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상찬(車相瓚)
1887~1946. 저널리스트, 한시 시인, 수필가. 호 청오(靑吾). 강원도 춘천 생.보성전문졸업. 「개벽」의 창간 동인이며 신간 「개벽」의 발행인. 이어 「별건곤(別乾坤)」, 「신여성」, 「농민」, 「학생」등을 발간, 〈관동잡영(關東雜詠)〉 등의 한시 및 사화(史話), 수필 등 다수를 발표.
저서에 「조선사 천년비사」, 「해동염사(海東艶史)」, 「조선야담사화전집」 등이 있음.
연산군 10년 갑자에 일어난 소위 갑자사화는 전날 무오사화(연산군 4년)보다도 더 심혹(甚酷)한 사화로 당시 명유(名儒)의 피해한 이가 퍽 많지마는 그중에 가장 연소하고 가장 인물이 청수(淸秀)하며 또 시(詩)의천재가 있어서 누구나 애석하게 여기던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읍취헌(挹翠軒) 박은이다. 그의 자(字)는 중열(仲說), 관(貫)은 고령(高靈)이니 한양의 종남산(終南山) 밑에 거하여 그 서재의 헌명(軒名)을 읍취라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호도 읍취헌이라 부르게 되었다.
“공의 집은 용재(容齋) 이행과 동리(同里)였는데 용재가 남산 청학동(지금 총독관저 아래 櫻谷山이라 칭하는 곳)에 살아서 자호를 청학도인이라 하였은즉 공의 집도 역시 이 청학동인 듯하다. 그리고 읍취의 의미는 산의 창취(蒼翠)1)를 가읍(可挹)2)한다는 뜻이다.”
1) 창취(蒼翠): 푸른 빛.
2) 가읍(可揖): 가히 잡아당김.
그의 원조(遠祖)는 고려 대장군 순(順)이요 증조는 지(持), 조(祖)는 수림(秀林)이니 모두 현감을 지냈고 부 담손은 한성 판윤으로 일찌기 이여(李茹)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종 10년 기해 (명 헌종 成化 15년, 1479)에그를 낳았으니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청수하고 미목(眉目)이 그림과 같아서 바라보면 진간(塵間)3)의 속인과 같지 않고 천재 또한 비상하여 4세 때에 벌써 독서를 할 줄 알았고 8세 때에는 글의 대의(大義)를 약해(略解)하며 15세 때는 능히 문장을 이루니 당시 이판(吏判)으로 있던 신용개(申用漑)가 한번 보고 크게 기특히 여겨 자기의 사위를 삼았었다.
3)진간(鹿間):더러운 세상. 속세․
그리고 17세 되던 해 즉 연산군 원년 을묘(명 효종 弘治 8년)에 진사(進士)하고 그 익년 병진에는 문과 급제를 하며 즉시 홍언충(洪彥忠;寓菴)과 같이 호당(湖堂)에 뽑혀 들어가니 그의 재명(才名)이 일시 세상에 떨치게 되었다. 그런데 때에는 마침 천변(天變)이 있으므로 그는 동료들과 같이 연명하여 시정(時政) 10여 조를 논하니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조정에 올린 정론(政論)으로 그때에 비록 채용은 되지 않았으나 시정의 폐막4)을 들어서 신랄통절하게 논의한 것은 능히 선진의 노재고관(老宰高官)들을 경탄하게 하였다.
4)폐막:그릇된 폐단.
그리고 그는 또 20 내외에 천추사(千秋使)를 따라서 명나라에 갔었는데 명의 노유석학(老儒碩學)에게 한자의 훈(訓)을 결의하였더니 그들은 처음에 그의 연소한 것을 보고 퍽 업수이 여겨 답응도 잘 하지 않더니 급기야 그와 한번 수작을 하여 보고는 모두 그의 기재에 놀라 감탄하며 매우 경애하였다.
그는 귀국한 후 홍문관 정자(正字), 수찬(修撰) 등 청관(淸官)을 역임하고 에 5개년을 있는 동안에 무슨 일이나 잘못된 것을 보면 조금도 기탄함이 없이 항상 직언 극간하니 폭군 연산도 매우 그를 두려워하고 따라서 그의 직언하는 명성이 조야에 떨치었다. 그러나 그 반면에는 주위의 인물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게 되었던 중 그는 또 상소하여 당시 권세가 당당한 유자광(柳子光)의 음사(陰邪)5)한 것과 또 성준(成俊), 이극균(李克均) 등의 아비부정(阿比不正)한 것을 극론(極論)하니 그 무리들은 모두 그를 기오원한(忌惡怨恨)6)하여 다른 일로 죄에 얽어 옥에 하(下)하게 되니 그의 신명은 일시 불측의 화를 입게 되었었다.
5) 음사(陰邪): 은밀하고 사악함.
6) 기원한 (忌惡怨恨): 거리끼고 싫어하며 원한을 가짐.
그러나 그는 원래 강직한 까닭에 문초하는 대로 조금도 기탄과 은휘(隱諱)함이 없이 사실대로 직대(直對)하니 옥관도 어찌하지 못하고 그냥 파직만 시키고 방석(放釋)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자기가 세속과 서로 맞지 않는 것을 깨닫고 그만 정계를 단념하고 이어 산수간으로 방랑하며 밤낮 시주(詩酒)로 자오(自娛)하다가 연산군 10년 갑자에 다시 지제교(知製敎)가 되니 그것은 그때 부득이한 사정으로 끌려 재차 조로(朝路)에 출각(出脚)한 것이요, 그의 본의는 아니었던 까닭에 항상 스스로 탄식하여 말하되
“어찌하면 산수 좋고 한적한 곳에 가서 집을 짓고 수일경(數日耕)의 밭을 갈며 날마다 농촌의 늙은이들과 같이 추축(追逐)하며 술이나 먹고 마음대로 놀다가 죽을까….”
하더니 필경 여의치 못하고 그대로 정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그해 4월경에 마침 관(館)의 동료들이 서변에 축성하는 것이 불리하다고 반론을 일으키는데 먼저 그 수의자(首議子) 유자광을 논핵하였더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그들을 모두 하옥하고 엄치(嚴治)하게 되었는데 그는 마침 출외부재(出外不在)하였다가 뒤에 돌아와서 그 일을 알고 즉시 항쟁의 상소를 하되 하루에 3·4차씩 10여 일 동안을 계속하여 하니 연산군도 그의 직언 극론에 감심하였던지 하옥하였던 여러사람들을 방석하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또 유자광의 죄악을 논핵하니 자광 일파는 그를 더욱 원한히 여기던 때에 마침 연산군이 그 생모 윤씨(성종 폐비)를 성종의 묘에 배향코자 하는데 권신(權臣)들은 대개 그 일을 찬성하나 사림파에서는 그 일을 반대하므로 연산군은 크게 노하여 그 반대의 수론자(首論者) 응교 권달수(權達手)를 죽이고 이행을 충주에 장류(杖流)하니 평소부터 사림파를 질오(惡)하던 영상 신수근(愼守勤), 형판 신수영(愼守英), 좌상 유순(柳洵), 좌참찬 임사홍(任士洪) 등은 그 기회를 타서 사림파를 일망타진으로 살해하려고 연산군의 총희(寵姬)와 환관 최건(崔虔)을 밀촉(密囑)7)하여 무고하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배가 그전 무오의 한을 품고(무오사화) 당을 지어 역모를 한다….”
하니 연산군은 대경 대노하여 즉시 무오에 귀양보냈던 김굉필 외 다수한 사류를 죽이고 또 전날 폐비 당시에 관계가 있던 윤필상(尹弼商), 한치형(韓致亨), 정창손(鄭昌孫), 한명회(韓明澮), 어세겸(魚世謙), 심희(沈僧), 이파(李坡), 이세좌(李世佐), 김승경(金承卿), 이극균, 성준, 권주(權柱) 등은 소위 2.6 간신(12인의 뜻)이라 하여 생존자는 죽이고 이미 죽은 자는 부관참시(剖棺斬屍)8)에, 심지어 쇄골표풍(碎骨飄風)9)까지 하며 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도 부관참시하고 기타 조지서(趙之瑞), 이계맹(李繼孟;교리), 사간 강백진(姜伯珍), 주계정(朱溪正) 이심원(李深源), 직학 심순문(沈順門), 승지 정성근(鄭誠謹) 등도 또한 화를 입게 하여 소위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 시기에 유자광은 또 평소 미워하던 박은과 그의 친근한 이행을 무함하여 이행은 충주 적소(謫所)에서 다시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고 박은은 동래로 귀양을 보냈다가 백 일이 미만하여 다시 경옥(京獄)으로 잡아올려 갖은 고신(拷訊)을 하다가 마침내 취형(就刑)하니 그는 최후까지 신색(色)이 변치 않고 다만 하늘만 쳐다보며 크게 두어 번 웃고 곧 절명하니 가련한 이 천재 시인의 나이는 그때 겨우 26세요 때는 연산군 10년 갑자(1504) 6월 15일이었다.
7) 밀촉(密囑): 은밀히 부탁함.
8) 부관참시(剖棺斬屍) : 관을 파내어 그 시체를 참함.
9)쇄골표풍(碎骨飄風):뼈를 빻아 바람에 날려 보냄.
그때에 그와 가장 가까운 친우 용재 이행은 적소에서 그의 화변(禍變)을 듣고 만시(輓詩)를 짓되(그와 同里, 同學, 同官, 同志로 연령도 1세의 차가 있고 또 죄도 같음)
“이 사람은 백운(白雲)의 마을에 있어야 하거늘
한번 속세에 귀양오니 온통 세상이 바뀌었네
광릉에 있는 지기와 단절됨을 통곡하노니
이 내 생애 다시는 큰 인물을 좇을 수 없으리”(편집자 역)10)
라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10) “斯人合在白雲鄕 一謫塵區海變桑 痛哭廣陵今已絶 此生無復聽峨洋”
그의 부인 신씨(申氏)는 그보다 일년을 앞서 졸서(卒逝)하고 4남 2녀가 있었는데 장자 인량(寅亮)은 그때 나이 15세로 장성 후 문과하여 참판까지 하고 차자 공량(公亮;아명 大春)은 장성 후 글씨를 잘 쓰고 역시 문과하여 관이 참의에 달하며 3자 종량(宗亮 ; 아명 大福)은 조요(早妖)하고 제4자 동숙(同叔)과 두 딸은 그때 모두 어렸다.
공의 묘소는 경기도 양지현(陽智縣) 동(東) 금곡촌(金谷村)에 있으니 (부인 신씨묘 우측) 묘지(墓誌)는 이행, 묘표(墓表)는 김행(金行;호 長浦, 광산 사람, 명종조 한림)이 찬하였으며 문집은 상하 2권이 있는데 공의 몰후에 이행이 수편(蒐編) 간행하였다가 그후 인조 때에 예판 오준(吳竣), 이판 조석윤(趙錫胤), 대제학 채유후(蔡裕後), 승지 박장원(朴長遠)제현(諸賢)의 제의로 호남백(湖南伯) 심택(沈澤)에게 탁(托)하여 중간(重刊)하고 또 정조 19년 을묘에 어명으로 증정(增訂) 간행하였는데 권수(卷首)에는 당시 이판 심환지(沈煥之)의 봉교근서(奉敎謹書)한 어제문(御製文)이 있다.
그리고 종조반정 초년 병인에는 도승지의 증직(贈職)을 내리고 그후 숙종 신묘에는 그의 선향(先鄕)인 경북 고령(高靈)의 영연서원(靈淵書院)에 배향하였다.
공은 총명강기(聰明强記)하기로 유명하여 어떠한 글을 대하든지 한 번만 보면 그야말로 일람첩기(一覧輒記)11)로 기억치 못하는 것이 없고 또 상하 고금에 인물의 기절고하(氣節高下)와 사업의 순박(醇駁)과 문장의 정변(正變)과 예문(禮文), 풍속까지라도 별로 모를 것이 없으며 무슨 일을 임하나 요사(料事)12)를 잘 하는 까닭에 붕배(朋輩)간에 난처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를 찾아 문의하고 또 그의 의견대로 한다면 별로 낭패가 없었다.
11) 일람첩기: 한 번 보고 쉽게 기억함.
12) 요사(料事) : 일의 처리.
평소 성격은 퍽 개결(介)하고도 웃기를 좋아하였으니 그의 싯구 중에 소자(笑字)를 많이 쓴 것이라든지 또 죽음에 임했을 때에도 신색이 변치 않고 재삼 웃기만 한 것을 보아도 족히 추지(推知)하겠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결코 보통인의 낭소(浪笑)13)가 아니요, 이 세상을 모두 비웃는 비소고소(鼻笑苦笑)였다.
13) 낭소(浪笑):실없는 웃음.
그가 화를 당한 것도 직접원인은 너무 직언한 데 있지만 간접원인은 이 세상의 부귀자, 권세자 들을 모두 비웃은 데 있었다. 그가 불행히 연산군 시대에 태어났기에 그렇지 만일 세종이나 성종시대 혹은 정조시대에 태어나서 그 문장을 완성하고 또 직언 극간의 개성을 잘 발휘할 수 있었다면 그는 상당한 대문호 대시호(大詩豪)가 되는 동시에 강직한 대보필지신(大輔弼之臣)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적으로는 서울의 백악산(북악산) 남록(신무문 밖 후록)에 대은암(大隱巖)과 만리뢰(萬里瀨)가 있으니 그것은 원래 영상 남곤(호 止亭)의 집 뒤에 있는 암석과 간곡(澗谷)으로 그가 그렇게 명명하고 시(詩)를 제(題)하였으니 즉
“주인이 산봉우리에 있으니
내 집의 화로가 피어오르고
주인이 산골짜기에 있으니
내 집의 처마엔 고인 빗물뿐
주인이 관직이 높아 세력이 왕성하니
문 앞엔 안부 드리는 거마(車馬)가 몰려 있네
3년에 하루는 울타리를 엿보지 않아
산신령의 꾸짖음에 응수하니 구차하구나
선비가 아닌 손님이 찾아오니
주인과 더불어 오랫동안 조회하네
문 앞을 지나도 차마 들어갈 수 없어
계곡 따라 노를 저어 돌아오니 역시 어지럽구나
바위 틈에서 잠깐 휴식하니
풍경과 여울은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고
나를 위해 울어 주는 학과 원숭이의 울음소리에도 두려움이나 사무침이 없구나
주인은 금옥(金玉)을 여러 번 싸서 비장하고 있고
이미 굳게 장식한 상자를 꿰매어 봉했으니 흔쾌히 주겠는가
한밤중에 계산(溪山)이 변한다 해도 믿지 못하고
대낮에 해를 향해 저물 때까지 오랫동안 앉아 있을 뿐이네
백운(白雲)은 마음과 생각이 미치지 않는 끝없는 곳에 멀리 있을 뿐이고
나는 병이 있어 오랫동안 앓고 있으니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하구나”(편집자 역)
라 하고 또 제(題)하여 왈
“대은암 앞의 눈이
봄에 내리니 한층 신기하구나
우연히 청흥산에 나가 보니
주인과 함께 못한 혼자 우는 짐승들이 가까이 있구나
길게 탄식하고 시문을 천천히 지으며 그대 집안의 손님이 나가기를 기다리네.
도리어 두렵고도 놀라운 것은 지금이라네” (「동국여지승람」 한성부川條 아래 참조) (편집자 역)
공의 시와 문에 있어서는 지금에 우리가 특별한 찬사를 드리지 않더라도 이미 전날에 여러 대가 거장들의 정평이 있었으니 즉 당시에 지정 남곤은 그의 시를 한번 보고 크게 칭탄하되
“이것은 정말 천재로 우리 동방에 그러한 작품이 있은 지 오랬다…”
하였고 그후 선조 때, 대시인으로 유명하던 최간역(崔簡易;입), 권석주 (權石洲;필) 양 선생은 항상 말하되
“읍취헌의 시는 동국(東國)의 제일이라….”
하고 또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공의 유집 중간서(重刊序)에 운하였으되
“내가 어렸을 때에 최간역, 권석주 양공에게 읍취의 시가 동국 제일이라는 말을 들었더니 급기야 공의 문집을 본즉 그 시는 격(格)이 방일하여 황태사(黃太史)로 더불어 가히 안행(應行)14)할 만하고 문(文)은 또한 아건(雅健)하여 크게 서한(西漢)을 핍(通)하였는데 그 망실(室) 신씨의 행장문(行狀文 ; 공의 문집 중에 망실 신씨 행장문이 있음) 같은 것은 비록 한창려(韓昌黎;退之)가 다시 지어도 그보다 더 할 수 없은즉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라….”
하였고
또 시강원찬선(講院贊善) 김행(金行)은 공의 묘표(墓表)를 찬한 가운데 공의 시를 평하여 왈
“신정(神情)이 쇄락하고 기격(氣格)이 종일(縱逸)하여 물(物)에 속박이 되지 않고 상시민속(傷時悶俗)과 감분무료(感憤無聊)한 데 이르러서는 왕왕 비가호축(悲歌)의 음(音)이 있다…….”
하고
또 운하되
“공(公)의 시는 최간역, 권석주가 모두 추복(推服)하고 문간공(文簡公)도 또한 천재 극고(天才極高)에 동국 절조(東國絶調)라 한 까닭에 그로 말미암아 공의 문장이 크게 세상에 행하게 되었다….”
하였으며
유득일(兪得一)은 또 공의 유집(遺集) 서문에 운하였으되
“공의 시는 천기(天機)에서 나오고 인공을 가(假)치 아니하므로 경(境)을 우(遇)하여 정(情)을 서(抒)하며 다른 사람들의 능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곡진하게 썼다. 그것을 중국 작가에 비하면 간재(齋)나 방옹(放翁)같은 이들도 오히려 공에게 손색이 있다.”
고 하였다.
14) 안행(雁行): 기러기가 줄지어 날 듯 나란히 감.
그리고 정조대왕께서는 당시(19년 을묘) 이판 심환지에게 명하여 공의 문집 권수(卷首)에 어제문을 쓰게 하셨는데 그 어제문 중에는 왈하되
“읍취는 시를 선(善)히 하였는데 국풍의 유향(遺響)이 있어서 동방절학(東方絶學)의 창(倡)이 될 만하다. 나는 특히 그 시를 애(愛)하는바 그 시는 거의 시의 본(本)이 될 만하다.”(중략)
하시고 또 운하되
“후세의 능시(能時)로 이름난 자가 거개 표(標)가 고(高)하고 기(己)를 양(揚)하여 스스로 소단(騷壇)15)에서 우이(牛耳)를 집(執)하였다고 칭하지마는 홀로 옵취의 시는 독특한 취의 시일 뿐이다…… (중략)”
하시고 또 말씀하시되
“이 문집의 증정은 내가 춘제(春邸 ; 동궁저)에 있을 때에 하여 동룡강협(銅龍講篋)에 두었더니 들으매 그의 후손이 영현(嶺縣)에 재(宰)가 되어있다니 차천로의 「오산집(五山集)」을 인반(印)한 근례(近例 ; 정조 15년 신해에 오산집의 간행을 명함)에 의하여 도신(道臣)에 명하여 간행케 하라.”
하셨다.
15) 소단(騷壇):문단(文壇).
이상에 있는 여러 분의 평만 가지고 보더라도 그의 시가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족히 짐작하겠거니와 여기에는 세상에서 많이 회자하는 그의 시 몇 편을 소개하고 각필(擱筆)16)하기로 한다.
16) 각필(筆): 쓰던 글을 멈추고 붓을 놓음.
병안중차우인운 증택지(病眼中次友人韻 贈擇之)
“눈 가리고 깊은 곳에 머무니 문을 열 수 없어
취헌이 한가히 반쯤 드리운 주렴으로 산을 바라보니
외롭기가 조롱새 같아 긴 시름에 빠지네
어리석기가 가을파리 같아 돌아올 추위를 싫어하고
점점 마르고 쇠약해지는 늙은이의 모습
백년 신세, 누군들 비웃지 않으리
세상에 나감이 멀고도 아득해 울면서 몸을 숨기네”(택지는이행의 자)(편집자 역)
재화택지(再和擇之)
“깊은 가을 나무의 낙엽이 문지방을 덮고
지게문 방 창문에는 일면이 모두 산이라
비록 술이 있어도 누구와 함께 마시리
이미 추풍우(秋風雨)는 추위를 재촉하고
하늘은 내게 궁한 상(相)을 부여하니
국화 또한 사람과 더불어 좋은 얼굴이 아닐세
나부끼는 낙엽은 걱정스레 땅에 딩구니
병든 눈으로 하여 가르칠 수 없으니 부질없이 침잠하나니” (편집자 역)
복령사(福靈寺)
“가람(伽藍)은 곧 신라의 옛 것이라
천불(千佛)은 모두 서쪽 축(竺)나라로 갔다오고
옛 신인(神人)을 따라서 흙덩이가 혼미한데
지금의 복(福)땅은 천대(天臺)와 같구나
봄그늘은 비를 부르고 새는 고목과 이야기하고 정겨운 바람이 없으니
홀로 애달파진다
만사를 큰 웃음으로 함께 하지 못하고
청산에서 세상을 보니 단지 먼지뿐이로다” (편집자 역)
야와(夜臥)
“머리맡에서 시를 읊으나 쓸 수가 없고
노새와 멍에 진 세 마리 말은 마구간에 누운 채 다시 울고
밤 깊어 가늘어진 달은 초승의 그림자일세
산은 고요하고 차가운 소나무가 홀로 소리를 내고
늙은 비복이 불을 다루는 소리
부인이 남편을 부르며 술을 권하네
취기가 와 몸을 감싸서 길게 드러누우니
가슴에 불평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네" (편집자 역)
영보정(永保亭)
“땅은 핍박하니 천 이랑이나 바다에 빠져 있고
산은 열렸으나 오히려 한 번의 밀물을 받아들이네
급히 부는 바람이 안개를 흩으니 물은 거울과 같네
요즈음엔 사람과 새도 없이 홀로 소요하니
객(客)의 속마음은 매번 싸늘한 번뇌가 되고
날이 저무니 다시 옛 동산을 생각하네
부지런히 읊으며 소일하나 새 말은 나오지 않고
수심에 겨워 보니 스러지는 빛이 아스라히 멀구나(其一)
땅의 두드림이 나르는 날개가 나아가는 듯하고
누각은 흔들거리는 듯하나 봉래산을 치지 못하네
북쪽을 바라보니 구름산이 지축 끝을 덮으려고 하니
남에서 가져오는 의복이 자랑스럽구나
바다 기운은 안개를 만들어 비를 내리고
물결은 하늘을 뒤덮어 홀로 바람을 일으키네
소문을 들어 어두운 마음이 새의 모양이고
울부짖으며 앉으나 경계가 텅 빔을 깨닫는다”(其四;其二,其三은 생략함) (편집자 역)
우중유회택지 (雨中有懷擇之)
“찬 비는 국화꽃에 좋지 않은데
가까운 사람 술항아리 작음을 아네
문 닫고 있노라니 단풍잎 지고
시를 얻으니 흰머리 새로워지네
정들어 친한 벗 즐거이 생각하니
적막한 새벽에 시름 더해지누나
언제나 정다웁게 마주 앉아서
웃으며 따뜻한 봄을 보노라” (공이 20세 내외부터 백발이라 칭함)(전규태 역)
효망(曉望)
“성그런 새벽별 바다에 드리우고
다락이 높다 보니 추위가 기어드네
이몸 외엔 높넓은 하늘과 땅이건만
끊임없는 호각소리 자리에 자자하다.
먼 산은 안개인 양 가물가물 눈에 들고
지저귀는 새소리 어느 새에 봄이구나
취함도 어제려니 으례사 깨리언만
시흥도 지루코나 서로가 어울리니” (이병주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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