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古岸子
元凱傳癖- 元凱에게는 左傳을 좋아하는 習癖이 있었다.
晉書
晉書에 일렀다.
杜預字元凱.
杜預의 字는 元凱이다.
旣立功之後 從容無事.
晉나라에서 공을 세운 뒤에 조용하고 일이 없었다.
乃耽思經籍 爲春秋左氏經傳集解 又參考衆家譜第 謂之釋例.
又作盟會圖‧春秋長歷 備成一家之學.
이에 經籍을 耽思하여 《春秋左氏經傳集解》를 만들고 또 諸家의 系譜를 참고하여 《釋例》라는 것을 만들었다.
또 《盟會圖》와 《春秋長歷》을 만들어 一家의 학문을 갖추어 이루었다.
比老乃成.
이런 것들은 큰 일거리였으므로 노년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又撰女記讚.
또 <女記讚>을 지었다.
當時論者謂 預文義質直.
당시의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杜預의 문장은 질박하고 直筆이다.”라고 하였다.
世人未之重.
世人이 그를 중히 여기지 않았다.
唯秘書監摯虞賞之曰
左丘明本爲春秋作傳. 而左傳遂自孤行.
釋例本爲傳設. 而所發明 何但左傳.
故亦孤行.
오직 秘書監 摯虞가 칭찬하였다.
“左丘明이 본래 <春秋>를 위하여 傳을 짓자 左氏傳이 드디어 스스로 단독으로 간행되었다.
<釋例>도 본래 <좌씨전>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밝힌 것은 어찌 <좌씨전>뿐이겠는가?
그러므로 역시 단독으로 간행되었다.”
時王濟解相馬 又甚愛之.
이때 王濟가 말을 감별할 줄 알고 또 몹시 말을 사랑했다.
而和嶠頗聚斂.
또 和嶠는 자못 재산을 거두어들였다.
預嘗稱 濟有馬癖. 嶠有財癖.
두예가 말한 적이 있다.
“왕제는 말을 좋아하는 習癖이 있고 화교는 재물을 좋아하는 習癖이 있다.”
武帝聞之謂曰
卿有何癖.
武帝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그대는 무슨 벽이 있는가?”
對曰
臣有左傳癖.
대답하였다.
“臣에게는 <좌씨전>의 習癖이 있습니다.”
終司隸校尉.
司隷校尉로 관직을 마쳤다.
位特進 贈征南大將軍.
죽은 후 지위를 特進시키어 征南大將軍을 贈職했다.
初預好爲後世名 常言高岸爲谷 深谷爲陵.
처음에 두예는 後世에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항상 말하기를, ‘높은 언덕은 골짜기가 되고 깊은 골짜기는 언덕이 되기까지’라고 했다.
刻石爲二碑 紀其勳績 一沈萬山之下 一立峴山之上. 曰
焉知此後不爲陵谷乎.
그러므로 돌을 깎아서 두 개의 비석을 만들고 그 勳績을 썼는데, 하나는 萬山 아래에 묻고 하나는 峴山 위에 세우면서 말하였다.
“어찌 이후에 언덕과 골짜기가 되지 않을 줄 알리오?”
[註解]
▶晉書- 《晉書》<列傳> 4의 기사임.
▶譜第- 世統의 註序의 기록.
▶摯虞- 晉나라 長安 사람, 武帝 때 太子舍人에 발탁되고 뒤에 太常卿이 되었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
▶左丘明- 魯나라의 太史로서 공자의 《春秋》에 해석을 붙인 《春秋左氏傳》을 지었음.
▶春秋- 공자가 저술한 魯나라의 역사책.
▶左傳- 공자의 《春秋》를 左丘明이 해설한 책.
▶王濟- 晉나라 사람. 젊었을 때 글재주가 있었으며 勇力이 남보다 뛰어났다. 武帝의 딸 常山公主에게 장가들어 늘 황제를 뵈었으나 일찍이 인물을 의논하지 않고 淸談을 잘했다.
▶嶠- 和嶠. 晉나라 西平사람. 젊어서 風格이 있고 潁川太守가 되었는데 정치가 맑고 간단했다. 惠帝 때 散騎常侍에 이르렀는데 집이 부자인데도 성질이 지극히 인색해서 杜預가 그에게 錢癖이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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