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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신라-김유신(金庾信)

耽古樓主 2023. 4. 30.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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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유신(金庾信)

 

김상기(金庠基)
1901∼1977. 사학가, 문학박사. 호동빈(東濱). 전북 김제 생.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학과 졸업. 서울대 교수, 국사편찬위원, 독립운동사 편찬위원, 학술원 회원 등을역임.
저서에 「동학과 동학란」, 「동방문화사교류논고」, 「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中國古代史綱要)」, 「동양사기요(東洋史記要)」등이 있음.

 

삼국통일의 위업을 세운 김유신은 신라 진평왕(제6대) 건복(建福) 12년(595)에 만노군(萬弩郡; 지금의 진천)에서 출생하였다. 가락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이요 구해 (仇亥;가락 최후의 왕)의 증손이니 신라 신부귀족(新附貴族)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 무력(武力)은 진평왕때에 신주(新州) 군주로서 백제 성왕의 내침을 요격하여 구천(狗川)에서 성왕을 공살(攻殺)하고 백제군 29,600을 무찔러 대공을 세웠으며 부는 소판(蘇判) 서현(舒玄;道衍으로도 씀)으로서 누차 백제를 격파하여 군공을 세웠고 모는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손녀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니 서현이 일찌기 만노군 태수로 있을 때에 그곳에서 유신을 낳았다.

 

유신은 어렸을 때부터 만명부인의 엄명한 훈육 밑에서 자라났으니, 그가 未擧하였을 때에 창녀 천관의 집에서 자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이를 안 만명부인은 그에 대하여 무뢰한 아동배와 사귀어 그러한 곳에 출입함을 꾸짖으며 평소에 기대하였던 바가 어그러짐을 탄식하여 흑흑 느껴 울었다. 유신은 그 자리에서 사죄하고 다시는 그러한 문전에 지나지 아니할 것을 맹서하였더니 어느날 술에 취하여 몸을 말에 맡겨 돌아올 때 말은 발익은 길을 밟아 천관의 집에 이른지라, 그때에야 비로소 깨달은 그는 번연히 칼을 빼어 탔던 말의 목을 쳤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써 보아도 김유신이 위대한 인격을 이루는 데에는 만명부인의 교화가 얼마나 많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5세에 화랑으로서 출세하매 그의 인품은 洽然히 세인을 복종케 하였으며 그의 도중(徒衆)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일컬었다. 그리하여 17,8세 때부터 신라를 침요하던 백제, 고구려를 토평하여 삼국을 통일하려는 장지(壯志)를 품고 중악(中岳;父岳) 석굴에 홀로 들어가 삼국통일을 하늘에 고하여 맹서하기도 하고 때로는 보검을 품고 연박산(咽薄山)에 들어가 향을 불살라 적성(赤誠)으로써 기원도 하였으니 이는 화랑으로서의 입산 수련과 장래 국가 주석(國家柱石)으로서의 정신적 단련을 하였던 것이다.

 

진흥왕(제24대)시대로부터 급격히 팽창된 신라의 세력은 선덕여왕(제27대)시대에 이르러 2대 인물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삼국통일의 기운이 익어진 것이다. 군정의 김유신과 외교의 김춘추(후일의 태종무열왕)는 발흥신라의 쌍주(雙柱)이었으며 이 두 인물이 서로 일체가 되어 국사에 진췌(盡膵)한 결과가 삼국통일이라는 커다란 사업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양대 인물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곳에는 또한 역사적 로맨스가 잠재하였으니, 김유신은 소년시대로부터 통일의 웅도를 품었으나 그는 원래 가락의 후예로서 신부귀족이었던 만큼 그와 같은 대사업을 경영함에는 왕실의 근친이요 영재인 김춘추와 같은 인물과 결탁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유신은 일찍이 기회를 만들어 그의 계매(季妹) 문희(文姫)와 김춘추와의 가연을 맺게 하였던 것으로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는 이로 말미암아 더욱 공고하여졌다.

 

 

1. 그의 무공

 

김유신은 신라 무사의 전형으로서 그의 영명위자(英名威姿)는 처음 출전할 때부터 나타났었다. 진평왕 건복 46년에 그는 중당당주(中幢幢主;대장)로 파진찬 용춘(龍春;김춘추의 부), 소판 서현(그의 부) 등의 부장이 되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청주)을 칠새, 처음엔 고구려의 역격으로 인하여 신라측의 사상이 많았으며 이에 따라 사기가 저상케 되었다.이에 김유신은 3군에 모범을 보이고자 칼을 빼며 말을 달려 고구려 진중에 돌입하여 여장(麗將)을 베니 신라군의 사기가 비로소 떨쳐 분격하여 5천여 급을 무찌르고 1천 인을 사로잡아 낭비성을 손에 넣어 그의 위명은 점점 인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그 후 선덕여왕 11년에 백제는 신라의 서부 40여 성을 공취하고 또 대량주(大梁州;대야성. 지금 합천)를 공파하여 김춘추의 애서(愛壻)인 도독(都督) 품석(品釋)과 그의 처 고타소랑이 패몰하였다.

 

김춘추는 공사(公私) 양방으로 백제에 대한 원한이 더욱 깊어 고구려를 끌어 가지고 백제를 도(圖)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뒷일을 김유신에게 부탁한 후에 불측한 곳 고구려를 향하여 떠났다. 당시 고구려에서는 김춘추를 위협하여 마목현(麻木峴)과 죽령 서북의 땅을 환부하라고 강요하여 별관에 가두었으므로 예정 환기(還期)인 6순(旬)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왕께 주청하여 고구려 응징의 사(師)를 이루기로 하고 결사의 사 3천 인(일설에는 1만 인이라고도 함)을 뽑아 일기당천(一騎當千)의 세로 고구려 남경(南境)에 진공하니 고구려에서도 자못 낭패하여 김춘추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이어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경산) 군주로서 국방을 엄히 하였으며 동 13년 9월에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렬성(省熱城), 동대성(同大城) 등 7성을 공취하고 그 익년 정월에 겨우 돌아와 미처 왕께도 복명치 못한 때에 백제의 대군이 매리성(買利城)을 내공한다는 경보가 들어오매 왕은 다시 유신의 출정을 명하였다. 그는 국명을 받자 처자도 찾아보지 아니하고 바로 마수(馬首)를 돌려 백제군을 역격하여 2천급을 베어 궤주케 하였다. 3월에 왕궁에 還謁하여 집에도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장차 내침하려 한다는 급보가 이르렀다. 여왕은 또다시 김유신에게

“국가의 존망이 경의 일신에 매였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가서 도모할지어다.”

하고 감격의 분부를 내리매 그는 급히 행군하여 적이 이르기 전에 방비하려는 계획 아래에 군을 몰아 자기집 문 앞을 지나 서쪽으로 향할새 문밖에 나와 기다리던 남녀 가족은 바라만 보고 눈물에 겨울 뿐이다. 그는 돌아도 보지 않고 그곳을 지나 50보쯤 가다가 말을 멈추고 장(漿)물을 불러 마시며

“우리집 물은 아직도 옛 맛이 있구나.”

하였다.

(漿):마실 물.

 

이 광경을 본 사졸들은

“대장군도 이러하거든 우리들이야 어찌 골육과 이별한 것을 한하랴.”

하며 서로 감격에 넘쳤다 한다.

 

동 16년 정월에 대신 비담(曇), 염종(廉宗) 등이 모반하여 병을 들어 명활성(明活城)에 둔거할새 그의 형세가 자못 창궐하였다. 김유신은 대의명분으로써 장졸을 독려하여 비담 등을 토주(討誅)하였고 동년(진덕여왕 원년) 10월에 백제군이 무산(茂山), 감물(甘勿), 동잠(桐岑) 등 3성을 내위하거늘 김유신이 보기(步騎) 1만으로써 막을새 신라군은 오랫동안 고전에 빠져 사기가 침쇠하였다.

토주(討誅): 죄인을 쳐죽임.

 

그는 비녕자(不寧子)를 특히 격려하여 3군을 진작케 하매 비녕자는 김유신의 지기(知己)에 감격하여 백제 진중에 뛰어들어 분격한 끝에 거꾸러지니 비녕자의 아들 거진(擧眞)과 그의 노복 合節이 서로 뒤를 이어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를 본 신라군은 크게 분발하여 앞을 다투어 엄격(掩擊)하여 3천여 급을 무찔러 백제군을 파하였고, 그 익년 3월에 백제 장군 義直이 腰車 등 서부 10성을 공함할새 당시 김유신은 압량주 도독으로 사졸을 3도에 나누어 대량성 밖에서 백제군을 유인하여 옥문곡(玉門谷)에 끌어들여 협격한 결과 백제의 장군 8명을 사로잡고 1천여 급을 참살하였다.

 

이에서 생금(生擒)한 8명의 백제 장군과 전에 대량주에서 피살된 품석부처의 유골을 교환하여 석일(昔日) 대량의 패를 보설(報雪)하고 드디어 승승장구하여 백제 경내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발(攻拔)하여 2만을 베고 9천 인을 생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유신은 이찬으로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總管)이 되었고 다시 백제의 진례(進禮) 등 9성을 진공하여 9,600여 인을 참획하였으며 동 3년 8월에 석토(石吐) 등 7성을 내침하던 백제 장군 은상(殷相)을 요격할새 그는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으로 더불어 5도에 나누어 공격하여 은상 이하 1만여인을 살획하고 말 1만 필, 개(鎧) 1,800여 건과 기타 기계를 노획하였으며 귀로에 1천여 군을 인솔한 백제 좌평 정복(正福)의 내항(來降)을 받았다.

보설(報雪): 설욕. 치욕을 보복함.

(): 갑옷,

 

이와 같이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은 국정의 문란함과 국력의 피폐함을 불고하고 신라와 부질없이 다툰 결과 막대한 병력과 군비를 소모하여 국운을 더욱 재촉함에 이르렀다.

 

 

2. 백제 평정

 

제28대 진덕여왕 8년(654)에 여왕이 붕거하매 김유신은 알천(閼川) 이찬(公)으로부터 책(策)을 정하여 김춘추를 영립(迎立)하였으니 유명한 태종무열왕이 곧 이분이다. 이와 같이 김춘추가 정통을 잇는 데에는 신흥 무사계급을 배경으로 한 김유신의 힘이 매우 많았으며 이에 따라 통일사업이 드디어 구현케 된 것이다.

 

친당주의자(親唐主義者)인 김춘추가 왕위에 오름으로 말미암아 나·당 양국의 관계는 더욱 친밀의 도를 가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이에 앞서 (진덕여왕 3년) 백제를 도(圖)할 양으로 당에 건너가 원병을 청하여 당 태종의 내락(內諾)까지 얻은 일이 있으며 당에서도 태종이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경험이 있으므로(645) 당의 강적인 고구려를 도하는 데에는 신라와 맺을 필요가 있으며 고구려의 여국(與國)인 백제를 먼저 평정하는 것이 고구려 정벌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에서 나·당 양국이 서로 맺어 신라의 서린(西隣) 백제를 먼저 도함에 이르렀다.

 

김유신은 백제 정벌에 앞서 미리 간첩으로써 백제의 상세(狀勢)를 탐사하는 동시에 백제의 당로자(當路者)까지 움직이기에 성공하였으니 신라의 급찬 조미곤(租未坤)이 일찍이 부산현령(夫山縣令)으로 백제군의 포로가 되어 백제의 국정을 전천(全壇)하던 좌평 임자(任子)의 가노(家奴)가 되었다. 그리하여 조미곤은 그곳에서 매우 임자의 신임을 받고 있다가 틈을 엿보아 본국에 도환(逃還)하여 김유신에게 문란한 백제의 정세를 보(報)하매 김유신은 다시 조미곤을 백제에 보내어 임자를 설복케 하였다. 이에서 김유신은 더욱 백제 병탄의 책을 급히 세워 열렬히 무열왕을 움직이었다. 그리하여 무열왕 6년에 또다시 당에 향하여 원병을 청한 결과 나·당 연횡이 구체적으로 성립한 것이다.

 

그 익년(660) 6월에 당장 소정방, 유백영 등이 13만 군으로 산동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덕물도(德物島; 지금 남양만 덕적도)에 이르매 여·당(나·당의 오기-편집자 주) 양방은 약속을 정하여 7월 10일로써 신라는 육로로, 당은 수로로(금강) 백제의 도성 사비성을 협격하기로 하고 대기 중이던 신라에서는 대장군 김유신, 장군 흠순(欽純;純은 春으로도 쓰니 김유신의 아우), 품일 등이 정병 5만으로 사비성을 향하였다. 7월 9일 김유신 등은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의 5천 군을 격멸하고 기벌포의 당군 진영에 이르니 소정방은 신라군이 약정한 기일에 늦었다 하여 신라 독군 김문영(金文穎)을 군문에 베려 하였다. 김유신은 크게 분노하여 군중에게

“당장(唐將)이 황산의 역(役)을 보지도 못하고 기일에 뒤진 것으로써 우리를 죄코자 하니 허물없이 욕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당군과 결전한 뒤에 백제를 공파하리라.”

하고 군문에 창을 세우니 노발(怒髮)이 하늘을 찌를 듯이 일어서며 허리에 찬 보검이 집을 벗어 튀어났었다. 이 얼마나 용장한 기개이냐. 소정방이 크게 낭패하여 문영을 돌려 보내었다. 그리하여 나·당 연합군은 드디어 서로 호응하여 12일에 사비성을 포위하고 그 익일에 공취하여 백제 토평의 목적을 달하였다.

 

그러나 이후 백제인(부여풍, 복신, 중 도침 등)의 회복운동은 그의 형세가 자못 치성(盛)하여 당의 유진장(留鎭將) 유인원(劉仁願) 따위로는 어찌하지 못하였으나 문무왕(제30대) 3년에 신라의 김유신 등 28(일설에는 30) 장의 출동을 기다려 비로소 진토(鎭討)에 성공하였던 것이니 두솔성(豆率城) 백강구(白江口)의 격전은 그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백제원정에 성공한 당은 신라까지도 넘겨다보려 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유신은 열렬히 당을 응징하기를 주장하였고 전승의 신라 국민은 상하일치의 단결력을 나타내어 무언한 가운데에 당의 야심을 꺾어 버렸다.

 

 

3. 고구려 공략

 

백제를 토평한 나·당 양국이 전승의 세로써 고구려 공벌에 나올 것은 그의 예정 계획이었다. 문무왕 원년 6월에 당의 수륙 35만 군이 고구려에 침입할 제 신라에서는 김유신이 대군을 동원하여 남천주(南川州 ; 경기 이천)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당국(當局)하여 원래(遠來)의 당군을 요격하던 터이므로 평양도행군총관 소정방이 바다를 건너 대동강구의 연안에 이르렀으나 육군과의 연락을 얻지 못하여 고립상태에 빠졌으며 그 위에 군량의 공급이 곤란하여 신라에 식량을 청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군장구(懸軍長驅)로 강적 고구려를 뚫고 거만(鉅萬)의 군량을 당군에 공급하기는 실로 난(難) 중의 난사이다.

현군장구(懸軍長驅): 응원군 없이 적지에 군병을 깊이 진격시킴.

 

그리하여 당군으로부터 이러한 주문을 받은 신라의 군신들은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 하여 첫 번부터 단념의 빛을 보이매 맹방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려던 문무왕의 우려가 더 한층 높았다. 이에 김유신은 감연히 노구를 끌고

"국가의 대사를 행함에는 죽더라도 피할 바가 아니라.”

하여 모험하기를 자원하였으니 원래 이러한 일은 김유신이 아니면 행하기 어려운 바이다.

 

그는 동년 12월 10일에 부장군 김인문(무열왕의 제2자), 진복(眞服), 양도(良圖) 등 9장군으로 더불어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 조 2만 2천여석을 싣고 고구려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그리하여 익년 정월 23일에 양국국경인 칠중하(七重河;지금의 임진강)에 이르매 사졸들은 두려워 감히 배에 오르지 못하는지라 김유신이 먼저 배에 올라 중심(衆心)을 격려하였다. 고구려 경역에 들어서는 고구려의 요격이 있을까 하여 대로를 피하고 험애한 길을 가려 깊이 평양을 향하여 들어갔다. 때는 엄동이라 풍설에 길이 빙활(水滑)하여 우마차가 전진하기 어려웠으나 김유신은 여러 가지로 사졸의 마음을 고무하면서 강행군을 계속하다가 도중(利峴)에서 고구려병을 역격하여 2월 1일에 장색의 험지에 이르매 추위는 더욱 혹독하고 인마가 곤피하여 僵仆하는 자가 적지 아니하였다.

강부(僵仆): 넘어짐 또는 넘어진 시체.

 

그러나 노장 김유신은 팔을 걷고 채찍을 들어 말을 몰아 앞을 서니 사졸은 감히 추운 것을 말하지 못하였다.

 

6일에 드디어 평양에서 멀지 않은 양오에 이르러 그곳에 유진하고 인문, 양도와 그의 아들 군승(軍勝) 등을 당영(唐營)에 보내어 왕지(王旨)로써 주렸던 당군에게 군량을 호궤(稿饋)하였다(소정방은 자주 군사에게 失利한 나머지에 군량을 얻어 철환하였음).

빙활(氷滑): 얼음지치는 운동을 말함인데 여기서는 길이 미끄러운 모양.

 

김유신은 이와 같이 중대한 사명을 달성하고 돌아올 때에 요격하려는 고구려의 복병을 교묘히 물리쳐 진로를 열고 다시 추병(追兵)을 표하반에서 격멸하여 신라의 위력을 다시금 빛내었다.

 

문무왕 6년에 이르러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죽고 그의 3자(남생, 남건, 남산) 사이에 정권의 싸움이 일어나 장자 남생이 당에 반주(叛走)하였다. 이러한 기회를 타 고구려에 대한 나·당 동맹군이 또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무왕 8년(668) 6월에 대기하고 있던 신라에서는 대각간(大角干;품관) 김유신이 대총관(大總管)이 되고 인문(仁問), 흠순(欽純), 천존(天存), 문충(文忠), 진복(眞服), 지경(智鏡), 양도(良圖), 개원, 흠발, 진순(陳純), 죽지(竹旨), 품일(品日), 문훈(文訓), 천품(天品), 인태(仁泰), 도유(都儒), 용장(龍長), 숭신(崇信), 문영(文穎), 복세(福世), 선광(宣光), 장순(長順), 순장(純長), 의복(宜福), 천광(天光), 일원(日原), 흥원(興元), 군관(軍官) 등이 각 총관이 되어 대군으로써 평양에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총관 김유신이 마침 풍증(風症)이 발하였으므로 경도에 머물러 나라를 지키며 후방의 경영을 담당하기로 하고 흠순, 인문에게 용병의 지획(指劃)을 주어 그의 대(代)로 전군의 지휘에 당케 하였다. 그리하여 신라의 대군은 문무왕의 통솔 아래에 고구려에 진격하여 9월 21일에 당군으로 더불어 평양성을 공취하여 드디어 고구려를 평정함에 이르렀다.

 

이에서 여·제 양국을 토평하려던 신라의 목적이 거의 달성되었으나 원래 당의 세력을 이용한 만큼 당군은 아직도 여·제의 고역(故域)에 잔류하였었다. 당군이 머무르고 있는 한에는 통일이 완성되지 못하는 것이니 신라는 다시 무력으로써 당군을 격퇴하여 반도에서의 삼국통일을 성취함에 이르렀다. 김유신의 종생의 이상이 이와 같이 실현의 역에 달한 때에 그는 조용히 병석에 누워 問慰하던 문무왕에게

“성공이 쉽지 아니하고 수성(守城)이 또한 어려우매 소인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하여 조정으로 하여금 위에서 화(和)케 하고 민물(民物)로 하여금 아래에서 편안케 하사 화란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기업(基業)이 무궁하면 죽어도 유감이 없으리다.”

라는 말을 남기고 문무왕 13년(673) 7월 1일에 79세로 서거하였다.

민물(民物): 백성

 

요컨대 당시 신라의 국운은 김유신의 쌍견(雙肩)에 매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삼국 통합에 그의 힘이 절대하였다. 그리하여 국내에서는 성신(聖臣)으로 국인의 존중을 받았으며 지용겸전(智勇兼全)한 그의 위명은 일찍부터 멀리 당에까지 떨쳤다. 일찌기 문무왕은 여·제 양국을 토평한 뒤에 김유신의 공적을 갸륵히 여겨 신라 최고의 관직이며 또 최초의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태대각간)의 직에 식읍 500 호를 봉하였고 후세에도 그의 위업은 신라 군신의 잊혀지지 못하던 바로서 흥덕왕(제42대) 때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함에 이르렀다.

 

끝으로 김유신 일족의 신라국가에 바친 공적을 몇 가지 들어 위인의 여풍을 추소(追溯)하여 볼까 한다. 김유신의 아우 흠순과 그의 아들 군승은 또한 국가의 간성으로서 여·제 평정에 많은 공을 세웠었다. 특히 흠순은 그의 형을 도와 행동을 같이하여 북정서벌(北征西伐)에 위훈을 세웠으므로 문무왕 시대에는 유신, 인문과 같이 국가의 3중신으로 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형 유신의 업적이 너무나 혁혁하여 흠순의 공업은 도리어 가려진 감이 없지 아니한 바이다.

 

다음, 김유신의 차자 元述의 일을 적어 보면 여·제를 토평한 후에 신라는 당의 세력을 반도에서 구축하였더니 당은 말갈과 합세하여 대방(황해도 일대)에 침입하였다. 원술은 비장(裨將)으로서 출전하다가 당군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신라군이 패하매 원술은 전사를 각오하고 적진에 돌입하려 하였다. 그때 그의 부하 담릉(淡凌)이

“무익한 죽음보다도 후효(後效)를 도하는 것이 가하다.”

하여 만류하니 원술은

 

“남아가 구차히 사는 것이 아니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오부(吾父)를 대하랴.”

하고 말을 채찍질해 돌입하려 하였으나 담릉이 굳이 붙들어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다. 김유신은 원술이 왕명을 욕되게 하고 가훈을 저버렸다 하여 문무왕께 베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원술 만을 중형에 처할 수는 없다 하여 듣지 아니하였다. 원술은 慙懼히 여겨 감히 부친을 대하지 못하고 전원에 은거하더니 그의 부친을 여읜 후에 모친 지소부인을 뵈려 하였다.

참구(慙懼):부끄럽고 송구하게 여김.

 

그러나 지소부인도

“원술이 이미 선군에게 자식으로 보이지 못하였거니 내 어찌 그의 어미가 되랴."

하고 종시 보지를 아니하였으니 당시 신라 부인의 기백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원술은 할 수 없이

“담릉의 그르친 바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렀다.”

고 탄식하고 태백산에 들어갔더니 문무왕 15년에 당병이 또 매소천성(買蘇川城)에 내한할 때에 원술은 전의 부끄러움을 씻고자 출전 역투한 결과 대공을 세웠으나 부모에게 용납되지 못한 것을 한하여 벼슬을 사하고 몸을 마쳤다 한다.

이로써 김유신 일족의 무사적 정신과 그의 가정적 훈육이 어떠하였음을 알 수가 있는 동시에 신라 무사도의 발달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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