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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7.우리 선조는 휴머니스트

耽古樓主 2023. 6. 13. 05:36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옛 우리 고고했던 선비들은 집 안에서 학을 길러그의 지조에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뜻을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웅변을 했다.

'탄탈로스의 접시'라는 화학 실험 기구가 있다. 시액이 일정 한계에 이르면 그 이상 넘치지 않게끔 그 밑구멍이 열려 쏟아져 나가게 장치된 실험 기구인 것이다.

 

탄탈로스는 희랍 신화의 주신 제우스의 아들로 기름진 소아시아의 폭군이었다. 그는 신들을 그의 궁전에 초청, 속임수로 인육요리를 먹이는 등 횡포가 심하여 제우스 신의 노여움으로 영원히 갈증에 시달리는 飢渴 지옥에 투옥된 것이다. 물이 목 위에까지 차올라 마실 수 있는 상황에 이른 순간 그 물이 아래로 빠지곤 하는 탄탈로스의 영원한 겁벌에서 얻은 실험 기구의 이름이다.

 

차면 기우는 이 탄탈로스의 원리를 물질주의자인 서양 사람들은 물리적으로밖에 이용 못 하였지만 정신주의자인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정신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개화기 때 한국에 와 살았던 한 미국 선교사는 서울 종로 길거리에서 대나무로 만든 '이상한 컵'을 팔고 있는 상인을 목격했다.

 

이 이상한 컵 밑에는 구멍이 분명히 뚫려 있는데 물을 담아도 새질 않았다. 물이 그 컵에 거의 차자 탄탈로스의 기갈 지옥에서처럼 그물이 밑구멍으로 쏟아져 나가곤 했던 것이다.

 

이 선교사는 그것이 사이펀 현상에 의한 것 같다고 적고 있을 뿐 왜 그것을 팔고 또 무슨 필요로 한국 사람들이 그것을 사 가는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The Korea Review vol. 1. 1901》

 

이 한국판 탄탈로스의 접시는 미국 사람이 보듯 호기심을 파는 큐어리어스 컵(이상한 컵)이 아닌 그릇으로써 수신(修身)하는 모랄 컵이었던 것이다.

 

기우는 그릇이란 뜻의 '기기'라 하여 우리 옛 선조들은 이 탄탈로스의 접시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인생 만사에 과분하면 넘친다는 안빈수분(安貧守分)과 지족지지(知足知止)의 교훈을 밤낮으로 그로부터 촉발받는 관습이 있었던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운다 하고 9분은 모자라고 10분은 넘친다는 등 분을 지키고 족함을 아는 지혜를 이 탄탈로스의 접시가 우리 선조들의 머리맡에서 구현시켜 왔던 것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에서 묘 앞에 이 기기를 두고 백성을 훈도했다는 기록(한시외전 3)이 있는 것으로 미뤄 이같은 물리의 도덕적 원용은 중국문화와 맥락이 없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이 같은 물리의 도덕 수신에의 원용은 다른 많은 원용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옛 우리 고고했던 선비들은 집 안에서 학을 길러, 그의 지조에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뜻을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웅변을 했던 것이다.

 

진주에 낙향해 있던 영남의 선비 최영경을 서애 유성룡이 찾아갔을 때 남루한 토의에 짚신 신은 최영경이 학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나와 맞았던 것이며 그로써 서애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 한다. 정말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학의 울음소리에까지 품위가 높고 낮음을 9품으로 가려 3품학, 7품학 식으로 울음소리의 법통을 적은 학보(鶴譜)까지 있었다 하니 숙연해지기만 한다. 조류학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새의 울음소리는 유전보다 후천적인 학습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한다. 그 섭리를 미리 알았던 우리 선조들은 아기 학에게 보다 품격높은 학을 스승으로 모셔 울음소리를 학습시킴으로써 품격을 높이고 그 학생의 품격을 동일화하려 했으니 오금이 저리도록 멋있지 않은가.

 

지금은 저금통으로 통용되고 있는 벙어리통의 뿌리도 바로 탄탈로스의 접시나 학 같은 수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말 때까지만 해도 서울 하연고개와 장충고개에 벙어리통 굽는 아도요가 있었고, 종로 육이전에 도전이 따로 있었을 정도로 생활 속에 침투되어 있던 지극히 한국적인 풍물 가운데 하나였다. 속전으로는 한양 풍수가 농아를 많이 낼 형국이라 전기 두 고개에 아도요를 만들어 이를 막고 각기 한 집에서 벙어리통 하나씩을 가지면 이 풍수기운을 미리 막을 수 있다 하여 서민 사회에서 벙어리통 경기가 유지됐다고 하나, 선비 사회에서는 전혀 딴 의미가 부가되어 내렸던 것이다.

 

선비가 거처하는 사랑방 상좌에 이 벙어리 단지를 모셔놓고 손님이 오면 그것을 내려 손 앞에 내민다. 이것은 앞으로 오갈 대화에 있을 수 있는 시국이나 시세에 걸리고 시휘에 저촉되는 화제에서 자신을 벙어리로 소외시킨다는 상징적인 전제인 것이다. 권력이나 영화나 영달이나 부나 재가 개입된 그런 시세에 관해서는 벙어리통처럼 듣지도 또 말하지도 않겠다는 수신적이고도 계명적인 의미도 있지만, 잇따른 사화나 당쟁과 시기와 무고의 연속인 선비 풍토에서의 보신을 이 벙어리통으로 하여금 대변시켰던 것이다.

 

이 옛 선비들의 처세통을 미니통으로 작게 만들어 마스코트로써 주머니 끈에 매어 달고 다니기도 했으며 그로써 자신을 권세와 영달로부터의 아웃사이더로 자처한 것이다.

 

이 벙어리통이 우리 고유의 저금통의 뿌리가 된 것은 풍수적인 주술이나 또 처세적인 효력을 유지시키는 데는 뭣인가 먹여야 한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발상에서 엽전을 집어넣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선조들은 상징이나 현상까지도 인간화하는 휴머니스트였다. 서양 사람들은 모든 사리를 곧잘 추상화한다는 데 비해 우리 한국 사람들은 추상적인 것을 구상화하는 것이 사고방식의 특색이라던데 추상적인 덕목이나 진리나 수신이나 허세를 이 같은 탄탈로스의 접시나 학, 벙어리 등으로 구상화시켜 그 추상 가치를 생활화했음은 독특한 문화 형태의 한 표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