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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3夫人과 是處青山可埋骨

耽古樓主 2025. 4. 6. 03:04

소동파의 3夫人과 是處青山可埋骨

 

소동파는 일평생 3명의 여인과 삶을 같이 했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성이 王氏이고 하나같이 현모양처였다. 훌륭한 배필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년해로를 못하고 세여인 모두 일찍 떠나보내고 비통해했다.

 

첫째 부인 王弗은 3살 차이로, 그의 스승이었던 鄕貢進士 王方의 딸이었다.

왕방이 가르치던 제자를 모아놓고, 집 근처 연못의 이름을 짓도록 하여 最秀作 제자에게 딸을 배필로 맺어주겠다고 했다. 소동파가 손뼉을 치면 고기들이 뛰노는 걸 보고 喚魚池라고 지었다. 마침 왕불도 작명행사 소식을 듣고 이름을 지어 보내니 우연의 일치로 이를 본 사람들이 천생배필이라고 했다.

 

왕불의 文才는 소동파와 떨어져서 시댁에 살던 시기에 있었던 일화가 잘 말해준다. 소동파의 여동생 즉 시누이가 올케 왕불을 골리려고 對聯詩句를 짓자고 했다. 그러면서 “嫂嫂看書心思漢 / 올케는 책을 보며 한나라를 생각하네.”라고 했다. 표의문자인 한문은 뜻이 여럿이다 보니 ‘漢’은 한나라는 뜻도 있지만 사내라는 뜻도 있어서 낭군이 없어 딴 사내를 생각한다고 놀린 것이다. 그러면 밖으로 나가버리자 왕불도 지지 않을 새라 이렇게 읊었다. “妹妹迫日手遮陰 / 시누이는 해가 겁나 손으로 막아 그늘지게 하네.” 사실 ‘日’은 태양을 뜻하지만 중국인들은 이 글자를 욕설(성교)로 사용한다. 해설하면, ‘시누이는 성교가 무서워 손으로 陰部를 가리네.’ 정도로 의역할 수 있겠다.

 

왕불도 소동파 못지않게 음식을 잘 만들었는데 특히 食醢를 잘 만들어서 그가 즐겨 먹었다고 한다.

소동파가 요즘의 필화사건 즉 文字獄인 烏臺詩案 사건으로 옥에 갇히면서 아들에게 형세가 불리해서 죽을 상황이면 마지막 사식으로 食醢를 넣으라고 했다. 식해는 아내 왕발을 그리워함이다. 아들이 돈을 구하기 위해 잠시 이웃 친척에게 옥바라지를 맡기면서 그런 사실을 말하지 않아 식해를 사식으로 넣었다. 옥에서 죽을 상황이라고 느낀 소동파가 絶命詩 2수를 지어 동생 蘇轍에게 보냈다. 그중 한편이 다음과 같다.

 

聖主如天萬物春 小臣愚暗自亡身 / 성군은 하늘같아 만물을 소생시키는데, 소신은 어리석고 어두워 스스로 망치네.

百年未滿先償債 十口無无更累人 / 백 살도 못살고 목숨 빚을 갚아야하네, 열 식구 돌아갈 곳 없어 남의 누를 더하네.

是處青山可埋骨 他年夜雨獨傷神 / 어디든 청산에 내 뼈 묻으면 되지만, 어느 해 밤비 내리면 그대 홀로 상심하리니.

與君世世爲兄弟 再結來生未了因 / 세를 이어 너와 함께 형제 되어, 못다 한 인연 다음 생에 다시 맺어 보자구나.

 

현모양처였던 왕불이 결혼 11년 만에 죽자 소동파는 고향의 어머니 무덤 곁에 묻고 묘역에 3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해 왕불에 대한 사랑을 표했다. 죽은 그녀를 꿈에서 보고 <江城子·記夢>을 지었다.

 

두 번째 부인은 첫 부인 왕발의 사촌동생 王潤之이다. 21살의 나이에 10년 이상 차이 나는 사촌 형부를 남편으로 맞아 25년을 내조하며 살다가 46살에 세상을 떴다. 이때 남긴 시가 <蝶戀花>이다.

 

셋째 여인은 정식 부인이 아닌 첩으로 王朝云이다. 그녀는 가난으로 어릴 때부터 노래를 부르는 기녀로 생활했지만 총명하고 학문을 알았다. 소동파가 황주통판으로 쫓겨나 있을 때 만나서 집으로 데려왔다. 마침 전에 乞人 여아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왕윤지의 친동생으로 밝혀지자 왕윤지가 은혜도 갚을 겸 26세 연상의 소동파를 성심껏 모셨다. 투옥과 유배 생활 등으로 힘들 때 모든 첩들이 떠나갔지만 왕윤지 만은 끝까지 곁에서 모셨다. 그렇지만 그녀도 소동파가 예순이 되던 해에 세상을 등졌다. 그녀를 위해 <西江月·梅>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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