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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2. 기심(機心)

耽古樓主 2023. 6. 16. 03:31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강에서 날아다니는 새나 산에서 달리는 짐승들이 사람을 피하는 것은 기심 때문이며기심을 갖지 않고 천연스러우면 금수와 친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莊子다.

 

옛날 강가에 한 어부가 살았다. 그는 고기잡이하면서 해오라기와 친하게 되어 가까이 와서 놀고 어깨에 올라앉기까지 했다. 그는 해오라기 이야기를 아내에게 했다. 아내는 그 해오라기 한 마리를 잡아 오라고 하였다. 이튿날 어부는 그렇게 마음을 먹고 강가에 나갔더니 그토록 많이 날아오던 해오라기가 한 마리도 가까이 날아오질 않았다. 이것은 어부에게 해오라기를 잡으려는 기심(機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심은 밖으로는 그러하지 않은 체하고 속으로 품는 사심이다. 강에서 날아다니는 새나 산에서 달리는 짐승들이 사람을 피하는 것은 기심 때문이며, 기심을 갖지 않고 천연스러우면 금수와 친할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장자(莊子)다.

 

옛날 벼슬아치들은 정국이 어지러우면 곧잘 산천을 찾아가 묻히곤 했는데, 진심으로 벼슬이나 권력이나 그에 따라붙는 영화를 잊은 경우와 잊은 체하는 경우가 있다. 세조(世祖) 때 학자 남효온(南孝溫)은 어지러운 정국을 등지고 행주(幸州)에 돌아가 기심을 잊었다. 그가 농삿일을 할 때면 물새들이 등에 와 앉아 지저귀는 바람에 날아갈까 봐 아픈 허리를 오래도록 펴지 못했다 한다. 명종(明宗) 때 정승 박순(朴淳)도 지리산에 들어가 기심을 잊었는데, 지팡이 짚고 산길을 걸으면 산새들이 그 지팡이 소리를 알고 몰려들었으며, 바위에서 낮잠을 자면 다람쥐들이 소매나 바짓가랑이 속을 들랑거렸다 한다.

 

한강 변에 있었던 압구정은 세조와 성종(成宗) 두 임금을 들여세운 공신이며 두 임금의 장인인 데다가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던 망기노(忘機老)의 정자다. 기심을 잊고 이곳에 물러나와 살면서 갈매기와 친하다 하여 압구정이요, 자신의 아호도 기심을 잊은 노인이라 하여 '망기노'라 하였다. 한데 망기노는 기심을 잊은체했을 뿐 잊지 못했던 것 같다. 다음 최경지(崔敬止, ?~1479)의 압구정 시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임금이 하루에 세 번씩이나 은근히 불러보아 총애가 흐뭇하던가.

정자는 있으나 와서 노는 주인이 없구나.

가슴 가운데 기심만 끊어졌다면 비록 벼슬바다 앞에서도 갈매기와 친할 수도 있으련만………….

 

세조정난(世祖靖難) 후 체제파(體制派)로서 대신 벼슬을 했던 사가정(四佳亭)이 반체제파로 팔도를 방랑했던 매월당(梅月堂)을 초치하여 강태공이 고기 낚는 그림 한 폭을 내놓으면서 제시(題詩)한 수를 청했다.

 

비바람 소소히 낚시터에 뿌리니

강물의 고기와 새는 기심을 잃었는데

뭣하러 늘그막에 날쌘 독수리가 되어

백이숙제(伯夷叔齊)를 굶주리게 하려는가.

 

기심을 찔린 사가정은 묵묵히 이 시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자네의 시는 바로 나의 죄안(罪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