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李丙燾)
1896~ 사학자. 호 두계(斗溪), 경기도 용인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 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장, 진단학회 회장, 학술원 회장 등을 역임. 근대한국사학 수립에 막대한 공을 세움.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한국 고대사회와 그 문화」등이 있음.
이황은 ‘동방의 주부자(朱夫子)’로 일컫던 퇴계 그 사람이니 율곡 이이와 한가지로 조선의 유학계를 대표한 최고봉으로 그 품격과 학문에 있어 각기 후인에 끼친 영향은 절대하였다. 특히 퇴계는 영남학인(嶺南學人)의 종사(宗師)로, 율곡은 기호학인(畿湖學人)의 종장(宗匠)으로 유달리 숭배되어 오던 이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퇴계는 율곡보다 35년이나 장(長)한 선진(先進)이니 연산군 7년 신유(1501) 12월 25일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안동군 도산면)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 경오(1570) 12월 초8일 향수 70세로 동현 도산에서 졸하였다. 퇴계의 자는 경호(景浩)요 퇴계(退溪), 도수(陶叟), 퇴도(退陶)는 다 그 별호이며 그 선조는 진보(眞寶) 사람이었다. 조(祖)는 계양(繼陽), 부는 식(植)이라 이르니 다 임천(林泉)을 사랑하고 학문을 힘쓰던 이였다.
퇴계는 생후 겨우 7개월 만에 부를 상(喪)하는 불행에 조우하여 그 훈육의 노(勞)를 모부인 박씨와 숙부 송재(松齋) 우에게 기다리지 아니하면 안 되었다. 12세에 송재에게 「논어」를 배울새 '이(理)’자의 의의를 물어 스스로 해답하기를
“사(事)의 시(是)한 것을 이 이(理)라 이르느냐.”
하여 숙부를 놀라게 하였다 함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으로써 그의 소년시대로부터 사색의 힘에 장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장성함에 따라서 더욱 학(學)에 뜻하여 거의 정사(定師) 없이 각고면려하여 때로 침식을 잊어버리고 이로 말미암아 신체의 쇠약증을 얻기까지 하였다 한다.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3세에 태학(성균관)에 들어가 (학우 河西 金麟厚와 서로 친함) 익년에 문과에 등제하고 정자(正字), 박사(博士), 전적(典籍), 호조좌랑(戶曹佐郞)을 거쳐 39세 때에는 홍문관 수찬(修撰)을 배하여 비로소 옥당에 선입(選入)되었다.
그 후 누관(屢官)을 경(經)하여 중종 38년 계묘(43세)에는 성균관 사성(司成)의 직을 수(授)함에 불구하고 걸가귀향(乞暇歸鄕)하여 이에 관을 사(辭)하고 환조(還朝)치 아니하였다. 이는 퇴계가 관을 버릴 의사로 퇴귀한 제일차이었다. 세로는 험난하고 벼슬은 높아가고 몸은 쇠약하여 임무에 감내키 어려움에도 그 퇴귀의 한 인(因)이 있었겠지만 이것이 전부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 주된 이유는 이보다도 전원을 동경하고 학문에 충실하려 함에 있었다. 즉 그의 진의는 정치계와 같은 전변무상(轉變無常)한 동적(動的) 방면보다도 또한 경성과 같은 번화한 도시생활보다도 한정(閑靜)한 전리(田里)에 돌아와 자연과 학문을 유일한 벗으로 삼아 고요히 진리를 탐색하는 정적(靜的) 세계를 발견하려 함에 있었다. 그 〈감춘(感春)〉이라는 시의 일절에
“3년의 봄을 서울에서 지나니
시절은 망아지에 멍에 매기 재촉하네
한가한 뜻에 무슨 유익함 있나
밤낮으로 나라의 은혜만 부끄러운데
내 집은 맑은 물가
즐거이 노니는 한가한 촌이라네
이웃에서는 봄일을 시작하고
닭과 개가 울타리 지키는 곳
책들과 자리가 고요하고
아지랭이는 개울물에 피어오르네
시내의 고기와 새들
소나무 아래는 학과 원숭이
즐겁도다 산사람이여!
돌아간다 말하며 술잔 높이 드네”(「퇴계집」권 1) (편집자 역)1)
라 한 것은 퇴계가 36세 때 경성에 있을 때 읊조린 시니 그 얼마나 전원을 동경하고 관계 생활의 부자유 몰취미를 느꼈던가 짐작된다.
1)“三年京洛春 局促駒在轅 悠悠意何盆 日夕愧國恩 我家清洛上 熙熙樂閑村 隣里事東作 鷄犬護籬垣 圖書靜几席 烟霞映川原 溪中魚與鳥 松下鶴與猿 樂哉山中人 言歸謀酒尊”
어떻든 그는 어디까지든지 학자요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미구에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로 소환되어 을사(45세)에는 홍문관 전한(典翰)에 전임하였다. 이해 7월에 인종이 승하하시고 명종이 즉위하시매 퇴계는 유명한 <걸물절왜사소(乞勿絶倭使疏)〉를 상(上)하여
“가령 남북의 두 오랑캐가 일시에 함께 일어나매 동쪽을 장악하면 서쪽을 잃으며 배를 보호하면 등이 어지러운 것입니다. … 이것이 신이 크게 근심하는 것입니다.”(편집자 역)
라 하여 대마도와의 외교 회복을 주창한 일이 있었으나 그 의논이 우원(迂遠)하다 하여 채납되지 못하고(「명종실록」), 또 때는 외척 윤원형이 이기배와 상모(相謀)하여 크게 사옥(士獄)을 일으킬 때마다 퇴계 역시 이 영향을 입어 일시 삭직을 면치 못하였고 다시 복직되매 익년(46세) 봄에 표연히 관을 버리고 희희(熙熙)한 낙원에 돌아왔었다. 퇴계는 이에 토계(兎溪)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축(築)하고 더욱 독서 구도에 뜻을 굳게 하였으니 ‘퇴계’는 즉 이 토계를 개칭하여 취한 호이었다.
일찌기 경성에서 「주자전서」를 얻어 읽고 즐겨하더니 그는 이로부터 문을 닫고 이 책에 정(精)을 다하여 부독앙사(俯讀仰思) 진지실득(眞知實得)으로써 그 요무(要務)를 삼았었다. 그가 주자에 사숙(私淑)하여 절실히 그 학을 이해하기는 이때로부터였다. 조예가 깊어갈수록 세미(世味)는 반비례하여 점점 얇아가므로 비록 조명(朝命)이 누하(屢下)하여도 고사불취(固辭不就)하고 혹 부득이 취임하더라도 오래 머물지 않고 퇴귀를 걸하며 혹은 외임(外任)을 자청하기도 하였다. 무신·기유 양년(명종 3년, 4년)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에 역임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정으로 인한 것이며 그후 임자(52세)에 다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 대사성, 부제학, 공조참판 등을 차례로 배수함에 불구하고 누누이 사퇴를 걸하여 마침내 명종 10년(55세)에 전리(田里)로 돌아온 것도 불유쾌한 경성의 공기를 벗어나 오로지 독서 함양에 은둔하려고 함이었다. 일시라도 독서와 사색을 떠난 생활은 퇴계에게는 도리어 큰 고통이었다.
앞서 풍기군수의 직을 버리고 돌아왔을 때에 퇴계는 거처를 다시 퇴계 서안에 복(卜)하여 새로이 한서암(寒棲庵)을 구(構)하고 10년 후 경신(60세) 겨울에는 또 도산 남에 서당을 지은 후 이에 이거하여 도수 혹은 퇴도(退陶)라 별호하였다. 이로부터 더욱 사색에서 도의 대원(大原)을 통견(洞見)하고 자연에서 감개를 계발하여 그 자득자락(自得自樂)의 경은 주자의 무이정사(武夷精舍)의 생활 그대로였다. 강구정밀(講究精密), 천리순독(踐履純篤), 소견소조(所見所造)가 익친익심(益親益深)하매 이에 전후하여 종유강학(從遊講學)의 무리는 사방으로부터 모여들었다.
이율곡이 23세의 묘령으로 퇴계를 방문하여 도를 물은 것도 이로부터 수년 전의 일이었다. 또 명종께서 퇴계가 병으로 인하여 응소(應召)치 못함을 탄석(惜)하여 비밀히 화공을 보내어 도산의 형승(形勝)을 그려 오게 하여 玩覽하신 것도 이때의 미담이었다.
퇴계의 학문의 온축(蘊蓄)과 발휘는 대개 50년대로부터 60년대에 걸쳐(즉 한서암에서 도산서당) 증대하였으므로 변론, 저술, 편찬 등의 중요한 것도 다 이 사이에 되었다.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석의(心經釋疑)」 및 기고봉과의 「사단칠정분이기서(四端七情分理氣書)」와 같은 것은 그 중에도 가장 저명한 것이다.
명종 말 선조 초에 예조판서를 배하고 익 원년 무진 (68세)에 또 누소로 인하여 나아가 대제학,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判中樞府事 兼 知經筵)을 배수하고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제진하니 이는 국은을 보답하고 성학(聖學)을 계발하기 위하여서의 것이었은 즉 퇴계 만년에 있어서 가장 의미심중한 저작물이었다.
더욱 퇴계가 궐하를 물러올 때 (선조 2년 3월) 선조께 올린 누누 장언(累累長言) 가운데
“금세는 가위 평치(平治)라 할 수 있으나 남북에 흔2)이 있고 생민이 곤췌하고 부고(府庫)가 공허하여 장차 국비기국(國非其國)하는 지경에 이를지 모르며 졸연히 사변이 있으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세가 없지 아니하니 우려가 없다 할 수 없다.”(「선조수정실록」)
고 한 말은 위의 저작 이상의 최중(最重)한 보국어(報國語)이었을는지 모르겠거니와, 어떻든 퇴계의 이 말은 저 이율곡의 양병 10만론에 먼저하기 10여 년 전이요 또 임진란을 앞서기 실로 20여 년 전이다.
2)흔: 틈.
오인은 그 선견의 명이 이 같았던가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사후에 시(諡)를 문순(文純)이라 사하고 광해 2년에 문묘에 종사되었다.
퇴계의 특성과 고결한 인격에 대하여는 하기(下記) 「명종실록」(21년 2월 15일조)의 기사가 가장 요령을 득(得)하였으므로 이로써 대신하려 한다.
“황의 성품은 총명하고 예지롭고 따뜻하고 겸손하였으며 단아하고 상세하며 온화하고 순수하였다. 도학에 마음을 잠겼으며 체험으로 연구하여 스스로 얻은 바가 많았다. 원기를 기르고 공을 깊이 하여 남의 눈에 나는 모나는 행동이 없었다.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에 마음이 의에 맞아서 조금도 구차함이 없었다. 일찌기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남에게 가볍게 보이지도 않았다. 실과 같이 분석하고 정치하고 미세하게 의리의 공을 천명하였으니 이것은 동방의 선유(先儒)들에게서는 일찌기 없던 것이었다. 배우는 자들은 그를 흠앙함이 마치 태산과 북두를 대함과 같았다. 그가 표연히 씻어버리는 점과 나아감에 어렵게 하고 물러남을 쉽게 여기는 절도는 진실로 봉황이 천 길의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기상이 있었다. 고을 사대부들은 모두 그를 보고 감화되어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며 재물의 이로움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그의 덕이 사람들에게 심어짐이 매우 깊었다.”(편집자 역)
1. 그의 학설
퇴계는 인문입도(因文入道)의 학자로 중년 이전에는 문장학에 더 힘을 썼지만 중년 이후로는 정주(程朱)에 사숙하여 도학을 전공하고 정주로써 지행(知行)의 준칙을 삼았다. 그리하여 퇴계의 근본사상 및 그 학설은 대개 정주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그의 철학에 있어서는 특히 주자의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사상을 계승하여 이를 더 철저케 한 감이 있다. 주자가 이기 이원적으로 우주를 해석함과 같이 퇴계도 도기(道器; 이기) 이원적으로 이를 설명하였다.
이 우주 만물은 도기 즉 이기의 2대 요소로 구성되어 그중에 하나도 결하여는 여실의 것이 될 수 없다. 만물의 체상(體象)은 기(器)요, 그의 갖춘 바 이는 도이다. 도는 기에 실리고 기는 도를 갖추어 서로 의지치 아니하면 이 우주의 삼라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 도기는 때로 이합(離合)이 있는 것이 아니요 항상 성질을 서로 상잡(爽雜)치 아니하는 의미의 결합이라 함이 그들의 근본사상이다. 그러므로 주자나 퇴계에 있어서는 물상(物上)에 취하여 보면 이기, 즉 도기는 서론 혼륜(渾淪)한 관계로되, 이를 분석하면 이는 이, 기는 기, 도는 도, 기(器)는 기(器)요 결코 이가 곧 기며 기가 곧 이며 도가 곧 기(器)며 기(器)가 곧 도는 아니다.
퇴계는 이 사상을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하여 「비이기위일물변증(非理氣一物辨證)」을 저술하고 곧 정명도의 '기역도 도역기(器赤道 道亦器)’(二程의 유서)를 해석하되
“기를 떠나 도를 찾을 수는 없는 고로 기역도라 한 것이니 이는 기더러 곧 도라 한 것이 아니며, 도를 벗어나 기가 있지 못하므로 도역기라 한 것이니 이것도 도를 곧 기라 한 것이 아니라.”
하고 또 주자의 '이여기결시이물(理與氣決是二物)'(주자 답 유숙부 서)이란 말을 인증하여 이로써 철안(鐵案)을 삼았다.
그러나 이기의 우주간에 있어서의 작용에 대하여 주자는 쓰되 “기는 능히 응결하고 조작하나 이는 정의(情意)와 조작이 없다”하여 이(理) 스스로의 작용을 인정치 아니하였음에 대하여 퇴계는 이를 인정하였다. 즉 퇴계는 이와 기가 한 가지 실재적 작용이 있는 것으로 보는 동시에 이(理)를 순연히 추상적 개념적 형식적 무위적인 것으로 보지 아니하였다. 그 말에 의하면
‘태극의 동정(動靜)이 있는 것은 태극이 스스로 동정하는 것이요, 천명이 유행하는 것은 천명이 스스로 유행하는 것이니 어찌 따로 부리는 자가 있으랴’ 한다.(퇴계 답 이달, 이천기 서)
태극과 천명은 정주학도에 있어서는 곧 이요 기가 아니니 퇴계의 말은 이가 스스로 동정하고 스스로 유행한다는 말이다. 그는 오히려 자기가 전에 단지 본체의 무위함만 보고 그 묘용(妙用)이 현행(顯行)하는 것을 알지 못하여 거의 이를 사물(死物)로 인정할 뻔하였다고 말한 바도 있었다(퇴계 답 기명언 서). 다음에 말할 퇴계의 '이발설(理發說)'은 실로 이러한 근본사상에서 나온 것이니 이 점은 미리 주의할 필요가 있다.
퇴계는 상술한 바와 같이 도기(道器) 2원적으로 우주를 해석하였지만 도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는 도는 순선무악(純善無惡)한 이(理)요 기(器)는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기(氣)인즉 도,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 자요 기 즉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자라고 보았다. 그런고로 퇴계는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역시 이러한 절대 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 이원으로써 분석하였다. 즉 심(心)의 체(體)인 성(性)에 본연성과 기질성을 구별함과 같이 성의 발인 정(情)에도 사단과 칠정을 대립시켜 본연의 성과 사단(측은·수오·사양·시비의 마음)의 정은 절대 순(純善)인 이의 체용(體用)으로 인식하고 기질성과 칠정(喜怒哀懼愛惡欲)은 가선가악의 상대적 가치를 가진 기의 체용으로 관념하였다. 그리하여 퇴계는 일찌기 그 경우(京友)인 정추만(鄭秋巒: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수정할 때에 원도(原圖)에
“사단이 일어나는 것은 순전한 이인 까닭에 선(善)이 아님이 없고, 칠정이 일어나는 것은 기를 겸한 까닭에 선악이 있다.”(편집자 역)
라 한 것을 고쳐
“사단은 이의 일어남이고 칠정은 기의 일어남이다.” (편집자 역)
이라 하였다.
대개 원도의 의취도 그러하지만 퇴계가 개정한 구에 있어서는 더욱 사·칠 이기의 대립적 관찰과 이기호발관(理氣互發觀)을 명시하였다. 호남학자로 퇴계의 후배인 기고봉은 이를 얻어 보고 온당치 않게 생각하여 질문을 발하되
“칠정 외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만일 사단이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아님이 없고 칠정이 기에서 발하여 선악이 있다 하면 이것은 곧 이와 기를 판(判)하여 양물(兩物)을 삼는 것이며 또 이것은 칠정이 성에서 나오지 않고 사단이 기에 승(乘)치 아니한 것이다.”(하략)
고 하여 그 논리의 결함을 지적하였다.
이것이 퇴·고(退高) 2인을 비롯하여 이후 길이 반도학계의 일대 논안(論案)을 이루게 한 사칠분이기여부론 (四七分理氣與否論)의 발단이었다.
퇴계는 이에 답변하여 가로되
“대개 이는 기와 더불어 서로 모름지기 체가 되고 용(用)이 되어 이 없는 기 없고 기 없는 이가 없으나 그러나 거기 대하여 분석해 말하면 부동한 바가 있으니 또한 별(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중략) 정(情)에 사단칠정의 분(分)이 있는 것은 성(性)에 본성(本性)·기품(氣稟)의 이(異)가 있는 것과 같다.
성에 있어 이미 이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면 독(獨)히 정에 있어 이기로 분언(分言)함이 불가하다 할 것이 있으랴. (중략) 사단 칠정의 2자가 다 비록 이기에 불외(不外)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는 그 소종래(所從來)를 인하여 각각 소주(所主)한 바를 가리켜 말함인즉 모(某)는 이가 되고 모는 기가 된다 함이 무어 불가할 것이 있느냐.”
하고 끝으로 오히려 「주자어류(朱子語類)」 중에 정히 그와 같은 말(사단은 이의 발함이고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이 있음을 근래 발견하고 더욱 자신의 그릇되지 아니함을 알았다는 의미의 말을 첨부하여 피차 반복 3, 4차에 이르도록 논쟁을 그치지 아니하였다.
사단 칠정을 이기에 분속(分屬)한 것은 조선에서는 추만, 퇴계 이전에 국초에 권양촌(권근)의 입학도설(入學圖說) 중에 이미 보이고 퇴계는 더욱 이 도설을 애독하였던 터이므로 퇴계의 사칠이기분대적(四七理氣分對的)관찰은 이에서도 영향됨이 깊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권양촌의 입학도설에 취하여(權陽村の入學圖說に就いて ; 「동양학보」제17권 제4호~제18권 제1호)>란 졸고 중에 언급한 바가 있으므로 상세한 논고는 거기에 참조하기를 바란다.
기고봉은 최후에는 퇴계설에 따르는 듯한 사칠론을 지어 보내었으나 그 결론에 이르러서는
“칠정이 발하고 중간에 조절하는 것은 사단과 더불어 처음에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대개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지만 이는 진실로 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발하고 중도에 조절하는 것은 곧 천명의 본연적인 체(體)이다. 그러니 어찌 기가 발하여 사단과 달라진다고 할 수 있겠는가?” (편집자 역)
라 하여 의연히 퇴계설에 불만을 표시하였다.
고봉의 전후 논리는 퇴계에 비하여 확실히 수보를 내디딘 우월한 견해로 조선적 학자의 특색을 발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후 퇴계는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께 제진할 때에는 십도의 하나인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상에
사단은 “이가 발하면 기가 그것을 따른다(理發而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하면 이가 그것을 탄다(氣發而理乘之)”란 구를 부(附)하여
여기에는 전일의
“사단은 이의 발함이요 칠정은 기의 발함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와는 좀 다르게 하였지만 자가의 “이기는 서로 발한다(理氣互發)”,
“사칠은 대립한다(四七對立)”의 주지는 의연히 변함이 없었다.
이로써 보면 퇴계는 항상 분석적 견해를 좋아하는 동시에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견해를 일층 더 철저히 발휘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칠이기호대관(四七理氣互對觀)에 있어서는 물론, 그 소위
“이가 발하고 기가 그에 탄다(理發而氣乘之)”
라는 용어에 대하여도 후일 이율곡의 심각한 비판이 있음으로부터는 길이 율곡학통의 논란거리가 되고 퇴계학파의 길이 변술(辨述)하는 제목이 되었지만 이러한 유의 논쟁은 이후 조선 유교사상에 자주 나타나 학계에 파문을 일으키고 학문의 단조(單調)를 깨침이 컸었다.
2. 그의 학풍
퇴계는 소시에는 가학(家學)을 이어 주로 문학에 힘을 썼으나 후에 「주자대전」을 얻어 주자에 사숙함으로부터는 주자를 신(信)하기를 신명과 같이 하여 이로써 일상생활의 준칙을 삼아 어묵동정(語默動靜), 사수(辭受), 취여(取與), 출처(出處)의 의가 하나도 주자와 합하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더구나 질의(質疑), 변난(辨難)의 제(際)에는 반드시 주자의 설을 인용하여 변증함이 상례이었다.
만일 주자와 설을 달리하는 자가 있으면 그가 고인이거나 금인이거나 또는 중국인이거나 자국인이거나 불문하고 반드시 변설(辯說)을 작(作)하여 공척(功斥)하였다.
예하면 그는 주기론자인 서화담(서경덕)과 이기합일론자인 명의 나정암(羅整菴;欽順)에 대하여는 〈비이기위일물변증(非理氣爲一物辯證)〉이란 논문을 지어 공격하고
지행합일론자인 왕양명(守仁)에 대하여는 〈양명전습록변(陽明傳習錄辯)〉이란 논문으로써,
또 심무체용론자(心無體用論者)인 연방(蓮坊) 이구(李球; 화담의 문인)에 대하여는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이란 논문으로써 각각 배척하여 주자학도로서의 충실을 드러냈었다.
주자의 집주(集註), 서독(書牘) 및 어류(語類)는 특히 그가 평생 금과옥조로 여기던 것이니 주자의 서독을 산정(刪定)한 그의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과 같은 것은 가장 그 정력을 주(注)하였던 편찬물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주자대전」의 것과 비교하여) 퇴계가 얼마나 주자서를 정독하고 저작하였는지 알 수 있는 동시에, 그 주자학도로서의 진면목을 살필 수 있고 또 그것이 주자학에 일대 공헌임은 말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러나 퇴계는 결코 맹목적으로 주자를 숭배하고 교주적(膠柱的)으로 그 설을 준수하려던 학자는 아니다. 말하자면 그는 주자학에 대하여 침잠한 연구와 사색을 쌓아 주자의 미진한 바를 발휘하여 드디어 그 학을 대성한 학자이었다.
주자 이후에 유수한 주자학도가 중국에 많이 나왔지만 그들은 대개 존덕성(尊德性; 실천궁행) 방면에 편중하여 심원한 학문을 논하는 논학문자(論學文字)는 비교적 적었다. 퇴계도 존덕성 방면을 경홀히 하지는 아니하여 특히 만년에는 진서산(眞西山 ; 德秀)의 심경(心經)을 애독하였지만 서산과 같이 존덕성에만 기우는 공부가 아니요, 그보다 도문학(道問學;博學) 방면을 위주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퇴계는 당시자기와 쌍벽이면서도 위학공부(爲學工夫)에 있어 좀 기치를 달리한 조남명(曺南冥;植)에게 은근히 구이학자(ㅁ耳學者;견문·담론을 좋아하는派)란 평까지 들은 일이 있지만 어떻든 그는 평생에 학을 논함을 좋아하였고 따라서 거기 관한 저술이 많았으며 특히 그의 정상신밀(精詳愼密)한 박학은 주자 후 오직 일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농암(金農巖;昌協)이 그의「잡지(雜誌)」에
“퇴계의 논학문자(論學文字)는 다만 우리 동방에만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비록 중국에 있어서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진서산 같은 이미 주자 이후의 대유(大儒)라 저술이 많지 못하며, 논학문자는 달리 한두 번에 걸쳐 보이나 또한 퇴계가 정밀하게 공을 쏟고 상세하고 간절히 한 것과 같지 않다. 그외는 이로써 알 만하다. 운운”(「농암집」권 32)(편집자 역)
이라 하고 또
“퇴계는 학을 말하기를 좋아했고 율곡은 이(理)를 말하기를 좋아했다.”(동상)(편집자 역)
라 한 것은 과연 적중한 평이라 하겠다.
그러나 퇴계의 학문은 역시 고원한 이학(철학)을 중심으로 하여 적축(積蓄)한 박학이므로 매양 학자를 대하면 심원한 철리(哲理) 특히 형이상적 근본문제에 취하여 제시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그 교도방법은귀납적 공부보다도 연역적 공부를 주로 하여 비록 초학자라도 대번 「심경(心經)」과 같은 고원한 철학서를 과하기를 상례로 하였으니, 퇴계의 말에도
“처음으로 공부를 힘쓰는 경지에서 「심경」과 같이 절실한 것이 없다.”(「언행록」) (편집자 역)
라 하고 또
“아래부터 배워서 위에 도달하는 것(귀납공부)은 진실로 떳떳한 차례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오랫동안 학습하여도 얻는 것이 없으면 쉽게 중도에서 그만두게 되니 본원적인 경지의 서두를 지시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동상) (편집자 역)
라고 하였다.
퇴계의 정상신밀한 성격은 그 학문에서 더욱 발휘되어 일변 형이상적 철학을 담론하면서도 일변으로 형이하적 훈고·고증의 학을 중시하여 매양 문인으로 더불어 경전의 질의훈석(質疑訓釋), 참호고정(參互考訂), 판본교수(板本校讐) 등을 일과로 하여 한 자 한 구를 범연히 하지 아니하였다. 퇴계는 주자의 철학에만 사숙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문학 고증학에서도 배운 바가 많았던 것이다.
3. 그의 문필 및 편저
시장 자획(詩章字畫)의 묘는 도학자인 퇴계에 있어서는 특히 그 여사(餘事)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는 인문입도(因文入道)한 학자인만큼 이 방면에 숙공(宿工)이 있어 일찍부터 능성(能聲)을 박(博)하였다. 그 학우인김하서가 퇴계에 증(贈)한 시 가운데
“선생은 빼어난 봉우리이니 이백과 두보의 문장에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체로다”(편집자 역)3)
3)“夫子嶺之秀 李杜文章王趙筆”
하여 퇴계의 문필을 격칭(激稱)한 바 있거니와 실로 퇴계는 문인 서가로서도 훌륭한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시장(詩章)은 필법의 단경(端勁)과 한가지로 한 자 한 구 선련정사(選鍊精思)의 고(苦)를 가하되 가벼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퇴계언행록」 잡기조에
“선생은 비록 한 자의 글씨를 쓰더라도 정돈하지 않음이 없어………글자체가 바르고 단아하며 무게가 있었다. 비록 일절을 읊더라도 한 구 한 자에 반드시 정밀하게 생각하고 다시 고쳐 정했으며 가벼이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이덕홍 소기)(편집자 역)
라 한 것은 즉 이를 말함이다.
이는 대개 퇴계의 일생을 통한 신상단정(愼詳端正)한 성격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또한 무비(無非)한 그 심법(心法)·심학(心學)에서 연출(鍊出)되는 것이므로 보통 소방(疎放)한 문인 서가와는 자연 그 유를 달리한다. 그리하여 그는 매양 서(書)는 심범에 의할 것을 주장하여
“자법(字法)은 심법의 나머지를 좇아 나옴이요, 글씨 익힘은 이름 있는 글씨됨을 구함이 아니다.”
“한 점 획으로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니 인간이 훼예에 흔들리는 데 매인 것이 아니라.”(「퇴계집」권 3) (편집자 역)
하고 시로 읊조리게까지 하였다.
도학자란 흔히 문예를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퇴계와 같은 이는 도학을 전공하면서도 문장을 애호하고 필요시하였다. 그는 말하되
“사(辭)는 의(意)를 달(達)할 뿐이나 그러나 학자는 문장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문장을 알지 못하면 비록 약간의 문력(文力)이 있다 할지라도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언행록」)
고 하였다.
이는 당연한 말이다. 어떠한 학문을 하든지 문장술을 몰라서는 자기의 의사를 충분히 발표하지 못할 것이다.
퇴계는 시문 중 문에 더욱 장하였으나 시에 있어서도 속유(俗儒)의 미치지 못할 경계에 있었다.
본래 그 금회(襟懷)가 표쇄(飄麗)하고 운도(韻度)가 청월(淸越)하며 자연을 사랑하고 전원을 즐겨하므로 물(物)에 촉(觸)하고 시(時)에 감(感)하여 읊조린 시만으로도 권(卷)을 이루어 있다.
특히 전원을 사랑하는 까닭으로 평생에 도연명(도잠)의 시를 좋아하여 매양 이를 화(和)하였다. 그 빈(貧)에 안(安)하여 인생을 달관하고 유속(流俗)을 초월한 점에 있어서는 연명과 매우 방불하지만 그러나 퇴계는 연명과 같이 한편에 기울어진 염세적 혹은 종주방일(縱酒放逸)한 시인은 물론아니며 또 연명과 같이 무현금(無絃琴)을 농(弄)한다는 그러한 허괴(虛怪)를 즐겨한 시인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퇴계는 온유돈후의 군자인적 시인 문인의 격을 갖추었던 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시나 문이 다 온후원만의 미(味)가 횡일(横溢)하여 있거니와 특히 그 〈도산십이곡(李鼈 6가체에 의하여 지은 조선 시가)과 조남명에 준 서(書)와 같은 것은 그런 유의 가장 두드러진 대표작이었다. 퇴계는 연명의 시 이외에 또 일찌기 두보·소동파의 시를 배운 일도 있지만 주자학을 전공함으로부터는 주자의 시문을 사랑하여 그의 만년 소작은 대개 주자와 격조를 같이하였다. 퇴계의 득의처인 서독(書牘)에 이르러는 전혀 주자의 그것에서 힘을 얻었으므로 퇴계의 서독을 읽을 때는 마치 주자의 그것을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일으켜 준다.
퇴계의 편저물은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으나 자수(自手)로 된 것에 「수정천명도설(修正天命圖說)」 1권, 「성학십도』 1권, 「자성록」(自省錄;從遊와의 講究 왕복서) 2권,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 「이학통록(理學通錄)」 11권 및 「계몽전의(啓蒙傳疑)」 1권이 있고 문인(門人)의 손에 편찬된 것에 「경서석의(經書釋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상례문답(喪禮問答)」 및 문집 등이 있다. 그 중 「천명도설」, 「자성록」,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퇴계집」 등의 서는 일찌기 일본에까지 유전되어 거기서 중간(重刊)된 것도 많지만 어떻든 퇴계의 학은 일본학계에 영향한 바도 컸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일본 주자학파의 거벽인 산기암재(山崎闇齋;이름은 嘉)와 같은 이는 가장 많이 퇴계에 사숙하여 「주자서절요」 및 「퇴계집」에 대하여 말하되
“「주자서절요」는 이퇴계가 평생의 정력을 다한 것이다. 「퇴계문집」 전 49권은 내가 열람해 보니 실로 조선의 제일인자다.”(「문회필록」권 20)(편집자 역)
이라 하였고, 그의 문인 흑암자운(黑巖慈雲)은 특히 「주자서절요」에 정(精)을 다하여 교수, 훈점(訓點)을 가하고 또 발문을 써
“주자문집의 글에는 진실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이는 집중한 것의 요체요 절요의 편(編)이니 또한 요체 중의 요체이다. 오호라, 퇴계의 마음씀이 부지런하고 정밀하도다. 후학에게 끼쳐줌이 실로 적지 않구나. 내가 가만히 주자서에 뜻을 둠이 있어서 이에 그것을 읽고 교정하여 구두점을 표하여 보기 쉽게 하노라.”(편집자 역)
라 하고 인하여 후일 이것의 중간을 보게 되었거니와 퇴계학의 암재학파(闇齋學派)에 끼친 바 영향은 더욱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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