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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90. 부채

耽古樓主 2023. 6. 17. 05:37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선풍기 바람이 더위를 물리적으로 쫓고 에어컨이 화학적으로 삭인다면부채 바람은 더위를 달래면서 공존한다자연과 적대하지 않고 화합하는 것이 부채 바람의 묘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친밀농도(親密濃度)를 연구한 심리학자 홀스타인이라는 이는 사람이 6개월 동안 만나지 않거나 소식을 전하지 않거나 하면 그 두 사람 사이의 친밀도가 반감한다고 했다.

 

그래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친지에게는 반년에 한 번쯤은 편지를 하거나 전화를 걸거나 인편에 안부라도 전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이 이 홀스타인의 법칙을 알았을 턱은 없지만 체험적으로 터득을 하고 꾸준히 실행해온 데 머리가 숙여진다.

 

이를테면 정초에 원근의 친지들에 달력을 보내고 그 후 거의 반년이 가까워지는 단오날에 부채를 다시 보냄으로써 희석되어가는 친밀농도를 원상유지시킨 것 등이 그것이다. 곧 정초력(正初曆)과 단오선(端午扇)은 그것들이 갖는 실용적인 쓸모보다 한국적 공동체의 접착제로서 그 뜻을 찾아볼 수가 있다.

 

선조 때 명문장 임제(林悌)가 엄동설한에 사랑하는 기생에게 부채를 보내고 있는데, 그 부채에다

'겨울 부채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그대 생각에 타는 가슴 삼복더위를 웃돌거늘………….'

하는 시를 쓰고 있다. 부치는 부채가 아니라 짙은 정이 오가는 매체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이렇게 사랑을 약속하거나 뜻을 같이하거나 죽음을 같이하거나 결의를 할 때 부채를 주고받음으로써 신물(信物)로 삼았던 것도 부채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미국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는 대원군 집정시절에 강화도에서 있었던 한미소전쟁(辛未洋) 때 노획한 일심선(一心扇)이 전시돼 있다. 그 부챗살마다 싸워서 죽기로 약속한 한국 병사들의 이름이 쓰여 있음을 보고 숙연해졌던 기억이 난다. 되살리고 싶은 부채철학이다.

 

그 밖에도 부채의 용도는 다양했다. 흔히들 부채에 여덟 가지 덕이 있다 했는데,

그 하나가 더위를 쫓아주는 덕이요,

둘째가 흙 땅에 방석이 돼주는 덕이요,

셋째가 햇볕과 비를 가려주는 덕이요,

넷째가 모기 · 파리를 쫓아주는 덕이요,

다섯째가 이리저리 가리키고 오라 가라 말을 대신해 주는 덕이요,

여섯째가 미인이 배시시 웃을 때 입을 가려주는 덕이요,

일곱째가 빚쟁이 만났을 때 얼굴을 가려주는 덕이요,

여덟째가 신날 때 장단치는 덕이라……….

 

선풍기 바람이 더위를 물리적으로 쫓고, 에어컨 바람이 더위를 화학적으로 삭여버린다면 부채 바람은 더위를 달래면서 공존하는 바람이다. 자연과 적대하는 바람이 아닌, 화합하는 바람이란 점에서 부채바람의 묘미가 있고 또 다른 철학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