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漢文

閑山島歌(한산도가) - 李忠武公(이충무공)

구글서생 2023. 4. 17. 01:51

 

寒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한산도월명야 상수루무대도).
深愁時, 何處一聲羌笛更添愁(심수시 하처일성강적갱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올라 큰 칼을 어루만지노라.

시름이 깊은 차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소리 이내 시름 더해 주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戍樓)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一聲胡笳)는 남의 애를 끊나니 

▶1597년 8월 15일, 열선루(전남 보성 관아에 있던 누각)에 앉아 지었다.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한산도가(閑山島歌)라는 제목으로 난중일기에 적어 놓은 글이며, 그 아랫글은 후세 사람들이 이를 보고 시조로 바꾸어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윗글에서 장군께서는 한산도(閑山島)를 한산도(寒山島)로 적었고, 후세 사람들은 강적(羌笛)을 호적(胡笛: 태평소)이 아니고 호가(胡笳: 풀잎피리)라고 적었다.

 

먼저 한산도(閑山島)를 한산도(寒山島)로 적은 것은, 1592년 4월 13일 장군의 나이 48세에 일본의 침입으로 일어난 임진왜란이 5년이 지나 1597년 장군의 나이 53세가 되어 정유년 추석이 되었는데도 전쟁이 끝이 나지 않고 계속되고, 게다가 확대되고 있으므로 이를 춥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조의 제목은 한산도가(閑山島歌)라 적었으면서도, 시조의 내용에서는 한산도(寒山島)로 적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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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사에 복권되었지만 모병을 위해 고을들을 둘러보니 관아와 민가는 폐허가 되어 텅 비어 있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보성 관아의 군기를 모아서 말에 싣게 했는데, 곧 들이닥칠 12만의 왜군에 비해 너무도 초라했다. 그러한 심경을 ‘寒’자로 표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음 호적(胡笛: 태평소)이 아니고 강적(羌笛)이라고 한 것은, 호적(胡笛) 가운데 풀잎피리 호가(胡笳)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하겠으며, 이를 알아챈 후세 사람들도 풀잎피리 소리라고 하여 일성호가(一聲胡笳)라고 적은 것으로 보인다.

 

또 난중일기를 작성할 정도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군은, 자신의 칼에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라고 劍銘을 적었다. 먼저 일휘소탕(一揮掃蕩)은 한번 휘둘러 쓸어버린다고 하는 말이며, 다음 혈염산하(血染山河)는 산하를 피로 물들인다고 하는 말이다. 즉 칼을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드린다고 하는 말이다. 칼에는 선조27년(1594) 4월 이무생(李茂生)이 진중(陣中)에서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閑山島歌(한산도가) - 李忠武公(이충무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