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韓愈論史書(여한유론사서)-柳宗元(유종원)
正月二十一日, 某頓首十八丈退之侍者.
正月 21일, 유종원은 머리 숙여 十八丈韓愈선생의 시종을 통해 말씀드립니다.
▶ 正月二十一日 : 元和 9년(814)의 정월을 가리킴.
▶ 某 : 宗元이라는 본명 대신에 '某'자로 겸칭한 것.
▶ 頓首 : 머리 숙임. 편지 앞부분에 사용하는 경어
▶ 十八 : 韓愈가 속한 형제의 行列로 그는 열여덟번째에 속하였다.
▶ 丈 : 연장자에게 붙이는 경어.
▶ 侍者 : 따르며 섬기는 사람, 侍從.
前獲書, 言史事云, 具與劉秀才書, 及今見書槀, 私心甚不喜.
전에 받은 글에서 역사에 관하여 말씀하면서, “劉秀才에게 보낸 편지에 상세히 밝혔다.”라고 하셨는데, 이제 그 글의 草稿를 보게 되니 제 마음이 심히 언짢습니다.
▶ 獲書 : 편지를 받다.
▶ 劉秀才 : 이름은 軻. 劉軻의 傳記는 미상. '수재'는 본래 과거의 한 과목이었으나 뒤에는 鄕貢에 급제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으로 변하였다. 〈與劉秀才書〉는 현재 《韓昌黎文集》에는 전하지 않고 《韓文外集》 권2와 《全唐文》권514에 각각 실려 있는데 원제는 〈答劉秀才論史書〉이다. 유종원의 이 글은 바로 〈답유수재론사서〉를 구해 본 뒤 각각의 세목에 대하여 자세히 비판한 글이다. 한유의 〈답유수재론사서〉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하여는 해설 참고.
▶ 書槀 : 편지의 원고, 槀는 稿와 같은 자.
與退之往年言史事, 甚大謬, 若書中言, 退之不宜一日在館下.
지난날 선생께서 역사에 대한 말씀과 매우 크게 어긋나므로, 글의 언급대로라면 선생께서는 단 하루라도 史館에 계셔서는 안 됩니다.
▶ 大謬 : 크게 어긋남.
▶ 下 : 史館. ‘下’는 의미없는 助字.
安有探宰相意, 以爲苟以史筆, 榮一韓退之邪.
재상의 뜻을 탐색하여 구차히 역사를 기술하는 글로써 어찌 한유라는 한 사람을 영예롭게 하겠습니까!
▶ 探 : 탐색함.
▶ 史筆 : 역사를 기술하는 글.
若果爾, 退之豈宜虛受宰相榮己, 而冐居館下近密地, 食奉養, 役使掌故, 利紙筆爲私書, 取以供子弟費.
과연 이렇게, 선생께서는 어찌하여 재상이 자신을 영화롭게 함을 까닭 없이 받아들이며, 함부로 密地에 가까운 史館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아 생활하며, 아랫사람을 부리며, 紙筆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글을 쓰며, 자제의 양육비를 얻어낸단 말입니까?
▶ 虛受 : 거짓되이 받아들임. 여기서는 자격이 되지 않으면서도 재상이 자신에게 내려준 史官이라는 영예스러운 직책을 받는다는 뜻.
▶ 冐(모) : ‘冒’와 같은 글자. 함부로,
▶ 近密地 : 史官은 천자나 정치가 이루어지는 중심권에 가까이 있음을 뜻한다.
▶ 奉養 : 녹봉으로 살아감.
▶ 掌故 : 원래 漢代에 설치되어 예악의 故實 등을 관장하던 屬이었으나 여기서는 하급의 사관을 지칭함.
▶ 利 : 사사로이 이용함.
▶ 供 : 갖춤, 공급함.
古之志於道者, 不宜若是.
옛적의 志士는 이런 것을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且退之以爲紀錄者有刑禍, 避不肯就尤非也.
더구나 선생께서는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에게 天刑이나 人禍가 있다고 여겨, 회피하고 직책을 맡지 않으려 하셨는데, 그것은 더욱 그릇된 일입니다.
史以名爲褒貶, 猶且恐懼不敢爲, 設使退之爲御史中丞大夫, 其褒貶成敗人愈益顯, 其宜恐懼尤大也.
사관은 褒貶을 명분으로 하는데, 두려워하여 감히 기록하기조차 못한다면, 가령 선생께서 御史中丞·御史大夫가 되어 남을 포폄하고 평가하는 일이 더욱 잦아지면 두려워함이 더욱 클 터입니다.
▶ 刑禍 : 天刑과 人禍. 한유는 〈答劉秀才論史書〉에서 사관에겐 천형이 내려지지 않으면 인화가 생긴다고 하였다.
▶ 御史中丞大夫 : 백관의 非違나 행실을 감찰함이 御史臺의 임무이며 그곳의 장관은 御史大夫, 부장관은 御史中丞이다. 한유가 史實을 기록하는 사관에게 형화가 미칠 것이라고 한 말에 대해 유종원은 다른 사람의 손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어사대의 경우를 들어 비교 반박한 것이다.
▶ 成敗人 :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들추어냄. 남을 평가함.
則又將揚揚入臺府, 美食安坐, 行呼唱於朝廷而已邪.
그리하면 의기양양하게 臺府로 들어가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자리에서 조정에 호령함에 그치겠습니까?
▶ 揚揚 : 득의한 모습.
▶ 臺府 : 어사대의 관청.
▶ 行呼唱 : 呼唱을 행함. 호창이란 백관이 조정에 모여 조회할 때 어사대부·중승이 열을 정렬하고 지휘함을 뜻함.
在御史猶爾, 設使退之爲宰相, 生殺出入升黜天下士, 其敵益衆, 則又將揚揚入政事堂, 美食安坐, 行呼唱於內庭外衢已邪.
어사조차 이러한데, 가령 선생께서 재상이 되면 천하의 선비를 生殺·出入·升黜하여 政敵이 더욱 많아질 터이니, 또 의기양양하게 政事堂으로 들어가 좋은 음식과 편안한 자리에서, 안으로 조정이나 밖으로 거리에 호령함에서 그치겠습니까?
▶ 升黜 : 승진시키거나 좌천시킴.
▶ 政事堂 : 정사를 보는 곳. 곧 재상의 집무실.
何以異不爲史而榮其號利其祿者也.
사관이 되지 않으면서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녹봉의 이익을 취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又言不有人禍, 必有天刑, 若以罪夫前古之爲史者然, 亦甚惑.
또 선생께서는 人禍가 있지 않으면 틀림없이 天刑이 미친다고 말하여, 마치 과거의 史官을 비난하는 듯한데, 역시 심한 미혹입니다.
凡居其位, 思直其道, 道苟直, 雖死不可回也, 如回之, 莫若亟去其位.
무릇 사람이 지위에 처함에, 그의 도를 곧게 하기를 생각하되, 그의 도가 진실로 바르다면 죽어도 굽혀서는 안 되고, 만약 굽히게 되면 곧장 그 지위를 떠남이 최선입니다.
▶ 回 : 굽힘. '曲'과 같은 뜻.
▶ 亟(극) : 빨리. 서둘러.
孔子之困于魯衛陳宋蔡齊楚者是也, 其時暗諸侯不能以也, 其不遇而死, 不以作『春秋』故也, 當是時, 雖不作『春秋』, 孔子猶不遇而死也.
孔子가 魯·衛·陳·宋·蔡·齊·楚에서 곤경을 겪었음은 그 당시 시대가 암울하여 제후가 등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공자가 불우한 채 죽음도 《春秋》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니, 당시에 《춘추》를 짓지 않았더라도 공자는 불우하게 죽었을 터입니다.
▶ 是也 : 《柳河東全集》에는 이 구절이 없다. 耽古樓主도 是也를 빼고 해석하였다.
▶ 以 : 用(기용, 등용)과 같은 뜻.
若周公史佚, 雖紀言書事, 猶遇且顯也, 又不得以『春秋』, 爲孔子累.
周公이나 史佚을 이를테면, 언행이나 事績을 기록했지만 도리어 때를 만나 顯達하였으매, 《춘추》로서 공자에게 累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 史佚 : 周 成王 때의 史官. 성은 尹이고 이름은 佚.
范曄悖亂, 雖不爲史, 其宗族亦誅.
范曄은 성격이 悖德하였매 사관이 되지 않았더라도 일족이 주살되었을 터입니다.
▶ 范嘩(범엽) : 南朝 사람. 자는 蔚宗. 《後漢書》 90권을 지은 사관이자 문인, 元嘉22년(445)에 모반을 일으켰다가 주살당하였다.
▶ 悖亂 :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며 일을 어지럽게 함.
司馬遷觸天子喜怒, 班固不撿下, 崔浩沽其直, 以鬪暴虜, 皆非中道.
司馬遷은 천자의 노여움을 건드렸고, 班固는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하였고, 崔浩는 강직함을 드러냄으로써 포악한 오랑캐와 싸웠으니, 모두 중용의 도가 아닙니다.
▶ 司馬遷 : 전한 사람. 흉노와의 싸움에서 항복한 漢의 장군 李陵을 변호하다가 武帝의 노여움을 받아 宮刑을 당함. 그 후 오로지 역사를 기술하는 일에만 열중하여 마침내 《史記》를 완성함.
▶ 喜怒 : 이 경우 '怒'의 뜻이 강조되는 複合辭임.
▶ 班固 : 後漢 사람. 자는 孟堅. 《漢書》의 저자.
▶ 不檢下 : 아랫사람을 단속하지 못함. 반고가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반고의 從僕이 만취하여 洛陽令렬인 种兢에게 무례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반고가 옥사하였다.
▶ 崔浩 : 北朝 北魏 사람. 神䴥 2년(429)에 太武帝가 조령을 내려 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는데 최호는 이 작업에 참여하면서 평소 자신에게 쏟아졌던 모함이나 북조 조정의 부정까지도 直筆하였다. 이에 격분한 북조인들이 계략을 꾸며 최호가 天帝를 꿈꾸고 있다고 모함하니, 태무제는 노하여 治罪한 뒤 최호를 비롯한 일족을 주살하였다.
▶ 沽(고) : 팔다. 여기서는 자랑삼아 드러낸다는 뜻(=怙).
▶ 暴虜 : 난폭한 적. 太武帝를 위시한 이민족의 北朝왕조를 지칭함.
左丘明以疾盲, 出於不幸. 子夏不爲史亦盲, 不可以是爲戒, 其餘皆不出此.
左丘明이 병으로 失明함은 불행했기 때문이며, 子夏는 사관이 아니어도 역시 실명했으니, 이런 예로써 경계할 수 없으며, 나머지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터입니다.
▶ 左丘明 : 《춘추》의 경문에 傳을 붙인 《春秋左氏傳》을 지었다고 하는 魯나라의 사관
▶ 其餘 : 그 나머지. 한유의 〈답유수재론사서〉에는 이상의 사관 외에도 《三國志》의 陳壽, 《晉書》의 王隱, 《漢晉春秋》의 習鑿齒, 《後魏書》의 魏收 등 여러 사람이 등장하나 유종원은 동류로 간주하여 생략하였다.
是退之宜守中道, 不忘其直, 無以他事自恐, 退之之恐, 惟在不直不得中道, 刑禍非所恐也.
그러므로 선생께서 중용의 도를 지키되 강직함을 잊어서는 안 되며 다른 일로 스스로 두려움을 느낄 까닭도 없으니, 선생께서는 강직하지 못함과 중용의 도를 얻지 못함만을 걱정하셔야지 刑禍는 두려워하실 바가 아닙니다.
凡言二百年文武士多, 有誠如此者.
선생께서 本朝 2백 년간 문무의 선비가 많다고 말하였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 二百年 : 韓愈의 시대는 唐이 건국된 지 약 2백년 정도가 흐른 때이다.
今退之曰:
“我一人也何能明?”
則同職者又所云若是, 後來繼今者又所云若是, 人人皆曰:
“我一人.”
則卒誰能紀傳之邪?
그런데 선생께서
“내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역사를 밝힐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같은 직책의 사람도 그렇게 말할 터이요, 후대에 지금을 이은 사관도 또 그렇게 말하여 사람마다
“나 혼자다.”
라고 말할 터이니,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역사를 기록하여 전하겠습니까?
如退之但以所聞知, 孜孜不敢怠, 同職者, 後來繼今者亦各以所聞知, 孜孜不敢怠, 則庶幾不墜, 使卒有明也.
다만 선생께서 듣고 아는 바로써 감히 태만하지 않고 부지런히 기록하고 같은 직책의 사람과 후대의 지금을 잇는 사관도 그들의 듣고 앎을 부지런히 태만하지 않으면, 몸을 망치지 않고 마침내 밝은 역사를 가지게 만들 터입니다.
▶ 孜孜 : 부지런히 힘쓰는 모양.
▶ 墜 : 실추함. 탐고루주는 ‘刑禍에 떨어지지 않음’으로 해석하였다.
不然, 徒信人口語, 每每異辭, 日以滋久, 則所云磊磊軒天地者, 決必不沈沒, 且亂雜無可考, 非有志者所忍恣也.
그렇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믿고, 늘 말을 달리하면서 시일이 오래되면, 선생의 소위 ‘천지간에 장쾌하게 우뚝 솟아 결코 사라지지 않음’은 난잡해져서 상고할 수 없을 터이니, 뜻을 지닌 사람이라면 차마 방자할 바가 아닙니다.
▶ 口語 :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
▶ 磊磊(뇌뢰) : 돌이 무더기로 쌓인 것처럼 장엄하고 쾌활함.
▶ 軒天地 : 천지간에 높이 솟음.
▶ 恣 : 그대로 방치함.
果有志, 豈當待人督責迫蹙然後, 爲官守邪?
정말로 뜻을 지녔다면 어찌하여 남의 독촉을 받고 나서 관직의 임무를 수행한단 말입니까?
▶ 督責 : 독촉하고 추궁함.
▶ 迫蹙 : 재촉함.
▶ 官守: 관직의 임무를 수행함.
又凡鬼神事, 眇茫荒惑, 無可準, 明者所不道. 退之之智, 而猶懼於此, 今學如退之, 辭如退之, 好言論如退之, 慷慨自謂正直行行焉如退之, 猶所云若是則唐之史述, 其卒無可託乎?
또 귀신의 일은 아득하고 허황하여 준거할 수 없으매 명철한 사람은 입에 담지 않는 바이거늘, 선생 같은 智者조차 그것을 두려워하시니, 학식이 선생과 같고 문장이 선생과 같고 토론을 좋아함이 선생과 같고 義氣를 가지고 정직한 행동을 한다고 자칭함이 선생과 같으면서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당나라 역사의 기술을 맡길 사람이 도대체 없지 않겠습니까?
▶ 眇茫(묘망) : 아득하여 망망함.
▶ 荒惑(황혹) : 황당무계하고 미혹스러움.
▶ 猶懼於此 : 이에 대하여 두려워하다. 곧 귀신을 두려워함.
明天子賢宰相, 得史才如此, 而又不果, 甚可痛哉.
明天子·賢宰相이 선생과 같은 史官의 人才를 얻고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매우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退之宜更思, 可爲速爲, 果卒以爲恐懼不敢, 則一日可引去, 又何以云行且謀也.
선생께서 마땅히 생각을 고쳐서 할 수 있으면 속히 실행하되, 끝내 두려워서 감행하지 못하면 그날로 관직을 떠날 일이지 무엇 때문에 “조금 해보고 물러날 참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 引去 : 관직을 떠남.
▶ 行且謀 : 조금 해보다가 떠날 것을 도모함. 〈答劉秀才論史書〉에서 '재상의 盛指를 감히 거역할 수 없어 조금 해보다가 떠나려고 한다.'라고 하여 한유는 애당초 사관이라는 직책에 자신감이나 관심이 없었음을 암시하였다.
今當爲而不爲, 又誘館中他人及後生者, 此大惑已.
그런데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서 史館의 동료나 후진을 끌어들임은 커다란 眩惑일 뿐입니다.
不勉己而欲勉人, 難矣哉.
자신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노력하게 함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해설
한유에게 주는 史官을 논한 글로서 《柳河東全集》에는 〈與韓愈論史官書〉라 제목이 되어 있다.
한유의 〈答劉秀才論史書>의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관의 大法은 褒貶인데 그것은 이미 《春秋》에서 갖추어졌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은 역사적 사실대로 기록할 뿐이지만 나같이 재주가 없는 사람은 사실의 기록마저도 못하겠다.
둘째, 사관에게는 人禍나 天刑이 미치니 孔子를 비롯하여 左丘明·司馬遷등 여러 가지 예를 보아도 이것은 분명하다.
셋째, 唐의 건국 이래 무수한 聖君·賢相·文武之士가 있었으니 나 혼자서는 역사를 기록하기가 벅차다.
넷째, 재상은 내가 아무런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도 늙은 이 몸이 세상에 어울리지 못하여 근심스럽게 일생을 마치지 않도록 영광스럽게도 사관이라는 직책을 주셨다. 급하게 독촉하시지는 않으나, 나는 각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으니 조금 해보다가 물러나려고 한다.
다섯째,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다르고 선악은 사람마다 차이가 나니 역사를 포폄함에 있어 과거의 기준에 맞출 수는 없다.
여섯째, 만약 내가 계속 사관의 직무를 수행한다면 설령 귀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부끄러운 일이며, 귀신이 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터이다.
일곱째, 唐의 성스러운 사적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터이니 사관에 적임자가 없을지라도 반드시 후배 중에서 역사가가 나와 엄숙하게 역사를 편찬할 터이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유는 애당초 史館修撰이라는 직책에 열의를 갖지 않았다. 유종원은 이에 대해 조목조목 예를 들면서 한유의 글을 비판하였다. 본문은 유종원이 永州司馬로 좌천되어 있을 때 지은 것이다.
迂齋云:
우재가 말했다.
“掊擊辨難之體, 沈著痛快.”
“때리고 논란을 판별하는 체제가 침착하고 통쾌하다.”
○ 退之爲史官, 柳子厚ㆍ劉秀才皆勉以作史.
퇴지가 사관이 되니 유자후와 유수재가 모두 역사서를 지으라 권면했다.
柳書首云:
“前獲書言史事.”
유종원의 서신의 머리에,
“이전에 편지를 받아보니 사관의 일을 말했습니다.”라고 썼으나,
退之集中, 與柳子之書不存, 所存者, 答劉秀才論史書, 今載外集.
퇴지의 문집 중엔 유자후에게 보낸 편지는 없고, 있는 것은 <答劉秀才論史書>로서, 지금은 外集에 실려 있다.
○ 云:
劉秀才에게 답한 편지에서 말했다.
“辱問敎, 勉以所宜務.
“외람되이 묻고 가르치시어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愚以爲, 凡史氏褒貶大法, 『春秋』已備之矣.
제가 생각하기로 대체로 사관의 포폄하는 큰 본보기는 『춘추』가 이미 완비하였습니다.
後之作者, 在據事跡實錄則善惡自見.
후대의 작가는 사적과 실록에 근거하면 善惡이 절로 드러납니다.
然此尙非淺陋偸惰者所能就, 況褒貶邪.
그러나 이것조차 천박하고 촌스럽고 경박하고 게으른 사람이 성취할 바가 아닌데, 하물며 포폄에 있어서겠습니까?
孔子聖人, 作『春秋』, 辱於魯衛陳宋齊楚, 卒不遇而死.
공자는 성인이었지만 『춘추』를 짓고 노나라와 위나라와 진나라와 송나라와 제나라와 초나라에서 곤욕을 당해 끝내 불우하게 죽었습니다.
齊太史氏, 兄弟幾盡, 左丘明, 紀春秋時事以失明, 司馬遷作『史記』刑誅, 班固瘦死, 陳壽起又廢, 卒亦無所至, 王隱謗退死家, 習鑿齒無一足, 崔浩ㆍ范曄亦誅, 魏收夭絶, 宋孝王誅死, 足下所稱吳競, 亦不聞身貴而今其後有聞也.
제나라의 태사씨는 형제가 거의 죽었고 좌구명은 춘추 시대의 일을 기록하였다가 실명했으며, 사마천은 『사기』를 짓고 형벌을 받았고 반고는 『漢書』를 짓고 수척하여 죽었으며,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등용되었다가 다시 廢黜되어 마침내 또한 이른 게 없었고, 『晉書』를 지은 王隱은 훼방에 은퇴하여 집에서 죽었으며, 『漢晉春秋』를 지은 습착치는 발 하나를 잃었고, 『魏史』를 지은 최호와 『後漢書』를 지은 범엽은 또한 처형되었으며, 『魏書』를 지은 위수는 요절했고 송효왕은 처벌받아 죽었으며, 족하께서 칭찬한 『則天實錄』을 지은 오경도 몸이 귀하게 됐다고 듣지 못했고 그 후손이 알려졌습니다.
夫爲史者, 不有人禍則有天刑, 豈可不畏懼而輕爲之?
사관인 사람에게 사람의 재앙이 있지 않으면 하늘의 형벌이 있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고 그걸 경시하겠습니까?
唐有天下二百年, 聖君賢相相踵, 其餘文武之士立功名, 跨越前後者, 不可勝數, 豈一人卒卒能紀而傳之邪?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200년, 聖君과 賢相이 서로 뒤이었고, 그 외 문무의 선비가 공명을 세워 전후를 뛰어넘은 사람을 이루 셀 수 없으니, 어찌 한 사람으로 분주하게 기록하여 전할 수 있겠습니까?
▶ 卒卒 : ① 분주하다 ② 총망하다
僕年志已就衰退, 不可自敦率.
저의 나이와 뜻이 이미 쇠퇴하여 가니 스스로 분발할 수 없습니다.
宰相, 知其無他才能, 不足用, 哀其老窮齟齬而無所合, 不欲令四海內, 有戚戚者 猥言之上, 苟加一職榮之耳, 非必督責迫蹙, 令就功役也.
재상은 제게 남다른 재능이 없어 등용할 수 없음을 알았으나, 늙고 곤궁하면서도 어긋나 합치되지 못하고 사해 안에서 친밀한 사람을 가지려 하지 않음을 불쌍히 여기고, 외람된 말을 올려 구차하게 한 직책을 더하여 영화롭게 했을 뿐, 반드시 독촉하고 다그쳐 일을 성취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賤不敢逆盛指, 行且謀引去.
천한 저는 감히 성대한 뜻을 거역할 수 없으니 실행하고 또한 도모하려 합니다.
夫盛唐鉅跡, 及賢士大夫事, 皆磊磊軒天地, 決不沈沒, 今館中非無人, 將必有作者勤而纂之.
대체로 성대한 당나라의 큰 자취와 어진 사대부의 일은, 모두 불쑥 천지에 솟았으니 결단코 침몰하지 않을 터이고, 지금 史館에 사람이 없지 않으니 장차 반드시 짓는 사람이 있어 부지런히 편찬할 터입니다.
後生可畏, 安知不在足下?
후배를 두려워할 만하니 어찌 족하께 있지 않다고 알겠습니까?
亦宜勉之.”
또 마땅히 힘쓰십시오.”
○ 讀退之此書然後, 讀子厚此書, 皆是排闢退之書中所說, 意了然矣.
퇴지의 이 편지를 읽은 후에 유자후의 이 편지를 읽어보면, 모두 퇴지가 편지 중에 말한 것을 배척한 뜻이 분명하다.
居其職則宜稱其職, 柳之以史事責韓, 與韓之以諫責陽城, 一也.
그 직책에 있으면 마땅히 그 직책에 걸맞아야 하매, 유자후가 사관의 일로 한유를 꾸짖은 것과 한유가 간쟁으로 양성을 꾸짖은 것은 똑같다.
以韓之平生剛正而有不敢作史之失, 受責何疑?
한유는 평생토록 강직하고 정직해 감히 史官이 되지 못하는 잘못이 있었으니, 꾸짖음을 받더라도 무에 의심하리오?
然卒能成『順宗實錄』五卷, 亦可以塞責矣.
그러나 마침내 『순종실록』 5권을 완성했으니, 또한 책임을 메꿨다고 할 만하다.
▶ 塞責 :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임시로 꾸며대는 일.
與陽城救陸贄, 沮延齡, 略足相當, 能補過如此, 何損二子之賢哉?
양성이 육지를 구제하고 배연령을 저지한 일과 대략 서로 마땅하여 잘못을 보충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두 사람의 어짊을 덜겠는가?
亦朋友責善之力也.
역시 친구 사이에 선으로 권면한 덕이다.
元和八年三月乙亥, 國子博士韓愈, 遷比部郞中史館修撰.
원화 8년 3월 을해에 국자박사 한유가 비부낭중 사관수찬으로 전직되었다.
先是, 愈數黜官, 又下遷, 乃作「進學解」以自喩, 執政覽之, 以其有史才, 故除是官.
이에 앞서 한유는 몇 차례 관직에서 축출되고 또 좌천되자 이에 「진학해」를 지어 자신을 비유하니, 집정관이 글을 보고 사관의 재주를 가졌다고 여겨 이 관직에 제수했다.
制詞曰:
제수하는 제사에서 말했다.
“太學博士韓愈, 學術精博, 文力雄健, 立詞措意, 有班馬之風, 求之一時, 甚不易得.
“태학박사인 한유는 학술이 정밀하고 넓으며, 문장력은 웅장하고 굳건해서 말을 세우고 뜻을 둠에 반고와 사마천의 기풍이 있으니, 한 시대에서 구하더라도 쉽게 얻지 못한다.
加以性方道直, 介然有守, 不交勢利, 自致名望, 可使執簡, 列爲史官, 記事書法, 必無所苟, 仍遷郞位, 用示褒升.”
게다가 성품은 방정하고 도가 곧아 절개 있게 지킴이 있으매, 권세와 이익을 사귀지 않고 스스로 명망을 성취하여 집간을 하게 하여 사관에 나열될 만하니, 일을 기록하는 서법에 틀림없이 구차함이 없을 터이매, 낭의 지위로 전직시켜 승진시킴을 보인다.”
▶ 執簡: 간책(簡冊)을 잡는다는 뜻으로, 史官이나 御史의 직책을 맡은 사람을 가리킨다.
白居易詞也.
이 制詞는 백거이의 글이다.
觀此, 豈可謂宰相苟加史職榮之邪?
이 글을 보면 어찌 ‘재상이 구차하게 사관의 직분을 더하여 그를 영화롭게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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