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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조선-이준경(李浚慶)

구글서생 2023. 5. 14.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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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준경(李浚慶)

 

신석호(申奭鎬)
1904~1981. 사학자경성제국대학 사학과 졸업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수사관(修史官),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서울시사편찬위원회 부원장학술원 회원,고려대성균관대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한국사료해설집」「국사신강」「국사개요」등이 있음.

 

견딜 감

 

이준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370년 전 조선 명종, 선조 양조의 名相으로 그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만큼 그의 사업은 큰 것이 많으며 그의 일생에는 파란곡절도 또한 많았었다. 지금 연대를 좇아 그의 일대 전기를 적어 보려 한다. 그런데 기사 중에 간혹 그의 연보와 행장에 상위(相違)되는 점이 있으나 이것이 모두 「이조실록」으로 정정한 것이니 독자는 양찰하기를 바란다.

 

준경은 광주 이씨로 자는 원길(原吉)이요 호는 동고(東皐)인데, 동고는 그가 만년에 부르던 것이요 초년에는 남당(南堂)이라 하였으며 홍련거사(紅蓮居士) 혹은 연방노인(蓮坊老人)이라고 한 적도 있다.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이수정(李守貞)의 제2자로 연산군 5년 12월 29일에 한성부동부연화방 연지동(東部蓮花坊 蓮池洞;경성 부근 蓮池町)에서 출생하였으니 그가 홍련거사 또는 연방노인이라고 호한 것도 여기에 기인한 것이다. 그의 부친은 벼슬이 수찬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이 역시 청직(淸職)이며 조부 이세좌(李世佐)와 증조 이극감(李克堪)은 모두 판서를 지냈으며 고조 이인손(李仁孫)은 우의정을 지냈으며 종증조 되는 고조 이극배(李克培)는 영의정, 이극균(李克均)은 좌의정, 이극돈(李克墩)은 판서를 지내 그의 일족은 모두 국가의 원훈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명한 성현의 「용재총화」에 ‘광이창성(廣李昌成)'이라 하여 광주(廣州)이씨가 해동 제일 성한 문호라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준경은 당시 제일 명문 거족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유시(幼時)에는 매우 행복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나 그가 여섯 살 때인 연산군 10년에 그의 가문에는 큰 불행이 이르렀다. 그것은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그의 조부 이세좌를 비롯하여 아버지 수정과 삼촌 숙부 수원(守元), 수형(守亭), 수의(守義)와 종증조 이극균이 모두 사형을 받은 것이다. 갑자사화는 주로 연산군이 자기 모친인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윤씨를 폐하여 죽이게 한 사람을 일일이 조사하여 이미 사망한 자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생존한 자는 능지처참하는 등 미증유의 참혹한 사화이나 이 사화 전체에 대한 설명은 그만두고 다만 준경의 집안 환란에 대하여만 쓰려 한다.

 

연산군 9년 9월에 준경의 조부 이세좌가 예조판서로 있으면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왕에게 진작(進爵)하고 회사배(回賜杯)를 받아 잘못하여 술을 어의(御衣)에 엎질렀으므로 그것이 죄가 되어 함경도 온성(穩城)에 정배되고 그 아들 4형제도 파직당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다행히 특사를 받아 환경(還京)하였으나 이때는 벌써 연산군이 극도로 황란(荒亂)하여 자기의 잘못을 간하는 자나 또는 자기의 명령에 복종치 아니하는 자는 불경 혹은 불공죄(不恭罪)로 처벌하여 마지 아니하던 때이다.

 

마침 연산군이 재상 홍귀달(洪貴達)의 손녀가 미모임을 알고 입내(入內)시키라고 명하였던바 귀달이 듣지 아니함에 곧 귀달을 함경도 경원(慶源)에 정배하고 귀달이 왕을 업수이여김은 이세좌의 죄를 놓은 까닭이라 하여 다시 세좌를 강원도 영월에 정배하고 이어서 거제도로 이배시켰다. 이세좌가 미처 배도에 이르기 전에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정원일기(政院日記)를 고출(考出)하여 본 결과 폐비를 사사(賜死)할 때에 세좌가 해방승지(該房承旨)였음을 알고 곧 사람을 놓아 세좌를 곤양(昆陽)에서 처참하고 이어서 그 아들 4형제도 사사하고 손자는 모두 외방(外方)으로 정배하고 가산은 전부 몰수하였었다.

 

이때 준경은 여섯 살 된 어린 나이로 그보다 한 살 맏되는 형 윤경(潤慶)과 같이 충청도 괴산에 정배되었다가 3년 후 즉 그가 여덟 살 되던 해 9월에 포악한 연산군은 폐지되고 중종이 반정(反正)함에 형제 모두 놓여서 서울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외가에 의탁하여 외조부 신승연(申承演)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승연이 경상도 상주 판관으로 부임함에 형제 모두 상주로 따라가서 그곳에 거주하던 당시 유명한 학자인 축옹(翁) 황효헌(黃孝獻)에게 수학하였다. 준경 형제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고 국량이 매우 컸으므로 그의 외조부가 특별히 사랑하여 그의 딸 즉 준경의 모친 신씨에게 이 두 아이는 봉추(鳳雛)와 기자(麒子)1) 같으니 잘 양육하라고 부탁하였다.

1) 봉추(鳳雛)와 기자(麒子) : 봉황의 새끼와 기린의 새끼 뛰어난 아기를 비유하는 말.

 

 

신씨는 매우 현숙한 부인으로 일찌기 두 아들에게 친히 「효경」과 「대학」을 가르치고 늘 교계하기를 과부의 자식은 잘못하면 세상에 버림을 받으니 너희들은 십분 근학하여 너희 집 가성(家聲)을 떨어뜨리지 말라고 하였다. 준경 형제는 모친의 교훈을 잘 지켜서 동리에 나가 놀지도 아니하고 늘 공부만 열심으로 하였다.

 

그래서 그는 15, 6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관통하고 당시 기묘사류(己卯士類)간에 풍미하던 성리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그의 종형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중종 10년에 대학(성균관)에 입학하여 성리학을 더 연구하고 17년에 생원시(生員試)에 입격(人格)하고 26년에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해 윤경도 진사에 장원하여 형제 모두 영화스럽게 되었으나 그의 모친은 이보다 8년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이 형제의 영화를 보지 못하였다.

 

준경은 급제한 후 곧 관도(官道)에 나아가 한림을 거쳐 옥당에 들어가 벼슬이 수찬에까지 올라갔다가 중종 28년 11월에 동관(同官) 구수담과 같이 경연에 입시(入侍)하여 중종께 기묘사류(己卯士類)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간신 김안로(金安老)의 일파에게 모함되어 파직을 당하였다.

 

기묘사류라 함은 중종 14년에 기묘사화를 입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일파로서 광조들은 여러 가지 弊政을 개혁하려다가 간신 남곤, 심정들에게 모함되어 일시 명사 수백 명이 아무 죄없이 혹은 살해되고 혹은 유찬(流竄)되고 혹은 파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남곤들의 여당이 아직 정권을 잡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기묘사류의 원통함을 왕에게 상주(上奏)하는 이는 없었다. 준경은 이것을 그저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구수담과 상의하고 경연의 기회를 이용하여 조용히 중종께 상주하였다.

 

그래서 중종은 기묘사류 중에도 가장 물망이 높은 김안국(金安國), 이장곤(李長坤) 등 수삼 명을 서용(敍用)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정권을 잡고 있던 김안로의 일파는 만일 기묘사류의 죄가 놓여서 다시 조정에 들어오면 자기네의 세력이 자연히 구축되겠으므로 기묘사류의 유죄함을 역설하고 다시 준경과 수담이 기묘사류를 석방하자고 함은 공(公)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사(私)에서 나온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그 이유는 준경과 수담의 친족이 많이 기묘사류에 섞인 까닭이다. 기묘사류 중에 준경의 친족으로는 동서 김식(金湜), 김윤종(金胤宗)과 종형 이연경과 5촌 이약영(李若永)·이약수(李若水)가 있으며 수담의 친족으로는 형 수복(壽福)과 처삼촌 조광조가 있으나 그들은 결코 자기네의 수삼 친족을 위하여 상주한 것이 아니요 公心에서 솟아나온 말이었었다.

 

그러나 김안로 일파의 참언은 주효하여 중종은 곧 준경과 수담을 파직하고 김안국들을 서용하라는 명령까지도 회수하였다. 이와 같이 준경은 출세하자마자 파직을 당하였으나 그의 명망은 이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직언지사(直言之士)라 하여 칭송이 자자하였다.

 

준경은 파직된 이후 5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독서에만 힘을 쓰다가 중종 32년 10월에 김안로 일파가 誅竄되고 기묘사류 김안국, 권철(權轍), 신광한(申光漢) 등 일시 명현이 차차 등용됨에 준경도 중종의 부르심을 받아 다시 출사하여 대간(臺諫)과 옥당에 출입하면서 시사를 바로잡기에 힘썼으며 혹은 동궁(東宮;仁宗)의 요속(僚屬)이 되어 인종의 학문을 보도(補導)하기에 힘썼다.

 

이로부터 준경의 관작은 점점 승진하여 중종 36년에 당상관(정3품 이상) 이상에 올라 홍문관 부제학과 승정원 승지를 지내고 38년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선(善;종2품)에 승진하여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으며 그후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교육에 힘쓴 일도 있었다.

익년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함에 고부사(告訃使)가 되어 명나라 서울 북경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귀국하여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 불행하여 동궁 때부터 성군(聖君)이란 이름을 받던 인종은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시고 그의 이모제(異母弟)인 명종(明宗)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함에 유명한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을사사화는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이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과 세력다툼을 하던 나머지에 일어난 사화인데 인종이 동궁에 있을 적에 나이 30이 가깝도록 후사를 낳지 못하고 문정왕후(文定王后;중종 계비)가 경원대군(慶原大君;명종)을 탄생하였으므로 왕후의 동생 윤원로(尹元老)·윤원형 형제가 대군을 끼고 세력을 부렸었다.

그러므로 감안로 용권(用權) 당시에 안로가 동궁의 지친(至親)이었으므로(안로의 아들 金禧가 인종의 매부임) 동궁 보호설을 제창하였으며 안로가 패사한 후에 윤임이 대신하여 동궁을 보호하자고 제창하였다.

 

이에 원로 형제는 윤임이 대군을 해하려고 한다는 유언(流言)을 만들어 중종과 문정왕후에 고하고 윤임도 원로 형제가 동궁을 해하려 한다는 유언을 만들어 사류간에 전파하여 서로 모함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대소 윤(尹)의 싸움이라고 하는데 대윤은 윤임, 소윤은 원로 형제를 가리킴이다.

 

중종, 인종이 상계(相繼)하여 승하하시고 유충(幼沖)한 명종이 즉위함에 윤원형이 크게 세력을 얻어 (이때 원로는 인종에 대한 불경죄로 방축되었음) 이기, 정순명(鄭順明), 임백령(林百齡) 등과 相謀하고 윤임,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들이 인종 승하하던 날 밤에 명종을 세우지 아니하고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세우려고 하였다는 것을 문정왕후에 고하여 윤임 등 3인을 죽이고 이어서 그들 뜻에 맞지 아니하는 자 모두 윤임의 당이라 하여 여러 차례 사화를 일으켜 일시의 명사를 거의 다 주찬하였다.

 

이때 준경의 조카 이중열(李中悅)과 5촌 이약영은 모두 찬살되고 형 윤경은 아들의 죄로 파직되어 문화 (門禍)가 다시 이르렀다. 그러나 준경만은 이 사화를 면하였으니 그것은 사화가 일어나던 익일 즉 명종 즉위년 8월 23일에 준경이 평안감사로 임명되어 평양에 부임하여 만 3년 동안 외방에 있었을 뿐 아니라 그는 일찌기 인종 때에 명종을 세제(世弟)로 봉하자고 주장하였으며 또 윤원로를 사지(死地)에서 구출하여 소윤에게 큰 덕을 보였던 까닭이다.

 

원로는 원형보다 더 흉악한 소인으로 대소윤 싸움 때에 윤임을 모함하기에 갖은 수단을 다 부렸으며 인종이 병환으로 계실 때에 인종이 얼른 죽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복자(卜者)에게 인종의 수(壽)를 점치는 등 인종에 대하여 불경한 행동을 많이 하였다. 그러므로 사화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윤임·유관이 대신을 모아놓고 원로를 죽이자고 하였다. 이때에 준경은 대비 즉 문정왕후를 위하여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원로를 외방에 방축하는 데 그쳤다.

 

이뿐 아니라 이때 준경은 매우 근신하여 사화에 대한 시비를 조금도 말하지 아니하였고 더우기 그의 조카 이중열이 화를 당하게 될 때에 중열로 하여금 자소명(自疏明)을 올리게까지 하였다. 중열은 매우 경박한 사람으로 일찌기 친우 이휘(李輝)와 같이 대소윤의 시비를 논란하고 기타 국사를 망담(妄談)하였다.

 

사화가 일어난 후 이휘가 택현설(擇賢說) 즉 명종을 세우지 말고 종실 중의 현자를 택하여 세우자고 하였다는 혐의로 피검되었을 때에 중열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부친 윤경과 삼촌 준경에게 문의하였다. 준경은 문호를 보전하기 위하여 상소자명(上疏自明)하라고 권하고 윤경은 매우도생(賣友圖生)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중열은 준경의 말대로 곧 상소하여 이휘가 늘 윤임을 두호하고 또 택현설을 주장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휘는 곧 사형을 받고 중열도 결국 면하지 못하였다. 이 사건에 관하여 율곡 이이와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는 그의 저술에서 준경의 잘못을 통척(痛斥)하였다. 그러나 갑자사화에서 쓰라린 경험을 맛본 준경으로서는 무리한 권고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옇든 준경은 을사사화 당시에 매우 근신하여 평안감사로 부임한 후에도 사화에 대한 시비는 조금도 논의하지 않고 재직 3년 동안 민치에만 심력을 경주하여 크게 치효(治效)를 나타내고 명종 3년 7월에 다시 중앙정부로 들어와서 병조판서, 한성부 판윤,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명종 5년 5월에 이르러 이기의 모함으로 보은(報恩)에 정배되어 두번째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기는 윤원형과 같이 을사사회를 일으킨 괴수로서 중종 때부터 사류에게 배척을 받던 자이다. 을사사화 이후 우의정이 되어 정권을 잡게 됨에 평생에 원한을 품은 자는 모조리 윤임의 당이라 하여 살해하고 아첨하는 자를 등용하여 문전에는 뇌물이 낭자하였다.

 

준경이 병조판서로 있을 적에 이기가 여러 번 구관자(求官者)의 이름을 적어서 정청(政廳;이조와 병조 관원이 모여서 관리의 임명을 결정하는 곳)에 보내고 모모(某某)에게 무슨 벼슬을 주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준경은 당시 이조판서 허자(許磁)와 같이 한 번도 그 청을 듣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이기는 준경과 허자를 미워하여 준경이 일찌기 윤임을 비호하였다는 말을 지어서 그의 복심(腹心) 진복창(陳復昌)과 이무강(李無疆)에게 부탁하여 준경을 탄핵하여 보은으로 정배하고 허자도 또한 모함하여 홍원(洪原)으로 정배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윤원형과 다툼을 하다가 이듬해에 면관되고 그의 조아복심(爪牙腹心)이던 진복창, 이무강도 서로 전후하여 찬축되었으므로 준경이 자연 드러나서 명종 6년 11월에 방축되었다.

 

준경은 석방된 후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서용되어 한직에 있다가 명종 8년 6월에 오랑캐 200여 명이 함경도 서수라(西水羅)에 침입하여 인축(人畜)을 많이 살략(殺掠)하였다는 장계(狀啓)가 들어옴에 왕은 특히 준경을 함경도 순변사(巡邊使)에 임명하여 이 사건을 처리케 하고, 겸하여 두만강 연안 각지의 성지(城池)를 순심(巡審)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오랑캐는 지금 만주국 간도성(間島省) 혼춘 방면에 거주하던 여진인(만주인)의 일종으로서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늘 조선땅에 침(侵)하여 도적질을 하였는데, 이번에 서수라에 침입한 것은 전년(前年)에 경흥(慶興;이때의 경흥읍은 慶興面邑洞이다)에 큰물이 져서 전지(田地)가 더 떠나갔으므로 부사 김수문(金秀文)이 경흥읍 바로 월편(越便)에 있는 이응거도(伊應巨島)가 매우 토옥(土沃)함을 보고 함경북도 병사(兵使) 김순고(金舜皐)와 상의하여 이응거도에 거주하는 오랑캐를 구축하고 신진(新鎭)은 설치하여 경흥 군민(軍民)으로 하여금 그 땅을 경작케 하였더니 이것에 분개한 오랑캐들이 동류를 규합하여 서수라에 침입하였던 것이다. 준경은 경흥에 도착하고 곧 이응거도의 신진을 철폐하고 오랑캐를 초유(招諭)하여 서수라 피거인축(被據人畜)을 송환케 하고 국경 각지의 성보(城堡)를 순찰한 후 그해 10월에 복명하였다.

 

준경은 함경도로부터 돌아온 후 실직(實職)에 취임하여 사헌부 대사헌과 병조판서를 다시 지내고 형조판서로 있다가 명종 10년에 유명한 을묘난(乙卯亂)이 일어날 때 전라도 도찰사가 되어 이것을 평정하였다. 을묘난이란 하면 구주연해(九州沿海)에 근거를 둔 해적들이 전라도에 침입한 사건인데 이때 이 해적들은 비단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 연해안 각지에도 침입하여 명나라와 조선에 큰 공포를 주었던 것이다.

 

명종 10년 5월에 그들 일당은 전함 70여 척을 몰아 가지고 전라도 영암군 달량포(靈巖郡 達梁浦;지금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에 침입하여 전라병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을 살해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을 사로잡고 여기서 두 패로 나눠 가지고 한 패는 서쪽 해안을 돌아 진도에 들어가서 금갑도(金甲島)와 남도보(南桃堡)를 분탕하고 한 패는 북으로 내륙에 침입하여 강진, 장흥 병영을 분탕하고 영암읍까지 들어왔었다.

이 급보를 받은 명종께서는 크게 놀라 곧 대신들을 모아 협의한 결과 당시 경상(卿相) 중에서 가장 명망이 높은 준경을 전라도 도순찰사에 임명하여 제장(諸將)을 총지휘케 하고 명장 남치근(南致勤), 김경석(金景錫)을 좌우도방어사(左右道防禦使)에 임명하여 전선에 나가서 싸우게 하였다.

 

준경은 곧 행장을 수습하여 전라도에 가서 나주에다 본영을 두고 제장을 지휘하여 방어에 힘썼는데 이때 마침 윤경이 전주 부윤으로 있다가 전라감사 김주의 명령으로 영암 가장(假)이 되어 영암성 중에 유둔하고 있었다. 준경은 그의 형을 지휘하기 어려우므로 편지를 보내서 퇴성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윤경은 영암에 도착한 이래 군졸을 잘 무휼(撫恤)하며 방어에 전력을 다하여 성중 사졸(城中士卒)이 크게 신뢰하던 터이므로 모두 그의 퇴성을 막을 뿐 아니라 윤경 자신도 죽음으로 국가에 보답하겠다 하고 그대로 영암에 유둔하였다가 5월 24일에 해적들을 성 밖 경교(卿校)에서 대파하였다.

 

이에 해적의 기세는 크게 최절(崔折)되어 더 북진하지 못하고 차차 남으로 퇴각하여 가리포(加里浦), 회령포(會寧浦), 녹도(鹿島) 등지를 분탕하고 다수의 인축을 약탈하여 가지고 도망하였다.

 

이 난에 있어서 전공이 가장 큰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윤경이다. 그래서 윤경은 특히 왕의 선로연(宣勞宴)을 받고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 준경은 해적이 퇴각할 때에 남치근 등 제장으로 하여금 진격케 하고 자기는 나주에서 일보도 남진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한때 대간의 탄핵을 받아 물론(物論)이 분분하였으나 제장을 지휘하여 난을 크게 확대시키지 아니하고 쉽게 평정한 공은 결코 적지 아니한 것이다.

 

이상에 술(述)한 바와 같이 준경은 일찍부터 명망이 높았을 뿐 아니라 북순남정(北巡南征)에 모두 공을 세웠으므로 그가 전라도로부터 돌아오자 명종은 특히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승배(陞拜)하고 미구에 좌찬성에 올리고 13년 11월에 우의성에 승배하여 국사를 총리(總理)케 하였다.

 

그러나 이때 윤원형이 아직 조정을 탁란(濁亂)할 뿐 아니라 명종왕비 심씨의 외숙 이양(李樑)이 또한 세력을 잡고 조정을 탁란하므로 준경은 수완을 다 펴지 못하였다. 그래서 준경은 여러 번 사표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명종 15년 6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였다가 19년 4월에 우의정 심통원(沈通源)의 모함으로 면상(免相)하였다.

 

심통원은 명종왕비 심씨의 종조(從祖)로 윤원형·이양과 같이 조정을 탁란하던 자인데 준경의 청직함을 싫어하여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마침 명종 19년 4월에 어떤 자가 문정왕후의 밀지를 위조하여 준경의 집에 전하였는데 준경은 그것을 정말 문정의 밀지인 줄 알고 그자를 포고(捕告)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안 심통원은 대사간 박영준(朴永俊)에게 부탁하여 준경을 탄핵하여 면직시켰다.

 

그러나 명종 20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하고 이제까지 문정왕후를 믿고 세력을 부리던 영의정 윤원형이 찬출됨에 준경은 중당(衆堂)에 의하여 다시 입상(入相)하여 영의정이 되었다. 이로부터 그는 명실공히 일국의 수상이 되어 심력을 다하여 국사에 당(當)하였는데 그의 상업(相業)으로 볼 만한 것이 많으나 특히 명종 승하 후에 선조를 영립한 것이 가장 위대하며 그가 명상이란 이름을 듣는 것도 또한 여기에 있다.

 

명종은 일찌기 순회세자(順懷世子)를 탄생한 이외에 다시 더 자녀를 낳지 못하였으며 세자는 명종 18년에 13세로 요졸하였다. 그러므로 일국 신민은 모두 후사에 대하여 큰 걱정을 하였는데 그중에 가장 근심한 사람은 준경이었다. 명종 20년 9월에 왕이 병에 걸려서 대단히 위중하므로 준경은 곧 입시하여 미리 후사를 정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자기 나이 아직 32세밖에 안 되므로 듣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덜 좋은 기색을 보였다. 수일 후 왕의 병세는 점점 더하여 일시 인사불성에 빠졌으므로 준경은 다시 왕비 심씨에게 후사를 강청하였다. 왕비도 할 수 없이 덕흥군(德興君) 제3자 하성군(河城君) 균(鈞)의 이름을 書下(서하)하였다.

 

하성군 균은 선조의 잠저(潛邸) 칭호이고 선조가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할 것은 이때부터 예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명종의 병환이 점차 회복되어 준경이 왕비에게 후사를 강청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다시는 후사에 대하여 언급 말라고 엄명하였다.

 

그래서 후사문제는 곧 정침(停寢)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후 수년을 지나도 명종은 도무지 자녀를 낳지 못하므로 준경은 다시 여러 번 왕에게 미리 후사를 정하자고 청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의연히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오히려 준경을 싫어하였다. 그래서 준경은 일시 사직하였다가 중망에 의하여 다시 취직한 일까지 있었다.

 

이와 같이 명종은 후사를 정하지 아니하고 22년 6월 28일 밤에 승하하였는데 이날 밤 준경은 69세의 노령으로 자정까지 정부에 유대(留待)하다가 왕의 병세가 급하다는 기별을 듣고 곧 왕의 침실로 들어가서 또다시 후사를 청하였으나 이미 늦었던 것이다. 그래서 준경은 할 수 없이 왕비 심씨에게 청하여 곧 선조를 사직동 잠저로부터 모셔다가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이때 명종이 후사를 정하지 아니하고 승하하였으므로 혹 무슨 변이나 일어나지 아니할까 하여 상하의 인심이 매우 흉흉하였으나 아무 일 없이 선조를 봉영한 것은 전혀 수상 이준경의 덕망이 높았던 까닭이다.

 

이때 마침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과 위량(魏亮)이 목종황제극조서(穆宗皇帝極詔書)를 가지고 평안북도 嘉山(가산)에 이르러 국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내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전진하지 아니하고 통역관 홍순언(洪純彦)에게 수상의 인물 여하를 물었다.

순언은 곧 수상 이준경은 국인이 모두 신뢰하는 현상(賢相)이라고 대답함에 다소 안심하는 빛을 보였으나 그래도 먼저 그 부하를 경성으로 보내서 사변 유무를 정탐한 후에 입경하였다. 그들이 경성에 들어와서 수상 이준경이 위풍이 늠름하며 국사가 모두 정돈되어 있음을 보고 크게 탄복하여 떠날 때에 준경에게 재배하고 귀국한 후에도 조선 사신을 만나면 반드시 준경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이 한 가지 사실로 우리는 준경의 인격이 얼마나 숭고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선조 즉위 이후 준경은 선조를 보좌하여 기묘사류 조광조를 신원증작(伸寃贈爵)하고 을사사화로 억울하게 수십 년 동안 적거(謫居)한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 명사 수십 명을 방환서용(放還敍用)하고 이어서 을사사화 피죄인(被罪人) 전체에 대하여 신원하고 기타 윤원형 등으로 인하여 잘못된 서정을 쇄신하는 등 선조 초정(初政)을 매우 빛나게 하였으나 신진 사류들과 뜻이 맞지 아니하여 비난과 공격이 심하였다. 준경이 신진 사류와 뜻이 맞지 않은 것은 당시 신진들이 너무 교격(嬌激)하여 선배와 구신(舊臣)을 무시한 까닭이며, 그중에 가장 뜻이 맞지 않은 것은 신진의 영수이던 유명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율곡 이이의 두 사람이며 이들과 서로 정면 충돌하기는 선조 2년 2월에 인종을 문소전(文昭殿)에 부사할 때부터이다.

 

문소전은 세종께서 창설한 것으로 태조와 시왕(時王)의 4조(四祖;고조, 증조, 조, 부)만을 향사(享祀)하는 곳인데 그 제도를 여기에 다 말할 수 없으나, 명종 때에 인종을 부사하려고 하다가 세조(명종의 고조) 때문에 부사할 자리가 없어서 논의가 분분하던 중 이기와 윤원형이 인종은 임금질을 1년도 못 하였으니 문소전에 부사하지 아니하여도 좋다 하고 따로 연은전(延恩殿)에 부사하였다. 그래서 일국 신민들은 모두 분통히 여겼는데 이때 마침 명종을 문소전에 부사하게 됨에 기대승 등 신진 사류들이 문소전 제도를 고쳐서 인종마저 부사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준경은 문소전제도를 고치는 것은 세종 유교(遺敎)에 위반되는 것이므로 그대로 두자고 하였다. 이에 기대승 등은 준경을 공격하여 을사 권간(權奸) 이기들과 조금도 다름없다고까지 말하였다. 그후 준경은 상소 자명하고 문소전 제도를 고친 후에 인종까지 부사하였으나 이로부터 기대승과 매우 좋지 못하게 지냈으며 준경이 김개(金鎧)사건으로 대승을 공격함에 이르러 더욱 좋지 못하게 되었다.

 

김개는 구신으로 매우 청간(淸簡)한 사람이나 기묘사화에 대한 시비를 다른 사람과 달리하여 조광조 일파의 옳지 못함을 주장하였으며 또 이때의 신진 사류들이 선배를 멸시하고 고담준론으로 세도를 만회하려고 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선조 2년 6월 9일에 경연에 입시하여 기묘사류의 잘못된 점을 말하고 지금 사류도 기묘사류와 같이 망담한다고 왕에게 진언하였다. 경연이 끝난 후에 승지 기대승, 심의겸(沈義謙)들이 이 말을 듣고 곧 왕에게 면대를 청하여 김개의 말은 사류를 일망타진하기 위하여 우선 임금의 뜻을 시험한 것이라 하고 곧 관작을 박탈하여 문외(門外)에 출송(黜送)하였다.

 

국제(國制)에 승지의 임무는 왕언을 출납할 따름이요 인물의 탄핵은 하지 못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므로 그후 어떤 날 준경이 경연에 입시하여 대승들이 일개 김개로 인하여 국가의 체통을 무시하고 월직(越職) 행동을 한 잘못을 공격하였다. 이때 이이가 곁에 있다가 말만 옳으면 반드시 체통을 지킬 필요가 없다 하여 준경의 말을 꺾어 버리고 대승을 두호하였다. 그러나 대승은 준경으로 인하여 벼슬을 버리고 나주에 퇴귀하여 준경을 詆毁(저훼)2)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2) 詆毁(저훼): 헐뜯음.

 

이와 같이 준경은 신진 사류들과 서로 좋지 못하게 지냈으므로 일부 경박한 사류간에는 준경이 사류를 일망타진하려고 한다는 풍설까지 떠돌게 되었다. 그러나 준경이 사류를 모해하려는 생각이 없었음은 물론, 당시 신진 사류들이 기묘사류와 마찬가지로 너무 망자존대(妄自尊大)하여 선비와 구신을 무시하고 서로 붕당을 만들어 조금만 자기들 뜻에 맞지 아니하면 고담준론으로 배격하여 마지 아니하므로 준경은 이와 같은 사습(士習)를 교정시키기 위하여 방헌(邦憲)과 체통을 준수하면서 그들을 억제하려다가 도리어 사류들에게 배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선조 4년 5월에 영의정을 사면하고 5년 7월 7일에 74세로 서거하였는데 임종시에 선조께 유답(遺剳)을 올려서 붕당을 타파하라고 공간(攻諫)하였다. 선조는 이 유답을 보고 조정에 붕당이 있는 줄 알고 크게 놀라 대신들을 불러놓고 화해시키라고 명하였다. 이에 신진 사류들은 조정에 붕당이 없음을 변명하고 준경을 공격하여 그 관작을 박탈하자고까지 하였다. 그중에도 가장 공격한 이는 율곡 이이로서 그는 선조가 준경의 유답으로 사류를 의심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독소(獨疏)를 올려서 여지없이 준경을 훼척하였다.

그러나 수년 후 동서 당쟁이 생겨서 영원히 국가를 좀먹게 하였으니 준경의 유답이야말로 시병(時病)을 적중한 격언이었다.

 

요컨대 준경은 만년에 신진들과 뜻이 맞지 아니하여 비난과 공격이 심하였으나 4조를 역사(歷仕)한 원로 중신으로 국가 위의지제(危疑之際)에 선조를 추대한 공은 사직(社稷)에 높았으며 그의 청덕(淸德)은 일세에 으뜸이었으니 그 하나 둘의 예를 들면 선조 원년에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하였을 때에 그는 궤장연(几杖宴)을 폐하여 연자(宴資)를 열읍(列邑)에 구청(求請)하던 당시의 폐풍을 없앴으며 선조 2년에 의정부에서 홍문록(弘文錄) 즉 옥당 관원될 사람을 선택할 때에 그의 아들 덕열(德悅)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표)이 많은 것을 보고 내 아들은 홍문록에 입선할 인물이 되지 못한다 하고 덕열의 권점을 모두 삭제해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그 권점을 가하여 당시의 한 미담이 되었다.

이와 같이 준경은 일평생 사(私)를 위하여 공(公)을 해하여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서거한 후에 충정(忠正)이란 시호를 받고 선조가 승하한 후에 선조 묘정의 배향공신으로 선정되어 그의 영령은 지금까지 종묘에 배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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