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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非打算性向(비타산성향)

耽古樓主 2023. 6. 4.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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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非打算性向(비타산성향)

 

□ BBC 프로듀서의 打算性

 

아프리카 케냐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악어와 하마의 군서지(群棲地) 머치슨 폭포의 상류를 관광하고자 관광회사에 차편을 신청했다. 한데 관광철이 아니라서인지 손님은 필자하고 영국 BBC방송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프로듀서의 부부 단 세 사람이었다. 관광회사측은 이맛살을 찌프리겠지만 우리는 꽤 오붓한 여행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바로 친해질 수가 있었다. 그는 직업상 아내와 항상 떨어져 살게 되기에 투정이 심하여 이 투정을 소화시키기 위해 자신은 원치도 않는 이런 여행에 이처럼 連行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한 소읍에서 점심을 같이하였다. 5불짜리 식당(부페)이었다. 다 먹고 나서 필자는 이들 몫까지 합하여 15불을 치러 주었다. 아는 사람으로 한 상에서 같이 밥을 먹었을 때 그 돈은 그중 한 사람이 치룬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있어 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어떤 저의가 개재된 것도 아니요 또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요인도 없다. 그저 무의식중에 한국인은 그런 행위를 하게끔 되었다. 하고 나서도 내가 점심을 샀으니까 어떤 댓가를 바라는 법도 없다. 곧 한국인의 체질화된 의식 가운데 비타산적 요인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위하도록 한다.

 

한데 구미인(歐美人)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이 부부는 내가 그들 몫까지 돈을 치루는 일을 만류했지만 이미 계산이 끝난 후였기에 이들은 어딘가 어색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행을 계속했다. 한데 점심을 먹기 이전하고 그 이후하고 이 프로듀서 부부의 행동이 판이하게 달랐다. 그 이전에는 커피 한잔 먹고 가자고 권하지 않더니 그 이후에는 「커피 부리크」(부리크는 우리 말의「참」에 해당되는 말)다 「아이스크림 브리크」다 「바나나 브리크」다 소읍(小邑)을 지나칠 때마다 차를 세우고 먹을 것을 사는 것이었다. 아마 대여섯 차례는 더 샀던 것 같다. 한데 어느 한 브리크를 끝으로 친구 두번 다시 쉬어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칼로 자른 것처럼 어느 시점을 한계로 하여 브리크의 친절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필자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프로듀서가 대여섯 차례 쉬면서 썼던 돈을 추산해 보았던 것이다. 커피 값, 아이스크림값, 콜라 값, 팬케이크 값, 바나나 값 하고 따져보니까 약 10불어치가 되었다....

 

아찔해졌다. 원 저토록 정밀하게 타산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결국 점심 먹을 때 저희네 부부가 내야 했을 10불을 나를 위해 소비한 것이다. 그리고 그 10불이 다하자 그런 타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언제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셨으며 바나나를 먹었느냐는 듯이 하늘의 뜬구름만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대개의 한국인은 배신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사람은 사람과의 인정 때문에 인간이다. 그 사이가 반드시 금전의 타산으로 이뤄져야 하는 가에 대한 모멸감마저도 곁들인다. 그사이가 정과 마음의 성의로 이어진 한국적인 인간 측면에서 받는 일종의 문화적인 충격인 것이다.

 

곧 타산적 인간관계로 형성된 문화유형의 충돌인 것이다.

 

□ 李浣將軍의 銀片故事

 

이 한국인의 비타산성이 어디서 연유되었을까? 선비사상이다.

 

선비의 조건은 재물로부터 자신을 완벽하게 소외시키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 왜냐면 재물은 선비가 이상으로 삼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해치는 가장 직접적인 요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재물의 단위인 금전은 저주하고 멀리해야 할 악마였다.

 

이런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께 돈 2전만 달라고 했다가 호통을 맞은 일이 있다. 당시 1전은 눈깔사탕 5개였다. 나눠 먹을 친구는 3명이고 1전 어치 사면 하나 앞에 하나씩 먹으면 2개가 남으니 그 두 개 처리하기가 난처하였다. 그래서 2전 어치 사면 3개씩 먹고 주인인 내가 하나 더 먹으면 된다는 면밀한 계산 끝에 2전 달라고 했던 것이다.

 

한데 할아버지는 「버릇없이 그따위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느냐」고 영문 모를 호통을 쳤던 것이다. 그 의문을 풀만큼 자라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그 돈 2전만 주시오 하지 않고 돈 한 푼만 주시오 했다면 화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면「돈 한 푼」과 「돈 2전」은 전혀 그것이 뜻하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돈 한 푼」은 막연한 돈의 보통명사로서 어떤 타산이 따르지 않는 표현이다. 하지만 돈 2전」은 이미 타산이 따른 표현이며 할아버지를 화내게 한 것은 바로 이 타산적 금전 단위를 입에 담았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곡식도 몇 말, 몇 되 구체적으로 분량을 말한다는 것은 상스럽게 여겼다. 이를테면, 몇 식구가 며칠 먹을 것을 주라든지 몇 되박 더 주라든지 타산적 단위를 말한다는 것은 기피했다.

 

비단 금전을 말하는 것 이외에 금전에 손을 댄다는 것도 터부였다. 마치 정신을 꾸중거리는 세균이라도 우굴대는 양 돈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선비들이 기방(妓房)에서 놀다가 화대(花代)를 준다든지 또 심부름꾼에게 팁을 준다든지 집안 아이들에게 세배돈을 줄 때는 돈을 접시에 얹어 오도록 하고 젓가락으로 집어서 주었던 것이다.

한국말로 팁을 젓가락 돈이라고 함은 이에서 연유된 것이다.

 

효종때 명장 이완장군(李浣將軍)은 그의 몸에 은편(銀片)을 지니고 다녔었다. 이 문제는 당시 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비 사회에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었다.

 

명문의 양반이 몸에 돈을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체통에 어긋난 일일 뿐더러 선비로서 법통을 어지럽히는 행위라고 지탄했으며 이완장군을 두둔하려는 사람들도 장군이 병영에 옮겨다녀야 하는 특수한 여건을 감안했을 뿐 돈을 지니고 다닌다는 행실을 변명하는 법은 없었다.

 

그리하여 고집이 센 가문에서는 이 완장군의 후손과 혼담이 나오면 이 은편고사(銀片故事)를 들추어 기피하곤 했다 한다. 토지문서도 재물이라 하여 선비들은 직접 그 문서에 손대는 법이 없었다.

 

토지매매 등 문서를 만져야 하는 일이 있으면 종을 시키되 위임장을 써서 그 종으로 하여금 재산 매매행위를 대행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 같은 대리매매행위(代理賣買行爲)는 구한말의 토지등기제(土地登記制)가 실시되면서 큰 혼란을 빚었고 그 이후 토지소유 분규의 가장 잦은 원인을 이루기도 했다.

 

곧 토지 등기가 시작되었을 때도 선비나 양반들은 손수 등기를 하지 않고 위임장으로 대행했기로 흑심을 품은 위임자가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는 사례가 많았을 뿐 아니라 악의가 없었다 해도 종 이름으로 등기한다는 사실이 종의 재산이 된다는 그런 근대화된 소유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 통치의 官에 이름을 올리기 싫은 선비의 고집이 작용하여 종 이름으로 등기시키는 사례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 후 종은 신분적으로 해방하여 법률적 개인으로 독립되자 재산은 엄연히 남의 것인데 등기는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어 재판 사태를 몰고온 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비타산 성향은 선비들의 재물기피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

 

□ 銀 한솥을 버리는 뜻

 

「일사유사(逸士遺事)」란 문헌에 한국인의 재물관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기사가 적혀 있다. 그것을 이에 옮겨 본다.

逸士遺事: 장지연이 조선시대의 중인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전기를 모아 편찬한 전기.

 

김학성이란 서울 사람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호구하는 한편 두 아들을 선생에게 보내서 공부를 하게 했다.

 

비 오는 어느날 처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들렸다. 메아리진 듯 약간의 울림이 있곤 해서 이상하다고 여기고 그 처마 밑을 파 봤더니 큰 가마솥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 가운데에 은(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옛 우리나라에는 외침(外侵)에 의한 난리가 있었고 재물 있는 집에서는 그것을 은으로 바꿔 집안의 깊숙한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하는 데 버릇이 들어 있었다. 대개 식구도 모르게 묻어두기에 묻은 당사자가 난리통에 죽거나 적에게 납치되어 버리면 그 땅에 묻은 은은 영원히 묻혀 있게 마련이며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발굴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옛부터 피난지로 유명한 강산에는 피난간 서울의 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금은패물은 산야에 몰래 묻어두고 몰살당한 전례가 많았기로 이것을 우연히 발굴해서 일확천금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을 두고 빗대어 말할 때 「강화섬에 가서 공산(空山)이나 뒤져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던 것이었다. 김학성의 어머니가 우연히 발견한 보물솥도 그 같은 연고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이 은을 본 어머니는 빨리 덮어버리고 제자리에 묻어버렸다. 물론 이 은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 혼자뿐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그 집을 팔고 전전하여 조그마한 오막살이에 정착하였다.

 

어느 날 남편의 제삿날에 음식을 차려놓고 그의 오빠를 청했다. 두 아들을 옆에 앉혀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아간 가장이 이 고아들을 미망인에게 맡기고, 항상 이것들을 옳게 성취시키지 못하고 또 조상의 혼령을 굶으시게 할까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내가 늙어 백발이 되고 두 아들이 성장하여 능히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지하에 가서 할 말이 있게 됐다.』

 

이어 어머니는 우연히 발견한 은을 도로 덮어두고 취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깜짝 놀라 왜 그 같은 횡재를 싫다 하고 버렸는가를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이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대꾸하는 것이었다.

 

『재(財)는 곧 재(災)인데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밖의 재앙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서 마땅히 궁핍한 것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하는데 두 아들이 아직 어릴 때에 주식(住食)의 안일에 습성이 들면 공부에 힘쓰지 아니할 것이고 만약 어렵게 자라나지 않으면 어찌 재물을 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집을 옮겨서 스스로 단념하였다. 집에 저축된 약간의 재물은 모두 나의 열 손가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 창졸간에 닥친 재물과는 비할 것이 아니다.』

 

또 다음 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영의정 김육의 아들이요 인조·효종·현종조에 육조판서를 고루 지낸 김좌명 집에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최술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과부인 그의 어머니가 현명하여 비록 천한 일을 할지언정 올바른 도리로서 자식을 가르쳤던 것이다.

 

김좌명이 호조판서 때에 이 최술의 충직을 갸륵하게 여기어 서리(書吏)로 임명, 요긴한 직책을 맡게 하였던 것이다. 이 소리를 들은 어머니는 바로 상전인 판서를 찾아가

 

『술이를 그런 직책에 맡길 수 없으니 체직을 시켜주소서.』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김좌명이 그 연유를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대꾸했던 것이다.

 

『제가 혼자되고 나서 가난하여 술이만 믿고 살아오면서 보리밥도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술이가 대감께 잘 보여 급료를 받게 되니 이로써 저희 모자가 밥을 먹게 되었을 뿐 아니라 술이 대감 문하에서 일보는 것을 믿고 사위를 삼았던 것입니다. 술이 제 처가에 기거하면서 냉이국으로 좌반(佐飯)을 하니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며칠 동안에 사치하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재물을 맡은 직무에 오래 있으면 그 마음이 날로 달로 더하여져서 마침내 죄를 범하고야 말 것이니 외동자식이 형벌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읍니다. 대감께서 만약 술이를 안 버리면 몇 말의 쌀만 내려주어 굶어 죽지 않을 자리에 옮겨주시면 다행이겠읍니다.』

 

이 어머니의 지성에 크게 감명한 김좌명은 술이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재물을 좌우하지 않는 청직에 옮겨주고 다만 달마다 쌀과 베를 따로 넉넉히 주며 말하기를 『옛날 조철의 어머니인들 어찌 이에서 더할 것이냐.』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한다.

 

이 두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다같이 가난하고 또 선비나 양반이 아닌 서민이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천민의 어머니들이란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실(史實)은 곧 양반이나 선비사회만이 이같은 재물을 기피하는 재물관이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여느 서민이나 천민에게까지 침투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곧 이 두 어머니들의 재물관은 곧 한국인의 재물관을 대변한다 할 수 있으며 왜 재물을 기피하느냐의 이유도 이 두 어머니들이 갈파하고 있다고 본다.

 

첫째, 재(財)는 곧 재(災)라는 관념이다. 옛 우리 선조들은 분수에 맞는 재에 지족(知足)하질 않고 여분의 재(財)를 축적하면 재(災)가 따른다고 여겼다. 그 재(災)란 재(財)에 따라 붙게 마련인 불행의 요소이다. 비단 도둑이 넘나 본다는 그런 일차원적인 재앙 뿐만 아니라 財가 형성됨으로써 비례해서 늘어가는 과욕(過欲)이 형성시키는 재(災)이다. 마을 인심과 이탈되고 가문 인심과 이탈될 뿐만 아니라 부모형제의 정리까지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이 재(財)에 대한 욕심인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뿐만 아니라 재욕(財欲)에 빠지면 부정이나 남못할 일을 저질러야 하는 함정에 빠지게 되어있다. 곧 일생을 망치는 일과 직결된다.

 

또한 명예와 인덕을 크게 소중히 여겼던 시절에 이 같은 과분한 재(財)는 곧 그것을 손상시키는 가장 손쉬운 도구이기도 했다.

 

□ 財物忌避의 三要素

 

조현명이 정승으로 있을 때 喪妻를 했는데 각 영문(營門)과 외방(外方)에서 賻儀를 보내온 것이 꽤 많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자 조정승의 아들들이 저희네끼리 뜻을 같이하고 정승에게 다음과 같이 여쭌 것이었다.

 

『부의로 들어온 재물로 돈을 만들어 토지를 사시면 어떻겠읍니까. 』

 

이 말을 듣고 매우 언짢아하던 조정승은 술을 불러와 한자리에서 둬 말이나 마시고 술이 얼큰해지자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못난 것들아, 너희들이 부의로 들어온 재물을 가지고 땅을 사려고 하니 부모의 상(喪)을 이익으로 아는 소행이 아니냐. 내가 정승이 되어서도 땅을 사지 않았다 하여 굶어 죽을 걱정이라도 있단 말이냐.』

고 자탄하며 그 부의로 들어온 재물을 모두 궁한 일가와 가난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곧 재물을 탐내는 소행으로 미뤄 죽은 후 제사마저도 지내지 않을 악인이 될 것을 선견(先見)했던 것이다.

 

이처럼 재(財)는 재(災)로 연결되는 요소로 우리 선조들은 확고하게 인식하고 살았기에 아무리 가난해도 재물을 기피함으로써 인덕과 인격을 구제하려 들었던 것이다.

 

둘째, 사람이 나서 마땅히 궁핍함이 있는 줄 알아야만 한다는 그런 궁핍에의 가치투사(價値投射)를 들 수 있다.

 

인간발전의 동기, 곧 모티베이션 포착(捕捉)의 계기는 궁핍에 있다는 진리 때문에 항상 재물의 충족을 기피하였던 것이다. 住食이 충족되면 모티베이션이 없어지고 그것이 없으면 공부나 인격형성에 게을러져 폐인이 되고 만다. 부잣집 자식이 대성하지 못한다는 상식은 이 궁핍이 없거나 덜함으로써 발전동기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재물을 둔 궁핍에서 형성되는 발전에의 지기(志氣)는 반드시 궁핍한 재물을 얻기 위한 노력에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격의 전반적인 발전에 투사된다고 여겼고 따라서 옛날 법도 있는 집 안에서는 아무리 재물이 유족한 집안이라도 자제만은 항상 궁핍하게 길렀던 것이다.

 

고려의 유명한 장상(將相) 최영 장군도 그런 교육목적이 내포된 궁핍 속에서 터득한 동기 때문에 훌륭하게 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항상 「金貨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타일렀고 몇 천 글을 가르치느니보다 궁핍의 터득처럼 좋은 가르침이 없다는 신조로 최영을 가르쳤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이「견금여석(見金如石)」의 가르침을 큰 띠(帶)에 써서 종신토록 명심하였으며 그가 대성하여 국정(國政)을 잡아 위엄이 중외(中外)에 떨친 후에도 털끝만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고 집은 겨우 住食에 족할 뿐이었다.

 

세째, 재(財)에 따른 무상감(無常感)에서 재(財)를 기피하였다. 남의 집 살이하면서 보리밥으로 근근히 끼니를 이었을 때는 푸성귀 소찬도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부잣집 처가에 잠시 기거한 후로는 냉이국과 반찬도 맛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곧 사람이 맛이라는 행복은 계급의 상하나 부(富)의 다과에 아랑곳없이 평등하다는 진리에 한국인은 현명하였다. 부가 주는 물질적 행복은 따지고 보면 정신적으로 행복한 것이 못되며 일단 그 물질적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 이상의 물질적 행복에로의 상향작용(上向作用)이 작동하여 보다 많은 부를 요구하게 된다. 상향된 행복이나 아예 상향을 포기한 상태에서의 행복의 질은 같은데 상향행복(上向幸福)을 위해서는 막대한 부의 소비를 필요로 한다.

 

이 부를 얻기 위해 실덕(失德)하고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같은 우리 조상들의 재물관은 물질과 정신의 상관 관계에서 정신을 우위에 두어왔던 기본적 차이에서 재물로부터 인간과 인격을 구제하는 방향으로 슬기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재물은 기피해야 하는 악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

 

□ 孝養山의 教訓

 

이천 효양산(孝養山)은 타산이 빠르고 재물에 영리하며 약삭빠른 사람은 불행하게 하고 반대로 비타산적이며 우직한 사람은 잘살게 하는 그런 선비사상의 한 요소를 영험으로 부리는 산이었다.

 

그 산 동쪽 두메 산촌동(山村洞)에 사는 조씨(趙氏)는 적이 우둔하고 타산 속에 어두었다.

 

어느 날 그가 효양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무디어진 낫을 갈려고 깨진 옹기그릇 하나를 주워다가 물을 떠왔다. 그 물을 부어가며 칼을 가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히 물을 다 썼는데도 그 옹기그릇에는 물이 담겨져 있곤 했던 것이다. 신기하게 생각한 조씨는 그 그릇에 흙을 한 번 담아 보았다. 쏟으면 쏟을수록 그 그릇에서는 흙이 솟아 나오는 것이었다. 담배를 담아 보았더니 담배도 그러하였고 쌀을 담아 보아도 그러하였다.

 

조씨는 천하에 없는 보물을 얻은 것이며 그 보물로 그의 여생은 행복과 영화와 치부를 보장받은 것이 된다. 하지만 이 조씨는 그것을 타산할 만큼 약삭빠르지가 못했다. 다만 이 그릇의 영문을 몰라 그 마을의 영리하고 약삭빠른 사람들에게 보였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이 쌀을 얹고 은전을 얹을 때는 그 영험은 사라지고 하나의 깨어진 옹기그릇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효양산의 설화는 非打算性에 가치를 부여한 선비사상이 어느 만큼 서민에게까지 침투해 있으며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정착했는가 하는 좋은 본보기라 할 것이다.

 

거지에게 보리쌀 한 줌 집어준 것까지 헤아리고 있는 며느리는 박복하다는 말이 있다. 가계(家計)에 치밀하고 타산성이 유난히 뛰어난 똑똑한 주부가 불행해지는 율이 높고 또 그런 성향의 사람일수록 한국 사회에 있어서의 우정지수(友情指數)가 낮아 소외감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비타산의 정신적 가치를 설파한 영국의 「허슬리」는 물질문명이요 기계문명이며 타산문명인 서구문명의 몰락은 필연이라고 전제하고 정신의 큰 울안에서 타산은 그만하자고 외쳤다. 「신프로이드」학파는 타산 속으로 예리해 있는 현대인의 정신생리를 위해 미련해질 수 있는 예방 정신병학을 제창하고 있기도 하다.

 

선비사상의 비타산성 요소는 현대문명 사회의 비젼을 제시하고 있으며 효양산은 그런 뜻에서 상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할 것이다.

 

이 비타산성은 한국인을 비생산적으로 하고 가난하게 된 요인으로 지탄받아 온 바로 그 요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산은 물질적 차원의 것이요 여기서 말한 선비사상의 비타산성은 정신적 차원이기에 반드시 이 정신적 가치가 물질적 마이너스를 가져온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비타산성은 정신을 금전의 노예로 하지 말고 오히려 금전을 정신의 노예로 하므로써 인간이나 정신의 존엄성이 물질에 의해 좌우되지 않게 하기 위한 有數한 가치체계인 것이다. 다만 이 가치체계가 고식화(姑息化)하여 재물 경시 · 경제산업의 천시 풍조를 빚게 했음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치체계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는 법이며 한국인은 한국적 가치체계에서 부정적인 면을 과장 확대하여 열등시하는 데 체질화되어 있음을 감안, 비타산성이 한국인을 가난하게 했다는 종래의 인식을 달리해야 할 줄 안다. 자꾸만 좁아지는 이 지구상에서 한국인을 가장 한국인답게 보존하는 길은 이 비타산성의 고수라고 보며 이야말로 한국적 휴머니즘의 특성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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