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蒙求(몽구)269 蘇武持節(소무지절) 본문
by 耽古書生
蘇武持節- 蘇武가 符節을 굳게 소지하다.
前漢蘇武字子卿 杜陵人.
前漢의 蘇武는 字가 子卿이니 杜陵人이다.
武帝時以中郞將持節使匈奴.
武帝 때 中郞將으로서 符節을 가지고 匈奴에 사신으로 갔다.
單于欲降之 迺幽武置大窖中 絶無飮食.
單于가 그를 항복시키려고 큰 구덩이 속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않았다.
▶窖: (교) 채소 따위를 겨울에 보관하는 구덩이
(조) 부억
天雨雪. 武臥齧雪 與旃毛幷咽之 數日不死.
눈이 내리자 소무는 누워서 눈을 입에 물고 깔개인 모직물의 털과 눈을 같이 삼켜서 수일 동안 죽지 않았다.
▶齧: (설) 물다
▶咽: (인) 목구멍 (열) 목이메다 (연) 삼키다
匈奴以爲神 乃徙武北海上使牧羝 羝乳乃得歸.
이에 흉노는 그를 神이라 여기고 北海로 옮기고 숫양[羝]을 치게 하고, 숫양이 새끼를 낳으면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武杖漢節牧羊 臥起操持 節旄盡落.
소무는 漢나라 부절을 꼭 쥐고 양을 치는데, 눕거나 일어날 때도 부절을 놓지 아니하여 부절의 털이 다 빠졌다.
昭帝立 匈奴與漢和親. 漢求武等.
昭帝가 즉위하면서 흉노와 한나라가 화친하자, 한나라에서 소무 등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匈奴詭言武死.
흉노는 거짓말로 소무가 죽었다고 했다.
常惠敎漢使者言
天子射上林中得鴈. 足有係帛書. 言在某澤中.
소무와 함께 붙잡혀 있던 常惠가 한나라에서 온 使者더러 다음과 같이 말하게 시켰다.
“천자가 上林苑에서 활을 쏘아 기러기를 떨어뜨렸는데, 기러기 발에 帛書가 매어 있었고 거기에 쓰기를, ‘소무가 어느 못가에 있다.’라고 하였다.”
由是得還. 拜爲典屬國.
이 까닭에 소무는 還國할 수 있었고 典屬國에 임명되었다.
秩中二千石 賜錢二百萬‧公田二頃‧宅一區.
年俸은 2천 석을 주고 돈2백만 냥과 公田 2頃과 주택 한 채를 하사했다.
▶秩中二千石: 汉制,三公号称万石,其俸月各三百五十斛:其称中二千石者月各百八十斛;二千石者百二十斛;比二千石者百斛;千石者九十斛;比千石者八十斛;六百石者七十斛;比六百石者六十斛;四百石者五十斛;比四百石者四十五斛;三百石者四十斛;比三百石者三十七斛;二百石者三十斛;比二百石者二十七斛;一百石者十六斛。(按:一斛即是一石)
武留匈奴十九歲.
소무가 흉노에서 머무른 것이 19년이었다.
始以强壯出 及還鬚髮盡白.
처음에 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어졌다.
至宣帝時 以武著節老臣 令朝朔望 號稱祭酒.
宣帝 때에 이르러 소무는 충절에 드러낸 老臣이라 하여 초하루와 보름에만 조회하도록 했고 祭酒라 부르게 했다.
年八十餘卒. 後圖畵於麒麟閣 法其形貌 署其官爵姓名.
80여 세에 卒하니 그 뒤에 麒麟閣에 그의 모습을 본떠서 그렸고, 그의 官爵과 성명을 써놓았다.
[註解]
▶前漢- <한서> <열전> 24에 있는 이야기임.
▶中郎將- 秦代로부터 唐代이전까지 殿門과 宿衛를 맡은 벼슬아치의 장관.
▶匈奴- 인종의 이름. 기원전 3세기경부터 약 3백년간 지금의 몽고 지방에서 유목하던 터키족의 일종.
▶單于- 흉노왕의 칭호.
▶上林- 임금의 동산. 苑과같다.
▶帛書- 비단에 쓴 편지.
▶典屬國- 屬國의 일을 맡은 벼슬.
▶頃- 1頃은 百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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