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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命詩-黃玹 본문

漢詩와 漢文

絶命詩-黃玹

耽古樓主 2025. 2. 12. 17:19

絶命詩-黃玹

 

절명시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損生却未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난리를 겪다 보니 白頭年이 되었구나. 몇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바람 앞에 가물거리는 촛불이 蒼天을 비추도다.

▷滾-물이 세차게 흐르는 모양,

▷白頭-머리가 세다(나이가 들다),

▷幾合-얼마ㆍ몇 번,

▷無可奈-어찌할 수 없다,

▷輝輝-빛이 밝은 모양,

▷蒼天-하늘. 연

▷亂離 : 전쟁 재해 등으로 세상이 소란하고 질사가 어지러운 상태.

▷捐生 : =捐命. 산 목숨을 버림.

▷未然 : 아직 정하여지지 아니함.

 

절명시 二

妖氛翳帝星移 九闕沈沈晝漏漏.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帝星이 옮겨지니, 久闕은 침침하여 晝漏가 더디구나.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妖氛[요분] : 불길한 기분, 전란. 소인배 또는 매구노를 가리킴.

▷帝星[제성] : 황제의 별, 紫微星[자미성], 황제를 지칭.

▷明[명]나라 藍智[남지] 〈磨崖碑[마애비]〉라는 시에

是時妖孼侵唐基[시시요분침당기] : 이 때 요상한 기운이 당나라 기업에 침노하여

帝星白日西南移[제성백일서남이] : 황제의 별이 한 낮에 옮겨 갔네. 라면서

唐[당]나라 玄宗[현종]이 安祿山[안록산]의 난을 피해 蒙塵[몽진]하는 상황을 읊었다.

詔勅[조칙] : 詔書[조서], 왕의 뜻을 백성에게 알리는 문서.

 

절명시 三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已沈淪.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니,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어라.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날 생각하니,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 어렵기도 하구나.

▷鳥獸(조수) : 새와 짐승. 금수(禽獸)

▷哀鳴(애명) : 슬피 욺

▷海岳(해악) : 바다와 산. 해악(海嶽)

▷槿花(근화) : 무궁화. 여기서 '槿花世界(근화세계)'란 우리 나라를 일컬음

▷沈淪(침륜) : 침몰. 몰락

▷掩卷(엄권) : 책을 덮음

▷懷千古(회천고) : 지난 날을 생각함

▷難作(난작) : 되기 어려움

▷識字人(식자인) : 글 아는 사람

 

절명시 四

 

曾無支厦半掾功 只是成仁不是忠.
止竟僅能追尹穀 當時愧不躡陳東.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단지 인을 이룰 뿐이요, 충은 아닌 것이로다.

겨우 능히 윤곡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당시의 진동을 밟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구나.

▷成仁[성인] : 인을 이룸, 정의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함.

국난을 당해 자결함으로써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는 다하였지만, 나라에 도움이 되는 충성을 한 것은 아니라는 뜻.

<論語> <衛靈公>에,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殺身以成仁 : 지사와 인인은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는 일은 없고, 목숨을 버려 인을 이루는 일은 있다.”라고 하였다.

▷尹穀[윤곡] : 宋나라 潭州 長沙 사람으로, 평소 강직하고 廉正함으로 명성이 있었다. 蒙古 군대가 쳐들어와서 潭城을 포위하였을 때 막료로서 성을 방어하는 데 참여하였는데,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처자에게 뒤따라 죽을 것을 명한 뒤, 집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단정히 앉아 자결하였다. 《宋史 卷450 尹穀列傳》

▷陳東 : 北宋 欽宗 연간의 太學生으로, 자는 少陽.

당시 蔡京 등 6인이 司馬光 등 舊法黨을 철저하게 몰아내고 王安石의 신법을 다시 시행하는 등 전횡을 일삼자, 六賊으로 지목하여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 金나라 군대가 침입해 왔을 때 대항을 주장했던 李綱이 파직되자, 태학생들을 이끌고 상소를 올려 그의 복직을 청하기도 하였다. 《宋史 卷455 陳東列傳》

황현 본인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진동처럼 간신배들을 몰아낼 것을 극언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

 

 

각 수의 주제

 

제1수에서는 작가가 이미 순명(殉名)에 대한 결심을 함.

제2수에서는 망국에 대한 슬픔

제3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냄.

제4수는 충(忠)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에 대한 한탄.

 

 

출전

 

<梅泉集>第一券 詩 庚寅稿

 

 

이해와 감상

 

1910년 황현(黃玹)이 지은 한시. 칠언절구 4수이다.

金澤榮이 편한 ≪梅泉集≫(7권, 1911, 상해) 권5에 수록되어 전한다.

〈절명시〉는 작자 황현이 경술국치를 당하여 8월 7일(음력) 더덕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자결하면서 남긴 시이다.

황현은 宗社가 망하는 날 국민이면 누구나 죽어야 옳다고 여겼다. 사대부들이 염치를 중히 하지 못하고 직분을 다하지 못하여 종사를 망쳐 놓고도 자책할 줄 모른다고 통탄하였다. 그는 인간 양심의 각성을 외치며 良知에 殉名(명예를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해 온 江華學派의 한 사람으로서 순명하였다.

 

 

절명시에 나타난 황현의 자세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황 현이 택한 길은 자결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봉건적인 忠의 관념을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글을 아는 사람으로서, 즉 士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었다.

 

죽음이 문제의 합당한 해결책은 아니었지만, ‘붓’만으로 일제와 대결하기에는 너무나 무력했고, 앞으로도 역시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은 순간 황현은 절망하였다. 당시 그는 붓을 총으로 바꿔 들고 나서기 힘들 정도로 많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행동으로 관철할 만한 투쟁적인 체질과 사상을 지니지 못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결국 그가 절명시를 남기며 죽음을 택한 이유는 선비적인 시인으로서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임형택, ‘황매천의 시인 의식과 시’)

 

작자 - 黃玹

 

1855(철종 6)∼1910.

조선 말기의 순국지사·시인·문장가.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전라남도 광양 출신. 시묵(時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청년시절에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에 와서 문명이 높던 강위(姜瑋)·이건창(李建昌)·김택영(金澤榮)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1883년(고종 20)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을 때 그가 초시 초장에서 첫째로 뽑혔으나 시험관이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둘째로 내려 놓았다. 조정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응시하지 않고 관계에 뜻을 잃고 귀향하였다.

 

1888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못해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응시해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당시 나라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정책 아래에서 수구파 정권의 부정부패가 극심했으므로 부패한 관료계와 결별을 선언, 다시 귀향하였다.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해 3,000여 권의 서책을 쌓아 놓고 독서와 함께 시문(詩文) 짓기와 역사 연구·경세학 공부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자 급박한 위기감을 느끼고, 후손들에게 남겨주기 위해 ≪매천야록 梅泉野錄≫·≪오하기문 梧下記聞≫을 지어 경험하거나 견문한 바를 기록해 놓았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통분을 금하지 못하고, 당시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하기 위해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통분해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매천집≫·≪매천시집≫·≪매천야록≫·≪오하기문≫·≪동비기략 東匪紀略≫ 등이 있다.

 

≪참고문헌≫ 騎驢隨筆, 韓國獨立運動之血史,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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