듣지 않았다.

是歲,武公卒,寤生立,是為莊公。
그 해에 무공이 죽고, 오생이 즉위하니 그가 莊公이다.

▶ 武姜: 姜은 申의 성이고, 무강은 남편의 시호를 따른 것이다.
▶ 寤生: 난산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도 逆産을 의미하는 寤生으로 지어졌다. 寤는 逆의 뜻을 지닌 牾와도 통한다. 이로 인해, 어머니가 싫어했고 그 반대급부로 아우 共叔段을 사랑하였다. <춘추좌씨전 魯隱公기원전722년>
▶ 莊公: 鄭莊公. 성은 姬이고, 이름은 寤生으로 鄭武公의 아들이다. 春秋시대 鄭의 3대 君主로42년 동안 재위하였다. 모친 강씨가 동생 숙단을 편애한 것을 빌미로 숙단이 반역을 일으키자 이를 신속히 진압한 후 모친과 결별했으나 영고숙의 기지로 화해하였다. 周, 虢, 衛, 蔡, 陳 연합군 및 宋, 陳, 蔡, 衛, 鲁 등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더불어 燕을 방어하고, 陳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許와 息을 공격했으며 北戎을 방어하였다.

 

莊公元年,封弟段於京,號太叔。
장공원년(기원전743)에 동생 叔段 京城에 봉하고 太叔이라 불렀다.

祭仲曰:
「京大於國,非所以封庶也。」
祭仲이 말하였다.
경성은 국도보다 크니 동생을 봉해서는 안 됩니다. ”

莊公曰:
「武姜欲之,我弗敢奪也。」
장공이 말하였다.
무강이 그렇게 하기를 바라니 내가 감히 빼앗을 수 없소. ”

段至京,繕治甲兵,與其母武姜謀襲鄭。
단이 경성으로 가서 군대를 훈련시키며 그 어머니 무강과 함께 을 습격할 준비를 하였다.

二十二年,段果襲鄭,武姜為內應。
장공22(기원전722)에 숙단이 과연 을 습격하고 무강이 안에서 호응하였다.

莊公發兵伐段,段走。
장공이 군대를 보내 숙단을 공격하니 숙단이 달아났다.

伐京,京人畔段,段出走鄢。
경성을 공격하니 경성 사람들이 을 배반했고 단은 읍으로 달아났다.

鄢潰,段出奔共。
언읍이 무너지자 단이 으로 달아났다.

於是莊公遷其母武姜於城潁,誓言曰:
「不至黃泉,毋相見也。」
이에 장공은 그의 어머니 무강을 城穎으로 거처를 옮기고 맹서하였다.
황천에 가기 전에는 서로 만나지 않을 터이다. ”

▶ 封弟段於京,號太叔. : 장공이 무강의 청에 따라 숙단을 京城에 살게 하고, 그를 京城太叔이라고 하였으며 신하들보다 특별히 총애함을 말한 것이다. 京은 鄭의 읍으로 京城이다.
▶ 祭仲: 鄭의 大夫이다. 字는 仲足이며 祭足이라고도 한다.
▶ 國: 國都.
▶ 繕: 손질하다.
▶ 共: 共國. 지금의 汲郡 共縣.
▶ 城穎: 鄭 땅.
▶ 黄泉: 저승. 땅속의 물. 이듬해 穎考叔이 황천에서 만나면 된다고 진언하자 이를 따라 굴을 파서 어머니를 만나고 화해하였다.



 

居歲餘,已悔思母。
1년 여 지나 장공은 후회가 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潁谷之考叔有獻於公,公賜食。
穎谷 考叔이 장공에게 예물을 바치자 장공이 음식을 내렸다.

考叔曰:
「臣有母,請君食賜臣母。」
고숙이 말하였다.
신에게 어머니가 계신데 군주께서 신의 어머니에게도 음식을 내려주십시오. ”

莊公曰:
「我甚思母,惡負盟,柰何?」
장공이 말하였다.
나는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은데 맹서를 어길까 두렵소. 어찌하면 되겠소?”

考叔曰:
「穿地至黃泉,則相見矣。」
고숙이 말하였다.
땅을 황천까지 파서 서로 만나십시오. ”

於是遂從之,見母。
이에 마침내 장공이 그 말을 따라 어머니를 만났다.

▶ 有獻: 獻上하다. 예물을 바치다.
▶ 惡: 두려워하다.
▶ 潁谷之考叔: 穎考叔. 춘추시대 鄭의 효자. 鄭莊公이 叔段의 반란으로 자기 어머니 姜氏를 穎城에 추방했는데, 영고숙이 찾아와 장공이 고깃국을 내리니 영고숙이 국물만 먹고 고기는 남기기에 까닭을 물으니, ‘小人에게 어미가 있어 가져다 드리려 합니다. ’ 라고 하였다.
장공이 물으니 황천에서 만나면 된다고 穎考叔이 진언하였고, 이를 따라 굴을 파서 어머니를 만나고 화해하였다. <춘추좌씨전 은공 원년>
▶ 穿地至黃泉: 영고숙이
“만약 물이 나는 데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서 굴속에서 서로 만나신다면 누가 黃泉에서 만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니, 공이 그 말을 따랐다. 여기서 황천은 땅속의 물을 말한다.




二十四年,宋繆公卒,公子馮奔鄭。
장공24(기원전720), 宋繆公이 죽자 공자  으로 도망쳐왔다.

鄭侵周地,取禾。
이 주나라의 땅에 침범하여 벼를 가져갔다.

二十五年,衛州吁弒其君桓公自立,與宋伐鄭,以馮故也。
장공25(기원전719),  州吁가 그의 군주 桓公을 시해하고 즉위하여 과 함께 을 공격하였는데 이는 공자 때문이었다.

二十七年,始朝周桓王。
장공27(기원전717), 처음으로 周桓王에게 조회하였다.

桓王怒其取禾,弗禮也。
환왕은 그가 벼를 가지고 간 일에 화가 나서 예우하지 않았다.

二十九年,莊公怒周弗禮,與魯易祊、許田。
장공29(기원전715), 장공은 주나라가 예우하지 않음에 화를 내고, 祊邑  許田과 바꾸어버렸다.

三十三年,宋殺孔父。
장공33(기원전711)  孔父를 죽였다.

▶ 宋穆公: 춘추시대 宋의 제14대 군주이다. 성은 子, 이름은 和이다. 12대 송무공의 아들이며 13대 송선공의 아우로, 형이 임종 시에 군위를 맡겨 세 번 사양하고 즉위하였다. 재위 9년 만에 죽었고, 임종 시에 대사마 공보를 불러다 자신의 아들(후의 송장공)대신 형의 아들 與夷(: 후의 송상공)에게 양위하도록 하였다. 목공은 아들 풍을 鄭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馮은 穆公의 아들이며 후일 莊公이 된다.
<[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 州吁: 衛의 14대 군주이며 莊公의 아들이자 衛桓公의 동생이다. 위환공16년(기원전719)봄, 주우는 衛의 도망자들과 함께 환공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衛의 군주가 되었다. 주우가 정장공의 동생 숙단을 위하여 鄭을 공격하려고 宋, 陳, 蔡에 동참을 요청하자, 세 나라가 모두 주우의 청을 받아들였다. 宋은 공자 풍이 鄭에 있었으므로 공자 풍을 제거하기 위해 참여하였다.
▶ 周桓王: 주나라의 14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林이다. 주평왕의 아들인 태자 洩父의 아들이다. 평왕이 사망했을 때 태자 예보가 이미 요절했기 때문에 즉위하였다.
▶ 桓王不禮: 환왕이 즉위한 뒤 卿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를 계획하였다. 마침 주나라와 鄭이 인접해 있어서 鄭이 경계를 넘어 벼를 베는 일이 잦았는데, 이를 빌미로 정장공을 卿士의 직위에서 파면한 뒤 虢公忌父를 경사로 삼았다. 정장공은 이에 불만을 느껴 이후로 환왕을 조회하지 않았고, 주나라와 鄭은 서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史記本紀]권04. 周本紀>
▶ 許田: 周成王이 낙양에 王城을 건조하고서 遷都할 뜻이 있었으므로 周公旦에게 주어, 魯君이 조회 왔을 때 朝宿邑으로 삼게 한 땅으로 鄭 가까이에 있다. 탕목읍은 그 땅에서 거두는 구실로 목욕 등의 비용에 충당하는 읍이라는 뜻으로 제후의 사유 영지이고, 조숙읍은 조회 오는 제후의 숙박 등의 비용으로 쓰기 위하여 천자가 하사하는 采地이다. 춘추시대에는 周王이 태산의 제사를 폐한 지가 이미 오래이므로 탕목읍은 이미 의미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鄭와 거리가 매우 멀고, 또 魯는 許田에 있는 주공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鄭은 자기들이 주공을 제사지내겠다는 핑계로 멀리 있는 祊田을 가까이에 있는 허전과 교환한 것이다. <춘추좌씨전 魯隱公 8기원전715년>
▶ 孔父: 孔父嘉. 춘추시대 宋의 대사마. 자는 孔父이며 이름은 嘉이다. 孔子의 6祖다. 穆公때 大司馬가 되었는데, 목공이 죽자 목공의 遺囑을 받아 殤公을 세웠다. 상공이 재위하는 10년 동안 11번이나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太宰 華父督이 그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민생을 안정시킨다는 명분으로 공보가를 살해하고 공보가의 아내를 차지하였다.
<[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三十七年,莊公不朝周,周桓王率陳、蔡、虢、衛伐鄭。
장공37(기원전707), 장공이 주나라에 조회하지 않자, 주환왕이 , , , 를 거느리고 을 공격하였다.

莊公與祭仲、高渠彌發兵自救,王師大敗。
장공은 祭仲, 高渠彌와 함께 출병하여 自救하니, 주환왕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祝聸射中王臂。
祝瞻은 주환왕의 팔을 쏘아 맞추었다.

祝聸請從之,鄭伯止之,曰:
「犯長且難之,況敢陵天子乎?」乃止。
축첨이 추격하기를 청하자 장공이 말렸다.
윗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곤란한 일인데, 하물며 감히 천자를 능멸하겠는가?”
라고 하며 제지하였다.

夜令祭仲問王疾。
밤에 채중에게 명하여 주환왕을 문안하였다.

▶ 高渠彌: 춘추시대 鄭의 대부. 정장공 때 卿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자 홀이 정소공으로 즉위한 후 소공을 살해하고 공자 亹를 옹립하였다.



三十八年,北戎伐齊,齊使求救,鄭遣太子忽將兵救齊。
장공38(기원전706), 北戎 를 공격하여 가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은 태자 을 보내어 병사를 거느리고 를 구원하였다.

齊釐公欲妻之,忽謝曰:
「我小國,非齊敵也。」
齊釐公이 홀을 사위로 삼고 싶어 했으나, 홀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우리는 小國이라 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

時祭仲與俱,勸使取之,曰:
「君多內寵,太子無大援將不立,三公子皆君也。」
이때 채중이 함께 있었는데, 혼인하기를 권하였다.
우리 군주에게 寵姬가 여럿이므로, 태자에게 큰 나라의 후원이 없으면 즉위할 수 없습니다. 나라의 세 공자가 모두 군주감입니다. ”

所謂三公子者,太子忽,其弟突,次弟子亹也。
이른바 세 공자란 태자 홀, 그의 동생 , 그 다음 동생 子亹를 말한다.

▶ 北戎: 山戎이라고도 하며 戎族의 일파로 춘추시대 북방에 거주하는 이민족.
▶ 太子忽: 鄭莊公의 장남. 훗날의 鄭昭公. 제희공25년(기원전706년), 鄭에서는 태자 忽을 보내 齊를 구원해 대승을 거두고 대장과 갑병들의 목을 齊에 바쳤다. 희공은 예전에 홀에게 딸 문강을 시집보내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번에 북융을 격파하자 또 사위로 삼고자 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춘추좌씨전 노환공6기원전706년>
▶ 齊釐公: 齊僖公. 齊의 제13대 후작이다. 이름은 祿甫다. <사기>에서는 사마천의 할아버지 司馬僖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釐公으로 표기하였다.
▶ 敵: ~에 상당하다. 감당하다.
▶ 取: 娶와 통용된다. 아내를 얻다.
▶ 太子忽,其弟突,次弟子亹也: 태자 忽은 鄭昭公이 되며, 동생 突은 鄭厲公이 되며, 동생 子亹는 채중에 의해 군주(시호가 없다)로 옹립된다.

 

 

四十三年,鄭莊公卒。
장공43(기원전701), 정장공이 세상을 떠났다.

初,祭仲甚有寵於莊公,莊公使為卿;
公使娶鄧女,生太子忽,故祭仲立之,是為昭公。
당초 채중이 장공에게 심한 총애를 받아 장공이 그를 으로 삼았다.
장공이 채중을 보내 鄧女를 아내로 맞아 태자 홀을 낳았기 때문에 채중은 태자 홀을 군주로 세웠으며 그가 昭公이다.

▶ 娶: 아내를 맞다.
▶ 昭公: 鄭昭公. 춘추시대 鄭의 제4대 군주로 이름은 忽이고, 자는 曼伯이다. 정장공과 정비(鄧曼)의 장자다. 정장공이 죽자 즉위하였으나 宋의 지원을 받은 동생 정여공에게 쫓겨났다가 복위했으나 고거미에 의해 암살당하였다.

 

 

莊公又娶宋雍氏女,生厲公突。
장공은 또  雍氏 여자를 아내로 맞아 厲公突을 낳았다.

雍氏有寵於宋。
옹씨는 에서 총애를 받았었다.

宋莊公聞祭仲之立忽,乃使人誘召祭仲而執之,曰:
「不立突,將死。」
宋莊公은 채중이 태자 홀을 즉위시키 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 채중을 유인하여 사로잡고서 협박하였다.
을 군주로 세우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

亦執突以求賂焉。
또 돌을 사로잡아 뇌물을 요구하였다.

祭仲許宋,與宋盟。以突歸,立之。
채중이 의 요구를 받아들여 과 맹약하고 을 귀국시켜 돌을 군주로 옹립하였다.

昭公忽聞祭仲以宋要立其弟突,九月 辛[丁]亥,忽出奔衛。
소공 은 채중이 의 요구로 그의 동생 돌을 옹립할 줄 알고 9월 정해일에 로 달아났다.

己亥,突至鄭,立,是為厲公。
기해일에 왕자 돌이 에 이르러 즉위하니, 그가 厲公이다.

▶ 宋莊公: 춘추시대 宋의 군주로 이름은 馮이고, 穆公의 아들이다. 목공이 與夷를 세우려고 하여 鄭에 가서 살게 하였다. 목공이 죽자 여이가 즉위하니 그가 殤帝이며, 太宰華督이 상제를 살해하여 군주가 되었다.
▶ 執: 체포하다.
▶ 要: 협박하다.
▶ 厲公: 鄭厲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突이고, 鄭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宋大夫雍氏의 딸인데, 宋莊公에게 총애를 받았다. 정장공이 죽자 昭公이 즉위했는데, 송장공이 祭仲을 위협하여 왕위를 탈취하고 여공을 세웠다. 재위4년에 채중이 정권을 독점함에 불만을 품고 채중의 사위 雍糾를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다. 일이 누설되어 옹규는 피살되었고, 여공은 달아나 변경의 櫟읍에 머물렀다. 鄭子儀 14년에 鄭의 대부 傅瑕가 자의를 죽이자 복위하였다.

 

 

厲公四年,祭仲專國政。
여공4(기원전697)에 채중이 국정을 專行하였다.

厲公患之,陰使其婿雍糾欲殺祭仲。
여공이 이 일을 걱정하여 은밀히 채중의 사위 雍糾를 시켜 채중을 죽이려 하였다.

糾妻,祭仲女也,知之,謂其母曰:
「父與夫孰親?」
옹규의 처는 채중의 딸이었는데 이를 알고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남편 중에 어느 쪽이 더 가깝습니까?”

母曰:
「父一而已,人盡夫也。」
그녀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아버지는 하나지만 남자는 모두가 남편이 될 수 있다. ”

女乃告祭仲,祭仲反殺雍糾,戮之於市。
이에 딸이 채중에게 이 일을 알리니, 채중이 오히려 옹규를 죽이고, 그 시신을 저자에서 죽였다.

厲公無柰祭仲何,怒糾曰:
「謀及婦人,死固宜哉!」
여공은 채중을 어찌할 수가 없으니, 옹규에 대해 화를 내며 말하였다.
부인과 일을 꾀했으니 실로 죽어 마땅하다!”

夏,厲公出居邊邑櫟。
여름에 厲公이 쫓겨나 변방의 읍인 에 살게 되었다.

祭仲迎昭公忽,六月乙亥,復入鄭,即位。
채중은 소공 홀을 맞이했고, 6월 을해일 소공은 다시 에 들어와 즉위하였다.

▶ 專: 제멋대로 하다.
▶ 陰: 은밀히. 암암리에.
▶ 櫟: 櫟邑. 춘추시대 鄭의 별도의 도읍지. 지금의 하남성 禹州市이다.






秋,鄭厲公突因櫟人殺其大夫單伯,遂居之。
가을에 鄭厲公突 櫟邑사람들을 시켜 역읍의 大夫 單伯을 죽이고 역읍에 자리를 잡았다.

諸侯聞厲公出奔,伐鄭,弗克而去。
제후들이 厲公이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宋頗予厲公兵,自守於櫟,鄭以故亦不伐櫟。
이 여공에게 많은 군대를 주어 스스로 역읍을 지키게 하니 은 이 때문에 다시 역읍을 공격하지 못하였다.

▶ 厲公: 鄭厲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突이고, 鄭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정장공이 죽자 昭公이 즉위했는데, 송장공이 祭仲을 위협하여 왕위를 탈취하고 여공을 세웠다. 재위4년에 채중이 정권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채중의 사위 雍糾를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다. 일이 누설되어 옹규는 피살되었고, 여공은 달아나 변경의 櫟읍에 머물렀다. 鄭子儀 14년에 鄭의 대부 傅瑕가 자의를 죽이자 복위하였다.
▶ 櫟: 櫟邑
▶ 單伯: 周나라 역읍의 大夫.

 

 

昭公二年,自昭公為太子時,父莊公欲以高渠彌為卿,太子忽惡之,莊公弗聽,卒用渠彌為卿。
소공2(기원전695)에 소공이 태자였을 때부터 아버지 莊公 高渠彌 으로 삼고자 했는데 태자 (: 소공)이 그를 미워했으나, 장공이 듣지 않고 결국 고거미를 에 임명하였다.

及昭公即位,懼其殺己,冬十月辛卯,渠彌與昭公出獵,射殺昭公於野。
소공이 즉위하자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하여 겨울 10월 신묘일에 高渠彌는 소공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야외에서 소공을 쏘아 죽였다.

祭仲與渠彌不敢入厲公,乃更立昭公弟子亹為君,是為子亹也,無謚號。
채중과 고거미가 감히 厲公을 맞아들일 수 없어 소공의 동생 子亹로 바꾸어 군주로 옹립했으며 그가 子亹인데 시호는 없다.

▶ 高渠彌: 춘추시대 鄭의 대부. 정 장공 때 卿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자 홀이 정 소공으로 즉위 후 소공을 살해하고 공자 亹를 옹립하였다.
▶ 子亹(자미): 鄭子亹. 춘추시대 鄭의 제6대 군주로 이름은 亹이며, 시호는 없다. 정장공의 아들이어서 子亹라고 칭하였다. 정소공, 정여공의 아우이며, 정자영의 형이다. 기원전695년, 정소공을 시해한 고거미가 옹립하여 鄭의 군주가 되었다. 기원전694년 제후들의 회맹장소인 首止에 참가하였다. 齊襄公에게 살해당해 1년도 재위하지 못하였다.

 

 

子亹元年七月,齊襄公會諸侯於首止,鄭子亹往會,高渠彌相,從,祭仲稱疾不行。
자미 원년(기원전694) 7월에 齊襄公 首止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는데, 의 자미도 회맹에 갔으며 고거미가 보좌로 따랐고, 채중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所以然者,子亹自齊襄公為公子之時,嘗會鬬,相仇,及會諸侯,祭仲請子亹無行。
그 까닭은 子亹가 일찍이 양공이 공자였을 때 싸운 적이 있어서 서로 원수가 되었는데, 제후들이 회맹하게 되자 채중이 자미에게 가지 말라고 청하였다.

子亹曰:
「齊彊,而厲公居櫟,即不往,是率諸侯伐我,內厲公。
我不如往,往何遽必辱,且又何至是!」卒行。
자미가 말하기를,
는 강하고, 여공은 櫟邑에 있으니 가지 않으면 제후들을 이끌고 나를 공격하여 여공을 들일 터이오.
나는 가는 것이 나을 터이다. 간다고 어찌 꼭 욕을 당하랴. 어쩌다 이 지경인가!”
하며 끝내 갔다.

▶ 齊襄公: 춘추시대 齊의 군주로 이름은 諸兒, 莊公의 손자다.
12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襄이다. 양공은 황음무도하여 무고한 자를 죽이고 이복 동생인 노 환공의 부인 문강과 사통하였으며, 노환공을 죽였으므로 인심을 크게 잃었다. 대부 연칭과 관지보가 병란을 일으켰고, 양공을 사로잡아 살해한 뒤 양공의 종제 공손 무지를 즉위시켰다.
▶ 相: 보좌하다.
▶ 内: 納과 통용된다. 받아들이다.
▶ 遽: 어찌.

 

 

於是祭仲恐齊并殺之,故稱疾。
당시 채중은 가 자미와 함께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 稱疾한 것이다.

子亹至,不謝齊侯,齊侯怒,遂伏甲而殺子亹。
자미가 도착하여도 양공에게 사과하지 않자, 양공이 화를 내었고 매복한 갑병이 자미를 죽였다.

高渠彌亡歸,歸與祭仲謀,召子亹弟公子嬰於陳而立之,是為鄭子。
고거미는 도망쳐 돌아와서 채중과 모의하여 자미의 동생 공자  에서 불러들여 옹립하니 그가 鄭子이다.

是歲,齊襄公使彭生醉拉殺魯桓公。
이해에 양공은 彭生을 시켜 魯桓公을 취하게 하고 늑골을 부러뜨려 죽게 하였다.

▶ 公子嬰: 鄭子嬰. 춘추시대 鄭의 제7대 군주로 이름은 嬰 혹은 儀이며, 시호는 없다. 사서에서 子儀 혹은 鄭子라고 한다. 정장공의 아들이며, 정소공, 정여공, 정자미의 아우다. 재위 14년 만에 정여공에게 투항한 傅瑕에게 암살당하였다.
▶ 魯桓公: 춘추시대 魯의 군주로 이름은 允 또는 軌이고, 惠公의 적자다. 公子翬가 隱公을 살해하자 즉위하였다. 齊襄公의 누이 文姜을 아내로 얻었는데 부인이 제양공과 사통하자 크게 화를 냈다. 양공이 이를 알고 연회를 베풀 때 力士를 시켜 살해하였다.

 

鄭子八年,齊人管至父等作亂,弒其君襄公。
정자8(기원전686) 사람 管至父 등이 난을 일으켜 군주인 양공을 시해하였다.

十二年,宋人長萬弒其君湣公。
정자12(기원전682) 사람 長萬이 그의 군주 湣公을 시해하였다.

鄭祭仲死。
의 채중이 죽었다.

▶ 管至父: 춘추시대 齊의 大夫. 襄公이 그와 連稱에게 葵丘에서 戍자리를 서도록 하면서 다음 해 瓜가 익으면 교체하겠다고 하였다. 때가 되어도 교체가 되지 않자 화가 나서 公子無知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양공을 살해한 뒤 무지를 군주로 세웠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 長萬: 춘추시대 宋 사람으로 卿을 지냈다. 南宮萬 또는 宋萬으로도 불린다. 송민공10년(기원전682년) 乘丘의 전쟁 때 魯 군대가 南宮長萬을 사로잡았다가 宋의 요청으로 그를 돌려보내니, 宋閔公이 그에게
“과거에는 내가 그대를 존경하였으나, 지금은 그대가 魯의 포로이니 나는 그대를 존경하지 않는다. ”
라고 조롱하여 모욕하였다.
남궁장만은 이 말로 인해 송민공에게 원한을 품고 閔公을 시해하였다.

 

十四年,故鄭亡厲公突在櫟者使人誘劫鄭大夫甫假,要以求入。
鄭子14(기원전680)에 이전에 역읍으로 도망쳤던 厲公突이 사람을 보내  대부 甫假(: 傅瑕)를 유인해 겁박하였는데, 국도로 돌아가 복위하게 해달라고 하였다.

假曰:
「捨我,我為君殺鄭子而入君。」
보하가 말하기였다.
나를 놓아주면 내가 당신을 위해 鄭子를 죽이고 국도로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

厲公與盟,乃捨之。
여공이 함께 맹약을 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 甫假: 鄭의 대부. 傅瑕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좌씨전 魯莊公 14기원전680년>

 

 

六月甲子,假殺鄭子及其二子而迎厲公突,突自櫟復入即位。
6월 갑자일에 甫假 鄭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 돌을 맞이하자, 여공 돌은 역읍에서 다시 돌아와 즉위하였다.

初,內蛇與外蛇鬬於鄭南門中,內蛇死。
당초 성문 안의 뱀과 성문 밖의 뱀이  남문에서 싸우다가 성문 안의 뱀이 죽은 일이 있었다.

居六年,厲公果復入。
6년이 지난 후에 여공이 과연 다시 들어왔다.

入而讓其伯父原曰:
「我亡國外居,伯父無意入我,亦甚矣。」
여공이 들어와 그 큰아버지 原繁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내가 도망쳐서 외국에서 살고 있는데도 큰아버지는 나를 맞아들일 생각이 없었으니 너무한 것 아니오?”

原曰:
「事君無二心,人臣之職也。
原知罪矣。」
원번이 말하기를,
군주를 섬김에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음이 신하된 사람의 직분입니다.
이 원은 죄를 알고 있습니다. ”

遂自殺。
하고 마침내 자살하였다.

厲公於是謂甫假曰:
「子之事君有二心矣。」
遂誅之。
이에 여왕은 甫假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군주를 섬김에 두 마음을 가졌다. ”
라 하며 죽였다.

假曰:
「重德不報,誠然哉!」
보하가 말하였다.
큰 덕은 보답을 받지 못한다더니 정말 그렇구나!”

▶ 內蛇與外蛇鬬於鄭南門中: 鄭 도성의 남문 밑에서 문안의 뱀이 문밖의 뱀과 싸우다가 문안의 뱀이 죽은 일이 있었는데, 이 일이 있은 지 6년 만에 厲公이 돌아온 것이다. <춘추좌씨전 노장공14기원전680년>
▶ 伯父原: 伯父原繁.
▶ 職: 본분. 직분.
▶ 重德: 큰 덕.

 

 

厲公突後元年,齊桓公始霸。
여공 돌 원년(기원전679) 환공이 처음 패주가 되었다.

五年,燕、衛與周惠王弟穨伐王,王出奔溫,立弟穨為王。
여공 후5(기원전675)   周惠王의 동생 姬頹와 함께 혜왕을 공격하자 혜왕은 으로 달아났고, 동생 희퇴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六年,惠王告急鄭,厲公發兵擊周王子穨,弗勝,於是與周惠王歸,王居于櫟。
여공 후6(기원전674)에 주혜왕이 에 위급을 알리자, 여공은 군사를 보내 주나라 왕자 퇴를 공격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주혜왕과 함께 돌아왔고, 주혜왕은 역읍에 거주하였다.

七年春,鄭厲公與虢叔襲殺王子穨而入惠王于周。
여공 후7(기원전673) 봄에 정여공이 虢叔과 함께 왕자 퇴를 습격하여 죽이고, 혜왕을 주나라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 周惠王: 성은 姬, 이름은 閬, 시호는 惠王이다. 주나라 제16대 釐王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주 장왕의 애첩 왕요의 아들로 장왕에게 사랑을 받은 작은아버지 子頹의 일파를 탄압하여, 자퇴의 스승 위국 등 대신들의 장원을 빼앗아 짐승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었다. 기원전675년 가을, 대부들과 士 석속이 소자에 의지하고 자퇴를 옹립해 반란을 일으켰다. 혜왕측이 한 번은 반란군을 소자의 영읍인 溫으로 쫓아냈으나, 燕와 衛가 자퇴를 지원해 혜왕이 쫓겨났다. 혜왕은 온으로 피했고 정여공은 자신이 13년간 망명할 때의 근거지인 櫟읍에서 혜왕을 맞이하였다. 자퇴는 겨울에 주왕으로 등극하였다. 혜왕4기원전673년, 정은 괵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史記本紀]권04. 周本紀>
▶ 頹: 왕자 王子 頹. 동주의 비정통 왕이다. 子頹라고 칭하기도 한다. 주장왕의 서자로, 주혜왕의 숙부이다. 장왕의 총애를 받아 혜왕 때 난을 일으켜 왕을 칭하였다.

 

秋,厲公卒,子文公踕立。
가을에 여공이 죽고 아들 文公 踕이 즉위하였다.

厲公初立四歲,亡居櫟,居櫟十七歲,復入,立七歲,與亡凡二十八年。
여공은 처음 즉위 4년 만에 역읍으로 도망가 살다가 17년 만에 다시 돌아와 7년을 재위했으니 망명까지 모두 28년을 재위하였다.

▶ 文公踕: 鄭文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踕, 捷이다. 정여공의 아들이다.

 

 

文公十七年齊公以兵破蔡遂伐楚至召陵
문공17(기원전656), 환공이 군대를 이끌고 를 격파하고 이어 를 공격하며 召陵에까지 이르렀다.

▶ 齊公以兵破蔡 : 齊桓公은 제후의 패자가 되어 夷狄을 물리쳤다. 蔡는 北杏에서 한 번 중원의 회맹에 참가한 뒤로 여러 姬姓國을 버리고 楚의 편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제환공이 제후의 군대를 거느리고 楚를 공격할 때 먼저 蔡를 쳐서 궤멸한 것은 먼저 楚의 편을 갈라놓은 것이다.
▶ 召陵: 楚의 지명.

 

 

二十四年,文公之賤妾曰燕姞,夢天與之蘭,曰:
「余為伯鯈。余,爾祖也。
以是為而子,蘭有國香。」
문공24(기원전649), 燕姞라는 문공의 천한 첩이 꿈을 꾸었는데, 천제가 그녀에게 난초를 주면서 말하였다.
나는 伯鯈로 너의 조상이다.
이 난초를 네 아들로 삼아라, 난초에는 나라의 향이 있다. ”

以夢告文公,文公幸之,而予之草蘭為符。
꿈을 문공에게 알리자, 문공은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고 그녀에게 난초를 증거로 주었다.

遂生子,名曰蘭。
마침내 아들을 낳자 이름을 이라 하였다.

▶ 姞: 南燕國의 姓.
▶ 伯鯈: 南燕의 조상이다. <춘추좌씨전 魯宣公 3년>
▶ 而: 너.
▶ 國香: 蘭은 나라의 꽃 중에 향기가 가장 뛰어나므로 사람들이 그를 蘭처럼 친애하고 사랑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 幸: 총애하다.
▶ 符: 증거. 文公이 준 蘭으로 임신한 월수를 계산하고자 한 것이다

 

 

三十六年,晉公子重耳過,文公弗禮。
문공36(기원전637), 공자 重耳 을 지나게 되었는데 문공이 예우하지 않았다.

文公弟叔詹曰:
「重耳賢,且又同姓,窮而過君,不可無禮。」
문공의 동생 叔詹이 말하였다.
중이는 어질고 또 同姓이며, 곤궁하여 주군께 왔는데 무례해서는 안 됩니다. ”

文公曰:
「諸侯亡公子過者多矣,安能盡禮之!」
문공이 말하였다.
제후의 망명 공자들로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많은데, 어찌 다 예를 갖추겠는가!”

詹曰:
「君如弗禮,遂殺之;
弗殺,使即反國,為鄭憂矣。」
숙첨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예우하지 않으시겠다면 차라리 그를 죽이십시오.
죽이지 않아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의 걱정거리가 될 터입니다. ”

文公弗聽。
문공은 듣지 않았다.

▶ 叔詹: 叔瞻. 춘추시대 鄭의 대부. 鄭文公의 동생. 晉公子 重耳가 달아나다가 鄭을 들렀는데 문공이 예를 갖추지 않았다. 숙첨이 일찍이 문공에게 간하여 예로써 대하든가 아니면 죽여 후환을 없애라고 했지만 문공이 듣지 않았다. 나중에 晉과 秦가 鄭을 포위하고 숙첨을 죽이려 하자 자살하였다.
▶ 且又同姓: 鄭은 기원전806년, 周厲王의 아들이자 주선왕의 동생인 정환공 友가 서주의 기내에 있는 鄭땅에 봉해짐으로써 세워졌으며, 晉은 주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 唐叔虞가 형인 성왕에게 삼감의 난이 평정된 이후 그 땅을 봉함을 받아 세운 나라이므로 姓이 같다.
▶ 反: 返과 통용된다.

 

 

三十七年春,晉公子重耳反國,立,是為文公。
문공37(기원전636) 봄에 의 공자 중이가 나라로 돌아가 즉위하니 그가 진 문공이다.

秋,鄭入滑,滑聽命,已而反與衛,於是鄭伐滑。
가을에  을 침공하자 활은 항복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배반하여 에 가서 붙었으므로 이에 은 활을 공격하였다.

周襄王使伯服請滑。
襄王 伯服 에 보내 활을 봐주라고 요청하였다.

▶ 鄭入滑: 주 양왕13기원전639년, 鄭이 활을 공격하자 양왕은 유손·백복을 보내 활의 땅을 헌상하도록 요구했으나 鄭은 두 명을 잡아두었다. 양왕은 분개해 鄭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대부인 富辰이 만류하였으나 양왕은 듣지 않고 다음 기원전637년, 군대를 이끌고 鄭을 공격하였다. 양왕은 이때, 적인의 翟后를 아내로 맞았다. <[史記本紀]권04. 周本紀>
▶ 滑: 周나라의 同姓제후로, 지금의 하남성 偃師縣緱氏城에 도읍했었다.

 

 

鄭文公怨惠王之亡在櫟,而文公父厲公入之,而惠王不賜厲公爵祿,又怨襄王之與衛滑,故不聽襄王請而囚伯服。
정문공은, 주혜왕이 역읍에 망명해 있을 때 문공의 아버지 여공이 주나라로 돌아가게 했지만 혜왕이 여공에게 작위를 내리지 않았음을 원망한 데다, 주양왕이 와 활의 편을 듦을 원망하여, 양왕의 청을 듣지 않고 백복을 가두었다.

王怒,與翟人伐鄭,弗克。
양왕이 노하여 翟人과 함께 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冬,翟攻伐襄王,襄王出奔鄭,鄭文公居王于氾。
겨울에  周襄王을 공격했으며, 주양왕은 으로 도망쳤고, 문공은 주양왕을 읍에 거주하게 하였다.

三十八年,晉文公入襄王成周。
문공38(기원전635) 문공이 주양왕을 成周(: 낙양)로 돌려보냈다.

▶ 惠王: 周惠王. 성은 姬, 이름은 閬이다. 주나라 제16대 釐王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주장왕의 애첩 왕요의 아들로 장왕에게 사랑을 받은 작은아버지 子頹의 일파를 탄압하여, 자퇴의 스승 위국 등 대신들의 장원을 빼앗아 짐승을 기르는 곳으로 만들었다. 또 대부 子禽, 邊伯, 祝跪, 詹父의 재산을 침해하였다. 이듬해인 기원전675년 가을, 위의 다섯 대부와 士 석속이 소자에 의지하고 자퇴를 옹립해 반란을 일으켰다. 혜왕측이 한 번은 반란군을 소자의 영읍인 溫으로 쫓아냈으나, 연과 위 두 나라가 자퇴를 지원해 혜왕이 쫓겨났다. 혜왕은 온으로 피했고 정여공은 자신이13년간 망명할 때의 근거지인 櫟에서 혜왕을 맞이하였다. 자퇴는 겨울에 주왕으로 등극하였다. 혜왕4기원전673년, 鄭은 괵과 협력해 자퇴와 그 일당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복위시켰다.
▶ 翟: 당시 陝西동북부 지방에서 활동하던 隗氏姓의 나라. ‘狄’으로도 통용된다.
▶ 襄王出奔鄭: 양왕16년(기원전636년) 翟(: 狄)이 주나라를 공격하여 숙대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양왕은 鄭으로 달아나고 諸侯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鄭은 양왕을 氾邑에 거주하게 하였다. 양왕17년(기원전635년), 양왕이 晉에 위급을 알렸고, 晉文公은 양왕을 주나라로 호송하고 叔帶를 죽였다.
▶ 成周: 周成王이 낙양에 王城을 건조하고서 遷都하였으므로 成周라고 하였다.

 

 

四十一年,助楚擊晉。
문공41(기원전632)  를 도와 을 공격하였다.

自晉文公之過無禮,故背晉助楚。
 晉文公 에 들렀을 때 무례했던 일이 있어 을 배신하고 를 도왔다.

四十三年,晉文公與秦穆公共圍鄭,討其助楚攻晉者,及文公過時之無禮也。
문공43(기원전630) 문공과 秦穆公이 함께 을 포위하여,  를 도와 을 공격한 것과 문공이 에 들렀을 때 무례했던 것을 성토하였다.

初,鄭文公有三夫人,寵子五人,皆以罪蚤死。
당초 鄭文公에게는 세 명의 부인과 다섯 명의 총애하는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죄를 짓고 일찍 죽었다.

公怒,溉逐群公子。
문공이 화가 나서 공자들을 모두 내쫓았다.

子蘭奔晉,從晉文公圍鄭。
子蘭 으로 도망쳤다가 晉文公을 따라 을 포위하였다.

時蘭事晉文公甚謹,愛幸之,乃私於晉,以求入鄭為太子。
이 무렵 자란은 진문공을 아주 공경하여 총애를 받았으며, 이에 남몰래 에서 활동하여 으로 돌아가 태자가 되길 바랐다.

▶ 寵子五人,皆以罪蚤死: 정문공이 鄭子의 妃陳嬀와 간음하여 子華와 子臧을 낳았는데, 子臧이 죄를 짓고 달아나니 자화와 자장을 죽였다. 또 江國에서 아내를 맞이해 公子 士를 낳았는데, 뒤에 공자 사가 楚에 조회하러 가자 楚가 독을 넣은 술을 먹이니 葉에 이르러 죽었다. 문공은 또 蘇國에서 아내를 맞이해 子瑕와 子兪彌를 낳았다. 그러나 兪彌는 일찍 죽었고, 洩駕가 瑕를 미워하고 문공도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세자로 세우지 않았다. 文公이 공자들을 모두 축출하니 공자 公子 蘭도 晉으로 도망가서 晉文公이 鄭을 공격할 때 종군하였다. <춘추좌씨전 노선공3년>

 

 

晉於是欲得叔詹為僇。
 叔詹을 잡아서 죽이려 하였다.

鄭文公恐,不敢謂叔詹言。
정 문공은 두려워하여 감히 숙첨에게 알리지 못하였다.

詹聞,言於鄭君曰:
「臣謂君,君不聽臣,晉卒為患。
然晉所以圍鄭,以詹,詹死而赦鄭國,詹之願也。」
숙첨이 듣고 정문공에게 말하였다.
신이 주군에게 말씀드렸지만 신의 말을 듣지 않더니 결국 이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을 포위함은 이 숙첨 때문이니, 제가 죽어서  을 용서함이 숙첨의 소원입니다. ”

乃自殺。
라고 하며 자살하였다.

鄭人以詹尸與晉。
의 군주가 숙첨의 시신을 에 보냈다.

晉文公曰:
「必欲一見鄭君,辱之而去。」
진문공이 말하였다.
의 국군을 한 번 만나 욕을 보이고야 떠날 터이다. ”

▶ 僇: 戮과 통용된다. 죽이다.

 

 

鄭人患之,乃使人私於秦曰:
「破鄭益晉,非秦之利也。」
의 군주가 이 일을 근심하여 은밀히 사람을 에 보내서 말하였다.
이 망해 이 강성함은 에 이롭지 않습니다.”

秦兵罷。
진군이 철수하였다.

晉文公欲入蘭為太子,以告鄭。
晉文公 子蘭 에 들여보내 태자로 삼으려고 에 알렸다.

鄭大夫石癸曰:
「吾聞姞姓乃后稷之元妃,其後當有興者。
子蘭母,其後也。
且夫人子盡已死,餘庶子無如蘭賢。
今圍急,晉以為請,利孰大焉!」
의 대부 石癸가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姞氏 后稷 元妃였으므로 그 후손이 흥성한다고 합니다.
자란의 어머니가 그 후손입니다.
또 부인의 아들들은 모두 죽고 남은 아들들도 자란만큼 현명하지 못합니다.
지금 포위되어 상황이 급한데 이 요청하니 이보다 큰 이득이 무엇이겠습니까!”

遂許晉,與盟,而卒立子蘭為太子,晉兵乃罷去。
이에 의 요구를 받아들여 맹약하고 자란을 태자로 세우자 晉軍이 비로소 철수하였다.

▶ 石癸: 鄭의 大夫.
▶ 姞姓: 姞은 吉人의 뜻으로 后稷의 元妃도 姞姓이었다. 姞姓의 여자가 后稷의 妃가 되었기 때문에 周나라가 흥성하였다. 그러므로 吉人이라고 한 것이다.
▶ 元妃: 군주 또는 제후의 元配. 姞姓은 姬姓의 配偶가 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四十五年,文公卒,子蘭立,是為繆公。
문공45(기원전628)에 문공이 죽고 아들 자란이 즉위하니 그가 繆公이다.

▶ 繆公(목공): 鄭穆公, 鄭繆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蘭이다. 문공의 아들이다.




繆公元年春,秦繆公使三將將兵欲襲鄭,至滑,逢鄭賈人弦高詐以十二牛勞軍,故秦兵不至而還,晉敗之於崤。
목공 원년(기원전627), 秦穆公이 세 장수에게 군대를 이끌고 을 습격하도록 하였는데, 읍에 이르렀을 때 의 상인 弦高를 만나 12마리의 소로 군을 위로하러 왔다고 속였기 때문에 秦軍 으로 가지 않고 돌아가는데,  崤山에서 를 패퇴시켰다.

初,往年鄭文公之卒也,鄭司城繒賀以鄭情賣之,秦兵故來。
당초 지난해 문공이 죽고,  司城繒賀 의 정세를 에 팔았기 때문에 秦軍이 온 것이었다.

三年,鄭發兵從晉伐秦,敗秦兵於汪。
목공3(기원전625) 이 군대를 일으켜 을 따라가 를 쳐서 에서 의 군대를 물리쳤다.

▶ 繆公: 鄭穆公, 鄭繆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蘭이다. 문공의 아들이다.
▶ 秦繆公使三將將兵欲襲鄭: 秦繆公이 鄭을 습격하고자 세 장수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게 하였다. 세 장수는 백리혜의 아들 孟明視, 건숙의 아들 西乞秫과 白乙丙이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賈人: 상인.
▶ 弦高詐: 秦軍이 滑邑에 도착했을 때, 鄭의 상인 弦高가 소 열두 마리를 끌고 주나라로 팔러 가다가 秦軍을 보고 죽거나 포로가 될까 두려워서 자신의 소를 바치면서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큰 나라가 鄭을 공격한다고 하여 鄭 군주가 방비를 단단히 하고는 신에게 이 소 열두 마리로 병사들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
秦의 세 장군이 서로에게 말하였다.
“鄭을 습격하고자 함을 鄭이 이미 알아챘으니 가봤자 성공할 수 없을 듯하오. ”
하며 鄭으로 가지 않고 滑邑을 멸망시켰다. 滑邑은 鄭 변경의 읍이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司城繒賀: 秦穆公이 大夫杞子를 파견해 鄭을 지키게 했더니, 杞子가 鄭에서 사람을 보내어 秦에 고하기를
“鄭 사람이 우리에게 北門의 열쇠를 맡겼으니,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온다면 鄭을 얻을 수 있다. ”
고 하였다.<춘추좌전·僖公 32년>

 

 

 

往年楚太子商臣弒其父成王代立。
지난해 의 태자 商臣이 그 아버지 成王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二十一年,與宋華元伐鄭。
목공21(기원전607)   華元 을 공격하였다.

華元殺羊食士,不與其御羊斟,怒以馳鄭,鄭囚華元。
화원이 양을 잡아 병사들에게 먹였으나 자신의 마부에게는 양고기국을 주지 않으니, 마부가 화를 내고 마차를 으로 몰고 갔고 이 화원을 포로로 잡았다.

宋贖華元,元亦亡去。
이 화원의 속전을 내려 했으나 화원이 도망친 뒤였다.

晉使趙穿以兵伐鄭。
 趙穿에게 군사를 이끌고 을 공격하게 하였다.

二十二年鄭繆公卒子夷立是為靈公
목공22(기원전606) 목공이 죽고, 아들 가 즉위하니 그가 靈公이다.

▶ 商臣: 楚穆王. 춘추시대 楚의 군주로 이름은 商臣이며, 成王의 아들이다. 태자로 있을 때 폐위될까 두려워 宮衛兵으로 아버지인 성왕을 포위하여 자살하게 한 뒤 왕위에 올랐다.
▶ 食士: 병사들을 위로하며 먹이다. 食(사)는 먹이다.
▶ 華元: 춘추시대 宋의 대신으로 宋戴公의5대손이다.
<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 羊斟(양짐): 羊羹. 양고기국
▶ 贖: 죄를 면하기 위하여 돈을 바치다. 속전을 내다
▶ 靈公: 鄭靈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夷이며, 穆公의 아들이다. 처음 등극하자 楚에서 자라를 바쳤는데, 이것으로 국을 끓여먹었다. 大夫子家와 子公이 입조하여 자공이 맛을 보려고 했지만 영공이 주지 않았다. 자공이 화가 나서 손가락을 솥에 넣어 맛을 보고는 나갔다. 화가 난 영공이 자공을 죽이려고 했는데, 자공과 자가가 먼저 살해하였다. 1년 동안 재위하였다.
▶ 趙穿: 춘추시대 晉의 대부. 趙盾의 조카이다.

 

 

靈公元年春,楚獻黿於靈公。
영공 원년(기원전605) 봄에 가 정영공에게 자라를 바쳤다.

子家、子公將朝靈公,子公之食指動,謂子家曰:
「佗日指動,必食異物。」
子家 子公이 영공에게 조회하려는데 子公의 집게손가락이 움직이자 子家가 말하였다.
일전에 집게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기이한 음식을 먹었었다. ”

及入,見靈公進黿羹,子公笑曰:
「果然!」
두 사람이 궁중으로 들어가 영공을 알현하니 자라탕이 올라왔고, 자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정말 그렇군!”

靈公問其笑故,具告靈公。
영공이 웃는 까닭을 물으니 그 이유를 모두 영공에게 말하였다.

靈公召之,獨弗予羹。
영공이 이들을 불러 놓고 子公에게만 자라탕을 주지 않았다.

子公怒,染其指,嘗之而出。
자공이 화내고 손가락으로 자라탕을 찍어 맛보고 나가버렸다.

公怒,欲殺子公。
영공이 노하여 자공을 죽이려 하였다.

子公與子家謀先。
자공은 자가와 함께 앞서 일을 꾸몄다.

夏,弒靈公。
여름에 영공을 시해하였다.

▶ 黿(원): 자라.
▶ 子家, 子公: 子家는 공자 歸生이고, 子公은 공자 宋이다. <춘추좌씨전 魯宣公 4기원전605년>
▶ 食指: 집게손가락.
▶ 食指動: 집게손가락이 움직인다는 말로 어떤 일에 대한 욕망과 야심을 품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 佗: 他와 같다.
▶ 染: 담그다. 적시다.

 

鄭人欲立靈公弟去疾,去疾讓曰:
「必以賢,則去疾不肖;必以順,則公子堅長。」
의 사람들이 영공의 동생 去疾을 세우려 하자 거질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어진 사람이어야 한다면 거질은 불초합니다. 순서를 따라야만 한다면 공자 이 나이가 많습니다. ”

堅者,靈公庶弟,去疾之兄也。
은 영공의 庶弟이자 거질의 형이었다.

於是乃立子堅,是為襄公。
이에 공자 견을 옹립하니 그가 襄公이다.

▶ 去疾: 정영공의 동생. 穆公의 庶子이다. 춘추좌씨전에는 子良으로 기록하고 있다.
▶ 襄公: 鄭襄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堅이다. 정영공이 죽은 후 鄭 국인은 정영공의 아우 공자 거질을 옹립하려 했으나, 공자 거질이 사양하고 형 공자 견을 지목하여 즉위하였다.

 

 

襄公立,將盡去繆氏。
양공이 즉위하여 繆氏를 모조리 제거하려 하였다.

繆氏者,殺靈公、子公之族家也。
목씨가 영공을 죽인 子公의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去疾曰:
「必去繆氏,我將去之。」
거질이 말하였다.
목씨를 기어이 제거하겠다면 제가 떠나겠습니다. ”

乃止。
이에 그만두었다.

皆以為大夫。
목씨들을 모두 대부로 삼았다.

▶ 將盡去繆氏: 여러 형제들을 축출하려 한 것이다.
▶ 必去繆氏: 子良만 남겨 두려 하니 거질이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襄公元年,楚怒鄭受宋賂縱華元,伐鄭。
양공원년(기원전604),   의 뇌물을 받고 華元을 풀어준 일에 화를 내고 을 쳤다.

鄭背楚,與晉親。
 를 배반하고 과 화친하였다.

五年,楚復伐鄭,晉來救之。
양공5(기원전600), 가 다시 을 공격하자 이 와서 을 구원하였다.

六年,子家卒,國人復逐其族,以其弒靈公也。
양공6(기원전599), 子家가 죽자  사람들이 다시 子家의 가족을 내쫓았는데, 영공을 시해하였기 때문이었다.

▶ 襄公: 鄭襄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堅이다. 정영공이 죽은 후 鄭 국인은 정영공의 아우 공자 거질을 옹립하려 했으나, 공자 거질이 사양하고 나이 순서대로 형 공자 견을 지목하여 즉위하였다.
▶ 從: 석방하다.
▶ 華元: 춘추시대 宋의 대신으로 宋戴公의 5대손이다. 정목공21년(기원전607년)에 楚와 宋의 華元이 鄭을 공격하였다. 화원이 鄭의 포로로 잡혔으나 宋이 속죄금을 주고 화원을 데려오려 했으나 화원이 도망친 뒤였다.
▶ 子家: 공자 歸生. 정영공은 자공이 불손하게 굴자 자공을 죽이려고 했는데, 子公과 자가가 영공을 먼저 시해하였다.

 

 

七年,鄭與晉盟鄢陵。
양공7(기원전598),   鄢陵에서 회맹하였다.

八年,楚莊王以鄭與晉盟,來伐,圍鄭三月,鄭以城降楚。
양공8(기원전597), 楚莊王  과 동맹을 맺자 공격해 와서 을 석 달 동안 포위했으며, 은 도성을 바치고 에 투항하였다.

楚王入自皇門,鄭襄公肉袒掔羊以迎,曰:
「孤不能事邊邑,使君王懷怒以及獘邑,孤之罪也。
敢不惟命是聽。
君王遷之江南,及以賜諸侯,亦惟命是聽。
若君王不忘厲、宣王,桓、武公,哀不忍絕其社稷,錫不毛之地,使復得改事君王,孤之願也,然非所敢望也。
敢布腹心,惟命是聽。」
楚莊王 皇門으로 들어가자, 정양공은 肉袒牽羊하고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제가 변방의 성읍에서 섬기지 못하여 군왕께서 노하시고 저희 고을까지 오시게 했으니 저의 죄입니다.
어찌 감히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군왕께서 저를 강남으로 내쫓거나 제후로 봉해도 오로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만약 군왕께서 周厲王, 周宣王 鄭桓公, 鄭武公을 잊지 않으셨다면, 불쌍해서라도 차마 그들의 사직을 끊을 수 없을 터이니 불모의 땅이라도 내리시어, 잘못을 고치고 다시 군왕을 섬기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 바라지 않습니다.
감히 저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오직 명을 받들 뿐입니다. ”

▶ 楚莊王: 楚의 제22대 군주로 이름은 侶이다. 성왕의 손자이자 목왕의 아들이며, 공왕의 아버지이다.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 상기 내용은 [史記世家]권40. 楚世家에 기록되어 있다.
▶ 皇門: 鄭의 성문.
▶ 肉袒牽羊以迎: 윗옷을 벗어 몸을 드러내고 양을 끌고 간 것은 항복하고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보인 것이다.
▶ 孤: 나. 제후가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厲, 宣, 桓, 武: 周厲王과 周宣王은 鄭이 나온 조상이고, 鄭桓公과 鄭武公은 처음 봉해진 鄭의 賢君이니, 楚가 이 네 임금에게 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鄭의 사직을 멸망하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 錫(사): 하사하다. 錫는 줄 ‘사’.
▶ 腹心: 마음속 깊은 곳.
▶ 布: 진술하다.

 

 

莊王為卻三十里而後舍。
楚莊王은 군대를 30리 밖으로 물리고 주둔시켰다.

楚群臣曰:
「自郢至此,士大夫亦久勞矣。
今得國捨之,何如?」
의 신하들이 말하였다.
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사대부들 역시 지친지 오래됐습니다.
지금 나라를 얻고도 버리시니 어째서입니까?”

莊王曰:
「所為伐,伐不服也。
今已服,尚何求乎?」
장왕이 말하였다.
공격이라는 것은 불복함을 치는 것이다.
지금 항복하였는데 또 무엇을 구하겠는가?“

卒去。
마침내 철군하였다.

晉聞楚之伐鄭,發兵救鄭。
  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을 구원하러 나섰다.

其來持兩端,故遲,比至河,楚兵已去。
장수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늦었으며, 황하에 이르렀을 때 楚軍은 이미 가고 없었다.

晉將率或欲渡,或欲還,卒渡河。
의 장수 일부는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려 하고, 또 일부는 돌아가려 했으나 결국은 황하를 건넜다.

莊王聞,還擊晉。
楚莊王이 알고 군대를 돌려 을 공격하였다.

鄭反助楚,大破晉軍於河上。
은 반대로 를 도와 의 군대를 황하 가에서 대파하였다.

十年,晉來伐鄭,以其反晉而親楚也。
양왕10(기원전595)  을 공격했는데, 을 배반하고 와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 持兩端: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




十一年,楚莊王伐宋,宋告急于晉。
양공11(기원전594), 楚莊王 을 공격하자,  에 위급을 알렸다.

晉景公欲發兵救宋,伯宗諫晉君曰:
「天方開楚,未可伐也。」
晉景公이 군사를 일으켜 을 구하려 하자 伯宗이 진경공에게 간하였다.
하늘이 바야흐로 를 돕고 있으니 아직 공격해선 안 됩니다.”

乃求壯士得霍人解揚,字子虎,誆楚,令宋毋降。
이에 출신으로  子虎 解揚이란 장사를 구해 를 속이고 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명령하게 하였다.

過鄭,鄭與楚親,乃執解揚而獻楚。
해양이 에 들리자 와 화친한 은 해양을 잡아 에 바쳤다.

楚王厚賜與約,使反其言,令宋趣降,三要乃許。
초왕이 많은 뇌물을 주고 해양에게 요구하기를, 말을 반대로 하여 에게 빨리 항복하게 하라고 했는데, 세 번을 강요하자 해양이 허락하였다.

▶ 伯宗: 晉의 大夫.
▶ 開: 개척하다.
▶ 解揚: 字는 子虎. 晉 霍邑사람으로 霍虎라고도 한다.
진경공6년(기원전594년), 초장왕이 宋의 수양성을 포위하자 宋은 晉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晉의 伯宗이 필 전투의 패배를 볼 때 하늘이 楚를 돕고 있는 만큼 이번에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므로 실제로 군대를 동원하지 말고 구원병을 보낼 듯이 꾸며 楚의 포위를 풀자는 계략을 내놓자 진경공은 解揚을 宋에 사자로 보냈다. 해양은 가는 길에 楚에 사로잡히게 되며, 초장왕은 해양에게 宋에게 晉의 구원군이 오지 않을 터이니 어서 항복하라고 말하면 살려주고 楚에서 중히 쓰겠다고 말했으나, 해양은 죽음을 각오하고 宋의 성에 晉軍이 곧 당도할 것이라고 외쳤다. 초장왕은 진노했지만, 그가 晉의 신하로서 목숨을 걸고 사명을 마쳤다는 점을 치하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이 일로 “解揚守信”이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 誆: 속이다.
▶ 反其言: 반대로 晉이 구원하러 오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한 것이다.
▶ 趣: 빨리. 재촉하다.

 

 

於是楚登解揚樓車,令呼宋。
이에 는 해양을 樓車에 태우고 에 고함을 지르게 하였다.

遂負楚約而致其晉君命曰:
「晉方悉國兵以救宋,宋雖急,慎毋降楚,晉兵今至矣!」
그러자 해양은 와의 약속을 어기고 晉君의 명령을 전달하였다.
이 지금 國軍을 모두 동원하여 을 구하러 나섰으니, 은 급하더라도 부디 에 투항하지 말라, 의 군대가 이제 도착할 터이다!”

楚莊王大怒,將殺之。
장왕이 크게 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解揚曰:
「君能制命為義,臣能承命為信。
受吾君命以出,有死無隕。」
해양이 말하였다.
군주가 명령을 제정함을 라 하고, 신하가 명령을 받듦을 이라 합니다.
나의 君命을 받고 나왔으니 죽을지언정 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

▶ 樓車: 적을 망보는 망루를 설치한 수레.
▶ 致: 전달하다.
▶ 制命: 명령을 제정하고 선포하다.
▶ 承命: 명령을 받듦.
▶ 隕: 떨어뜨리다. 추락하다.

 

 

莊王曰:
「若之許我,已而背之,其信安在?」
楚莊王이 말하였다.
너는 나와 약속해놓고 배신했거늘 너의 믿음이란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解揚曰:
「所以許王,欲以成吾君命也。」
해양이 말하였다.
군왕에게 약속한 까닭은 우리 주군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將死,顧謂楚軍曰:
「為人臣無忘盡忠得死者!」
해양이 죽음을 앞두고 楚軍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신하된 자가 충성을 다하면 죽임을 당함을 잊지 말라!”

楚王諸弟皆諫王赦之,於是赦解揚使歸。
楚莊王의 동생들이 용서하자고 왕에게 간하니, 해양을 용서하고 돌려보냈다.

晉爵之為上卿。

이 해양에게 상경의 작위를 내렸다.

十八年,襄公卒,子悼公沸立。
양공18(기원전587) 양공이 죽고, 아들 悼公 沸가 즉위하였다.

▶ 悼公沸: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費, 沸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아버지 양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백이 되었다.

 

 

悼公元年,鄦公惡鄭於楚,悼公使弟睔於楚自訟。
도공 원년(기원전586)  靈公   提訴하니, 도공이 동생  에 보내 자신을 해명하였다.

訟不直,楚囚睔。
소송에 승소하지 못하자  을 가두었다.

於是鄭悼公來與晉平,遂親。
이에 정도공은 과 강화하니, 두 나라는 사이가 좋아졌다.

睔私於楚子反,子反言歸睔於鄭。
곤은  子反과 친분이 있어서, 자반이 곤을 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말해 주었다.

▶ 悼公: 鄭悼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費/沸. 襄公의 아들이며, 정성공의 형이다. 아버지 양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백이 되었다. 2년을 재위하였다.
▶ 鄦公惡鄭於楚: 許나라 靈公이 鄭伯을 楚에 提訴하였다. 이는 2년에 걸쳐 鄭이 허를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鄦는 許나라. 고대 주나라의 제후국으로 지금의 하남성 허창현 동쪽이다.
▶ 弟睔: 이름은 睔이고, 悼公의 동생이다. 훗날의 鄭成公이다.
▶ 訟: 해명하다. 변명하다.
▶ 直: 해명하다. 진술하다.
▶ 子反: 楚莊王의 동생으로 楚의 司馬이다.

 

 

二年,楚伐鄭,晉兵來救。
도공2(기원전585),  을 공격하자 晉軍이 와서 구해주었다.

是歲,悼公卒,立其弟睔,是為成公。
이해에 도공이 죽고, 그의 동생 이 즉위하니 그가 成公이다.

成公三年,楚共王曰「鄭成公孤有德焉」,使人來與盟。
성공3(기원전582), 楚共王이 말하기를,
鄭成公은 나에게 은덕을 입은 사람이다. ”
라고 하며 사람을 보내 과 맹약을 하였다.

成公私與盟。
성공은 사사로이 와 동맹을 맺었다.

秋,成公朝晉,晉曰「鄭私平於楚」,執之。
가을에 성공이 에 조회하자 이 말하였다.
이 사사로이 와 강화하였다. ”
라고 하며 성공을 억류하였다.

使欒書伐鄭。
欒書에게 을 공격하게 하였다.

四年春,鄭患晉圍,公子如乃立成公庶兄繻為君。
성공4(기원전581) 봄에   을 포위할까 염려하여 공자  庶兄 를 군주로 세웠다.

其四月,晉聞鄭立君,乃歸成公。
그해 4월에  이 군주를 옹립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을 돌려보냈다.

鄭人聞成公歸,亦殺君繻,迎成公。
 사람들이 성공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주인 를 죽이고 성공을 맞아들였다.

晉兵去。
晉軍이 돌아갔다.

▶ 成公: 鄭成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睔이며, 悼公의 동생이다. 처음에 楚의 도움으로 등극했는데, 楚共王이 사람을 보내자 사사롭게 동맹을 맺었다. 晉에 입조했는데, 晉이 동맹을 배반함에 화를 내고 성공을 체포한 뒤 鄭을 공격하였다. 鄭 사람들이 庶兄 繻를 세워 국군으로 삼았다. 晉은 鄭이 군주를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을 돌려보내니, 鄭 사람들이 繻를 죽이고 정 성공의 태자인 髡頑을 군주로 세웠다가 다시 睔을 군주로 세웠다.
▶ 平: 강화하다.
▶ 欒書: 欒武子. 춘추시대 晉의 大夫. 欒枝의 손자다. 晉景公 11년 鞍전투에서 齊軍을 대파하였다. 나중에 郤克을 대신해 中軍을 이끌었다. 여공이 정치를 잘못하자 中行偃과 함께 사람을 시켜 여공을 죽이고 悼公을 옹립하였다. 시호는 武子이다.
▶ 公子如: 子如. 公子班.
▶ 繻: 公子 繻.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시해당하여 시호가 없다. 晉은 정성공이 楚와 사사로이 동맹하였음을 빌미로 삼아 구금하고 欒書로 하여금 鄭을 치도록 하였다. 鄭에서는 晉의 포위를 두려워하여 공자 如가 공자 수를 군주로 추대하였다. 晉에서는 鄭이 임금을 새로 추대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성공을 돌려보냈다. 鄭 사람들은 성공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공자 수를 시해하고 성공의 아들 髡頑을 추대하였다. 공자 如는 許로 달아났고, 성공은 귀국한 후 곤완을 대신하여 복위하였다.

 

 

 

十年,背晉盟,盟於楚。
성공10(기원전575)  과의 맹약을 배반하고 와 동맹하였다.

晉厲公怒,發兵伐鄭。
晉厲公이 노하여 군대를 일으켜 을 공격하였다.

楚共王救鄭。
공왕이 을 구원하였다.

晉楚戰鄢陵,楚兵敗,晉射傷楚共王目,俱罷而去。
  鄢陵에서 전투를 벌였고 의 군대가 패했으며,  공왕의 눈을 쏘아 부상을 입히자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

十三年,晉悼公伐鄭,兵於洧上。
성공13(기원전572), 晉悼公 을 공격하여 군대를 洧水 가에 주둔시켰다.

鄭城守,晉亦去。
이 성을 지키자 晉軍이 떠나갔다.

▶ 楚共王: 楚의 제23대 군주로 이름은 審이고, 楚莊王의 장남이다. 장왕 사후 楚의 패권이 다소 둔화되는 틈을 타 晉이 서서히 부흥하는 과정에서 晉, 楚 양 강대국의 갈등이 점차 고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기원전575년6월에 양국 군대가 鄭·宋·衛·陳 등 中原의 주요 중소 국가들에 대한 지배력을 놓고 鄢陵에서 대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楚가 준비 부족과 적군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인해 패배하였는데, 공왕 자신은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당했고, 공자 茂는 포로가 되었으며, 군의 대장인 子反은 자살하였다.
▶ 鄢陵: 鄭 땅으로 지금의 潁川郡에 속한다.



 

十四年,成公卒,子惲立。是為釐公。
성공14(기원전571)에 성공이 죽고, 아들 이 즉위하였다. 그가 釐公이다.

▶ 釐公: 鄭釐公: 僖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髡頑또는 惲이다. 기원전581년 공자 繻가 시해된 후 신료들에 의해 임시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아버지 成公이 晉에서 귀국하여 복위하였고, 성공이 죽자 뒤를 이어 鄭 군주가 되었다.

 

釐公五年,鄭相子駟朝釐公,釐公不禮。
희공5(기원전566), 의 재상 子駟가 희공에게 조회하였는데 희공이 예우하지 않았다.

子駟怒,使廚人藥殺釐公,赴諸侯曰「釐公暴病卒」。
자사가 노하여 주방장을 시켜 희공을 독살하고 제후에게 부고하기를,
희공이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셨다. ”라고 하였다.

立釐公子嘉,嘉時年五歲,是為簡公。
희공의 아들 가 즉위하니 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고 그가 簡公이다.

▶ 子駟: 姬騑, 公子騑. 字가 子駟이다. 정양공의 동생이다.
▶ 釐公不禮: 희공은 태자로 있을 때 子罕과 함께 晉에 갔을 때 자한을 예로 대우하지 않았고, 子豐과 함께 楚에 갔을 때 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정희공5년(기원전566년)에는 재상 子駟와 대립하여 결국 자사에게 암살당하였다. 자한과 자풍과 자사는 모두 희공의 작은할아버지로 정목공의 아들들이다. <춘추좌씨전 魯襄公 17기원전566년>
▶ 使廚人藥殺釐公: 춘추좌씨전에서는 독약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자객을 시켜 죽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鄵邑에서 子駟가 자객을 시켜 밤에 僖公을 시해하고 瘧疾로 죽었다고 제후국에 부고하였다.” <춘추좌씨전 魯襄公 17기원전566넌>
▶ 赴: 상을 알리다. 부고하다.
▶ 簡公: 鄭簡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嘉이고, 僖公의 아들이다. 처음 즉위했을 때 公子들이 재상 子駟를 죽이려고 하자 자사가 공자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자사와 子孔이 번갈아가며 執政하였다. 晉이 鄭을 치니 晉과 동맹하고, 楚가 치니 楚와 동맹을 맺었다.

 

簡公元年,諸公子謀欲誅相子駟,子駟覺之,反盡誅諸公子。
간공 원년(기원전565), 공자들이 재상 子駟를 죽이려고 모의했는데, 자사가 알아채고 도리어 공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二年,晉伐鄭,鄭與盟,晉去。
간공2(기원전564),  을 공격했으며, 이 동맹을 맺자 이 철수하였다.


冬,又與楚盟。
겨울에 이 다시 와 동맹하였다.

子駟畏誅,故兩親晉、楚。
자사가 誅罰당함을 두려워한 까닭에  를 모두 가깝게 지냈다.

三年,相子駟欲自立為君,公子子孔使尉止殺相子駟而代之。
간공3(기원전563), 재상 자사가 군주로 즉위하려고 하자, 공자 子孔 尉止를 시켜 재상 자사를 죽이고 위지를 재상으로 대체하였다.

子孔又欲自立。
자공 또한 군주로 즉위하려고 하였다.

▶ 鄭簡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嘉이고, 僖公의 아들이다. 아버지 희공이 재상 자사에게 시해당하자, 자사에게 옹립되어 5살에 鄭 군주가 되었다. 공자들이 희공을 시해한 자사를 죽이려고 모의했으나 자사가 미리 알고 선수를 쳐 子狐·子熙·子侯·子丁을 죽였고, 자호의 두 아들 孫擊과 孫惡은 衛로 달아났다. 그후 子駟와 子孔이 번갈아가며 執政하였다.
▶ 子駟: 공자 騑. 字가 子駟이며 정목공의 아들이며 정영공과 정양공의 동생으로 춘추시대 鄭의 대부이다. 駟씨의 시조가 된다.
▶ 子孔: 姬嘉. 公子嘉,字가 子孔이다. 정목공의 아들이며 정양공의 동생으로 鄭 孔氏의 시조가 된다.
※鄭穆公의 아들들: 鄭穆公은 13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이들 중 일곱 아들은 각각의 가문을 이루어 그들을 七穆이라 불리었으며 세력이 강대해져 국정을 좌우하여 국력이 쇠퇴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子產曰:
「子駟為不可,誅之,今又效之,是亂無時息也。」
於是子孔從之而相鄭簡公。
子産이 말하였다.
子駟가 즉위함이 잘못이라고 죽이고 지금 또 그를 본받으니, 난이 가라앉을 날이 없을 터입니다. ”
이에 자공은 그 말에 따랐고, 鄭簡公의 재상이 되었다.

▶ 子産: 공손교. 姓은 公孫, 이름은 僑, 字는 子産 또는 子美, 鄭의 현명한 大夫로 春秋時代후기의 뛰어난 정치가이다. 당시 楚와 晉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압박받던 鄭을 교묘한 외교정책과 내정개혁을 통해 유지함으로써 공자에 의해 군자로 칭송되었다.

 

 

四年,晉怒鄭與楚盟,伐鄭,鄭與盟。
간공4(기원전562),   와 동맹을 맺음에 노하여 을 공격하였으며  과도 동맹을 맺었다.

楚共王救鄭,敗晉兵。
 공왕이 을 구원하며 晉軍을 물리쳤다.

簡公欲與晉平,楚又囚鄭使者。
간공이 과 강화하려 하자 가 또 의 사신을 가두었다.

十二年,簡公怒相子孔專國權,誅之,而以子產為卿。
간공12(기원전554), 간공은 재상 子孔이 국정을 전횡하자 화가 나서 자공을 죽이고 子產 으로 삼았다.

十九年,簡公如晉請衛君還,而封子產以六邑。
간공19(기원전547), 간공이 에 가서  군주를 귀국하게 도와달라고 청하고, 자산에게 여섯 개의 읍에 봉하였다.

子產讓,受其三邑。
자산은 사양하고 세 개 읍만 받았다.

▶ 子孔: 公子嘉,字가 子孔이다. 정목공의 아들이며 정양공의 동생으로 鄭 孔氏의 시조가 된다.
▶ 簡公如晉請衛君還: 衛獻公이 영식과 孫林父에 의해 쫓겨나 齊에 있었는데 정간공이 晉에 가서 귀국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二十二年,吳使延陵季子於鄭,見子產如舊交,謂子產曰:
「鄭之執政者侈,難將至,政將及子。
子為政,必以禮;不然,鄭將敗。」
간공22(기원전544), 의 사신 延陵季子 에 와서 자산을 만나보고 마치 오랜 친구처럼 자산에게 말하였다.
의 집정자는 사치스러우니 장차 난이 일어나서, 정권이 그대에게 돌아갈 터입니다.
그대가 정치를 맡으면 반드시 예를 지키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은 패망할 터입니다. ”

子產厚遇季子。
자산이 계자를 후대하였다.

二十三年,諸公子爭寵相殺,又欲殺子產。
간공23(기원전543), 공자들이 총애를 다투어 서로를 죽였고, 또 자산을 죽이려 하였다.

公子或諫曰:
「子產仁人,鄭所以存者子產也,勿殺!」
공자 중 누군가가 말하였다.
자산은 어진 사람으로 이 존재할 수 있음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니, 죽이지 말라!”

乃止。
이에 멈추었다.

▶ 延陵季子: 季札.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侈: 사치스럽다.
▶ 厚遇: 厚待하다.

 

二十五年,鄭使子產於晉,問平公疾。
간공25(기원전541), 정간공이 子產 에 사신으로 보내 晉平公을 문병하였다.

平公曰:
「卜而曰實沈、臺駘為祟,史官莫知,敢問?」
평공이 말하였다.
점괘에 實沈, 臺駘가 빌미가 되었다는데 사관도 무엇인지 모르니 감히 물어봐도 되겠소?”

▶ 平公: 晉平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彪이고, 悼公의 아들이다.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淫樂을 즐겼다. 정치가 趙韓魏의 三家로 몰려갔다.
▶ 實沈臺駘爲祟: 실침과 대태 두 신이 禍가 된 것이 卜兆에 드러난 것을 이른다. 祟는 재앙이나 탈 따위가 생기는 원인.
▶ 實沈, 臺駘: 실침은 高辛氏의 아들로 전쟁을 일삼다가 參星을 주관하여 제사하게 되었고, 대태는 金天氏의 후예로 물을 잘 다스려 汾逃지역을 관장하였다. 실침과 대태가 빌미가 되었다는 평공의 말은 이 두 神에 변고가 일어나서 병이 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對曰:
「高辛氏有二子,長曰閼伯,季曰實沈,居曠林,不相能也,日操干戈以相征伐。
后帝弗臧,遷閼伯于商丘,主辰,商人是因,故辰為商星。
遷實沈于大夏,主參,唐人是因,服事夏、商,其季世曰唐叔虞。
자산이 대답하였다.
高辛氏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閼伯이며 작은아들은 實沈으로 깊은 숲속에서 살면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날마다 무기를 들고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임금이 이들을 좋지 않게 여겨 알백을 商丘로 옮겨 辰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더니 나라 사람들이 이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辰星이 상나라의 별이 된 것입니다.
실침을 大夏로 옮겨 參星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더니, 의 사람들이 이어받아 나라와 나라를 복종하여 섬겼고 唐 末世의 군주가 唐叔虞였습니다.

▶ 高辛氏: 帝嚳. 黃帝의 曾孫이고, 帝堯의 아버지이다. <史記 五帝本紀>
▶ 閼伯: 고대 전설의 인물로 帝嚳고신씨의 아들로 전해진다. 商丘에서 불씨를 관리하는 火正에 임명되었다.
▶ 實沈: 閼伯의 동생.
▶ 不相能也: 두 아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이다. 能은 화목하게 지내다.
▶ 操干戈: 전쟁하다. 干은 방패, 戈는 창.
▶ 后帝弗臧: 요임금이 좋지 않게 여기다. 后帝는 堯임금이다. 臧은 좋다.
▶ 商丘: 宋 땅. 辰星의 제사를 주관한 것이다. 辰星은 大火星이라고도 한다.
▶ 主: 제사를 주관하다.
▶ 辰: 28宿 중의 하나로 心宿를 말한다. 心宿는 천자의 올바른 자리로 명당과 상과 벌을 의미한다.
▶ 商人是因: 商人은 湯王의 선조 相土로 商丘를 封地로 받아 閼伯의 옛 나라를 이어 辰星의 제사를 주관하였다.
▶ 大夏: 지금의 晉陽縣.
▶ 參: 参宿. 28宿 중 서방칠수의 하나로 효도와 충성 형벌을 다스리고 변방 도시를 관장한다
▶ 唐人: 大夏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 其季世曰唐叔虞: 叔虞는 唐의 마지막 임금인데, 天帝가 邑姜의 아들에게 당을 주려 하였기 때문에 唐君의 이름에서 그 이름을 지은 것이다.
▶ 季世: 末世.
▶ 唐叔虞: 唐叔姬虞. 성은 姬이고, 자는 子於(: 子于)이다. 周武王의 아들이자 周成王의 아우이다. 周公이 唐을 멸망시킨 후에 당의 땅을 叔虞에게 하사하여 당숙우로 불리게 되었으며, 周나라 諸侯國인 晉의 始祖가 되었다. 그의 아들인 燮父가 도읍을 晉水 가로 옮겨 晉으로 개명하였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當武王邑姜方娠大叔,夢帝謂己:
『余命而子曰虞,乃與之唐,屬之參而蕃育其子孫。』
당시 주무왕의 부인 邑姜 大叔을 임신했을 때 꿈에 상제께서 그녀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너의 아들 이름을 로 지어 주니 그에게 을 주어, 參星 분야의 땅을 맡겨 그 자손을 번창하게 하라.’

及生有文在其掌曰『虞』,遂以命之。
대숙이 태어남에 손바닥에 자 모양의 무늬가 있어 결국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及成王滅唐而國大叔焉。故參為晉星。
성왕에 이르러 당을 멸망시키고 대숙을 그곳에 봉하였으므로 參星 의 별자리가 되었습니다.

由是觀之,則實沈,參神也。
이렇게 보면 實沈 參星의 신입니다.

▶ 邑姜: 주武王의 왕후로 齊太公의 딸이다.
▶ 大叔: 唐叔虞. 唐叔姬虞. 성은 姬이고, 자는 子於(: 子于)이다. 周武王의 아들이자 周成王의 아우이다.
▶ 屬: 嘱과 통한다. 맡기다. 부탁하다.

 

 

昔金天氏有裔子曰昧,為玄冥師,生允格、臺駘。
옛날에 金天氏의 후예로 라는 자가 있었는데 玄冥 이 되어 允格 臺駘를 낳았습니다.

臺駘能業其官,宣汾、洮,障大澤,以處太原。
대태는 능히 아버지의 관직을 계승하여 汾水 洮水를 소통시키고, 大澤에 제방을 太原에 살았습니다.

帝用嘉之,國之汾川。
帝顓頊이 이를 가상히 여겨, 汾川으로 封國하였습니다.

沈、姒、蓐、黃實守其祀。
, , , 가 실제로 그의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今晉主汾川而滅之。
지금은  汾川 일대를 통치하면서 이들 네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由是觀之,則臺駘,汾、洮神也。
이렇게 본다면 臺駘 汾水 洮水의 신입니다.

然是二者不害君身。
그러므로 이 두 신은  군주의 몸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 金天氏: 帝少皥이름은 摯이고, 字는 靑陽이다.
▶ 玄冥: 水官
▶ 昧: 水官의 長. 昧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允格이고 작은아들이 臺駘이다.
▶ 業: 계승하다.
▶ 宣汾洮: 분수와 조수를 소통시키다. 宣은 通과 같다. 汾과 洮는 두 물의 이름이다.
▶ 障大澤: 堤防을 쌓아 물을 막은 것이다.
▶ 以處太原: 太原은 晉陽으로 臺駘가 거주한 곳이다. 일설에는 太原은 地名이 아니라, 汾水유역 일대의 높고 평평한 지대를 가리킨 것이라고도 한다.
▶ 帝: 顓頊을 말한다.
▶ 沈姒蓐黃: 이 네 나라는 臺駘의 후손이다.
▶ 然是二者不害君身: 실침과 대태 두 神이 내린 재앙과 복이 군주의 신상에 미쳐 그 질병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山川之神,則水旱之菑禜之;
日月星辰之神,則雪霜風雨不時禜之;
若君疾,飲食哀樂女色所生也。」
산천의 신에게는 홍수와 가뭄 같은 재해가 발생하면 제사드리고,
일월성신의 신에게는 눈과 서리, 바람과 비가 때를 잃으면 제사드립니다.
군주의 병으로 말하자면 음식과 슬픔, 쾌락, 여색으로 인해 생긴 것입니다. ”

平公及叔向曰:
「善,博物君子也!」
평공과 叔嚮이 말하였다.
좋은 말씀입니다. 모든 사물에 밝은 군자십니다!”

厚為之禮於子產。
자산에게 후한 예물을 주었다.

▶ 菑: 재앙.
▶ 禜: 고대에 재앙을 막는 제사.

 

二十七年夏,鄭簡公朝晉。
간공27(기원전539) 여름에 정간공이 에 조회하였다.

冬,畏楚靈王之彊,又朝楚,子產從。
겨울에 楚靈王이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다시 에 조회했으며, 자산이 따라갔다.

二十八年,鄭君病,使子產會諸侯,與楚靈王盟於申,誅齊慶封。
간공28(기원전538)에 정간공이 병들자, 자산에게 제후들과 만나도록 하고 초영왕과 읍에서 맹약했는데, 영왕이  慶封을 죽였다.

▶ 慶封: 齊의 간신. 崔杼와 공모하여 齊莊公을 시해한 후 左相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였다. 초 영왕이 경봉이 도망하여 있는 오나라 주방을 함락시키고 경봉을 죽였다. <史記世家권40. 楚世家>

 

 

三十六年,簡公卒,子定公寧立。
간공36(기원전530) 간공이 죽고, 아들 定公 寧이 즉위하였다.

秋,定公朝晉昭公。
가을에 정공이 晉昭公에게 조회하였다.

▶ 定公寧: 鄭定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寧이다. 아버지 간공이 죽어 뒤를 이었다. 정공16년(기원전514년), 정공이 죽고 아들 정헌공이 뒤를 이었다.
▶ 晉昭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이고, 平公의 아들이다. 재위하는 중에 晉의 六卿, 韓ㆍ趙ㆍ魏ㆍ范ㆍ中行ㆍ智氏 등이 강해지고 公室은 약화되었다.

 

 

定公元年,楚公子棄疾弒其君靈王而自立,為平王。
정공 원년(기원전529) 공자 棄疾이 그의 군주 영왕을 시해하고 즉위하니 그가 平王이다.

欲行德諸侯。歸靈王所侵鄭地于鄭。
평왕은 제후들에게 덕을 베풀려고 초영왕이 침탈한 의 땅을 돌려주었다.


▶ 棄疾: 楚平王. 楚의 공자 棄疾. 공자 比의 동생이다. 楚靈王이 陳을 멸하고 5년 뒤 楚公子 棄疾이 영왕을 살해하고 平王이 되었다. 초평왕이 막 즉위하자 제후들과 잘 지내자 옛 陳와 蔡의 땅을 되돌려주고 예전처럼 그 후손을 군주로 세웠으며, 빼앗은 鄭의 땅도 되돌려주었다.

 

 

四年,晉昭公卒,其六卿彊,公室卑。
정공4(기원전526, 소공이 죽자 六卿의 세력이 강해지고 공실은 약해졌다.

子產謂韓宣子曰:
「為政必以德,毋忘所以立。」
子產 韓宣子에게 말하였다.
정치는 반드시 덕으로 해야 하며, 정치가 공고해지는 원인을 잊지 마시오. ”

六年,鄭火,公欲禳之。
정공6(기원전524) 에 화재가 발생하자, 정공이 화재를 막고자 액막이를 하려고 하였다.

子產曰:
「不如修德。」
자산이 말하였다.
덕정을 베풂만 못합니다.”

▶ 六卿: 晉六卿. 晉의 6대 世卿家(: 대대로 卿의 지위를 계승한 유력한 귀족 가문)로 范·中行·智·韓·魏·趙씨.
▶ 韓宣子: 春秋시대 晉 대부 韓起를 말한다. 宣은 그의 시호이다.
▶ 為政必以德: 為政以德. 논어 ‘위정’편에
“정치를 덕으로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북극성이 자리를 지키고 있고, 다른 모든 별이 함께 그를 떠받들어 도는 것과 爲政以德, 譬如北辰, 居其所而衆星共之. ”라고 하였다.
▶ 禳: 재앙을 쫓는 기도. 액막이

 

 

八年,楚太子建來奔。
정공8(기원전522), 의 태자 이 도망쳐왔다.

十年,太子建與晉謀襲鄭。
정공10(기원전519), 태자 건이 과 모의하여 을 습격하였다.

鄭殺建,建子勝奔吳。
이 건을 죽이자 건의 아들  로 달아났다.

▶ 太子建: 초평왕의 아들. 楚平王이 費無忌의 참언을 믿고 그에게 太子 建을 죽이도록 하자 태자는 宋으로 달아났다. 당시 초평왕에게 쫓겨난 태자 건은 宋에 망명 갔다가 宋의 혼란상을 보고 송원공 편에 가담하였고, 다시 鄭으로 달아났다가 鄭定公과 재상인 子產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世家]권40. 楚世家>

 

 

十一年,定公如晉。
정공11(기원전519)에 정공이 에 갔다.

晉與鄭謀,誅周亂臣,入敬王于周。
 과 모의하여 주나라의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周敬王을 주나라로 귀국시켰다.

▶ 敬王: 周敬王. 춘추시대 주나라의 군주로 성은 姬고, 이름은 貴다. 靈王의 아들이다. 周景王이 죽자 왕자 丐의 도당이 왕자 朝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며, 사대부들이 景王의 큰아들 猛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왕자 朝가 맹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래서 맹을 悼王이라고 하였다. 晉 사람들이 왕자 朝공격하고 왕자 丐를 옹립하니 그가 곧 敬王이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十三年,定公卒,子獻公蠆立。
정공13(기원전517)에 정공이 죽고, 아들 獻公 蠆가 즉위하였다.

獻公十三年卒,子聲公勝立。
헌공이13(기원전510) 만에 죽고, 아들 聲公 勝이 즉위하였다.

當是時,晉六卿彊,侵奪鄭,鄭遂弱。
이 당시 의 육경이 강대해져 을 침탈하자 은 결국 쇠약해졌다.

▶ 獻公: 鄭獻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蠆이다. 아버지 정공이 죽자 헌공이 뒤를 이었다.
▶ 聲公: 鄭聲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勝이다. 아버지 헌공이 죽자 뒤를 이었다.

 

 

聲公五年,鄭相子產卒,鄭人皆哭泣,悲之如亡親戚。
성공5(기원전496) 의 재상 자산이 죽자  사람들이 모두 哭泣하며 슬퍼하기를 친척이 죽은 듯이 하였다.

子產者,鄭成公少子也。
자산은 鄭成公의 막내아들이었다.

為人仁愛人,事君忠厚。
사람됨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했으며, 군주를 섬김에 충성스럽고 돈후하였다.

孔子嘗過鄭,與子產如兄弟云。
공자가 일찍이 에 들렀을 때, 자산과 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及聞子產死,孔子為泣曰:
「古之遺愛也!」
자산이 죽었음을 듣고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어질고 사랑을 알았던 사람이다!”

八年,晉范、中行氏反晉,告急於鄭,鄭救之。
성공8(기원전493),  范氏 中行氏 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에 위급함을 알려 이 그들을 구원하였다.

晉伐鄭,敗鄭軍於鐵。
 을 공격하여 鐵丘에서 鄭軍을 물리쳤다.

▶ 范, 中行反其君: 晉혜공5년(기원전496년), 晉의 卿인 中行氏와 范氏가 반란을 일으키자 智氏와 趙簡子로 하여금 그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며, 범씨와 중항씨는 齊로 달아났다.

 

 

十四年,宋景公滅曹。
성공14(기원전487) 宋景公 를 멸망시켰다.

二十年,齊田常弒其君簡公,而常相於齊。
성공20(기원전481)  田常이 그의 군주 簡公을 시해하고 의 재상이 되었다.

二十二年,楚惠王滅陳。
성공22(기원전479) 楚惠王 을 멸망시켰다.

孔子卒。
孔子가 세상을 떠났다.

▶ 宋滅曹: 기원전487년 봄에 송경공이 曹를 공격하고 회군할 때 褚師子肥가 宋軍의 후미를 맡았는데 曺 사람이 욕하며 꾸짖자 後軍이 행군을 정지하니 전군이 그를 기다렸다. 송경공이 그 소식을 듣고 노하여 전군에 반격을 명하여 마침내 曹를 격멸하고서 曹伯과 司城彊을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죽였다. <춘추좌씨전魯哀公8년>
▶ 田常: 陳成子 또는 田成子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齊 사람. 田乞의 아들이다. 齊簡公때 闞止와 함께 左右相을 맡았다. 선조들의 전통을 계승하여 大斗로 재어 양식으로 대여하고, 小斗로 재어 거둬들여 民心을 얻었다. 제간공 4년 감지와 간공을 공격해 살해하고, 간공의 동생 驁를 세워 平公으로 삼았다. 스스로 재상이 되어 齊의 국정을 장악하고, 公族 가운데 강성한 이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楚惠王滅陳: 陳湣公 24년(기원전478년)에 초혜왕이 나라를 되찾고 군대를 일으켜 북벌에 나서 陳민공을 죽이고 마침내 陳를 멸망시키고 차지하였다. <[史記世家]권36. 陳杞世家>

 

三十六年,晉知伯伐鄭,取九邑。
성공36(기원전465)  知伯 을 공격하여 9개 읍을 탈취하였다.

▶ 知伯: 智伯.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의 晉 사람으로 이름은 瑤이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出公 17년에 趙, 韓, 魏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邑으로 삼았다. 趙襄子가 한, 위와 함께 知氏를 멸족하였다.

 

 

三十七年,聲公卒,子哀公易立。
성공37(기원전464)에 성공이 죽고, 아들 哀公 易이 즉위하였다.

哀公八年,鄭人弒哀公而立聲公弟丑,是為共公。
애공8(기원전455),  사람들이 애공을 시해하고, 성공의 동생 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共公이다.

共公三年,三晉滅知伯。
공공3(기원전452) 三晉이 지백을 멸망시켰다.

三十一年,共公卒,子幽公已立。
공공31(기원전424)에 공공이 죽자, 아들 幽公 已가 즉위하였다.

幽公元年,韓武子伐鄭,殺幽公。
유공 원년(기원전423) 韓武子 을 공격하여 유공을 죽였다.

鄭人立幽公弟駘,是為繻公。
 사람들이 유공의 동생 를 세우니 그가 繻公이다.

▶ 三晉: 春秋時代 강국의 하나였던 晉이 분리되어 세워진 韓・魏・趙의 세 나라. 晉의 三卿이었던 文侯魏斯・烈侯趙籍・景侯韓虔의 3家가 기원전453년에 쇠약해진 晉을 분할하여 각각 나라를 세웠는데, 이때부터 戰國時代가 시작되었다.

 

 

繻公十五年,韓景侯伐鄭,取雍丘。
수공15(기원전408), 韓景侯 을 공격하여 雍丘를 탈취하였다.

鄭城京。
 京城을 수축하였다.

▶ 繻公: 鄭繻公. 춘추전국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駘이다. 정유공의 아들이다. 기원전423년, 한무자가 鄭에 쳐들어와 정유공이 죽임을 당하자 즉위하였다.
▶ 韓景侯: 韓虔. 晉의 卿인 韓武子의 아들이다. 韓景侯 때인 기원전403년에 晉이 韓, 魏, 趙로 삼분되어 정식으로 韓가 건립되었다.
▶ 城: 修築하다. 건축하다.

 

 

十六年,鄭伐韓,敗韓兵於負黍。
수공16(기원전407),  을 공격하여 負黍에서 韓軍을 패퇴시켰다.

二十年,韓、趙、魏列為諸侯。
수공20(기원전403), , , 가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二十三年,鄭圍韓之陽翟。
수공23(기원전400),   陽翟을 포위하였다.

▶ 負黍: 읍 이름.
▶ 陽翟: 韓의 도읍. 지금의 河南省禹縣.

 

 

二十五年,鄭君殺其相子陽。
수공25(기원전398), 정수공이 그의 재상 子陽을 죽였다.

二十七,子陽之黨共弒繻公駘而立幽公弟乙為君,是為鄭君。
수공27(기원전396), 자양의 黨人이 함께 수공 를 시해하고, 幽公의 동생 을 옹립하니 그가 鄭君이다.

鄭君乙立二年,鄭負黍反,復歸韓。
정군 을 즉위 2년에 의 부서읍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부서읍이 다시 에 귀속되었다.

十一年,韓伐鄭,取陽城。
정군을 11(기원전385),  을 공격하여 陽城을 탈취하였다.

▶ 子陽: 재상 駟子陽. 정수공은 나중에 駟子陽의 추종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 鄭君乙: 鄭康公. 전국시대 鄭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은 乙이다. 정공공의 아들. 정유공, 정수공의 동생. 정수공이 재상 子陽의 무리에게 살해돼 군주가 되었다. 정강공21년(기원전375년), 한 애후가 鄭을 멸망시키고, 정강공을 죽였다.

 

 

二十一年,韓哀侯滅鄭,并其國。
鄭君 乙 21(기원전375) 韓哀侯 을 멸망시키고 그 나라를 합병하였다.

▶ 韓哀侯: 전국시대 韓의 군주로 韓景侯의 증손이다. 왕위를 이은 초기에 趙, 魏와 晉을 삼분하고, 애후 2년에 鄭을 멸망시켰다. 韓嚴에게 살해당하였다.

 

 

太史公曰:
語有之,
「以權利合者,權利盡而交疏」,甫瑕是也。
甫瑕雖以劫殺鄭子內厲公,厲公終背而殺之,此與晉之裏克何異?
守節如荀息,身死而不能存奚齊。
變所從來,亦多故矣!
태사공은 말한다.
권세와 이익으로 결합한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관계도 멀어진다. ”
라는 말이 있는데 甫瑕가 이와 같았다.
보하는 비록 鄭子(: 자영)를 겁박하여 살해하고 厲公을 맞아들였지만, 여공이 끝내 배신하여 그를 죽였으니, 이것이  里克과 무엇이 다른가?
荀息과 같은 사람은 절개를 지켜 자기 몸은 죽었지만 奚齊를 보전할 수는 없었다.
변란이 생기는 까닭도 여러 가지이기 때문이다!”

▶ 合: 융화하다.
▶ 甫假: 鄭의 대부. 춘추좌씨전에는 傅瑕로 기록하고 있다. <춘추좌씨전 魯莊公 14기원전680년> 鄭子 14년(기원전680년)에 종전에 역읍으로 도망쳤던 厲公突이 사람을 보내 鄭 대부 甫假(: 傅瑕)를 유인해 여공이 국도로 돌아가 복위하게 해달라고 겁박하였다.
보하가 말하기를,
“나를 풀어주면 내가 당신을 위해 鄭子를 죽이고 국도로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
라고 하였다. 여공이 그와 함께 맹약하고 그를 풀어주었다.
6월 갑자일에 甫假가 鄭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 돌을 맞이하자 여공 돌은 역읍에서 다시 돌아와 즉위한 후 보하를 죽였다.
▶ 鄭子: 公子嬰. 鄭子嬰.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嬰 혹은 儀이며, 시호는 없다. 사서에서 子儀 혹은 鄭子라고 한다. 정장공의 아들이며, 정소공, 정여공, 정자미의 아우다. 재위14년 만에 정 여공에게 투항한 (甫假: 傅瑕)에게 암살당하였다.
▶ 厲公: 鄭厲公. 춘추시대 鄭의 군주로 이름은 突이고, 鄭莊公의 둘째 아들이다. 정장공이 죽자 昭公이 즉위했는데, 송장공이 祭仲을 위협하여 왕위를 탈취하고 여공을 세웠다. 재위4년에 채중이 정권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채중의 사위 雍糾를 시켜 살해하려고 하였다. 일이 누설되어 옹규는 피살되었고, 여공은 달아나 변경의 櫟읍에 머물렀다. 鄭子儀 14년에 鄭의 대부 傅瑕가 자의를 죽이자 복위하였다.
▶ 裏克: 里克. 晉獻公의 책사이자 권신. 무공과 전략에 뛰어나 진헌공 시기에 虞·虢을 공격하는 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헌공이 죽자 荀息이 여희의 소생인 奚齊를 세웠는데 里克이 해제를 죽였다. 순식이 헌공의 서자인 탁자를 다시 세우자 이극이 朝에서 탁자를 죽였다. 晉惠公 이오에 의해 賜死되었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荀息: 晉의 老臣. 驪姬의 아들인 奚齊의 스승이다. 晉獻公에게서 驪姬소생인 亥齊를 보필하라는 遺命을 받고 초지일관하게 임무를 완수하려 했으나 여희 일당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킨 里克이 해제를 죽였고, 그 후 조정에서 뒤를 이은 도자를 시해하자 순식은 따라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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