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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62.한국적 화풀이

구글서생 2023. 6. 16. 03:11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

 

아내가 선별해서 그릇을 깨는 행위나 남편이 소화장치를 해놓고 제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울화의 자학적 처리라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이며큰 손실이 나지 않게끔 하는 점에서 경제적이다.

 

옛날 부녀자들은 사기그릇이나 오지 뚝배기 · 바가지 · 요강 따위에 금이 가거나 이가 빠져 못 쓰게 돼도 버리는 법이 없었다. 근검절약해서가 아니고, 앞으로 있을 그것들의 쓸모를 위해 찬장이나 선반 위나 마루 밑 깊숙이 보관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남편과 싸울 일이 생긴다. 아무리 정당한 사연이라도 육체적으로 힘도 세고 가족제도적으로도 권위가 센 남편에게 약세일 수밖에 없어 얻어맞거나 내쫓기게 마련이다.

 

바로 이때다.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금 간 요강을 꺼내어 마당의 섬돌에 내동댕이치고, 부엌에 들어가 이 빠진 사기그릇을 내려치며, 금 간 바가지를 꺼내어 와지끈 밟아 버린다. 그 모두 파열음이 굉장한 기물들이라 온통 세간살이를 작살내는 것 같은 효과를 가해자에게 충분히 발휘한다. 스트레스 해소도 되어 통쾌한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홧김에 서방질하는 것보다 얼마나 합리적인 화풀이인가.

 

남편들의 화풀이도 방법이 다를 뿐 원리는 같았다. 아내의 이기죽거림이나 발악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면 하인을 불러 구정물통을 방문 앞에 갖다 놓도록 시키고 자신은 나무헛청으로 달려간다. 나무한 짐 안아다가 안방에 들여놓고 화로에서 잉걸불을 꺼내어 그 나뭇단에 대고 후후 불을 일으켜 붙인다.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면 입으로만 연거푸 말리지 말라고 하면서 방문 앞에 갖다 놓은 구정물을 부어 그 불을 끈다.

 

아내가 선별해서 그릇을 깨는 행위나 남편이 소화(消化)장치를 해놓고 제집에 불을 지르는 행위는 울화의 자학적 처리라는 점에서 지극히 한국적이랄 수 있고, 또 큰 손실이 나지 않게끔 격식화되고 의식화(儀式化)돼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이랄 수가 있겠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풀고서 후련해진 다음에는 서로 등을 긁어주며 화목해지곤 했던 것이다.

 

일전 월드컵의 새벽 중계를 보고 들어온 남편을 의심하여 부엌에 달려가 식칼을 들고 나와 찔러 죽인 아내가 있었다.

 

몇 마디 주고받으면 풀릴 일을 카악! 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단세포성이 충격적이고, 또한 감정을 중화시키는 전통적 의식(儀式)이 증발하고 없는 데 못내 아쉬움이 든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아니 담배 한 대 피우고 나면 후회할 감정의 폭발을 이성(理性)으로 거르지 못하고 살인과 살인범이라는 파국으로 몰아간다는 것은 분명히 현대병의 하나가 아닐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