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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3.抵抗性向(저항성향)

耽古樓主 2023. 6. 10. 09:43

선비의 의식구조-抵抗性向(저항성향)

3. 抵抗性向

 

青盲抵抗

 

권세에 저항하는 행동유형 가운데 한국 고유의 이색적인 한방식이 여말(麗末)부터 일제(日帝)까지 지속되어 왔었다.

 

청맹(靑盲)이라 하여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장님 행세를 하고 불의의 세상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소외시키는 레지스탕스다.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그에게 있어 암흑이며 이 암흑을 소외시키는 청맹 선언을 하면 임금이나 조정에서도 그 인위적 장님의 청맹행위를 보장해줘야 했다. 그 청맹행위에 반감을 품은 짓궂은 임금이나 세도가는 이 청맹을 하는 이가 청맹을 깨뜨리는 일이 있는가를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상주시켜 감시를 하기도 했다.

 

청맹에 관한 기록은 여말 이성계의 득세에 대한 저항 수단으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저항수단은 우리나라에서 독창된 것이 아니라 후한시대에 이업(李業)이라는 이가 청맹을 칭하고 피세(避世)했다는 기록 후한서 <이업전>이 있고 청맹을 핑계대고 불사한다는 어귀가 중국 문헌인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성계가 정변으로 정권을 잡자 정온(鄭溫)이 진주에, 조운흘(趙云仡)은 광주(廣州)에 낙향해서 각기 청맹 레지스탕스를 벌였다 한다. 정온은 여말의 정승 정석(鄭碩)의 아들로 사헌대부(司憲大夫)였었다. 이태조는 사람을 보내어 이 청맹 사실을 염탐하기까지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운흘이 광주의 고원촌(古垣村)에서 청맹 은거를 하고 있을 때 당시 좌의정이던 김사형이 어명을 받들고 벼슬에의 권유를 위해 고원촌을 찾아왔다. 이때 조운흘은 소매 넓은 베적삼에 삿갓을 쓰고 더듬더듬 나와 길게 읍()만 하고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김 사형은 이태조에게 가서,

 

그 뻣뻣한 고집쟁이 늙은이는 청맹뿐만 아니라 청아(靑啞)를 겹쳤더이다.

라고 고했다 한다.

 

눈뜬장님, 있는 벙어리일 뿐 아니라 조운흘은 정신 있는 미치광이인 청광(靑狂)노릇까지 겹쳐 했다. 그는 미친 척하기 위해 아미타불을 곧잘 중얼거렸고 이 아미타불의 음조(音調)에 맞추어 사람들은 조운흘 조운흘하고 놀려대는 풍조까지 있었다 한다. 이 청광 레지스탕스를 선망하는 은어로써 이조운흘 조운흘하는 경문은 후세에 전승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저항적 일생을 산 조운흘은 그의 일생을 다음과 같은 시에 집약시키고 죽어갔다.

 

누런 소를 타고 청산 옆에 있으니

추하고 추한 그 풍신은 베 한필의 가치도 없구나.

 

이태조의 정변에 이어 청맹습속이 다시 부활한 것은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세조정란(世祖靖難) 때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이맹전(李孟專)의 청맹은 유명하다. 정언(正言) 벼슬로 있던 그는 세조의 야심을 눈치채자 곧 고향인 선산 강정리(善山 綱正里)에 은거하며 청맹을 내외에 알리고 집안에 묻혀서 30년을 눈 뜬 장님으로 살다가 죽었다.

 

30년 청맹 중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해 앉지도 않는 피방(避方)도 철저히 했다 한다. 생업에 종사하지 않으니 가세는 기울어 밥 먹을 때 수저가 식구대로 없어 차례를 기다려 먹어야 했던 가난 속에서도 그 청맹의 절의(節義)를 깨뜨리지 않고 지켜내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철저한 자기 학대로 가족들은 정말 장님인 줄 알았고 부인 신씨도 그가 죽을 때 임종에 서야 거짓 장님임을 알았다 한다. <일두집(一蠧集)>

 

세조정란 때 청맹 저항을 한 사람으로 구인문(具仁文)을 들 수 있다.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였던 그는 성 삼문(成三問)과 무척 다정한 친구였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야심이 노골화하자 구인문은 관인(官印)을 던져 버리고 충청도 해미(海美)에 있는 선영(先瑩)으로 돌아가 청맹을 칭탁(稱託)하고 두문불출해 버렸다. 어느 날 홍주에서 성삼문이 이 구인문의 청맹을 문안하려고 찾아가 시로써 뜻을 주고 받으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다고 묵묵부답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후 맹장(盲杖)을 짚고 온천 나들이도 하곤 했으나 단종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다시 입산두문(入山杜門)했다 한다. <조선명신록(朝鮮名臣錄)

 

불의 시대에는 이 청맹이 반드시 부활하였으며 연산군의 악정 때는 직제학 벼슬에 있던 남포(南褒)가 적성 감악산(積城岳山)에서 청맹 은거를 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원흉 남곤의 아우인 남포는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는 청맹을 취소하고 무명베 갓에 헤어진 옷을 입고 국내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여생을 살았다.

 

青聾抵抗

 

이 청맹과 같은 유형으로 청농 · 청광이 있고 거짓 앉은뱅이도 이 범주에서 이해돼야 할 줄 안다.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정보(鄭保), 성 담수(成聃壽) 등과 더불어 이조 절의팔현(節義八賢)으로 불리운 권절(權節)푸른 귀머거리 의 전형적 인물이었다.

수양대군은 그가 쿠데타를 모의할 때 권절을 여러 번 찾아와서 술을 대작하며 은밀히 그 쿠데타를 귀뜸하곤 했다. 그는 이 불의의 음모를 씻어버리고 싶은 무한한 심적 갈등 끝에 청농임을 밝히고 귀머거리 행세를 시작하였다. 그의 가족들도 손짓으로 대화를 하도록 한 철저한 귀머거리 행세는 주변 사람에게 미친 사람으로 지목받게까지 되었다. 문헌에 따라 그가 정말 미쳤다고도 돼 있으나 그의 조카인 은군자(隱君子) 권안(權晏)을 찾아가 미친 처신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다는 점, 성삼문이 죽었을 때 친구에게 부친 애절한 편지 귀절로 미루어 그가 미친 것은 청광으로 보는 이가 많다.

 

명종 때의 청백리요, 판서인 조언수(趙彦秀)도 청농처세(靑壟處世)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의롭지 않은 일을 당할 때만 귀머거리가 되었다. 이를테면 그가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있을 이조의 당상(堂上)에 결원이 생기자 어떤 판서 한 명이 합당하지 않은 일을 천거하여 조언수에게 강압을 하였다. 이에 조언수는 두 눈만 굴리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고함을 질러도 여전하였다.

정랑의 귀가 멀었는가고 호통을 쳐도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것을 옆에서 본 다른 사람들이 무척 통쾌하게 여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저항이나 불사로서 의로움을 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앉은뱅이로는 기묘사화 후 불출사 저항을 한 사간 정구(司諫 鄭球)가 전형적이었다. 그는 발의 연골이 붙어 일어설 수가 없다 하여 무려 18년간이나 앉은뱅이 노릇으로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정희등(鄭希登)을 혼인시킬 때 며느리 맞이를 할 즈음에야 문득 일어나 걸으니 가족들도 그때야 거짓 앉은뱅이 짓을 한 줄 알았다 한다. <월사집(月沙集)

 

이 같은 일련의 푸른 장님 유형의 행동방식은 가치관의 정신적 집념을 육체적으로 보상하여 보다 확고하게 하고 또 영원하게 하기 위한 정신적 자아의 처절한 방위 수단인 것이다. , 육체적 자학으로 정신을 구제하는 종교적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青狂抵抗

 

남효온은 김시습과 김종직을 스승으로 삼더니 그의 저항적 방랑행실을 김시습으로부터, 문장과 지조는 김종직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역사상 드물게 보는 개성 있는 일생을 살았다.

 

공은 재주와 행실은 뛰어났으나 옷과 음식은 누추하였다. 항상 암말을 타고 다녔으므로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손가락질하며 따라 다녔다.

 

말은 운반 수단이므로 그것이 숫말이건 암말이 건 아랑곳이 없었다. 하지만 관습적인 사회는 그것을 비웃었고 그 이단적 행동으로 자신을 구제한 것이다.

 

관계에서 명성을 구하니 풍파가 사납고 추강(秋江)에서 낚시를 하니 장기(癢氣)가 침노한다. 성정(性情)을 수양하려고 하니 세간 도리를 떠나야 하고 산업을 경영하려 하니 처음 먹은 맘을 저버리게 된다.<상촌휘언(象村彙言).

남효온이 아웃사이더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이와 같이 써 놓고 있다.

 

불의의 세상에서 자기 보존수단으로 미친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효온의 아들 남충서(南忠恕)도 미친 척하고 그의 아버지가 저지른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여파에서 자신을 보존하려다가 끝내는 잡혀 죽음을 당하고 만다. 연산군이 남효온의 아들을 잡아 죽이도록 하명하자 한 추관(推官),

 

본래 미친 병이 들었으니 인간으로 칠 것도 못 됩니다.라고 말했으나 연산군은 그다웁게,

 

미친 것이 세상에 살면 뭣 하겠느냐? 죽여버리라.하여 피살된 것이다.

 

생원과에 장원해서 설흔네 살에 이르기까지 유배지만 전전하며 살다가 역사에 수수께끼의 실종을 기록하고 사라진 간신(諫臣) 정희량(鄭希良)도 한국인의 이 행동방식에서 이해되어야 할 줄 안다.

 

그는 무척 술을 즐겼다. 유배지에서 손수 술을 빚어 마셨는데 그 술은 거르지도 않고 짜지도 않았다. 그 독특한 자기만의 술을 두고 그는 혼돈주(混沌酒)라 불렀다. 이것은 현세적인 기교주의에 대한 그의 저항적 표현이요, 태고 때의 순박함을 숭상하는 자연주의의 표현이었다.

 

나는 내가 빚은 탁주를 마시고 나는 내가 타고난 천진을 온전히 한다.

라고 시를 읊기도 했다.

 

술로써 자회(自晦)하지 못하면 삼동계(參同契 仙術의 대표적 서적), 삼동계로도 자해하지 못하면 반광(半狂)으로 살아낸 한국인의 저항적 행동방식을 정희량은 살다 죽은 것이다. 그는 예언자요 기인(奇人)으로 소문나 있었으나 어느 단오날 고양(高陽) 남강가에 신발을 벗어 놓고 실종되었다. 그후 기행(奇行)을 하는 선인(仙人)이 나타나면 모두 정희량이라는 소문이 퍼지곤 하여 그의 저항적 일생에 세상 사람들은 공감을 해 주곤 했다.

 

중종 2년 유명한 음모형 모사가(謀事家)인 남곤과 심정은 장안의 강직한 선비들의 파워를 두려워하여 그 세력을 꺾는 숙청의 전초 작업으로써 옥사를 하나 꾸몄다. 그때 잡혀 온 대표적 선비가 박강(朴薑)의 아들이요 박은(朴誾)의 손자인 박경(朴耕)과 유생 조광보(趙光輔)였다. 조광보는 식견이 고명하여 장안 선비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한 데다가 과격한 선동가로 소문나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박영(朴英)을 보고 말했었다.

 

너는 무부(武夫)로써 갑자사화를 일으켜 선비를 모조리 죽이고도 떳떳이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임사홍(任士洪), 유자광(柳子光)을 베어 죽이지 못하는가. 네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너를 죽이리라.

 

이와 같은 과격한 말들이 밀고되어 국가 변란을 음모한다 하여 이 강직한 선비를 잡아 가두게 하였다.

 

조광보는 거짓 미친 체하여 자회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던 터라 대궐 뜰로 잡혀들어갈 때부터 큰 소리로 옛글을 외우고 있었다. 윗자리에 유자광이 있음을 보고 옛글 읽는 소리투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자광은 소인인데 어찌 이 대인들 자리 틈에 있는가, 무오년에 어진 사람들을 모함하여 김종직 같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이제 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 청컨대 상방검(임금이 상용한 칼로서 한나라 성제때 주운이 그 칼을 빌어 아첨하는 신하를 베이겠다고 간한 고사에서 나온 말)을 얻어서 아첨하는 신하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성스러운 임금을 받들고 어진 재상을 임명하면 착한 정치를 가히 볼 수 있으리로다.

 

이 가락으로 전달한 시평(詩評)을 옆에서 듣던 성희안이

 

아첨하는 신하란 누구인가?

 

하니 묶여온 조광보는 서슴치 않고,

 

그것을 몰라서 묻는가. 자광이로다.

 

하고는 중종반정의 일등공신인 박원종(朴元宗)을 보고는,

네가 성스런 임금을 추대했으니 그 공이 과연 크지만 어찌 네가 폐한 폐주(연산군)의 나인을 데리고 사느냐. 하였다.

 

그의 신랄한 광기 섞인 어투는 역시 중종반정의 공신인 성희안에 퍼부어졌다.

 

너희 모두들 명유(名儒)라 하던데 이제 어찌 자광과 함께 일하느냐

 

또 사관(史官) 강홍(姜洪), 이말(李抹)을 가리키면서

너희들은 사관이니 마땅히 내 말을 특히 써두렸다. 하였다.

 

매를 열 번 넘게 맞고는 다만 나라가 아프다고 통곡할 뿐이니 박 원종이,

 

참으로 미친 병이 있는 사람이로군.

하고 그만두었다.

 

이 옥사가 일어나자 박영은 이 선비들의 스승인 정붕(鄭鵬)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리자 그 노대가(老大家)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가만히 생각하다가,

이는 반드시 동문인 문서구(文瑞龜)가 아첨코저 무고한 것이고 박경(朴耕)은 우직하여 불측한 화를 당할 것이요, 영리한 조광보는 반드시 죄를 면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정붕의 예언은 하나도 틀림없이 들어맞았다. 조광보의 자회술이 이와 같이 승리한 것이다.

 

단종 때 상신(相臣)인 정분(鄭苯)이 세조 쿠데타로 피살되던 날 그의 아들 정광로(鄭光露)가 미쳤다. 물론 미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정상적 인간에서 소외(疏外)시켜야만 맘을 편안히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 광노자(狂奴子)라 자칭하고 방랑하며 살았으므로 그 명문의 혈통마저도 찾을 길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렇게 살다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 이해(李懈)는 인조의 반정공신(反正功臣)이었다. 부귀를 우습게 보고 방일(放逸)하게 행동하여 옷을 벗기도 하고 몸을 단정히 가지지 않았다.

 

이공(李公)이 생각이 있어 그런 것이다. 처음에 반정을 의논할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라를 편안케 하고 민생(民生)을 보존하기로 말을 하므로 이 공이 즐겨 듣고 참여하였던 것인데 성공을 하고 나자 그 말대로 실천하지 않는 이가 많이 있어서 籍沒 당한 집들의 그릇과 의복 등의 물건을 모아 놓고 날마다 모여서 친히 스스로 분배하기까지 하였다. 이 공이 그 자질구레하고 탐하고 비루한 꼴을 보고는 부끄러워 죽고 싶어서 스스로 폐인이 되어 미친 척하고 몸을 바치어 본래의 뜻을 밝힌 것이었다.

 

한국인이 한국에 살 수 있는 한 생존방식으로서의 아웃사이더란 한국인이 양식과 양심을 지켜내린 최후의 방위선에서 갈갈이 찢기운 깃발 아래 처참해질 대로 처참해진 병사의 모습들이었다.

 

自晦抵抗

 

세종(世宗), 문종이 돌아가고 세조 초에 옛 친구인 큰 인물들은 모두 저승에 갔으며 유학(儒學)은 차츰 쇠약해가니 나의 뜻은 이미 황량해져, 드디어 머리 깎은 사람과 짝하여 산수에 노나니, 사람들이 내가 부처를 좋아했다고 하나 오로지 세상에 드러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세조가 교지(敎旨)를 전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매번 나아가지 않고 처신을 당도(當道)에 벗어나게 하여 사람 축에 들지 않게 하였으므로 어떤 이는 나를 바보라 하고, 어떤 이는 나를 미치광이라고 하였다. 소라고 부르고 말이라고 불러도 모두 다 응하였다.

지금 임금이 등극하여 어진 이가 간()하는 말을 따른다기에 10여 년 전에 육경(六經)을 다시 익히고 익혀 약간 정통했으나 내 처지와 세상이 서로 어긋나 마치 둥근 구멍에 모난 촉꽂이격圓鑿方柄格임을 자주 보고, 또 옛친구들은 이미 모두 가버리고 새로운 지기(知己)들과는 아직 친하지 못하니 누구 하나 나의 마음을 알 리 없으므로 다시 산수 간을 방랑하게 되었다. 」〈패관잡기(稗官雜記), 권일(卷一)>

한국의 전형적인 아웃사이더인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의 한 귀절이다.

 

당대에 미치광이로 소문났던 생육신 김시습은 이 짤막한 자기 고백에서 스스로를 소외시켰을 뿐 미치광이가 아님을 엿볼 수가 있다. 둥근 구멍에 모난 촉꽂이는 그의 아웃사이더적인 본질의 직관적 표현이다.

 

아웃사이더란 인사이더의 반대말로 중세 서구사회에서 기독교 국가의 기독교도들이 이국(異敎國)의 사람들을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했으며, 2차대전 후 영국의 젊은 평론가콜린 윌슨이 이 말을 어떤 시대의 사회 가치체계의 상식 밖에서 사는 사람으로 새 뜻을 부여하였다. 이교도나 이방인 말고도 소외자 또는 반역, 허무, 퇴폐 등 그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적 이미지의 아웃사이더란 자기 자신의 양심에 자기가 아웃사이더라는 것에 갈등을 느껴서는 안 되며 또 그 가치 세계에서는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비단 육체적으로 괴롭더라도 정신적으로는 편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체계의 우상(偶像)에 대해 저항적이고 파괴적이어야만 했다. 이 아웃사이더의 세 가지 조건에 합당한 한국사의 인물은 많지만 그전형적 인물로 세조정란에 저항한 김시습을 들 수가 있다.

 

김시습이 일찍이 출가(出家)하여 중이 되었는데 부자집 늙은이가 흰 疋木으로 袈裟를 만들어 주었더니 그 옷을 입고 서울에 들어와서 시궁창 물속에 수십 번을 뒹굴고 마침내는 벗어 내버렸다. 뒤에 세조가 원각사에서 수륙재(水陸齋)를 베푸는데 신승(神僧)으로 부름을 받았다. 백결(百結)의 누비옷을 입고 청어(靑魚)한 두름을 가지고 임금 앞에 나갔다. 중과 고기라는 상반된 시위로 풍자를 한 것이다. 그러자 세조가 미친 중이라 하여 내쫓았다.

 

세조의 정란 공신 신 숙주(申叔舟)는 그와는 어릴 때부터의 친구였다. 신숙주가 보고 싶어 찾아가도, 또 불러도 오지 않으므로 집사람을 시켜 만취시켜 놓고 가마로 태워다 신숙주의 집에 옮겨다 놓았다. 술에서 깨어난 김시습이 마냥 잡고 늘어지는 옷깃을 찢고 그 집을 도망쳐 나왔다. 그는 말대꾸 한마디 않고 빠져나왔으며 오염되었다 하여 옷마저 벗어 던지고 발가벗은 채 백주에 향교동 큰 거리에 있는 냇물에서 목욕했다 한다.

노사신(盧思愼)도 무척 싫어했다. 노사신으로부터 장자(莊子)를 배웠다는 조우(祖雨)라는 중이 김시습을 흠모하여 곧잘 찾아오곤 하였다. 한 방에서 밥을 먹으려는 조우의 첫 숟가락이 입 가까이에 이르자 김시습은 발로 흙먼지를 묻혀 밥수저에 뿌리면서 말했다.

 

노모(盧某)에게 수학(修學)한 자가 사람이라고 밥을 먹어

 

시세에 무관하여 세조의 조정에 입사한 시인 서거정(徐居正)과는 다정한 벗이었다. 그런데 서 거정이 찾아가면 예는 커녕 누워서 두 발을 거꾸로 하여 벽에 대고 장난질을 하면서 하루종일 얘기했다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다정하지만 천대할 것은 천대하겠다는 소신있는 행동이었다. 서거정도 너그러웠던지 그 천대는 천대대로 받고 우의는 우의대로 지켜왔다 한다. 그토록 세조에 저항을 하던 그가 세조가 주재하는 내전의 법회에 참여하여 조정의 조심스런 이목을 끌었다. 김시습은 이 집중된 이목을 통쾌하게 이용하고자 하는 내심이 있었다.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행방불명이 되었다. 세조는 실종된 김시습을 찾도록 시켰다. 그는 일부러 대로(大路)의 똥과 오줌을 받아두는 거름 구덩이 속에 들어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것은 세조에 대한 상징적인 통쾌한 모욕행위인 것이다. 미치광이로서 탈출할 구멍을 터놓은, 그리고 자신이 우물속에 들어가 자학함으로써 그 오물성을 세조에게 익살시키는 고차원적인 저항수단이었던 것이다.

 

소 뒤에 꼴두기

 

그가 중이 된 것에 대해 후세의 유학자들은 이따금 쟁점으로 곧잘 삼았다. 선유(先儒)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이 율곡은 명교(名敎)를 버리고 방자한 그의 행실에 회의를 느꼈고, 이 퇴계도 김시습의 비유학적인 저서에 대해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개의 유학자들은 김시습에게 있어 체질적으로 싫은 불의를 기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이라는 형태를 택했을 뿐이며, 중의 참 길에서 그는 항상 기름처럼 떠 있었다는 것을 변명하는 데 급급하였다.

 

그를 신사(神師)라 하여 많은 중들이 추켜 올리고 가르침을 내려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소 한 마리와 소 먹일 꼴을 가져오게 하여 그 꼴을 소 뒤에 놓아두고 깔깔 웃으며 승방으로 들어가 버린 일이 있었다.

사람이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것을 속담에서 비유하길 소 뒤에 꼴 두기라 했다. 자신에게 불리(佛理)를 배우려는 어리석음을 이와같이 표현한 것이다. 유학자들은 이런 것이 바로 중으로서 참 길을 걷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인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쟁점은 유학 지상주의의 작은 테두리에서 김시습을 평가하려는 고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왜냐면 그가 중으로서 성실하려 하지 않았듯이 그는 유학이 지배하는 당대 체제사회에도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중들이 문하에 몰려왔을 때 소 뒤에 꼴로 모욕했듯이 유생들이 문하에 몰려왔을 때도 보다 가혹하게 모욕을 하였다. 찾아온 유생들을 나무나 돌로 때리고 멀리서 활을 쏘기까지 하였다. 정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 하나 그건 김시습을 아끼고 싶은 후세 사람들의 소원에 불과하다. 또 문하에 공부하겠다는 유생들을 밭일만 시키니 끝까지 수업하는 자가 거의 없었다 하며 김시습의 유학에 대한 마음가짐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그는 유학에서 자신을 소외시켰고 불도에서도 소외시켰다. 또 체제에서도 소외시켰다. 그는 자기의 노비와 전택(田宅)을 사람들이 맘대로 빼앗아가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갑자기 이 노비를 빼앗아간 자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때 조정이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이제 매월당이 체제적인 사람이 되려나 보구나.하고 기뻐했었다.

더디게 싸운 끝에 승소한 노비문서를 되찾아 들고 관가 문밖에 나와서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웃고는 갑자기 그 문서를 발기발기 찢어 개천 속에 던져버렸다. 체제에 대한 얼마나 통쾌한 보복인가.

 

재상들이 행차할 때는 벽제(辟除)라 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킨다. 서거정의 벽제 행차 때 이 천승(賤僧) 차림의 김시습이 불쑥 나와,

, 강중(剛中: 서거정의 자)이 편안한가?

하며 재상에 대한 법도에 저항하기도 했다.

 

하루는 영의정인 정창손(鄭昌孫)이 벽제 행차를 하는데 이 천승이 불쑥 나타나 손가락질을 하고,

야 너 그만 두어라.

며 막말을 하였다. 이 반체제적 행실을 두고 조정에서 죄를 주자는 의론이 일어났고 또 이를 위태롭게 여겨 교우하던 몇 사람들마저 김시습과 내왕을 끊었다. 반체제가 심할수록 그는 고독해지고 고독할수록 조금씩 더 미쳤다.

 

거리에 지나가다가 한 군데를 응시하면서 한참 동안 박은 듯이 서 있기도 하고, 혹은 거리에서 소변을 보면서 뭇사람들이 보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웃으며 뒤따르고 서로 다투어 기와 조각과 조약돌을 던져 피를 흘리며 거닐기도 했다. 거리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놀고 취하여 길가에 쓰러져서는 항상 바보처럼 웃곤 하였다. 어떤 때는 자기가 손수 심고 가꾼 벼가 이삭이 탐스러운데 낫을 내둘러 한 이랑을 다 베어 땅에 버리고는 목을 놓아 울었다.

 

달밤을 맞으면 이소경(離騷經)을 소리 높이 읊었다. 모두 외우고 나서는 반드시 엎드려 흑흑 울었다. 이와 같은 매월당의 울음은 상황을 우는 것이었다. 아웃사이더의 고독을 우는 것이었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책임을 우는 것이었다.

 

그의 예술하는 태도도 현대적 뜻을 갖는다. 현대의 예술은 자기 만의 것이 아닌 표현(발표)없이 성립이 안 되는 것처럼 되어 있다. 예술은 표현이 전제된다. 하지만 표현 없이 예술은 있을 수 있다. 김시습이 그런 예술을 했다.

 

-율시(律詩) 혹은 오언고풍(五言古風)을 지어 종이에 싸서 물에 띄워 보내고 멀리 떠내려가는 것을 보면 또 써서 띄워 보내기를 해가 지도록 계속하여 종이가 다 하면 돌아왔다. 어떤 때는 지은 것이 거의 1백여 수나 되었지만 모두 떠내려 보내니 남는 것이 없었다.

 

서 있는 나무를 깎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였다. 한참 읊고 나서 문득 곡하여 깎아버렸다. 혹은 종이에 시를 써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에다 던져버렸다. 혹은 나무를 조각하여 농부의 모양을 만들어서 책상 옆에 두고 하루 종일 들여다보다가 곡하고 불태워 버렸다. 장릉지(莊陵誌)

 

전에 작고한 20세기의 거장(巨匠) 조각가 쟈코메티는 몇달이나 걸려서 깎고 닦고 한 그의 작품이 완성되면 그 즉시로 그 작품을 부수어 버렸다 한다. 이미 작품이 완성되면 예술행위는 끝났기 때문이다.

 

매월당의 시나 조각도 이와 매한가지다. 그 예술에는 위선도, 모방도, 수식도 필요가 없다. 그의 실존이나 고독이나 불안같은 그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뜻을 다 하면 끝나는 것이다.

 

매월당은 그런 예술을 하였다. 그는 늙을 때와 젊은 때의 두 자화상을 그리고, 그 그림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네 모양이 지극히 초라하고

네 맘이 지극히 어리석으니

너를 지극히 깊은 산골짜기에 두어 두는 것이다.

 

낙백(落魄)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 미쳐서 소요하는 것이 낫다던 매월당은 한국에서 가장 실존적인 자기 추구로 가장 크게 몸부림친 사람이었다.

 

捲堂抵抗

 

조광조가 옥에 갇히자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등의 유생들이 대궐 뜰에 와서 소리내어 울었고, 서울 성안 각 방()의 향도들이 궁성으로 모여들었다. 소문(疏文)을 지어 조광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한 이들은 대궐문을 난잡하게 밀치고 들어갔다. 이들을 저지하는 궐병과 싸우는 바람에 원생 박광우(朴光祐)는 상처를 입어 얼굴에 피가 범벅이 되었고, 수천 유생 중에 망건이며 옷이 성한 자가 없었다. 이같이 대궐 뜰에서 엎드려 통곡하자 그 소리가 임금이 있는 대내(大內)에까지 들렸다.

 

임금은,

유생의 일이 심히 놀랍도다. 대궐 마당으로 함부로 들어왔으니 또한 그 죄가 있을 것이다. 궐문을 밀치고 바로 들어와서 호곡(號哭)한다는 것은 천고(千古)에 없던 일이다. 주모자를 잡아 가두라.

하였다.

 

이때 유생들은,

한나라 양진(楊震)이 잡혔을 때 태학생(太學生) 3천여 명이 궐문을 지키고 호곡한 일이 있거니와 전하께서 오늘 하시는 일은 진실로 천고에 없는 일이외다.

라고 왕의 파워에 학생파워를 신랄하게 대립시켰다.

소두(疏頭)가 된 이약빙(李若氷)등 다섯 명이 잡혀가자 여러 유생들이 앞다투어 옥에 들어가 앉으니 옥이 차고 쇠끈이 모자라 새끼 줄로 목이 엮인 채로 종루(鐘樓)에 앉아있는 유생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이같은 조광조를 두둔하는 학생파워는 그를 모함한 반대당의 우두머리 남곤 등이 조광조가 인심을 얻어 나라에 위태롭다고 임금을 공갈한 그 유언비어를 실증한 것이 되었고 이 파워에 겁을 먹은 왕은 해결책으로서 그 파워의 정점에 있는 조광조를 죽여 버리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다.

조광조에게 사사령(賜死令)이 내린 것은 이 유생의 데몬스트레이션을 해결시킨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이것은 난세(亂世) 때면 흔히 있었던 유생파워 시위의 한 실례이다.

 

이같은 행동적 파워 시위의 전초적 단계인 성균관의 권당(捲堂) 습속은 잦았었다. 동맹휴학이랄 권당의 요구조건은 그들의 실질적 문제, 예를 들면 스승의 배척이나 관리의 소홀 같은 대내적인 문제가 아니라, 항상 대의에 배반된 수의(守義)를 위한 명분을 내세웠으므로, 성균관 권당은 집권자에게 가장 두려운 압력으로 작용해 왔으며 독주의 저지 요소가 되어 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연산군의 단상제(短喪制) 때의 성균관 권당, 청나라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을 때의 권당, 갑오개혁 후 새 교육령이 내렸을 때의 권당 같은 것은 유명했다.

 

영의정 이후원(李厚源)이 임금에게 여쭙기를, 성균관 권당의 명분만 좋으시면 역사에 성군이 된다고 권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성균관 권당은 잦았던 것으로 보여지며 권력층에 압력단체로 작용했음을 알 수가 있다.

 

학자 성혼(成渾)이 모함당했을 때, 이목(李楘)을 소두(疏頭)로 한 성균관 태학생 150명이 그 원통함을 신원하였고,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문묘에서 추방한 데 대한 유생의 호곡시위, 그리고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토록 한 시위 등은 모두 성균관의 집단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함께 얼려 있는 성균관 이외에도 영향력을 많이 가진 학자의 영향권 안에 있는 유생들도 집단 파워를 곧잘 과시하곤 했다.

이를테면 최영경(崔永慶)이 모함으로 진주감옥에 갇히자 그 옥전에는 영남 각지에서 모여든 유생 1천여명이 초막을 짓고 단식으로 連日 連夜 시위하였던 일이 있었다.

 

또 그가 모함으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이 영남에 전파되자 유생들은 각기 상복, 상갓(喪笠) 차림으로 상경, 서울 장안을 누비며 시위하였으므로 한 때 최영경을 모함한 정적들이 잠적까지 했다 한다. 연산군이 성균관을 폐한 것도 학문이 싫어서가 아니라 이 성균관 학생들의 집단 파워 행사가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비단 이 유생파워는 악정이나 불의에만 행사된 것이 아니라 선정(善政)에도 행사되었었다.

 

임금이나 수령의 송덕에 곧잘 이 유생 데몬스트레이션이 있곤 하였으나, 한말에 이르러서는 이 송덕 데모에 관권과 금권이 개입하여 부패상의 일환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 혹심한 케이스가 유생채류(儒生借留) 또는 유생원류(願留)라는 습속이다.

 

채류란 한 지방의 수령이 전임되었을 때 유생파워를 이용, 상급 관청에 유임(留任) 시위를 하는 것이고, 원류습속은 전임되어 나가는 수령을 가지 못하게 막는데 이 유생파워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 목사나 군수 또는 현감이 전임되면 유임의 청원을 하는 것이 상습처럼 돼 있었다. 향교에서 유림들이 모여 향회를 소집하고 향교의 대표자인 장의(掌議)가 책임자가 되어 유임 운동비를 호당 얼마씩 배당하여 거둔다. 향교의 서재(西齋·중국 거유를 모시는 재)장의와 동재(東齋·한국의 거유를 모시는 재)장의가 모여 전임 군수의 공적을 誇大하여 유임원(留任願)을 작성한다.

 

이 유임원에는 내모지요 거후지사(來暮之謠 去後之思), 애민지택 두소지풍(愛民之澤 杜召之風)등 중국 고사(故事)에 나온 유임문귀를 나열하기 마련이었다.

 

이 유임원을 들고 유생 20~30여 명이 집단으로 상급 관청 뜰앞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유임연좌(連坐)를 시작한다.

 

이 채류 데모는 쉽게 해결나기 마련이었다. 유임원의 여백에,

이 일은 공사(公事)에 속하니 사사로이 결정지을 수 없다. 불일 내에 상부에 보고하겠다

는 기록 끝에 관찰사의 커다란 도장만 받으면 끝난다. 이들은 이것으로써 임무가 끝나고 거둔 돈은 나누어 착복한다. 수령도 채류를 받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영예가 되므로 그 채류원을 훈장처럼 싸들고 그 고을을 떠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채류를 빙자한 유생파워 행사를 한말(韓末)분식(分食)이라 속칭하였음은 백성에게 채류를 빙자하여 돈을 뜯어 나누어 먹었기 때문에 생긴 말일 게다.

 

원류에의 유생파워행사는 습속화되어 있었다. 수령이 전임돼 떠나가는 날, 유생들은 아침 일찍 향교에 모여 떠나가는 길목 10여 리 즈음에 열지어 앉는다.

 

수령의 가마가 지나가면 이 유생들은 떠나가지 말아 달라는 시늉으로 이 가마를 가로막는 제스추어의 승강이를 벌인다. 불루예(佛淚禮)라는 간단한 거짓 울음의 의식이 베풀어지면 떠나가는 수령은 격식화된 말,

본 수령은 이번에 승명(承命)하여 본 고을을 떠나게 됐으나 일단 상경했다가 반드시 되돌아 올 터이니 잠시 기다려라.

고 말한다.

이에 유생 대표는 역시 격식화 된 말,

백성은 모두 영감의 재래(再來)를 가물 때 비 기다리듯 하오니 하루 빨리 귀임하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한다.

 

이 불루예가 끝나면 수령은 제 갈 길을 가고 유생들은 되돌아 서버린다. 더 멀리 영송하는 자도 없고 또 이 수령이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는 자도 없다. 수령은 불루예 때 받은 원류원의 서장(書狀)을 훈장처럼 들고 그의 영예로 삼는 것이다.

대개 조작적인 경우가 많지만 진실로 원류를 할 경우 유생들이 길바닥에 눕고 말목을 잡고 늘어지곤 하여 밤에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한말에 순종(純宗)이 남행(南幸) 순시를 할 때, 경상도 유생들은 왜놈들이 임금을 일본에 납치해간다고 오해하고, 수백 명이 철도 노변에 누워 기차통행을 방해한 사건도 이 유생 파워시위의 한 전통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野詩抵抗

 

우리 선조들은 직설적인 표현보다 은유적인 표현을 즐겼다. 곧 산문적이 아니라 시적이었다. 자기의 뜻을 표현하는 데 시로 못하면 선비로서 실격이었다. 그러기에 교우를 하거나 놀이터에 가거나 손을 맞거나 하면 벼루와 종이를 내어밀고 시를 쓰므로서 그 사람의 자질과 인품을 평가하게 마련이었다.

 

또한 옛 선비들은 도처에 시를 쓰고 새기곤 하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정자가 있으면 시를 써서 그곳에 걸어 놓고 갔으며, 역사(驛舍)의 흰 벽이나 창문의 종이에 시를 써놓고 떠나기도 했으며, 암벽에 또는 살아있는 나무의 밑둥을 깎아 그곳에 시를 써 놓고 가기도 했다. 이 시가 풍광을 읊은 것은 거론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정치나 세태를 은유하거나 풍자로써 어떤 공감력을 가질 수 있는 시사시(時事詩),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무기명으로 써 놓았을 때, 이것은 비단 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언론적인 기능과 선동적인 기능을 지닌다.

 

이와 같은 시를 야시(野詩)라 통칭하였고 이 야시는 한국인의 한 저항적 습속을 형성하였다.

 

여기 공주 유구역(維鳩驛)의 한 실례를 인용해 본다.

 

고려 때 일이다. 이 유구역을 수리할 때 당대의 묘수(妙手)인 공장(工匠) 박모가 맡았었다. 그는 유구역 침실 서쪽 벽에 흰옷에 갓 쓰고, 여윈 말을 탄 사람들이 시름없이 말 가는 대로 산길을 따라 서서히 가는 것을 그려 놓았다.

형색이 초라한 이 그림은 당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문극겸(文克謙)의 시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으로 풀이했었다.

고려 의종(毅宗)이 여색과 음악을 좋아하므로 정언(正言)이던 문극겸이 소를 올려 행색을 바로 잡도록 간하였으나 듣지 않으므로 시 한 수를 짓고 낙향하였다. 그 낙향시의 끝장은 다음과 같았다.

 

한 조각 정성 몰라주니

파리한 말 맥없이 채찍하여

머뭇거리며 물러왔네.

 

이 글귀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이 유구역에서 자고 가는 숱한 행인들이 이 그림을 알면서 보기도 하고, 모르면서도 보았을 것이다.

 

송광사의 무의자(無義子)가 승려 천여 명을 거느리고 서원(西原·청주)으로 가는 길에 이 유구역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이 그림을 보고,

간신(諫臣)이 서울을 떠나가는 그림이다.

하면서 한참 동안 탄식하더니 시를 지어 그 벽에다 써내렸다.

 

벽 위에 이 그림을 뉘 그렸는고.

간하는 신하 서울을 떠나니 일이 위태하네.

山僧이 이 그림을 보다 서러워 하거늘

하물며 벼슬하는 사대부야 어떠할까.

 

이 공감의 개탄은 세월이 흐를수록 축적되어 갔다. 그 후 다시 치한 행인이 차운(次韻)하여 벽에 시를 썼다.

 

그 누가 이 간신이

가는 모습을 그렸는가.

벽 위에 가득 찬 맑은 바람이

나부(懦夫) 하나 울려놓네.

 

그 후 또 어떤 행인의 시가 다시 이 벽을 메웠다.

 

흰 옷에 누른 띠 간신의 이 그림,

이가 바로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하고

헛되이 나라 떠나니

붓끝에 그린 솜씨 허비하여 뭣하리.

 

일련의 이 연작 시화에서 무저항의 내향적 저항의 공감이 축적되어 감을 본다. 이같이 전국에 산재돼 있는 역사의 벽은 은연중에 낙서에 의한 신문 구실을 충분히 하였고 여론의 진원지가 되었다.

 

김안로(金安老), 채무택(蔡無澤), 허항(許沆) 등 삼흉(三凶)이 정권을 전단하고 있을 때 갈원(葛院)의 벽 위에 있던 다음과 같은 야시가 공감을 받았었다.

 

뭇 소인들이 조정에 득실거려

태평이라 속이니

이 몸은 일찍 돌아가

밭갈이함이 합당하나

임금을 생각하여

가볍게 못 물러나 머뭇거리니

항아리 속에서 모기떼 우는 소리

도무지 우습기만 하구나.

 

이 야시에 대해 임보신(任輔臣)이 그의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해 놓고 있다.

 

이 글의 뜻을 보니 반드시 조정에서 뜻을 같이할 수 없는 이가 지은 것이 분명하다. 삼흉이 정권을 휘두를 때 참혹한 형벌과 준엄한 법으로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다스려, 심지어 머리 깎은 중들까지도 그 해독을 입어서 온 나라가 두려워하여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발도 마음대로 못 놀려서 감히 의논하지도 못했으므로, 그중 한 사람이 이 글을 감히 크게 써놓았으니 인심을 속일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중종 4년에 탐혹(貪酷)하기 이를 데 없는 삼가현령(三嘉縣令)이 죽었다. 한데 누군가가 그의 관에다 다음과 같은 야시를 써 놓았다.

 

저승의 오귀(五魂)가 백성을 괴롭히니

염라대왕이 천라(天羅)를 시켜

이를 죽였구나.

이제 백성의 시름과 원한이 그쳤으니

요순시대의 태평한 봄이 오는가.

 

이 야시 이야기를 들은 관찰사는,

비록 죽은 현령이 나쁘지만 관에 야시를 썼다는 것 그 또한 나쁘다. 그를 잡아 처형하라.

고 하명했지만 끝내 이 필자를 잡질 못했다.

 

이 무기명의 비판 규탄적인 야시 말고도 고도의 은유로 알만한 사람만 알 수 있게 하는 기명의 야시 풍습도 있었다.

권신(權臣)인 심정(沈貞)이 양천(陽川)에 소요당(消瑤堂)을 짓고 시명이 높았던 박상(朴祥)더러 현판시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박상이 쓴 시구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끼어 있었다.

 

반쪽 산(半山)에 음식상을 차렸고

가을 구릉(秋壑)에 술통이 비었다.

 

반산은 왕안석(王安石)의 아호요, 추학(秋壑)은 가사도(賈似道)의 아호인데 이 두 사람이 모두 송나라를 망친 대신들이다. 이 심정을 풍자하는 시구를 심정은 알지도 못했고 또 아는 사람만이 알고 구전하였던 바, 후에 이를 알고는 그 시판을 떼어 태워 버리고 그때부터 박상에 대해 원한을 품게 되었다.

 

白碑抵抗

 

단종의 절신(節臣) 조상치(曺尙治·부제학)는 세조가 선위(禪位)하자,

세 아들이 조정에 올라 복이 너무 과하니 물러가겠다.

고 상소하고 마단(麻丹·영천)에서 두문(杜門)하고 여생을 살았다. 그는 종신토록 왕궁이 있는 서북 쪽을 향해 앉는다는 법이 없었다. 자신의 묘비를 만들어 놓고 죽은 유수한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는 큰 돌 하나를 주워다가 깎지()도 않고 꾸미지도 않은 자연석 그대로의 표면에 다음과 같이 새겼다.

 

노산조부제학 포인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

 

그리고 자서(自序)하기를,

노산조라 함은 오늘의 신하가 아닌 것을 밝힌 것이요, 계자(階資)를 쓰지 않은 것은 임금을 구하지 못한 죄를 나타낸 것이며, 부제학이라 쓴 것은 사실을 빠뜨리지 않으려는 것이고, 포인이라 쓴 것은 망명하여 도망한 신하라는 뜻이다

하였다.

그는 아들들에게 그가 죽거든 꼭 세우라고 유언했는데, 그의 아들들은 화가 미칠까 봐 그 비석을 땅에 묻어 버렸다. 죽음에 즈음하여 살았을 때의 자기의 정신적 좌표를 똑바로 해놓고, 역사에서 자기가 취한 행동의 테두리를 정하고 싶은 욕구가 죽기 전에 묘비명을 써 놓는 한 습속을 형성했던 것이다.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었다던 정수곤(丁壽峴·이조 성종때 校理)은 항상 죽음을 이웃에 놓고 살았던 것 같다.

동방에 선비 하나가 살았는데 그 이름이 정 수곤이라

로 시작된 이 묘비명의 끝 귀절은 그가 죽기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상의 변천을 뜻하였다. 한데 정말 숨이 끊어진 후 그 묘비명을 찾아보았더니 그 끝 귀절을 쓰지 못한 채였다. 즉 평생을 써도 못다 쓴 미완성의 묘비였으며 그것은 일생을 둔 그의 통찰의 벅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을 똑바로 의식했을 때, 즉 기절(氣節)을 세우고 그 기절을 죽음이라는 극한상황의 우위에 두었을 때 이같이 자기의 무덤 앞에 세울 묘비명을 써 들고서 죽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개 감상적이며 무력한 저항의 표현이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대개 자기의 인생을 하찮은 낙진(落塵)으로 극소화하는데 공통되어 있었다. 이런 풍습은 죽음과 대결한 한국인의 멋이기도 했으며 죽음과 대결한 한국인의 차분한 자세이기도 했다. 정수곤이 고쳐 써오던 끝장의 미완성 묘비는 그런 뜻에서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과 그의 인생의 갈등을 적절히 표현해 주고 있다.

 

대명천하(大明天下) 햇빛이 비치는 나라에 남자의 성은 홍()이며 이름은 언충(彦忠)이요, 자는 직경(直卿)이라. 반평생에 우활(迂闊)하고 옹졸함은 문자의 공이다.

32세에 세상을 마치니 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며 뜻은 어찌 이다지 긴고. 옛 고을 무림(茂林)에 묘지를 정하니 푸른 산은 위에 있고 물굽이 언덕은 아래에 있다. 천추만세(千秋萬歲) 뒤에 누가 이 들판을 지날는지. 반드시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면서 슬퍼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

 

글을 하고 글을 해서 깨친 도리(道理)와 절의(節義) 때문에, 바른말 하다가 갖은 혹독한 고문 끝에 유배당한 연산조의 젊은 학자 홍언충이 유뱃길에 노숙하면서 지은 자신의 묘비명이다. 또 거유 이 황이 미리 써놓은 자작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면서부터 치()였고, 커서는 다병(多病)하였다. 중년에는 어찌하여 학문을 즐겼으며 늦게는 어찌하여 벼슬을 하였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오히려 멀고 벼슬은 사양할수록 도리어 얽혀 왔다. 출세에는 서툴었고 퇴장(退藏)할 뜻 굳힌 지 오래였다. 속 깊이 국은(國恩)에 부끄러워했고 진실로 성인의 말씀이 두려워, 높고 높은 산이 있고 졸졸 흐르는 물 있는 데서 벼슬하기 전의 생활로 돌아가 한가히 즐기면서 뭇 비방을 벗어났다. 내 회포가 막혔으니 나의 패물을 뉘 보리오. 내 고인(古人)을 생각해 보니 고인이 이미 내 마음을 먼저 얻었거니 어찌 오늘 세상에서 오늘의 내 마음을 모른다 하리. 근심 속에도 낙이 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이 있는 법이었다. 조화(造化)를 따라 사라짐이여. 다시 뭣을 구하리오.

 

그리고 아들 이준(李鶴)에게, 비를 세우지 말고 다만 작은 돌로 전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晚隱眞城李公之墓)라고 표시하라

고 유언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의 인생과 살았을 때의 일을 겸손하게 자신이 귀결시키는, 그리고 어딘지 저항적 기풍을 풍기는 것이 이 자작비명의 풍습이었다. 그 저항의 대상은 인생이나 세상에 대한 대국적인 것에서부터 임금이나 정치에 이르는 다양한 저항의 복합이다.

 

이 저항이 강렬했을 때는 아예 아무것도 쓰지 않은 백비(白碑)를 세우도록 유언한다. 무덤 앞에 비석은 서 있는데 누구의 묘란 표식도 또 아무런 행적도 새겨지지 않은 비석이 자주 발견돼 왔으며, 이것은 아무것도 쓰지 않으므로써 너무 많은 것을 암시하는 것이 된다. 이승에서의 자기 인생을 극소화한 끝에 아주 무화(無化)해 버리고 싶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싶었던 욕구, 그것은 고도의 종교적 깨우침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또 불의나 악정의 세상에서 살았다는 것으로도 비롯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의 정신을 때 묻은 세상에서 구제하고 싶은 뜻에서도 비롯되었던 것이다.

 

전남 장성군 황용면 아곡리(長城郡黃龍面阿谷里)에 명종 때의 명신 박수량(朴遂良)의 무덤이 있는데 서해 바다에서 구했다는 소금에 절은 하얀 암석으로 만든 비석이 서 있다. 그 비면에는 앞 뒤 옆면에 아무런 비명이 없다.

 

그 가문에 전해 내려온 구전(口傳)에 의하면 그의 일생이 너무 청백했고 서민적이었기에 그 청백의 영원한 표현이라고 하였으나, 이 백비(白碑)는 본인의 유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죽음에 즈음하여 저항적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의 흔적을 아주 없애 버리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죽거든 아예 불에 태워 강물에 띄워 버리라는 유언 땅에 묻되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 무덤을 만들되 비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 등 소극적 단계로써 자신을 무화하려 했다. 비석은 세우되 비명을 쓰지 말라, 비명을 쓰되 이 퇴계처럼 간소하게 쓰는 소극성향도 이같은 자기무화의 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가 있다. 있는 것보다 과장된 자기를 후세에 남기고 싶은 것이 인간 상징(常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이 상정은 진리이다.

 

그런데 절의(節義)에 인간을 희생하고, 정신을 구제하는 데 철학과 진리를 두었던 한국의 일부 사반사회(士班社會)에 형성된 사고방식은 이 상정에서 자기를 소외시켜 역사의 펀한 벌판에다 아무렇게나 자기를 내던져 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팔도에 널리 널려 있는 백비이며, 그것들은 너무나 많은 것이 쓰여 있어 아무것도 없는 채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많은 것을 읽히어 가며 오래 그런 곳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