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文眞寶(고문진보)

고문진보 作者略傳

耽古樓主 2024. 2. 27. 22:43

古文眞寶(고문진보)



字나 號가 아닌 성명을 標題로 삼고 가나다 순으로 배열하였다.


賈島(779~843)
자는 浪仙, 또는 閬仙. 范陽(:北京) 사람.
처음에 집을 나가 중이 되어 無本이라 號하였는데, 뒤에 환속하여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長江主簿를 지낸 적이 있어 賈長江이라고도 부른다.
한번은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이란 시구를 지으며 길을 가다가 ‘敲’자를 ‘推’자로 바꿀까 어쩔까 생각하다 京兆尹 韓愈의 행차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유는 그 연유를 듣고 ‘敲’자를 권한 뒤, 그의 문재를 높이 사서 친구가 되었다. 글을 고친다는 뜻의 ‘推敲’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그의 시는 孟郊와 흔히 병칭되어 ‘郊寒島痩’라 일컬어졌으나[그의 시의 범위가 좁고 가난하고 메마른 정조가 담긴 것이 많기 때문임] 俗氣없는 古淡한 맛이 宋代의 시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長江集》 10권이 있다.


賈誼(기원전201~기원전169)
誼는 이름. 前漢의 洛陽(:河南) 사람.
세상에서는 賈生이라 일컬어졌다( 《史記》屈原賈生列傳 ).
가생이 諸子百家의 서에 통달하였다. 말을 들은 漢 文帝가 그를 불러 博士로 삼았다. 이때 가생의 나이 20세로, 가장 나이 어린 박사였다. 천자의 자문이 있을 때마다, 여러 老先生은 대답하지 못했는데 가생은 모두 대답했으므로, 천자는 기뻐하며 1년 안에 大中大夫로 昇任하였다.
그는 曆을 고치고, 服色(: 의복이나 거마의 색)을 바꾸며, 법도를 정하고, 예악을 일으키기를 奏請하였다., 周勃·灌嬰·張相如 등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조정에서 쫓겨나 長沙王의 太傅가 되어, 〈治安策〉을 올렸다. 몇 년 후, 懷王이 낙마하여 죽음을 슬퍼하여 哭泣하기 1년여에 졸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 후에 賈太傅라 불렀다.
經世家이며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楚辭계통의 賦家로서도 유명하다. 〈過秦論〉은 〈치안책〉과 함께 議論文의 대표작이며, 〈弔屈原賦〉·〈鵩賦〉 등은 辭賦의 명작이다. 《新書》 10권이 있다.

江淹(444~505)
자는 文通. 南朝 梁나라 때의 濟陽 考城(:河南省)사람.
宋·齊·梁 세 왕조를 섬기어 양나라에선 金紫先祿大夫 벼슬까지 지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면서도 학문을 좋아하여 일찍부터 文名을 날렸다. 그의 시는 淸麗한 맛이 있고 擬古의 작품이 많다. 恨賦·別賦 등에서는 더욱 정교한 표현과 짙은 감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江文通集》이 있다.


高騈(821~884)
자는 千里. 唐 幽州(:河北省) 사람.
젊어서 힘이 좋고 무예에 뛰어났다.
朱叔明을 섬겨 府의 司馬, 侍史大夫를 지냈고, 西川節度까지 올랐다. 그러나 叛心을 지닌 게 알려져 결국은 信望과 兵權을 모두 잃고, 神仙術에 빠졌다가 잡혀 죽고 말았다.
시를 좋아하여 기발한 표현으로 秀作을 남기고 있다.

 


孔稚圭(447~501)
자는 德璋. 남북조시대 南齊의 문인. 제나라 明帝 때에 南郡의 태수가 되었다.
인품이 청렴하고 淡泊하였다. 문학을 좋아하며, 세상의 일을 싫어하고, 홀로 술마시기를 즐겼다. 정원의 풀을 베지 않아 풀 속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림을 두고 “나는 저 개구리 울음소리를 음악으로 삼는다.”라고 말하였다.한다.
출사하여 都官尙書가 되었다가 太子詹事散騎常侍까지 올랐다.
55세로 죽었는데, 그의 〈北山移文〉은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高適(702~765)
자는 達夫 또는 仲武. 河北省 滄州 사람.
젊어서는 세상일에 얽매임 없이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였으나 官運이 좋아 哥舒翰의 書記로부터 시작하여 劍南·劍西 절도사, 刑部侍郞 등을 지냈고, 勃海縣侯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唐나라 시인 중 벼슬은 가장 현저하였다. 하겠다. 그는 군사관계로 변경에 오래 머물렀으므로 詩도 자연 邊塞를 詩題로 한 것이 많다. 청년시절에는 오로지 관직에 전념하였으나 50세가 되면서 비로소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의 시에는 宏放高壯한 기개가 보이며 岑參과 시풍이 같은 무리라 하겠다.
《高仲武集》10권이 있고, 또 당시 사람들의 詞華集인 《中興間氣集》 2권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歐陽修(1007~1072)
자는 永叔. 호는 醉翁·六一居士. 廬陵(:江西省 吉安) 사람. 북송 초기의 뛰어난 문학가이며 정치가.
進士가 된 뒤 樞密副使, 參知政事 등을 지내다가 太子少師로 致仕하였고, 시호를 文忠公이라 하였다. 王安石·曾鞏·蘇洵·蘇軾·蘇轍이 모두 그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왕안석의 新法에 반대하면서도 정치개혁을 통한 올바른 정치풍토를 이룩하려 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는 실용적인 개념을 바탕으로 형식적인 수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였다.
시에 있어서는 平淡을 위주로 한 새로운 시풍을 개척하였고, 散文에 있어서는 韓愈와 柳宗元의 古文運動을 계승하여 고문을 확정지어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 되었다. 宋詞가 성행하게 된 데에도 그의 공이 크며, 經學에 있어서도 새로운 학풍을 여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歐陽文忠公集》 153권이 있다.


屈原(기원전343?~기원전277?)
자는 平, 周末 楚의 왕족.
널리 학문을 배워 치란에 밝았으며, 사람을 응대하는 일에 뛰어났으므로, 懷王의 左徒 (:官名)가 되어, 들어와서는 국사를 논하고, 나가서는 빈객을 접대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같은 官에 있던 上官大夫가 이것을 질투하여, 굴원을 참소하니 그 때문에 면직되었다. 그 당시 秦은 張儀를 초에 파견하여 제와 초를 분리시키려 하고 있었다. 장의는 곧 초나라 회왕을 거짓으로 秦나라에 초청하였는데, 회왕은 굴원의 간언을 듣지 않고 진에 갔다가 포로가 되어 객사하였다. 굴원은 한편 멀리 추방되어있으면서도 초나라와 회왕을 못 잊어, 그 마음을 〈離騷〉로 노래하였다.한다.
회왕의 뒤를 이어 頃襄王이 서자, 子蘭이 王尹이 되었다. 자란은 상관대부로 하여금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게 했으므로, 왕은 화가 나서 굴원을 유배시켰다. 굴원은 그 후, 長江을 건너 洞庭湖를 남하하여 沅水·湘水 근처를 방황하면서, 고향 郢都를 그리워하고 유배된 신세를 한탄하면서 많은 賦를 지었다. 그리고 참다못해 마침내 汨羅에 몸을 던져 죽었다(賈誼의 〈弔屈原賦〉 참조). 〈懷沙〉의 부는 죽기 직전에 지은 것이라 일컬어진다. 그밖에 〈九歌〉·〈天問〉·〈卜居〉 등의 諸篇도 굴원의 작이라 일컬어진다. 이 작품들은 모두 情感이 깊고 辭句가 뛰어나게 아름답다.
그리고 漢대에 와서 사람들이 굴원의 작품 형식을 본받아 글을 지어 이른바 漢賦가 발달하게 된다.


盧全(795?~835)
호가 玉川子이고, 당나라 范陽(:北京) 사람.
일찍이 河南의 少室山에 숨어 살며, 벼슬하지 않고 깨끗한 일생을 보냈다. 세상을 풍자하는 시를 많이 지었고, 기괴한 색채를 띤 작품이 많다. 茶의 전문가로 유명하고 韓愈도 그의 시를 높이 샀다. 환관을 풍자하는 시를 쓴 이유로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 《玉川子集》 2권, 《外集》 1권이 있다.


唐庚(1071~1121)
자는 子西. 魯國先生이라 號하였다. 북송 眉州 丹稜(:四川省) 사람.
글을 잘 지었고 進士가 된 뒤 宗子博士가 되었다. 張商英의 추천으로 提擧京畿常平이 되었으나, 장상영이 재상 자리를 물러나자 그도 惠州로 좌천되었다. 곧 上淸太平宮 提擧가 되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죽었다. 정밀한 글로 이름났고, 《唐眉山集》 24권을 남겼다.


陶淵明(365~427)
潛이 이름이고 자가 淵明이라고도 하고, 이름이 元亮(또는 字)이라고도 한다. 私諡를 靖節이라 하여 정절선생이라고도 불렸다. 東晉 때 瀋陽 柴桑(:江西省 九江) 사람. 晉나라 大司馬 陶侃의 증손이라고도 한다.
젊어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시문을 잘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벼슬을 하다 彭澤縣令이 되었는데, 마침 郡督郵가 시찰을 나와 밑의 사람들이 도연명에게 관복을 입고 나와 만나라고 하자 “나는 5斗米 때문에 허리를 꺾을 수는 없다.”라고 하며 그날로 사표를 내고〈歸去來辭〉를 읊으며 전원으로 돌아갔다 한다.
이후로 그는 전원에 파묻혀 술을 벗하며 詩로 한평생을 보냈다.
그의 시는 자연 속에서 체험하는 정감과 시골 생활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중국 시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놓은 기념비적 작가이며, 본격적인 自然詩는 그에게서 비롯된다. 謝靈運의 시가 자연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데 힘쓴 데 반하여 도연명은 자기 속에 일단 자연을 융화시킨 다음 자신과 융화된 자연을 시로 재생시켰다. 그가 후세 중국 문학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陶靖節集》 4권이 있다.


杜牧(803~852)
자는 牧之, 호은 樊川. 晩唐의 京兆(:長安)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才名이 있었다.
진사에 급제한 후, 監察御史·宣州의 團練判官·刺史 등을 역임하고 中書舍人에 이르렀다.
詩聖 杜甫를 大杜(또는 老杜라고 함)라 하는 한편 그를 小杜라 불렀고, 두보와 함께 二杜라 불리기도 하였다.
만당의 시인으로는 드물게 높은 기개를 지녀, 천하의 대사와 고금의 성패를 즐겨 논하였다. 그의 작품은 표현이 호방하면서도 아름다운데, 특히 〈阿房宮賦〉는 걸작이다. 또 그의 〈山行〉과 〈江南春〉 등 사람들에게 膾炙되는 명시도 많이 지었다.
《樊川文集》 20권, 《外集》 1권이 있다.


杜甫(712∼770)
두보는 당나라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보통 李白을 詩仙, 두보를 詩聖이라 하며 흔히 ‘李杜’라 부르고 있으나 후세 중국 문학에 끼친 영향은 오히려 이백보다 크다고 하겠다.
자는 子美. 본디 襄陽(:湖北省) 사람이나 할아버지 때 하남성 鞏縣으로 옮겨왔다. 40세까지 방랑이 그의 주된 생활이었으며[남으로 吳·越, 북으로 齊와 趙에 이르렀으며 30세를 전후하여 이백과 사귈 때는 그와 함께 梁·宋·齊·魯를 돌아다니며, 이른바 ‘携手同游, 醉眠共被’하였다. 그러나 이백보다 11세나 젊었다], 40세가 되어서 長安에 이르러〈三大禮賦〉를 올려 玄宗을 감탄시켰으나 중히 쓰이지 못하였다. 安祿山의 난 때는 賊中으로부터 도망하여 鳳翔에 이르러 肅宗을 見하고 곁에서 일을 도왔으나 얼마 못 가서 房琯의 일로 말미암아 華州로 폄적되었다. 이 뒤부터 관직에 마음이 없어 秦州·同谷 등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成都로 돌아왔다. 성도에서 舊友 劍南節度使 嚴武에게 의탁하여 한 칸 草屋을 짓고 얼마 동안을 보냈다. 이때 檢校工部員外郞으로 엄무를 도왔으매 흔히 杜工部라고 부른다. 엄무가 죽은 뒤 성도로부터 夔州로 옮겨 2년을 지내고 다시 湖南으로 갔으며 耒陽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일생을 유랑하였으나 심후한 천성이 여러 가지 현실을 접하면서 그 감회를 위대한 시로 써내게 되었다. 흔히 그를 사실적인 사회시인이라 말한다. ‘殘羹與冷炙, 到處潛悲辛’이란 시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의 생활이 지극히 곤궁했으므로 그의 시도 침울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는 民生疾苦, 사회불평, 忠君愛國과 당시의 현실을 그대로 시로 읊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를 ‘詩史’라고도 부른다. 그가 陝·蜀·湖南 등의 지방을 유랑하던 12년 동안의 생활은 특히 비참하였고, 그때의 그의 심령상의 모든 것이 시로 표현되었다. 그가 스스로 ‘語不驚人死不休’라 하고 또 ‘老來漸於聲律細’라고 했듯이 그의 시를 쓰는 기교도 더욱 성숙해졌으며 唐代의 각종 詩體를 거의 모두 시험하였다. 그의 시는 律詩와 樂府가 가장 아름답고, 古體와 배율도 대단히 훌륭한 것이 많으나 絶句만은 그다지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그는 長安·杜陵에 살았으므로 少陵野老 또는 杜陵布衣라 자칭했고, 老杜라고도 부른다. 《杜工部集》25권이 있다.


馬存(? ~1096)
자는 子才. 북송 樂平(:江西省 鄱陽縣 부근) 사람. 徐積의 문인으로 진사가 된 뒤 觀察推官을 지냈다. 그의 시는 雄渾豪放한 맛이 있고 蟬聯體의 시를 잘 지었다.


梅堯臣(1002~1060)
자는 聖兪. 북송의 宣城(:安徽省) 사람. 선성은 옛날에 宛陵이라고도 불러 梅宛陵이라고 흔히 불렀다.
河南의 主簿에서 시작하여 國子監直講·尙書都官員外郞 등의 벼슬을 하였다. 蘇舜欽과 함께 시로 유명하여 ‘蘇梅’란 칭호가 있었고, 歐陽修의 詩友였다. 그의 시는 평담하고 소박하며 당시 사회상도 반영하려고 노력하여 구양수와 함께 宋詩의 혁신에 크게 공헌하였다. 《苑陵集》 60권이 있다.


孟郊(751~814)
자는 東野. 당나라 湖州 武康(:浙江省) 사람. 젊어서부터 嵩山에 숨어 살았다. 韓愈와 친교가 있었고, 50세가 다 되어 진사에 급제하여 溧陽(:江蘇省) 縣尉가 되었다. 대체로곤궁한 일생을 보내어, 그의 시에는 고난과 불평이 담긴 것들이 많다. 그러나 문장은 平庸하고 淺俗함을 피하고 瘦硬함을 추구하였다. 五言詩를 특히 잘 지어 賈島와 함께 이름을 날려, 흔히 苦吟詩人이라 일컬어진다. 《孟東野集》 10권이 있다.


文天祥(1236~1283)
자는 宋瑞 또는 履善. 호는 文山이었고, 남송 吉州 廬陵(:江西省) 사람.
진사가 된 뒤 竷州知事 등을 지냈고, 恭帝의 德祐 원년(1275)에 元나라 군대가 쳐들어오자 右丞相으로서 천자를 도와 항쟁에 나섰다. 元軍에 잡혔다가 도망하여 福州에서 丞相이 되었고 다시 원군과 싸우다 循州로 도망하였다. 衛王 밑에서 少保로 信國公에 봉해졌으나 潮陽에서 원군에게 잡히어 끝내 굴복하지 않아 3년 뒤(1283)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가 죽기 전에 지은 〈正氣歌〉가 특히 유명하며, 《文山集》 21권, 《文山詩史》4권이 세상에 전한다.


班婕妤(기원전 7년 전후)
婕妤는 女官 이름. 前漢 左曹越騎校尉 班況의 딸. 젊어서 才學이 있었고, 후궁으로 들어가 成帝의 총애를 받아 婕妤가 되었으나 뒤에 趙飛燕 때문에 성제의 사랑을 빼앗겼다. 첩여는 太后의 長信宮에서 지내다 성제가 죽은 園陵을 돌보았다. 〈怨歌行〉은 그녀가 사랑을 잃은 슬픔을 읊었다는 명작이다.


白居易(772~846)
자는 樂天, 호는 醉吟先生 또는 香山居士라 하였고, 당나라 太原(:山西省) 사람이나 뒤에 下邽(:陝西省 渭南)으로 옮겨 살았다.
진사가 된 뒤 秘書省校書郞·左拾遺·左贊善大夫등의 벼슬을 지냈고, 元和 10년(815) 上書하여 得罪하고 江州司馬로 쫓겨났다. 뒤에 杭州·蘇州 刺史를 거쳐 文宗 때 刑部侍郞·河南尹·太子少傅가 되었고 馮翊縣開國侯에 봉해졌으며, 845년 刑部尙書로 致仕하였다. 그의 산문은 정세하고도 표현이 절실하였고, 시는 쉬우면서도 유창하여 일반 사람들이 널리 좋아하였다. 元稹과 唱和하여 그들의 시체를 흔히 ‘元白體’라 부르며, 劉禹錫과도 사귀어 ‘劉白’이란 호칭도 있었다. 그는 시란 정치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모순을 고발하는 풍유시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樂府 등 수 많은 백성의 생활을 반영하고 정치의 모순을 드러내는 시를 썼다. 그는 서정에도 뛰어나 〈琵琶行〉·〈長恨歌〉를 비롯한 작품이 세상에 널리 유행하였다. 《白氏長慶集》71권이 있다.


范仲淹(989~1052)
자는 希文, 북송의 蘇州 吳縣(:江蘇) 사람.
經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진사에 급제하여 仁宗 때에 參知政事가 되어 정치개혁을 꾀하였다.
송대 최고의 명재상으로, “ 선비는 천하의 근심은 제일 먼저 근심해야 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누려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岳陽樓記〉에도 잘 나타나 있다. 皇祐 5년에 64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시호는 文正, 楚國公에 追封되었다. 《政府奏議》 2권, 《范文正公集》 25권이 있다.


謝薖(?~1133)
자는 幼槃, 호는 竹友. 북송 臨川(:江西省) 사람. 謝逸의 동생으로, 修行에 뛰어났었으나 진사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呂本中은 이들 형제를 江西詩派에 넣고 있으나, 黃庭堅과는 달리 遠趣가 있다. 《竹友集》10권과 《竹友詞》 1권을 남겼다.


謝靈運(385~433)
南朝 송나라 陳郡 陽夏(:河南省 太康) 사람. 謝玄의 손자로 康樂公을 襲封받아 흔히 謝康樂이라고 부른다. 일찍부터 동생 謝惠連과 文名을 날렸다. 永嘉太守·侍中·臨川內史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송나라에 대해 모반하다 잡혀 죽었다. 그는 귀족 출신답게 사치스런 생활을 하며 산수를 유람하기 좋아하였다. 그의 유람에는 항상 길을 닦고 물건을 나르는 從者가 수백 명이나 되었고, 산수를 대하면 늘 그 勝景을 시로 그려냈다. 그의 시는 자연경물의 묘사가 세밀하고 정교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룩하였으며, 중국 산수시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다. 다만 지나치게 형식을 추구한 듯한 흠이 느껴진다. 《謝康樂集》 8권이 있다.


司馬光(1019~1086)
자는 君實. 세상에서 涑水先生이라 불렀으며, 북송 陝州 夏縣 涑水鄕(:山西省)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20세에 진사가 된 뒤 端明學士·知永興軍 벼슬을 지냈고, 神宗 때엔 御史中丞이 되었으나, 王安石의 新法에 반대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哲宗이 즉위하자 門下侍郎·尙書左僕射로 신법을 개정하였으나 8개월 만에 죽었다. 太師溫國公에 追贈되고 시호를 文正公이라 하였다. 《資治通鑑》 290권이 명저로 알려졌고, 시문에도 뛰어나 《傳家集》 80권을 남기고 있다.


謝枋得(1226~1289)
자는 君直, 호는 疊山. 弋陽(:江西省) 사람.
宋末 文天祥과 함께 진사가 되어, 江東提刑 등을 거쳐 江西招諭使知信州가 되었다. 信州까지 元兵에 함락되자 처자는 모두 원병에게 잡혀갔고 자신은 이름을 바꾸어 福建 일대에 숨어지냈다.
뒤에 원나라 世宗에게 잡혀 벼슬을 강요당하자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었다.
문인들이 文節이라 私諡하였다.
그는 陸象山 계열의 학자로 여러 가지 학술적인 저술도 남겼다.
그의 시에는 옛날을 생각하며 현재를 슬퍼하는 침통한 것이 많으며, 《疊山集》 5권이 있다.


謝脁(464~499)

자는 玄暉. 남북조시대 南齊의 陳郡 陽夏(:河南省 太康)사람.
晉나라 謝安의 동생으로 귀족 출신이며, 齊나라에선 宣城太守를 지내어 謝宣城이라고도 부른다. 뒤에 상서이부랑 벼슬을 하였으나 모함을 받아 옥에서 죽었다.
그는 자연풍경을 많이 읊었고, 淸麗秀逸池 풍격을 지녔다. 그의 詩는 특히 서정에 뛰어났고, 이미 唐代의 풍격을 어느 정도 갖추 오언시의 律體化에 크게 공헌하였다. 〈謝宣城集》 5권이 있다.


石介(1005~1045)
자는 守道. 兗州 奉苻 사람.
과거에 급제하여 南京推官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곧 물러나 徂徠山 아래에서 젊은이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뒤에 國子監直講, 太子中允을 지내기도 하였는데, 뜻과 행실이 곧기로 알려졌다.
송대 성리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며 《徂徠集》 20권을 남기고 있다.


釋貫休(832~912)
俗姓은 姜, 자는 德隱. 당나라 5대 佛僧으로 蘭谿(:浙江省 사람).
뒤에 禪月大師란 호가 내려졌고, 서화와 시로 그 시대에 유명하였다. 樂府와 古律에 뛰어났고 《禪月集》 25권이 있다.


聶夷中(837~?)
자는 坦之. 당나라 河東(山西省 永濟 부근) 사람.
진사가 된 뒤 겨우 華陰縣尉 등을 지냈으나 시종 가난하였다. 따라서 시국의 어려움, 백성 특히 농민의 곤경을 동정하는 내용의 시를 많이 썼다. 특히 악부체에 뛰어났다.


蘇過(1072~1123)
자는 叔黨. 송나라 眉山(:四川省) 사람. 蘇軾의 아들로 글뿐 아니라 서화에도 뛰어나 사람들이 小坡라 불렀다. 兵部右承務郞·穎昌府 朗城縣 知事·中山府 通判 등을 지냈다. 소식이 英州·惠州에서 시작 儋耳·廉州·永州 등지로 귀양살이 다닐 적에는 홀로 따라다니며 시중들었다. 소식이 죽은 뒤에는 穎昌에 자리잡고 살며 그곳을 이름 짓고 所斜川이라 이름짓고 斜川居士라 自號하였다. 《斜川集》 5권을 남겼다.


蘇庠(1100 전후)
자는 養直. 호는 眚翁. 북송에서 남송에 걸쳐 활약한 문인.
일생을 벼슬하지 않고 살았으나 그의 시는 蘇軾이 李白에 비겼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廬山에서 80여세에 壽를 마쳤다. 《後湖集》 10권과 《後湖詞》 1권을 남겼다.


蘇洵(1009~1066)
자는 明允. 북송의 眉山 사람. 老泉이 호이다.
27세에 비로소 발분하여 학문을 배워, 六經·百家의 書에 통하였다. 秘書省 校書郞이 되어, 宋初 建隆 이래의 禮書를 저술하였다. 또 姚闢 등과 함께 《太常因革禮》 100권을 완성하고 졸하였다.
노천은 성품이 순박하고 정직하며 才氣에 넘쳤다. 학문은 儒에 치우치지 않고, 고대의 縱橫家(:외교론)를 좋아했으며, 예언자 같은 達識이 있었다.
漢의 賈誼로 자처하여, 그 문도 論策(:정치나 교육에 대한 의견이나 계책을 서술한 문장)에 뛰어났다. 〈權論〉·〈衡論〉·〈審勢〉·〈審敵〉 등이 대표작이다.
〈名二子說〉은 그의 뛰어난 두 아들의 이름을 軾과 轍이라 지은 아버지의 마음을 서술한 것이다. 이들 父子를 三蘇라 하고, 형제를 二蘇라 한다. 삼소 모두 唐宋八大家에 들어가는 古文家이다.


蘇軾(1036~1101)
자는 子瞻, 호는 東坡. 북송 眉山(:四川省) 사람으로 아버지 蘇洵, 아우 蘇轍과 함께 三蘇라 불린 문호임.
嘉祐 2년(1057) 진사가 되어 大理評事·鳳翔府簽判 등을 지냈다. 왕안석의 신법에 반대하여 神宗에게 그 불편을 상소한 끝에, 杭州 通判으로 湖州·黃州·惠州 등으로 옮겼다.
哲宗이 즉위하자 朝奉郎으로 불러들인 뒤 禮部侍郞·中書舍人·翰林學士 겸 侍讀 등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는 다시 죄명으로 지방관으로 쫓겨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紹聖 초(1094)에는 다시 신법을 행하는 바람에 혜주·昌化 등지로 쫓겨났다.
徽宗 때 大赦로 朝奉郞이 되고 다시 成都玉局觀 提擧가 되었다.
죽은 뒤 시호를 文忠이라 하였다. 그는 산문에 있어서나 詩·詞에 있어 호방하고 준일한 작풍으로 송대문단을 대표하였고, 서화에도 능하였다.
‘蘇門四學士’를 비롯한 수많은 후진을 발전하게 하였고, 수많은 학술적인 저술 이외에도 《東坡全集》115권과 《東坡詞》 1권을 남기고 있다.


邵雍(1011~1077)
자는 堯夫. 북송 范陽(:河北省) 사람.
평생을 河南省 蘇門山 百泉 가에 숨어 살며 공부에 전념하여 《易》과 圖書象數之學에 一家를 이루었다. 그는 자기가 사는 곳을 安樂窩라 부르고 安樂先生이라 自號하기도 하였다. 죽은 뒤 시호를 康節이라 하였다.
그의 시는 철학사상이나 도덕관을 읊은 작품들로 독특한 경지에 이르고 있다.
많은 학술적인 저술 이외에도 《伊川擊壤集》 23권이 있다.


蘇轍(1039~1112)
자는 子由, 蘇軾의 아우이며, 아버지 蘇洵 및 형과 함께 古文에 있어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열아홉 살 때 소식과 함께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여 파란많은 벼슬살이를 하였다. 哲宗 때엔 右司諫을 거쳐 御史中丞·尙書右丞·門下侍郎 등의 벼슬을 하였고, 徽宗 때 大中大夫로 致仕하였다.
《欒城集》 50권을 비롯하여 많은 문집과 《詩集傳》 등의 여러 가지 학술적인 저술도 남겼다.


宋之問(656?~712)
일명 少連, 자는 延淸. 汾州(:山西省)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文才로 알려졌으며 五言詩를 가장 잘 썼다.
그러나 사람됨이 비속하여 則天武后 때 무후의 佞臣 張易之에게 아첨하여 그 사람 대신 시를 써주었을 뿐 아니라 溺器까지 받쳐들었다고 한다. 中宗 때 修文館直學士가 되었고 睿宗 때 폄적되어 欽州에 가서 그곳에서 오래지 않아 賜死되었다. 그는 인품이 비록 깨끗하지 못하였으나 初唐 때 沈全期와 함께 文名을 날리어 흔히 ‘沈宋’이라 불렸고, 近體詩의 완성에 특히 큰 공헌을 하였다.


僧淸順(? ~1090?)
자는 怡然. 북송 西湖의 詩僧.
서호의 北山에 僧道潛과 함께 살았고 蘇軾의 만년의 詩友였다.
그의 시에는 佳句가 많으며, 왕안석도 매우 좋아하였다고 한다.


沈約(441~513)
자는 休文. 남조 梁나라 吳興 武康(:浙江省) 사람.
宋·齊 두 나라를 섬긴 뒤 梁武帝를 도와 벼슬이 尙書令에 이르고 建昌縣侯에 봉해졌다. 죽은 뒤 시호를 隱侯라 하였다.
학문이 깊은 위에 시율에 정통하여 《四聲譜》를 지어 四聲八病등의 원칙을 내세움으로 써 詩體의 새로운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의 시는 謝脁·王融 등과 함께 聲律에 주의를 기울여 문학사에서 ‘永明體’라 부른다. 후세 근체시의 발전은 그에게 힘입은 바 매우 크다.
《沈隱侯集》 100권이 있다.


楊賁(生卒 미상)
당 德宗(780~804) 때 사람[《正宗》注].
天寶 3년(744)에 과거에 급제하였다.도 한다 [《唐詩紀事》]. 《唐書》에도 그의 傳은 없다.

呂大臨(?~1090?)
자는 與叔. 북송의 京兆 藍田(:陝西) 사람으로, 세상에서는 南田先生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張橫渠에게서 배웠는데, 선생이 세상을 버리자, 伊川·程明道 二程子에게 배웠다. 경서에 밝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謝良佐·游酢·楊時와 함께 '程門四先生'이라 일컬어진다.
大忠·大防·大鈞·大臨의 사형제 모두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玉溪集》 20권과 《玉溪別集》 10권이 있다.


吳融(850? ~901?)
자는 子華. 당나라 山陰(:浙江省) 사람.
진사가 된 뒤 韋昭가 蜀을 토벌할 때 書記였으나, 죄를 짓고 荊南(:湖北)을 유랑하였다. 뒤에 다시 左補闕을 시작으로 翰林學士, 中書舍人을 거쳐 戶部侍郞·翰林承旨를 지냈다. 《唐英歌詩》 3권을 지었다.


吳隱之(?~413)
자는 處默. 東晉 漢陽 鄄城(:山東省) 사람.
학문에 뛰어났고 일찍부터 맑은 절조로 유명하였다.
廣州는 물산이 풍부하여 자사들이 私利를 취하자, 조정에선 吳隱之를 광주자사에 임명하였다. 그는 부임하며 여기에 실린 〈貪泉〉시를 읊어 절조를 나타내고 깨끗한 벼슬살이를 하였다. 中軍에 올랐고 先祿大夫의 金章紫緩을 받았다.


王轂(900년 전후)
자는 虛中. 당 宜春(:江西省 吉安縣) 사람.
진사가 된 이래 唐末에 尙書郞中으로 치사하였다. 그의 문집 3권이 전한다.

 


王勃(650~676)
자는 子安. 唐의 太原(:山西)사람.
楊炯·盧照鄰·駱賓王과 詩名을 나란히 하여 唐의 四傑이라 일컬어진다. 隋의 大儒인 文中子 王通의 자손이다.
麟德 초에 對策(:과거에서 정치 또는 經義에 관한 문제를 내어 답안을 쓰게 하는 일)으로 朝散郞에 임명되고, 후에 沛王이 그 이름을 듣고 王府의 修撰(:역사를 편집하는 관직명)에 임명하였다. 당시 투계놀이가 성행했는데, 勃이 장난으로 쓴 그 檄文이 고종의 노여움을 사 劍南(:四川)으로 쫓겨났다. 후에 죄를 지은 官奴를 숨겼다가 그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하여 죽였으므로, 주살을 용서받고 除名(:관직에서 물러남)되었다. 그때 아버지 福畤도 좌천되어 交趾의 令이 되었으므로, 아버지를 찾아가던 도중에 滕王閣의 잔치에 참여하여 〈滕王閣序〉 및 시를 지었다.
그 후 바다를 건널 때 물에 빠진 것이 원인이 되어 죽었으니, 30세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종래 발은 貞觀 2년(648)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왔지만, 〈春思賦〉에 스스로 咸亨 2년 22세라 서술하고 있음에 따르면 650년이 된다.
《王子安集》 30권이 있다.


王安石(1021~1086)
자는 介甫, 호는 牛山. 江西省 臨川 王臨川이라고 부르고 뒤에 荊國公에 봉해져 王荊公이라고도 부른다. 북송 때의 뛰어난 정치가이며 문학가요 사상가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일찍이 문명을 날렸다. 仁宗 때 진사가 되었고, 嘉祐 3년(1058)에는 前言書를 올리어 정치개혁을 주장하였고, 神宗 熙寧 2년(1069)에 參知政事가 되고 이어 재상이 되자, 곧 靑苗·均輸·市易·免役·農田水利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신법을 적극 추진하였다. 司馬光·蘇軾 등 보수파의 반대로 격렬한 정쟁을 벌였으나 결국 신법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재상을 그만둔 뒤 江寧(:지금의 江蘇省 南京)에 퇴거하다 죽었는데, 시호를 文公이라 하였다.
시는 당시의 사회현실을 반영하는 작품을 비롯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고, 산문에 있어서도 이른바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친다. 그밖에 《周官新義》 등 학술적인 저술도 많으며, 《王臨川文集》 29권이 전하고 《唐百家詩選》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王禹偁(954~1001)
자는 元之. 북송 濟州 鉅野(:河北省) 사람.
진사가 된 뒤 太宗 때 右拾遺 直史館을 비롯하여 左司諫 知制誥·大理寺判官 등을 거쳐 翰林學士 등을 지낸 뒤 黃州刺史로 나갔다가 蘄州로 옮긴 뒤 죽었다.
그는 형식적 수식을 존중했던 宋初의 西崑體를 반대하고 시는 杜甫·白居易, 文은 韓愈·柳宗元을 존중하였다. 작풍이 평이하고도 소박했으며 당시의 정치 사회를 풍자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小畜集》 20권, 《承明集》 10권, 《集議》 10권, 《詩》 3권이 있다.


王維(701~761)
자는 摩詰. 原籍은 山西省 太原 사람이나 아버지를 따라 山西省 永濟에 옮겨와 살았다.
그는 조숙한 작가로 9세 때부터 글을 썼다. 〈洛陽女兒行〉은 16세 때의 작품이며 〈桃源行〉은 19세 때의 작품인데 모두 이미 성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당나라 시인 중 田園詩派를 대표하며 孟浩然ㆍ儲光羲ㆍ韋應物·柳宗元 등과 맥을 같이하는데 학자들은 모두 그를 첫머리에 꼽는다.
21세에 진사가 되었다. 안녹산의 난 후에는 사상이 일변하여 점점 불교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뒤에 벼슬이 尙書右丞에까지 이르렀으나 한적한 생활을 좋아하여 만년엔 독서를 즐기었다.
그는 검소한 성품으로 무늬 있는 옷을 입지 아니하고 처가 죽은 뒤에는 再娶하지 않았다.
그 후 輞川에 있는 산수가 奇勝한 藍田別墅에 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는 多才多藝한 사람으로 시를 잘할 뿐 아니라 그림도 잘 그려 蘇東坡가 ‘詩中有畵, 畵中有詩’란 유명한 詩語를 남기게 하였다.
五言律詩와 五言絶句를 가장 잘 지었으며, 망천에 있을 때는 특히 오언절구를 많이 썼는데 그 짤막한 20개의 글자 속에 悠然神往하는 아름다운 경지를 담았다.
그는 원래 富貴公子였으나 뒤에 산수에 정을 붙인 까닭에 시 중에 恬靜淡遠한 정조가 넘치며 또 그런 柔麗秀美한 글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史鑑類評》에 그의 시를 ‘上林春曉, 芳樹微焟’이라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다. 그는 安史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나 현실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그의 시 가운데 시대상을 반영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唐王右丞集》 6권이 전한다.


王褒(?~기원전 61)
자는 子淵, 蜀(:四川) 사람.
漢의 宣帝 때에 益州의 刺史(:知事) 王襄이 王褒를 불렀다. 선제의 명에 의해 王褒는 〈聖主得賢臣頌〉을 지어 올려, 張子僑 등과 함께 待詔에 임명되었다. 方士(:주술사)가 ‘익주에 金馬碧雞의 신이 있다.’라고 말해서, 선제가 王褒에게 그 신을 제사지내게 했는데, 도중에 병사하였다.


王翰(687~726)
《舊唐書》에는 王澣으로 되어 있다. 자는 子羽로 山西省 晉陽 사람.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이 通事舍人·駕部(:馬驛을 管掌)員外에 이르렀다.
仙州(:河南省 葉縣)에서 別駕를 지낼 때 매일 才士와 호걸과 더불어 음주·수렵을 즐겼다. 뒤에 湖南·道州의 司馬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특히 〈凉州詞〉가 유명하며 《王翰集》 10권이 있다.


王羲之(321~379)
자는 逸少. 13세 때에 晉의 周顗를 알현하였다. 주의는 희지를 異才라 하였다.
자라남에 따라 언사가 명백하며 의리에 통하고 절조가 굳다는 칭찬을 들었다. 특히 草書와 隷書를 잘 써서 고금의 제일이다. 〈蘭亭集序〉는 문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필적이 비할 데 없는 명필로서, 오늘날까지도 書家의 法帖이 되고 있다.
단지 유감은 현존하는 것은 당대의 模刻으로 진필이 아니라는 점이다.
출사하여 右軍將軍·會稽內史를 지냈으므로, 세상에서는 王右軍이라 칭하였다.
일소의 생졸년에는 제설이 있어 일정하지 않다. 羊欣의 〈筆陣圖〉에서 말하는 것처럼 永和 9년에 33세였다면 앞에 게재한 대로이지만, 이밖에도 永嘉 원년(307) 또는 泰安 2년(303)에 태어났다는 설 등이 있다.


元結(723~772)
자는 次山. 唐의 武昌(:湖北) 사람. 魯山의 令 德秀의 族弟(:사촌 동생)이다.
元結은 어렸을 때부터 재기가 남달리 뛰어났으며, 17세 때에 학문에 뜻을 두어 天寶 12년에 진사가 되었다. 安祿山의 난이 일어났을 때 蘇元明의 추천에의해서 肅宗에게 출사하였다.
〈時議〉 세 편을 올려 金吾參軍兵曹로 승진되고, 監察御史를 겸하여 山東西道의 節道參謀가 되었다. 史思明의 난 때에 元結은 泌陽에 주둔,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15개의 성을 온전히 지켰다. 그 공으로 감찰어사 裏行(:定員外)으로 직위가 올라갔다. 代宗이 즉위하자 벼슬을 사퇴하고 樊川의 물가로 돌아가, 著作郞을 제수받아 책을 저술하였다. 禮部侍郎이 추증되었다. 元結은 당시의 경박한 시를 미워하여, 風雅한 古道(:옛날 성현의 도)로 돌아가기를 제창했으며, 문은 대구를 중시하는 華美한 체를 배척하였다.《篋中集》은 이러한 견지에서 당시의 시를 편집한 것이다. 그 序에 그의 문학과 시에 대한 견식이 서술되어 있다. 《次山集》 외에 《元子》 10편, 《文編》 등의 저술이 있다.

元鎭(779~831)
자는 微之. 당나라 河南(:河南省 洛陽) 사람. 열다섯 살에 진사가 된뒤 拾拾遺 등을 거쳐 監察御史가 되었으나, 정쟁에 말려들어 通州司馬로 쫓겨났다. 그러나 중도에 변절하여 宦官에게 붙어 工部侍郞이 되었고, 穆宗 때는 裴度와 함께 재상 자리에 올랐고, 武昌節度使가 되어 죽었다. 백거이와 친했고 문학이념도 비슷하여 현실을 풍자하는 新樂府運動을 전개하여 세상에선 백거이와 함께 ‘元白’이라 불렀다. 시의 표현이나 내용이 백거이에 매우 가까우나 모든 면에서 백거이보다는 한 수 아래이다. 《元氏長慶集》100권, 《小集》 10권이 전한다.


魏野(960∼1019)
자는 仲先, 호는 草堂居士. 북송의 隱逸詩人.
벼슬을 멀리하고 陝州 東郊에 樂天洞을 마련하고, 琴을 벗하여 평생을 보냈다. 죽은 뒤 秘書省 著作郞에 추증되었다. 精苦하여 시를 지었고 俗氣가 없었으며, 警拔한 구절이 많았고, 唐人詩風이 있어 林和靖과 병칭되었다. 그의 시집 《草堂集》은 뒤에 《鉅鹿東觀集》 10권으로 전하여지게 되었다.


韋應物(737~790?)
長安 사람. 젊었을 적에는 의협을 좋아했고 三衛郞으로 玄宗을 섬겼다. 뒤에 滁州·江州·蘇州 등지의 刺史를 지내어, 韋江州 또는 韋蘇州라고도 부른다.
그의 시는 전원풍물의 묘사에 뛰어났고,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담박하다. 간혹 당시의 민생질고를 반영하는 작품도 썼다. 陶淵明을 좋아하여 그를 의작한 작품이 적지 않고, 王維·孟浩然·柳宗元 등과 함께 자연을 노래한 작가를 대표한다. 《韋蘇州集》 10권이 전한다.


劉邦(기원전 257~195)
자는 季. 漢나라 開國 황제인 高祖. 본디 沛國(豐邑:江蘇省 沛縣) 사람이어서, 뒤에 沛公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본디 泗水 가의 亭長(:里長)이었으나 秦末에 起義하여 項羽와 함께 秦을 쳤다. 항우는 패공을 漢王에 봉했으나, 뒤엔 항우와 싸워 천하를 통일한 뒤 漢이라 하고 咸陽에 도읍을 정하였다. 12년 천자로 세상을 다스렸고, 〈大風歌〉 이외에도 〈鴻鵠歌〉가 전한다.


劉伶(?~300?)
자는 伯倫. 晉의 沛國(:江蘇) 사람이다. 竹林七賢의 한사람으로, 阮籍·嵆康 등과 사귀었으며, 술을 몹시 즐겼다. 평소 鹿車(:작은 수레)를 타고 한 병의 술을 가지고 다녔는데, 삽을 멘 하인 한 사람을 따르게 하여 어느 곳에서든 자신이 죽거든 그 자리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한다. 建威參軍을 지냈으므로 劉參軍이라 불렀다.


柳永(1045 전후)
原名 三變, 자는 耆卿. 崇安(:福建省) 사람. 형제의 排行이 일곱 번 째라 柳七이라고도 부르고, 진사가 된 뒤 屯田員外郞을 잠시 지내 柳屯田이라고도 부른다. 낭만적이어서 그밖엔 벼슬을 못하고 술과 여자 속에 파묻혀 일생을 보냈다. 그는 詞의 작가로 특히 長調인 慢詞를 창작하여 그의 사는 널리 宋詞 발전에 큰 몫을 하였다. 시는 별로 전하는 게 없으며 詞集으로 《樂章集》이 전한다.


劉禹錫(772~843)
자는 夢得. 당나라 中山 無極(:河北省) 사람, 貞元 9년(793)에 진사가 되어 監察御史를 지냈다.
柳宗元과 함께 정치혁신을 주장하는 王叔文 집단에 들어가 度支員外郞을 지내다, 숙문이 실패하자 朗州司馬로 쫓겨났다. 오랜 뒤에 裵度의 추천으로 太子賓客 등을거쳐 檢校禮部尙書로 벼슬을 마쳤다. 죽은 뒤 戶部尙書가 추증되었다.
그의 시는 통속적이면서도 매끄러웠고 백거이와 친하게 지냈다. 특히 民歌的 작품들은 다른 시인들이 전혀 흉내내지 못할 수준이며, 古文도 잘 지었다. 《劉賓客文集》 〔一名《中山集》〕 30권, 《外集》 10권이 있다.


柳宗元(773~819)
자는 子厚, 당나라 河東(:山西省 永濟) 사람, 진사가 된 뒤 校書郞 등을 지냈다.
順宗 때 劉禹錫 등과 왕숙문의 혁신 정치 집단에 참여하여 禮部員外郞을 지냈으나, 실패하자 永州司馬로 쫓겨났다. 元和 10년(815)엔 柳州刺史로 옮기어져 그곳에서 죽어, 사람들은 그를 柳柳州라고도 부른다.
유종원은 韓愈와 함께 古文運動을 전개하여 흔히 ‘韓柳’라고도 부른다.
그의 산문은 한유의 웅혼함과는 달리 빼어난 맛이 있고,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풍자적인 글과 山水遊記에 특히 뛰어났다. 시는 더욱 한유보다 더욱 세련되어 맑고 빼어난 풍격을 지녔고, 자연 속의 정경을 노래하여 도연명에서 王維·孟浩然·韋應物을 이어 自然詩派로 알려졌다. 그의 시 중에는 淸遠한 한적을 읊은 좋은 시가 많다. 《柳河東集》45권, 《外集》 2권이 있다.


陸龜蒙(?~881?)
자는 魯望이다. 江湖散人, 天隨子, 甫里先生 등으로 號하였다. 당나라 蘇州(:江蘇省) 사람.
학문에 뛰어났고 벼슬은 시작하자 곧 내던지고 松江 甫里(:江蘇省)에 숨어살았다. 피일휴와 함께 사람들은 ‘皮陸’이라 불렀다. 산문에는 당시의 모순을 폭로하는 글이 많으나 시에는 자연 풍경을 노래한 게 많다. 많은 저술과 함께 《甫里先生文集》 20권을 남겼다.


李嶠(644~713)
자는 巨山. 唐初의 趙州 贊皇(:河北省) 사람 어려서부터 문명을 날렸고, 진사가 된 뒤 給事中 등을 지내다, 則天武后의 비위에 어긋나 潤州司馬로 쫓겨났다. 오랜 뒤에 다시 鳳閣舍人이 되었고, 同中書門下三品으로 특진하고 趙國公에 봉해졌다. 현종 때엔 다시 盧州別駕로 쫓겨나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詠物이 많아 정취가 부족하나 崔融·蘇味道 등과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文集》 50권, 《雜詠詩》 12권 등이 전한다.


李格非(1090년 전후)
자는 文叔이고, 濟南 사람으로 정확한 생졸년을 알 수 없다.
송나라 哲宗 때 사람으로 예순한 살을 살았다 한다. 문학보다 經學에 뜻을 두어 《禮記說》 수십만 자를 지은 뒤에 진사가 되었다 한다. 冀州司戶參軍과 禮部員外郎 벼슬을 하다가 만년에 쫓겨났다. 詩文도 잘 지었고, 《문집》 45권을 남기고 있다.


李覯(1009~1059)
자는 泰伯. 북송의 于江(:江西省) 사람으로 세상 사람들이 于江先生이라 불렀다.
문장이 뛰어나고 經學에 통하여, 그에게서 배우고자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이 수백이었다. 皇祐 초에 范仲淹의 추천으로 大學助敎가 되었다. 가우4년, 51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뜻이 높고 밝은 문장을 많이 썼다 하는데, 아깝게도 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다.


李密(?~285?)
자는 令伯. 東晉의 武陽(:四川) 사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개가했으므로 조모의 손에 성장하였다. 효성이 뛰어나, 이를 안 晉의 武帝가 太子洗馬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이밀은 〈陳情表〉를 올려 사양하였다. 무제는 이밀의 효심에 감동하여 노비 두 사람을 내리고, 군과 현의 수령에게 일러 음식물과 의복을 제공하게 하였다. 이밀은 후에 조모의 상을 마친 다음, 출사하여 漢中의 태수로 봉직하였다.


李白(701~762)
자는 태백. 靑蓮居士라 自號하였다.
杜甫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당의 대표적 시인. 先祖 때 隴西 成紀(:甘肅省 天水)에 살다가 죄를 지어 西域으로 옮겼는데 이백은 이곳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아마 胡人인 듯하므로 이백은 혼혈종일 가능성도 있다[당시 그를 가리켜, 눈은 불꽃 같고 입을 벌리면 굶주린 호랑이 같다고 하였다.. 5세 되던 때 온 집안이 四川으로 갔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를 蜀郡 사람이라고도 한다. 또 그 스스로는 隴西(:지금의 甘肅省)布衣라 하고 있다[輿韓荊州書]. 어떤 사람은 이백의 선조는 원래 胡人이었는데 장사하러 四川에 옮겨 왔다고도 말한다.
그의 일생은 낭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했고 재산을 가볍게 여겨 남에게도 상당히 후하였다. 열다섯 살이 되어서는 검술을 좋아하여 널리 제후들의 일에도 간여하였다. 또 일찍이 楊州에 놀러가서는 1년도 되지 못해 황금 3천여 만을 써버렸다 한다. 또 젊어서 사람을 몇 명 죽였으나 거리끼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25세쯤 되던 무렵 蜀을 떠나 長江·漢水·齊·魯 등의 지방을 두루 돌아다녔다. 天寶 초에 장안에 이르러 賀知章의 알선으로 현종을 만나 頌 한 편을 올리어 翰林院에 供奉케 되어, 후세엔 李翰林이라고도 부른다.
한번은 현종이 沈香亭에서 양귀비와 잔치를 벌이고 꽃구경을 하면서 이백을 불러 시를 짓게 하였는데, 이때 지은 것이 바로 〈淸平調〉 3수이다. 그는 벼슬은 하지 못하고, 곧 다시 장안을 떠나 여러 곳을 漫遊하였다. 안녹산이 난을 일으켰을 때는 廬山에 있었는데 永王 李璘의 청을 받아 그를 돕다가 이린의 모반이 실패하자 그도 잡혀갔으나 郭子儀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여 夜郞으로 귀양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그 뒤에 곧장 淸陽(:九江)·宣城·金陵 일대를 유랑하였다. 마지막에는 집안 아저씨뻘 되는 當塗令 李陽冰에게 의지하여 살았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采石磯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술에 취하여 달을 잡으려고 물속에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그는 浪漫詩人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고사도 무척 많아서 일일이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의 시풍은 첫째 의기호매하여 늘 자기 마음대로 글을 써서 宏麗하고 웅위 한 意境을 나타내고 있다. 둘째 情思飄逸하여 시문이 仙人의 말 같아서 사람들을 감탄케 한다 賀知章은 그를 謫仙人이라 불렀다.
또 일생 동안 시국이 뜻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여 시 가운데 頹靡하고 自放한 의취가 엿보인다. 두보가 이백을 읊어 ‘실컷 술마시고 미친 듯 노래부르며 공연히 나날을 보냈으니, 높이 휘날리고 우뚝 솟은 의기는 누구 위해 웅장한가? [痛飮狂歌空度日, 飛揚跋扈爲誰雄]’라 하였다. 《李太白詩》 30권이 전한다.


李斯(기원전284?~기원전208)
楚나라 上蔡 사람.
荀卿에게 帝王之術을 배운 다음 秦나라로 가서 丞相 呂不韋의 눈에 들어 출세길로 들어섰다. 정위 등의 벼슬을 하며 秦始皇을 보좌하였고,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승상이 되어 큰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다. 진시황의 유명한 焚書坑儒 같은 폭정이 그의 제의로 이루어졌다고 하나, 한자의 자체를 小篆으로 통일하여 중국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진시황 때의 詔令과 함께 수많은 表·奏를 지었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泰山·之罘·碣石·會稽·琅琊등에 훌륭한 刻石文도 많이 남겼다. 특히 〈諫逐客書〉 같은 여기에 실린 글은 그의 출세의 발판이 되었던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李紳(780~846)
자는 公垂. 당나라 無錫(:江蘇省) 사람. 진사가 된 뒤 國子監助敎를 지냈고, 武宗때에는 재상이 되었고, 뒤에 淮南節度使도 지냈다. 시호는 文肅이라 하였다. 李德裕·元稹과 함께 ‘三俊’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白居易·元稹과 친교를 맺어 新樂府運動에 참여하여 현실을 풍자하는 많은 작품을 썼다. 〈追昔游集〉이 전한다.


李鄴(曹鄴[816~875]의 잘못)
《唐文粹》엔 〈讀李斯傳〉시를 曹鄴의 작이라 하였고, 《唐詩紀事》에서도 조업이 이 시를 지었다 하였다. 조업은 자가 鄴之, 당나라 桂林(:廣西省) 사람.
진사가 된 뒤 咸通 초(860) 太常博士가 되고 洋州刺史도 지냈다. 사회현실과 서민의 어려운 생활에 대하여 눈을 떴던 작가이며, 《曹鄴集》 1권이 전한다.


李賀(791~817)
자는 長吉. 昌谷(:河南省 宣陽) 사람. 唐室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韓愈·皇甫湜 등에게 인정받았고 沈亞之와 친하게 지냈다. 벼슬은 奉禮郞·協律郞을 지냈으나 27세에 죽었다. 그의 시는 예리한 감각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표현과 상상을 융합시켜 아름답고 신기한 경지를 이루고 있어, 흔히 鬼才라 일컬어진다. 특히 樂府歌行에 뛰어났고, 현실을 풍자하는 작품들도 있다. 전체적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자기의 온 심령을 기울여 시를 쓴 듯하다. 《李長吉歌詩》 4권이 전한다.


李漢(825년경 생존)
자는 南紀.
어려서부터 韓愈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글을 잘 지었다. 剛强한 성품이 한유와 흡사하였는데, 한유는 이것을 좋아하여 사위로 삼았다. 한유가 죽은 다음, 한유의 詩文을 모아 정리하였다.


李華(?~676)
자는 遐叔. 당의 趙州(:河北) 贊皇사람.
大歷 초에 죽었다. 文辭가 화려하고 情調가 풍부한 글을 썼으나, 宏大雄傑한 기상이 부족하였다.


仁宗皇帝(1010~1063)
趙禎. 처음 이름은 受益. 眞宗의 여섯째 아들로 송나라 네 번째 임금.
43년 동안 세상을 다스렸고, 인종은 그의 廟號임.
그의 시대엔 富弼·韓琦·范仲淹·歐陽修등의 명신이 조정에 가득 찼고, 인종 자신도 공검한 위에 백성을 사랑하여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岑參(715~770)
原籍이 河南省 南陽이나 뒤에 荊州·江陵으로 옮겨와 살았다. 四川 嘉州刺史로 있었던 까닭에 岑嘉州라고도 부른다. 成都에서 지내다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악부의 民歌的정신과 어조로 변경의 풍광과 전장의 정경을 잘 읊었다. 高適과 시풍이 비슷하여 흔히 ‘高岑’이라고 부른다. 그의 시는 淸峭超奇한 것이 특징이고 중년에 封常淸의 군대를 따라 新疆에 가 있었으므로 서역 지방에 관한 시가 많은데, 이것들은 특히 豪放挺拔하다.
《岑嘉州集》 18권이 있다.


張轂( 연대 및 何人인지 미상)
《古文大全》에는 張穀으로 되어 있으나, 모두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 책의 〈行路難〉은 《樂府詩集》·《唐文粹》·《張司業集》에 모두 張籍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니, 장적의 잘못일 터이다.


張耒(1054~1114)
자는 文潛, 호는 柯山·宛丘先生이다. 북송 楚州 淮陰(:江蘇省 淸江) 사람.
蘇轍에게 배웠고 蘇軾에게 문재를 인정받았다. 진사가 된 뒤 著作郞·起居舍人·龍圖閣學士 등을 거쳐, 소식과 함께 귀양을 다니다가 徽宗 때엔 太常少卿을 지냈다. 다시 潁州·汝州를 거쳐 陳州 崇福寺 主管으로 있다 죽었다.
시는 백거이를 본받았고 張籍의 악부도 배워, 당시의 사회상을 쉬운 표현으로 반영하기에 힘썼다. ‘蘇門四學士’의 한 사람으로 《宛丘集》 76권을 남겼다.


張夫(1054~1114)
자는 潛, 호는 柯山·宛丘先生이다.
북송 楚州 淮陰(:江蘇省 淸江) 사람. 蘇轍에게 蘇軾에게 문재를 인정받았다. 진사가 된 뒤 著作郞·起居舍人·龍圖閣學士 등을 거쳐, 소식과 함께 귀양을 다니다가 徽宗때 太常少卿을 지냈다. 다시 潁州·汝州를 陳州 崇福寺 主管으로 있다 죽었다.
시는 백거이를 본받았고 張籍의 악부도 배워, 당시의 사회상을 쉬운 표현으로 반영하기에 힘썼다. 蘇門四學士 중의 한 사람으로 《宛丘集》 76권을 남겼다.


張蘊古(?~ 631)
당나라 太宗 때 사람.
貞觀 2년, 中書省의 관리로 있으면서 〈大寶箴〉을 지어 태종에게 올렸다. 태종은 천자가 規戒로 삼을 만한 글이라며 크게 기뻐하여 비단 3백 필을 내리고 그를 大理寺의 丞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4년 뒤에 태종은 한 권세가의 말만 듣고 장온고를 죽였으니 〈대보잠〉의 규계를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태종은 뒤에 크게 후회하였으나 장온고는 이미 죽고 없었다.


張說(667~730)
자는 道濟 또는 說之. 당나라 洛陽 사람.
武后 때 과거에 급제하여 太子校書郞을 비롯 兵部侍郞·弘文館學士 등을 지낸 뒤 현종 때에는 中書令이 되고 燕國公에 봉해졌다. 그 시대 조정의 중요한 문서는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와 세상 사람들이 蘇頲과 함께 ‘大手筆’이라 불렀다. 죽은 뒤 文貞이라 諡하였다. 그는 시에도 뛰어나 특히 寫景과 서정에 情致를 보였다. 소설도 썼다 하며, 《張燕公集》 30권이 전한다.


張詠(946∼1015)
자는 復之, 호는 乖崖. 북송 鄄城(:山東省) 사람. 太宗때 진사가 된 뒤 益州知事·吏部尙書·陳州知事를 지냈고, 죽은 뒤 左僕射가 추증되고, 忠定이라 諡하였다.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하였으며 《乖崖集》 12권을 남기고 있다.


張籍(768?~830?)
자는 文昌. 당나라 和州 烏江(:安徽省) 사람. 진사가 된 뒤 太祝秘書郞·水部員外郞·國子司業 등의 벼슬을 지내어, 흔히 張司業 또는 張水部라고 부른다.
그의 시풍은 白居易와 비슷하여, 그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악부체 시를 많이 지었다. 서정시에 있어서도 청려하면서 진실하고 평담한 경향을 보여주는 수작을 남겼다. 王建과 함께 ‘張王’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張司業集》 8권을 남기고 있다.


張載(1020~1077)
자는 子厚. 호는 橫渠. 북송 때 사람으로 長安에서 출생하였다.
학문과 도를 행함에 힘썼으며 지조가 굳고 예를 좋아하여 세상 사람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嘉祐 2년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易說》·《語錄》·《正蒙》 등의 저서와 〈東銘〉·〈西銘〉 등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의 철학은 《易》으로 宗을 삼고 《中庸》으로 體를 삼았으며, 예를 숭상하는 것이었다. 송학 즉 朱子學은 周敦頤에 의해 시작되어 程明道·程伊川의 二程子와 장재에 의해 꽃피었으며, 뒤에 朱熹에 의해 대성된 학문이다.


程頤(1033~1107)
자는 正叔, 호는 伊川, 북송 河南 사람.
형 顥(:明道先生)와 함께 주돈이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8세 때 仁宗에게 왕도정치를 권하는 상서를 올렸다. 天祐 초에 國子의 敎授에 임명되었는데, 가끔 천자께 나아가 강론하였다. 처음에는 翰林院의 蘇東坡와 함께 法法黨에 맞섰으나, 나중에는 두 사람의 뜻이 맞지 않아 서로 당을 만들어 대립하였다. 당시 세상에서는 동파가 거느린 당을 川黨, 정이가 거느린 당을 洛黨이라 불렀다. 정이의 형 명도선생은 관후한 성품을 지녔으나, 정이는 강직하여 조정에서 직간을 서슴지 않았다. 형인 정호와 함께 二程子로 불리는데, 두 사람이 宋代의 철학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정이의 理氣說은 후에 朱熹에 의해 대성되었다. 大觀 원년, 75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가정 13년, 正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淳祐 원년 伊川에 추봉되었다. 공자묘에 配享되는 大儒로 《易傳》 4권, 《經說》 8권, 《伊川文集》 8권 등을 남겼다.


諸葛亮(181~234)
자는 孔明. 삼국시대 蜀漢의 승상으로 琊琊(:山東省) 사람.
처음엔 南陽에 숨어살며 〈梁甫吟〉이나 읊고 지냈으나, 蜀主 劉備의 三顧草廬로 세상에 나와 촉을 도와 싸워 《三國志演義》의 중심 인물로 유명해졌다.
유비가 죽은 뒤엔 後主를 섬기며 싸워 무수한 일화를 남겼으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전장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의 글로 〈出師表〉가 특히 유명하며 《諸葛武侯集》 1권이 있다.


曹景宗(506년 전후)
자는 子震. 남조 梁나라 때의 장군.
魏나라 군사를 깨친 공으로 梁武帝가 竟陵太守를 내렸고, 뒤에 郢州刺史에 도독을 겸하였고, 竟陵縣侯에 봉해졌다. 다시 侍中中衛將軍이 되었고, 淮水에서 위나라 장수 楊大眼을 격파하고 개선했을 때 무제가 華光殿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그때 지은 〈競病韻〉 시가 유명하다.


曹植(192~232)
자는 子建. 삼국시대 魏나라 曹操의 셋째 아들. 文帝 曹丕의 아우.
이 조조 3부자는 수많은 문인을 이끌며 본격적으로 오언시를 짓기 시작하여 중국 문학을 제 궤도에 올려놓은 建安文學의 인도자들이다. 그 중에도 특히 조식의 시가 뛰어나다.
처음엔 東阿王, 뒤엔 陳王에 봉해졌고, 죽은 뒤 諡를 思王이라 하였다. 따라서 흔히 陳思王이라고 부른다. 《曹子建集》 10권이 있다.


周敦頤(1017~1073)
자는 茂叔. 北宋 道州 營道縣(:湖南)사람.
대대로 濂溪 가에서 살았으므로 濂溪라고 호를 지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廣東轉運判官이 되었으나, 병을 얻어 스스로 南康軍을 원하여 돌아갔다. 熙寧 6년에 졸하였다. 惇頤(또는 敦頤)는 박학하여 아는 바를 몸소 실천하였다. 또 일찍이 도를 듣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과감하게 하였다. 《太極圖說》과 《通書》를 저술하여 만물의 본체를 太極으로 하고, 음양 두 氣의 전개에 의해서 현상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 철학사상은 二程子와 朱子에 의해서 계승되어 송학으로 대성되었다.


朱熹(1130~1200)
자는 元晦 또는 仲晦·紫陽이다. 雲谷山人·晦翁·滄州病叟·遯翁 등의 호를 썼다. 남송 徽州 婺源(:江西省) 사람.
진사가 된 뒤 高宗·孝宗·光宗·寧宗을 섬기며, 벼슬이 寶文閣待制에 올랐다. 그의 학문은 모든 이치를 추구하여 앎을 얻으며, 자신을 반성하고 성실히 행동하며 居敬을 위주로 하여, 마침내 송대 性理學을 집대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리학은 程朱學·朱子學으로도 불린다.
죽은 뒤 文公이라 諡하였고, 徽國公에 추봉되었으며, 孔子廟에 從祠되었다. 그는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시문에도 뛰어나서, 《詩集傳》·《楚辭集注》 등 문학 연구에 있어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시는 宋詩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라 할 수 있는 哲理를 담은 작품들이 적지 않다. 《朱子文集》 100권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仲長統(179~219)
자는 公理. 後漢 山陽(:河南) 사람.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文辭가 풍부하였다. 처음에는 벼슬을 싫어하여 〈樂志論〉을 지었으나, 후에 曹操의 군사에 참여하였다. 《昌言》 34편(일설에는 24편)을 지었다.


曾鞏(1019~1083)
자는 子固. 南豐先生이라 호하였다. 북송 南豐(:江西省)사람.
일찍이 歐陽修에게 문재를 인정받았고, 진사가 된 뒤 中書舍人을 지냈다.
산문은 중후하고 곧아서 朱熹 등 많은 사람이 존중하였고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시는 산문만 못하나 작풍이 역시 성실하다. 《元豐類稿》 50권, 부록 1권이 있다.


陳師道(1053~1101)
자는 履常 또는 無己라 하였고, 호를 後山居士라 하였다.
북송 彭城(:江蘇省 徐州) 사람. 증공을 師事했으나 과거는 보지 않았다.
蘇軾의 추천으로 徐州敎授를 거쳐 秘書省正字가 되었다. 그는 江西詩派의 중요한 작가로 시는 黃庭堅과 두보를 본받으며 簡古한 풍격을 추구하였고,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다. 서정에도 뛰어나며, 古文에도 능하였다.
《後山集》 30권이 전한다.


眞宗皇帝(968~1022)
趙元侃. 뒤에 이름을 恒이라 고쳤고, 송나라 太宗의 셋째 아들로 송나라 세 번째 임금. 처음에 襄王에 봉해졌다. 태자가 된 다음 태종이 죽자(997) 황제가 되어 25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廟號가 眞宗이며 永定陵에 묻혔다.


崔顥(704? ~754)
당나라 汴州(:河南省 開封) 사람이다. 開元 11년(723) 진사에 급제하였다.
어떤 사람들의 설에 의하면 글을 잘 지었으나 행실은 경박하였다. 한다. 도박을 좋아하고 술을 즐기며 여자도 미인만을 가렸기에 오래 가지 못하고 헤어졌다. 관직은 司勳員外郞에 이르렀다.
그의 시는 어려서는 浮艶輕薄하였으나 만년에는 기풍있고 뼈있는 시를 썼다. 그의 칠언율시 중 〈黃鶴樓〉·〈行經華陰〉 등은 특히 유명하다. 《河岳英靈集》과 《國秀集》에 실린 시 10여 편 이외에도 《崔顥詩集》이 있다.


韓駒(?~1135)
자는 子蒼. 북송 蜀(:四川省)의 消井監사람.
蘇軾에게 배워 시법을 논한 〈陵陽正法眼〉을 짓기도 하였다. 政和 초(1111)에 아버지 친구 賈祥의 추천으로 徽宗에게 그의 시문이 인정되어 진사가 된 뒤 秘書省正字를 시작으로 徽猷待制로 致仕하였다. 그의 시는 깎고 다듬고 한 끝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呂本中은 江西詩派 계보에 넣었으나 자신은 黃庭堅과의 관계를 인정치 않았다.
《陵陽集》이 전한다.


漢武帝(기원전156~기원전87)
성은 劉, 이름은 徹. 景帝의 둘째 아들로 漢의 7대 군주이다.
그의 재위 50년은 영토가 넓고 문화가 발달했던 한나라의 전성기였다. 郊祀(:하늘을 제사지내는 의식)를 설정했으며, 음률을 정하였다. 또 의식에 쓸 음악을 작곡하게 하였고, 封禪(:하늘에 제사지내며, 산천에 제사지내는 일)을 하는 등, 周代에 이어 문물제도를 정비하였다. 유학을 좋아하여 公孫弘 같은 大儒를 평민으로부터 올려 재상으로 삼았다. 이후 對策(:시험)으로써 賢士를 채용하게 되었다. 또 董仲舒의 설을 받아들여 五經博士를 두고 경학을 장려하였다. 특히 문학을 사랑하여, 시인·賦家를 많이 모으고, 樂府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를 설치하여 가요를 수집·제작하게 하였다. 그의 시대의 산문으로는 司馬遷의 《史記》 103권이 편찬되고, 司馬相如 등이 부를 많이 지어 西漢의 문학 전성기를 이루었다. 武帝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이 되어 〈漢武故事〉·〈漢武內傳〉·〈漢武事略〉 등으로 전승되고 있다.이것들은 무제가 신선 신앙에 열중한 데에서 생겨난 설화이다.


韓愈(768~824)
자는 退之. 당나라 南陽(:河南省) 사람.
송대에 昌黎伯에 추봉되어 흔히 韓昌黎라고 부른다.
일찍이 고아가 되어 형수에게 양육되었으나, 열심히 공부하여 貞元 8년(792)에 진사가 되었다. 벼슬은 일찍이 監察御史·國子博士 등을 지냈으나 憲宗이 佛骨을 맞아들임을 간하는 〈論佛骨表〉를 올렸다가 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吏部侍郞에까지 승진되었고 죽은 뒤 文公이라 諡하였다.
그는 사상면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불교를 내치며, 육조 이래의 형식미를 강구한 騈儷文을 반대하고 古文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柳宗元과 함께 唐代 고문의 쌍벽을 이루었고 ‘당송팔대가’의 첫째 인물로 꼽히게 되었다. 그의 시는 신기한 표현을 추구하며 진부함을 반대하였고, 산문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아 險怪함에 흘렀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유학에 있어서는 堯舜에서 孔孟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른바 학문의 ‘道統’을 주장하여 송대 성리학 발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昌黎集》 40권과 《外集》 10권이 전한다.


邢居實(1100년 전후)
자는 惇夫. 송나라 초 御史中丞을 지냈고 程顥의 제자였던 邢恕의 아들.
여덟 살에 〈明妃引〉을 지어 세상에 알려졌고, 司馬光에게 배웠으며, 蘇軾·黃등과도 내왕이 있었던 사람이다.


黃庭堅(1045~1105)
자는 魯直, 호는 山谷道人·涪翁이라 하였고, 分寧(:江西省 修水)사람.
治平 4년(1067)에 진사가 된 뒤 校書郞·神宗實錄檢討官·著作郎 등을 지냈다. 紹聖 4년(1094)에는 신종실록이 사실과 어긋난다는 죄명으로 黔州·戎州(:모두 四川省)에 유배당하였다. 徽宗 때 다시 太平州知事 등을 지냈으나 다시 宜州(:湖北)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형식상 두보를 배우면서도 ‘無一字無來處’·‘點鐵成金’ 등을 내세우며 독특하고 딱딱한 풍격을 추구하였다. 그는 庸俗함을 물리치고 시구를 단련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으나 사상이나 내용을 경시하고 형식에 너무 편중한 느낌을 받게 한다. 어떻든 이러한 그의 시풍은 江西詩派를 이룩하여 송대 시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蘇軾 문하에서 나왔으매 ‘蘇黃’이라 불리기도 하고, 秦觀·晁補之·張耒와 함께 ‘蘇門四學士’라 불리기도 하지만 스승 소식과는 풍격이 다른 시풍을 개척하였다. 《黃豫章集》 30권과 〈別集》 14권이 있다. 書法에도 뛰어나 많은 碑刻과 墨跡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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