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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億齡의 시 2수 본문

漢詩와 漢文

林億齡의 시 2수

耽古樓主 2025. 2. 9. 11:52

林億齡의 시 2수

 

示子芳

古寺門前又送春 殘花隨雨點衣頻.
歸來滿袖淸香在 無數山峰遠趁人.

古寺 앞에서 봄을 보내는데, 마지막 꽃잎은 비를 따라 옷에 붙네.

돌아오는 길목, 소매 가득 맑은 꽃향기에, 무수한 산 벌이 멀리 따라오누나.

◇ 頻(빈): 1)잦은 모양 2)늘어서다 3)찡그리다 여기서는 1)과 2)의 뜻

◇ 袖(수): 옷 소매

◇ 趁(진): 따라오다. 뒤따르다.

 

감상

 

오래된 절을 찾아 나들이하는데 날씨가 더운 것이 이미 초여름이다. 떠나가는 봄을 아쉬워하는 이 작가의 마음을 하늘도 아는지 비까지 뿌려 준다. 빗물에 실려 꽃잎이 떨어진다. 비에 젖은 두루마기 위로 꽃잎이 내려앉아 하얀 옷에 붉은 점으로 무늬를 이룬다. 옷에 꽃잎을 묻힌 채로 산을 내려오자니 어디선가 벌떼들이 나타나 계속 따라온다. 꽃향기를 소매 가득히 담아 오니 벌들이 알고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그 향기 가득한 봄을 ‘ 子芳 ’이란 친구에게 자랑하고 있다.

 

送白光勳還鄕

江月圓復缺(강월원복결) 庭梅落又開(정매락우개)
逢春歸未得(봉춘귀미득) 獨上望鄕臺(독상망향대)

강에 뜬 달은 둥글었다 다시 이지러지고, 뜰의 매화는 졌다가 또 피네

봄이 와도 나는 돌아가지는 못하매, 홀로 망향대에 올라 본다

 

 

 작자-林億齡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대수(大樹), 호는 임석천(林石川). 임득무(林得茂)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수(林秀)이고, 아버지는 임우형(林遇亨)이며, 어머니는 박자회(朴子回)의 딸이다. 박상(朴祥)의 문인이다.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었고, 152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부교리·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간·전한·세자시강원설서 등 여러 직위에 임명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금산군수 역임 시 동생 임백령(林百齡)이 소윤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의 많은 선비들을 추방하자, 자책하고 벼슬을 사퇴하였다. 그 뒤 임백령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을 보내오자 분격하여 이를 불태우고 해남에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등용되어 1552년 동부승지·병조참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가 되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도량이 넓고 청렴결백하며, 시문을 좋아하여 사장(詞章)에 탁월하였으므로 당시의 현인들이 존경하였으나 이직(吏職)에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으로 사신(史臣)들이 평하였다.

전라남도 동복의 도원서원(道源書院), 해남의 석천사(石川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석천집』이 있다.

松江 鄭澈의 스승이다.

 

 

임억령의 墓表 - 朴世采 撰

 

호남(湖南)에 대체로 유명한 현인과 은둔한 인사가 많았는데, 중종(中宗)과 명종(明宗) 시대에 이르러 가장 융성하였다. 그러나 그 풍절(風節) 문장(文章)이 우뚝 뛰어나 일시 제현(諸賢)들의 존경을 받은 분은 오직 옛날 관찰사(觀察使) 석천 선생(石川先生) 임억령(林億齡)공이 가장 드러났다고 한다.

 

공의 자(字)는 대수(大樹)이고, 관향은 선산(善山)이다. 그의 시조(始祖) 임양저(林良貯)가 신라(新羅)에서 벼슬하여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이 고려(高麗)로 귀순할 때 극력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 자손들이 여러 고을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는데, 해남현(海南縣)으로 이주한 사람이 공의 선조(先祖)이다.

증조(曾祖) 임득무(林得茂)는 참의(參議)에 추증(追贈)되었고, 할아버지 임수(林秀)는 현감(縣監)으로 참판(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 임우형(林遇亨)은 판서(判書)에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음성 박씨(陰城朴氏)이다.

 

공은 홍치(弘治) 9년(1496년 연산군 2년) 2월 16일에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의 명에 따라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형제에게 글을 배웠다.

정덕(正德)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 11년)에 태학(太學)에 들어가고, 가정(嘉靖) 을유년(乙酉年, 1525년 중종 20년)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시강원(侍講院)ㆍ홍문관(弘文館)의 관직을 두루 거치고 누차 사헌부(司憲府)ㆍ사간원(司諫院)의 관직 및 사인(舍人)에 임명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동복(同福)ㆍ금산(錦山) 두 고을의 수령과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고, 최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가 되었다. 공에 대해 상고할 만한 출처는 이상과 같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 3월 9일에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나 공의 집 북쪽 몇 리 정도 되는 마포(馬浦) 술향(戌向)의 자리에 묻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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