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詩와 漢文

夜直(야직) - 王安石(왕안석)

耽古樓主 2023. 4. 7. 02:54

夜直(야직) - 王安石(왕안석)

金爐香盡漏聲殘(금로향진누성잔)  剪剪輕風陣陣寒(전전경풍진진한)
春色惱人眠不得(춘색뇌인면부득)  
月移花影上欄干(월이화영상난간)

향불 꺼지고 물시계 소리도 조용한데, 살랑살랑 가벼운 바람에 차츰 추위가 스미네.

봄빛은 사람을 괴롭혀 잠 못 이루게하는데,  달은 꽃 그림자를 옮겨 난간 위에 올려놓았네 .

金爐(금로) : 금빛으로 장식된 향로.

漏聲(누성) : 자격루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剪剪(전전) : 바람이 약간 세게 부는 상황을 묘사한 것.

惱人(뇌인) : 사람을 번뇌스럽게 함.  

 

* 王安石(왕안석. 1021-1086): 중국 북송의 정치인. 자는 개보(介甫)며 호는 반산(半山)이다.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5~6세 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한 천재였고, 1038년에 부친상을 당함에도 노력한 끝에 4년 뒤 진사에 급제하여 북송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일에 종사하다가 할아버지대에 이르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왕안석의 아버지 왕익(王益)은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지방 관아의 하급관료였다. 더해서 그의 집안은 고향 임천현에 “하루 목숨을 기댈 만큼의 경작지”도 없었기에 가난했고, 청빈한 인물이었던 부친 왕익은 지방 하급관료로 지내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근무지를 전전했다.

 

어릴때부터 똑똑했던 왕안석은 불과 5세때 시경과 논어를 통달했으며, 당대의 또래 수재들이 그렇듯 정치, 경제 등 당시 현실적인 부분보다는 시부(詩腑)를 만들어 명성을 올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다. 그러다가 17세가 되던 해 여름, 아버지 왕익이 강령부(江寧府)에 근무하게 되어 이곳에 도착했을 무렵부터 생각이 바뀌어, 시부보다는 학문에 몰두했다.

 

그러나, 1038년에 업무로 인한 과로 등으로 부친 왕익이 사망하여 부친상을 치뤄야 했다. 이 무렵 왕안석은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고, 강령부에 그대로 정착했는데 학문에 몰두함에도, 당시 인종 경력 연간 학문의 유행을 따르면서도 방법은 달랐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해석 후에도 자신이 공부하여 얻은 지식이 정확한지 검증하기 위해,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거나 눈으로 현실 생활을 직접 접하려고 했다. 또 단순히 유가의 학문, 경전만을 공부하지 않고, 제가백가의 학문들과 의서 등 다른 학문까지 폭넓게 습득했다.

 

인종 경력1년인 1042년, 왕안석은 과거에 급제해 섬서회남절도판관(陝西淮南節度判官)을 수여받아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중앙관리는 아니었지만, 뛰어난 학문 지식을 갖추고 행정실무 능력이 탁월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특히 관개사업과 재정 관리 업무 능력에서 평가가 좋았다.

 

가우 5년 인종에게 《만언서(萬言書)》를 지어 바쳤다. 이때 그가 인종에게 건의한 개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중앙 관료들의 주목을 받게 되고, 여러 중앙관료들의 적극적인 추천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왕안석은 모친과 동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이유 등을 들어 사양했다. 만언서를 바친 지 2년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잠시 관직을 떠났고, 모친상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 후에도 40세가 될 때까지 지방관으로 근무했다.

 

왕안석이 유명한 이유는 신법(新法)이라 불리는 개혁일 것이며, 그의 의도는 반대파의 견제와 불안한 정치상황으로 인해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출처 나무위키)

夜直(야직) - 王安石(왕안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