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여성(李如星)
1901∼?. 화가. 호 청정(淸汀), 경북 생.
대구 청년을 중심으로 혜성단(慧星團)을조직,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년간 복역. 닛교(立敎) 대학 경제학부 중퇴.조선일보, 동아일보의 조사부장, 편집차장 역임.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월북․
저서에 숫자조선연구(數字朝鮮硏究)」.
솔거는 신라 진흥왕(540~576) 때 사람으로서 조선사에 제일 먼저 나타나는 유명한 화인(畵人)이다.
그는 빈한한 농가의 아들로서 일찍부터 화사(畵事)에 뜻한 바 간절하였으나 적빈여세(赤貧如洗) 참으로 붓 한 자루 얻을 길조차 바이 없어 김매러 갈 때는 호미끝으로 모래판을 종이삼아 그리기도 하고 나무하러 갈 때는 칡뿌리를 붓 삼아 바위 위에 그리기도 하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다.
☞적빈여세(赤貧如洗): 가난하기가 물로 씻은 듯하여 가진 것이 없음.
그러나 벽향(僻鄕)에 良師 없음을 어이하리요. 그는 일야(日夜)로 천신에게 신교(神敎)를 빌었던바 한번은 꿈에 한 거룩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신인(神人) 단군이라. 너의 지성에 느낀 바 있기에 이 신호(神毫)를 주노라.”
하거늘, 솔거 열연(悅然)히 깨닫고 그때부터 그의 예술은 지묘(至妙)의 경(境)에 들어 마침내 명장(名匠)이 되었다 한다. 이에서 그는 신은(神恩)에 감명되어 꿈에 나타난 단군 어진(檀君御眞)을 거의 1천 매나 그려 가가(家家)에 반포하고 신은을 봉찬(奉贊)코자 하였으니, 고려 이규보의〈題率居所畵檀君御眞贊〉에
“고갯마루 위 저 집에 걸린 단군상은 옛날 어느 명공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 분명코나!” (편집자 역)
라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밝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룡사(진흥왕 27년 병술에 창건된 경주 東郊의 거찰) 벽에 그린 그의 노송은 체간(體幹), 인부(鱗麬), 지엽(枝葉), 반굴(盤屈)이 너무나 逼眞하여 연연작조(燕鳶雀鳥)가 왕왕 날아들다가 층등이락한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그의 예술이 원숙기에 들었을 때의 작품이었을 것이다.
▶연연작조(燕鳶雀鳥):제비, 솔개, 참새 등 온갖 새를 총칭.
▶층등이락(蹭蹬而落):어정거리다가 떨어짐.
세구색암(歲久色暗)하여 사승(寺僧)이 그 단청을 보채(補彩)한 후 다시 조작(鳥雀)이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의 작품은 이상의 두 가지뿐이 아니요 응당 많았을 것이로되, 경주 분황사 관음보살상과 진주 단례사(斷例寺) 유마상(維摩像)이 그의 것이라 전할 뿐 그 진적(眞蹟)을 접할 수 없는 것은 실로 천고의 한사(恨事)이다.
솔거와 거의 동시대의 회화라 할 만한 평남 강서군 우현리 대묘(大墓)·중묘(中墓)의 벽화(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천인, 신선, 산악, 비운, 기린, 봉황, 연화 등이 그려져 있음)도 웅혼의 기운과 遒勁한 필법으로 내외인을 크게 놀라게 하였으니, 鳥雀을 속일 만큼 된 그의 회화는 필시 그보다 훨씬 사실적이었을 것이며 또 그 위에 웅경(雄勁)한 고신라(古新羅) 기백이 실렸을 것으로 상상되고, 시대와 지리적 관계로 보아 북위(北魏) 더구나 양(梁)의 영향이 채 미치지 못한 자가 독자의 회화이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인즉, 그의 예술은 높게 평가되는 것이며 그의 신라 미술에 끼친 영향과 공적도 자못 컸을 것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遒勁:그림이나 글씨의 붓힘이 세어짐.
「고환당집(古懽堂集)」 동경잡영(東京雜詠)에 이르기를
“솔거가 어찌 미천한 가문에서 난 것을 거리끼리오. 국사는 오직 6법의 기묘함만을 전하는데 기묘한 필법은 타인의 손을 용납치 않으니 황룡사 벽의 노송 가지가 알고 있네”(편집자 역)
“率居何妨出所微 國史猶傳六法奇
妙技不容他手補 皇龍寺壁老松枝”
(참고서:삼국사기, 고환당집, 東史類考, 동국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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