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漢文

雜詠(잡영) - 王維(왕유)

구글서생 2023. 4. 13. 03:03

 

雜詠(잡영) - 王維(왕유)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군자고향래 응지고향사)
來日倚窓前 寒梅着花未.(내일기창전 한매착화미)

그대는 고향에서 오셨으니, 응당 고향 일을 아시겠지요.

오시던 날 창 앞의 매화엔 꽃이 피었던지요?

 

▶원문

雜詩三首 - 王維

​家住孟津河,門對孟津口。

常有江南船,寄書家中否。

 

君自故鄉來,應知故鄉事。

來日綺窗前,寒梅着花未。

 

已見寒梅發,復聞啼鳥聲。

心心視春草,畏向階前生。

 

君自故鄕來 應知故鄕事
來日倚窓前 寒梅着花未

▶작자: 王維
 
중국 당대 시인이자, 화가. 자는 마힐(摩詰). 山西省 출신이다. 시성(詩聖) 두보, 시선(詩仙) 이백과 견주어 시불(詩佛)이라고 불린다.

아홉 살 때부터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15세 때부터 장안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개원 7년(719년) 진사(進士)로 급제했다. 그는 태악승(太樂丞)이 되었으나, 바로 이듬해에 산동성의 제주사창참군(濟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집이기》에 따르면 황제만이 출 수 있는 황사자(黃獅子)라는 춤을 악인이 불경하게 제멋대로 추었기 때문에 책임자로서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왕유가 종친들과도 가까운 사이였기에 현종이 그를 종친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734년, 다시 수도로 소환되어 급사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안사의 난이 일어났고, 756년에 장안이 함락되고 왕유도 반란군에 포로로 잡혀 낙양으로 압송되어, 원치 않은 관직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안이 수복된 뒤에 어쨌든 반란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할 뻔 했으나 형이 고위 관리로 그의 구명에 나섰으며, 반란군에 잡혀있을 때에도 당 황실에 대한 충성을 토로한 시를 썼다는 점이 부각되어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그는 차츰 속세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욱 슬픔에 빠진 그는 장안 종남산의 망천(輞川) 옆에 있는 시골 집에 틀어박혀 불교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에서는 두보나 이백에 비해 다소 알려져 있지 않은 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