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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83. 측간 문화

耽古樓主 2023. 6. 16. 03:32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측문화(厠文化)를 뒤돌아보면 배설물을 멀리 처리하는 원측문화(遠厠文化)와 가깝게 처리하는 근측문화(近厠文化)로 대별할 수 있다.

 

1백여 년 전만 해도 수세식 변기가 있고 욕조(浴槽), 샤워기가 있으며 꼭지만 틀면 물이 쏟아지는 세면대가 갖추어진 화장실은 유럽의 왕후 귀족만이 누릴 수 있었던 사치스러운 공간이었다.

 

수세식 변기가 특허권을 얻은 것은 1775년의 영국에서였는데 공공하수도가 돼 있질 않아 실용화되지 못하다가 1880년대에 들어서야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1백여 년 전 파리의 경우 수세식 변기의 보급률은 20퍼센트에 불과했으며, 그 80년 후인 1968년까지만 해도 겨우 55퍼센트에 불과했으니 의외로 느린 보급속도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전까지는 옛 한국에서처럼 요강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화려하고 컸다던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 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날이 어두워지면 파리나 런던의 거리에서는 여기저기서 “물조심!” 하고 외치며 2층, 3층에서 창 밖으로 배설물을 길가에 쏟아 버렸다 하며, 이것은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었다.

 

유럽에 향수가 발달한 것은 이 거리의 악취에서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측문화(厠文化)를 뒤돌아보면 배설물을 멀리 처리하는 원측문화(遠厠文化)와 가깝게 처리하는 근측문화(近厠文化)로 대별할 수 있다.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보면, 사막에서는 오아시스에서 활을 쏘아 꽂히는 먼 거리까지 가서 용변하는 것이 규칙이며, 범칙을 하면 형벌을 받는다 했다. 물이 귀한 땅에서는 건조시켜 처리해야 했기에 원측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음 직하다. 한데 물이 많은 수도문화권(水稻文化圈)에서는 근측문화가 발달하고 있다. 불경(佛經) 《기원도경(祇園圖經)》에 보면 기원정사(園精舍)의 제육원(第六院)에는 유측(流厠)이라는 아래에 냇물이 흐르는 수세식 변소가 있었다 했다. 태국이나 베트남의 델타 지역에서는 원두막 같은 고상식(高床式) 주택에서 사는데 피로티라 하여 토관을 통해 상하(床下)로 용변을 흘려보낸다. 그럼 우계(雨季)에 들어 빗물이 싹 쓸어가버린다.

 

불교에 묻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절간들에서 흐르는 계곡물 위에 유측을 만들어 쓴 전통은 유구하다. 일제 때까지만 해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는 흐르는 계곡물을 끌어와 물통에 채워두고 프랑스의 비데처럼 하체(下體)를 씻도록 돼 있는 발달된 수세식 변기가 있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에 보면 고구려에 동화된 읍루족(挹婁族)은 측간을 방의 복판에 만들어놓고 산다 했는데, 측을 옥내로 끌어들였다면 방 아래로 유수(流水)케 한다든지 하는 처리방식이 강구돼 있었음 직하다. 비록 외래의 수세식이 판치고 있지만 수세식 문화는 우리가 더 앞서 있었다 할 것이다. 다만 땅을 걸게 하는 거름으로서 배설물을 필요로 했던 농경의 발달이 이 수세식 전통문화를 증발시켰을 뿐인 것이다.

 

남뇨(男尿)와 여뇨(女尿)를 따로 받아, 나무나 삼(麻)같은 성장을 필요로 하는 작물에는 남뇨를, 열매가 많이 열고 뿌리가 뻗게 할 필요가 있는 작물에는 여뇨를 가려 쓰기까지 했으니 대단한 측문화랄 수 있다. 그래서 요강에도 구조적으로 성별을 달리해 놓았으며, 경주박물관에 소장된 신라시대의 변기도 한 눈으로 남자 요강인지 여자 요강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돼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