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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와 漢文

東方虯의 시 2수

耽古樓主 2025. 2. 7. 07:49

東方虯의 시 2수

 

春雪

春雪滿空來 (춘설만공래) 觸處似花開 (촉처사화개)
不知園裏樹 (부지원리수) 若個是眞梅 (약개시진매)

봄눈이 하는 가득 내려서닿는 곳마다 꽃이 피는 듯하네.

정원의 나무 구분할 수 없어, 눈꽃이 모두 매화인 줄 아네.

 

書譜에서 집자한 春雪

 

눈 온 날 사진

 

 

昭君怨三首

 

其一首

漢道方全盛(한도방전성),朝廷足武臣(조정족무신)。
何须薄命妾(하수박명첩),辛苦事和親(신고사화친)。

한나라 황도는 지금 한창 왕성하고, 조정에는 무신이 넘쳐나는데도

하필이면 불운한 이내 몸에게, 흉노를 섬기는 고초를 겪으라 하네.

 

其二首

掩淚辭丹鳳(엄루사단봉),銜悲向白龍(함비향백룡)。
單于浪驚喜(선우랑경희),無復舊時容(무부구시용)。

눈물을 흘리며 단봉궐을 떠나와, 백룡으로 가는 길 마음은 찢어지는데

선우는 미친 듯 놀라워하며 기뻐하지만, 소군의 옛 모습 다시는 볼 수 없어라.

○ 丹鳳: 당나라 장안성 대명궁.

白龍: =白龍堆.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동남쪽 천산남로에 있는 염호주변의 사막지역

 

 

其三首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带缓(자연의대완),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으매,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네.

자연히 옷 띠가 느슨해지니, 허리 몸매 보이기 위함이 아니네.

 

 

 

감상

 

어떤 사람은 지은이를 모른다고 하고, 어떤이는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라고 하고, 또 어떤이는 왕소군이라 한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 시절의 궁녀였고, 동방규는 당나라 사람이니 아주 훗날의 사람이다.

지은이가 누구건 간에 이 시의 이해를 돕고 중국의 4대 미녀로 꼽히는 왕소군이 원한을 품을 만한 사연을 잠시 보자면...

 

​중국 前漢 11대 황제는 元帝( BC74~BC33)입니다. 漢元帝 建昭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립니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이때 왕소군, 본명 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지요.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습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습니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습니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지요. 원제 竟寧 원년(BC33), 남흉노의 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습니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지요.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습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합니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합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합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합니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지요.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입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냅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원제는 그녀에게 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합니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습니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떠나간 왕소군....

 

흉노의 땅에서 흉노의 왕 선우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살다가 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흉노의 풍습에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이어받게 되어 있었다 합니다.

 

왕소군이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흉노의 풍속을 따르겠는가?, 한 나라의 풍속을 따르겠는가?"

 

선우의 아들은 흉노의 풍속을 따르겠다고 대답했으니 어머니를 아내로 데리고 살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왕소군은 음독하여 자살했습니다.

왕소군이 죽자 장례를 치뤘는데 원래 흰 풀만 나던 胡地에서 그녀의 무덤에서만 푸른 풀이 났답니다. 그래서 그 푸른무덤을 靑塚이라 불렀답니다.

 

작자-東方虯

 

則天武后 때 左史를 지냈다는 것 이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기타

 

胡가 두가지 뜻으로 쓰임에 착안하여 아래와 같은 구절을 만든 것을 어디선가 보았다.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 화초가 없다고 하는데,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리오.

어찌 땅에 화초가 없으리오마는, 오랑캐 땅이라 화초가 없다하네.

○ 胡(되 호): 오랑캐

○ 胡(어찌 호):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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