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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인간적인 인간관리

耽古樓主 2023. 6. 13. 05:37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규범적이기보다 가족적이며이 같은 인간적 인간관리는 오늘날 경영 철학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책을 이것 저것 읽다 보면 후세에 이름을 남긴 임금님이나 재상들은 아랫사람 다스리는 데 법도나 이치로 하지 않고 정리나 인정으로 하고 있는 데 예외가 없다.

 

우리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이성적이기보다 감성적이고, 규범이기보다 가족적이기 때문일 것이며 이 같은 인간적 인간 관리는 오늘날 경영 철학에서도 예외는 아닌 줄 안다.

 

성종(成宗)은 글 잘하는 선비를 좋아하여 문장이 특출난 세 사람을 궁중에 불러 숙식케 하고 독서에 전념토록 했었다. 그 세 사람이 바로 손순효(孫舜孝)와 조위(曺偉), 그리고 신종호(申從濩)였다.

 

선택받은 이 세 사람을 두고 모든 사람이 영광으로 생각하였으며 또한 무척 부러워했다.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 성종은 내시 한 사람만을 거느리고 이들이 글을 읽는 옥당(玉堂)에 微行을 했다. 옥당 문전에 이르자 때마침 숙직을 하고 있던 매계(梅溪) 조위(曺偉)의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성종이 창틈으로 들여다보니 매계는 의관을 바로 하고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매우 흡족히 여겨 장려해 주려고 문을 열려는 순간 갑자기 한 젊은 궁녀가 옥당 글방의 뒷문으로 들어와 책상머리에 다소곳이 앉는 것이었다.

 

성종은 들어가려다 말고 숨을 죽이고 그 정황을 지켜보았다. 매계는 글을 읽다 말고 따져 물었다.

"네 모습을 보아하니 宮姬가 틀림없는데 어찌하여 이 깊은 밤중에 못 들어올 곳에 들어왔느냐?"

“저는 늘 발 틈으로 선비님의 뛰어난 풍채를 보고 사모해 왔는데 그만 염치를 무릅쓰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대궐 안 법도가 매우 엄하고 이목이 번거로운데 만일 이를 아는 사람이 있으면 어찌 죄를 면하겠는가. 당장 물러가거라!”

“일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어찌 헛되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선비님이 저를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릴 것입니다.”

말을 마친 궁녀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목에다 갖다 대었다.

당황한 매계는 칼을 빼앗고 촛불을 끄고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 성종은 이를 끝까지 지켜보고 혹시 다른 사람이 알까 봐 그 자리에서 경계하다가 대궐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시에게 명하여 밤이 추우니 이들에게 어용(御用)의 돈피(豚皮) 갓옷을 덮어 주라고 시켰다.

 

매계가 꿈속에서 이상한 향기가 온 방 안에 가득한 것에 놀라 깨어보니, 임금님의 갓옷이 덮여 있어 자지러지게 놀랐다.

 

이튿날 날이 새자 매계는 글을 올려 죽기를 청하였으나 성종은 비밀히 내시를 보내 타일렀다.

“그날 밤의 정경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뿐이다. 그래서 그것이 네 죄가 아닌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스스로 인책할 것을 삼가토록 하라.”

 

그 후 매계와 더불어 옥당의 삼학사 중의 한 사람인 삼괴당(三愧堂) 신종호(申從)가 임금을 뵙기를 특청하기로 불러들였더니 말하였다.

“조위는 儒臣으로서 심히 엄한 대궐 안에서 밤에 궁희를 끌어안고 사사로이 침실에 들었으니 청하옵건대 나라의 법도를 바로잡으소서.”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던 임금은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어떻게 이 사실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의문나는 점이 있어서 조위에게 물어보고자 늦은 밤 눈길을 밟고 옥당에 이르자 놀랍게도 옥당의 뒷문으로 젊은 궁희 하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황급히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히 사사로운 정으로 공부를 잘못되게 해서는 안 되겠기에 친구의 정을 무릅쓰고 이렇게 여쭙는 것입니다."

 

성종은 음성을 낮추어 따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겠지 하고 확인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 일은 내가 그대보다 먼저 목격한 것인데, 이는 조위의 죄가 아니다. 굳이 이를 가지고 더이상 논하지 마라.”

 

물론 이 일은 더이상 말썽이 되지 않았다. 이를 아는 사람도 당사자인 매계와 젊은 궁녀, 그리고 성종과 삼괴당 이상으로 번져나가지도 않았다.

 

사죄를 인간적인 아량으로 포용하고 또 이를 은폐해준 성종의 리더십, 그 리더십의 깊이가 얼마만한가 실감케 해주는 사례이며 이 리더십의 깊은 혜택을 받은 신하가 임금을 위해, 또 나라를 위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까가 자명해진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가장 덕있는 재상으로 꼽히는 김신국(金藎國, 1572~1657)도 인간적 인간 관리로 전설적인 재상이다.

 

인조(仁祖) 때 김신국이 호조판서로 있을 때의 일이다. 중국에 은을 바칠 일이 있어 이를 監封하는데, 신중을 기하려고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자신이 직접 감독, 감시, 지휘하며 감봉을 했다.

 

이 은을 계산하는 算員하나가 김신국이 다른 데를 돌아보며 지시를 하고 있는 동안에 은 한 덩이를 슬쩍 집어서 품에 넣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그 산원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변소에 가는 것처럼 밖에 나갔다가 한참 만에 되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계속하였다.

 

훔친 은을 어디에다 숨겨놓고 온 것이 분명하며 이 사실을 눈치챈 것은 오로지 김신국 한 사람뿐이었다.

 

이에 김신국은 모르는 체하고 곧 자리를 하면서 여러 관원에게 말했다.

“내가 이전에 앓던 통증이 다시 도지려고 해서 오래 앉아 있지 못하겠다.”

 

김신국은 그 은을 한방에 넣어두고 그 산원으로 하여금 숙직케 하고는 내일 다시 셈하여 봉하겠다고 했다.

 

혼자 남은 산원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은의 수량이 맞지 않으면 그 허물이 숙직한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 숨겨 두었던 은을 다시 갖다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래서 이튿날 감봉할 때 그 산원은 무사했다.

 

10여 일이 지난 뒤 김신국은 그 사람의 죄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다른 일을 핑계삼아 좌천을 시켰다.

 

어찌 그 리더십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