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한국인의 살리고 싶은 버릇-25.계 본문
줄행랑친다는 것을 '삼십육계'라 하고, 무슨 일에 깽판 놓는 것을 '산통 깬다'고 하는데 이는 도박성 계가 못되게 악용된 경우에서 비롯된 말이다.
-우리나라 저축 수단이 제도 금융으로 옮겨 가므로써 전통적인 계가 사라져 가고 있다. 계는 전통적 저축 · 보험 · 영리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상부상조 · 친목 · 공익 수단이기도 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자랑스런 유산이다. 이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경제와 정신이 이토록 아름답게 조화된 이런 형태의 문화유산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더러 그리스·로마시대에 장례비를 추렴하던 장의(葬)조합이나 러시아의 인두세(人頭稅) 공동 부담을 위한 미르, 영국의 프렌들리소사이어티 등을 우리의 계와 견주는 학자도 있으나, 그것들은 우리 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 그 모두를 포괄한 계랄 수는 없다. 본래의 계 정신만 살린다면 좁아지는 국제화 사회에서 한글이나 고려자기나 가을 하늘에 못지않게 손꼽히는 자랑거리가 바로 계일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계가 못되게 악용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줄행랑친다는 것을 '三十六契'라 하고 무슨 일에 깽판 놓는 것을 '산통(算筒) 깬다'고 하는데, 삼십육계나 산통계는 돈 내고 돈 먹는 도박성 계로 계주가 돈 떼어 먹고이다. 곧잘 도망쳤던 데서 비롯된 말
인종 때 반란을 일으킨 殺人契, 숙종(肅宗) 때 민심을 흉흉케 한 검계(劍契) 같은 것도 계를 악용한 경우랄 것이다. 또 순조(順祖) 때 문헌인 《송남잡지(松南雜識)》에 보면 여염의 과부들끼리 추렴, 백상계(白孀契) 또는 청상계(靑孀契)를 부어 그 돈으로 건장한 사나이 품을 사서 고독한 공방(空房)을 면하는 은밀한 반도덕계(反道德契)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상계(喪契)ㆍ혼계(婚契)ㆍ호포계(戶布契)같이 관혼상제(冠婚喪祭)나 세금 같은 목돈을 내야 할 때를 위한 상부상조계(相扶相助契), 다리를 놓고 길을 내며 보를 쌓고 나무를 심는 공제계(共濟契), 서당계·책계(冊契)·필묵계(筆墨契) 같은 장학계(吳學契), 부모를 즐겁게 해주려는 위친계(爲親契), 제자들끼리 스승을 위하려는 은문계(恩門契), 어려운 홀아비나 과부 · 고아를 도우려는 구빈계(救貧契), 술을 끊기를 약정한 금주(禁酒契) 그리고 늦잠을 서로 견제하는 조기계(早起契) 등은 한국인의 전통적 심성과 사상(思想)을 과시하는 양질의 계랄 수 있다. 뜻이 맞는 문무관(文武官)끼리 나라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사생(死生)을 함께 한다는 사생동지계(死生同志契)며 一心契도 적지 않았다.
또한 계를 부었다가 절의(節義)를 지킨 분이나 명현(名賢)들의 사당을 순례하는 모현계(慕賢契)며 더불어 과거에 붙은 사람끼리 계를 부어 어렵게 된 동문을 돕는 동문계(同門契)며 또 더불어 명승을 유람하며 합동시첩(合同詩帖)을 남기는 풍류계(風流契) 등 되살리고 싶은 계가 비일비재하다. 부녀자들 사이에도 이삭을 주워 이웃을 돕는 이삭계, 미나리꽝을 공동으로 가꿔 그 이득으로 동지(冬至) 날 동네 할머니들 버선을 지어드리는 버선계, 계원의 딸이 시집가면 때때옷을 지어 부조하는 색동계 등 아름답기 그지없는 계바람이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이 아름답던 계풍(契風)에서 정신적인 요인이 증발하고 온통 영리(營利)와 利息을 노리는 경제적 요인과 유흥적 요인만 남아나더니 그나마도 사라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유산의 정신적 美風을 복고시켜 동질화(同質化)되어가는 세상에 강력한 이질적 존재가치를 찾아 누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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