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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조선-서경덕(徐敬德)

구글서생 2023. 5. 14.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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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서경덕(徐敬德)

 

황의돈(黃義敦)
1891~1969. 사학자. 충남 생. 어릴 때 한학을 수학. 평양 대성학교, 휘문의숙, 보성고보교원을 거쳐 조선일보 사원, 문교부 편수관, 동국대 교수 역임. 
저서에 「신편조선역사(新編朝鮮歷史)」, 「중등조선역사」등이 있음.

 

 

1. 선생의 탄생과 유년시대

 

선생의 성은 서(徐), 휘는 경덕(敬德)이요, 관(貫)은 당성(唐城)이며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요 송도 동문 밖 화담(花潭) 위에 은거 수도하므로 세인이 화담선생이라 지칭하였다. 이조 성종 20년(기유) 거금 451년 전 2월 17일로, 조선문화의 개척자인 화담선생은 500년 문화적 고도(故都)로서 성거산(聖居山)이 높고 화계수(花溪水)가 맑은 송도 화정리(禾井里), 침묵한 전사(舍) 일우(一隅)에서 고고의 성을 들렸다.

 

때는 마침 이조 문화의 원숙시대인 성종대왕의 재위 중이며 조정암의 탄생 후 8년, 이퇴계의 탄생 전 13년, 이율곡의 출세 전 48년이요, 지나 철인 설경헌(薛敬軒;瓊)의 졸후 25년, 진백사(陳白沙;獻章)의 몰세(沒世) 전 11년, 나정암(羅整菴;欽順)의 출생 후 24년, 왕양명(王陽明;守仁)의 탄생 후 17년이며 서양 철인의 지동설 창도자 코페르니쿠스의 출생 후 17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전 3년,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 전 28년으로서, 조선에서는 이조 문화의 원숙시대요 지나에서는 명조 문화의 극성시기며 산동(山東;薛派), 여요(餘姚;王派) 양대 학파의 논전시대요, 서양에서는 계몽운동의 단서가 새로 열리던 때이다. 세계의 규운(奎運)1)이 일시에 환개(煥開)하고 동서의 철인이 동시에 배출케 됨은 또한 희귀하다 할 만하다.

1) 규운(奎運):문운. 문예의 발달.

 

선생의 가정은 미미한 향사부가(鄕士夫家)로서 풍덕(豊德)에 세거(世居)하다가 선생의 외가를 따라 송경(松京)으로 천이(遷移)하였었다.

선생의 증조는 득부(得富), 조는 순경(順卿), 부는 호번(好蕃), 모는 한씨로서 선생과 같은 영준(英俊)의 후손을 둘 만한 업인(業因)으로 적덕종인(積德種仁)하기 누세(累世)였었다. 더구나 선생의 엄부는 근엄 정직키로, 선생의 모부인은 온순자정(溫順慈貞)키로 사린의 숭앙을 받았었다. 醴泉2)이 어찌 근원이 없으며 영지(靈芝)가 어찌 뿌리가 없으랴. 선생의 천자가 아무리 생지(生知)일지라도 근엄한 엄부의 훈도하에서 자정한 모부인의 회중에서 그의 순결무구한 양성(良性)을 보육(保育)하고 수명통철(粹明通澈)한 천자(天姿)를 옥성(玉成)하였었다.

2) 예천(醴): 단맛이 나는 물이 솟는 샘.

 

그래서 선생의 6,7세 때에 벌써 총명영예(聰明英睿)하고 강의정직(剛毅正直)하며 장자(長者)의 교훈에 선종(善從)하고 물리 연구에 孜孜하였었다. 그의 가정은 원래 청빈여세(淸貧如洗)하므로 6,7세 때에 생애의 보조로 전간(田間)의 소채를 채취하다가 종지리조(從地理鳥)3)의 매일 1척 1촌씩 점진적으로 비상함을 보고 침사묵념(沈思默念)하기 수일에 마침내 그가 지기(地氣)의 화난(和暖)함을 좇아 날로 비양(飛揚)됨의 원리를 각오(覺寤)하였다.

3)종지리조(從地理鳥):종달새.

 

아, 기마(驥馬)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천리의 치빙(驅驛)함을 몽상하고 학추(鶴雛)가 아무리 미소하더라도 9고(九皐)의 울음을 화응하도다. 장래에 철인이 될 만한 선생의 천재는 유년시대에도 종종 표현됨이 이러하였다. 선생이 14세 때에 향촌학구(鄕村學究)에게 상서(尙書) 기삼백(朞三百)편을 수학하다가 학구가 그 원리를 석명(釋明)치 못하므로 선생은 퇴귀하여 정사심려(精思深慮)하기 15일에 그의 조리를 통오(洞寤)하고 이로부터 여하한 사리라도 구득(究得)할 만한 자신이 확립하여 연구의 보무를 전진하였었다.

 

 

2. 선생의 수양시대

 

아, 오인의 운명은 아무리 길더라도 그의 결정은 찰나의 감격으로부터 되고 마는 것이다. 석가세존은 가비라성(迦毘羅城)문 밖 신비적 감격으로부터 3계의 구주(救主)가 되고 원효는 심법생멸저화두(心法生滅底話頭)의 감격으로 법계의 대위인이 되었었다.

선생의 생애도 또한 아무리 천재를 품수(享受)하였더라도 비상의 감격적 충동이 없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선생의 18세 때에 「대학」을 통독하다가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4)장에 이르러 개연히 탄식하고 창연히 낙루하였다. 이 찰나 동안 선생의 가슴에는 무엇이 돌격하고 선생의 신경에는 무엇이 자극하는 듯하였다.

4)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앎에 이르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있다.

 

“아 사람이 되어서 우주의 진리 그를 각오치 못하고야 사람이며 사자(士子)가 되어서 그를 격구(格究)치 못하고야 글을 읽어 무엇하랴?”

하면서 이로부터 크게 발분하여 천지 만물의 명칭을 벽 위에 열서(列書)하고 날마다 그를 궁구하기에 거의 폐침망반(廢寢忘飯)케 되었었다. 이가 선생의 진리적 생애에 투입하는 최선의 경로요 최초의 감격적 충동으로서 선생의 40년간 장세월의 전도는 이로부터 지배되고 선생의 천추 불멸의 대사상은 이로부터 방광(放光)되기 시작하였었다.

 

선생의 미우(眉宇)가 헌앙(軒昂)하고 선생의 안목이 서성(曙星) 같으며 선생의 총명이 절속(絶俗)하고 선생의 강의가 과인하셨다. 선생은 이같은 비범의 천자로서 ‘문자상철우(蚊子上鐵牛)'5)적 지성과 '침선파부중(沈船破釜甑)’6)적 최후의 용공(用工)을 겸하였었다.

5)문자상철우(蚊子上鐵牛):모기가 쇠로 만든 소에게 덤빔.

6)침선파부증(沈船破釜甑):솥과 시루를 깨뜨려 다시는 밥을 짓지 않고 배를 가라앉혀 강을 건너 환국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곧 결사적으로 일에 임함을 이름.

 

선생이 이로부터 폐문궤좌(閉門跪坐)하여 정사역구(精思力究)하기 수십 년간에 왕왕히 시공을 초월하고 침식을 망각하였었다. 더구나 적빈여세한 선생의 가정에서는 6,7일간 절화(絶火)도 하였으며 사색에 전력하는 선생의 정신에는 10여 일간 면수(眠睡)도 사절하였었다. 마는 춘풍화우(春風和雨)의 선생의 안상(顔上)에는 일편의 암영이 없었고 광풍제월(光風霽月)7)인 선생의 흉금에는 일도(一道)의 광명이 비쳤었다.

7)광풍제월(光風霽月):도량이 넓고 시원함.

 

진리의 즐거움과 자연의 기쁨에 취하고 묻힌 선생의 눈에는 영욕이 둔망(頓忘)되고 부귀를 부운시(浮雲視)하였다. 그래서 중종 14년(선생이 31세 때 기묘) 조광조 혁운동(革運動) 때에 선생이 현량과(賢良科)에 수천(首薦)이 되었으나 선생은 그를 쾌연히 사절하고 말았었다.

 

선생의 용공이 너무 과혹(過酷)하므로 선생과 같은 건강한 신체와 강고한 두뇌로도 마침내 기혈(氣血)이 울결(鬱結)하고 신경이 쇠약하여 일시에는 고경(苦境)과 비운에 빠졌었다. 그래서 선생은 34세 때에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키 위하여 명산대천에 여류(旅遊)의 길을 떠났다. 그래서 금강, 속리, 지리 등 명산에 주류하였었다. 선생은 원래 자연을 최애(最愛)하므로 명산승지(名山勝地)를 만날 제마다 호흥(豪興)을 못내 이겨 글짓고 노래하고 춤추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그의 〈금강산시〉에는

“금강산이 뛰어나단 말 듣고

20년이나 안타까운 뜻을 품어왔네

이제 와 보니 맑은 경치 좋은데

하물며 가을하늘까지 보탬이랴

 

시내의 국화 향기 처음 진동하고

바위의 단풍은 붉게 타려고 하네

숲의 골짜기 깊음을 읊으니

마음도 또한 숙연해지는구나”8)

라 하여 금강의 자연을 찬미하였다.

8)“聞說金剛勝 空懷二十年 旣來淸景地 況値好秋天 溪菊香初動 巖楓紅欲燃 行吟林壑底 心盧覺蕭然

 

선생이 여행한 지 1년 만에 정신의 총명과 육체의 건강이 쾌복(快復)되므로 이에 학문에 전력하였었다.

 

 

3. 선생의 老成시대

 

선생이 43세 때에 모부인의 명령으로 과장(科場)에 부거(赴擧)하여 성균생원을 마쳤으나 또한 부귀가 그의 소지(素志)가 아니므로 다시 홍진에 염신(染身)치 않았고 56세 때에 후릉참봉(厚陵參奉)의 배명을 받았으나 또한 고사불취(固辭不就)하고 마침내 청산이 아아(峨峨)하고 녹수가 양양한 화담 서사정반(逝斯亭畔)에서 미록의 벗, 원학(猿鶴)의 짝으로 진리의 꿈을 꾸고 자연의 춤을 추면서 소요부(邵堯夫), 장횡거(張橫渠) 등의 고인을 추모하고 박화숙(朴和叔;淳), 허태휘(許太輝;曄) 배(輩)의 후진을 교도하였다.

 

“밥을 짓지 못한 지 이틀인데 하루종일 정자에 앉아 의논하였어도 용모에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라 함은 이석담(李石潭)의 기록이요

“이끼가 솥에 가득 끼었으나 거문고를 뜯으며 높게 읊는다.”

라 함은 허초당(許草堂)의 찬탄이며

“당년에 그를 얻어 뵐 수 있는 것은 10년의 독서보다도 낫다.”

라 함은 이퇴계의 추모요

“송도의 3절 중에 선생이 으뜸이다.”

라 함은 황진이의 흠앙이며

“당일의 독서로 경륜에 뜻을 두고

한 해가 저무니 안연의 가난함이 달구나

부귀는 다툼이 있어 하수(下手)가 되기 어려우나

숲속의 샘물은 금함이 없으니 몸이 편안하구나

나무 베고 낚시하여 배를 채우고

음풍영월은 정신을 채울 만하구나

배움이 이르러 의심 없음이 정말로 쾌활하니

백년의 인생에게 헛된 가르침을 면하련다

 

하늘 가운데 서서 부끄럼 없고

즐겨 맑고 온화한 경지에 들어간다

내 마음 높은 벼슬에 있지 않고

본디 삼림에 있는 뜻을 따르련다

진실로 밝은 일은 칼날을 품었고

현묘한 기관은 채찍맞기 좋아한다

경(敬)의 공부는 천지신명을 대한 듯하니

창에 가득한 풍월은 스스로 유연하도다”9)

라 함은 선생의 자도(自道)요 자찬한 바이다.

9)“讀書當日志經綸 歲暮還甘顏氏貧 富貴有爭難下手 林泉無禁可安身 採山釣水堪充腹 詠月吟風足暢神 學到不疑真快活 免教虚作百年人

將身無愧立中天 興入清和境界邊 不是吾心簿卿相 從來素志在林泉 誠明事業恢遊 玄妙機關好着鞭 主敬工夫方對越 滿窓風月自悠然

 

이 어찌 낙천지명적(樂天知命的) 군자인이 아니며 안심입명적(安心立命的) 인생관을 자각함이 아니냐? 아! 선생의 안한자득(安閒自得)한 기상과 소쇄청정(蕭灑淸淨)한 신운(神韻)은 천고의 후인을 기경(起警)케 하도다.

 

선생의 도덕이 더욱 원숙하고 선생의 학문이 더욱 노성하매 이에 56세의 퇴령(頹齡)으로 수십 년래에 함축온저(含蓄蘊貯)10)한 자각의 진리를 토하여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의 4편으로 선생의 주뇌적(主腦的) 사상인 기적일원론(氣的一元論)과 물질불멸론(物質不滅論)을 서술하시고 성음해(聲音解), 황극경세수해(皇極經世數解), 괘도해(卦圖解), 괘변해(卦變解) 등 편으로 희역소학(犧易邵學)을 조술(祖述)하여 선생의 독특의 소장(所長)인 수리학(數理學)으로 우주 변화의 상수(象數)를 해석하셨다.

10) 함축온저(含蓄蘊貯):쌓아 놓음.

 

 

인자필수(仁者必壽)11)의 원칙을 준수치 않는 무심의 창천은 마침내 선생의 하수(遐壽)12)를 허락치 않았다.

11) 인자필수(仁者必壽):인자는 반드시 장수한다. 논어에 나옴.

12) 하수(遐壽): 장수.

 

그래서 58세를 일기로 마치고 명종대왕 원년(병오) 일기로 394년 전 7월 7일에 완이미소(莞爾微笑) 중에서 현세를 고별하셨다.

 

아, ‘철인이 쇠하고 태산이 무너짐(哲人萎矣 泰山頹矣)’이로다. 님 잃은 성거모운(聖居暮雲)은 천고에 원한이 사무치고 주인 없는 화담서파(花潭逝波)는 지금도 오열하도다. 마는 선생은 갔더라도 선생의 정신은 남아 있고 선생의 육체적 생명은 58년의 단시일로 마쳤더라도 선생의 진리적 사상은 천만 년에 무궁하리로다. 이로부터 선생의 표상적 생애의 서술을 마치고 선생의 사상적 방면을 설명코자 하노라.

 

 

4. 선생 이전의 지나 유교사상 발전의 경개

 

선생은 물론 철학가요 유가이다. 유가 중에도 심수(深邃)하고 예리한 독창적 철학자요, 철학가 중에도 온건하고 착실한 유교적 사상가이다. 유교가 그의 생애요 유교적 사상이 그의 생명이며 광채이다. 누구이든지 선생의 생애, 곧 선생의 역사를 설명하려면 물론 선생의 실제적 생애보다는 선생의 사상적 방면에 치중치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도 또한 선생의 사상적 방면, 곧 선생의 유교철학적 개념에 치중치 아니할 수 없는 동시에 그의 유래와 원천으로써 선생의 사상상에 중대한 관계와 연락이 있는 지나 유교사상의 사적 발전의 상황을 먼저 서술치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아니면 곧 선생의 사상을 설명키 곤란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그의 경개를 설명코자 하는 바이다.

 

윤리중심적 사상은 물론 지나인의 특색이요 지나 사상의 중심문제며 더구나 유교의 강령이요 주의이다. 그러므로 그네는 모두 만반의 사위(事爲)를 윤리적 입장으로부터 해결코자 하였다.

 

정치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답다(君君臣臣父父子子)”13)의 이상국을 몽상하였고

처세로는

“효는 백 가지 행동의 근본(孝者百行之源)”

을 부르짖었고

철학으로는

“성선 성악(性善性惡)”

이 그네의 중심적 계쟁문제(係爭問題)로서,

“하늘에서 내린 명령을 가리켜 성(性)이라 한다(天命之謂性)”

가 그네의 구경적(究竟的) 극점이요 발단적 초보이다.

13) 유교의 정명(正名)사상, 즉 이름과 실제가 상부(相符)하여야 한다는 사상으로 유교사상을 이루는 근간의 하나이다. '군군' 등에서 앞의 군()은 이름이고 뒤의 군은 실제를 뜻한다.

 

바로 말하면 유교의 원시시대, 곧 그의 교조인 중니(仲尼)14)는 차라리 이상적 방면을 등기(等棄)하고 실제적 방면 곧 실천적 윤리를 전주(專主)하였었다.

14) 중니(仲尼): 공자의 자().

 

그래서

“명과 인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시다(罕言命與仁)”

하시며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

하며

“사람 섬기는 일도 알지 못하는데 이찌 귀신 섬김을 알겠는가(未知事人焉知事鬼)”

하여 현실 이외의 사색을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성문(聖門)의 고제(高弟)인 자공(子貢)으로도

“공자께서 성과 천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얻어 들을 수 없었다(夫子之言性與天道不可得而聞)”

라 개탄하였었다.

바로 말하면 중니의 주장은 현실적 생애에 몰두한 우리 인생으로서는 현실 이외 곧 공막(空漠)한 이상적 방면에는 넘겨다볼 필요가 없음을 언명하였다.

 

그러나 오인의 지식적 요구의 충동은 원리적 설명이 없는 신조하에서 맹종함을 허락치 아니할 뿐 아니라 당시에 양자강 유역에서 만장 기염(萬丈氣焰)을 토하던 남지나적 문화, 곧 노장열양(老莊列楊)15) 배의 현오(玄奧)한 이상적 학설이 거세(擧世)를 풍미하는 동시에 이상적 입각이 박약한 유교의 생명이 좇아 위구(危俱)케 되었었다.

15) 노장열양(老莊列楊):노자, 장자, 열자, 양주 등 도가 계통의 사상가들.

 

그러므로 그를 대항키 위하여는 상당한 윤리적 이상 곧 유교적 철학을 건설치 아니하여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자사(子思)는

‘하늘에서 내린 명령을 가리켜 성(性)이라 한다(天命之謂性)’

을 수창(首唱)하여 유교철학의 단서를 계발하였고 맹자는 성선(性善), 순자는 성악(性惡)설을 주장하여 윤리의 기초적 사상을 수립하려 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다 유교철학의 원시적 맹아시대에 단편적 발견으로서 조직이 없고 연락(聯絡)이 없고 통(統)이 없고 통일이 없었다. 더구나 진·한(秦漢) 이후 1,500년간에는 유교의 침쇠 암흑시대(沈衰暗黑時代)로서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휘한 자가 없었다. 동씨(董氏;仲舒)의 도원설(道原說)은 소략에 기울고 양씨(楊氏;雄)의 태현경(太玄經)은 노장(老莊)에 흐르고 왕씨(王氏;通)의 집중설(執中說)은 피상에 그쳤을 뿐 물론 이상적 유학자가 없었다.

 

동한시대(東漢時代)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불교, 곧 현오신비(玄奧神祕)한 인도적 사상이 도도홍수(滔滔洪水)와 같이 일사천리의 급조적(急潮的) 세력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고 말래카를 돌아 지나대륙을 풍미하면서 재래에 입각이 공고치 못하던 지나적 문화사상을 유린케 되었다.

바로 말하면 유교의 운명이 위기일발에 있었다. 그러므로 장융(張融), 주우, 진희이(陳希夷) 배의 삼교일치론(三敎一致論), 곧 지나·인도 양대 사조의 조화적 운동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곧 반응이 없고 공적이 없고 마침내 실패에 돌아갈 뿐이었었다.

 

이에 송조(宋朝)에 이르러 그의 반동으로 주염계(周濂溪;敦頤), 소강절(邵康節;雍), 정명도(程明道;顥), 정이천(程伊川;頤), 장횡거(張橫渠;載) 등 여러 철인이 계출하여 유교의 사상을 일층 조직적으로 건설하고 유교의 입장을 일층 선명케 하여 불교사상을 대항하였고, 더우기 대철인 주회암(朱晦庵;熹), 육상산(陸象山 九淵)이 병기하여 그를 집대성하매 이에 유교의 세력이 아연히 은성(殷盛)하여 동아 사상계에 패권을 장악케 되니 이에 순차로 송유(宋儒)의 사상의 경개를 설명코자 하는 바이다.

 

물론 유가의 주안은 윤리이다. 그러므로 그의 철학적 사상도 윤리적 입장에서 출발하였었다. 그래서 그의 결과는 본체론(本體論)에 그치고 말았다. 물론 인식론이나 미학의 범위에서는 몽상에도 미치지 못하였었다. 더구나 그의 내용은 독단론으로서 우주의 실재를 맹목적으로 긍정하고 오인의 각오를 대담적으로 시인하였다. 20세기 철학적 사조에 비교하면 물론 그의 내용이 유치하고 그의 범위가 협소함은 말할 것도 없다. 마는 본론의 범위는 유가의 사상을 현대적으로 비평코자 함이 아니요 유가사상 그의 사적 발전의 상태를 그대로 소개하여 화담 선생의 사상의 원류를 탐구하려 함이므로 시비정부(是非正否)를 물론하고 유가사상의 중심문제인 본체론 윤리설을 그대로 소개하려 한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면 본론의 주제인 화담 선생의 학설로 후세에 유전됨은 유교사상에도 본체론의 일부뿐으로서 윤리적 사조를 규견(鏡見)할 만한 선생의 유저도 무엇도 후세에 끼침이 없다. 선생의 사상 중 유일무이한 본체론을 소개코자 하는 저자는 차라리 지나 유교사상 중의 본체론의 일부를 서술코자 한다.

 

송유의 사상은 유교를 옹호하고 선·불(仙佛) 양교의 배척을 주장하였으나 기실은 선·불 양가 사상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바로 말하면 선·불 양자의 사상을 흡수하여 환골탈태적(換骨奪胎的)으로 유교철학을 조직하였다. 그러므로 주염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아무리 유가사상의 근저인 역학(易學)의 표면으로 장식하였더라도 그의 내용은 불가의 진여론(眞如論), 선가의 태일설(太一)의 영향을 받음이 적지 아니한 듯하다. 일보를 전진하여 말하면 3교일치론자인 진희이의 무극(無極圖)를 참작함은 사증(史證)에도 소연한 바이다. 더구나 육상산의 유심론(唯心論)은 유교적 표면에 불교적 골자로 채웠다.

 

주염계의 태극설은 일원적 태극 아래에서 양동음정(陽動陰靜)의 2대 세력으로 우주의 발작 변화(發作變化)됨을 설명하였고 소강절의 선천학(先天學)은 일원적 선천이 동일의 기하학적 변화의 법칙으로 자연과 자아를 지배함을 주장하였으나 염계의 태극과 강절의 선천은 혼륜주잡(混淪周雜)16)한 명제로서 아직 이기(理氣) 곧 심물(心物) 양자의 분석적 계경(界境)이 명확치 못한 동시에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아파이론'설과 유사한 원시기의 미진보한 본체론인 듯하다.

16) 혼륜주잡(混淪周雜):()와 기()가 분화되지 않고 섞여 있는 상태.

 

그에서 한번 전진하여 장횡거는 태허론으로 우주 발전의 원천이 기적(氣的) 일원에 있음을 주장하고, 정명도는 2기교감론(二氣交感論)을 주장하여 우주의 생멸 변화가 음양 2기의 동정승침(動靜升沈)에 전재(專在)함을 언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 유기론(唯氣論), 곧 유물론으로서 우주의 존재와 발작을 유물론적 방면으로만 관찰하였다. 그러므로 그에 불만적 반동사상을 포함한 정이천은 일보를 전진하여 이기(理氣) 2원, 곧 심물 양원론(心物兩元論)의 단서를 계발하였다.

“음양의 소이(所以)는 도(道)이며, 음양은 기(氣)이다. 그러니 곧 기는 형이하자(形而下者)이며 도는 곧 형이상자(形而上者)이다.”

라 하여 도여기(道與氣), 곧 이여기(理與氣) 양자로 우주의 존재를 해석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아직도 단순몽롱한 이기 양원론으로서 설명이 부족하였었다. 바로 말하면 그는 장래 주회암의 2원론을 계발할 만한 전도적 사상에 불과하였다. 곧 정이천의 몽롱한 2원론은 주회암의 설명을 기대하여서야 조직적으로 창명(彰明)이 되었다.

 

주회암은

“이(理)와 기(氣)는 결단코 일물(一物)이 아니다. 다만 사물에서 보면 두 가지가 혼합되어 나뉘어짐이 없는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둘은 2물이 됨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만일 이에서 보면 비록 사물에는 존재치 않으나 이미 사물의 이치가 갖추어지면 다만 이가 있을 뿐이요 실제로 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라 하여 이기 양자를 판연히 구분하였고

“이와 기는 본래 선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좇아 나오는 바를 미루어보면 이가 앞이고 기가 뒤이다.”

라 하여 이기의 상상적 선후를 말하면서

“이는 별물(別物)이 아니다. 기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기가 없으면 이도 또한 걸려 있을 곳이 없다.”

라 하여

‘하나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壹而二, 二而壹)’

라는 설명을 주도(周到)케 하며

“기는 막히고, 맺고, 조작할 수 있다. 이는 정의(情意)도 없으며, 헤아릴 수도 없고, 조작할 수도 없다. 다만 기가 막히고 모이는 곳에 이가 문득 그 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라 하여 이기 양자의 성질의 이점(異點)을 설명하여 이천의 몽롱한 이기설을 명확히 설명하고

“태극은 단지 이 하나이다.”

라 하여 염계의 몽롱한 태극설을 석명(釋明)하여

“이가 있으면 문득 기가 있다.”

라 하여 이기 2원론의 기치를 선명하게 수립하였다.

 

송유의 학설도 이에 이르러 조직이 완성되었다 할 만하다. 그러나 그네의 사상이 아직도 단순하여 장·정(張程)의 기원론(氣元論)은 이의 위치, 곧 이기(심물)의 관계적 한계와 성질을 명확히 설명치 못하였으며 더구나 그의 불멸성(물질 불멸)을 오득치 못하였고 정주(程朱)의 이기 양원론은 연기(緣起)의 방편적 설명이 없었으며 더구나 그 양원론 자체가 왕왕히 서양에서도 인도에서도(스피노자의 사상, 僧 기야파의 사상) 보는 바와 같이 철학사상에 중세기 미진보한 사상이다. 그의 결점은 마침내 조선의 철인 화담, 퇴계, 율곡, 노사(蘆沙) 여러 선생의 손을 경과하여서야 보충이 되고 완성이 되었다.

 

 

5. 선생 이전의 조선유교 발전의 경개

 

원시적 유교의 수입은 삼국시대 초부터 된 듯하다. 사증(史證)의 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임신)에 태학을 설립하고 자제를 교육하였다 하며 백제 고이왕 52년(병오)에 백제인 왕인(王仁)이 논어와 효경을 가지고 동도(東渡)하였다 한다. 그리고 신라 진평왕 이후로는 삼국 전쟁에 당인(唐人)의 원조를 얻기 위하여 나인(羅人)이 자주 지나에 왕래하는 동안에 지나의 유불 양교의 사상을 크게 수입하면서 불교에서는 원효, 유교에서는 설총, 양대 위인이 계출하였었다. 그래서 설총은 방언으로 9경을 해석하여 유교사상을 크게 고취하였으며 지나 유학생이 배출됨을 따라 유교의 수입됨이 적지 않았었다. 그러나 당시에 전상(專尙)하던 불교사상의 박해로 인하여 그가 크게 발전되지 못하였다.

 

고려 400년간에도 불교가 전성하므로 김양감(金良鑑), 최충(崔沖) 등 약간의 석유(碩儒)가 간출(間出)하여 그를 고취하였으나 또한 미미 부진하였었다. 그 말엽 충렬·충선왕 때에 원국과의 교통이 빈번함을 따라 지나 유교사상이 다시 수입되면서 안문성(安文成;裕)은 그의 재흥운동에 전력하였고 우역동(禹易東;悼), 윤언이(尹彦頤)는 역학을 전공하고 백이재(白彝齋;頤正)는 정주의 학설을 수입하며 권국재(權菊齋;溥), 박충좌(朴忠佐)는 그를 간행하여 전국에 보급케 하고 이익재(李益齋;齊賢), 이목은(李牧隱:穡)은 그를 계속적으로 수입 선전하며 정포은(鄭圃隱;夢周), 길야은(吉冶隱;再), 권양촌(權陽村;近) 배는 그를 연구하고 해석하여 크게 고취하매 부패한 불교에 염퇴(厭退)된 인심이 크게 향응하여 유풍(儒風)이 대진(大振)하였었다.

 

이조 초년에도 그의 여풍이 대진하며 이조의 정략이 또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배양하므로 인심이 크게 풍미하는 중에 위에서는 세종 성종과 같은 성군이 그를 장려하고 아래에서는 김점필재(金宗直), 김한훤(金宏弼), 조정암 같은 대유가 속출하여 그를 고취하였으므로 유교사상이 전사회에 협흡(浹洽)17)하였었다.

17) 협흡(浹拾): 널리 전하여짐. 도리가 마음속에 깊이 스며듦.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문화를 물론하고 남의 사상, 남의 문화를 수입하려면 적어도 백 년 동안의 전력이 아니면 그를 소화하고 그를 조작하여 자가적 문화를 환성(換成)치 못하는 법이다. 곧 우리의 유교사도 그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하였었다. 여말부터 이조 초까지 약 100여 년간은 순전한 지나사상의 수입시대로서 그를 연구하고 해석함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바로 말하면 정포은, 김점필재, 조정암 등 선배를 아무리 석학이라 숭배하더라도 그네는 곧 지나사상을 지나사상대로, 지나식 유교를 지나식 유교대로 전탄(全呑)하였었다. 그네의 사상은 조선의 사상이 아니요, 그네의 유교는 조선화의 유교가 아니었다. 해석적이요 인습적이며, 창조적이 아니요, 개척적이 아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면 그네는 장래의 창조자 개척자의 선구로서 길을 열고 터를 닦음에 지나지 못하였었다. 정말 조선화적 사상, 조선화적 유가로서 창조자요 개척자가 된 이는 화담선생이 처음이다. 그가 개척자의 최선봉으로서 퇴계, 율곡, 노사 등 모든 계승자도 그의 뒤를 잇달아 배출하였다.

 

 

6. 선생의 유물론

 

선생의 사상을 설명하려면 먼저 유교철학의 중심문제인 이기(理氣)가 그 무엇인가 함에 의문을 해결치 않아서는 안 되겠다. 곧 이기 양자를 현대적으로 해석치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그도 물론 시대와 학자를 따라 그의 내용의 차이점이 얼마간 없지 않지마는 정주나 퇴·율(退栗)의 설명한 바를 종합하여 보면 이(理)라 함은 물론 측면적 이유가 아니라 곧 정면적 실재로서 영(靈), 곧 물질의 반면인 심령인 듯하다.

“하늘에 있는 것은 이요 사람에게 있는 것은 성(性)이다.”

라 함이 간명한 그의 증명사이다. 그를 한번 더 자세히 말하면 우주 전체에 있는 심령을 가리켜 그의 명사를 이라 하고 개인의 자체에 있는 심령을 가리켜 그의 명사를 성이라 하는 동시에 ‘왈이 완성(曰理曰性)’은 곧 동일한 심령의 가상적 위치를 따라 변칭(變)된 명사인 듯하다.

기(氣)라 함은 무엇인가?

그는 곧 심령의 반면인 물질로서

“흘러다니는 것은 기요 막혀서 고정된 것은 질(質)이다.”

라 하여 기는 기체(氣體)요 질은 고체(體)임을 언명하였다. 물질과학이 발달되지 못한 그 시대의 사고로는 어떤 경우에는 기는 곧 추상적 무형물로 인정한 착오점이 없지 않지마는 어떻든지

“이는 형태가 없지만 기는 형태가 있다.”

라 하여 무형한 심령, 곧 이의 반면에는 유형한 물질, 곧 기의 존재함을 긍정한 동시에 그네의 명명한 기는 곧 물질임을 확언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우주의 존재가 곧 기적일원(氣的一元)일 뿐임을 단언한 선생의 학설은 물론 유물론이라 함이 적당하다.

 

선생은 그의 사상의 결정적 저술인 「원이기편(原理氣篇)」 초두에

“태허는 고요하고 침묵하여 형태가 없으니 그를 이름하여 선천(先天)이라 한다. 그 크기는 바깥이 없으며, 그 시초는 처음이 없다. 그 온 곳을 궁구할 수 없어 잠연허정한 것은 기의 원초이다. 바깥이 없는 먼 곳까지 가득찬 것이 핍색(福塞)하고 충실하여 빈 곳이 없으니 터럭 하나라도 허용할 공간이 없게 된다. 그러나 당기려고 하면 빈 것이고 잡으려고 하면 없게 된다. 하지만 도리어 가득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라 하며

“허(虛)라는 것은 기(氣)가 모이는 못이다.”

라 하고

“허는 곧 기이다.”

라 하며 이기설 초두에

“바깥(끝)이 없는 것을 태허(太虛)라 하고 시작이 없는 것을 기라 하니 허는 곧 기이다. 허는 본래 무궁하니 기도 또한 무궁하다.”

라 하며 그의 태허설(太虛說)에

“태허는 비었으나 빈 것이 아니니 허는 곧 기이다. 허는 끝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기도 또한 끝도 없고 바깥도 없다.”

라 하여 장횡거의 태허설을 습취하여 무궁무진의 우주만상의 근저적 실재가 오직 계한(界限)이 없고 정형(定形)이 없는 무진장의 태허임을 단언하는 동시에 그의 소위 태허라 함은 무엇인가 함의 의문을 해석키 위하여 허를 곧 기라 단안하였었다.

 

그러나 이상의 설명뿐으로는 허와 기를 양 건물(件物)로 오해할 염려가 있으므로 선생은 다시 일보를 전진하여

“이미 허(虛)라고 말하고 어떻게 기(氣)라고 할 수 있는가? 비고 고요한 것을 곧 기의 몸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작용을 모으고 흐트리는 것이다."

라 하며

“그 고요하고 침잠한 몸체를 말하여서 일기(一氣)라 한다.”

라 하여 잠연허정(湛然虛靜)18)은 곧 기의 형용사로서 기는 곧 잠연허정한 태허의 자체임을 단언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상소(相素)와 같이 허(虛)는 상(相), 기(氣)는 소(素)로서 이명 일물(異名一物)임을 증명하였다.

18) 잠연허정(湛然虛靜):침착하고 고요하여 마음이 항상 평정함.

 

그의 2물이 아님을 반증키 위해

“허가 빈 것이 아님을 안다면 그것을 무(無)라고 할 수는 없다. 노자(老子)는 유(有)가 무에서 생긴다고 했으니 허가 곧 기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라 하며

 

“또 말하기를 허가 기를 낳을 수 있다고 하니 이것은 틀린 것이다. 만약 허가 기를 낳는다면 바야흐로 그것이 생겨나기 전에는 기가 있지 않아서 허는 죽은 것이다. 이미 기가 없는데 또 어디로부터 기를 낳을 수 있겠는가?”

라 하여 노자의 유무허기(有無虛氣)를 양단적으로 구분하여 ‘유가 무에서 생긴다’하고 ‘허가 기를 낳는다’함의 착오됨을 공격하였다.

곧 자가(自家)의 입장으로 보면 허는 무가 아닌 동시에 허는 곧 기로서 허와 기가 양단적 이성이 아니거늘 만일 허가 기를 생(生)한다 하면 이는 곧 허와 기가 절연한 양체적 이성(異性)이며, 무에서 유가 생한다 하면 이는 곧 공공무유적(空空無有的) 백지에서 종자 없는 현상계가 발생한다 함이니 그가 곧 인과적 논리상에 모순됨이라 하여 노씨(老氏;노자)를 배척하였었다.

 

이상의 각종 설명을 종합하여 보면 선생의 사상은 철두철미한 유물론으로서 허와 기의 양자적 관계는 상소적(相素的) 방면으로부터 본 이명 일물(異名一物)임을 단언할 수 있다. 선생은 이로부터 그의 구경적(究竟的)실재의 형용적 설명을 붙이기 곤란함을 언명키 위하여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소리가 없어도 들을 수 있고 냄새가 없어도 접할 수 있다. 천성(千聖)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주염계와 장횡거는 그것을 끌어 빗나가지 않았으며 소강절은 한 글자의 고침도 허락지 않았다.”

라 하고 과거 선철(哲)의 그에 대한 모든 형용사를 모순 없는 한 계통 아래 집합하여 자기의 사상을 증명키 위하여

“성현의 말씀을 주워 근원에까지 소급하여 본다.

주역에 이른바 고요히 움직이지 않는다 했으며 중용에는 이른바 정성스러운 자는 스스로 이룬다고 했다.

고요히 침묵하고 있는 것을 말하여 일기(一氣)라고 하며 혼연히 서로 두루 섞여 있는 것을 말하여 태일(太一)이라고 한다.

주염계는 여기에서 어찌할 수 없이 그것을 말하며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라고 했으니 이것이 곧 선천(先天)이다.”

라 하며

 

“그것이 그러한 소이연(所以然)을 이(理)라고 하며 그것이 묘하게 되는 소이를 신(神)이라고 하며 그것이 자연스럽게 진실한 것을 성(誠)이라 하며 그것이 비추어서 유행하게 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고 모두 모아서 갖추지 않음이 없게 된 것을 태극이라고 한다.”

라 하여 과거의 각종 술어를 모순과 간격이 없이 자가사상인 유기론적(唯氣論的) 방면으로부터 연결 또는 해석케 하였다.

 

그러나 정이천, 주회암 등 송유 배의 누누이 주장하던 이기 양원론과 자가의 유기론 사이에 모순점을 제거함이 가장 곤란한 문제이다. 한 걸음을 더 나아가 말하면 유기론자의 입장에 선 선생의 흉중에는 그의 반면에 있는 이를 어떻게 해석할까 함이 가장 큰 문제였었다. 그래서 선생은 그를 구처(區處)키 위하여

“그것이 그러한 소이연을 이라 한다.”

라 하였다.

그러나 그로만은 만족한 설명이라 하기 곤란하므로 다시 일보를 전진하여

“기의 밖에는 이가 없다. 이라는 것은 기의 주재자이다. 이른바 주재자라는 것은 밖으로부터 와서 주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가 일을 함에 그러할 수밖에 없는 이유의 바른 것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을 가리켜 주재자라고 하는 것이다.”

라 하여 이는 곧 정주의 주장함과 같이 물질적 기와 병거 대치할 만한 심령적 실재물이 아니요 물질적 기의 변화작용상의 부속적 이유로서 측면적 가명사(假名詞)임을 증명하여 철두철미하게 자가의 유기론적 입장을 변호하면서

“이는 기보다 선행하는 것이 아니니 기도 시원(始源)이 없고 이도 진실로 시원이 없다. 만일 이가 기보다 선행한다고 하면 기에 시원이 있게 된다.”

라 하여 은연중에

“그 좋아 나온 바를 미루어 보고자 하면 이가 선행하고 기가 뒤따른다.”

라 한 주회암의 사상을 반박하였었다.

그래서 선생의 우주관은 어느 방면으로든지 철저한 유물론으로 구성되고 말았었다.

 

 

7. 선생의 연기론(緣起論)

 

만일 선생의 사고와 같이 우주의 근저적 실재가 기적 일원이라 할진대 그의 기원적 본체로부터 어떠한 방편으로 삼라만상 곧 현상계가 개전(開展)될까 함이 가장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연기적 방편을 설명하는 벽두에

“문득 도약하고 홀연히 열리는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킨 것인가? 스스로 그러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 하며

“주역이 이른바 감화되어 드디어 통한다 했으며 중용에서는 도가 스스로 말한다고 했고 주역에서는 태극이 움직여서 양(陽)을 낳는다고 했으니 움직이고 고요해짐이 없을 수 없고 열고 닫힘이 없을 수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기틀이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라 하여 기의 자체가 자연적으로 자동자행(自動自行)함을 언명하였었다. 마는 그의 자동자행적 진전에 대하여 상세한 단계적 방편의 설명이 있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그러므로 선생은

“이미 일기(一氣)라고 했으니 1은 스스로 2를 포함하고 있다. 이미 태일(太一)이라고 했으니 1은 문득 2를 낳게 된다. 1은 2를 낳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 하며

“기의 원초에서 그 처음은 하나이다. 이미 기는 하나라고 했으나 문득 둘을 낳는 것이며 태허는 하나이지만 그 가운데는 둘을 품고 있다.”

라 하여 1원(一元)의 기체로부터 자연적으로 2가 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소위 2라 함은 무엇을 지칭함인가 함이 또한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또한 그를 해석키 위하여

“1은 2를 낳는다고 했는데 2는 무엇을 말함인가? 음양이요 동정(動靜)이며 감리(坎離)19)이다. 1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음양의 시원이며 감리의 체가 고요히 침묵하여 하나인 상태를 말한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서 음양이 되는 것이다.”

라 하여 1은 잠연청허(湛然淸虛)의 일원적 기체로서 2는 그의 일원적 기체로부터 분출한 음양 2기임을 명언하는 동시에 그의 음양 2기로부터 다시 삼라만상의 화성(化成)됨의 방편적 설명으로

“2는 스스로 극(克)을 낳을 수 있으니 생(生)은 곧 극이요 극은 곧 생이다. 기는 스스로 미묘하여서 두드려 움직이는 데에 이르게 되니 생극(生克)이 그렇게 한 것이다.”

라 하였다.

19) 감리(坎離):감과 리는 모두 8괘의 하나인데 감은 북방을 가리키고 리는 남방을가리킨다. 감의 괘는 ==이고 리는 그 모양이다.

 

그는 곧 아낙시만드로스의 이른바 한난건습(寒暖乾濕) 등 반대성이 항구적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충돌적 운동으로 인하여 '도아파이론'의 본체계로부터 삼라만상의 현상계가 분출된다 함과 같이 음양 양자의 반대성적 기체의 자연적 생극고탕(生克鼓盪)20)의 충동적 무시무종의 운동으로부터 현상세계가 개전됨을 증명하였었다.

20) 생극고탕(生克鼓盪):생과 극이 두드려 움직이게 하다.

 

 

8. 선생의 천지개벽론

 

전기(前記)와 같이 1원의 기체로부터 음양의 2기, 음양 2기의 생극고탕으로부터 현상세계가 개전됨을 주장한 선생의 논리적 순서는 물론 현상계 곧 후천적 유형세계의 개벽된 상태를 설명치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에 천지개벽론으로

“양극은 두드러져서 하늘이 되고 음극은 그것을 모아서 땅이 되었다. 양의 두드리는 극이 그 엑기스를 맺은 것이 해이고 음의 모은 극이 그 엑기스를 모은 것이 달이다. 나머지 엑기스들은 흩어져서 뭇별들이 되고 그것들이 땅 위에서는 물과 불이 되었다. 이것을 후천(後天)이라고 하는 것이다.”

라 하여 천지의 개벽이며 일월의 생성이며 성신(星辰)의 결정이며 수화(水火)의 창조가 모두 음양 2기의 생극고탕으로부터 됨을 주장하는 동시에 기타 만유의 현상물도 그의 방편으로부터 화성되지 아니함이 없음을 사고하였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좇아 계기하는 의문은 물론 천지일월이 어찌하여 추락치 않고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회전하는가 함이다. 그래서 선생은 그의 의문을 해답키 위하여

“하늘이 기를 움직이는 것은 한결같이 움직임을 위주로 하여 둥글게 돌면서 그치지 않는다. 땅이 형(形)을 응결하는 것은 한결같이 고요함을 위주로 하여 가운데에 권재(權在)해 있다. 기의 성(性)은 움직임이니 위로 오르려는 것이다. 형의 질(質)은 무거움이니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이다.

기는 형의 바깥을 포함하고 있으며 형은 기의 가운데에 있어서 위로 오르려는 것과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이 서로를 멈추어 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태허의 가운데에 걸려 있으면서도 오르지도 않고 내리지도 않아 좌우로 둥글게 회전하는 이유이다. 고금에 있어 떨어지지 않는 것은 소강절이 이른 바 하늘은 형에 의존하고 땅은 기에 부탁하는 것이다. 스스로 의존하고 부탁하는 것은 의존하고 부탁하는 것의 기미이니 그 묘한 것인저!”

하였다.

그는 곧 천기는 상등하고 지형은 하추(下隆)하려는 양자의 반대력으로부터 평균적 조화적 상태를 보유함을 주장함으로써 근대 역학(力學)의 원리의 일단을 선견하였다 할 만하도다.

 

그의 천지현공론(天地懸空論)의 결과로는 물론 천지의 계한(界限)이 있을까. 만일 계한이 있다 하면 그 밖에는 무엇이 있을까 함이 잇달은 의문일 것이다. 그래서 선생은

“하늘은 커서 바깥이 없으니 곧 태허가 바깥이 없는 것이다. 태허가 하나라는 것을 안다면 나머지는 모두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라 하여 천체는 곧 무제한 유일의 태허적 기체로서 유한적으로 사고함은 오인의 망상임을 주장하면서 일보를 전진하여

“소강절 선생이 말했다. 혹자는 천지의 바깥에 다른 천지만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천지만물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지 못한다면 성인도 또한 알 수 없을 것이다. 소강절 선생의 이 말을 마땅히 다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라 하여 천체의 무제한인 동시에 천지만물 외에 다시 별종의 천지만물이 있다고 상상하는 망상을 근본적으로 타파치 아니할 수 없음을 주장하였었다.

 

 

9. 선생의 물질불멸론

 

선생의 본체론은 소박하고 독단적 유물론이며 연기론, 개벽론은 현대적 과학자의 안공(眼孔)에는 이미 파탈(破脫)된 점이 적지 않은 동시에 그다지 위대하다 찬탄할 만한 가치가 있을는지 의문이지마는 오직 만장의 광휘가 지금도 찬란타 할 만한 점은 선생의 물질불멸론이다.

 

선생은 그의 가장 독단적 발명인 물질불멸론의 벽두에

“기는 시작도 없고 생겨남도 없다. 이미 시작함이 없는데 어찌 끝맺음이 있으랴? 이미 생겨남이 없는데 어찌 없어짐이 있으랴?”

고 하여 물자(기)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이며 불생불멸로서 항구적 실재성임을 주장하면서 그에서 일보를 전진하여

“사는 것과 죽는 것 사람과 귀신, 이들은 다만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오직 모이고 흩어짐이 있을 뿐이며 유(有) 무(無)가 있는 것은 아니다.”(이상 인용문은 편집자 역)라 하여 현상적 변화 생멸이 오직 일원적 기체의 취합이산(聚合離散)으로부터 화현(化現)된 가상일 뿐으로서 기 곧 물질의 자체에는 생멸유무적변화가 절대적으로 없음을 단안하였다.

환언하면 곧 물질의 자성(自性)은 시종이 없고 생멸이 없이 항구 불변적으로서 현상세계의 변화적 과정의배후에 존재한 영존실재적(永存實在的) 본체인 동시에 삼라만상의 유전변화는 오직 물(物) 자체의 취합이산적 표면현상에 대한 오인의 환망적(幻妄的) 각오뿐이라 함이다.

 

“물(物)이 오고 와도 다 오지 못하여

이미 온 것이 겨우 닿으니 또 좇아오네

오고 옴에 본래 스스로 와 시작도 없으니

묻노니 그대는 처음 어디로부터 오는가?

 

물이 가고 가도 다 가지 못하여

이미 간 것이 이르렀으나 다 간 것 아니네

가고 가서 끝에 이르도록 돌아감이 끝나지 못하니

묻노니 그대는 끝내 어디로 가는가?”21)

함은 선생의 무종래 무소귀적(無從來 無所歸的) 물질불멸의 선천적 진경을 찬탄한 싯구이다.

21)“有物來來不盡來 來縫盡處又從來 來來本自來無始 爲問君初何所來有物歸歸不盡歸 歸線盡處未會歸 歸歸到底歸無了 爲問君從何所歸

 

선생은 일보를 전진하여 그에 대한 사실적 증명을 들기 위하여

“기라는 것은 한결같이 고요하며 맑고 텅 빈 것으로 끝이 없을 만큼 가득차게 텅 빈 것이다. 그것의 큰 것을 모은 것은 하늘과 땅이 되고, 그것의 작은 것을 모은 것은 만물이 된다. 모이고 흩어지는 세는 미세하거나 드러나거나 느리고 빠른 차이만 있을 뿐이다. 태허에서 크고 작게 모이고흩어지는 것에는 대소(大小)의 다름이 있다. 비록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그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

라 하며

“비록 한 조각 촛불의 기라도 눈앞에서 흩어지는 것을 보여 주지만 그 나머지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으니 어찌 완전히 없어진다고 할 수 있으랴?”

하여 천지만물의 취합이산이 그의 대소를 따라 아무리 미저구속(微著久速)22)의 차별은 있을지라도 그의 물질적 자성의 생멸이 없음은 동일한 바로서, 비록 일편의 향촉지기(香燭之氣)라도 그의 원칙을 벗어남이 없음을 주장하였었다.

22) 미저구속(微著久速):미세하고 현저하고 오래 지속적이고 빠른 것의 차이.

 

그뿐 아니라 선생은 그의 유물적 사상의 입장으로부터 오인의 정신 지각성도 순연한 유물성으로 인정한 동시에 그도 또한 그의 원칙을 벗어나지 못함을 주장하였었다. 그래서

“하물며 사람의 정신 지각도 모이는 것이 크고 또한 오랜 것이다. 형체와 넋도 그 흩어짐을 보이는 것이 무에 다 빠져들어가는 것 같다. 이곳에 모두 생각을 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라 하며

“사람이 흩어진다는 것은 형체와 넋이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모이는 것이 한결같이 고요하고 맑고 텅 빈 것은 끝내 흩어지지 않으나 태허의 한결같이 고요한 가운데 흩어짐은 동일한 기이다. 그 지각의 모이고 흩어지는 것은 다만 느리고 빠름만이 있을 뿐이다.”

라 하였다. 그는 물론 오인의 정신 지각도 또한 잠일청허(湛一淸虛)한 기체의 일부로서 취산의 구속(久速)은 있을지언정 동일한 태허잠일(太虛湛一) 중에 환원 조화될 뿐 자성적 생멸이 없음이라 함이다.

 

선생은 편 말에 다시 그의 불멸성의 근본적 이유를 귀착키 위하여

“그 기는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 왜인가? 기는 한결같이 고요하고 맑고 텅 비어 이미 그 시작도 없으며 또한 끝도 없다. 이것이 이와 기가 지극하고 묘한 이유이다.”

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기는 무시무종이므로 따라서 불생불멸이라 함이다.

 

아! 이는 선생의 주장한 물질불멸론의 경개로서 인도에서도 지나에서도 구주(서양 물질불멸론보다 200년 전)에서도 아직 보지 못한 그 시대에 세계적 수창(首創)인 광영의 학설이다. 선생도 자가의 독창적 사상임을 언명키 위하여

“배우는 사람들이 진실로 궁구하여 이 경지에 도달한 자가 여럿이지만 비로소 천성(千聖)들이 다 전하지 못한 미묘한 요지를 엿보았다.”

라 하여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을 저술하여 박이정(朴頤正;獻民), 허태휘 등 문인에게 탁전(托傳)하면서

“이 논의가 비록 글이 졸렬하지만 천성이 다 전하지 못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명하건대 부디 잃지 말고 후세에 전하고 중국과 여러 멀고 가까운 변방에서 편찬하여 동방에서 학자가 나왔음을 알게 하라.”

고 하였었다.

 

아! 선생의 자부도 또한 중하도다. 마는 이 어찌 혈배23)의 미견으로 양양 자부하는 천루배(淺陋輩)에 비길소냐?

23) 혈배 : 움막.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

이라 함은 능인(能仁)24)의 자존이요,

‘유일무이 상제진자(唯一無二上帝眞子)’

라 함은 기독(基督)의 자부며,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 주었으니 환퇴25)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함은 중니(仲尼)의 자허(自許)이다.

24) 능인(能仁): 석가의 존칭.

25) 환퇴 :중국 춘추시대의 송의 대부 형퇴의 별명.

 

선생과 같은 독창적 석학으로서 또한 자부가 중하고 자허(許)가 높지 아니할 수 없을 만하도다.

 

 

10. 선생의 수역학(數易學)

 

구주 학술계에서는 온갖 과학적 연구의 기초가 수학에 있음을 공인하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수학적 두뇌 또는 그의 증명이 아니면 치밀한 진리를 구득(究得)치 못할 줄로 알았었다. 마는 과학적 사상이 가장 결핍된 동양학술계에서는 그를 경시할뿐 아니라 부패한 유교도의 안공(眼孔)에는 수학자라 하면 곧 이단사학으로 보았었다. 이러한 동양 또는 유교에서 출생한 선생으로서 진리적 연구의 기초가 수학에 있음을 각오케 되었음은 또한 발군의 사상이요 독창의 식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은

“수학은 알지 않을 수 없다. 이치의 온갖 모습들이 숫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 언명하면서 그를 크게 연구하는 동시에 온갖 물리적 연구의 방식에도 그를 응용하였었다. 선생의 수리적 오경(寤境)에 대하여서는 그를 추찰할 만한 유저가 없으므로 그의 조예적 문호를 규견(窺見)키 곤란한 바이다. 마는 선생은

“1은 수(數)가 아니다. 수의 체(體)이다.”

라 하여 수의 체용(體用)을 논단하고 그를 응용하며 동양 역학(曆學)의 원조인 상서 기(朞)삼백편을 해석하고 「황극경세수해편(皇極經世數解篇)」을 저술하여 기벽난삽(奇僻難澁)으로 유명한 소강절의 우주개벽론을 해석하였고, 그에서 일보를 전진하여 동양철학의 비조(鼻祖)로서 후천세계의 변화 법칙을 수리적으로 설명코자 한 역학(주역)의 오리(奥理)도 구득하였었다.

그래서 선생은

“역이라는 것은 음양의 변화이다. 음양은 2기이니 1음 1양은 태일(太一)이다. 둘인 까닭에 변화하고 하나인 까닭에 묘하니 변화의 밖에 다른 소위 묘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2기가 능히 낳고 낳게 하며 변화하고 변화시켜 그치지 않게 하는 것이 곧 태극의 묘함이다. 만일 밖이 변화하고 묘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역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라 하여 태원(太元)의 1기로부터 음양 2기에, 음양 2기의 순환적 생극 변화로부터 다종다양의 현상계에 순서적으로 진전되는 신묘기화적(神妙奇化的) 원리는 곧 역학의 보편 개괄적 원리로서 그의 원리를 놓고서는 역리를 설명할 수 없음을 단언하였었다. 그리고 선생은 다시 역학의 연구하는 혜경(溪徑)26)을 후학에게 지도키 위하여

“조화 귀신과 주역의 음양 극치의 곳에 후학자들이 계사전(繫辭傳)27)의 주염계, 정이천, 장횡거, 주자의 설에만 많이 집착하고 공부하여 그침이 없고 대단히 힘을 다한 연후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라 하였고 선생은 다시 역학에 대한 최종의 일언으로

“계사의 미묘한 요지를 발휘하기 위하여 정자와 주자는 모두 그 힘을 다한 연후에 간략히 설파했다. 따라서 후학은 그 유(類)를 찾을 만한 자취가 없어 모두 조야한 것만 보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다. 나는 나의 얄팍한 견해를 붙여 후학으로 하여금 그 흐름을 따라 원류를 탐구하게 하고자 한다. 그러나 나의 정력을 다하여 글에 나타냈으나 뜻이 있어도 나아가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것이 조그만 한이 된다.”

라 하여 정주의 학설이 너무 소략하여 후학의 탐구할 만한 혜경이 없음을 우념하는 동시에 자가 독특의 견지를 토로할 만한 기회를 얻지 못함을 한탄하였었다.

26) 혜경(蹂徑): 지름길.

27) 계사전(繫辭傳):주역의 괘를 설명하여 상세하게 붙인 주석.

 

선생의 수학과 역학에 대한 구체적 사상은 그의 유저가 없는 동시에 문외한이 된 저자로서는 그를 규견할 방편이 없으나 이상에 열거한 편언척구(片言隻句)로 보더라도 선생이 그에 대한 독특적 각오의 자신과 자부가 어떠하였음을 가히 알 만하도다.

 

 

11. 선생의 사상에 대한 조선 사상계의 영향과 반동

 

전장에 기술함과 같이 최근 500년간의 문화적 역사는 전부 유교적 사상으로서 선생 이전의 유교적 사상은 번역적이요 수입적이며 지나식 모방적 시대로서 정말 독창적 자가적 사상을 규호한 이는 선생이 처음이다. 그래서 선생의 규호하에서는 전국이 향응하여 기다(幾多)의 철인(哲人)이 계출하였었다.

 

선생의 문하에서 직접으로 親炙받은 청년 중에서는 문장도학(文章道學)과 훈업덕망(勳業德望)이 겸비한 박사암(朴思庵;淳)을 필두로 하여 허초당(許草堂;曄), 박슬한(民獻)이며 자방물표(自放物表)의 박수암(朴守菴;枝華), 이토정(李土亭;지함)이요, 강명이학(講明理學)의 홍치재(洪耻齋; 仁佑), 이연방(李蓮坊;球)과 경명행수(經明行修)의 남동강 (南東岡;彦經), 이이소(李履素;仲虎)배의 다수한 천재가 계출하여 선생의 사상을 소술(紹述)하였고 제배(儕輩)로는 조용문(趙龍門;昱), 박광우(朴光佑), 김모재(金慕齋 : 安國)배며 후진으로는 이퇴계, 김하서(金河西;麟厚), 기고봉(奇高峰;大升), 이율곡 배의 여러 철인이 선생의 영향과 감화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받지 아니한 이가 없는 듯하다.

 

마는 그중에도 가장 퇴계와 율곡 양 대가의 사상상에 지대한 영향과 반동이 있었다. 퇴계는 선생보다 13세의 후진으로서 아무리 직접적 감화를 받음은 아닐지라도 개척적 이상과 학문적 풍기를 환기한 선생의 여운을 간접으로 받았음은 단언할 수 있다.

퇴계는「화담집」을 독파하면서

“전배는 문화(文華)에만 승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술업(術業)에 소략하니 누가 스스로 분발하여 도를 닦고 경서에 나아가리오.”

하며

“홀로 진리의 물가에 노닐어

산림에 은거하여 귀신을 얻어 본 이 누구요

두루 억세(億世)를 엿봄이 손바닥 보는 것과 같으니

천년의 학업 닦아 세상을 뜻대로 보는구나”28)

28)“獨厲頹波泳聖涯 林居如得鬼誰何 數窺憶世猶看掌 學派千年欲撞家

라 하여 전배는 문화에 기울고 금인은 술업을 등기(等棄)하여 거세가 혼몽한 중에서 홀로 화담 철인의 탄생됨을 찬탄하였으며

“내가 태어나 이분을 뵙지 못했다면 평생을 헛되이 지냈을까 두렵네.”

라 하여 자가의 정신상에 지대한 감화를 받았음을 자백하였고 일보를 전진하여

“당년에 얻어 보았다면 10년 동안 읽은 글보다 나을 것을!”

이라 하여 선생을 친접(親接)치 못함을 한탄하였으며

“누가 화담선생의 뜰을 찾을까. 마음의 실마리가 서로 전하는 이 드물고나.”

고 하여 선생의 후계자가 희소함을 한탄하였다.

퇴계의 숭앙이 어떠하였으며 퇴계의 사상상에 감화됨이 어떠하였음을 알 만하도다.

 

마는 퇴계의 사상에는 선생의 사상으로부터 이와 같은 중대한 감화를 받는 동시에 그의 반면에는 선생의 사상이 너무 유물적 방면으로 전경(專傾)됨을 치의(致疑)하였다. 더구나 주자의 이기 2원론을 절대적으로 신앙하는 퇴계의 안공에는 선생의 기적(氣的) 일원론에 치의(置疑)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퇴계는 「이기비일물변(理氣非一物辯)」을 저술하여

“기의 정치한 것은 성(性)이 되고 성의 조야한 것은 기가 되니 기가 더욱 정치해야 이가 있게 된다.”

라 한 선생의 유기론(唯氣論)을 반박하면서 선생의 사상상에는

“기를 가리켜 성이라 한 것은 그릇된 것이다.”

가 있는 동시에

“이자(理字)를 얻어 봄이 투명하지 못하여 형(形)과 기(器)가 조야하고 얄팍한 데 떨어짐을 면하지 못했다.”

라 하면서 그의 반동으로 이기 양원론 철학을 조직하였었다.

 

율곡은 선생을 찬탄함에

“깊이 사고하고 멀리 통달하여 스스로 얻은 신묘함이 많이 있으니 문자나 언어만의 학문이 아니다.”

라 하며

“그가 이와 기가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묘한 곳에 대하여 요연히 눈으로 보았으니 타인이 책을 의지한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라 하였으나 율곡의 사상은 화담·퇴계 양 선생의 사상에 동일한 감화를 받은 동시에 또한 동일한 불만이 있었다.

그래서 화담에 대하여서는 그의 유물적 방면에 전경됨을 치의하고 퇴계에 대하여서는 그의 양원론이 구경적 일관적 우주관이 아님에 치의하였었다.

그래서 화담에게 대하여서는

“특별히 향상되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이치와 이치가 통하는 국면이 있었다.”

라 하며

“기가 이의 병이 된다는 것을 인정함을 면치 못했다.”

라 하여 그의 유기론을 반박하고

퇴계에게 대하여는

“천지의 조화가 두 가지 근본이 없는 까닭에 우리의 마음이 발하는 것에도 두 가지 원칙이 없다.”

라 하며

“노선생의 학문은 대뇌(大腦)상에 병이 됨을 면치 못했다.”

라 하여 그의 양원론을 반박하고 따라서 그의 반동으로 일체양성론(一體兩性論)을 창도하여 실재적 방면으로는 이기 양자가 일체양성적으로 존재하고 연기(緣起的) 방면으로는 기의 일원적 세력으로부터 개전됨을 주장하였었다. 그는 물론 화·퇴 양 선생의 사상에 대한 반동과 조화와의 사상으로서 실재적 방면으로는 퇴계의 사상, 연기적 방면으로는 화담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 후 300년래로는 진정한 독창적 사상가가 없을 뿐 아니라 당동벌이적(黨同代異的) 누열(陋劣)한 폐습이 사상계에도 파급되어 영유(嶺儒)는 퇴계의 사상을, 호유(湖儒)는 율곡의 사상을 교수(膠守)하는 동시에 후계자의 세력이 부진한 화담의 사상을 배척하여 심지어 이단사학이라 지목할 뿐, 공정한 비판적 사상이며 자가독립적 사상가가 요요무문(寥寥無聞)하더니 다행히 이채의 대철인 기노사(奇蘆沙; 正鎭) 선생이 철종 말년에 출생하여 자가당착이 많은 율곡의 사상에 의하여

“그로 하여금 한 구(句) 안에 천명이 이미 식었다는 말을 쓰지 않게 하였으니 천명이 이미 식고 음양이 오래 되었다는 것은 실로 듣지 못하였다.”

라 하며

“이는 약하고 기는 강하니 나는 대저 기가 이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렵다.”

라 하여 그를 크게 배척하고 그의 반동으로 자가 독특의 유이론적 철학을 조직하였다.

 

조선 유가사상의 발달된 순서를 개괄적으로 들면 화담선생은 물론 그의 개조로서 퇴계, 율곡, 노사 3선생은 그의 중요한 계승자인 동시에 화담은 유물론, 퇴계는 심물 양원론(心物兩元論), 율곡은 일체양성론, 노사는 유심론으로 각기 특색을 발휘하였다. 이가 곧 우리 민족의 사상 발달의 순서로서 지나에서든지 인도에서든지 서양에서든지 어떠한 민족을 물론하고 그 사상 발달의 순서는 이러한 공례(公例)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12. 선생의 인격과 사상에 대한 후인의 비평

 

선생의 유물론적 사상이 과연 진리에 적합하고 안 함은 특수의 문제이지마는 어떻든지 선생은 자가 독특의 우주관 인생관 하에서 철두철미하게 낙천지명적(樂天知命的) 생애를 누렸었다.

그래서 유가에서 이상적 철인의 생애로 희망하고 목적하는

“위무(威武)에도 굴하지 않고 부귀에도 음란해지지 않으며 빈천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의 진리적 쾌락의 생활을 정말 실현한 이는 선생이다.

 

“화담이란 집을 짓고 쓸고 물뿌리기를 지극하게 하며 소요하며 스스로 얻는 것이 세간을 벗어난 사람과 같았다.

말년에 이르러는 얼굴을 깨끗이하고 등을 굽혔으며 양 어깨가 튀어나왔고 닿는 곳마다 모두 보고 즐거워하였다.

항상 바람을 머금고 달을 희롱해서 자기와 사물이 하나가 되는 기상이 있었다.”

라 함은 「동유록(東儒錄)」의 기록이요

 

“성품은 지극히 효성스러웠으며 상중(喪中)에는 소금기 있는 것과 채소를 먹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혹 연일 불을 때지 못하더라도 그침이 없었다.

자주 굶었으나 항상 편안하고 안정되게 있었다.”

라 함은 어숙권(魚叔權)의 기며

 

“세대의 명을 끊을 만한 재주와 세상을 경영할 만한 학문이 있었다.”

함은 홍치재의 찬탄이요,

 

“항상 가득히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 세간의 득실과 시비 영욕은 모두 그의 가슴 속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재산을 다스리는 데 오로지 하지 않아서 자주 굶었으나 주림을 참았으며 한번 들어간 곳에서는 견디지 못할 지경이라도 편안하게 처하였다.”

라 함은 이율곡의 숭앙이며

 

“맑은 바람과 같이 우뚝 모범이 되어 후세를 감동시켰으며 인심을 맑게 했다.”

라 함은 성우계(成牛溪)의 회고요

 

“촌사람과 전혀 다름이 없어서 고을 사람들과 함께 처함에 그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다."

라 함은 「명현록(名賢錄)」에 기록한 바이며

 

“한미한 데서 떨쳐 일어나 시종 높은 절개가 있었다.”

라 함은 이택당(李澤堂)의 칭도요

 

“몸이 막아섬에는 성철(聖哲)에 의했고

사물을 봄에는 제비와 물고기처럼 즐거워했다

언제나 몸가짐이 깨끗하고 고고했으니

어찌 호미로 달을 뽑을 수 있으랴”29)

29)“抗身依聖哲 觀物樂鳶魚 不籍彈冠手 寧地帶月鋤

라 함은 이퇴계의 찬사요

 

“화담의 말은 보배처럼 중하니 천년의 연원 깊은 선비일세”30)

30)“珍重花潭語 淵源千載儒

라 함은 김하서의 감탄이다.

 

화풍감우(和風甘雨)의 기상과 광풍제월(光風霽月)의 흉금으로 부귀를 부운시하고 빈천을 안연처(晏然處)한 선생의 이상적 인격에 대하여서는 이와 같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찬탄치 아니함이 없었다.

마는 선생의 사상 방면에 대하여서는 종종의 이론적 비평이 없지 않았었다.

유미암(柳眉巖;希春)은 선생의 학문이 수학에 편경하였다 하여 「유선록(儒先錄)」 중에 참가함을 반대하였고

선조 대왕은

“경덕이 지은 저서를 내 취해서 보니 기와 수는 많이 논했으나 수신의 일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수학이 아닌가. 또 그 공부는 의심할 만한 곳이 많다.”

라 하여 증직(贈職)의 포상을 근석31)하였고

퇴계는 자가의 이원론적 입장으로부터 「이기비일물변」을 저술하여 선생의 유기론을 반박하면서

“화담의 학풍은 장횡거에게서 나왔으니 유가의 정통은 아니다.”

라 하였고

율곡은 그의 일체양성론 상으로부터 선생의 사상을 비평하여

“깊이 생각하고 멀리 통달하여 스스로 얻은 맛이 많이 있으니 문자와 언어만의 학문은 아니다.”

라 하여 한편으로 선생을 찬탄하면서도

“그의 저서가 성현의 뜻과 같다고 한다면 나는 모르겠다.”

라 하여 선생의 사상을 반박하였었다.

31) 근석: 아까와함.

 

그러나 당시에도 한편으로는 박사암, 허초당 등 선생의 문인배가 선생의 사상을 변호하기에 노력함이 적지 않았었다. 마는 그는 다 퇴·율(退栗)의 사상에 필적할 만한 사상가가 아닌 동시에 선생의 사상적 문호를 완전히 보수하고 영구히 선양한 자가 없었다.

 

따라서 퇴·율 양가의 사상이 300년래 반도 사상계의 영역을 독점하였으므로 선생의 사상적 광채는 암흑 중에 장거(葬去)하고 말았었다. 어찌 그뿐이었으랴? 일보를 전진하여 선생을 이단사학으로 지목케 되었었다.

 

 

13. 결론

 

구경의 진리는 ‘하나’ 일지라도 시대와 ‘사람’을 따라 소견이 동일치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는 석가의 진리를, 공자는 공자의 진리를, 기독은 기독의 진리를 각기 천명하여 자가의 문호를 각립(各立)하였었다. 지나인, 인도인, 구주인을 물론하고 과거 기천년간에 기다의 종교가, 철학가, 과학가가 분분히 규호한 진리는 그의 시대와 사람을 따라 천차만별이 되고 말았다. 곧 귀일한 의논이 없었다. 어찌 과거만 그러했으랴? 미래 만만겁일지라도 그러하고 말 것이다. 구경유일(究竟唯一)의 진리가 있다 하면 그는 물론 영겁의 비밀로서 그의 비약(祕鑰)32)을 개방할 자가 없을 것이다. 가사(假使) 그의 비밀을 개방한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를 공인치 못할 것이다. 따라서 구경의 진리가 다수인지 유일인지 고정인지 변천인지 그도 또한 의문이다. 그래서 진리의 발전 진화설을 주장하는 학자도 없지 않았다. 어떠한 철인, 어떠한 사상가일지라도 그의 주장이 구경적 절대유일의 진리라 하면 나는 그를 수긍치 못할 것이다. 그는 물론 오인의 인식력의 가능의 범위가 아닌 동시에 만만고(萬萬古)의 비밀이 되고 말 것이다.

32) 비약(祕鑰):비밀의 열쇠.

 

과거 철인에 대한 오인의 가장 숭배하고 찬탄하는 바는 그네의 사상이 구경 유일의 진리이고 아님을 표준함이 아니요, 오직 그의 주밀(周密)한 조직적 사상상에 철두철미한 시종일관의 정신적 우주관 인생관을 확립하여 경우와 물질의 미혹과 마장(魔障)을 초월하고 안한자적(安關自適)의 낙천지명적 생활을 향유함이 가장 숭배하고 찬탄하는 바이다. 석가의 정각(正覺)이 그요, 공자의 불혹(不惑)이 그요, 기독의 믿음이 그이다. 그네의 정각, 그네의 불혹, 그네의 믿음이 과연 구경의 진리이고 아님은 특수문제이지마는 그네는 철두철미한 그네의 인생관하에서 미혹이 없고 마장이 없는 극락적 생활을 영위하였었다. 그가 인생의 가장 존귀한 바이다.

 

오인의 인식 능력을 과신하고 고인의 언설과 사상을 맹종하여 자가의 교조인 공맹정주(孔孟程朱)의 사상이 구경 유일의 진리이므로 표준하는 동시에 그네의 소설(所說)과 일호의 차이가 있으면 곧 그는 이단사설로 여지없이 배척하는 조선 유교도의 안목에는 물론 화담선생의 사상도 배척되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는 선생의 유물론적 사상 그 자체의 구경적 진리이고 아님은 물론하고 그의 사상과 설명이 적수불루(滴水不漏)의 철저한 조직적 계통적이며 더구나 그의 물질불멸론은 세계 수출(首出)의 창작적 발견으로서 선생은 그의 자가 독특의 사상적 토대상에서 시종일관의 철저한 우주관 인생관을 확립하여

“학문을 이루어 의심이 없으니 진실로 쾌활하도다!” (이상 인용문은 편집자 역)

고 부르짖으면서 낙천지명적 극락세계의 생활을 향유하였었다.

 

그가 곧 선생의 위대한 점이며 필자의 모배(膜拜)하는 바로서 그가 아니면 오인의 생활적 가치가 없을 것이요, 사회의 문화적 근기가 서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선생을 흠앙하고 원학(願學)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제2의 화담선생이 배출함을 빌고 바라면서 300년간 암흑에 묻혔던 선생의 유저를 끌어내어 외람히 소개의 붓을 들었노라.

33) 모배(膜拜):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함.

길게절할 모.

 

(본전은 대정 10년에 필자가 단행본으로 저작 발행하였던 바로서 다소 수정하여 쓰게 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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