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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의식구조-26.儉約性向(검약성향)

구글서생 2023. 6. 11. 05:09

선비의 의식구조-26.儉約性向(검약성향)

 

■ 냉장고와 짚신

 

6·25사변 때 한국에 종군했던 영국 군인 두 명과 음악 동호 클럽 멤버로서 교제한 일이 있었다.

 

그때, 이 군인들이 입고 나오는 외출 군복의 무릎 부분이며 팔꿈치 부분 등 잘 해어지는 부분마다 기워져 있는 것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느낀 일이 있다.

 

손수 기워 입느냐고 물었더니 부대 안에 옷을 입는 부서가 따로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몰락과정에 있다고는 하지만 「대영제국(大英帝國)」의 군인인데 군비가 모자라 군복을 기워 입게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없어서 기워 입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서도 기워 입게 하는 어떤 정신적 플러스 알파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독 여행 때 그곳에 사는 한 친구 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백화점에 가서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아들놈 란도셀을 사려 했을 때 일이다.

이것저것 보고 나서 기왕이면 좋은 것을 사주려고 피혁제의 좋은 것을 선택, 값을 물었다. 한데 연마한 그 여점원은 「값만 비싸고 실용적이지 못하니 이것으로 쓰시오」하고 값싸 보이는 비닐제를 권하는 것이었다.

『 란도셀이란 기껏해야 2년만 쓰면 고작인데 그렇게 비싸게 주고 살 필요가 없다.』

면서 2년이면 이 비닐제로도 충분하다면서 끝내 우겨대더라는 것이었다.

 

우리 한국 사람 같으면 마진이 높은 값비싼 것을 팔려고 노력할 것이다. 한데 장사하는 사람이 자신의 이익보다 물건 사가는 사람의 「근검」에까지 배려하는 이 정신적 전통은 서독 사회에서 보편적인 것이다.

 

서독에 유학했던 한 친구는 언젠가 독일 학생들과 학교 도서관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건물에서 멀리 떨어져 원회(遠廻)를 한 일이 있었다 한다.

그런데 한 독일 친구가 보고

『구두 바닥이 더 닳는 일을 왜 하느냐, 』

고 충고하더라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이런 말을 들으면 어디까지나 장난 말로 간주하겠지만 독일 사람들의 심성(心性)에는 이 같은 소비절약을 둔 정신적 유전자가 체질화돼 있는 것이다.

 

한국 주부들이 계란 요리를 할 때 계란을 깨어 속을 쏟고는 껍데기는 버려 버린다. 하지만 독일 주부들은 계란을 깨어 속을 쏟은 다음 작은 스푼으로 껍데기 속에 묻은 진득진득한 흰자위를 긁어낸 다음에야 버린다.

 

서독 사람들이 우리 한국 사람보다 가난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안다. 소비절약에 대한 정신적 유전자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국이나 서독 사람에 비해 한결 잘 살지 못하면서도 무릎이나 팔꿈치를 기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또 값비싼 것은 사지 말도록 권하는 물건 파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을 약간 원회한다 하여 신바닥이 더 닳는다 하는 의식 속에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계란 껍데기 속에 묻은 흰자위를 실용화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는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 한국인의 정신적 전통 속에는 그같은 근검·절약·절용(節用)에 대한 유전질이 없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 전통 속에서 서구(西歐)의 그것보다 더 강력한 절용·근검에 관한 유전자가 면면히 흘러왔던 것이다.

 

나는 개화(開化) 또는 근대화로 불리우는 서구 문물에 전혀 때묻지 않은 그런 전통적 자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골짝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언젠가 할머니를 따라 밭에 갔다 오던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길가에 버려진 헌 짚신짝 하나를 줏어 들었다. 어린 마음이지만 그런 해어진 짚신짝 따위를 주워드는 할머니가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할머니와 쥐고 걷던 나는 손을 살며시 잡아 빼어 짚신짝을 들고 걷는 할머니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었던 생각이 난다.

 

헌 짚신짝이 아쉬울 만큼 우리 집이 가난했던 것이 아니었다. 또 그 짚신짝이 꼭 필요한 것만도 아니었다. 한데 할머니는 그것을 줏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그 짚신 올을 낱낱이 풀어 부드럽게 손으로 비볐다. 그 체온이 스민 부드러운 검불을 개집에 깔아 주는 것이었다.

비단 우리 할머니뿐 아니라 한국인은 그것이 전혀 쓸모없는 지푸라기 하나 물 한 됫박이라도 버린다는 법은 없다는 전통적 유전질을 우리 할머니가 대행했을 뿐인 것이다. 할머니는 손자를 위해 겉보리 한 되 주고 눈깔사탕 여 남은 개를 바꿔 선반 위에 얹어 놓는다.

내가 보채면 그 눈깔사탕 하나를 통째로 주는 법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빠지고 몇 개 없는 그 이빨로 눈깔사탕을 반으로 쪼개느라 애쓰며 오만상을 찌푸린다. 그 찌푸린 할머니의 오만상을 보고 나도 따라서 오만상을 찌푸렸던 기억이 선하다.

그렇게 힘들여 쪼갠 반쪽만 주고 반쪽을 다시 선반 위에 얹어 놓곤 했던 것이다.

 

또 할머니는 색연필을 사줄 때는 내가 쓰던 연필 길이가 새끼손가락 길이보다 짧아진 것을 재어보고 확인한 다음에야 사주었던 기억도 선하다.

 

반드시 물자가 부족해서, 또 성격이 인색해서 할머니가 눈깔사탕을 쪼개고 연필 길이를 잰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는 아낀다는, 곧 절용에 대한 한국의 전통적 가치의 평범한 발로에 불과한 것이다.

 

절용에 대한 이 전통적 가치를 체험했고 그 유전자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뼈가 굵은 나로서는 오늘날의 버리는 문화, 낭비의 문화, 사치 상향의 문화는 이질적이고 충격적일 수밖에 없다.

 

일전 한 친구 집에 들렀을 때 고장난 고물, 냉장고를 어떻게 버리느냐 하는 것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느끼는 것이 컸다.

헌 짚신짝을 줍는 것과 헌 냉장고를 버리는 이 아찔한 공백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왜 이만한 공백이 벌어졌는가. 절용에 대한 정신적 유전자가 왜, 언제, 어떻게 해서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여러 가지 복합 이유가 있는 줄 아나 그 중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 커다란 맹점 (盲點)이 있었다는 것도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첫째, 근대화를 구미화로 잘못 받아들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전통적 요소가 한국적인 동일성(아이덴티티)은 모두가 열등한 것이기에 무작정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버려왔기에 절용에 관한 그토록 훌륭한 자질마저도 후진적인 요인으로 버림받았던 것이다.

 

둘째, 구미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그 대표적인 물질주의만을 도입했고 그 이면에 깊이 도사린 정신을 도입하지 않았던 데서 구미의 절용에 관한 정신적 전통 같은 플러스적 가치는 도입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질적 악화(惡貨)만 들여오고 정신적 양화(良貨)는 들여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곧 열매만 따오고 뿌리는 캐어 오지 못한 것이다. 절용에 관한 정신적 토양은 황무지가 된 채 우리에게 실존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정신적 토양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느냐에 있다고 본다.

 

□ 나의 열 손가락으로

 

「일사유사(逸事遺土)」란 문헌에 한국인의 재물관을 엿볼 수 있는 두 개의 기사가 적혀 있다. 그것을 이에 옮겨본다.

 

김학성이란 서울 사람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서 호구하는 한편 두 아들을 선생에게 보내서 공부를 하게 했다.

비오는 어느 날 처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들렸다. 메아리진 듯 약간의 울림이 있곤 해서 이상하다고 여기고 그 처마 밑을 파봤더니 큰 가마솥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 그 가운데에 은(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옛 우리나라에는 외침에 의한 난리가 있었고 재물있는 집에서는 그것을 은으로 바꿔 집안의 깊숙한 땅속에 묻어두고 피난하는 데 버릇이 들어 있었다. 대개 식구도 모르게 묻어 두었기에 묻는 당사자가 난리통에 죽거나 적에게 납치되어 가 버리면 그 땅에 묻은 은은 영원히 묻혀 있게 마련이며,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발굴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옛부터 피난지로 유명한 강화(江華)에는 피난간 서울의 돈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금, 은 패물을 산야에 묻어두고 몰살당한 전례가 많았기에 이것을 우연히 발굴해서 일확천금한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을 두고 빗대어 말할 때 「강화섬에 가서 공산(空山)이나 뒤져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던 것이었다.

 

김학성의 어머니가 우연히 발견한 이 보물 솥도 그 같은 연고로 이해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이 은을 본 어머니는 빨리 덮어서 제자리에 묻어 버렸다. 물론 이의 소재를 아는 사람은 오로지 어머니 혼자뿐이었다.

그 후 어머니는 그 집을 팔고 전전하여 조그만한 오막살이에 정착하였다.

어느 날 남편의 제삿날에 음식을 차려놓고 그의 오빠를 청했다. 두 아들을 옆에 앉혀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돌아간 가장이 이 고아들을 미망인에게 맡기고 항상 이것들을 옳게 성취시키지 못하고 또 조상의 혼령을 굶으시게 할까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내가 늙어 백발이 되고 두 아들들이 성장하여 능히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지하에 가서 할 말이 있게 됐다.』

이어 어머니는 우연히 발견한 은을 도로 덮어두고 취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했다.

깜짝 놀라 왜 그 같은 횡재를 싫다 하고 버렸는가고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이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이 대꾸하는 것이었다.

『재(財)는 곧 재(災)인데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밖의 재앙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사람이 나서 마땅히 궁핍한 것이 있는 줄을 알아야 하는데, 두 아들이 아직 어릴 때에 주식의 안일에 습성이 들면 공부에 힘쓰지 아니할 것이고, 만약 어렵게 자라지 않으면 어찌 재물을 버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집을 옮겨서 스스로 단념하였다.

집에 저축된 약간의 재물은 모두 나의 열 손가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니 창졸간에 눈앞에 닥친 재물과는 비할 것이 아니다. 』

 

또한 이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영의정 김육의 아들이요 인조, 효종, 현종조에 육조판서를 고루 지낸 김좌명 집에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최술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과부인 그의 어머니는 현명하여 비록 천한 일을 할지언정 올바른 도리로써 자식을 가르쳤던 것이다.

김좌명이 호조판서 때에 이 최술의 충직을 갸륵하게 여기어 서리(書吏)로 임명, 요긴한 직책을 맡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바로 상전인 판서를 찾아가

「술이를 그런 직책에 맡길 수 없으니 체직을 시켜 주소서」

하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김좌명이 그 연유를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대꾸했던 것이다.

『제가 혼자되고 나서 가난하여 술이만 믿고 살아오면서 보리밥도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하였었는데 지금은 술이가 대감께 잘 보여 급료를 받게 되니, 이로써 저희 모자가 밥을 먹게 되었을 뿐 아니라 술이 대감 문하에서 일보는 것을 믿고 그 처가에서 사위를 삼았던 것입니다.

술이 제 처가에 기거하면서 냉이국으로 좌반(佐飯)을 하니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며칠 동안에 사치하는 마음이 이와 같으니, 재물을 맡은 직무에 오래 있으면 그 마음이 날로 달로 더하여져서 마침내 죄를 범하고야 말겠으니 외동 자식이 형벌 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읍니다.

대감께서 만약 술이를 안 버리면 몇 말의 쌀만 내려주어 굶어 죽지 않을 자리에 옮겨 주시면 다행이겠읍니다. 』

이 어머니의 지성에 크게 감명한 김좌명은 술이 어머니의 뜻을 받아들여 재물을 좌우하지 않는 청직에 옮겨주고 다만 달마다 쌀과 베를 따로 넉넉히 주며 말하기를

「옛날 조철의 어머니인들 어찌 이에서 더할 것이냐」

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한다.

 

이 두 가지의 주인공들은 다 같이 가난하고 또 선비나 양반이 아닌 서민이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천민의 어머니들이란 점에서 공통되고 있다.

그래서 이 사실(史實)은 곧 양반이나 선비 사회만이 이 같은 재물을 기피하는 재물관이 지배했던 것이 아니라 여느 서민이나 천민에게까지 침투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이 두 어머니들의 재물관은 곧 한국인의 재물관을 대변한다 할 수 있으며 왜 재물을 기피하느냐의 이유도 이 두 어머니들이 갈파하고 있다고 본다.

 

첫째, 재(財)는 곧 재(災)라는 관념이다. 우리 한국인은, 분수에 맞는 재에 지족(知足)하질 않고 여분의 재(財)를 축적하면 재(災)가 따른다고 여겼다. 그 재(災)란 재(財)에 따라 붙게 마련인 불행의 요소다. 비단 도둑이 넘나본다는 그런 일차원적인 재앙뿐만 아니라 재가 형성됨으로써 비례해서 늘어가는 과욕(過欲)이 형성시키는 재(災)다. 마을 인심이 이탈되고 가문 인심이 이탈될 뿐만 아니라 부모 형제의 정의까지도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이 재(財)에 대한 욕심인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뿐만아니라 재욕(財欲)에 빠지면 부정이나 남못할 일을 저질러야 하는 함정에 빠지게 돼 있다. 곧 일신을 망치는 일과 직결된다.

또한 명예와 인덕을 크게 소중히 여겼던 시절에 이같은 과분한 재(財)는 곧 그것을 손상시키는 가장 쉬운 도구이기도 했다.

조현명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상처를 했는데 각 영문(營門)과 외방(外方)에서 부의를 보내온 것이 꽤 많았다. 장례를 마치고 나자 조정승의 아들들이 저희들끼리 뜻을 같이하고 정승에게 다음과 같이 여쭌 것이었다.

『부의로 들어온 재물로 돈을 만들어 토지를 사시면 어떻겠읍니까?』

이 말을 듣고 매우 언짢아하던 조정승은 술을 가져오게 하여 한자리에서 둬 말이나 마시고 얼근해지자 아들들을 모두 불러놓고,

『못난 것들아, 너희들의 부의로 들어온 재물을 가지고 땅을 사려고 하니 부모의 상(喪)을 이익으로 아는 소행이 아니냐. 내가 정승이 되었는데도 땅을 사지 않으면 굶어 죽을 걱정이라도 있단 말이냐. 』

하고 아들들을 매우 호되게 꾸짖고 매질을 한 다음 통곡했던 것이다.

『내가 죽고 나면 아이들이 나를 제사지낼 수도 없겠구나』

고 자탄하며 그 부의로 들어온 재물을 모두 궁한 일가와 가난한 친구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곧 재물을 탐내는 소행으로 미뤄 죽은 후 제사마저도 지내지 않을 악인이 될 것을 선견(先見)했던 것이다.

이처럼 재(財)는 재(災)로 연결되는 요소로 우리 선조들은 확고하게 인식하고 살았기에 아무리 가난해도 재물을 기피하므로써 인덕과 인격을 구제하려 들었던 것이다.

 

둘째, 사람이 나서 마땅히 궁핍한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그런 궁핍에의 가치투사(價値投射)를 들 수 있다.

인간 발전의 동기, 곧 모티베이숀 포착의 계기는 궁핍에 있다는 진리 때문에 항상 재물의 충족을 기피하였던 것이다. 주식(住食)이 충족되면 모티베이숀이 없어지고 그것이 없으면 공부나 인격형성에 게을러 저 폐인이 되고 만다. 부잣집 자식이 대성하지 못한다는 상식은 이 궁핍이 없거나 덜함으로써 발전 동기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재물을 둔 궁핍에서 형성되는 발전에의 지기(志氣)는 반드시 궁핍한 재물을 얻기 위한 노력에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인격의 전반적인 발전에 투사된다고 하였고, 따라서 옛날 법도 있는 집안에서는 아무리 재물이 유족한 집안이라도 자제들만은 항상 궁핍하게 길렀던 것이다.

고려의 유명한 장상(將相) 최영 장군도 그런 교육목적이 내포된 궁핍 속에서 터득한 동기 때문에 훌륭하게 된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의 아버지는 항상

「금을 보기를 돌과 같이하라」

고 타일렀고 몇 천 글을 가르치는 것보다 궁핍의 터득처럼 좋은 가르침이 없다는 신조로 최영을 가르쳤던 것이다.

최영 장군은 이 견금여석(見金如石)의 가르침을 큰 띠에 써서 종신토록 명심하였으며, 그가 대성하여 국정(國政)을 잡아 위엄이 중외(中外)에 떨친 후에도 털끝만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고 생활은 겨우 주식(住食)에 족할 뿐이었다.

 

세째, 재(財)에 따른 무상감(無常感)에서 재(財)를 기피하였다. 남의 집살이를 하면서 보리밥으로 근근히 끼니를 이었을 때는 푸성귀 소찬도 그렇게 맛이 있었는데 부잣집 처가에 잠시 기거한 후로는 냉이국과 반찬도 맛이 없게 되었던 것이다.

곧 사람이 맛본다는 행복은 계급의 상하나 부의 다과에 아랑곳없이 평등하다는 진리에 한국인은 현명하였다. 부(富)가 주는 물질적 행복은 따지고 보면 정신적으로 행복한 것이 못되며 일단 그 물질적 행복을 누리게 되면 그 이상의 물질적 행복에로의 상향작용(上向作用)이 작동하여 보다 많은 부를 필요로 하게 된다. 상향된 행복이나 아예 상향을 포기한 상태에서의 행복의 질은 같은데 상향행복(上向幸福)을 위해서는 막대한 부의 소비를 필요로 한다.

이 부를 얻기 위해 실덕(失德)하고 범죄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결국 재물은 기피 해야 하는 악의 본질일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우리 조상들의 재물관은 곧 물질과 정신의 상관관계에서 정신을 우위에 두어 왔던 기본적 차이에서 재물로부터 인간과 인격을 구제하는 방향으로 슬기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잣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선비는 인격적 차원에서 청빈해야 하고 목민(牧民)하는 차원에서 청백해야 했다. 아울러 이 두 가지는 선비의 골격이요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그의 「목민심서」에서 「청렴은 수령의 본무요 모든 선의 근원이며 덕의 바탕이니 청렴하지 않고서 능히 수령일 수 없다」고 관리의 기본조건으로 이 청렴을 내세우고 있다.

상산록(象山)에 보면 관리의 청렴을 가늠하는 한계를 3등급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1등급은 나라에서 주는 봉록 이외는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먹다 남은 것이 있어도 가지고 돌아가지 않는 자요,

2등급은 봉록 이외에 명분이 바른 것은 먹되 부정한 것은 먹지 않으며 먹다 남은 것이 있으면 집으로 보내는 자요,

3등급은 이미 선례가 있는 것은 비록 부정이라도 먹되 아직 선례가 서 있지 않는 것은 제가 먼저 시작하지 않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청렴의 구분보다 옛 선비들의 청백정신이 진하게 들어간 사례별로 유형을 나누어 선비의 이 기본조건을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선비는 백성에게 해독이 가거나 백성에게 미세하게나마 어떤 영향을 주는 일이면 이를 취하지 않고 삼가하는 그런 청백 류형이다.

 

기건(奇虔)이 연지(延支)에 부사로 있을 때 그 고을의 명물인 붕어를 보내 달라는 공사(公私) 간의 청탁을 자주 받았다. 이 붕어 청탁 때문에 백성이 무척 괴롭힘을 당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그의 전임 부사인 김모가 붕어먹기를 무척 좋아했기로 백성들이 그를 조롱하여 객사의 벽에 다음과 같은 은닉벽서가 붙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부사 6년 동안 무슨 일을 하였는고, 온 못의 붕어만 다 먹어 치웠지』

기건은 이를 알고 그가 부사로 있는 동안은 청탁은 커녕 붕어를 단 한번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제주목사로 나갔을 때도 살펴보았더니 제주 명물인 전복이 마치 연안의 붕어처럼 민폐를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역시 그가 제주에 있는 동안은 한 점의 전복도 먹지 않았던 것이다. 〈筆苑雜記〉

 

중종때 정붕이 청송(靑松) 부사로 나아갔을 때 당시 영의정이던 성희안(成希顔)이, 젊었을 때부터 그와 절친한 사이였기로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문안하고 곁들여 잣과 벌꿀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정 붕이 답하기를,

『잣나무는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는데 부사된 자가 어떻게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성 희안이 이 전갈을 받고 바로 정붕에게 사과하는 편지를 써 보냈던 것이다. 〈新堂集〉

 

조오(趙悟)는 청렴하고 절조가 비할 데가 없었다. 집이 지극히 가난하여 예조낭관(禮曹郞官)이 되었을 때 한번은 병이 있어 방위(方位)를 피하여 남의 집을 빌어 살았는데 시량(柴糧)이 부족하여 조석을 잇지 못하였다. 동료가 백미 서 말을 가지고 가서 문병하니 받지 않았다. 뒤에 공석에서 이 일을 자랑하였더니 사람들 중에는 혹 기롱하는 이도 있었다. 그가 합천군수로 있을 때에 그 고을에 은어가 나는데 여름철에 비록 썩는 지경에 이르러도 처자가 그것을 맛보지 못하였다 한다. 아들, 사위, 종들이 왕래할 때에는 다 자기 먹을 양식을 가지고 다니게 하였다. 〈界苑雜記〉

 

金壽彭(김수팽, ?~?)은 영조때 사람인데 활달하고 기질이 높았다. 호조의 서리로 있을 때 그 동생이 혜국(惠局)의 서리로 있었는데, 수팽이 어느날 동생의 집에 갔더니 동이와 항아리가 뜰에 널려 있고 염색하는 즙(汗)이 철철 넘쳤다. 어디에 쓰는 것이냐 하고 물으니 동생이

「저의 처가 염색으로 영업을 하고 있습니다」

하니, 수팽이 노하여 동생을 매로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다 후한 녹을 먹으면서 이런 것을 영업하면 저 가난한 사람들은 장차 무엇으로 생업(生業)을 하란 말인가」

하고 그것을 쏟아 버리게 하니 푸른 물이 철철 흘러서 개울에 넘쳤다.

공문서를 가지고 판서의 집에 가서 서명하기를 청하니 판서가 손님과 바둑을 두면서 머리만 끄덕이고 여전히 바둑을 두고 있었다. 수팽이 뜰의 계단을 지나 올라가서 손으로 바둑판을 쓸고 다시 내려와서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의 일이니 늦출 수 없읍니다. 서명하여 다른 서리에게 주어서 시행하게 하십시오」

하고 시작하고 나가니 판서가 사과하며 만류하였다 한다.

호조에는 바둑처럼 만들어 놓은 은을 많이 저장하여 두었는데 그것은 봉부동(封不動)이라 하여 수백 년 동안 전해 오는 것이었다.

모(某)가 판서로 있을 때에 어린 딸의 패물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몇 개를 집어 냈다. 수팽이 그 옆에 있다가 손으로 덥석 집어 내며 말하기를

「소인은 딸이 다섯이 있으므로 많이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니, 판서가 무안하여 도로 놓아 두었다 한다. 〈逸士遺事〉

 

이처럼 백성을 배려하는 청백 유형 이외에 관물(官物)·사물(私物)을 엄연히 구분하는 것도 옛 선비 사회에서 한 조류를 이루고 있었다.

 

정승 최윤덕(崔潤德)이 태안 군수로 있을 때에, 차고 있던 箭筒에 장식한 철(鐵)이 헐었으므로 수리하는 공인(工人)이 관가의 철로써 이를 수리하였더니 곧 명령하여 철을 다시 뜯어내게 했던 것이다. 〈崔潤行狀〉

 

정여창(鄭汝昌)이 안음(安陰) 현감으로 있을 때에 김굉필이 방문하였더니 여창이 관가의 물건으로 金盞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공이 책하기를

「자네가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한 줄 나는 몰랐네. 이 뒤에 반드시 이것 때문에 사람을 그릇되게 할 것이네.」

하였다. 그 뒤에 과연 그 고을 원이 그것 때문에 장죄를 범한 자가 있었다 한다.

 

뇌물 거절은 청백의 조건이다. 뇌물과 선물, 예물의 한계는 모호하고 막연하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옛 선비들은 일단 예물이나 선물, 그리고 조정이 내리는 상물(賞物)까지도 거절하는 것으로 청백(淸白)의 바른 길을 잡았던 것이다.

 

■ 맑고, 정직하고, 엄하고

 

현종 때에 우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사대부의 대소 상사에 친구 간에 賻儀를 보내는 규례가 있으나 십 세전의 어린아이 죽음에 어찌 부의가 있겠읍니까. 신이 去年 겨울에 어린 자식의 초장을 당하였는데 충청 병사 박진한(朴振翰)이 면포(棉布) 일동(一同)을 부의로 보냈읍니다. 신이 대신의 자리에 있으니 이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면 반드시 신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비록 곧 돌려보내기는 하였으나 결코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유사로 하여금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그 말을 좇았던 것이다. 〈牧民心書〉

 

이변(李邊)은 성질이 곧았다.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관직을 추천함에 있어 장관의 하는 일에 반대를 많이 하여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루는 외관(外官) 중에서 생선과 맛좋은 고기를 선물로 보낸 자가 있었는데 받지 않았다.

그런데 장관은 이미 그것을 먼저 받았는데 말을 들었다. 그날 장관의 집에 가 맛좋은 고기로 대접을 받았는데 공이 젓가락을 들면서

「이것이 선물로 받은 고기구나」

하니 장관이 깊이 원혐(怨嫌)을 품었다 한다. 〈靑坡劇談〉

 

선조 임진년에 이직언(李彦)이 獻納으로서 파천 임금을 따라 의주(義州)에 있을 때에 전라도에 있는 수령 중에 여름 부채를 선물로 보낸 자가 있었다. 공이 그 사실을 들어 탄핵하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선물을 보낼 수 있는가 하니 동료들이 悚然하게 여겼다 한다. 〈牧民心書〉

 

인조 때에 북도(北道)에 있는 무관 수령이 최정승(崔政丞) 명길(鳴吉)에게 초피(貂皮)를 선사하였다. 명길이 그걸 가지고 온 사람을 불러서 도로 주면서 책(責)하기를 돌아가서 너의 원에게 말하라. 이것은 어지러운 조정(朝延)의 여풍(餘風)이다. 내가 들어가 위에 아뢰어 죄를 주도록 청하려 하였으나 지금은 우선 용서하니 뒤에는 이와 같이 하지 말라 하여라.」

하였던것이다.〈牧民心書〉

 

선조가 하루는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박팽년이 일찌기 한 벗을 관직에 추천하였더니 그 벗이 토지를 주려 하였다. 팽년이 말하되, 친구가 주고받는 것은 비록 거마(車馬) 같은 중한 물건이라도 사양하지 않고 받는다는 옛글이 있지마는 혐의가 있는 것은 받을 수가 없다 하고 거절하였으니 이야말로 청렴한 것이라 할 것이다.』

하고, 곧 명령하여 그 자손에게 벼슬을 주게 하였다. 〈莊陵志〉

 

고려 때 최석(崔碩)이 부사(府使)로 있을 때에 청렴하기로 이름이 났었다.

순천에서는 전례(前例)에 부사가 갈려서 돌아갈 적에는 반드시 말 여덟 마리를 선사하면서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였다. 최석이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에 고을 사람들이 말을 바치면서 좋은 것을택하라 하니 석이

「말이 서울에까지 갈 수 있으면 족하지, 선택은 무엇하러 하는가」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 말을 돌려보내었다.

고을 사람이 받지 아니하니 석이,

「내가 너희 고을에 부사로 있을 때에 암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내가 지금 데리고 있으니 이것은나의 욕심이라.」

하고 그 망아지마저 돌려보냈다. 그 뒤로부터 말을 바치는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고을 사람들이 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워서 팔마비(八馬碑)라고 칭하였다 한다. 〈輿地勝覽〉

 

정약용이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주가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고 선물로써 그림부채, 패도(佩刀), 호초(胡椒), 단향(丹香)을 주었다. 이에 정약용은 일행이 받은 것을 다 거두어 한 그릇에 봉하여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그것을 접대하던 왜인(倭人)에게 주어 도주에게 도로 보냈었다. 그 뒤에 도주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 물건을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사신으로 갔던 일행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청하는 대로 허락하였더니,

『신이 거기에 있을 때는 받지 아니하다가 여기에 이르러 받는다면 전후에 마음이 다른 것이 되니 진실로 원하지 아니합니다. 』

하니 임금이 억지로 받게 하지 못하고 왜인에게 도로 주어서 보냈던 것이다.

 

최치운(崔致雲)이 최정승 윤덕(潤德)을 따라 파저강 야인을 토벌한 공이 컸기로 세종이 토지 오십 결과 노비 삼십 구를 주었더니 치운이 굳이 사양하여 글을 일곱 번이나 올렸다. 임금이 대신으로 하여금 의론케 하니,

『삼십 구의 노비를 가지고도 그 공로를 다 보상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이 억지로라도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허조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일부러 겉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 중심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니, 그 사양하는 것을 들어 주어 아름다운 이름을 이루어 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 말에 좇았다. 치운이 기뻐하여 집에 돌아가 그 부인에게 이르기를,

『오늘에야 청한 대로 되었다. 』

하니, 부인이 말하기를

「임금이 주시는 것을 사양하였으니 복도 없다.」 했다.

 

성종이 하루는 후원을 산보하는데 우연히 까치가 종이 쪽지 하나를 물어다가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주워서 보니 바닷가에 있는 한 수령이 좌승지(左承旨)에게 선사로 보낸 물품 목록이었다. 임금이 그 종이 쪽지를 소매 속에 넣고 경연(經筵)에 나와서 여섯 승지를 불러서

「만약 외방의 수령이 식물을 자네들에게 선물로 보내면 예의를 돌아보지 않고 받겠는가」

하였다.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습니까」

하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는데 좌승지는 자리를 피하여 땅에 엎디면서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90세 노모가 있는데 어제 전부터 잘 아는 한 수령이 해물(海物)을 신에게 보내었기로 신이 받았습니다」

하였다. 이 솔직한 행동을 임금이 가상하게 여기고 신임이 두터웠다 한다. 〈逐睡篇〉

 

청백(淸白)에는 시련이 따르고 그 시련은 관직에 붙은 벼슬덤을 둔 유혹을 극복하는 데 있었다.

내 자식을 내 권력으로 출세시킬 수 있는 데도 그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든지 또는 그 권력을 둔 가족, 문족, 친지 등의 청탁을 거절하는 용기가 선비의 다른 한 청백유형을 형성하고 있다.

 

동고 이준경(東皐·李浚慶)이 領相이 되어 도당(都堂)에서 홍문록(弘文錄) 권점(圈點)을 행할 때에 붓을 들어 그 아들 덕열(德悅)의 이름을 지우면서 말하기를,

『내 아들이 옥당에 합당치 아니한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가 대신의 체통을 얻었다고 감동하였었다. 그 뒤에 유영경 역시 영상으로 있으면서 도당의 홍문록 권점을 할 때 역시 그 아들 업의 이름을 지웠던 것이다. 〈荷潭破寂錄〉

 

정갑손(鄭甲孫)이 성질이 맑고 정직하고 엄하여 자제들이라도 사정으로써 청하지 못하였다. 함길도(咸吉道) 감사가 되었을 때에 잠깐 소명을 받고 서울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함길도 향시(鄕試) 방(膀)을 보았더니 그의 아들 오(烏)가 합격이 되어 있었다. 공이 화를 내어 시관(試官)을 꾸짖으며

「늙은 자가 감히 여우처럼 나에게 아첨을 하는가. 우리 아이가 학업이 정하지 못한데 어찌 요행으로 임금을 속일 것인가」

하고 아들의 이름을 빼어버리고 시관을 내쫓았던 것이다. 〈筆苑雜記〉

 

국법에 도승지는 이조(吏曹)의 인사행정 결정에 참여하게 되어 있으므로 청탁하는 이가 많았는데 이세영(李世永)이 도승지가 되었을 때에는 침묵을 지키고 말이 없었다. 이조의 당상관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것이 미안하여

「영감은 어찌 한가지도 말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였다.

이에

『임금의 옥쇄를 받들어 임금의 명령을 출납하는 것이 승지의 직책입니다. 어진 인물을 승진시키고 그렇지 못한 인물을 내치어 각기 그 재질에 맞게 하는 것은 맡은 이가 따로 있습니다』

하니 동렬들이 부끄러워 사과하였다 한다. 〈陰日記〉

 

■幸福과 不幸을 중화시키는 사고방식

 

나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몇 가지 쓸데없는 의혹을 품어왔다. 이를테면 왕세자비나 왕비를 간택(陳擇)할 때 모든 백성이 왜 그 대상으로 뽑히는 것을 한사코 기피했는가가 그런 것이다. 신분 사회에 있어 여자로서 최고의 행복이 바로 그 비(妃)가 되는 일인데 웬 까닭으로 그 최초의 행복을 기피했을까. 더구나 자기의 딸을 비로 들이면 부원군이 되고 화려한 외적으로 부(富)와 세도를 누릴 수가 있어 인생 비약 가운데 이같이 크고 알찬 비약이 없는데 웬일로 간택이 선포되면 딸을 숨기고 숨기지 않으면 누더기 옷을 입히고 얼굴에 거름흙칠까지 시켜야 했던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예비로 간택되어 가면 마치 지옥의 사자한테 나 끌려간 것처럼 대성통곡하고 울어야 했던가 모를 일이다.

 

물론 몇 가지 개연성은 있다. 간택되어 간다고 꼭 된다는 보장이 없는 데다가 일단 간택을 받고 비가 못되면 주물시(呪物視)당해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가 어렵다는 마이너스 부담이 지워진다.

또 비가 되었다손 치더라도 궁중의 가진 음모와 세도와 당파 싸움 틈에서 비운의 일생을 보내는 것이 통념화되어 있기에 그 와중에 딸을 들여놓고 싶지 않다는 휴머니즘의 작용도 상상할 수 있다.

또 지속되는 세도나 당파싸움에서 몰락 패가망신하고 또는 유배 독살당하는 그 일련의 풍토에서 소외된 채 무풍지대에서 살고 싶은 민중의 간절한 소망에서 이 위험한 행복을 기피했을 만도 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개연성은 그 기피하는 이유의 작은 일부분일 수는 있으나 어느 하나가 그 전체 이유일 수는 없는 것이다.

차라리 행복이라는 지극히 좋은 상태에 저항하는 어떤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작용한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행복합니다」하는 따위의 말을 한국인이 하기 시작한 것은 서구소설이나 서구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극히 최근의 일이며 그나마도 이성간의 환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나 또 사기성이 농후한 쇼 용어에 불과하다. 꽃 한송이 카드 한 장 선물받고 「I'm Happy」 하고 목사의 방문을 받고 「I'm Happy」하는 그런 서구식 행복들에 둔감하다.

또 편지 밑에

「다행하게 생각합니다」,

「행복이 깃들기를」 하는 따위의 어구는 실감을 수반하지 않은 수사용어에 불과하다.

 

곧 행복이란 피는 그 속에 없고 행복이란 미이라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곧 한국인 사이에서는 행복한 상태에 대한 생활감정이 어떠한 이유에서 고사(枯死)해 왔음을 알 수가 있다.

 

행복이란 말이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은 것은 한국인과 이 좋은 상태와는 인연이 멀 뿐만 아니라 그 좋은 상태를 겸양하는 습성이 체질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생활 주변에서 행복이라는 상태는 허무하고 또 위험하다는 사고가 지배적인 반면에 불행을 참아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관념이 체질화되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겠다.

 

「구홉(九合)은 모자라고 열홉(合)은 넘친다」는 속담이 있다.

「술은 반취(醉), 꽃은 반개(半開), 복은 반복(半福)」이라 하고

「솜에도 발을 찧듯이 복에도 다친다」했다.

 

인간이 모두가 충분한 만족을 바라거나 또 만족한 상태에 놓인다는 것은 죄악은 아니나 위험하며 눈물의 씨앗이 된다는 그런 체험적 관념이 나타나 있다.

 

옛 우리 조상들은 조석 끼니에 없어서는 안 될 근본적인 것 이외의 물질에 욕심내는 것을 부덕으로 알았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우면 그만이다. 요즘 같으면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누우면 허기져 하늘이 노오랄 텐데 옛 조상들은 그 맘의 안정 때문에 하늘이 파랗게 보였던 것 같다.

 

물질은 서로 가지려는 데서 빚어진 갈등과 더 모으려는 데서 빚어진 경쟁과 상실할 것이라는 공포와 가졌다는 데서 빚어진 오만과 있어서 촉발되는 방탕과..... 그 모든 것이 정신적 안정을 해치는 요인들 뿐이다. 곧 행복은 위험한 것이다.

 

유학자 김장생(金長生) 선생은 이같은 본능적, 물질적 충족상태의 행복에 대해서는 기필 초인간적인 절대력으로서의 천도(天道)가 벌을 내린다고 가르치고 있다.

 

호사마다(好事多魔)라는 말도 있듯이 행복한 인간에게는 반드시 궂은 일이 야기된다. 역(易)에 달이 차면 기울듯이 천도도 휴영이 있고 재물이 많으면 많이 잃는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송시열(宋時烈) 선생도 행복은 인사(人事)가 아니라 곧 천은(天恩)이고 천은이 과하면 몸을 위태롭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치는 것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지지소이불태(知止所以不殆)]는 노장(老莊)의 소욕지족사상(少慾知足思想)도 공수래공수거(空手來 空手去)하는 불교의 무상사상(無常思想)도 행복 부정의 유교사상에 복합되어 한국인으로 하여금 물질적 본능적 만족으로부터 자학케 한다. 그리하여 한국인은 모든 의식주 면에서 근검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옛날에 유생 세 사람이 과거의 시험장에 나아가려 할 때 한 사람은 거울이 땅에 떨어지는 꿈을 꾸었고, 한 사람은 허수아비가 문짝 위에 걸려 있는 꿈을 꾸었고, 한 사람은 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이들은 해몽가의 집을 찾아갔다. 때마침 해몽가는 없고 그의 아들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도 한다던데 점쟁이집 아들이야 하고 그 아들에게 꿈 풀이를 의뢰했다.

 

이 아들이 꿈을 풀어 이르기를 모두가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는 동안 해몽하는 주인이 와서 그 아들을 꾸짖고 시를 써 이들의 꿈을 풀어 주었는데 그것은 아들의 해몽과 정반대의 것이었다.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어찌 소리가 나지 않으며, 허수아비가 걸렸는데 어찌 사람이 올려 보지 않으며, 꽃이 바람에 떨어졌는데 어찌 열매를 맺지 않으리오.

상서로운 꿈이니 세 분이 모두 소원을 이루고 대성할 것이라 했다.

 

행복의 불행화(化) 그에 수반된 불행의 행복화는 한국인의 다른 한 의식구조를 형성해 놓았으며 그 의식구조의 가장 단적인 표현이 한국인의 꿈 풀이다. 곧 꿈속에서의 불행한 요소는 곧 그 정반대인 행복의 조짐이요, 꿈속에서의 행복한 요소는 불행의 조짐으로 이해하는 것이 그것이다.

 

벌거벗고 거리를 활보한 꿈은 대길(大吉)하고 온몸이 묶여 있는 꿈은 장수할 조짐이다. 분뇨(糞尿)로 몸을 더럽히면 재물이 생기고 몸에서 피를 보면 재물이 생긴다. 불 꿈은 공술의 예언이요, 송장을 보면 대길하다. 불길한 것들이 대길을 예언받는 반면에 길한 꿈이 불길을 예언받는다.

 

술이나 밥을 걸게 배불리 얻어먹는 꿈은 병이 생길 조짐이요, 왕비, 귀비 등 귀인에게 환대를 받으면 크게 다친다. 미녀가 옷벗는 것을 보면 송사(訟事)가 생기고 돈 꿈을 꾸면 손재수가 예언된다. 좋은 옷을 얻으면 마누라가 간통할 조짐이다.

 

이 같은 행복과 불행을 중화시키는 사고방식은 본능적 물질적 행복에로의 상향을 저지시키는 반대급부로서 그 불행에로의 하향에 감내할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줘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떠한 가난이나 불행이 닥쳐도 당황하거나 비탄하지 않게끔 기틀을 만들어 준 것이다. 곧 소극적인 불행에 대한 심리적 면역법의 하나로서 무상감을 양상시켜주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가난이나 불행이나 불운에 대해 그것을 어떻게든지 위안함으로써 소극적으로나마 불평 불만을 억제하는 데 도사가 돼 있음을 본다.

 

비단 가난이나 불행이나 불운을 소극적으로 감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가난이나 불행이나 비운이 인생수양에 바람직하니 득을 봤다고 추겨준다. 부족 불완전한 상태가 바람직하고 아름답다는 부족주의, 불완전주의 같은 심경을 미화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근검절약에는 이 같은 원천적인 철학이 밑거름이 돼 있기도 했던 것이다.

 

■ 유교사상과 근검ㆍ절약

 

옛 우리 한국인이 근검절약한 데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복합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서 우리 선조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방식을 강하게 지배했던 성리사상을 들 수 있다. 곧 강한 유교의 규범이 근검 절약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던 것이다. 그 성리 사상이란 어떤 것인가.

 

농촌의 골목길을 걸어보면 연돌 높이가 지붕 높이를 웃도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유럽 농촌을 걸어 보면 벽돌로 쌓은 우람한 연돌들이 지붕 위로 우뚝우뚝 솟아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서양의 연돌은 마치 부의 상징 인양 하늘 높이 치솟아 연기를 내어 뿜고 있음을 본다. 한데 한국의 연돌은 마치 그것의 노출이 부끄러운 듯 처마 밑에 초라하게 숨겨져 있으면서 연기를 위로 뿜는 것이 아니라 처마에 반사시켜 아래로 내려깔고 있다.

 

연돌이 높을수록 불을 잘 들인다는 물리의 ABC를 한국인이 몰랐다는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수천 년 동안 수천만 명이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그까짓 간단한 이치를 발견 못했다고는 믿어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또 짚으로 이은 처마 밑의 연돌이 불을 일으킬 불안한 요건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을 게다. 한데 한국의 연돌은 높아진다는 법이 없다. 왜 그랬을까.

 

한국인은 의식주라는 인간 생존의 본능적 필수를 노출하거나 공개한다는 것을 수치로 알고 부덕(不德)으로 알았기 때문에 밥을 짓고 방을 다습게 하는 이 본능적 존재방식의 한 표현인 연기를 은폐했을 뿐이다.

밥을 짓고 밥을 먹는 일은 생존의 가장 근본 조건이기에 숨어서 하는 것이 도리였다.

 

홍콩의 거리나 사이공의 길바닥에서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길가의 까페에 앉아서 햄버거를 씹고 페르샤 사람들이 방석만한 넌(빵)을 목에 걸고 길을 걸으면서 뜯어 먹는 그런 공개적인 본능 행위를 한국인은 할 수가 없다. 마치 성(性)행위 같은 본능 행위의 일환으로 숨어서 먹는다.

밥먹는 도중에 손님이 오면 밥을 먹다 말고 반사적으로 밥상을 치우는 한국인의 습성은 반찬이 없어 낯부끄러운 것을 모면하기 위한 행위만은 아닌 것이다.

비단 먹는 것뿐만이 아니다. 잠잔다는 본능 행위도 수치로 안다. 한국인은 잠잘 때만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나면 이불을 개서 벽장에 숨겨둔다. 만약 숨겨둘 곳이 없어 옷장 위에 쌓아놓게 되면 반드시 이불보로 덮어 은폐를 한다. 곧 사람이 잠잤다는 흔적을 소멸시켜 버린다.

서양의 침대가 잠잤다는 흔적을 고스란히 노출시켜 놓은 것과는 적이 대조적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집에서는 빨래 가운데 이불잇, 요잇, 베갯잇, 홑이불 등 침구(寢具)에 관련된 빨래는 여자의 내의와 더불어 앞마당에서 말리지 않고 반드시 뒷 마당에 다 말려야만 했다.

 

북관(北關) 지방에서 부부싸움을 하다가 부부 가운데 누군가가 베개를 마당에 던지면 그것은 파경을 뜻하였다. 침실용구의 외부 노출은 곧 성생활의 노출인 양 이같이 큰 뜻을 가졌었다.

 

서양의 의자와 한국의 방석과의 콘트라스트도 그렇다. 손님이 오면 방석을 내어놓고 손님이 가면 방석을 치워 버린다. 곧 편하게 앉는다는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안락에 한국인은 죄악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데 서양의 의자는 항상 그곳에 있으면서 안락을 유혹하고 있다.

 

한국 여인의 고유 의상이 육체를 철저히 은폐하는 것도 그 같은 생활방식으로 이해할 수가 있다. 장옷으로 눈을 제외한 얼굴을 다 가리고도 못다 가려 소매통을 크게 하여 사람 앞에 나타나면 손까지 소매 통에 감추도록 했다.

곧 옷 소매통이 큰 한국 저고리의 저의는 이 같은 일련의 본능 죄악감각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부인은 잠을 기울게 자지 아니하며 앉기를 비뚤어지게 하지 아니하며 한쪽 발을 들고 서지 아니하며 눈으로 부정한 빛을 보지 아니하며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

「아니하며」는 이렇게 끝이 없다.

 

부모를 쳐다볼 때 부모의 안면까지 올려 보아서도 안 되고 허리 아래로 내려 보아서도 안 되었다. 그렇기에 부모에게 여쭐 말이 있으면 눈의 위치는 목 아래 허리 이상에 머물러야 했다.

 

부모가 병중에 있으면 웃을 일이 있어도 이(齒)를 드러내지 않고 입속에서 웃어야 한다. 어른이 쓰는 책이나 재떨이나 심지어는 어른이 깎아 먹고 난 과실껍질이라도 앞에 걸리면 앉아서 옮겨 놓고 넘지 않아야 한다. 손님 앞에서 개를 꾸짖어서는 안 되고 존장(尊長)에게는 나이를 물어도 안 되며, 길가는데 행방을 물어서도 안 된다.

 

마루에 오를 때는 반드시 소리가 나게 하며 문밖에 신이 두 켤레가 있거든 문 안에서 말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들어가서는 안 된다. 또한 방문을 열고 방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눈을 아래로 깔고 들어가야 했다.

 

밥숟갈은 크게 뭉치지 말고, 국물은 주르륵 마시지 말고 뼈는오 도독 씹지 말고, 더운 것은 호호 불지 말며 남이 보는 데서 잇새를 쑤시지 말아야 한다. 서 있는 사람에게 앉은 채 물건을 건네 주어서는 안 되고, 앉아 있는 사람에게 서서 건네도 안 된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주변은 너무나 해서 안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안 되는 일들은 한결같이 하고 싶은 일이요 자연스러운 일이요 편리한 일들이다. 인간주의(人間主義)나 합리주의(合理主義)나 자연주의(自然主義)거나 프라그마티즘의 기조(基調)위에 형성된 서구 사회에서는 그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모두 해야 될 일이라는 데 이 생활감각은 너무나 한국적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곧 한국문화사의 어느 단계에서 서정(抒情)에 대한 서사(叙事)의 부흥이 있었고 시에 대한 반시(反時), 자유에 대한 교조(敎條), 자연에 대한 규제(規制), 헬레니즘에 대한 헤브라이즘의 혁명이 있었으며 그 혁명의 연장 위에 한국인이 살아왔고 살고 있다는 것이 된다.

 

곧 성정(性情)에 대한 성리(性理)의 혁명이다. 인간성, 본능, 감정, 생리 등 인간의 성정적(性情的) 요인은 조직이나 집단사회 규범에 필요한 성리 속에 극소화시키는 행실철학에 한국인은 적셔져 왔다.

 

사람은 정신력과 육체력이 그 안에서 대결하고 있는 하나씩의 개체이기도 하다. 이 대결은 항상 반비례 관계에 놓여 있다. 육체편이 지니고 있는 오욕(五欲)은 물론 수면(睡眠)까지라도 대결시켜 그것을 극소화시킴으로써 정신력을 극대화시킬 수가 있다. 물론 그 역(逆)도 성립된다. 역사적인 어떤 인간이나 또 현대의 어떤 인간도 이 정신과 육체가 마주치는 각기 다른 좌표를 갖고 있으며 또한 그 좌표의 성향이 시대적으로 특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고려 시대의 한국인은 그 X와 Y의 교차좌표가 중심에서 육체편으로 기울었다면, 조선시대에 들어 그 중심점을 넘어 정신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가 개화기에 싹튼 반성리 합리주의(反性理 合理主義)에 자극받아 육체 면으로 역전환, 해방 후에는 휴머니즘, 실존주의 프라그마티즘에 자극 고무되어 중심점을 지나 육체편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할 것이다.

 

이 같은 정신력과 육체력의 좌표이동 때문에 근검절약에 대한 전통적 사고방식과 행동방식도 그 근원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할 것이다.

 

■ 李圭完 傳(上)

 

이규완(李圭完)하면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한국적 인간상으로서 근세 백 년 동안에 근검 절약에 대한 가장 많은 일화를 남긴 인물이며 노장(老壯) 세대에는 널리 알려져 있다. 더러는 무골(武骨)이라고도 하고 기인(奇人)이라기도 하고 또 이인(異人)이라기도 하지만, 그가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진 것은 체면이나 안목 등 남의 체면을 묵살하고 자신의 소신대로 과감하게 실천해낸 그 특이성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행동대로 활약했고 젊은 시절은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생활로 허송한 다음 43세에 강원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로 근 20년간 관직생활을 했던 분이다. 곧 한국 개화사를 살아낸 일생이었다.

 

망명에서 돌아온 1년만인 을미년 7월에 그는 박영효(朴泳孝)의 민비 시해 음모 무고사건에 관련, 다시 박영효를 따라 일본에 망명하여 20여 년을 일본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가 되돌아온 것은 헤이그밀사사건이 일어났던 1907년으로 나이는 46세였다.

 

이듬해 내각관제(内閣官制)가 발표되면서 강원도 관찰사로 배임받았고 그 후 직제개편으로 강원도 장관으로 이름만 바뀐 채 유임 11년간 춘천에서 장관을 지냈다.

 

강원도 장관 시절 어느 일요일에 춘천 우두리(牛頭里)에 있는 명문 이모승지(李某承旨)집을 방문했다. 장관을 반기기 위해 성찬을 베풀자 그는

「성찬보다 마음의 환대가 고마운 것이요. 금후는 이런 일을 삼가시오.」

하고 주의를 주고는

『나는 어디를 가든지 폐를 끼치게 되면 반드시 답례를 하는 것이 나의 주의요. 지금부터 귀댁내의 가사를 조력하겠소』

하고는 장관이 손수 지게를 짊어지고 퇴비운반을 시작했던 것이다.

 

주인이 당황하여 만류했지만 막무가내고 석양이 되도록 계속한 것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이규완 장관을 대접할 때는 찬 세 가지를 넘는 법이 없는 소찬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 돼 버렸다 한다.

이 장관이 전라북도 옥구 수리 조합을 시찰하러 갔을 때 일이다. 안내하던 전라북도 농무과장이 고급 여관을 정해두고 안내하자 바로 가까이 있는 주막집을 찾아 들어가 방이 있느냐고 물었다.

주인이

「이러한 방이라도 좋으시다면」

하고 방문을 열어보였다.

그 방에는 이미 행상인들의 숙객이 많이 들어 있었고 흙벽에 빈대 죽인 자국이 어수선하였다.

수행한 사람들은 아무리 장관이 소탈하더라도 설마 이런 방에서 혼숙(混宿)할까 했지만, 이 장관은 아무 말 없이 방 한쪽에 자리잡더니 언제 어디서 주워 넣었는지 대쪽 하나를 꺼내어 이것을 열심히 쪼개더니 여념없이 이쑤시개를 깎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를 이 혼숙방에서도 여지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같이 늦도록 손수 만든 토산(土産) 이쑤시개를 이튿날 그를 안내하느라 수고한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예산상 쓰게 돼 있는 숙박료 접대비가 남아 처리에 곤란하다고 말하자 그는 그곳 보통학교에 장학금으로 사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는 잠깐 기다리는 시간은 물론, 식사 기다리는 시간, 뒤보는 시간마저도 쉰다는 법 없이 노끈을 꼬거나 어망(漁網)을 들고 다니며 그물을 얽는 일을 평생 잊어본 일이 없었다.

 

미국인 선교사 부인이요 원산루씨(元山樓氏)여학교장이던 알라파는 이전부터 이장관과 친면이 있는 터였다.

 

어느 날 미국에서 친구가 왔다면서 일요일에 댁으로 이장관을 방문했다.

밭일을 하다가 이들을 맞은 이 장관은 차라도 대접할 생각은커녕 평소에 얽던 어망을 들고 나와 그물을 얽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돌아갈 즈음에는 이들에게

「가시는 두 분에게 참고될 말씀을 하겠소. 나는 그 옛날 귀국에도 갔다온 일이 있지만 문명의 정도를 선망해 마지 않았소. 그런데 오늘 두 분을 보니 어딘지 못마땅한 점이 있소. 보다시피 나는 일요일에도 밭을 매고 어망을 뜨는 등 촌음을 아끼고 있는데 당신들은 잡담으로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소. 혹 문명을 믿고 현실에 만족하는지는 모르되 우리가 이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이쪽 생산물이 싼 값으로 귀국에 진출하게 될지 모르오」

하고 타일렀다.

 

이에 얼굴을 붉히고 두 양(洋)부인은 돌아갔는데 이를 보고 있던 부인이 모처럼 오신 외국의 빈객(賓客)에게까지 그런 실례의 말씀을 하느냐고 못마땅히 여기니까

「그것은 당신의 소견이 좁소.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할 때에는 상대방이 누구 일지라도 진심을 피력하는데 미국사람이건 한국사람이건 사람에는 변함이 없소」

라고 했다.

 

얼마 후 알라파 부인이 다시 방문했는데 들어앉자마자 손가방을 열고 뜨개감을 꺼내서 뜨개바늘을 놀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장관 역시 어망을 뜨면서 오래 담소했던 것이다.

그의 집 측간에 가면 반드시 천장으로부터 드리워진 어망이 늘어져 있으며 뒷간에서만 한 달에 평균 두 개씩의 어망이 생산되었는데 이같이 양산(量産)되는 어망은 강원도 해변 가난한 어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 그는 말방아 콩타작기 등 농기구를 손수 만들어거나 백성들에게 만들어 주었고, 또 손수 톱질과 대패질을 하여 책장이며 약장, 찻장을 만들어 서울 종로변의 가구점에 내놓고 팔아 농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모양은 없어도 튼튼한 게 특색인 이 가구는 도장관(道長官) 목수가 만든 것이라 하여 장안에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이처럼 근면으로 일관한 그의 일생이었다.

『조선사람들은 새삼스레 자신들이 가난뱅이란 것을 알고 떠들썩한데 내가 보기에는 2천만 백성 가운데 겨우 10만 명이 일하고 있고 나머지 1천9백 90만 명은 놀고 있다. 이처럼 먹고 살기 괴로운 세상에 놀고 먹는다는 것은 사치스럽기 그지없다.

그들은 일하려 해도 일자리가 없다고 버릇처럼 말들 하지만 일이 없어서가 아니고 처음부터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이렇게 일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알건 모르건 간에 새끼라도 꼬아라, 짚신이라도 삼아라, 지게는 내가 만들어 줄테니 지게짐이라도 지라고 타이른다. 한데도 그 말대로 실천한 경우를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놀다가 친척집에 추수(秋收)가 들어왔다, 돈이 생겼다, 벼슬을 얻었다 하면 마냥 달려가 먹어 치우고 손을 벌려 구걸을 한다.

나는 결코 할일이 없다는 것을 걱정하질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걱정한다.

조선의 논밭은 시비(施肥)만 충분히 하면 곱절의 수확을 거둘 수 있음을 내가 직접 체험한 바다. 가령 그것을 5할로 보아도, 조선인구가 4천만 명으로 배가 한다 해도 걱정할 게 없다.

걱정은 조선사람이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그의 실천 우선주의는 다음과 같은 그의 좌담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나처럼 손이 이 꼴이 되도록 지어야 만이 비로소 되는 것이 농사라는 것이네, 다른 것들은 입만으로도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농사 만은 인쇄물이나 입으로만은 안되는 거야. 어느 돈많은 선각자적인 양반이 덴마크(丁抹〕에 갔다 와서 열심히 개량농사를 짓는다기에 내가 어느 해 한 번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그랬더니 하품이 날 지경이더구먼. 집 안에 온실을 만들어 놓고 스토브를 피우는 등 아주 굉장하거든. 속성이니 촉성이니 하면서 재배한다는 것이 겨우 쑥갓〔春菊〕이더란 말이야. 여기에 들여 놓은 돈이 대단하거든. 스토브에 매일 드는 연료비용만도 대단하지만 일군도 70원씩 사경을 주어 두 사람이나 두고, 비료도 한 차에 2원씩 주어 5백 차나 쓴다니 이것만도 1천 원 이상 들어가지 않느냐 말이야.

이분 정말 덴마크라는 나라의 농사를 잘 못보고 온 모양이더군 그래.

그때 그 분네 집에 가서 본 것을 여기서 말한다면 배꼽이 빠질까 두려워서 그만두지만 돈 들이고 하는 것이 농사가 아니고 힘들이고 하는 것이 농사란 것을 알아야 돼. 손이 흙도 되고 똥도 되고 하는 것이 바로 농사야.

아무리 시대가 달라지고 발달한다 해도 우리 땅에서는 기계도 필요하지만 이 손이 제일이다.

주무르고 매만질 수 있는 이 손이 제일이야.

나는 이렇게 온종일 일하고 밤에 자리에 누우면 온몸이 쑤시고 앓기도 한다. 고단해서 잠이 올 때도 있지만 아파서 잠을 못 잘 때도 있어.

그러나 여태껏 풀 하나 나지 않던 모래 땅에 곡식이 나고 과실이 연다고 생각하면 빨리 날이 밝아주었으면 맘이 아픔을 억눌러 주거든. 이 맛이란 계집질보다 좋고 좋지.』

 

양구(楊口) 고대리(高垈里)에서 사돈의 차남이 매형의 아버지가 도장관을 하고 있으니 취직이나 해보고자 춘천에 와서 누님댁에 머물었다.

퇴청한 그에게 오게 된 사연을 말하자 그는

「좋은 데 취직이 되고 말고, 사나흘 걸릴 테니 우리집에 머물러 있게. 그러나 우리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우리집 가법(家法)을 잘 지켜 주어야 하네」

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자 이 젊은 사돈을 멍석을 깔아 놓은 마당으로 불러냈다.

「자 우리 새끼나 꽈 보세. 나는 오늘 저녁으로 5백 발을 꼴 터이니 사돈일랑 그 고운 손에 그렇게는 못 꼴 테니 나의 절반도 안 되는 2백 발만 꼬고 들어가 자기로 하세.』

하고 새끼를 꼬게 했다.

부자집 아들로 태어난 이 사돈이 그날 밤 겪어야 했던 고초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할 때 이장관 사돈을 부르더니 뒷산에 베어놓은 참나무 가지를 추려서 단을 묶고 큰나무는 한데 모아서 가려〔積〕놓도록 일을 시키고 떠났다.

하루종일 나무를 다듬고 추려 가리던 사돈은 기진맥진하여 누님에게마저도 간다온다 말 한 마디 없이 그 집을 떠나 버렸던 것이다.

 

그는 거지가 오면 반드시 자기의 허락을 맡은 다음 동정하라고 가족에게 분부해 두었다.

어느 날 아침 한 걸승(乞僧)이 어린 아기 중을 데리고 걸식(乞貪)하러 왔다.

이에 이장관은

「조반을 주겠다. 그러나 쌀 한 톨 돈 한 닢 공짜로는 주질 않겠다.」

면서 아침밥을 차려 주고는 수십 평의 텃밭으로 이 걸승을 데리고 갔다.

그는 밭에 쳐놓은 새끼줄을 보이면서

「이 새끼줄 안을 팽이로 파놓고 가시오」

했다.

출근하면서 당시 집에 기식하고 있던 종형에게 이 걸승의 작업을 감독토록 시켰다.

걸승은 부르튼 손바닥을 보며

「불과 조반 한 그릇의 댓가치고는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고 불평을 했던 것이다.

그런 연후부터 이장관이 사는 마을에는 거지들이 얼씬도 하지 못했다 한다.

 

■ 李圭完 傳(下)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이었고 한말에 강원도 함경도 장관을 지낸 이 규완은 5척7치8푼의 큰 키였고 체중은 19관 내외로 79세 때에도 18관을 유지했었다.

대식가로 일본망명시 여관에 들면 공기밥으로 열두 공기 먹는 것이 상례였고 즐기는 만두국은 으례히 두 사발씩 먹어치운다.

 

주량은 삼 홉 정도, 담배는 손님 접대 때에만 피웠다. 차림새는 제복 이외에는 견직물을 평생 몸에 댄다는 법이 없었다. 양복은 결혼할 때 맞춘 단벌 이외에 맞춘 일이 없으며 평소에는 여름에 베 중의 적삼, 겨울에 무명옷이었다. 일을 할 때는 무명에 물감을 들인 색옷을 입었기로 중국인 고용인으로 오인받기 일쑤였다.

 

구두는 강원도 장관 임관 당시에 사서 신은 한 켤레를 30년 동안 수선에 수선을 거듭하여 신었는데 이것도 회의라든지 제복을 입었을 때에 국한해서 신었으며 짚신이 해지면 두 쪽을 다버리는 것이 아니라 해어진 한쪽만을 새 짚신으로 바꿔 신고 지냈던 것이다.

 

그는 관찰사 시절에 따로 사는 두 자부(子婦)를 불러 곧잘 엉뚱한 질문을 하곤 했다.

이를테면 그 문답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빨래는 어떻게 하는가? 』

『냇물에 가서 합니다. 』

『그래서는 안 된다. 빨래는 집에서 하고 빤 물은 모두어 두었다가 거름에 섞어서 밭에 주든지 퇴비에 끼얹도록 해라.』

『불은 어떻게 때나?』

『장작을 지피고 태웁니다. 』

『그것은 안 된다. 나무를 살 때부터 그 나무를 손질해 딴 것으로 쓸 수 있나 여부를 따지면서 골라 사야 한다. 그리하여 용재(用材)로 쓸 만한 것은 따로 모아 두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테면 가느다란 놈은 도구의 자루로, 싸리나무는 모아서 비를 만들어 쓰다가 때도록 하라. 』

 

며느리를 처음 대면했을 때는 다음과 같은 엉뚱한 질문을 했던 것이다.

『너는 뒤를 어떻게 보느냐?』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다.

『용변의 시간도 이를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실꾸리를 들고 가 감든지 ….』

그의 둘째 며느리가 말한 시아버지상〔像]은 다음과 같다.

『아버님은 생일잔치는 물론 환갑잔치까지도 굳이 거절하였으며 시집와서 21년이 되지만 단 한 번도 식구의 생일잔치를 차려본 일이 없읍니다.

제사 때 입는 두루마기도 넝마 같았고 장례비도 10원을 못 넘게 하여 어느 가난한 사람의 장례비만도 못해 이웃보기 낯부끄럽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 시집와서 함흥 관사에 인사드리러 갔을 때도 아버님은 빨래할 때 헌옷에서 뜯어놓은 실오락을 낱낱이 모아 감고 계셨으며 아이들이 다 쓰고 버린 잡기장을 주워다가 그 행간에 당신이 글씨 연습을 하시고는 이를 잘라 종이 노끈을 꼬아서 그 노끈으로 자기의 종이 조끼를 떠입는 것이었읍니다.

노끈 뜨게질도 능숙하실 뿐 아니라 물레도 손수 개량, 고안해서 만들고 일생동안 어망을 얽으셨는데 그 실은 관사의 울타리 안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그 누에고치에서 손수 실을 빼어 원료로 삼으셨읍니다.

밥상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물을 얽으시고 혹은 짚신을 삼아 가족의 모든 신발을 충당했으며 변소에서도 종이 노끈을 꼬거나 어망을 읽는 일을 평생 계속하셨읍니다.

또 의복은 항상 색옷을 입어야 한다 하여, 솔선수범 항상 검은 무명옷을 입으셨으며 흰옷은 절대로 입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신동면 석사리(新東面碩土里) 황무지를 자녀들과 손수 개간, 저수지까지 만들어 네째 아들을 그곳에 살게 해 농사짓게 했다. 그 아들이 살집을 짓는데 하필이면 제방 복판 수문(水門) 바로 위에다가 가족의 공동 노역으로 집을 지은 것 역시 그의 불굴의 생활신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자동차나 기차는 모두 운전석이 최전단의 전위부에 있다. 그것은 항상 위험에 대처하는 데 편리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법이다. 이 농장의 요충이요, 최전단은 바로 이 수문 위다. 만약 이곳이 파괴되면 모든 것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집을 지어놓으면 굳이 누구나 주의시키지 않아도 이 둘을 든튼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둑이 견고할 때 농장은 절대 안심이다. 』

 

이 둑을 쌓을 때 쓴 목재도 그가 손수 가꾼 나무를 잘라 한 것이요, 콘크리트 쓰기를 거부한 것도 온 식구가 한결같이 주워 모은 돌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이었다.

 

며느리를 얻으면 혼례가 끝나는 이튿날 반드시 밭에 데리고 나가 가래질을 시켰다.

그의 자부들은 당시 고등여학교를 나오고 교사를 하거나 했던 상류층 여자였는데도 셋이 협동해야 일이 잘되는 가래질로 노동의 협동적인 묘미를 익히게 했던 것이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네째 자부가 결혼했을 때는 가래질할 철이 못되었기에 나흘 동안 계속하여 돌담을 쌓게 했던 것이다.

 

그는 병구완 온 간호원에게마저도 퇴비손질을 시켰을 만큼 근로의 가치를 익히게 하는 데 사람을 가린다는 법이 없었다.

 

그의 손녀가 어느 하루 이웃집에서 달리아 꽃 묘 몇 포기를 얻어다가 마당에 심고 있었다.

이것을 본 그는 뒷을 심느냐고 물었다.

『달리아입니다. 』

『달리아라니?』

『꽃이 곱고 뿌리는 감자 같습니다. 』

『그럼 그 뿌리는 먹을 수 있는 거냐? 』

『먹지 못합니다. 』

『그럼 열매가 달리느냐?』

『열매는 열지 않습니다. 』

『꽃을 보는 것뿐이라면 눈만 피곤해질 것이 아니냐, 절대로 한 포기 이상 심어서는 안 된다.

저 도라지 꽃을 보아라. 꽃은 청초하고 뿌리는 겨울에도 땅에서 파내면 그대로 신선한 찬거리가 된다. 더우기 약재로서 중국에서 수입한다고 하니 이만큼이라도 집에서 생산하면 그만큼 나라의 수출이나 경제에 공헌하게 되지 않겠느냐?』

고 타일렀던 것이다.

 

사치를 배격하는 그는 비단에 대해 생리적인 반감을 갖고 인생을 살아왔다.

강원도 강릉에 이모라는 유명한 부호가 있었다. 그가 도장관으로 순시를 할 때 부디 집에 와서 하룻밤 쉬어가길 간청하였다. 옛 우리 풍습에는 귀인을 집에 불러 온가족이 성장(盛裝)하고 환대하는 습속이 있었으며 이 집에서도 옛 풍습대로 했다. 그가 그 집에 들자 일가의 부녀자들이 비단옷으로 성장을 하고 맞는지라 이것을 둘러보던 장관은 이모의 어머니에게 손가락질하여 짐짓, 「저 늙은 기생은 이름이 뭣인가」

고 물었다.

비단옷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정선, 평창, 영월의 삼군 연합 연초경작 품평회가 있을 때 이장관도 참석, 영월의 군참사(郡參事) 장한식씨 집에 머물게 됐다.

 

장관이 머물거라 하여 도배를 깨끗이 하고 비단 이불 요를 깔아놓았던 것이다.

그는 집에 있건 출장을 가건 밤에는 짚신을 삼아 아침에 갈아 신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비단 이부자리가 불쾌한지라 짚을 갖고 오라 시키고는 그 비단 이부자리 위에서 짚신을 삼고는 그대로 어질러 놓고 웃목에 가 이불도 덮지 않고 잤던 것이다.

 

춘천에서 구수회의가 있었을 때 일이다.

모군수가 회의 전 새벽녘에 이 장관에게 인사를 갔더니 장관은 마침 퇴비에 인분을 뒤섞고 있었다.

비단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군수를 힐끗 올려보더니 잘 왔다면서 좀더 가까이 오라 시켰다.

악취에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다가가자 장관은 대뜸 똥거름을 만지작거렸던 손으로 두루마기 입은 팔을 잡더니 마냥 그 손으로 비단 두루마기에 인분칠을 해 버렸던 것이다.

 

47세에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했다가 함경남도 장관으로 전임, 도장관을 그만둔 것은 63세 때였다.

퇴임 후에도 그는 청량리 전농동에서 농장을 개척, 일본 황실에서 욕심낼 만한 규모로 키워놓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11월에 85세로 서거할 때까지 여전히 평범한 농부로 근면하고 실천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항상 자제를 보고,

『내가 죽거든 입은 옷 그대로 너희들 형제의 손으로 메어다가 파묻어라. 그리고 장례비는 나의 소신인 10원을 넘지 않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모은 재산만큼은 절대로 낭비하지 말고 교육사업에 선용하라. 그렇게 한다면 나의 묘에 비석은 없을지라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예배하고 갈 것이다.

세상에는 흔히 생전에 묻힐 자리를 보아두고 비석까지도 준비하는데 그런 자는 이승에서 거짓 살았기에 끝까지 거짓으로 살려는 행위인 것이다. 』

고 훈계하였다.

언젠가 박영효댁에 백발이 된 이규완, 신응희(申應熙), 유적노(柳赫魯) 등 갑신정변의 행동대원들이 모여 구정(舊情)을 토로하는데 화제가 사후의 준비가 어떻게들 됐는가에 미쳤다. 이때 이규완옹은

『나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다. 헌옷 한 벌이면 되고 없으면 알몸으로 묻어 달랄 작정이다.』

고 말했는데 좌중에서는 설마 했지만 옹의 신념에는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 날 장남과 차남을 불러놓고, 그가 손수 가꾸어 놓은 미류나무를 가리키며 하는 말이,

『언제 내가 죽을지는 모르나 내가 죽거든 저 미류나무로 관재(棺材)를 하라. 관재가 마련되었으니 장례비 10원을 5원으로 내리고 그 이상 넘지 않도록 하라.』

고 분부했다. 두 아들이 반드시 그러해야 할 이유가 뭣 있느냐고 따져 묻자 다음과 같은 경륜을 피력하는 것이었다.

『나의 과거를 회고하건대 국가사회를 위해서나 후손을 위해서나 무엇 하나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일러 무능인(無能人)이었다. 이러한 무능한 인물이 세상을 떠남에 있어 어찌 다액의 재물을 소비하면서까지 장의(葬儀)할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은 또한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다.

양반을 자부하고 의식주에 한 가지도 궁합을 모르고 무위소일하여 영달의 환몽을 깨지 못하는 부유층은 물론 그들과 합류하여 허송세월하는 자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를 아는가.

관혼상제에 과분한 재물을 들이는 것이 한국 동포의 생활을 피폐케 하는 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후라도 이것을 시정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

고 타일렀다.

 

□ 옷물림

 

나는 노랑색 쉐터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갖고 있다. 아마도 내가 갖고 있는 쉐터의 거의가 노랑색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길가다가 쇼윈도우에 노랑색 쉐터가 걸려 있으면 다가가서 보곤 한다.

물론 사람에게는 개성에 따라 좋아하는 색이 있지만, 내가 노랑색 쉐터에 끌리는 것은 그 같은 한가한 개성이나 기호의 차원이 아니고 보다 각박하고 쓰라린 잠재적 선망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나는 가난한 산촌 농가의 네째 아들로 태어났다. 물론 옷이 귀했던 시절이기도 하려니와 당시 그 산촌 사람들은 「옷물림」이라 하여 아버지가 입던 옷을 맏아들이 물려 입고 그 맏이 물린 옷을 둘째가 입고 이렇게 차례로 물려 입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그러니까 새 옷은 항상 아버지나 맏형 차지요, 막동이인 나는 항상 낡고 기운 옷을 입어야만 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소시적에 새 옷을 입어본 기억이 전혀 나질 않는다. 옷깃이 닳아 흰 실밥이 드러났거나 무릎, 엉덩이, 팔꿈치 부분이 항상 기워진 옷인 데 예외가 없었던 것이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옛 우리 조상들은 대체로 이 낡은 옷물림에 체질화돼 있었고 따라서 옷물림을 입어야만이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요즈음 아이들에게 새 옷을 입는 불안을 납득시키기란 어렵겠지만 옷물림에 체질화된 옛 한국인은 새 옷을 입는다는 것이 어딘가 겸연쩍고 남 보기 부끄러운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국민학교 일학년 때 일로 기억이 된다. 아버지가 일본 오오사까[大阪]에서 열린 만국박람회(萬國博覽會)에 구경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의 선물로 쉐터를 사갖고 오셨다.

그 무렵, 형님들은 중학교 이상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나에게만 이 옷선물을 한 것이었다. 그 쉐터 색깔이 노랑색이었던 것이다.

 

헤어진 물림옷만 입다가 이 파격적인 새옷, 그 당시 그 산촌에 아무도 입은 사람이 없는 그런 색다른 디자인, 색다른 색깔의 옷을 두고 나는 황홀했으며 식구들도 무척 나를 선망했던 기억이 선하다.

 

한데 황홀했던 이 감정은 나의 속마음이었을 뿐이요, 그 옷을 입을 어떤 정신적, 정서적 준비가 전혀 돼 있질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 옷을 입고는 괜히 어디엔가 마음이 불안하여 밖에 나갈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 입고 싶은데 입지 못하는 이 표리의 갈등이 당시의 어린 나를 무척 괴롭혔던 것이다.

밤에 모든 식구가 잠들면 몰래 일어나서 도둑놈처럼 장롱 가까이 다가가 그 노랑 스웨터를 꺼내 입고 황홀해한 적도 몇 번 있었다. 한데도 그 옷을 입고 나가지 못한 당시의 심성(心性) 구조는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요, 나의 개성 때문도 아니며 당시 옷물림의 검소한 사회풍조에서 한국사람이 보통으로 지녔던 그런 심성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 새옷을 입었다 할 때 나보다 웃사람, 곧 나에게 옷을 물려준 형님들, 그리고 아버지의 옷보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이 되며 이것은 옷물림이라는 관습, 즉 정신적 스테로타입〔固定觀念〕에 거역하는 하극상이 되는 것이다.

 

그 스테로타입을 깨기란 당시의 어린 나로서는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그 좋은 옷을 입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받아가면서까지도 끝내 그 노랑 쉐터를 입지 않고 말았던 것이다.

사치하지 말아야 하며 또 근검 절약해야 한다는 그런 성숙된 도의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웃사람이 이러한데 내가…」하는 그런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 때문에 입고 싶어도 입지 못했다.

 

노랑 쉐터에 대한 선망은 이렇게 하여 나의 무의식중에 잠재되어 오늘의 나를 노랑 쉐터에 편집케 해놓았다고 본다.

 

이같이 웃사람을 의식하고 웃사람이 않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가치관은 나만의 개별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 한국인 모두에게 보편화돼 있던 가치관이었던 것이다. 이 가치관이 상하의 서열의식을 약화시키고 개인주의를 부각시키는 구미사조에 의해 찢어발겨진 헌 걸레처럼 돼 버린 것이다.

 

그러나 한 민족이나 문화권의 가치관이란 하루 아침에 개조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노랑 쉐터에 얽힌 선망이 나의 무의식층(無意識層)에 수십 년 잠재돼 살아있었듯이 민족의 기억 속에 수십 년, 수백 년 유전자(遺傳子)로서 잠재돼 버린다는 것은 문화 인류학이 입증하고 있는 바다.

 

그래서 나는 이웃 사람을 의식하는 잠재의식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든 한국인의 기억 속에 바이탈리티를 누리고 있다고 확신하고 싶다.

 

이 바이탈리티 위에서 오늘을 사는 지혜로써 근검이나 절용(節用)을 접목(接木)시킨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요. 그 접목이 가능하다고 본다.

 

우리 전래의 속담에 「上濁下不淨」이라 하고 「灌頭之水下足底」, 「人之善惡 必從其先」이라 했다. 이마에 부은 물은 발뒤꿈치로 흐르고 사람의 선악은 반드시 그 웃사람에 따르며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이 교훈은 이 같은 한국적 바이탈리티의 가능성의 제시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국인의 소비성향이나 사치성향을 다 잡는 근검절용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이 웃물을 맑게 하는 방법이라고 본다.

 

모 종합병원의 월급받는 원장을 하고있는 한 친구가 있다. 이 원장에게는 자가용차가 병원측으로부터 배정되었지만 이를 거부하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기에 병원에서나 이웃 사람들로부터 지독한 사람으로 뒷손가락질 당하기도 하는 친구다. 그는 신발을 기워 신고 신문 틈에 끼어드는 광고지를 엮어 메모지로 쓴다. 그는 그 나름대로 산다. 물론 그런 생활철학에 대한 평가는 가지가지겠으나 그 원장 슬하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들의 차림이나 생활이 다른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 비해 유별나게 달라져 있다는 것만은 누가 봐도 일목요연하다는 것에는 이론이 없었다.

 

근검 절용하라고 직원들에게 말 한마디 한 일도 없고 또 그의 생활철학에 대해 일언반구 입 밖에 낸 일도 없는 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또 외국에 플랜트 수출을 하는, 5백여 종업원 규모의 기계공업을 하는 친구가 있다. 그는 그 쇠소리 요란스런 공장에 딸린 15평의 좁은 집에서 살며 자신의 옷은 물론 모든 식구의 옷을 가장 값싼 동대문시장의 결손의류시장에서 사 입으며 이발 가위를 사놓고 집에서 이발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이 「웃물」의 근검 절용의 생활을 항상 보면서 일한다. 그 때문인지 그 「아랫물」에서 노사분규가 한 번도 일어난 일이 없을뿐더러 자재 전용의 효율이 다른 회사에 비해 21%나 높다고 한다. 물론 물자절약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거나 계몽한다는 법도 없었다 한다.

 

옛날 고을을 다스리는 원님들은 삼권(三權)을 한 손에 쥐고 있었기에 대단한 세도와 재력을 누렸었다. 하지만 그들의 밥상에는 국 한 그릇, 김치 한 접시, 간장 한 종지 외에 「이두이변(二豆二籩)」이라 하여 네 가지 반찬 이상 놓지 않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한다. 목천현(木川縣)이나 연기현(燕岐縣) 같이 고을이 작아 예산이 적은 고을의 원님들은 그나마도 두 가지 반찬을 줄여 먹는 것이 관례가 돼 있었다.

 

그 고을의 가장 웃사람의 음식 가지 수를 제한한 이유는 곧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고을 주민으로 하여금 절용케 하는 「절풍(節風)」의 눈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웃사람 되기란 그런 측면에서도 고된 책임이 있음을 자성들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