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스승이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지식을 가르치는 지육(知育)보다 사람됨을 가르치는 덕육에 한결 더 비중을 두어야 한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일제 때 나의 별명은 '짜찌루'였다. 당시 영국 수상 처칠의 일본말 발음인 것이다.
이것은 죽도록 싫은 별명이다. 왜냐하면 영국은 당시 일본과 싸우고 있던 적성국(敵性國)으로 ‘죽여라, 짜찌루' 하는 따위의 표어며, 창살에 찔린 짜찌루 머리통을 그린 표어가 나붙곤 하던 때이기에 그 별명으로 불리울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경멸을 느꼈던 것이다.
언젠가 학교 운동장에서 여자아이들 노는데 훼방을 놓다가 집단으로 짜찌루란 매도의 세례를 받았다. 사춘기가 시작된 때라 미묘한 열등감도 작용했던지 복받치는 분노를 참을 길 없어 배나무 고목 뒤에 등 대고 앉아 엉엉 울었다.
그러고서 수업이 시작되었다. 담임 선생님이 이 나의 짜찌루 소동을 멀리서 보았는지 책을 덮으라 하고 짜찌루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훈화를 시작했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대영제국을 다스리는 총리대신으로 그의 사람됨이며 정치적 수완을 감명깊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를 불러세우고 그렇게 자랑스러운 별명을 지니고서 사내답지 않게 울면 안 된다고 타이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파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적성국을 찬양하는 반국가적 발언이요, 그나마도 어리다고는 하지만 대중 앞에서 공공연하게 말했다는 것은 대담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해방되고 안 일이지만 이 담임 선생님은 그 때문에 경찰서에 몇 번 호출당했으며 불구속으로 기소까지 됐었다고 들었다.
이 김(金) 선생님이 내 평생 가장 잊을 수 없는 스승 가운데 한 분이시다.
한 제자의 조그마한 열등감을 구제하기 위해서 감옥에 갈 일을 서슴지 않은 것이 옛 스승이었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스승이 해야 할 많은 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오히려 지식을 가르치는 지육(知育)보다 사람됨을 가르치는 덕육(德育)에 한결 큰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 옛날 교과(敎科)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지식이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사람의 행실을 가르치는 덕육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옛날의 스승들은 그 아이의 먹고 입고 자는 것에서부터 조그마한 버릇이나 성질 고치는 것에 이르기까지 사람됨을 가르치는 데 집중되었었다.
그러했기로 옛날에는 스승의 행실이나 버릇이나 표정이나 옷매무새까지 닮는다. 물론 사상이나 철학도 닮는다. 이 전인교육(全人敎育)을 시키기 위해서는 서양의 기숙학교처럼 선생과 더불어 기거하면서 배워야만 했다.
그래서 조선조 중엽까지만 해도 서당을 공방(工房)이라 했는데, 이 공방이 바로 기숙학교인 것이다. 왜 그런 이름이 붙었냐면 서당의 건축구조가 '工'자 형으로 되었었기 때문이다. 아래채 위채를 대청으로 이어놓고 바로 대청을 금방으로 쓴다. 위채의 좌반(左牛)은 스승이 기거하고 우반(右半)은 이 스승을 찾아온 원근(遠近)의 선비나 서생들이 기거하는 방으로 제공한다. 곧 정주성(定住性)이 아닌 이동성(移動性)의 학생기숙사랄 수 있다. 아래채는 정주성(定住性)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다. 이렇게 공방에서 더불어 자고 먹으면서 모든 행실을 다스리며 글을 배웠던 것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충주 변두리 지비천(知非川)가에 유배와서 지비공방(知非工房)을 짓고 많은 제자를 가르쳤던 참판 김세필(金世弼)의 공방은 유명했다.
또한 양평 용문산 기슭에 있었던 권일신(權日身)의 공방은 바로 한국 천주교의 온상이기도 했다.
또한 한말의 척사학문(斥邪學文)은 바로 스승 이항노(李恒老)의 공방이 온상이었다.
이 같은 공방 스승의 전통 때문에 한국의 스승은 세상 사는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을 형성시켜 주는 사람이란 의미가 진했다.
김선생님이 일신의 안위를 무릅쓰고 자칫 그 무렵 나이에 상처를 주기 마련인 한 제자의 열등감을 불식시켜 주었다는 것은 바로 그 전통의 맥락인 것이다.
인간 형성을 시키는 데는 그만한 용기도 필요했음 직하고 그렇게 인간적인 교육을 받았을 때만이 스승으로서 존경심도 우러나는 법이다.
현대는 많은 것을 변질시켰지만 스승에게 있어 이 같은 덕육적인 요인의 증발도 그 큰 변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소학생은 소학생 나름으로, 중고학생은 중고학생 나름으로, 대학생은 대학생 나름으로 행실이나 인간 교육이 필요하며 또 가르치고 배울 분량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현대 교육은 가급적 그것을 멀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으며 그것이 낡은 겨 포대에서 여기저기가 새어 나오듯이 교육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승은 아이들을 보다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는 수단 이상이나 이하의 존재로밖에 생각지 않게 되고 아이들도 스승을 지식주입의 파이프 이상으로 존경하질 않게 된 것이다.
옛것보다 새것이 좋다고 하지만 스승만은 옛 스승이 새 스승보다 좋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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