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82.조선-윤증(尹拯) 본문
김원근(金瑗根)
생몰 연대 미상. 교회 지도자. 정신여고 교사 역임.
윤증의 자는 자인(子仁)이요, 호는 명재(明齋)요, 적은 파평(坡平)이요,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인조 기사년에 출생하였고 생월일은 미상이다. 선생의 화상을 보니 얼굴은 길고 천정은 높고 봉의 눈이요 검의 눈썹(鳳目刀眉)이다. 풍채가 당당하다. 덕성은 순수하다. 학식은 도덕과 문장이 겸비하였다.
어렸을 때에는 유계 선생에게 소학을 배우셨다.
청년시대부터는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문학과 성리학을 배워 조예가 매우 고명하셨다.
선생이 어렸을 때이다. 청국에서 사신이 와서 억지로 강화하기를 청하였다. 선생의 부친인 미촌공은 크게 분이 나서
“강화를 하지 말고 그 사신을 잡아 목을 베고 대의를 밝히옵소서.”
하고 상소하셨다. 그리하여 당시에 척화신(斥和臣)으로 명예가 자못 높으셨다.
병자년에 선생의 나이 여덟 살에 청국 난리를 당하였다. 선생은 그 부친을 따라 강화도로 피난을 가셨다. 그 이듬해 봄에 강화가 적군에게 함락이 되었다. 강화 피난민들은 귀천을 물론하고 다 부로(俘虜)가 되었다.
그때에 선생의 모친 이씨는 적군에게 욕을 볼까 염려하여 그 남편이 어디로 나간 틈을 타서 귀여운 생명을 아끼지 않고 순절하셨다.
그때에 선생의 나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다. 선생은 그 모친만 의지하고 있다가 천만뜻밖에 장엄하게도 순절하는 광경을 지켜보셨다.
그후에 선생은 그 부친을 따라 충청도 시골집으로 내려가셨다. 그 부친은 강화사변을 분개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을 실지로 연구하였다.
선생은 장성하면서 송우암 선생에게 학업을 받고 성리를 연구하여 3,40년 동안에 큰 학자가 되었다. 기유년 8월에 그 부친이 세상을 버리셨다.
송우암은 만장(輓章)을 지어 선생에게 보내셨다. 이때는 송우암과 사제의 정분이 친절한 대로 갈리지 않고 온전히 있을 때이라 그 만장은 문장이 찬란하게 극구 칭찬하였다.
“온갖 세파 정신없이 마구 흘러도 그 속에서 기둥을 버텨 섰었소
온 천지가 혼란 속에 휩싸였는데 하나의 별빛으로 밝아 있었소
오직 이런 것만이 아니었고 그 세상살이와 처세에 있어 일찌기 학계에나왔을 때엔 모든 선비, 벗들이 공경하였고 바른 일을 위하여 주장을 펴자, 아무도 맞서는 사람 없었소
그러다가 중간에 호란을 만나 살아나려 구차하게 애를 쓰셨소1)
강화성이 갑자기 함락이 되니 괴로와라 이때 운수 불행하였소
그러니 공의 뜻만 알아보아야지
목숨까지 못 따른 것 따질 것 있나
이때부터 세상에서 숨어 살면서 뉘우침만 오로지 일삼았었소
갸륵한 행실이 임 (임금님)께 알려져 곧 바로 높은 벼슬 내리셨건만
벼슬자리 한번도 받지 않은 채 그저 그냥 진사라 자칭하였소
보긴 비록 겸손한 척 위선 같지만
속으론 참으로 뜻이 있으리
허름한 옷, 낡은 띠 차림이라도 속마음은 결백하게 때가 없었소
두 임금의 부름을 사뭇 받고도 벼슬 사양 한결같이 절개를 지켰소
세상 못된 무리에게 모범을 세워 두고두고 높은 절개 전해지리라” (편집자역)
라 하였다.
1)병자호란 당시 윤선거는 친구 김만겸(金萬兼), 송시영(宋時瑩) 등, 부인 이씨와 함께 항전하다가 강화성이 함락되면 함께 죽자고 약속하였다가, 막상 함락되어 친구들과 부인은 모두 함께 자살하였는데, 자신은 종의 옷으로 변장하고 말몰이인 양 말을 몰고 강화성을 탈출하였다. 그 후, 그는 구차한 자기 소행을 일생토록 부끄럽게 여겨 종내 벼슬하지 않은 채 세상에서 숨어 살았다. 이 시는 윤선거의 지조를 높이 찬양하면서도 그의 과거 수치를 그대로 숨김없이 기록한 엄정한 글이다. 윤증이 송우암에게 묘문을 고쳐 달라고 한 것이 바로 이 수치스런 부분을 빼달라고 한 것이다.
이 만장의 글을 보면 포창하는 말이 매우 찬란하였다.
그후에 윤휴가 또 윤공의 제문을 지어 보냈다.
송우암은 윤휴와 예송(禮訟)한 일과 주자(朱子)를 반대하기 때문에 절교하였다.
송우암은 선생의 부친 생시에 자기와 같이 윤휴와 절교하라고 권하였다. 윤공은 당시 풍기(風紀)에 따라서 절교하마고 승낙하였다. 송우암은 그 말을 믿었다. 그러나 윤공의 사정이 윤휴와 절교하기 어려운 형편이 많아서 절교하지 못하였다.
이번 상사에 선생은 윤휴의 제문(祭文)을 받았다. 송우암은 이 소문을 듣고 윤휴의 제문을 아니 받을 터인데 받았다고 크게 불평이 생기셨다. 그러나 선생은 그 부친이 윤휴와 절교할 의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제전과 만사를 받으셨다.
계축년에 선생이 그 부친의 묘문을 지어 달라고 우암에게 청하여 연보와 그 부친과 친절하고 학문이 높은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행장 초본(行狀草本)과 기유년에 그 부친이 송우암에게 보내려고 써 두었던 편지(己酉擬書)와 그 부친의 행장에 참고가 될 만한 서류들을 수습하여 우암에게 보내드리고 묘문을 지어 달라고 간청하였다.
선생이 쓴 그 부친의 연보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선친이 윤휴를 애호한 것은 공심(公心)이요 또 옳은 뜻이라고 하였다. 또 우암께서 윤휴를 배척하는 것은 너무나 과격하다는 등 설을 쓰셨다. 또 윤휴의 문예를 많이 칭찬한 구절이 있었다.
우암은 이런 것을 보고 윤휴와 절교 아니하고 또 선생이 윤휴의 만장 받은 것을 분개하여 그 묘문을 짓는 데 서사(敍事)와 포장(褒狀)하는 말을 송공이 자기의 의견대로 쓰지 않고 다만 박세채가 쓴 것을 그대로 참작하여 썼다. 그중에도 희롱하는 말의 구절이 있다고 한다. 두 집에서 사사 일로 인하여 정부와 사회에까지 큰 파란을 일으키게 한 원인이 되었다.
그 묘문에 하였으되,
“숭정(崇禎) 기유(己酉) 4월 18일에 미촌 선생 파평 윤옹의 휘는 선거(宣擧)요 자는 길보(吉甫), 이산(尼山;尼는 山魯城 古號)집에서 졸하셨다. 멀고 가까운 지방에 사는 선배들이 소문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상하며 또 부의(號賻)하는 자와 호상(護喪)하는 자들로 길이 메었다. 또 덕행이 높은 신사들이 모여서 슬프게 탄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왕께서 경연에서 신하들의 말을 들으시어 특별히 증직(贈職)하시고 상사에 쓸 물품을 내려 주셨다. 발인하는 날에 호상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장사를 지낸 후에 그 살던 곳과 일찌기 지나다니던 곳에 서원과 사당을 건설하고 제사를 지내셨다. 점잖은 군자들이 서로 말하기를 큰 덕행이 사람을 감동하게 함이 이러하다고 칭찬하며 탄식하였다.”
이상이 원문의 첫머리였다. 이 아래는 명(銘)을 쓴다.
그 명략(銘略)에 하였으되
“공은 실로 그 전하는 바
경시하여 공경하고 숭앙하지 않는다.
이즈음의 어느 사람이
포상하고 표창하리오
아름답다 현석(박세채의 호)이여
극진히 포창하였다
나는 글을 짓지 않고 그대로 기록만 하여
이 명장(銘章)을 쓰노라” (편집자 역)2)
라 하였다.
2)“公實其傳 易不欽崇 今世何人 以褒以彰 允矣玄石 極其揄揚 我述不作 揭此銘章”
송우암은 상술함과 같이 선생의 부친이 생시에 윤휴와 절교 아니함과 선생이 또 만장 받은 것을 분개하여 묘문을 지을 때에 자기 생각대로 쓰지 않고 박세채가 편찬한 대로 전부 인용하여 쓰고 끝에 명을 쓰기를
“아름답다 현석(玄石 ; 박세채 制號)이여 극진히 포창하였다.
나는 글을 짓지 않고 그대로 기록만 하여 이 명(銘)을 쓰노라.”
하였다. 묘문을 보면 사실의 긴중한 말은 다 박세채의 지은 대로 쓰고 자기는 그 글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을 표시하였다.
선생은 이 묘문을 보고 마음에 불만족한 구절이 많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하여 송공에게 전후 세 번이나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처음 갑인년에는 묘문 중에 미흡한 구절이 있음을 말씀하여 개정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마음과 같이 되지 않았다.
그 다음 병진년인즉 송우암이 거제도에 위리 중에 있을 때였었다. 선생은 천리 원로에 찾아가서 그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셨다. 그때에 송공이 먼저 묘문에 대하여 개정하여 주마고 자청하셨다. 선생은 서류를 또 보내었다. 약간의 글자를 고칠 뿐이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세째 번 무오년에는 송우암이 또 먼저 묘문을 개정하여 주마고 하였다. 선생은 묘문을 보내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박숙채의 권고를 받아 묘문과 서류를 또 보내였다. 그때도 약간의 글자를 고치고 처음이나 마찬가지로 더 개정하지 않았다. 이 점으로 선생은 마음에 결박지통이 생겼다. 갑자년에 선생이 송우암에게 보낸 편지 중에 이러한 말이 있다.
“묘문은 재삼이나 개정하시마 하시던 말씀은 다 성실치 못하옵고 말았읍니다.
비단 이뿐 아니라 문하께서 저의 집 일이라면 비록 세세한 일일지라도 선인에게 방해가 될 만한 것은 후생들에게 다 드러나게 하시니 선생께서 무슨 연고로 이와 같이 하시는지 알 수가 없읍니다.”
고 하였다.
그전 신유년에 선생이 송공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辛酉擬書)에 하였으되 왕도와 패도(覇道)를 아울러 쓰고 의(義)와 이(利)를 쌍으로 행한다는 등 설과 또
“시골서 봉물하는 예절이 너무 과하며 사림들의 봉승(奉承)함이 너무 사람의 정에 지나갑니다. 사람들이 그 위엄만 무서워하고 그 덕은 생각지 않습니다. 완연히 세도하는 집의 문정(門庭)과 같이 후끈후끈하고 다시는 전부(儒者)의 집 기상은 조금도 없읍니다.”
하는 등 설과 기타 이론을 변론하여 쓴 장서(長書)였었다.
이 편지는 송공의 외손자 권이정(權以錠)의 입으로 발각이 되었다. 이 일로 사림에서 스승을 배척한다고 크게 분쟁이 생겼다. 송공의 문생 중에서는 최신(崔愼)이 송공을 위하여 상소하여 선생을 공격하고 선생편에서는 이세덕(李世德)이 상소하여 송공을 공격하는 등 불상사가 크게 일어났다. 사제 간에 정분은 아주 끊어졌다.
사림에서는 선생을 옳다고 주장하는 이는 소론(少論)이라 칭하고 송공을 옳다고 주장하는 이는 노론(老論)이라고 칭한다. 이는 산림에서 생긴 소론 편당이었었다.
송공이 일찌기 정계에 있을 때에 박숙채가 선생을 청하여 같이 정계에서 일하기를 원하였다.
송공의 말씀이 “자인(子仁)이 올 수가 있나”
하였다.
박공의 말이 “선생께서 부르시고 제가 가서 청하면 올 듯하다”
하였다.
박공은 송공의 명령을 선생에게 전하였다.
선생이 말씀하기를
“현금 정계에서 일하려면 척신들과 권신들과 다른 자를 배척(異己者排斥)하는 등 일을 막을 수가 있냐”
하였다.
박공은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하기 어렵다”
하였다.
“그러면 나는 나갈 수가 없노라”
고 하였다.
박공은 그 말을 듣고 송공을 보지 않고 바로 자기집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때에 송공이 김익훈(金益勳)의 죄과를 두호하여 말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인하여 승지 조지겸(趙持謙)과 지평 한태동(韓泰東)과 오도일(吳道一) 등은 송공의 의견이 옳지 않음을 분개하여 송공과 갈라섰다.
이에 선생과 남인파와 남은 당파를 합동하여 소론 편당이 되어 송공을 공격하였다. 이는 정계에서 생긴 노·소론(老少論) 편당이었었다.
선생은 당시에 은일(隱逸)로 연세가 높고 덕행이 높으셨다.
왕께서 선생의 덕망을 들으시고 신해년에 산림은일(山林隱逸)로 진선(進善)과 제주(祭酒) 등의 벼슬을 주시고 부르셨다. 선생은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으셨다.
계해년에 좌참찬과 우찬성 등의 벼슬을 주시고 부르시되 굳게 사양하고 나가지 아니하였다. 기축년에 우의정으로 부르셨다. 선생은 사양타 못하여 은일로 대신(白衣政丞)이 되셨다.
숙종 기축년에 졸하셨다. 행년(行年)은 81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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