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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24. 외편 - 가언 - 광명륜 - 第二十四章 본문

小學集註(소학집주)

8-5-2-24. 외편 - 가언 - 광명륜 - 第二十四章

구글서생 2024. 1. 13. 17:01

소학집주

父母之喪 中門外 擇樸陋之室 爲丈夫喪次 斬衰 寢笘枕塊 不脫絰帶 不與人坐焉.
婦人 次於中門之內別室 撤去帷帳衾褥華麗之物 《溫公書儀》
부모의 상에는 中門 밖에 소박하고 좁은 방을 가려서 丈夫의 喪次를 만들고斬衰에는 거적에서 자며흙덩이를 베며首絰과 腰絰을 벗지 않으며남과 함께 앉지 않는다.
부인은 中門 안의 별실에 머물되휘장과 이불과 요 등의 화려한 물건을 철거한다.

【集解】
樸樸素 陋隘陋.
은 소박함이요, 는 좁음이다.

斬衰 以極麤麻布爲之 下邊不緝也.
斬衰는 극히 거친 삼베로 만들고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것이다.

笘藁薦 塊土墼.
은 짚자리요, 는 흙으로 만든 벽돌이다.

【增註】
麻在首曰絰 在腰曰帶.
삼이 머리에 있는 것을 이라 하고, 허리에 있는 것을 라 한다.

撤 亦去也.
또한 버림이다.

皆哀痛之至 有所不安而然.
모두 애통이 지극하여 편안치 못한 바가 있어서 그렇게 한다.

男子無故 不入中門 婦人 不得輒至男子喪次
남자는 연고가 없으면 中門에 들어가지 않으며부인은 갑자기 남자의 喪次에 이르지 않는다.

【增註】
居喪 內外之辨 當然也
居喪중에 내외의 분별은 당연하다.

晉陳壽遭父喪 有疾 使婢丸藥 客往見之 鄕黨以爲貶議.
坐是沈滯 坎坷終身 嫌疑之際 不可不愼.
나라 陳壽는 父喪을 당하여 병이 있으므로 종을 시켜 환약을 짓게 하였는데이 가서 보고고을 사람들이 貶議[비평]하였다.
그는 이에 연좌되어 침체하여 불우하게 몸을 마쳤으니혐의를 받을 즈음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集解】
陳壽 字承祚 巴西人.
陳壽承祚이니, 巴西 사람이다.

貶議 謂貶抑而論議也.
貶議는 깎아내려 논의함을 이른다.

沈滯 淹滯也 坎坷 不遇也
沈滯는 머물러 막힘이요, 坎坷는 불우함이다.

陳壽에 관하여

 

陳壽(233년 ~ 297년)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 ~ 서진의 관료로, 자는 承祚이며 益州 巴西郡 安漢縣 사람이다.

정사 《삼국지》는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서진의 陳壽가 저술했고 조위의 裴潛이 위나라를 정통으로 편찬했다. 《사기》, 《한서》, 《후한서》와 함께 4대 正史로 분류된다.


진수의 부친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馬謖의 참군을 지냈고 諸葛亮이 마속을 벨 때 머리를 깎이는 棍刑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일찍이 촉한의 관리를 지냈으며, 譙周의 문하에 있었다. 진수가 출사한 후, 촉나라에서 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환관 黃皓에게 핍박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진나라의 司馬炎이 천하를 통일한 이후, 진수의 재능을 알아챈 사공 張華의 추천을 받아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佐著作郞·陽平令을 역임했고, 著作郞·巴西郡中正으로 전임했다.


진수는 삼국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그는 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나라의 신하였기에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 위나라와 오나라와는 달리 촉나라에는 엄밀한 의미의 사관은 없었지만, 진수는 촉나라의 관리였기 때문에 촉나라 기술의 부족함을 덜 수 있었다.


진나라의 장화는 진수의 뛰어난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칭찬하고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장화의 정적이었던 荀勗 등의 훼방으로 진수는 장광태수로 전임됐다. 이후 진나라의 황제는 진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治書侍御史에 임명했다. 이후 모친이 별세하자 진수는 관직을 버렸다. 낙양에 시신을 묻으라는 모친의 유언을 따랐으나, 고향에 묻어야 하는 예를 어겼다는 이유로 향당의 비난을 받았다.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古國志》50편, 《益部耆舊傳》, 《官司論》, 《釋諱》, 《廣國論》, 《蜀相諸葛亮集》을 편찬해 중국 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晉書》〈진수전〉에서 진수를 평하길, 班固와 司馬遷을 이어 이전의 典을 이을 자는 오직 진수뿐이라고 호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