耽古樓主의 한문과 고전 공부
맹자집주 진심장구 하 제37장 본문
萬章問曰:
「孔子在陳曰:
『盍歸乎來!
吾黨之士狂簡, 進取, 不忘其初.』
孔子在陳, 何思魯之狂士?」
萬章이 물었다.
“孔子께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吾黨의 선비가 狂簡하여 진취적이되 그 처음을 버리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孔子께서 陳나라에 계시면서 어찌하여 魯나라의 狂士를 생각하셨습니까?”
盍, 何不也.
합(盍)은 어찌 아니랴 이다.
狂簡, 謂志大而略於事.
狂簡은 뜻은 크되 일에 소략함을 이른다.
進取, 謂求望高遠.
進取는 高遠한 것을 구하고 바람을 이른다.
不忘其初, 謂不能改其舊也.
不忘其初란 그 옛 잘못을 고치지 못함을 이른다.
此語與論語小異.
이 말은 論語와 조금 다르다.
孟子曰:
「孔子
『不得中道而與之, 必也狂獧乎!
狂者進取, 獧者有所不爲也』 .
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 故思其次也.」
孟子가 말하였다.
“孔子는 말하기를,
‘中道의 인물을 얻어 가르치지 못한다면, 반드시 狂者와 獧者라도 얻어서 교육시키겠다!
狂者는 진취적이요 獧者는 불선을 행하지 않는 바가 있다.’라고 하셨다.
孔子께서 어찌 中道의 人物을 얻기를 원하지 않으셨겠는가?
얻는다고 기필하지 못하므로 다음의 人物을 생각하신 것이다.”
不得中道, 至有所不爲, 據論語亦孔子之言. 然則孔子字下當有曰字.
不得中道로부터 有所不爲까지는 論語를 근거해 보건대, 또한 孔子의 말씀이니, 그렇다면 孔子라는 글자 아래에 마땅히 曰 자가 있어야 한다.
論語道作行, 獧作狷.
論語에 道는 行으로 되어 있고, 獧은 狷으로 되어 있다.
有所不爲者, 知恥自好, 不爲不善之人也.
有所不爲者란 부끄러워할 줄을 알고 자신의 지조를 아껴서, 不善을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孔子豈不欲中道以下, 孟子言也.
孔子豈不欲中道 以下는 孟子의 말씀이다.
「敢問何如斯可謂狂矣?」
“감히 묻겠습니다. 어떠하여야 狂者라 이를 수 있습니까?”
萬章問.
만장이 물었다.
曰:
「如琴張·曾晳·牧皮者, 孔子之所謂狂矣.」
“琴張, 曾晳, 牧皮와 같은 자가 孔子가 이른바 狂者이다.”
琴張, 名牢, 字子張. 子桑戶死, 琴張臨其喪而歌. 事見莊子.
琴張은 이름이 牢요 字는 子張이니, 子桑戶가 죽음에 琴張이 그 喪에 臨하여 노래를 불렀으니, 이 사실이 莊子에 보인다.
雖未必盡然, 要必有近似者.
비록 반드시 다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요컨대 반드시 이와 근사한 점이 있었을 것이다.
曾晳見前篇.
曾晳은 前篇(離婁上)에 보인다.
季武子死, 曾晳倚其門而歌, 事見檀弓.
季武子가 죽음에 曾晳이 그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으니, 이 사실이 禮記 檀弓에 보인다.
又言志異乎三子者之撰, 事見論語.
또 ‘자기의 뜻은 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다.’라고 말하였으니, 이 사실은 論語 先進에 보인다.
牧皮, 未詳.
牧皮는 자세하지 않다.
「何以謂之狂也?」
“어찌하여 狂이라 이릅니까?”
萬章問.
만장이 물었다.
曰:
「其志嘐嘐然, 曰
『古之人, 古之人』 .
夷考其行而不掩焉者也.
“그들의 뜻이 높고 커서 말하기를,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되 평소에 그의 행실을 살펴보면 행실이 말을 덮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嘐嘐, 志大言大也.
嘐嘐(효효)는 뜻이 크고 말이 큰 것이다.
重言古之人, 見其動輒稱之, 不一稱而已也.
古之人이라고 거듭 말한 것은 걸핏하면 稱하고, 한 번만 칭할 뿐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夷, 平也.
夷는 평소이다.
掩, 覆也. 言平考其行, 則不能覆其言也.
掩은 덮음이니 평소에 그 행실을 살펴보면 행실이 그 말을 덮지 못한다는 말이다.
程子曰:
「曾晳言志, 而夫子與之.
蓋與聖人之志同, 便是堯舜氣象也, 特行有不掩焉耳, 此所謂狂也.」
程子가 말하였다.
‘曾晳의 말과 뜻을 夫子께서 許與하셨다.
이는 聖人의 뜻과 같은 것이니, 곧 堯舜의 氣象이었다. 다만 행실에 가리우지 못함이 있었을 뿐이니, 이것이 이르는바 狂이라는 것이다.’
狂者又不可得, 欲得不屑不潔之士而與之, 是獧也, 是又其次也.
狂者를 또 얻을 수 없으면, 不潔한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선비를 얻어서 교육하고자 하셨으니, 이가 獧者이니 또 그 다음이다.”
此因上文所引, 遂解所以思得獧者之意.
이 대문은 윗글에 引用한 것을 인하여 마침내 獧者를 얻을 것을 생각하신 뜻의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狂, 有志者也; 獧, 有守者也. 有志者能進於道, 有守者不失其身.
狂은 뜻이 있는 자요, 獧은 지킴이 있는 자이니, 뜻이 있는 자는 道에 나아갈 수 있고 지킴이 있는 자는 자신의 지조를 잃지 않는다.
屑, 潔也.
屑은 깨끗이 여김이다.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鄕原乎!
鄕原, 德之賊也.』」
曰:
「何如斯可謂之鄕原矣?」
(萬章이 물었다)
“ 孔子가 말하기를,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자는 그 오직 鄕原일 것이다.
鄕原은 德을 해치는 사람이다.’라고 하셨으니,
어떠하여야 鄕原이라 이를 수 있습니까?”
鄕人, 非有識者.
鄕原은 有識한 자가 아니다.
原, 與愿同. 荀子 「原慤」 , 字皆讀作愿, 謂謹愿之人也.
原은 愿과 같으니, 荀子에 原과 慤이라는 글자를 모두 愿으로 읽으니, 매우 삼가하는 사람을 말한다.
故鄕里所謂愿人, 謂之鄕原.
그러므로 鄕里의 이른바 愿人을 鄕原이라 이른다.
孔子以其似德而非德, 故以爲德之賊.
孔子께서는 德 같으면서도 德이 아니기 때문에 德의 적이라고 하신 것이다.
過門不入而不恨之, 以其不見親就爲幸, 深惡而痛絶之也.
문을 지나면서 들어오지 않더라도 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친히 찾아옴을 당하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니, 깊이 미워하고 통렬히 끊으신 것이다.
萬章又引孔子之言而問也.
萬章이 또 다시 孔子의 말씀을 인용하고 물었다.
曰:
「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 古之人, 古之人.
行何爲踽踽涼涼?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
孟子가 말하였다.
“광자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이처럼 말과 뜻이 커서, 말은 행실을 돌아보지 않으며 행실은 말을 돌아보지 않고서 말하기를,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라고 하는가?’라고 한다.
견자에게 말하기를, ‘행실을 어찌하여 이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하는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이 세상을 위하여, 남들이 善하다고 하면 可하다.’라고 한다.
이렇게 閹然히 세상에 아첨하는 자가 鄕原이다.”
踽踽, 獨行不進之貌.
踽踽는 홀로 걸어 나아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涼涼, 薄也, 不見親厚於人也.
涼涼은 薄함이니 남에게 친후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鄕原譏狂者曰:
何用如此嘐嘐然, 行不掩其言, 而徒每事必稱古人邪?
鄕原이 狂者를 기롱하였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嘐嘐然하여 행실이 말을 가리지 못하면서, 한갓 每事에 반드시 古人을 칭하는가?’
又譏狷者曰:
何必如此踽踽涼涼, 無所親厚哉?
또 狷者를 기롱하였다.
‘어찌 반드시 이와 같이 踽踽 涼涼하여 親厚한 바가 없는가?
人旣生於此世, 則但當爲此世之人, 使當世之人皆以爲善則可矣’
사람이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다만 마땅히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하여, 당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善하다고 하게 한다면 可하다.’
此鄕原之志也.
이것이 鄕原의 뜻이다.
閹, 如奄人之奄, 閉藏之意也.
閹은 奄人의 奄과 같으니 닫고 감추는 뜻이다.
媚, 求悅於人也.
媚는 남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다.
孟子言此深自閉藏, 以求親媚於世, 是鄕原之行也.
孟子가 말하였다.
‘이것은 깊이 자신을 닫고 감추어서 세상에 親하고 기뻐하기를 구하니, 鄕原의 행실이다.’
萬子曰: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德之賊, 何哉?」
萬章이 말하였다.
“온 고을 사람이 모두 原人이라고 이른다면, 가는 곳마다 原人이 되지 않음이 없거늘, 孔子께서 德의 賊이라고 하심은 어째서입니까?”
原, 亦謹厚之稱, 而孔子以爲德之賊, 故萬章疑之.
原은 또 謹厚한 칭호인데 孔子께서 德의 賊이라고 하셨으므로 萬章이 의심하였다..
曰: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 合乎汙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德之賊也.
孟子가 말하였다.
“비난하려 하여도 들추어 낼 것이 없으며, 풍자하려 하여도 풍자할 것이 없고,
流俗과 同化하며,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여, 평소에는 忠信과 유사하며, 행함에 淸廉潔白과 닮아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면, 스스로 옳다 여기지만, 그런 자와는 함께 堯舜의 道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므로 德의 賊이라고 하셨다.
呂侍講曰:
「言此等之人, 欲非之則無可擧, 欲刺之則無可刺也.」
呂侍講이 말하였다.
‘이러한 무리의 사람은 비난하고자 하면 거론할 것이 없고, 풍자하고자 하면 풍자할 만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流俗者, 風俗頹靡, 如水之下流, 衆莫不然也.
流俗은 풍속이 무너지는 것이 물이 아래로 흐름과 같아서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汙, 濁也.
汚는 濁이다.
非忠信而似忠信, 非廉潔而似廉潔.
忠信이 아니면서 忠信과 비슷하고, 청렴하고 깨끗함이 아니면서 청렴하고 깨끗함과 유사한 것이다.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孔子가 말하였다.
‘같은 듯하면서 아닌 것(似而非)을 미워하노니,
가라지를 미워함은 가라지가 벼싹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요,
말재주가 있는 자를 미워하노니 그가 義를 어지럽힐까 염려함이요,
말 잘하는 입을 가진 자를 미워함은 그가 信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요,
鄭나라 음악을 미워함은 正樂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요,
자주색을 미워함은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요,
鄕原을 미워함은 德을 어지럽힐까 염려해서이다.’
孟子又引孔子之言以明之.
孟子가 또 孔子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莠, 似苗之草也.
유(莠)는 苗와 비슷한 풀이다.
佞, 才智之稱, 其言似義而非義也.
佞은 재주와 지혜가 있는 자의 칭호이니, 그 말이 義로운 것 같으나 義가 아니다.
利口, 多言而不實者也.
利口는 말이 많으나 성실하지 못한 자이다.
鄭聲, 淫樂也. 樂, 正樂也.
鄭聲은 음탕한 음악이요 樂은 正樂이다.
紫, 閒色. 朱, 正色也.
紫는 중간색이요, 朱는 바른 색이다.
鄕原不狂不獧, 人皆以爲善, 有似乎中道而實非也, 故恐其亂德.
鄕原은 狂하지도 않고 獧하지도 않아서, 사람들이 모두 善하다 하니, 中道의 인물과 유사하지만 실제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 德을 어지럽힐까 두려워하신 것이다.
君子反經而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君子는 떳떳한 道를 회복할 뿐이다.
經道가 바로서면 庶民이 (善에)興起하고,
庶民이 興起하면, 邪慝함이 없어지리라.”
反, 復也.
反은 회복함이다.
經, 常也, 萬世不易之常道也.
經은 常道이니, 萬世에 변하지 않는 常道이다.
興, 興起於善也.
興은 善에 興起함이다.
邪慝, 如鄕原之屬是也.
邪慝은 鄕原과 같은 등속이 이것이다.
世衰道微, 大經不正, 故人人得爲異說以濟其私, 而邪慝幷起, 不可勝正.
세상이 衰하고 道가 쇠미해져서 큰 經道가 바로서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異說을 하여 그 私慾을 이루려고 해서, 邪慝함이 함께 일어나니, 이루 다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君子於此, 亦復其常道而已.
君子가 이에 대하여 또한 그 常道를 회복할 뿐이다.
常道旣復, 則民興於善, 而是非明白, 無所回互, 雖有邪慝, 不足以惑之矣.
常道가 회복되면 백성들이 善에 興起하여 是非가 명백해져서 回互하는 바가 없어, 비록 邪慝한 자가 있더라도 족히 惑하게 할 수 없다.
尹氏曰:
「君子取夫狂獧者, 蓋以狂者志大而可與進道, 獧者有所不爲, 而可與有爲也.
所惡於鄕原, 而欲痛絶之者, 爲其似是而非, 惑人之深也.
絶之之術無他焉, 亦曰反經而已矣.」
尹氏가 말하였다.
‘君子가 狂者와 獧者를 취한 것은 狂者는 뜻이 커서 더불어 道에 나아갈 수 있으며, 獧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어서 더불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鄕原을 미워하여 통렬히 끊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사이비여서 사람을 惑하게 하기가 심하기 때문이다.
이를 끊는 방법은 다른 것이 없다. 역시 經道를 회복할 뿐이다.’
►蓋:承上起下之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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