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雲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추운막막사산공 낙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畵圖中(입마계교문귀로 부지신재화도중).
가을 구름 아득하고 사방 산은 고요한데, 낙엽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었구나.
다리께에 말 세우고 돌아갈 길 묻노라니, 그림 속에 내가 든 줄 인식하지 못하네.
시골에 묻혀 은거하는 친구 김 거사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
엷은 가을 구름은 널리 아득하게 펼쳐져 있고, 사방 산은 인적 없이 고요하다. 김 거사의 집이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있음을 말해준다. 깊은 가을, 낙엽은 땅에 가득 소리 없이 떨어져 온통 붉게 뒤덮였다.
허균은 일찍이 이 두 구에 대해 ‘그림같다(如畵)’고 평한 바 있다.
문득 돌아가는 길이 어렴풋하다. 시냇가 다리 곁에 말을 멈추고 서서 마침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길을 물어본다. 천하의 정도전이 고작 얼마 전에 지나왔을 길 하나 모를까. 그것도 시골길을.
이는 시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다. 역시 김 거사의 집이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제목에 ‘들 야(野)’자를 썼지만 사실은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첫 구의 ‘사방 산(四山)’이란 표현이 그것을 말해준다.
허균이 앞의 두 구에 대해 ‘그림같다’고 한 것은 한 걸음 떨어져서 느낀 것이고 평하는 타이밍이 조금 빨랐다. 작자 자신은 그보다 한 수 더 떠 “그림 속에 내가 있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했으니 자신조차 그림 속의 등장 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자연에 동화되었다. 과연 동양화치고 인물이 안 들어간 산수화가 드무니 세번째 구까지 포함해야 그림의 모양새가 제대로 갖춰진다.
홍만종(洪萬宗)도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굳이 언급했지만 이 시는 전형적인 ‘시중유화(詩中有畵:시 속에 그림이 있음)’의 경지에 든 작품이다. 시의 묘사가 생생하여 그림을 보는 것 같을 때 하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뛰어난 그림에서 시의(詩意)를 느껴 시를 짓는 수도 많았으니 이른바 제화시(題畵詩)이다. 이런 경우는 ‘화중유시(畵中有詩)’가 된다.
■어구 풀이
秋雲:가을 구름.
漠漠:널리 펼쳐져 있는 모양.
四山:사방의 산.
空:인적이 없고 고요함.
溪橋:시냇가의 다리.
歸路:집으로 돌아가는 길.
畵圖:그림.
■작자
정도전(1342~1398) 삼봉(三峯)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교체기에 뛰어난 정치력으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꿈꾸던 이상 세계는 실현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정적의 칼에 단죄돼, 조선 왕조 말기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경복궁 설계의 공을 인정받아 겨우 신원되는,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삶을 살았다.
당초, 이성계가 자신의 꿈을 실현해 줄 수 있는 인물임을 확신하고 이때 그는
蒼茫歲月一株松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生長靑山幾萬重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好在他年相見否 (잘 있다가 다른 해에 서로 볼 수 있을까)
人間俯仰便陳跡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라는 시를 남기고 그를 추대한 후 새 왕조를 이끌 물적, 인적 인프라를 완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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