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충실기

쌍충실기(雙忠實紀) 구본(舊本) 발문(跋文)

耽古樓主 2023. 3. 26.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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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실기(雙忠實紀) 구본(舊本) 발문(跋文)

雙忠實紀舊本 跋文



곽사중(郭思中) 발문(跋文)

소호, 소계 두 선생께서 용사의 변을 만나 종묘사직의 전복(顚覆)을 민망히 여기고 생령(生靈)들이 어육이 될 것을 염려하여 형은 백의로 창의하고 아우는 적수(赤手)로 일어나서 적을 막아 겪고 머리를 베어 중흥의 큰 공을 도와 이루었으니 그 인기(人紀)를 바로잡고 세교(世敎)를 권함이 어떠한가?

다만 병화의 나머지 문헌이 남은 것이 없어 그 가모(嘉謨), 웅략과 지행, 격언이 거의 인몰(湮沒)되어 전하지 아니하더니 다행히 국승과 야사에 있었다.
이에 소계공의 사손(祀孫) 정악(靖岳)씨가 한 두어 가지의 잡서에서 나온 것을 수집하여 유고의 약간을 합하여 한 부를 만들었다.

이 실록은 그의 사언(私言)이 아니고 실지에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다.

아! 두 분 선생께서 훈창지화(壎唱篪和)하고 덕에 힘쓰고 공에 힘써 그 광채를 백 세에 드리운 것이다.

의로써 말한다면 나라를 위하여 어려움을 이겨내어 사직을 부호(扶護)하였으니 그 효충(效忠)이 지극하였고, 지혜로 말한다면 혼조에서 용퇴(勇退)하여 화란을 함께 하지 않았으니 그 선견(先見)이 밝은 것이다.

또 시(詩)에 있어서는 애써 조식(彫飾)을 빌리지 않고 원기(元氣)가 혼연하였으니, ‘한 점의 고기로도 가히 온 솥을 알 수 있다.’라 할 것이다.

이것이 두 분 선생을 존숭하게 되는 까닭이니, 다른 날에 태사(太史)가 의열(義烈)을 찬할 때 이로써 보아 두 분 선생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이 책의 말미에 한마디 말을 쓰기를 부탁하기에 감히 분에 넘치면서도 사양하지 못하고 그 개요를 이와 같이 약술하는 바이다.
포산(苞山) 곽사중(郭思中)은 삼가 발문을 쓰다.

이중련(李重蓮) 발문(跋文)

고성은 영남의 바다 사이에 한 작은 고을이다.

그런데 최씨의 한 집안 안에 소호, 소계 두 분의 쌍충, 훈렬(勳烈)이 용사의 난 즈음에 병랑(炳烺)하였다.

혹은 백면(白面)으로 전쟁에 나가기도 하고 적수(赤手)로 국란에 달려갔으며, 의성(義聲)으로 부르는 곳에 지사(志士)가 향응하여 남구(南寇)가 유린하는 세력을 막아내어 창원, 진해, 고성, 사천 사이를 보장되게 하였으니 어찌 나라에 감격한 충분(忠憤)이 있을 뿐 자신의 몸을 잊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난 가을에 조정에 휴양(休養)을 빌어 이 고을에 제수되어 향인들이 사당을 세워 오도산 아래에서 제향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주치(州治)로부터 30리의 가까운 거리였다.

형 되기도 어렵고 아우 되기도 어려운데다가 지방이 인물 때문에 더 높아졌으니 고성을 진실로 작다고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후손 규찬(奎燦)씨가 처음으로 그의 가승(家乘)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니 그 평생토록 효우의 행덕과 충의의 사적을 완연히 소호, 소계 두 분 사이에 그 참모습을 보는 것 같고, 담티의 오전(鏖戰)과 제양(濟洋)의 화공이 더욱 사람이 팔을 끼고 길게 감탄하게 하고, 칼을 어루만지며 강개하여 마치 전고(戰鼓)가 산을 무너뜨리고 장풍(長風)이 바다를 뒤덮는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가군(家君)께서 많은 선비들의 요청으로 마침 원수(院首)가 되었으므로 의리로 한마디의 말을 유록(遺錄)의 말미에 붙이지 않을 수 없어 산앙(山仰)의 정성에 대신하는 바이다.
통훈대부, 전 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지제교(知製敎) 연안(延安) 이중연(李重蓮)이 삼가 발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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