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篇은 儒家의 戰爭觀과 이를 輯編한 劉向의 戰爭思想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해진다.’라는 두 개의 명제를 근본으로 編述하였다.
전쟁에서의 승리와 패배의 결과를 부르는 중요한 要素를 例事를 통하여 보였다.
예를 들면,
①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으며,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가 있고, 용맹한 장수가 있어도 군사들이 친근히 따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
② 內治를 잘하지 못하면 國外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없고 근본적인 은혜가 미치지 않으면 지엽적인 일을 할 수 없다.
③ 전투를 할 때는 자신의 몸과 집 등의 일체를 잊고 전투에 매진하면서 죽음을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 등의 기본을 말하고 있다.
한편 孔子가 전쟁에 반대했던 사례를 들었으며, 무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로 仁道를 행하지 않아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나라에는 당연히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뜻을 보였다.
1.
《司馬法》曰:
「國雖大,好戰必亡;
天下雖安,忘戰必危。」
《司馬法》에 일렀다.
“나라가 强大하여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멸망하고,
천하가 편안하여도 軍備를 잊으면 반드시 위험해진다.”
▶ 司馬法 : 전국 초기 齊 威王이 大夫들을 시켜 예전의 司馬兵法을 정리하고 춘추시대 齊나라 大將 司馬穰苴의 兵法을 그 안에 붙이게 하여 만든 兵法書이다.
〈仁本〉‧〈天子之義〉‧〈定爵〉‧〈嚴位〉‧〈用衆〉의 다섯 편이 남아 있다. 일명 《司馬穰苴兵法》이라고도 한다. 《史記 司馬穰苴列傳》
《易》曰:
「君子以除戎器,戒不虞。」
《周易》에 일렀다.
“君子가 이것을 보고 兵器를 수리하여 뜻밖의 변란에 대비한다.”
▶ 君子以……戒不虞 : 《周易》 萃卦의 象辭에 보인다.
夫兵不可玩,玩則無威;
兵不可廢,廢則召寇。
전쟁은 즐기면 안 되니, 전쟁을 즐기면 威力이 없고,
군비를 폐기하면 안 되니, 군비를 폐기하면 적의 침입을 부른다.
昔吳王夫差好戰而亡,徐偃王無武亦滅。
옛날 吳王 夫差는 전쟁을 좋아하다가 멸망하였고, 徐나라 偃王은 군비가 없어서 또한 멸망하였다.
▶ 徐偃王 : 西周시대 徐나라 군주를 이른다. 仁義를 행하여 36제후국(일설에는 32국)의 조회를 받았으며, 淮夷 등과 연합하여 周나라에 저항하였다.
楚나라의 공격을 받았으나, 백성을 사랑하여 전쟁에 나서지 않아서 楚나라에 패배하였고 뒤에 吳나라에 멸망당하였다.
故明王之制國也,上不玩兵,下不廢武。
그러므로 현명한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적에, 윗사람은 전쟁을 즐기지 않고, 아랫사람은 군비를 폐기하지 않았다.
《易》曰:
「存不忘亡,是以身安而國家可保也。」
《周易》에 일렀다.
“보존하며 멸망의 위험을 잊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몸이 편안하여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
▶ 存不忘亡……可保也 : 《周易》 〈繫辭 下〉에 보이는데, ‘存不忘亡’이 ‘存而不忘亡’으로 되어 있고, 그 뒤에 ‘다스려져도 어지러워짐을 잊지 않는다.[治而不忘亂]’는 구절이 더 있다.
2.
秦昭王中朝而歎曰:
「夫楚劍利、倡優拙。
夫劍利則士多慓悍,倡優拙則思慮遠也,吾恐楚之謀秦也。」
秦 昭王이 조회하는 중에 탄식하였다.
“楚나라의 劍은 날카롭고 광대는 연기가 서툴다.
劍이 날카로우면 군사들이 대부분 날쌔고 용맹하며, 광대의 연기가 서툴면 君主의 생각이 원대하니, 나는 楚나라가 우리 秦나라를 도모할까 두렵다.”
此謂當吉念凶,而存不忘亡也,卒以成霸焉。
이 말은 吉할 때 凶함을 생각하고 존립할 때 멸망이 닥침을 잊지 말라는 말이니, 〈秦나라가〉 마침내 이것으로 霸業을 이루었다.
3.
王孫厲謂楚文王曰:
「徐偃王好行仁義之道,漢東諸侯三十二國盡服矣!
王若不伐,楚必事徐。」
王孫厲가 楚 文王에게 말하였다.
“徐 偃王이 仁義의 道를 행하기 좋아하여 漢水 동쪽의 32개 제후국이 모두 복종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토벌하지 않으시면 楚나라가 필시 徐나라를 섬기게 되겠습니다.”
▶ 王孫厲 :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이다. 행적은 미상이다.
王曰:
「若信有道,不可伐也。」
文王이 말하였다.
“진실로 仁義의 道가 있다면 토벌하지 못하오.”
對曰:
「大之伐小,強之伐弱,猶大魚之吞小魚也,若虎之食豚也.
惡有其不得理?」
王孫厲가 대답하였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토벌함과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토벌함은 큰 물고기가 작은 물고기를 삼킴과 같고 호랑이가 돼지를 잡아먹음과 같습니다.
어찌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文王興師伐徐,殘之。
文王이 군대를 일으켜 徐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徐偃王將死,曰:
「吾賴於文德而不明武備,好行仁義之道而不知詐人之心,以至於此。」
夫古之王者其有備乎?
徐 偃王이 죽을 때 말하였다.
“나는 文德만을 믿어서 武備에 밝지 못하였고, 仁義의 道를 행함을 좋아하여 간사한 사람의 마음을 모르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대저 고대의 君王은 武備를 갖추었던가 보다.”
4.
吳起為苑守,行縣適息,問屈宜臼曰:
「王不知起不肖,以為苑守,先生將何以教之?」
吳起가 苑의 太守가 되어 예속된 縣을 순행하다가 息縣에 당도하여 屈宜臼에게 물었다.
“王께서 내가 不肖한 줄을 모르고 苑의 태수로 삼으셨으니, 선생은 무엇을 가르쳐주시렵니까?”
▶ 苑(완)守 : 苑의 太守이다.
《群書拾補》에는 ‘苑’은 ‘宛’으로 써야 한다고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苑’과 ‘宛’은 통용한다고 하였다. ‘宛’은 지금의 河南省 南陽 지역으로, 楚나라의 유명한 鐵 생산지이다. 《荀子 議兵》‧《漢書 地理志 下》
▶ 屈宜臼 : 본서 권13 〈權謀〉 15에는 ‘屈宜咎’로 되어 있다.
屈公不對。
屈公이 대답하지 않았다.
居一年,王以為令尹,行縣適息。問屈宜臼曰:
「起問先生,先生不教。
今王不知起不肖,以為令尹,先生試觀起為之也!」
1년이 지나, 왕이 오기를 令尹으로 삼으니, 오기가 현을 순행하다가 식현에 당도하여 굴의구에게 물었다.
“내가 선생께 물었으나 선생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왕께서 내가 不肖한 줄을 모르시고 영윤으로 삼으셨으니, 선생은 시험 삼아 내가 하는 일을 두고 보시오.”
▶ 行縣適息 : 소속된 縣을 巡行하다가 息縣에 당도했다는 말이다. 息은 본래 西周 때 封한 諸侯國인데, 춘추시대 楚나라에게 멸망되어 縣이 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식현 서남에 있었다. 鄎으로도 쓴다. 《春秋左氏傳 隱公 11년》
屈公曰:
「子將奈何?」
굴공이 말하였다.
“그대는 장차 어떻게 하시렵니까?”
吳起曰:
「將均楚國之爵而平其祿,損其有餘而繼其不足,厲甲兵以時爭於天下。」
오기가 말하였다.
“앞으로 楚나라의 벼슬을 균등하게 하여 녹봉을 공평하게 하고, 넉넉한 사람의 재물을 덜어서 부족한 사람을 보태주며, 군대를 훈련시켜 때가 되면 천하를 다툴 터이오.”
屈公曰:
굴공이 말하였다.
「吾聞昔善治國家者不變故,不易常。
“내가 듣기에, 옛날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옛 制度를 변경하지 않으며, 常規를 바꾸지 않는다고 합니다.
今子將均楚國之爵而平其祿,損其有餘而繼其不足,是變其故而易其常也。
그런데 그대는 앞으로 楚나라의 벼슬을 균등하게 하여 녹봉을 공평하게 하고, 넉넉한 사람의 재물을 덜어서 부족한 사람을 보태주려고 하니, 이는 옛 제도를 변경하고 상규를 바꾸는 것입니다.
且吾聞兵者凶器也,爭者逆德也。
더구나 내가 듣기에 武力은 凶器이고, 전쟁은 逆德이라 합니다.
今子陰謀逆德,好用凶器,殆人所棄,逆之至也,淫泆之事也,行者不利。
그런데 그대는 은밀히 역덕을 꾀하며 흉기를 쓰기 좋아하니, 대개 백성이 싫어하는 것으로, 역덕의 지극함이고 절제 없이 방종한 행위이매, 시행하는 사람은 이롭지 못합니다.
且子用魯兵不宜得志於齊而得志焉;
子用魏兵不宜得志於秦而得志焉。
또 그대가 魯나라 군대를 가지고 齊나라에 승리하지 못함이 당연한데 승리하였고,
그대가 魏나라 군대를 가지고 秦나라에 승리하지 못함이 당연한데 승리하였습니다.
▶ 且子用魯兵……而得志焉 : 《史記》 〈吳起列傳〉에 보인다.
吾聞之曰:
『非禍人不能成禍。』
내가 듣기에,
‘患亂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면 환란을 만들지 않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吾固怪吾主之數逆天道,至今無禍。
나는 본래 우리 임금께서 여러 차례 天道을 어겼는데도 지금까지 환란을 당하지 않음을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嘻!且待夫子也。」
아, 우선 그대가 하는 일을 두고 보겠습니다.”
吳起惕然曰:
「尚可更乎?」
오기가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고칠 수 있겠습니까?”
屈公曰:
「不可。」
굴공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吳起曰:
「起之為人謀。」
오기가 말하였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하여 도모해보겠습니다.”
▶ 屈公曰……起之爲人謀 : 《群書拾補》에 “이 13자는 衍文이니 《淮南子》 〈道應訓〉에는 없다.”라고 하였다.
屈公曰:
「成刑之徒不可更已!
子不如敦處而篤行之,楚國無貴于舉賢。」
굴공이 말하였다.
“형체가 완성된 사람은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敦厚하게 처신하고 篤實하게 일을 함이 낫습니다.
초나라에는 어진 이를 추천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 刑 : ‘形’과 통용이다. 《淮南子》 〈道應訓〉에는 ‘形’으로 되어 있다.
▶ 楚國無貴于擧賢 : 이 구절도 《淮南子》 〈道應訓〉에는 없다.
5.
春秋記國家存亡,以察來世,雖有廣土眾民,堅甲利兵,威猛之將,士卒不親附,不可以戰勝取功。
《春秋》에 국가의 存亡을 기록함으로써 내세를 살펴보게 하였으니, 넓은 국토와 많은 백성,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무기, 용맹한 장수가 있더라도 士卒이 친근히 따르지 않으면 전쟁에 승리하여 戰功을 세울 수 없다.
晉侯獲於韓;
楚子玉得臣敗於城濮;
蔡不待敵而眾潰。
晉侯는 韓原에서 사로잡혔고,
楚나라의 子玉 得臣은 城濮에서 패배하였으며,
蔡나라는 적군의 공격을 기다리지도 않고 군사가 흩어져 달아났다.
▶ 晉侯獲於韓 : 魯 僖公 15년(B.C.645)에 晉나라와 秦나라가 韓原(당시 晉나라 땅으로, 지금의 山西省 芮城縣에 있는 韓亭이라는 설과 河津縣과 萬榮縣 중간에 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다.)에서 벌인 전쟁에서 晉나라가 大敗하여 晉侯 惠公(夷吾)이 秦 穆公에게 사로잡혀 秦나라로 끌려간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15년》
▶ 楚子玉得臣敗於城濮 : 魯 僖公 28년(B.C.632) 楚나라 令尹 成得臣이 城濮(당시 衛나라 땅으로, 지금의 山東省 鄄城縣 서남에 위치)의 전쟁에서 晉나라 군대에게 大敗하여 죽은 일을 말한다. 子玉은 득신의 字인데, 姓은 成이다.《春秋左氏傳 僖公 28년》
▶ 蔡不待敵而衆潰 : 魯 僖公 4년(B.C.656)에 齊 桓公이 魯‧宋‧陳 등 일곱 諸侯國과 연합하여 蔡나라를 공격하였는데, 채나라 군대가 적군의 공격이 있기도 전에 흩어져 도망친 일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4년》
故語曰:
「文王不能使不附之民;
先軫不能戰不教之卒;
造父王良不能以弊車不作之馬,趨疾而致遠;
羿逄蒙不能以枉矢弱弓,射遠中微.」
옛말에 일렀다.
‘周 文王도 친근히 따르지 않는 백성은 부릴 수가 없고,
先軫도 훈련하지 않은 군사로는 전쟁하지 못하며,
造父와 王良도 망가진 수레와 일어나지 못하는 말로는 빨리 달려 먼 곳까지 이르지 못하고,
羿와 逢蒙도 굽은 화살과 약한 활로는 먼 곳의 작은 표적을 맞히지 못한다.’
故強弱成敗之要,在乎附士卒,教習之而已。
그 때문에 强弱과 成敗의 요체는 사졸들이 친밀히 따르게 하고 그들을 가르쳐 훈련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 先軫 : 본서 권8 〈尊賢〉 02 참고.
▶ 造父王良 : 造父는 周 穆王의 御者로서 수레를 잘 몰아 목왕의 天下 周遊를 수행한 사람이다. 徐 偃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八駿馬를 몰아 하루에 천 리를 달려가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趙城을 하사받고 趙氏의 선조가 되었다. 《史記 趙世家》‧《水經注 河水》
王良은 춘추시대 晉나라의 말을 잘 몰던 사람이다. 趙簡子가 寵臣 嬖奚를 태워 사냥하게 했을 때 말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몰았다 한다. 《孟子 滕文公 下》‧《論衡 率性》
▶ 羿逢(방)蒙 : 羿는 夏나라 때 활을 잘 쏘았다는 有窮國의 군주이다. 夏后 相을 축출하고 王이 되었으나 정치에는 힘쓰지 않고 사냥에 빠졌다가 부하 寒浞에게 매수된 자기의 家衆에게 살해당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4년》
逢蒙은 고대의 활의 명사수로, 羿에게 활쏘기를 배워 활쏘는 법을 완전히 터득하자 천하에 예만이 자기를 이길 수 있다고 여겨 예를 죽였다 한다. 《孟子 離婁 下》
6.
內治未得,不可以正外,本惠未襲,不可以制末.
國內의 政治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國外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고, 根本적인 은혜가 두루 미치지 않으면 枝葉적인 일을 할 수 없다.
是以春秋先京師而後諸夏,先諸華而後夷狄。
이 때문에 《春秋》에 京師를 先順位로 하고 諸夏를 後順位로 하였으며, 諸華를 선순위로 하고 夷狄을 후순위로 하였다.
▶ 先京師而後諸夏 先諸華而後夷狄 : 《春秋》의 記事 원칙을 말한 것으로, 京師의 인물을 먼저 쓰고 諸夏의 인물을 뒤에 쓰며, 諸華의 인물을 먼저 쓰고 夷狄을 뒤에 쓴 것을 말한다.
여기의 경사는 魯나라를 빌려 말하였고, 제하와 제화는 周代에 分封한 中原의 諸侯國을 말한다. 《春秋公羊傳》
成公 15년에 “《춘추》는 자기 나라를 안으로 삼고 제하를 밖으로 삼으며, 제하를 안으로 삼고 이적을 밖으로 삼았다.[春秋內其國而外諸夏 內諸夏而外夷狄]”라고 하였다.
及周惠王,以遭亂世,繼先王之體,而強楚稱王,諸侯背叛,欲申先王之命,一統天下。
周 惠王 때에 이르러 혼란한 시대를 만나 先王의 계통을 이었으나 강대한 楚나라는 王을 칭하고 제후들은 왕실을 배반하니, 선왕의 敎命을 펴서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하였다.
▶ 周惠王 : 춘추시대 東周의 天子로, 이름은 閬이다. 釐王의 아들이다.
蔿國과 邊伯 등의 땅을 빼앗고 膳夫의 녹봉을 몰수하자, 다섯 大夫가 난을 일으켜 燕나라와 衛나라 군대를 불러 혜왕을 공격하니, 혜왕은 鄭나라로 달아나 櫟에 머물렀다. 다섯 대부가 혜왕의 아우 王子 頹를 세웠는데, 뒤에 정나라가 虢公과 연합하여 왕자 퇴와 다섯 대부를 죽이고 혜왕을 맞아 복위시켰다. 《春秋左氏傳 莊公 19년》
▶ 强楚稱王 : 춘추시대 楚 武王 35년(B.C.702)에 초나라가 周 王室에 자기의 尊號(王號)를 봉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왕실이 허락하지 않자 楚王 熊通이 노하여 스스로 楚 武王이 되었다. 《史記 楚世家》
不先廣養京師,以及諸夏,諸夏以及夷狄.
먼저 京師의 역량을 널리 배양하여 점차 확대하여 諸夏에 미치게 하고 제하에서 점차 확대하여 夷狄에 미치게 하지 못하였다.
內治未得,忿則不料力,權得失,興兵而征強楚,師大敗,撙辱不行,大為天下笑。
內治를 달성하지 못하고 분노하더니, 힘을 헤아리지도 않고 得失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군대를 일으켜 강대한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군대가 대패하여 굴욕을 당하고 선왕의 명을 실행하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큰 비웃음을 샀다.
幸逢齊桓公以得安尊,故內治未得不可以正外,本惠未襲,不可以制末。
다행히 齊 桓公을 만나서 왕실의 안정과 제후의 존경을 받게 되었으매, 내치를 이루지 못하면 국외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고, 근본적인 은혜가 두루 미치지 않으면 지엽적인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다.
▶ 幸逢齊桓公 以得安尊 : 齊 桓公이 미약한 周 王室을 위해 ‘尊王攘夷’를 명분으로 북쪽의 夷狄을 토벌하여 中原을 넘보는 일을 막고 남쪽의 강성한 楚나라를 억제하여 왕실을 안정시키고 王의 권위를 높였다. 당시 제후국 중에 齊나라가 가장 강대하여 霸者가 되었고, 惠王은 환공에게 侯伯의 지위를 내렸다.
7.
將師受命者,將率入,軍吏畢入,皆北面再拜稽首受命。
군대를 거느리라는 王命을 받으면 장군이 솔선하여 朝廷에 들어가고, 軍吏들이 전부 들어가서 모두 북면하여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는다.
▶ 軍吏 : 軍中의 장수와 部將 등을 통틀어 이르는 명칭이다. 《周禮 夏官 大司馬》
天子南面而授之鉞,東行,西面而揖之,示弗御也。
天子가 남면하여 장군에게 斧鉞을 주고, 동쪽으로 가서 西向하고 揖함은 軍權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는 것이다.
▶ 鉞 : 고대 兵器의 하나이다. 모양은 斧와 비슷하나, 斧보다 크고 날이 둥글다. 주로 銅으로 만들며 玉으로 만든 것도 있다. 刑具로도 썼는데, 여기서는 兵權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썼다.
故受命而出忘其國,即戎忘其家,聞枹鼓之聲,唯恐不勝忘其身,故必死。
그러므로 왕명을 받고 출정함에는 國事를 잊고, 전쟁함에는 家事를 잊으며, 진격의 북소리를 들음에는 오직 승리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그 몸을 잊기 때문에 必死的으로 싸우는 것이다.
必死不如樂死,樂死不如甘死,甘死不如義死,義死不如視死如歸,此之謂也。
그렇지만 必死는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樂死]만 못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은 기꺼이 죽음[甘死]만 못하고, 기꺼이 죽음은 正義를 위해 죽음[義死]만 못하고, 정의를 위해 죽음은 죽음을 집에 돌아가듯이 여김만 못하니, 이을 이름이다.
故一人必死,十人弗能待也;
十人必死,百人弗能待也;
百人必死,千人不能待也;
千人必死,萬人弗能待也;
萬人必死,橫行乎天下,令行禁止,王者之師也。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열 사람이 對敵하지 못하고,
열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백 사람이 대적하지 못하며,
백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천 사람이 대적하지 못하고,
천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만 사람이 대적하지 못하며,
만 사람이 필사적으로 싸우면 천하를 마음대로 횡행하여, 명령하면 시행되고 禁하면 그치게 되니, 이것이 帝王의 군대이다.
8.
田單為齊上將軍,興師十萬,將以攻翟,往見魯仲連子。
田單이 齊나라의 上將軍이 되어 10만의 병력을 일으켜 翟을 공격하려고 할 때, 魯仲連子를 찾아가서 뵈었다.
▶ 田單 : 전국시대 齊나라 장군이다. 본서 권8 〈尊賢〉 05 참고.
▶ 翟 : ‘狄’과 통용이다. 중국 고대의 민족 이름이다. 춘추시대 이전에는 齊‧魯‧晉‧衛‧宋‧邢 등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장기간 활동하였고, B.C.7세기 때 赤狄‧白狄‧長狄의 세 部로 분열되었다.
▶ 魯仲連子 :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魯仲連‧魯連이라고도 한다.
남의 어려움을 해소해주고도 상을 받지 않은 高士이다. 趙‧魏를 설득하여 邯鄲에서 秦의 야욕을 꺾었고, 燕의 장군을 설득하여 聊城을 齊나라에 돌려주게 하였다. 《戰國策 齊策 6》‧《史記 魯仲連鄒陽列傳》
仲連子曰:
「將軍之攻翟,必不能下矣!」
仲連子가 말하였다.
“장군은 翟을 공격해도 절대 항복시키지 못할 터이오.”
田將軍曰:
「單以五里之城,十里之郭,復齊之國,何為攻翟不能下?」
田將軍이 말하였다.
“제가 5리의 城과 10리의 郭을 가지고 제나라의 국토를 수복하였는데, 무엇때문에 翟을 공격하여 항복시키지 못하겠소?”
▶ 復齊之國 : 전국시대 燕나라 장군 樂毅가 齊나라를 공격하여 72城이 함락되고 卽墨 한 城만 남았을 때 齊의 장군 田單이 燕軍을 무찌르고 燕에 빼앗겼던 국토를 수복한 일을 이른다.
去上車不與言。
수레에 올라 떠나면서 다시 말하지 않았다.
決攻翟,三月而不能下,齊嬰兒謠之曰:
「大冠如箕,長劍拄頤.
攻翟不能下,壘於梧丘。」
전단이 결심하고 翟을 공격했으나 석 달이 되어도 함락하지 못하는데, 제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노래를 불렀다.
“큰 冠을 키[箕]처럼 쓰고 長劍으로 턱만 괴고 있네.
翟을 공격하나 함락하지 못하여 梧丘에 시체를 쌓네.”
▶ 梧丘 : 길의 막다른 곳에 있는 큰 언덕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묻힌 곳이다.
於是田將軍恐駭,往見仲連子曰:
「先生何以知單之攻翟不能下也?」
이에 전장군이 두렵고 놀라서 중련자를 찾아가 뵙고 말하였다.
“선생은 어떻게 제가 翟을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할 줄을 아셨습니까?”
仲連子曰:
중련자가 말하였다.
「夫將軍在即墨之時,坐則織蕢,立則杖臿為士卒倡曰:
『宗廟亡矣,魂魄喪矣,歸何黨矣。』
“장군이 卽墨에 있을 때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잡고서 士卒들에게 독려하기를,
‘宗廟가 망하고 조상의 魂魄을 잃었으니, 어디로 돌아가랴.’라고 하였소.
▶ 卽墨 : 전국시대 齊나라 邑이다.
지금의 山東省 卽墨市로, 田單이 燕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齊나라를 수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던 곳이다.
▶黨 : 바(所), 곳, 장소(場所)
故將有死之心,士卒無生之氣。
그 때문에 장수에게 必死의 각오가 있었고 사졸에게 苟生의 氣色이 없었소.
今將軍東有掖邑之封,西有淄上之寶,金銀黃帶,馳騁乎淄澠之間,是以樂生而惡死也。」
그러나 지금 장군은 동쪽에 掖邑의 封地가 있고, 서쪽에는 淄水 가의 보물이 있으며, 黃金으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淄水와 澠水 사이를 마음대로 달리매, 삶을 즐거워하고 죽음을 싫어하고 있소.”
▶ 掖邑 : 전국시대 齊나라 邑이다. 지금의 山東省 萊州市로, 田單의 封邑이었다.
▶ 金銀黃帶 : 저본에는 ‘金銀黃帶’로 되어 있으나, 《戰國策》 〈齊策 6〉과 《太平御覽》 권318에 ‘黃金橫帶’로 되어 있다.
田將軍明日結髮,徑立矢石之所,乃引枹而鼓之,翟人下之。
전장군이 이튿날 머리를 묶고, 矢石이 날아오는 곳에 똑바로 서서, 북채를 잡고 북을 치니, 翟人이 항복하였다.
故將軍者,士之心也,士者將之枝體也,猶與則枝體不用,田將軍之謂乎!
그러므로 장군이란 사졸의 마음이고 사졸이란 장군의 肢體인데, 마음이 머뭇거리면 사지가 말을 듣지 않으니, 전장군을 이름이다.
9.
晉智伯伐鄭,齊田恒救之.
晉나라 智伯이 鄭나라를 토벌하니, 齊나라 田恒이 구원하였다.
▶ 智伯 : 본서 권3 〈建本〉 30 참고.
▶ 田恒 : 춘추시대 齊나라 사람 陳恒인데, 田常으로도 쓴다. 본서 권9 〈正諫〉 21 참고.
有登蓋必身立焉,車徒有不進者必令助之。壘合而後敢處,井灶成而後敢食。
〈전항은〉 비옷을 입고 꼭 친히 서서 兵車와 步兵이 전진하지 못하면 항상 돕게 하였으며, 堡壘가 적합한 뒤에야 감히 거처하고 우물과 부엌이 완성된 뒤에야 감히 밥을 먹었다.
▶ 有登蓋 : 孫詒讓은 “‘登’은 아마 ‘簦’과 통용인 듯하다. 《說文解字》 〈竹部〉에 ‘簦은 笠蓋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春秋左氏傳》 哀公 27년에 실려 있는데, “비가 내려 田恒이 비옷을 입고 창을 짚고는 널빤지 위에 서서 독려하였다.”라고 하였기에, ‘비옷을 입다.’로 번역하였다.
▶ 壘合而後敢處 : 堡壘를 축조한 뒤에 감히 거처한다는 말이다.
智伯曰:
「吾聞田恒新得國而愛其民,內同其財,外同其勤勞.
治軍若此,其得眾也,不可待也。」
지백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전항이 이제 막 國政을 장악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안으로는 백성들과 재물을 같이 나누어 쓰고 밖으로는 병사들과 노고를 함께한다고 한다.
군대를 이렇게 다스리면 民衆의 마음을 얻을 것이니, 對敵할 수가 없다.”
乃去之耳。
이내 철수하고 말았다.
10
太公兵法曰:
《太公兵法》에 말하였다.
▶ 太公兵法 : 太公 呂尙이 지었다는 著名한 兵書의 하나이다. 일명 《六韜》라고도 한다. 《莊子 徐無鬼》
「致慈愛之心,立武威之戰,以畢其眾;
練其精銳,砥礪其節,以高其氣。
“將帥는 자애로운 마음을 보이고 武威가 있는 전쟁을 일으켜 군사가 힘을 다하게 하고,
정예군을 훈련하고 志節을 갈고 닦아서 사기를 高揚해야 한다.
▶ 畢 : 저본에는 ‘卑’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따라 ‘畢’로 바로잡았다.
分為五選,異其旗章,勿使冒亂;
堅其行陣,連其什伍,以禁淫非。」
군대를 나누어 다섯 줄로 만들고 旗幟를 다르게 하여 혼란하게 하지 말며,
行陣을 견고하게 하고 什과 伍를 連坐시켜 잘못을 방지해야 한다.”
▶ 分爲五選 : 군대를 나누어 다섯 줄로 만든다는 말이다.
▶ 什伍 : 옛날 군대의 기본 편제이다. 다섯 사람이 伍, 두 伍인 열 사람이 什이 된다. 《春秋左氏傳 昭公 元年》‧《禮記 祭義》
壘陳之次,車騎之處,勒兵之勢,軍之法令,賞罰之數, 使士赴火蹈刃,陷陣取將,死不旋踵者,多異於今之將也。
《太公兵法》은 陣營의 순서, 車騎의 안배, 용병의 형세, 군대의 법령, 賞罰의 등급을 가지고, 병사를 부림에 불에 뛰어들고 칼날을 밟으면서 적진을 함락하고 장수를 잡게 하되 필사적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게 하였으니, 지금의 장수와 다른 점이 많다.
11.
孝昭皇帝時,北軍監御史為姦,穿北門垣以為賈區。
孝昭皇帝 때에 北軍 監御史가 법에 어긋난 행위를 하여 北門의 담장을 뚫어서 물건을 매매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 孝昭皇帝 : 漢나라의 제8대 황제이다. 이름은 弗陵인데, 武帝의 작은 아들이다.
霍光‧金日磾‧上官桀 등의 보좌로 국력의 회복에 힘썼다. 始元‧元鳳‧元平의 세 연호를 사용하였다. 《漢書 昭帝紀》
▶ 北軍監御史 : 北軍은 漢代에 京師를 守衛하던 屯衛兵이다.
한대의 未央宮은 京城 서남쪽에 있어서 그곳을 수위하는 군대를 南軍이라 하고, 長樂宮은 경성의 북쪽에 있어서 그곳을 수위하는 군대를 북군이라 하였다. 監御史는 곧 監軍御史로, 軍中을 감찰하던 임시 벼슬이다. 《史記 呂太后本紀》‧《漢書 楊胡朱梅云傳》‧《欽定歷代職官表 18》
▶ 賈(고)區 : 물품을 사고파는 작은 집이다. 《漢書 胡建傳》
胡建守北軍尉,貧無車馬,常步,與走卒起居,所以慰愛走卒甚厚。
胡建이 北軍尉로 근무하면서 가난하여 車馬가 없어 항상 걸어다니며 사졸들과 생활하였으매, 사졸들을 위로하고 사랑함이 매우 두터웠다.
▶ 胡建守北軍尉 : 胡建은 漢나라 河東 사람으로, 字는 子孟이다. 武帝 때 守君正丞이 되어 민심을 얻었고, 渭城令을 지냈다.
昭帝의 누이 蓋長公主의 情夫가 자객을 보내 京兆尹을 살해하고 개장공주의 집에 숨어 있는 것을 붙잡았는데, 개장공주가 호건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무고하자 자살하였다. 吏民들이 그의 원통함을 알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漢書 胡建傳》
守는 직무를 맡긴다는 뜻이다. 北軍尉는 北軍校尉로, 軍中의 법을 집행하는 벼슬이다.
建欲誅監御史,乃約其走卒曰:
「我欲與公有所誅,吾言取之則取之;
斬之則斬之。」
호건이 감어사를 誅殺하려고 사졸들과 약속하였다.
“나는 그대들과 주살하려는 자가 있으니, 내가 잡으라고 하면 잡고,
내가 斬首하라고 하면 참수하라.”
於是當選士馬日,護軍諸校列坐堂皇上,監御史亦坐。
이때 兵馬(군대)를 선발하는 날에 護軍과 校尉들이 청사에 벌여 앉았고 감어사도 앉아 있었다.
▶ 護軍諸校列坐堂皇上 : 護軍은 秦漢시대에 장군들 사이의 관계를 조절하기 위하여 임시로 두었던 벼슬로, 護軍中尉가 있었다. 《史記 陳丞相世家》‧《漢書 韓王信傳》
堂皇은 관리가 집무하는 청사를 이른다.
《漢書》 〈胡建傳〉의 顔師古 注에 “사방에 벽이 없는 방을 皇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建從走卒趨至堂下拜謁,因上堂,走卒皆上.
호건이 사졸들을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당 아래에 이르러 拜謁하고 이어 당에 오르니 사졸들도 모두 올라갔다.
建跪指監御史曰:
「取彼。」
호건이 무릎을 꿇고 감어사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저자를 잡아라.”
走卒前拽下堂。
사졸들이 나가서 끌고 당 아래로 내려갔다.
建曰:
「斬之。」
호건이 말하였다.
“참수하라.”
遂斬監御史,護軍及諸校皆愕驚,不知所以。
이에 감어사를 참수하니, 호군과 교위들이 모두 놀라 어쩔 줄을 몰랐다.
建亦已有成奏在其懷, 遂上奏以聞,曰:
호건이 또 이미 작성한 上奏文을 품속에 가지고 있다가 상주문을 올려 아뢰었다.
「臣聞軍法立武以威眾,誅惡以禁邪。
“신이 듣기에, 軍法에 武威를 세워 군사들에게 위엄을 보이고 악인을 주살하여 사악한 행위를 금한다고 합니다.
今北軍監御史公穿軍垣以求賈利,買賣以與士市,不立剛武之心,勇猛之意,以率先士大夫,尤失理不公。
그런데 북군 감어사는 공공연히 군영의 담을 뚫어 장사의 이익을 취하려, 군사들과 물건을 거래하며, 강한 武勇의 정신과 용감한 의지를 세움으로써 士大夫들에 솔선하지 않으니, 매우 불합리하고 불공정합니다.
臣聞黃帝理法曰:
『壘壁已具,行不由路,謂之姦人,姦人者殺。』
신이 듣기에 《黃帝理法》에 이르기를,
‘군영의 城壁이 이미 완비되었는데 규정된 길을 따라 다니지 않으면 그를 간사한 사람이라고 이르니, 간사한 사람은 죽여야 한다.’라고 합니다.
▶ 黃帝理法 : 黃帝의 이름을 가탁하여 征伐과 刑戮에 관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漢書》 〈胡建傳〉에는 黃帝李法으로 되어 있는데, 顔師古 注에 “李는 法官의 칭호이다. 정벌과 형륙에 관한 일을 총괄하여 주관하기 때문에 그 책 이름을 李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臣謹以斬之,昧死以聞。」
신은 삼가 이런 사람을 斬首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보고합니다.”
制曰:
「《司馬法》曰:
『國容不入軍,軍容不入國也。』
建有何疑焉?」
황제가 批答을 내렸다.
“《司馬法》에
‘나라의 制度와 儀節은 군대에 적용하지 않고, 군대의 제도와 의절은 나라에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호건은 무엇을 의심하는가!”
▶ 制 : 황제의 명령인데, 여기서는 批答으로 번역하였다.
▶ 司馬法……軍容不入國 : 《司馬法》은 兵書의 하나로, 本名은 《司馬穰苴兵法》이다.
전국시대 齊 威王이 大夫에게 예전의 司馬兵法을 追論하고 司馬穰苴의 병법을 그 안에 붙이게 하여 만들었다. 이 구절은 〈天子之義〉에 보인다. 《史記 司馬穰苴列傳》
建由是名興,後至渭城令,死。至今渭城有其祠也。
호건이 이로 인하여 이름을 떨쳐서 뒤에 渭城令에 이르고 任所에서 죽었는데, 지금까지 위성에 그의 사당이 있다.
▶ 渭城 : 漢代에 두었던 縣 이름이다. 治所는 지금의 陝西省 咸陽市 동북쪽의 渭城區 窑店镇 일대이다.
12.
魯石公劍,迫則能應,感則能動.
魯石公이 劍舞를 출 때 바싹 다가가면 感應하고 감응하면 움직인다.
▶ 魯石公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䀛穆無窮,變無形像,優柔委從,如影與響,如尨之守戶,如輪之逐馬,響之應聲,影之像形也.
끝없이 깊고 玄妙하여 변화해도 형상이 없고 차분하게 따라서 움직임이 그림자와 메아리 같고, 삽살개가 집을 지키는 듯하고, 수레바퀴가 말을 쫓는 듯하여, 메아리가 소리에 호응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닮음과 같다.
▶ 䀛穆 : 깊고 玄妙한 모양이다.
▶ 優柔委從 : 저본에는 ‘復’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孫仲容이 ‘復는 아마 優가 되어야 마땅하니, 글자 모양이 비슷하여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고, 《淮南子》 〈原道訓〉에 ‘優游委縱’으로 되어 있으니, ‘優游’는 곧 이 구절의 ‘優柔’이다.”라고 함을 따라 ‘優’로 바로잡았다.
▶ 尨 : 저본에는 ‘龐’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說苑纂註》‧《說苑校證》에 의거하여 ‘尨’으로 바로잡았다.
閶不及鞈,呼不及吸,足舉不及集。
閶의 북소리는 鞈의 북소리에 미치지 못하고, 내뱉는 숨은 들이마시는 숨에 미치지 못하고, 발을 드는 것은 발을 모으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 閶不及鞈(탑) : ‘閶’과 ‘鞈’은 모두 북소리이다.
相離若蟬翼,尚在肱北眉睫之微,曾不可以大息小,以小況大。
그 차이는 매미 날개처럼 작지만, 그럼에도 팔꿈치와 등, 눈썹과 속눈썹처럼 미세함이 있어서,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작은 것으로 큰 것을 겨누지 못한다.
▶ 肱北(배) : 팔과 등 사이를 말한다. ‘北’는 ‘背’와 통용한다.
用兵之道,其猶然乎?此善當敵者也。
用兵의 방법도 이와 같을 것이니, 이것이 잘 대적하는 방법이다.
未及夫折衝於未形之前者,揖讓乎廟堂之上而施惠乎百萬之民.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적을 제압하여 물러가게 함에는 미치지 못하고, 조정에서 禮義를 행하여 만백성에게 은혜를 베풂에는 미치지 못한다.
故居則無變動,戰則不血刃,其湯武之兵與!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변란이 발생하지 않게 하고 전쟁함에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는 것, 이것이 湯王과 武王의 병법이다.
13.
孔子北遊,東上農山,子路、子貢、顏淵從焉。
孔子께서 북쪽으로 유람하다가 동쪽의 農山에 오르실 적에 子路‧子貢‧顔淵이 隨從하였다.
▶ 農山 : 일설에는 魯나라, 일설에는 齊나라에 있다는 산 이름이다. 또 다른 일설에는 큰 산의 뜻이라고 한다.
孔子가 북쪽으로 유람했다면 당연히 山東 북쪽에 있어야 하니, 대체로 華北의 燕山 일대이거나 혹은 太行山脈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孔子喟然歎曰:
「登高望下,使人心悲.
二三子者,各言爾志。
丘將聽之。」
공자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다.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니 사람의 마음을 서글프게 하는구나.
너희 몇 사람은 각각 자기가 품은 뜻을 말해 보아라.
내가 들어보겠다.”
子路曰:
「願得白羽若月,赤羽若日,鐘鼓之音上聞乎天,旌旗翩翻,下蟠於地。
由且舉兵而擊之,必也攘地千里,獨由能耳。
使夫二子為從焉!」
자로가 말하였다.
“달빛 같은 흰 깃털과 해 같은 붉은 깃털로 된 指揮旗를 얻어서 종과 북소리가 위로 하늘에까지 진동하고 깃발이 펄럭거려 아래로 땅에 닿아 맴돌게 합니다.
저는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여 틀림없이 천 리의 땅을 빼앗을 터이고 이것은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 두 사람이 따르게 하겠습니다.”
孔子曰:
「勇哉士乎!
憤憤者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용감하구나. 士人이여!
憤憤하여 평온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 憤憤 : 憤氣가 일어나 평온하지 못한 모양이다.
子貢曰:
「賜也,願齊楚合戰於莽洋之野,兩壘相當,旌旗相望,塵埃相接,接戰搆兵,賜願著縞衣白冠,陳說白刃之間,解兩國之患,獨賜能耳。
使夫二子者為我從焉!」
자공이 말하였다.
“저는 齊나라와 楚나라가 넓고 큰 들판에서 交戰하여, 양쪽의 堡壘가 서로 대치하고, 깃발을 서로 바라보며 티끌이 서로 이어져 接戰해 싸우면, 저는 흰옷에 흰 冠을 쓰고 흰 칼날이 부딪치는 사이에서 利害를 말하여 두 나라의 兵禍를 해결하기를 원하니, 이는 저만이 할 수 있습니다.
저 두 사람이 따르게 하겠습니다.”
▶ 莽洋 : 끝없이 넓고 큰 모양이다.
孔子曰:
「辯哉士乎!
僊僊者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가 있구나. 사인이여!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이구나.”
▶ 僊僊 : 遊說할 때 말을 잘하는 모양이다.
顏淵獨不言。孔子曰:
「回!來!
若獨何不願乎?」
顔淵만 말을 하지 않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回야, 이리 오너라.
너만 어찌 원하는 것이 없느냐?”
顏淵曰:
「文武之事,二子已言之,回何敢與焉!」
안연이 말하였다.
“文臣과 武臣의 일을 두 사람이 이미 말했으니, 제가 어찌 감히 끼어들겠습니까!”
孔子曰:
「若鄙,心不與焉,第言之!」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두 사람이 말한 것을) 비루하게 여겨 끼어들지 않으려 하나, 마음 놓고 말해 보아라.”
顏淵曰:
「回聞鮑魚蘭芷不同篋而藏,堯舜桀紂不同國而治.
二子之言與回言異。
回願得明王聖主而相之,使城郭不脩,溝池不越,鍛劍戟以為農器,使天下千歲無戰鬥之患.
如此則由何憤憤而擊,賜又何僊僊而使乎?」
안연이 말하였다.
“제가 듣기에, 鮑魚와 蘭芷는 같은 바구니에 넣어 간수하지 않고, 堯舜과 桀紂는 같은 나라에서 다스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말은 저의 말과 다릅니다.
저는 明王‧聖主를 만나 그를 보좌하여, 城郭을 修築하지 않고 해자를 파지 않게 하며 劍과 창을 녹여서 농기구를 만들어서, 천년 동안 천하에 전쟁의 근심이 없게 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로는 무엇 때문에 분분히 出擊하고, 자공은 또 무엇 때문에 말재주로 사신이 되겠습니까?”
▶ 鮑魚蘭芷 : 소금에 절인 마른 물고기와 蘭草‧白芷를 아울러 말한다. 포어는 썩는 냄새가 고약하게 나고, 난초‧백지는 향기로운 香草인데 두 가지를 같은 그릇에 담아두지 못한다.
孔子曰:
「美哉,德乎!
姚姚者乎!」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름답다. 너의 德이여!
아름답고 훌륭한 사람이로다.”
▶ 姚姚 : 아름답고 훌륭한 모양이다.
子路舉手問曰:
「願聞夫子之意。」
자로가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합니다.”
孔子曰:
「吾所願者,顏氏之計,吾願負衣冠而從顏氏子也。」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안회의 생각이니, 나는 衣冠을 짊어지고 顔氏의 아들을 따르려고 한다.”
14.
魯哀公問於仲尼曰:
「吾欲小則守,大則攻,其道若何?」
魯 哀公이 仲尼에게 물었다.
“나는 나라가 弱小할 때는 지키고, 나라가 强大할 때는 공격하려고 하는데, 그 방법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 魯哀公 : 본서 권1 〈君道〉 05 참고.
仲尼曰:
「若朝廷有禮,上下有親,民之眾皆君之畜也,君將誰攻?
若朝廷無禮,上下無親,民眾皆君之讎也,君將誰與守?」
중니께서 대답하셨다.
“만일 조정에 禮法이 있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친애함이 있으면 民衆이 모두 임금께서 기르는 바이니, 임금께서는 누구를 공격하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예법이 없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친애함이 없으면 民衆이 모두 임금의 원수이니, 임금께서는 누구와 함께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於是廢澤梁之禁,弛關市之征,以為民惠也。」
이에 애공이 澤梁의 금령을 해제하고 關市의 세금 징수를 줄여서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 廢澤梁之禁 : 澤梁은 물 가운데 돌을 쌓아 물을 막고 물고기를 잡는 둑인 魚梁이다. 백성들이 어량에서 물고기를 잡아 이익을 취함에 관한 禁令을 폐기한 것이다.
《荀子 王制》‧《禮記 王制》
▶ 弛關市之征 : 關門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받는 통행세와 市場의 상인에게 받는 영업세의 징수를 줄임을 말한다. 《孟子 滕文公 下》‧《荀子 富國》
15.
文王曰:
「吾欲用兵,誰可伐?」
文王이 말하였다.
“내 武力을 쓰려고 하는데, 어느 나라를 토벌하면 좋을까?”
太公望曰 :
「密須氏疑於我,可先往伐。」
太公望이 말하였다.
“密須氏가 우리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먼저 가서 토벌함이 좋겠습니다.”
▶ 〈太公望曰〉 : 저본에는 없으나, 《說苑校證》에 “‘伐’자 아래에 ‘太公望曰’ 네 글자가 빠진 듯하다. 《帝王世紀》에 ‘太公曰’이라 되어 있고, 《通鑑外紀》에 ‘太公’ 두 글자가 있다.”라고 함을 따라 보충하였다.
▶ 密須氏 : 殷나라 때 지금의 甘肅省 靈臺縣의 서쪽에 세운 나라 이름이다. 密이라고도 한다. 《詩經 大雅 皇矣》‧《春秋左氏傳 昭公 15년》
管叔曰:
「不可。
其君天下之明君也,伐之不義。」
管叔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그 나라의 군주는 천하의 明君이니, 그를 토벌하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 管叔 : 西周 때 사람으로, 성은 姬, 이름은 鮮이다. 周 文王의 셋째 아들이고, 武王의 아우로 管(지금의 河南省 鄭州市)에 봉해졌기 때문에 관숙이라 한다.
무왕이 죽은 뒤 蔡叔‧武庚과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公에게 패하여 죽었다. 《史記 周本紀》
太公望曰:
「臣聞之先王伐枉不伐順;
伐險不伐易;
伐過不伐不及。」
태공망이 말하였다.
“신이 듣기에, 先王은 바르지 못한 나라는 토벌하되 순종하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으며,
地勢가 험준한 나라는 토벌하고 쉽게 진격할 수 있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으며,
분수에 넘치는 나라는 토벌하고 분수에 미치지 않는 나라는 토벌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文王曰:
「善。」
문왕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遂伐密須氏,滅之也。
마침내 밀수씨를 토벌하여 멸망시켰다.
16.
武王將伐紂。召太公望而問之曰:
「吾欲不戰而知勝,不卜而知吉,使非其人,為之有道乎?」
武王이 商紂를 토벌하려고 할 적에, 太公望을 불러서 물었다.
“나는 교전하지 않고서도 승리함을 알고, 점을 치지 않고서도 吉함을 알며, 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을 부리려고 합니다.
이렇게 함에 방법이 있습니까?”
太公對曰:
「有道。
王得眾人之心,以圖不道,則不戰而知勝矣;
以賢伐不肖,則不卜而知吉矣。
彼害之,我利之, 雖非吾民,可得而使也。」
태공이 대답하였다.
“방법이 있습니다.
王께서 大衆의 마음을 얻어서 無道한 나라를 도모하시면 교전하지 않고서도 승리함을 알게 되고,
왕의 어진 德으로 不肖한 임금을 토벌하면 점을 치지 않고서도 길함을 알게 되며,
저 商紂는 백성을 해치는데 우리는 백성을 이롭게 하면, 우리 백성이 아니더라도 부릴 수가 있습니다.”
武王曰:
「善。」
무왕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오.”
乃召周公而問焉,曰:
「天下之圖事者,皆以殷為天子,以周為諸侯,以諸侯攻天子,勝之有道乎?」
이에 周公을 불러서 물었다.
“천하의 큰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모두 殷나라를 天子로 인정하고, 우리 周나라를 諸侯로 인정하고 있다.
제후의 신분으로서 천자를 공격하여 승리함에 방법이 있는가?”
周公對曰:
「殷信天子,周信諸侯,則無勝之道矣.
何可攻乎?」
주공이 대답하였다.
“은나라는 진실로 천자이고, 주나라는 진실로 제후라면 승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 공격할 수 있겠습니까?”
武王忿然曰:
「汝言有說乎?」
무왕이 忿然히 말하였다.
“너의 말에는 설명할 것이 있느냐?”
周公對曰:
「臣聞之,攻禮者為賊,攻義者為殘,失其民制為匹夫.
王攻其失民者也,何攻天子乎?」
주공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禮義 있는 나라를 공격함을 賊이라 하고, 道義 있는 나라를 공격함을 殘이라 하고, 민심을 잃으면 匹夫가 된다고 합니다.
왕께서 민심을 잃은 자를 공격함이지, 어찌 천자를 공격하는 것이겠습니까?”
▶ 制 : ‘부르다, 號稱하다’의 뜻이다.
武王曰:
「善。」
무왕이 말하였다.
“좋은 말이다.”
乃起眾舉師,與殷戰於牧之野,大敗殷人。
민중을 동원하고 군대를 출동하여 은나라와 牧野에서 전쟁하여 은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다.
▶ 牧之野 : 곧 牧野로, 河南省 淇縣 남쪽에 있던 옛 地名이다.
周 武王이 殷의 紂를 패배시켜 멸망하게 한 곳이다. 《書經 周書 牧誓》‧《後漢書 郡國志 1》
上堂見玉,曰:
「誰之玉也?」
무왕이 廟堂(朝廷)에 올라가 寶玉이 있음을 보고 물었다.
“누구의 보옥인가?”
曰:
「諸侯之玉。」
누군가 대답하였다.
“제후의 보옥입니다.”
即取而歸之於諸侯。天下聞之,曰:
「武王廉於財矣。」
즉시 보옥을 취해 제후에게 돌려주니, 천하 사람들이 듣고 말하였다.
“무왕은 재물에 욕심이 없구나.”
入室見女,曰:
「誰之女也?」
방에 들어가 美女들이 있음을 보고 물었다.
“누구의 미녀들인가?”
曰:
「諸侯之女也。」
대답하였다.
“제후의 미녀들입니다.”
即取而歸之於諸侯。天下聞之,曰:
「武王廉於色也。」
즉시 미녀들을 취하여 제후에게 돌려보내니 천하 사람들이 듣고 말하였다.
“무왕은 女色에 욕심이 없구나.”
於是發巨橋之粟,散鹿臺之財金錢以與士民.
이때 무왕이 巨橋의 곡식을 풀고, 鹿臺의 재물과 金錢을 나누어 士民에게 주었다.
▶ 巨橋 : 곧 鉅橋로, 殷나라 紂가 곡물을 저장했던 창고 이름이다.
지금의 河北省 曲周縣 북동쪽에 있었다. 《書經 周書 武成》‧《史記 殷本紀》
▶ 鹿臺 : 殷나라 紂가 재물을 모아 저장했던 行宮 이름이다.
지금의 河南省 淇縣 서쪽에 있었다. 《書經 周書 武成》‧《史記 殷本紀》
▶ 金錢 : 저본에는 ‘財金錢’이나, 《藝文類聚》 권66‧85의 《六韜》를 인용한 글에 ‘散鹿臺之金錢’으로 되어 있고 《說苑校證》에 “‘財’자는 衍文인 듯하다.”라고 함을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黜其戰車而不乘,弛其甲兵而弗用,縱馬華山,放牛桃林,示不復用。
戰車를 폐기하여 타지 않고, 갑옷과 무기를 해제하여 사용하지 않으며, 말을 華山에 놓아주고, 소를 桃林에 풀어주어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였다.
▶ 華山 : 西嶽 華山으로, 일명 太華山이라 한다. 지금의 陝西省 華陰縣 남쪽에 있다. 《爾雅 釋山》‧《書經 周書 武成》
▶ 桃林 : 지금의 河南省 靈寶縣 서쪽, 陝西省 潼關 동쪽 일대 지역이다. 周 武王이 전쟁을 종식한다는 뜻으로 전쟁에 동원했던 소를 놓아준 곳이라 한다. 《書經 周書 武成》‧《史記 留侯世家》
天下聞者,咸謂武王行義於天下,豈不大哉?
천하에 이 소식을 들은 자는 모두 말하였다.
“무왕이 천하에 道義를 시행하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17.
文王欲伐崇,先宣言曰:
文王이 崇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며 먼저 宣言하였다.
▶ 崇 : 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戶縣(옛 鄠縣) 일대 지역에 있던 殷나라의 諸侯國이다.
은나라 말에 周 文王에게 멸망당하였다. 《詩經 大雅 文王有聲》
「予聞崇侯虎,蔑侮父兄,不敬長老,聽獄不中,分財不均,百姓力盡,不得衣食.
“내가 듣기에, 崇侯 虎는 父兄을 업신여기고 노인을 공경하지 않으며, 소송의 판결이 공정하지 않고 재물의 분배가 고르지 못하며, 백성이 힘을 다하는데도 衣食을 얻지 못한다고 한다.
▶ 崇侯虎 : 殷나라 紂의 신하로, 崇나라의 君主이다.
은나라 주왕에게 西伯 昌(周 文王)을 참소하여 羑里 감옥에 갇히게 하였는데, 뒤에 서백 창이 숭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豐邑을 만들었다. 《史記 周本紀》
予將來征之,唯為民乃伐崇.」
내가 가서 숭나라를 토벌하려 함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이다.”
令毋殺人,毋壞室,毋填井,毋伐樹木,毋動六畜,有不如令者死無赦。
명령하기를, 함부로 살인하지 말고, 집을 허물지 말고, 우물을 메우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고, 六畜을 동원하지 말라고 하였고, 만일 명령대로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용서하지 않았다.
崇人聞之,因請降。
숭나라 군주가 소문을 듣고 인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18.
楚伐陳,吳救之.
楚나라가 陳나라를 토벌하니, 吳나라가 구원하였다.
▶ 楚伐陳 : 저본에는 ‘楚莊王伐陳’이나, 《說苑校證》에 “《韓非子》 〈說林 下〉에 ‘荊伐陳’이라 하여 ‘莊王’ 두 글자가 없다. 左史 倚相은 楚 靈王 때 처음으로 《春秋左氏傳》에 보이니, 莊王을 섬길 수 없다.”라고 함을 따라 衍文으로 처리하였다.
雨十日十夜晴。左史倚相曰:
「吳必夜至,甲列壘壞,彼必薄我.
何不行列鼓出待之。」
열흘 밤낮을 비가 내리다가 날이 개니, 左史 倚相이 말하였다.
“오나라 군대가 틀림없이 밤에 습격해 올 터이고, 우리 군대의 갑옷은 찢어지고 堡壘는 허물어졌으매, 저들은 필시 우리를 얕볼 터입니다.
어찌 대오를 정비하고 북을 치면서 나가 기다리지 않습니까?”
▶ 左史倚相 : 본서 13 〈權謀〉 27 참고.
▶ 列 : ‘裂’과 통용이다.
吳師至, 見楚軍成陳而還。
오나라 군대가 楚의 軍營에 와서 陣勢를 이룸을 보고 돌아갔다.
▶ 見楚軍 : 저본에는 ‘楚見’으로 되어 있으나, 《說苑校證》에 “‘楚見’ 두 글자는 당연히 ‘見楚’로 바뀌어야 하고 ‘楚’자 아래 또 ‘軍’자가 빠졌다. 《太平御覽》 권10에 ‘見楚軍成陳而反’으로 되어 있으니, 따라야 한다.”라고 함을 따라 ‘見楚軍’으로 바로잡았다.
左史倚相曰:
「追之。
吳行六十里而無功,王罷卒寢。」
좌사 의상이 말하였다.
“추격하십시오.
오나라 군대가 행군하기 60리인데, 세운 戰功이 없어 오왕은 지치고 병사는 쉬고 있을 터입니다.”
果擊之,大敗吳師。
마침내 추격하여 오나라 군대를 크게 이겼다.
19.
齊桓公之時,霖雨十旬。
齊 桓公 때 장맛비가 백 일 동안 내렸다.
桓公欲伐漅陵,其城之值雨也,未合。
桓公이 漅陵을 토벌하려고 城을 修築하다가 장맛비를 만나 끝마무리를 하지 못하였다.
▶ 漅陵 : 곧 巢陵으로, 지금의 山東省 聊城市 동쪽 15리에 있었다.
전설상 巢父가 은거하여 몸소 농사짓던 곳으로, 나무 위에 둥지를 만들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管仲隰朋以卒徒造於門,桓公曰:
「徒眾何以為?」
管仲과 隰朋이 병졸을 거느리고 宮門에 나아가니, 환공이 말하였다.
“병졸로써 무엇을 하려 하오?”
▶ 管仲隰朋 : 본서 권1 〈君道〉 18과 19 참고.
管仲對曰:
「臣聞之,雨則有事。
夫漅陵不能雨,臣請攻之。」
관중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비가 오면 전쟁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릉 사람들이 비를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공격하기를 청합니다.”
公曰:
「善!」
遂興師伐之。
환공이 말하기를,
“좋소.”
하고, 이어 군대를 일으켜 소릉을 공격하였다.
既至,大卒間外士在內矣,桓公曰:
「其有聖人乎?」
소릉에 도착해보니, 많은 병사가 성 밖에 숨어 있고 甲士는 성 안에 숨어 있으매, 환공이 말하였다.
“아마 聖人이 있는 모양이다.”
▶ 大 : 저본에는 ‘天’으로 되어 있으나, 《群書拾補》에 ‘大’자로 되어 있고, 《說苑校證》에 明鈔本과 經廠本에 바로 ‘大’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을 따라 ‘大’로 바로잡았다.
乃還旗而去之。
이에 깃발을 돌려서 떠났다.
20.
宋圍曹,不拔。
宋나라가 曹나라를 포위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司馬子魚謂君曰:
「文王伐崇,崇軍其城,三旬不降,退而脩教,復伐之,因壘而降。
今君德無乃有所闕乎?
胡不退脩德,無闕而後動。」
司馬 子魚가 宋君에게 말하였다.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할 적에 숭나라 군대가 그 城을 지켜 30일 동안 항복하지 않자, 퇴각하여 文敎를 닦고 다시 정벌하였고, 종전의 軍勢를 이용하여 항복을 받았습니다.
지금 군주의 덕에 흠결이 있음은 아닌지요?
어찌 퇴각하여 덕을 닦아 흠결을 없앤 뒤에 군대를 동원하지 않습니까?”
▶ 司馬子魚 : 춘추시대 宋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目夷이고 字는 子魚이다.
桓公의 아들이고 襄公 玆父의 庶兄이다. 환공의 병이 깊을 때 자보가 후계자로 삼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사양하였고, 양공이 즉위한 뒤에 司馬가 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8‧22년》‧《史記 宋世家》
▶ 因壘而降 : 보루를 증축하거나 예전에 있던 군대를 증원하지 않고 옛 그대로의 軍勢를 이용하여 항복받았음을 말한다.
21.
吳王闔廬與荊人戰於柏舉,大勝之,至於郢郊,五敗荊人。
吳王 闔廬가 荊(楚)나라 군주와 柏擧에서 전쟁하여 크게 승리하고, 郢의 郊外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형나라 군주를 이겼다.
▶ 吳王闔廬與荊人戰於柏擧 : 闔廬는 본서 권8 〈尊賢〉 05 참고.
荊은 楚나라의 옛 이름이다.
柏擧는 본서 권12 〈奉使〉 18 참고.
▶ 郢郊 : 郢은 춘추전국시대 楚나라의 國都이다. 지금의 湖北省 江陵縣 紀南城에 있었다.
楚 文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였고, 楚 懷公 30년(B.C.278)에 秦나라에 함락되어 진나라의 南郡이 되었다.
紀山 남쪽에 있다 하여 紀郢이라고 하며, 또 초나라의 남쪽 지역에 있다 하여 南郢이라고도 한다. 《春秋左氏傳 文公 10년》‧《史記 楚世家》
闔廬之臣五人進諫曰:
「夫深入遠報,非王之利也,王其返乎?」
합려의 신하 다섯 사람이 諫言을 올렸다.
“적국에 깊숙이 들어가고 먼 곳에 와서 보복함은 王의 이로움이 아니니, 왕께서는 돌아가셔야 합니다.”
五人將鍥頭,闔廬未之應,五人之頭墜於馬前.
다섯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베어 간하려고 하였고, 합려가 미처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다섯 사람의 머리가 합려의 말 아래 떨어졌다.
▶ 五人將 : 저본에는 ‘人’자가 없으나, 《群書拾補》에 따라 ‘人’자를 보충하였다.
闔廬懼,召伍子胥而問焉。子胥曰:
「五臣者懼也。
夫五敗之人者,其懼甚矣,王姑少進。」
합려가 두려워서 伍子胥를 불러 묻자, 오자서가 말하였다.
“다섯 신하가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 이긴 사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심하니, 왕께서는 우선 조금만 진군하십시오.”
遂入郢,南至江,北至方城,方三千里,皆服於楚矣。
마침내 郢에 들어가서 남쪽으로 長江에 이르고 북쪽으로 方城에 이르니, 사방 3천 리가 모두 오나라에 복종하였다.
▶ 方城 : 춘추시대 楚나라 북쪽에 있던 長城 이름이다. 하남성 方城縣에서 시작하여 伏牛山을 지나 동쪽으로 鄧縣에까지 이른다. 중국 九塞의 하나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4년》‧《淮南子 墜形訓》
22.
田成子常與宰我爭,宰我夜伏卒,將以攻田成子,令於卒中曰:
「不見旌節毋起。」
田成子가 일찍이 宰我와 다투었는데, 재아가 밤에 병졸을 매복하여 전성자를 공격하려 하며 병졸에게 명령하였다.
“旌節을 보지 않고는 起動하지 말라.”
▶ 田成子常與宰我 : 田成子는 본서 권2 〈臣術〉 16 ‘陳成子’와 본서 권9 〈正諫〉 21 ‘田常’ 참고.
宰我는 본서 권9 〈正諫〉 21 ‘宰予’ 참고.
▶ 旌節 : 깃발과 符節을 이른다.
鴟夷子皮聞之,告田成子。田成子因為旌節以起宰我之卒以攻之,遂殘之也。
鴟夷子皮가 알고 전성자에게 고하자, 전성자는 인하여 정절을 위조하여 재아의 병졸들을 기동하게 하고 마침내 재아를 멸하였다.
▶ 鴟夷子皮 : 본서 권2 〈臣術〉 16 참고.
23.
齊桓公北伐山戎氏,請兵於魯,魯不與,桓公怒,將攻之.
齊 桓公이 북으로 山戎氏를 토벌하려고 魯나라에 派兵을 요청함에, 노나라가 파병하지 않으매, 환공이 노하여 노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 山戎氏 : 본서 권13 〈權謀〉 21 참고.
管仲曰:
「不可.
我已刑北方諸侯矣。今又攻魯,無乃不可乎?
魯必事楚,是我一舉而失兩也。」
管仲이 말하였다.
“안 됩니다.
우리가 이미 북방의 제후들을 처벌하였는데, 지금 또 노나라를 공격하면 不可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노나라를 공격하면〉 노나라는 필시 楚나라를 섬길 터이니, 이는 우리가 한 번에 두 가지를 잃는 것입니다.”
桓公曰:
「善!」
乃輟攻魯矣。
환공이 말하기를,
“좋소.”라고 하고, 노나라 공격을 중지하였다.
24.
聖人之治天下也,先文德而後武力。
성인이 천하를 다스림에 文德(禮樂敎化)을 우선하고 武力은 뒤에 둔다.
凡武之興為不服也。文化不改,然後加誅。
무력을 일으킴은 상대가 불복하기 때문이니, 文德과 敎化로도 고쳐지지 않고 나서야 주벌하는 것이다.
夫下愚不移,純德之所不能化而後武力加焉。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변화하지 못하니, 순수한 덕으로도 교화할 수 없고 나서야 무력을 쓰는 것이다.
25.
昔堯誅四凶以懲惡,周公殺管蔡以弭亂,子產殺鄧析以威侈,孔子斬少正卯以變眾.
예전에 堯는 四凶을 주벌하여 惡人을 징계하였고, 周公은 管叔과 蔡叔을 죽여서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子産은 鄧析을 죽여 방종한 사람을 두렵게 하였고, 孔子는 少正卯를 斬首하여 백성의 풍습을 바꾸었다.
▶ 四凶 : 堯임금 때의 네 惡人을 말한다.
곧 幽州로 流配한 共工, 崇山으로 추방한 驩兜, 三危로 귀양 보낸 三苗, 羽山에서 죽인 鯀을 이른다.
《書經 虞書 舜典》
▶ 周公殺管蔡 : 본서 권11 〈善說〉 16 참고.
▶ 子産殺鄧析以威侈 : 子産은 본서 권2 〈臣術〉 04 참고.
鄧析은 본서 권5 〈貴德〉 07 참고.
등석을 죽인 일에 대하여 《荀子》 〈非十二子〉‧《呂氏春秋》 〈離謂〉‧《淮南子》 〈泛論訓〉에는 모두 자산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 定公 9년에 執政한 駟歂이 죽였다고 한 것이 믿을 만하다.
威侈는 방종한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뜻이다.
▶ 孔子斬少正卯以變衆 : 본권 27에 자세히 보인다.
佞賊之人而不誅,亂之道也。《易》曰:
「不威小,不懲大,此小人之福也。」
아첨하고 음험한 사람을 징벌하지 않음은 환란을 부르는 길이니, 《周易》에 일렀다.
“작은 惡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큰 악에 징벌을 내리지 않는 것, 이것은 小人의 福德이다.”
▶ 易曰……此小人之福也 : 이 구절은 《周易》의 원문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니다.
《周易》 〈繫辭 下〉에 “소인은 어질지 않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의롭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익이 아니면 권장되지 않으며, 위엄이 아니면 징계하지 못한다. 작게 징계하여 크게 경계하게 하는 것, 이것이 소인의 복이다.[小人不恥不仁 不畏不義 不見利不勸 不威不懲 小懲而大誡 此小人之福也]”라고 보인다.
26.
五帝三王教以仁義而天下變也,孔子亦教以仁義而天下不從者,何也?
五帝와 三王은 仁義로 백성을 敎化하여 천하 사람들이 변화하였으나, 孔子 역시 인의로 백성을 교화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따르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 五帝三王 : 본서 권14 〈至公〉 참고.
昔明王有紱冕以尊賢,有斧鉞以誅惡,故其賞至重,而刑至深,而天下變。
예전의 현명한 제왕은 紱冕의 작위를 가지고 賢者를 존중하고, 斧鉞의 형벌을 가지고 惡人을 징벌하였으매, 賞은 지극히 무겁고, 형벌은 지극히 엄혹하여 천하 사람들이 변화하였다.
▶ 紱冕 : 옛날에 官印을 매는 인끈과 大夫 이상이 쓰는 禮冠으로, 高官을 비유하여 이른다. 《淮南子 泰族訓》‧《司空楊秉碑》
▶ 斧鉞 : 옛날에 사람을 처형하는 데 쓰던 刑具이다. 일반적으로 형벌을 이르는 말로 쓴다.
孔子賢顏淵,無以賞之,賤孺悲,無以罰之;故天下不從。
공자가 顔淵을 현명하게 여겼으나 상을 줄 수가 없고, 孺悲를 卑賤하게 여겼으나 징벌할 수가 없었으매 천하 사람들이 따르지 않았다.
▶ 孺悲 : 춘추시대 魯나라 사람으로, 孔子에게 士喪禮를 배운 사람이다. 뒤에 공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공자가 거절한 일이 있다. 《論語 陽貨》‧《禮記 雜記》
是故道非權不立,非勢不行,是道尊然後行。
이 때문에 道는 권력이 아니면 수립되지 않고, 권세가 아니면 시행되지 않으니, 도는 尊崇을 받고 나서 시행되는 것이다.
27.
孔子為魯司寇,七日而誅少正卯於兩觀之下.
孔子께서 魯나라의 司寇가 된 지 7일, 少正卯를 兩觀 아래에서 誅殺하셨다.
▶ 司寇 : 刑法과 獄訟을 주관하는 벼슬 이름이다.
魯 定公 14년(B.C.496)에 孔子가 司寇로서 재상의 일을 攝行하였다. 《史記 孔子世家》
▶ 誅少正卯於兩觀 : 少正卯는 춘추시대 魯나라 大夫이다.
少正은 氏이고 卯는 이름인데, 일설에는 소정이 벼슬 이름이라고 한다.
孔子와 同時에 門徒를 모아 講學하였고, 亂政을 행하여 공자가 司寇가 된 지 7일 만에 誅殺하였다 한다. 《荀子 宥坐》‧《尹文子 大道 下》‧《孔子家語 始誅》‧《史記 孔子世家》‧《论衡 讲瑞》
兩觀은 宮門 앞에 높이 쌓은 두 闕을 말한다. 궐을 觀이라고도 하는데, 궁문이나 城門 양쪽에 높이 쌓은 臺이다. 《詩經 鄭風 子衿》‧《三輔黃圖 雜錄》
門人聞之,趨而進,至者不言,其意皆一也。
門人들이 듣고 달려왔는데, 도착한 사람들이 말은 하지 않았으나 그들의 생각은 모두 같았다.
子貢後至,趨而進,曰:
「夫少正卯者,魯國之聞人矣!
夫子始為政,何以先誅之?」
子貢이 뒤에 도착했는데 달려 나와 말하였다.
“소정묘는 노나라에서 이름난 사람입니다!
선생님께서 政事를 시작하시면서 무엇 때문에 이 사람을 먼저 죽이십니까?”
孔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賜也,非爾所及也。
“賜야! 네가 미칠 바가 아니다.
夫王者之誅有五,而盜竊不與焉。
帝王의 주살에는 다섯 종류가 있으나 竊盜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一曰心逆而險;
二曰言偽而辯;
三曰行辟而堅;
四曰志愚而博;
五曰順非而澤。
첫째는 마음에 逆心을 품고 음험한 자,
둘째는 거짓을 말하면서 達辯인 자,
셋째는 邪僻한 행하면서 완고하여 변화하지 않는 자,
넷째는 뜻이 어리석으면서 박식한 자,
다섯째는 잘못을 합리화하며 번지르르하게 꾸며대는 자이다.
此五者皆有辨知聰達之名,而非其真也。
이 다섯 종류의 사람은 모두 明辨하고 知識이 있고 聰明하고 通達하다는 명성이 있으나 진실이 아니다.
苟行以偽,則其知足以移眾,強足以獨立,此姦人之雄也,不可不誅。
진실로 虛僞로만 행하면 그들의 지혜는 대중의 마음을 바꾸고, 완강함은 세상에서 독립할 수 있으매, 이는 간악한 사람 중의 우두머리이므로 주살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夫有五者之一,則不免於誅。今少正卯兼之,是以先誅之也。
다섯 중의 하나만 있어도 주살을 면하지 못하는데, 소정묘는 다섯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으매 먼저 주살하였다.
昔者湯誅蠋沐,太公誅潘阯,管仲誅史附里,子產誅鄧析,此五子未有不誅也。
예전에 湯王은 蠋沐을 주살하였고, 太公은 潘阯를 주살하였으며, 管仲은 史附里를 주살하였고, 子産은 鄧析을 주살하였으니, 이 다섯 사람은 주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蠋沐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 太公誅潘阯 : ‘太公’은 ‘文王’으로 고쳐야 할 듯하다. 《群書拾補》에는 “《荀子》에 ‘文王誅潘止 太公誅華仕’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고, 《說苑校證》에는 “《說苑纂註》에 《孔子家語》에 ‘文王誅潘正’으로 되어 있다.”라 하였다.
▶ 史附里 : 본서 권5 〈貴德〉 07 참고.
▶ 此五子 : 《群書拾補》에는 “윗글에는 네 사람에 그쳐 한 사람이 적으나, 《荀子》에는 ‘周公誅管叔’이 더 있어서 ‘七子’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고, 《說苑校證》에 “《孔子家語》에도 ‘七子’로 되어 있고, 《尹文子》에는 ‘六子’로 되어 있어 ‘管叔’이 없다.”라고 하였다.
所謂誅之者,非為其晝則功盜,暮則穿窬也,皆傾覆之徒也!
이른바 ‘誅罰’은 낮이면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밤이면 담을 뚫거나 넘어가서 도둑질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나라를 뒤엎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 穿窬 : 도둑질하는 행위를 말한다. 穿은 남의 담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고, 窬는 담을 넘어가 도둑질하는 일을 이른다. 《論語 陽貨》‧《孟子 盡心 下》
此固君子之所疑,愚者之所惑也。
이들은 본디 君子가 의심하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미혹하게 하는 자들이다.
《詩》云:
『憂心悄悄,慍于群小。』
此之謂矣。」
《詩經》에 이르기를,
‘초초히 마음에 근심하는데, 여러 小人에게 노여움을 받았네.’라고 하였으니,
이런 사람을 두고 이른 말이다.”
▶ 詩云……慍于群小 : 《詩經》 〈邶風 柏舟〉에 보인다.
28.
齊人王滿生見周公,周公出見之,曰:
「先生遠辱,何以教之?」
齊나라 사람 王滿生이 周公을 뵈려 하자, 주공이 나가 접견하고 말하였다.
“선생이 멀리 오시느라 수고로우셨으니, 무엇으로 가르쳐주시렵니까?”
▶ 王滿生 : 사람 이름인데, 행적은 미상이다. 《呂氏春秋》 〈精諭〉에는 ‘勝書’로 되어 있다.
▶ 遠辱 : 먼 곳에서 온 것을 공경히 이르는 말이다. 辱은 謙辭로, 수고로움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말이다.
王滿生曰:
「言內事者於內,言外事者於外.
今言內事乎?言外事乎?」
왕만생이 말하였다.
“朝廷 안의 일은 안에서 말하고, 조정 밖의 일은 밖에서 말하겠습니다.
지금 조정 안의 일을 말할까요? 조정 밖의 일을 말할까요?”
周公導入。王滿生曰:
「敬從。」
주공이 인도하여 들어오니, 왕만생이 말하였다.
“공경히 명을 따르겠습니다.”
布席,周公不導坐。王滿生曰:
「言大事者坐,言小事者倚。
今言大事乎?言小事乎?」
자리를 펴고 주공이 자리로 인도하지 않으니, 왕만생이 말하였다.
“大事를 말하려면 앉아서 하고, 小事를 말하려면 기대어 말하겠습니다.
지금 대사를 말할까요? 소사를 말할까요?”
周公導坐。王滿生坐。
주공이 자리에 인도하니, 왕만생이 자리에 앉았다.
周公曰:
「先生何以教之?」
주공이 말하였다.
“선생은 무엇으로 나를 가르쳐주시렵니까?”
王滿生曰:
「臣聞聖人不言而知,非聖人者雖言不知。
今欲言乎?無言乎?」
왕만생이 말하였다.
“신이 알기로는, 聖人은 남이 말하지 않아도 알지만, 성인이 아닌 자는 말을 하더라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지금 제가 말하기를 바라십니까? 말하지 않기를 바라십니까?”
周公俛念,有頃,不對。
주공이 머리를 숙이고 한동안 생각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王滿生藉筆牘書之曰:
「社稷且危」.
傅之於膺。
왕만생이 붓과 木簡을 빌려
“社稷이 장차 위험하다.”라고 쓰고
그것을 가슴에 붙였다.
周公仰視見書曰:
「唯!唯!
謹聞命矣。」
주공이 머리를 들어 글을 보고 말하였다.
“예, 예.
삼가 교명을 따르겠습니다.”
明日誅管蔡。
이튿날 管叔과 蔡叔을 주벌하였다.
▶ 管蔡 : 管叔과 蔡叔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본서 권11 〈善說〉 1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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