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列傳

列傳권62.管晏列傳(관안열전)

耽古樓主 2023. 4. 17. 10:15

 

열전2-管晏列傳

管仲夷吾者,潁上人也
管仲 夷吾는 潁上 사람이다.

▶ 管仲夷吾 : 管夷吾. 이름은 夷吾이며, 齊公子 糾에게 벼슬하여 후에 桓公과 적대관계이었다.

환공의 신하 鮑叔이 추천하여 환공의 신하로서 재상이 된 후 齊나라를 춘추시대의 5覇 중 제일가는 강국으로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제환공이 管夷吾를 존대하여 중보(仲父)라고 호칭하여 관중이라 불리게 되었다.

▶ 潁上 : 潁水의 물가. 지금의 河南省 登封縣.

少時常與鮑叔牙游,鮑叔知其賢。
젊어서 鮑叔牙와 交遊하였으며, 포숙은 그가 현명함을 알아주었다.

▶ 鮑叔牙 : 春秋時代 濟나라의 政治家. 管鮑之交라 일컬어지는 친구 管仲을 濟桓公에게 추천하여 桓公의 정치를 도왔다.

管仲貧困,常欺鮑叔,鮑叔終善遇之,不以為言。
관중은 가난해서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그를 잘 대해주고 속인 일을 말하지 않았다.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管仲事公子糾。
그 후 포숙은 齊公子 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公子 糾를 섬기게 되었다.

 

▶ 已而 : 그 후. 뒤이어.

▶ 公子小白 : 공자 규의 동생. 후일 제환공이 된다.

▶ 桓公( ? ~ 기원전 643년)은 춘추시대의 제나라의 제16대 후작이며, 성은 姜, 휘는 小白, 시호는 桓公. 춘추시대의 패자이다. 포숙아의 활약에 힘입어 공자 규와의 公位계승 분쟁에서 승리하고 제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관중을 재상으로 삼고 제나라를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으며, 실권을 잃어버린 東周 왕실을 대신해 會盟을 거행했다.

▶ 公子糾 : 齊襄公의 동생. 공자 소백의 형.

及小白立為桓公,公子糾死,管仲囚焉。
소백이 桓公으로 즉위하면서 공자 규는 죽었고 관중은 옥에 갇히었다.

鮑叔遂進管仲。
포숙은 곧 관중을 천거하였다.

▶ 進 : 추천하다. 천거하다.

管仲既用,任政於齊.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에서 국정을 맡게 되었다.

齊桓公以霸,九合諸侯,一匡天下,管仲之謀也
齊桓公은 패자가 되고 아홉 번 제후들과 회맹하여, 혼란스러운 천하를 바로잡았으니, 관중의 지모 덕분이었다.

 

▶ 九合諸侯 : 九合은 ‘구합’으로 읽어 ‘아홉 번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하고, ‘규합’으로 읽어 ‘감독하여 회합하다’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아홉 번은 軍用 수레로 모인 것이 세 번이고 乘用 수레로 모인 것이 여섯 번이다.”라고 하였다.(論語 憲問)

合은 會盟으로 제후와 제후가 만나서 맹약을 맺는다는 뜻.

▶ 一匡天下 : 혼란스러운 천하를 안정시킴. 匡은 바로잡다는 뜻.

管仲曰:

「吾始困時,嘗與鮑叔賈,分財利多自與,鮑叔不以我為貪,知我貧也。

吾嘗為鮑叔謀事而更窮困,鮑叔不以我為愚,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鮑叔不以我為不肖,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鮑叔不以我怯,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召忽死之,吾幽囚受辱,鮑叔不以我為無恥,知我不羞小睗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知我者鮑子也。」

관중이 말하였다.

“내가 처음에 어려웠을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익을 나눌 때 내가 더 많이 가졌으나 포숙은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으니, 나의 가난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포숙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다가 그를 곤궁하게 한 적이 있으나, 포숙이 나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았으니 시운이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을 벼슬하여 세 번을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못났다고 하지 않았으니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전투하다가 세 번을 달아났으나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으니 나에게 老母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하여 소홀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는 유폐되고 붙잡혀 굴욕을 당하였으나, 포숙은 내가 부끄러운 줄 모른다고 여기지 않았으니, 내가 사소한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천하에 공명을 떨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 嘗 : 일찍이. 이전에. ~한 적이 있다

▶ 三見 : 세 번 당하다. 見은 ‘당하다’의 被動.

▶ 不肖 : 현명하지 않다. 못나다.

▶ 公子糾敗,召忽死之 : 제나라가 정치가 혼란하여 管仲과 召忽은 공자 糾를 모시고 魯나라로 망명하였고, 鮑叔은 공자 小白을 모시고 莒나라로 망명하였었다. 공자 규는 소홀의 이복동생 혹은 이복형이라고도 한다.

공자 규가 패하자 소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관중은 함거에 실려 제나라에 돌아가기를 청했다. 제후의 자리를 확고하게 다진 제환공은 군사를 동원하여 노나라에 있는 관중을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 不羞小睗 : 不羞는 부끄러워하지 않다. 小睗은 사소한 일. 小節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 睗(석): 빨리보다

鮑叔既進管仲,以身下之。
포숙은 관중을 천거한 후, 자신은 관중의 아랫자리에 있었다.

子孫世祿於齊,有封邑者十餘世,常為名大夫。

포숙의 자손은 대대로 제나라의 녹봉을 받고, 봉읍을 십여 대동안 소유하였으며, 항상 이름 있는 사대부 집안이었다.

 

▶ 世祿 : 대대로 이어서 받는 나라의 녹봉.

▶ 封邑 : 대부에게 봉하여 준 땅.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천하 사람들이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지 않고, 포숙이 사람을 알아봄을 칭찬하였다.

▶ 天下不多 : 세상 사람들이 ~을 칭찬하지 않다. 多는 칭찬하다. 아름답게 여기다.

管仲既任政相齊,以區區之齊在海濱,通貨積財,富國彊兵,與俗同好惡
관중이 齊相이 되어 政事를 맡고 나서,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는 이점을 활용하여, 재화를 유통하고 축적하여 부국강병을 꾀하고, 백성과 고락을 함께하였다.

▶ 區區 : 가지각색.

故其稱曰:

「倉廩實而知禮節,衣食足而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

四維不張,國乃滅亡。

下令如流水之原,令順民心。」

그래서 관중은 이렇게 말하였다.

“倉廩이 충실하면 백성이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하면 榮辱을 알고, 윗사람이 법도를 준수하면 육친의 관계가 도타와진다.

四維(禮義廉恥)가 伸張되지 아니하면, 나라가 곧 멸망하고 만다.

명령을 내림이 물의 근원에서 흘러내리듯 하여야, 민심이 따르게 할 수 있다.”

 

▶ 이 구절은 管子 牧民에 있는 말이다. <凡有地牧民者,務在四時,守在倉廩。國多財,則遠者來,地辟舉,則民留處;倉廩實,則知禮節;衣食足,則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四維張,則君令行。>

▶ 四維 : 네 가지 강령인 禮義廉恥를 말한다. “예란 절도를 넘지 않음이며, 의란 스스로 나아가 구하지 않음이며, 염이란 악행을 은폐하지 않음이며, 치란 그릇된 것을 따르지 않음이다.(一曰禮、二曰義、三曰廉、四曰恥。禮不踰節,義不自進。廉不蔽惡,恥不從枉.) <管子 牧民篇>

※ 破廉恥(파렴치: 염치를 모르고 뻔뻔스러움)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 六親 : 父母兄弟妻子

故論卑而易行。
그래서 정책이 아랫사람들의 사정에 부합하여 쉽게 이행되었다.

▶ 論은 政令. 卑는 아랫사람.

俗之所欲,因而予之;俗之所否,因而去之。
백성이 바라는 것은 인하여 베풀어주고, 백성이 바라지 않는 것은 인하여 제거하여 주었다.

其為政也,善因禍而為福,轉敗而為功。

그는 정치를 함에, 화가 될 일은 복이 되게 하고, 실패할 일은 성공으로 이끌기를 잘하였다.

 

貴輕重,慎權衡。

일의 경중을 중히 여기고, 득실을 저울질하는 데 신중하였다.

 

▶ 權衡 : 저울추와 저울대. 사물의 가볍고 무거움을 고르게 함.

桓公實怒少姬,南襲蔡,管仲因而伐楚,責包茅不入貢於周室。
환공이 실제로 少姬의 일로 성을 내어 남쪽 蔡나라를 치자, 관중은 인하여 楚나라를 치면서 주 왕실에 包茅를 조공하지 않는다고 꾸짖었다.

▶ 少姬 : 제환공의 부인이며 채나라 군주의 여동생으로 환공과 물놀이를 나갔다가, 장난으로 배를 흔들자 제환공이 이에 노하여, 소희를 채나라로 쫓아내자 蔡候가 소희를 개가시켰다. 제환공이 이에 앙심을 품고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후는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左傳 僖公三年>

▶ 包茅不入貢 : 관중은 그 일로 인해 초나라를 정벌하여 주 왕실에 包茅를 바치지 않은 것을 꾸짖었다. 包茅는 초나라의 특산물인 푸른 띠 풀을 말하며 제사용 술을 거를 때 사용한다. <左傳·僖公四年>

桓公實北征山戎,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
환공은 실제로 북쪽으로 山戎을 치자, 관중은 인하여 연나라에게 召公의 어진 정치를 실행하도록 했다.

▶ 山戎 : 北狄. 서융이라고 하며 주로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이민족이다.

於柯之會,桓公欲背曹沫之約,管仲因而信之,諸侯由是歸齊。
또 柯 땅의 회맹 때 제환공이 曹沫과 한 약조를 어기려 하자, 관중은 그 약조를 지켜 미덥게 하였으니, 제후들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제나라로 歸附하였다.

▶ 曹沫 : 중국 魯의 莊公을 섬긴 장군이다. 노와 인접해 있던 강국 齊는 번번이 노를 침략했고, 조말은 노의 장군으로 이를 막았으나 세 번이나 패하고 노는 영토를 잃게 되었다. 불리해진 노는 遂邑을 바치는 조건으로 제와 화의를 맺게 되었는데, 이를 승낙한 桓公이 맹약하는 자리에서 장공이 바치는 수읍을 헌상한다는 내용이 담긴 맹약서를 쓰는 도중에, 조말이 난입해서 비수로 환공을 위협하며 자신의 패전을 보상하기 위해 앞서 제가 세 번의 전투에서 빼앗아간 노의 땅을 돌려줄 것을 협박하였고, 환공은 마지못해 서약서를 썼다. 환공은 협박으로 맺어진 계약은 무효하다며 臨淄로 돌아온 뒤 수읍 등을 다시 빼앗기 위해 군을 일으켰지만, 재상 管仲이 「覇者의 신망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이 협박으로 맺어진 약속이라 해도 지켜야 한다.」 라고 환공을 설득했고 환공은 이에 노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齊太公世家>

故曰:
「知與之為取,政之寶也。」
관자는 이렇게 말했다.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보배이다.”

▶ 知與之為取 政之寶也 : 관자 목민편에 실려 있는 말이다. (故知“予之為取者,政之寶也.”)

管仲富擬於公室,有三歸、反坫,齊人不以為侈
관중은 공실만큼이나 부유하여 삼귀의 누대와 反坫을 다 갖추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사치스럽다고 여기지 않았다.

管仲卒,齊國遵其政,常彊於諸侯。

관중이 죽자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준수하여 항상 다른 제후국보다 강하게 되었다.

 

▶ 三歸 : 성이 각기 다른 세 여자를 세 집에서 아내로 거느리는 것을 말한다.

▶ 反坫 : 제후들이 會盟할 때 술을 바치는 의식을 행하고 나서 빈 술잔을 엎어두는 받침대로 제후 이외의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後百餘年而有晏子焉。
그 후 백여 년 뒤에 晏子가 태어났다.

 

晏平仲嬰者, 萊之夷維人也, 事齊靈公莊公景公, 以節儉力行重於齊.

晏嬰의 자는 평중으로 萊나라 夷維 지역 사람으로, 제나라 영공·장공·경공을 섬기며 절약과 검소함을 힘써 행하여 백성들이 귀중하게 여겼다.

 

旣相齊, 食不重肉, 妾不衣帛.

齊相이 되어서는 식사에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놓지 못하게 하고, 처첩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다.

 

其在朝, 君語及之, 卽危言, 語不及之, 卽危行.

그가 조정에 있을 때 임금이 물으면 바르고 신중하게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조심해서 행동하였다.

 

國有道, 卽順命, 無道, 卽衡命, 以此三世顯名於諸侯.

나라에 도가 있으면 임금의 명령에 순응하고, 도가 없으면 그 명령이 옮고 그름을 가렸다. 이 때문에 三世(영공, 장공, 경공)에 걸쳐 제후들 사이에 그 명성을 떨쳤다.

 

越石父賢, 在縲紲中.

越石父라는 賢者가 사건에 연루되어 죄인의 몸이 되었다.

 

▶縲紲:监狱;囚禁

晏子出, 遭之塗, 解左驂贖之, 載歸.
안자가 외출했다가 길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다. 안자는 3두마차의 왼쪽 말을 풀어 보석금으로 내주고 월석보를 마차에 태워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弗謝, 入閨, 久之, 越石父請絶.

안자가 인사말도 없이 내실로 들어간 지 오래되니, 월석보는 절교하자고 청하였다.

 

晏子戄然, 攝衣冠謝曰,

「嬰雖不仁, 免子於戹, 何子求絶之速也.」

안자가 크게 놀라 의관을 차리고 월석보에게 사과하였다.

“제가 비록 어질지는 못해도 그대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이토록 빨리 절교하려 하십니까?”

 

石父曰 :

「 不然.

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

方吾在縲紲中, 彼不知我也.

夫子旣已感寤而贖我, 是知己.

知己而無禮, 固不如在縲紲之中.」

월석보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드러낸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죄수의 신분이었을 때 그들은 나를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대부께서 贖錢을 내고 저를 풀어주었으니, 이는 저를 알아준 것입니다.

저를 알아주면서 예로써 대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監獄에 있음이 낫겠습니다.”

 

晏子於是延入爲上客.

안자는 이에 월석보를 청하여 안으로 들이고 上客으로 모셨다.

 

▶延: (선생·의사 등을) 부르다. 청하다. 초빙하다.

晏子爲齊相出, 其御之妻從門閒而闚其夫.
한번은 안자가 齊相으로서 외출하려는데, 말을 모는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을 엿보았다.

 

其夫爲相御, 擁大蓋, 策駟馬, 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은 재상을 위해 말을 모는데, 큰 차양을 받쳐 들고 사두마차의 말에 채찍질하며, 의기양양하게 매우 만족해했다.

 

旣而歸, 其妻請去, 夫問其故.

일을 마치고 남편이 돌아오자 아내가 이혼하여 떠나기를 청하였고 남편이 그 까닭을 물었다.

 

妻曰 :

「 晏子長不滿六尺, 身相齊國, 名顯諸侯.

今者妾觀其出, 志念深矣, 常有以自下者.

今子長八尺, 乃爲人僕御. 然子之意自以爲足.

妾是以求去也. 」

아내가 말하였다.

“안자는 키가 6척도 안 되는데, 그 몸은 齊相으로서 제후들에게 이름을 떨치고 있습니다.

이번에 첩이 그가 외출하는 것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었고 항상 자신을 낮추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신장이 8척이나 되건만 남의 마부 노릇을 하면서도, 당신의 마음에 그것을 만족해합니다.

저는 이러한 까닭에 헤어지자고 요구합니다.”

 

其後夫自抑損, 晏子怪而問之.

이 일이 있은 후 사내는 스스로 마음을 누르고 겸손해지니, 안자가 괴이하게 여기고 물어보았다.

 

御以實對, 晏子薦以爲大夫.

마부가 이실직고하자, 안자는 그 마부를 추천하여 대부로 삼았다.

太史公曰 :

「 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及晏子春秋, 詳哉其言之也.

旣見其著書, 欲觀其行事, 故次其傳.

至其書, 世多有之, 是以不論, 論其軼事.

管仲世所謂賢臣, 然孔子小之.

豈以爲, 周道衰微, 桓公旣賢, 而不勉之至王, 乃稱霸哉.

語曰 :

「將順其美, 匡救其惡, 故上下能相親也.」

豈管仲之謂乎 ?

方晏子伏莊公尸哭之, 成禮然後去, 豈所謂見義不爲無勇者邪

至其諫說, 犯君之顔, 此所謂進思盡忠, 退思補過者哉.

假令晏子而在, 余雖爲之執鞭, 所忻慕焉.

태사공은 말한다.

나는 관중이 쓴 《관자》의 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의 篇과 《晏子春秋》를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이 상세하였다.

그들의 著書를 읽고 나서, 그들의 행적을 관찰하고자 傳記를 정리했다.

《관자》나 《안자춘추》에 대해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그곳에서 빠져 있는 일만을 논하였다.

관중을 세상 사람들이 賢臣이라고 일컫지만, 공자는 그를 소인으로 여겼다.

어찌해서 그렇게 생각했을까?

周나라의 도가 쇠미해진 상태에서, 제환공은 재덕이 출중하면서도 지극한 王道를 힘쓰지 않고, 단지 霸者로만 칭하여지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일렀다.

“군주의 장점은 북돋우고 결점은 바르게 고쳐줌으로써 군주와 신하가 서로 친해질 수 있다.”

그것이 어찌 관중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齊莊公이 崔杼의 처와 사통하여 최저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안자는 최저의 집에 가서 장공의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군주의 죽음에 예를 다한 후 떠났는데, 이것이 어찌 '정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않은 용기 없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諫言할 때는 임금의 안색에 구애받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조정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 할 것을 생각하고 물러나서는 허물을 고칠 것을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만일 안자가 오늘날 살아있다면, 나는 비록 그를 위해 마부가 되어도 좋으니, 그를 흠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