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崔鉉培)
1894~1970. 국어학자, 문학박사. 호 외솔. 경남 울산 생. 주시경의 문하.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 문과를 거쳐 교토(京都) 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연대 교수, 한글학회 이사장, 학술원 부원장 등을 역임. 철저한 한글전용주의자로 외래어를 우리말로 풀어 쓰는 운동을 전개.
저서에 「우리말본」, 「한글갈」, 「우리말 큰 사전」 등이 있음.
1. 생애
최세진은 「훈몽자회(訓蒙字會)」의 저자로 그리하여 한글 발달의 역사에 한 용의적(庸醫的) 수술을 한 부족한 한글학자로 오늘날 일반으로 인정되어 있는 모양이나 기실 그는 한글학자라 하기보다 훨씬 더 뚜렷한 한학자 즉 지나어학자(支那語學者)로서 이조 500년간에 거의 유례가 없다 할 만큼 다대한 어학자적 업적을 끼친 사람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조정에 출사하여 현관(顯官)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와의 외교 문서를 독담(獨擔)하는 중요한 몫(역할)을 보았건마는 그의 출생, 성장, 수업, 활동, 만년 등 전기적 사실에 관하여서는 상세한 사록(史錄)의 전하는 것이 없음은 큰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그와 동시인(同時人)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와 또 「통문관지(通文館志)」,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타 그 저서 등을 참작하여 어림하건대 그는 성종 때에 나서 성종조에 질정관(質正官)1)이 되고 중종 11년경에 통훈대부(通訓大夫;당하관), 행내섬시 부정(行內瞻侍副正) 겸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한학교수(漢學敎授 ; 「四聲通解」 所記)가 되고 중종 21년에 이문(吏) 제1과의 시취(試取)에 응하여 특히 당상관절충장군행(堂上官折衝將軍行), 충무위부호군(忠武衛副護軍; 「訓蒙字會」 所記)이 되고 동 31년에 중추부사 첨지(中樞府事僉知; 정3품)가 되고 동 34년에 희선대부(喜善大夫;종2품)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중종 만년에 이승을 떠난 모양이다.
1) 질정관(質正官):조선조의 임시 벼슬. 글의 음운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는 일을 맡았음.
그는 독학의 선비로 한어(漢語)에 정통하고 또 이문(吏文)에 능통하였다. 이문이란 것은 이속(吏屬)이 쓰는 글이란 뜻인데 구식의 한문체도 아니요 또 근세의 한어(漢語)도 아니요, 일종 특별한 한문체이니 주로 지나와의 공문서와 제사(題辭)2) 등에 쓰인 것이다.
2) 제사(題辭):관부에서 백성이 제출한 소장(訴狀) 또는 원서(願書)에 쓰는 관부의 판결이나 지령.
성종 때에 사역원(司譯院) 과거에 뽑혀 강사습관(講肆習讀官)이란 미관(微官)이 되어 수년을 지내매 그 익힌 바를 어전에서 강하여 성적이 매우 좋은지라, 성종께서 크게 칭찬하시고 특히 질정관이란 높은 벼슬을 주시니 간관(諫官)이 상소하여 사뢰되
“잡관으로써 질정관 같은 높고 귀한 벼슬을 삼는 것은 예로부터 그 例가 없사오나이다.”
한데 임금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그 사람을 얻은 다음에야 그 例의 있고 없음을 탄할 것이 있으랴. 이제 나로부터 예를 지음에 옳으니라 하셨다.”
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최세진의 재학(才學)이 얼마나 우수하였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러 번 연경(燕京)에 가서 어학과 이문에 관한 공부를 하였으며 따라서 지나의 제도와 문물에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중종 중년으로부터 지나와의 외교문서가 다 그의 손에서 나왔다. 이와 같이 그의 사회적 존재가 중하고도 귀한지라 중종 10년에 영의정 유순(柳洵)이 건의하되
“신은 생각하옵건대 이제 문신(文臣)이 이문(吏文)과 한음(漢音)을 이해하는 이가 홀로 최세진 한 사람뿐이니 이 사람이 아니면 무릇 임금께 올리는 공문서와 지나와의 외교문서를 한 손으로 담당할 이가 없겠사오니 이것이 심히 걱정이 되옵나이다. (「중종실록」)”
라 하여 한어의 연구는 지금에 꼭 그에게 배워야 하겠다고 논하였으며 중종 20년에 당시 영의정 남곤이 임금께 아뢰어서 이문학관(吏文學官)을 두어 최공에게 수업하게 하였으며 「패관잡기」의 저자 학관 어숙권은 자기가 동료 중 나이도 적고 배움도 옅은 사람으로서 수십년 내에 제법 이문을 알게 되어 큰 꾸지람을 면한 것은 오로지 최공의 가르침의 덕분이라고 자백하였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족히 최세진이 얼마나 일세에 중시되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2. 저서
이와 같이 최세진은 다만 훌륭한 학식을 가지고 중요한 관직과 교수를 맡아 보았을 뿐 아니라 더욱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위대한 학자적 업적을 후세에 끼쳤다. 이제 그 저서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사성통해(四聲通解;2권):
중종 12년. 이 책은 한자를 그 운을 따라 배열하고 그 뜻을 풀어 놓은 운서(韻書)이니 신숙주의 「사성통고(四聲通攷)」의 불완전을 보충하기 위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을 원거(原據)를삼고 이에 몽고, 조선의 자음(字音)의 정음(正音), 속음(俗音)을 부기하여 가장 조선사람에게 적절하며 또 실용에 맞도록 편찬한 것이니 다소의 결함은 있다 하더라도 조선에서 일찍 출판된 사서(辭書) 중에 가장 훌륭한 것으로 추장할 만한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지을 적에 해가 지면 기름으로 햇빛을 이어 가면서 4개 성상(星霜)에 그 초고를 일곱 번이나 고쳐서 겨우 다 되었다 하니 최세진과 같은 학식과 성근(誠勤)이 아니면 이러한 대사업을 도저히 이루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② 운회옥편(韻會玉編;2권):
중종 31년. 앞의 「사성통해」가 한자의 성(聲)으로써 유별하여 꾸민 운서임에 대하여 이 책은 그 형(形)으로써 유별하여 꾸민 옥편이니 이리하여 학자의 한자의 학습과 운용상 편익을 주고자 하여 지은 것이니 조선에서 ‘옥편’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의 첫머리다. 이 책은 지나 종래의 양(梁), 송(宋), 요(遼)의 옥편의 수부 배열법(首部排列法)에 개량을 더한 것이니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정연한 수부 배열법의 기초를 이룬 명(明)의 매응조(梅膺祚)의 「자휘(字彙)」보다 80년이나 앞섰으니 이도 또한 자랑할 만한 것이다.
③ 훈몽자회(訓蒙字會;3권 1책):
중종 22년. 이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기에 쓰는 가정 교과서인데 한자 3,360자를 4자씩 유취해운(類聚諧韻)하여 읽기와 깨치기에 편리하도록 지은 것이니 그 지음(저작)의 취지를 대략 다음과 같이 그 머리말에 하여 있다.
“㈀ 세상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적에 반드시 「천자(千字)」를 먼저 가르치고 다음에 「유합(類合)」을 가르치고 그런 뒤에 비로소 모든 책을 읽힌다. 그러나 「천자」는 지나의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가 엮은 책인데 모두 지나의 고사를 취하며 배열하여 글월(文)을 지은 것이니 그 글월이야 잘 되었지마는 조선의 어린아이들이 겨우 그 글자는 배울지언정 어찌 그 고사로 된 글월의 뜻을 깨칠 줄이 있으리오. 또 「유합」은 본국에서 나오기는 하였으나 누구의 엮음(撰)인지 알 수 없으며 비록 유합이라고는 하였지마는 그 자(字)가 허자(虛字)가 많고 정자(定字)가 적어서 사물의 형(形)과 명(名)의 실(實)을 배울 것이 적다.
㈁ 원래 어린아이들의 교육법은 먼저 구체적 사물에 관한 지식이 있고 다음에 그 사물에 해당한 글자를 가르쳐야 그 학습이 실제와 부합하여 하나가 되나니 그런 뒤에 다른 책에 나아가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제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보면 비록 「천자」, 「유합」을 배워서 경사(經史) 제서(諸書)를 읽기까지 하여도 다만 그 글자만 알고 그 실물은 알지 못하여 글자와 실물이 둘이 되어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이 정말로 깨치지 못할 것이 많으니 이는 대개 글자만을 외어 익히고 그 실물은 보기를 힘쓰지 아니한 소치이다.
㈂ 그래서 나는 전실(全實)의 자(字)만으로 상·중 두 편을 엮고 반실반허(半實半虛)의 자(字)로써 하편을 엮어 이루었으니 세상의 부형된 이는 먼저 이 책으로써 가정에서 가르칠 것 같으면 아이들도 조수 초목 등 실제 사물의 이름을 알게 되어 마침내 글자와 사물이 둘이 되어 서로 어긋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리하면 아이들 교육상 유익함이 적지 아니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볼 것 같으면 그 넉 자씩 유취하기 위하여 너무 어려운, 덜 쓰이는 자를 끌어댄 흠이 없지 아니하며 또 「천자」나 「유합」을 대신하려 한 의도가 달성되지는 못하였지만, 하옇든 그 편찬의 취지가 실로 오늘날 과학적 교육법의 지식을 가진 우리의 안목으로 보아 조선 구식교육에서 문자의 지식과 실물의 경험이 서로 어긋나서 실제 생활에 유용한 힘이 되지 못하는 폐단을 잘 간파하였으니 이 점에 있어서 최세진은 조선 교육사상사에서 실증주의를 제창한 선각자적 지위를 차지할 만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겠다.
④ 노걸대언해(老乞大諺解;2권):
「노걸대(老乞大)」를 언해한 것.
⑤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1권):
「박통사」를 언해한 것.
⑥ 노박집람(老朴輯覽):
이상 세 책은 다 한어(漢語)의 학습서이다.
⑦ 이문집람(吏文輯覧)
⑧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이문의 참고서.
이 다섯 가지 책들이 다 사역원(司譯院), 승문원(承文院)의 한리학관(漢吏學官)들에게 지극히 소중히 쓰이던 학습서, 참고서, 취방시험(取方試驗)의 강서(講書)들이다.
3. 한글에 관한 업적
앞에서 말한 「훈몽자회」는 어린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교과서이다. 그 각 한자 아래에 한글로 그 읽는 법(곧 뜻과 음)을 달았다. 그래서 이 한글의 독법과 용법을 일반 가정의 부형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 책의 첫머리 범례에서 한글에 관한 설명을 아주 간단하게 하여 두었는데 이것이 곧 우리 한글의 역사에 중대한 획시기적 전환을 지은 것이다. 이에 그것을 초기(抄記)하면 다음과 같다.
○초성과 종성에 통용하는 8자:
ㄱ(其役) ㄴ(尼隱) ㄷ(池末) ㄹ(梨乙) ㅁ(眉音) ㅂ(非邑) ㅅ(時衣) ㅇ(異凝) (註;밑줄 친 것은 조선말로 읽을 것이다. 다음에도 다 그러하다)
其尼池梨眉非時異 8음은 초성에 쓰고, 役隱末乙音邑凝 8음은 종성에 쓴다.
○초성에만 독용하는 8자 :
ㅋ(箕) ㅌ(治) ㅍ(皮) ㅈ(之) ㅊ(齒) △(而) ㅇ(伊) ᅙ(屎)
○ 중성에만 독용하는 11자 :
ㅏ(阿) ㅑ(也) ㅓ(於) ㅕ(余) ㅗ(吾) ㅛ(要) ㅜ(牛) ㅠ(由) 一(應;종성에는 쓰지 않음)] ㅣ(伊;단지 중성에만씀) ㆍ(思;초성에는 쓰지 않음)
○초·중성을 합용하여 작자(作字)한 예:
가 갸 거 겨 고 교 구 규 그 기 ᄀᆞ
○초·중·종 3성을 합용하여 작자한 예:
간(肝) 갇(笠) 갈(刀) 감(柿) 갑(甲) 갓(皮) 강(江)
이제 이 「훈몽자회」의 범례가 한글의 역사상 가진 의의를 몇 가지 따내어 적어 보고자 한다.
① 글자의 배열 순서가 「훈민정음」과 많이 달라졌으며 오늘날의 그것과 근사하게 되었다. 「훈민정음」에서의 글자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닿소리(초성, 자음)
아음- ㄱ ㅋ ᅌ
설음- ㄷ ㅌ ㄴ
순음- ㅂ ㅍ ㅁ
치음- ㅈ ㅊ ㅅ
후음- ᅙㅎ ㅇ
반치- △
반설- ㄹ
○홀소리(중성, 모음)
ㆍ ㅡ ㅣ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이것이 「훈몽자회」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되었다.
○ 닿소리
ㄱ ㄴ ㄷ ㄹ ㅁ ㅂ ㅅ ᅌ(초성과 종성에 통용하는 8자)
ㅋ ㅌ ㅍ ㅈ ㅊ △ ᅌㅎ (초성에만 독용하는 8자)
○홀소리 :ㅏ ㅑ ㅕ ㅗ ㅛ ㅜ ㅠ ㅡ ㅣ 、
곧 닿소리의 배열이 「훈민정음」에서는 아설순치후의 5음으로 분류 배열을 하였음에 대하여 「훈몽자회」에서는 얼만큼은 그 5음적 배열의 순서를 지키면서 그 글자의 운용상 차이로써 2대분하였다. 그리고 홀소리의 배열에 있어서는 「훈민정음」에서는 간단한 자형(字形; 아울러 자음)에서 복잡한 자형으로 나아갔음에 대하여 「훈몽자회」에서는 대체로 개구음(開口音)에서 폐구음(閉口音)으로 나아가되 복음(複音)은 그 원초모음의 다음에 붙였다.
그리고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에서 결정한 한글 스물 넉 자의 차례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는 종래 민간에서 쓰는 순서를 따른 것인데 이것이 대체로 최세진의 「훈몽자회」의 차례를 따른 것이라 하겠다. 다만 닿소리의 ㅈㅊ이 무슨 관계로 해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ㅋ의 앞에 온 것만이 다르다.
② 글자의 수가 27자다. 「훈민정음」의 28자에서 ᅙ자가 없어졌으며 오늘날의 24자보다는 △ ㅇ ㆍ의 3자가 많음을 알겠다. 이 책의 범례에서도 초성으로서의 ㅇ과 ᅌ이 속간(俗間)에서 서로 혼용됨을 말하기는 하였지마는 아직 자형으로는 ㅇ과 ᅌ을 구별하였은즉 오늘날보다는 자형으로는 ᅌ 하나가 더 있었다 할 만하다.
③ 그 배열 순서와 ‘초성과 중성을 합용하여 작자(作)한 예’를 보면 재래의 한글의 ‘본문’ 또는 ‘반절'이란 것이 대체를 「훈몽자회」에서 비롯한 것이라 하겠다.
먼저 재래의 ‘본문’ 또는 ‘반절’은 오늘날의 우리의 잘 아는 바이로되 이 글에서는 특히 적어 들어 그 작자를 밝힐 필요가 있다.
ㄱㄴㄷㄹㅁㅂㅅᅌㅣ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ᄀᆞ과궈
나냐너녀노뇨누뉴느니ᄂᆞ놔눠
다댜더뎌도됴두듀드디ᄃᆞ돠둬
라랴러려로료루류르리ᄅᆞ롸뤄
마먀머며모묘무뮤므미ᄆᆞ뫄뭐
바뱌버벼보뵤부뷰브비ᄇᆞ봐붜
사샤서셔소쇼수슈스시ᄉᆞ솨숴
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ᄋᆞ와워
자쟈저져조죠주쥬즈지ᄌᆞ좌줘
차챠처쳐초쵸추츄츠치ᄎᆞ촤춰
카캬커켜코쿄쿠큐크키ᄏᆞ콰쿼
타탸터텨토툐투튜트티ᄐᆞ톼퉈
파퍄퍼펴포표푸퓨프피ᄑᆞ퐈풔
하햐허혀호효후휴흐히ᄒᆞ화훼
(註:맨 앞의 받침글자 줄의 이응(ᅌ)과 딴 이(ㅣ)와는 그 차례를 서로 바꾸기도 하며 ‘과궈’, ‘놔눠’들은 모두 ‘하’줄의 다음에다가 붙이기도 한다.)
“이것을 살피건대
첫째로, 맨 앞에 받침으로 쓰이는 닿소리 여덟을 들어 놓은 것이 저 「훈몽자회」에서 최세진이 초성과 중성에 통용하는 8자라고 규정한 것과 일치한다. 다만 거기에 따로 이(ㅣ)를 더한 것은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에서도 그 용법을 설명하지 아니한 바를 실제의 필요상 명백히 들어 놓은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 ‘본문’ 열 넉 줄의 첫 줄(가갸줄)이 저 「훈몽자회」에서의 초성과 중성과를 합용하여 작자(作字)한 예와 꼭 일치한다. 다만 '과궈' 줄을 더한 것은 「훈몽자회」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만약 그것이 맨 끝의 ‘하’줄 다음에 있는 것이 고식(古式)이라 할진대 그것이 초성과 중성과의 합작의 예로서 나타나지 않았음도 넉넉히 이해될 것이다.
세째로 ‘본문’ 열 넉 줄의 차례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의 닿소리의 차례가 저 「훈민정음」의 그것과는 훨씬 다르고 이 「훈몽자회」의 그것과 근사하다. 다만 '자’, ‘차’의 두 줄이 ‘카’줄의 앞에 간 것만이 「훈몽자회」에서와 다른 점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한글의 ‘본문’을 꾸민 이(編者)는 최세진이라 하여도 큰 틀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④ 「훈민정음」에서는 아무 제한을 하지 아니한 닿소리(초성, 자음)의 용법에 새로운 제한을 만들어 ㄱㄴㄷㄹㅁㅂㅅᅌ 여덟 자는 초성 (첫소리)과 종성(끝소리, 받침)에 두루 쓰이고, ㅋㅌㅍㅈㅊ△ᅌㅎ 여덟 자는 초성(첫소리)에만 쓰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훈민정음」의 원의(原義)와 조선말의 실제와 맞지 아니한 것이로되 동몽(童蒙)을 가르치기에 간단 평이한 이점이 있음으로 해서 종래 민간에서 준용하는 기본법이 되어 왔었다.
⑤ 낱낱의 한글 글자의 이름을 지었다. 곧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은 한글 스물 여덟 자를 낳기만 하시고 그 이름은 짓지 아니하였다. 최세진의 「훈몽자회」는 「훈민정음」이란 어머니가 낳은 스물 여덟 아이 가운데에 하나가 없어진 뒤에 스물 일곱 아이의 이름을 지은 작명부(作名父)이다. 그런데 그 이름된 법이 앞의 조목(條目)에 든 닿소리의 용법을 따라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는 여덟 자는 그 초성으로 쓰인 보기(例) 하나와 종성으로 쓰인 보기 하나를 들어 두 자 이름(보기 ; ㄱ기역· ㄴ니은)으로 하고 초성에만 쓰이는 여덟 자는 그 초성으로 쓰인 보기 하나만을 들어 외자 이름(보기; ㅋ키· ㅌ티)으로 하였다.
이상을 통관(通觀)하건대 「훈몽자회」의 베풀음(서술)이
① 한글을 낱낱이 글자의 이름을 지어 기억에 편리하게 하였으며
② 닿소리의 용법에 새 제한을 두어 첫소리와 받침소리로 두루 쓰이는 여덟 자와 첫소리로만 쓰이는 여덟 자를 딱 끊어 구별한 점은 비록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의 원의와 틀리며 조선말의 실제와 맞지 아니하여 그것을 따라 익힌 후세의 한글 용법에 틀림의 씨를 뿌린 과오가 있기는 하지마는 그 「훈몽자회」란 책이 본시 어린아이들의 교과서이기 때문에 오로지 간이(簡易)를 취하여 전습(傳習)의 보급을 꾀함에서 나온 것일 것이니 한글. 창제로부터 겨우 82년밖에 안 되는 당시에 있어서 그 보급을 위한 이러한 범오(犯誤)는 넉넉히 서량(恕諒)할 만한 것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③ 그리고 그가 꾸민 '본문'은 과연 일반 민간에 널리 퍼져서 조선의 글자를 배우는 자 「훈민정음」은 도무지 모를지라도 반드시 이 ‘본문’을 말미암지 아니한 이가 없었으니 최세진의 한글 보급상의 공적은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는 「훈몽자회」의 범례에서 한글의 보급을 꾀하여 이 새 글자가 정말로 우민(愚民)의 것이 되도록 힘썼으며 그 본문인 한자의 독법도 그 음을 「훈민정음」에서 취한 지나 본토의 원한음(原漢音)을 버리고 (그 원래 한음이 당시 조선 속음과 틀리는 점이 많기 때문에 그것을 초학자에게 고집할 필요가 없다 함은 세종대왕께서도 이미 말씀한 바 있었다) 조선의 속음을 그대로 적었으며 「사성통해」에서는 당시의 지나 음을 엄극(嚴極)히 적어내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어려운 맞춤(철자)을 썼지마는 「훈몽자회」에서는 그런 어려운 맞춤은 쓰지 않았다.
또 그는「사성통해」에서 먼저 「광운(廣韻)」36자모와 「운회(韻會)」 35자모와 「홍무정운(洪武正韻)」 31자모의 도(圖)에 한글로써 그 발음을 달았으니 이도 다 운학(韻學)의 조선화 대중화에 致意한 보람(표)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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