義敏公 崔均
1.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2.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평(汝平). 호는 소호(蘇湖). 아버지는 최운철(崔云哲)이다.
어버이에 대한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다. 『주역』에 통달하였고, 특히 천문에 밝았다.
3.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강(崔堈)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를 풍운장(風雲將)이라고 불렀다.
고성·사천 등지에 진격하여 적병을 많이 참살하였다. 조정에서 이를 가상히 여기고 守門將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1605년 배를 타고 침입한 적병을 형제가 힘을 합하여 격퇴하였으며,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본디 벼슬에 뜻이 없었던 그는 혼미를 거듭하는 조정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돌아가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며 지냈다. 사람들이 그 집을 효우려(孝友廬)라고 불렀다.
안빈낙도하며 금서(琴書)를 즐겼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80세에 죽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민(義敏)이다.
義肅公 崔堈
1. 정의
조선시대 가리포첨사, 경상좌수사, 충청도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 의병장
2. 개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견(汝堅). 호는 소계(蘇溪). 아버지는 최운철(崔云哲)이다.
3.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무과에 급제한 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최균(崔均)과 함께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김시민(金時敏)과 합세하여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1593년 김해로부터 웅천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퇴하였으며, 1594년 김덕령(金德齡)의 별장으로 고성에서 왜군과 싸우는 등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1605년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로 승진하였고, 1606년 경상좌수사가 되었다.
광해군 때 충청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김제남(金悌男)의 옥사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문초를 받은 뒤 방송되었으나, 사직하고 은퇴하였다.
후일 포도대장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퇴하고, 56세로 죽었다.
1816년(순조 16) 형 최균과 함께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고성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의숙(義肅)이다.
15대조고 의민공과 의숙공의 약력을 삼가 적어 봄.
2022.4.27. 삼을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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