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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9. 사불삼거(四不三拒)

耽古樓主 2023. 6. 17. 05:37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우리 형제가 국록을 먹으면서 이런 영업을 하면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으란 말이냐형 김수팽은 동생을 매로 치며 염색물을 쏟아버렸다.

 

우리 전통 관료사회에 청렴도를 가르는 기준으로 '사불삼거(四不三拒)'라는 불문율이 있었다.

 

부업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일불(不)이다.

영조 때 호조(戶曹)의 서리(書吏)로 있던 김수팽(金壽彭, ?~?)이 어느 날 惠廳의 서리로 있는 동생집에 들렀다가 마당에 널려 있는 항아리에서 염색하는 즙(汁)이 넘쳐흐르는 것을 보고 어디에 쓰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그래서 동생이 처가 염색으로 생계를 돕고 있다고 하자, 노하여 동생을 매로 치며, “우리 형제가 더불어 국록을 먹고 있으면서 이런 영업을 하면 저 가난한 백성들은 무엇으로 생업을 삼으란 말이냐.” 하고 모조리 그 염색물을 쏟아버렸던 것이다.

 

재임 중 땅을 사지 않는 것이 이불(二不)이다.

살림에 무심한 윤석보(尹碩輔)가 풍기군수로 있을 때 고향에 두고 온 그의 처 박씨가 굶주리다 못해 시집올 때 입고 온 비단옷을 팔아 채소밭 한 뙈기를 샀다. 윤석보는 이 소식을 듣자 조정에 사표를 내고 고향에 가서 땅을 물리고서 대명(待命)을 하고 있다.

 

집을 늘리지 않는 것이 삼불(三不)이다.

대제학(大提學) 벼슬의 김유(金楺, 1653~1719)는 서울 죽동(竹洞)에 집이 있었는데, 어찌나 좁은지 여러 아들들이 처마 밑에 자리를 펴고 거처할 정도였다. 그가 평안감사로 나가 있는 동안 장마비에 처마가 무너지자 이를 수리하면서 아버지 몰래 처마를 몇 치 더 달아냈던 것 같다.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처마가 넓어진 것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야 알고 그 당장에 잘라내게 했던 것이다.

 

재임 중 그 고을의 명물을 먹지 않는 것이 사불(四不)이다.

조오(趙悟)가 합천군수로 있을 때 고을의 명물인 은어를 입에 대질 않았고, 기건(奇虔)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그곳 명물인 전복 한 점을 먹지 않았던 것이 그 사불이다.

 

윗사람이나 세도가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삼거(三拒)중 일거(一拒)다.

중종(中宗) 때 정붕(鄭鵬)이 청송부사(靑松府使)로 있을 때 당시 영의정이었던 성희안(成希顔)이 청송 명산인 꿀과 잣을 보내달라고 전갈을 띄웠다. 이에,

“잣나무는 높은 산 위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부사 된 자가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라고 회신을 하고 있고, 영의정도 잘못을 사과하고 있으니 정말 아름답다.

 

청을 들어준 다음 답례를 거절하는 것이 이거 (二拒)다. 사육신인 박팽년(朴彭年)이 한 친구를 관직에 추천했더니 답례로 땅을 주려 했다. 그러자 땅을 찾아가든지 관직을 내놓든지 택일하라고 전갈을 보내고 있다.

 

재임 중 경조애사(慶弔哀事)의 부조를 일체 받지 않는 것이 삼거(三拒)다.

현종(顯宗) 때 우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열 살 난 아들이 죽었는데, 충청병사(忠淸兵使) 박진한(朴振翰)이 명베(무명) 한 필을 부조해 왔다. 이에 아첨 행위가 아니면 대신의 청렴을 시험해 보려는 행위라고 법에 얽어 넣기까지 하고 있다.

 

서울시가 관리직의 청렴도를 조사하여 청렴카드제를 실시한다고 한 일이 있었다. 그 기준 잡기가 어려워 청렴도 측정은 말썽도 많고 또 번번이 실패하거나 유명무실해지게 마련이었다. 이 사불삼거를 복고 및 수정, 제도화하여 공직풍토의 지질(地質) 변혁을 꾀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