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편은 악의에 대한 열전으로 樂毅는 전국시대 魏의 출신으로 燕의 명장이다. 전국시대 중엽에 燕은 燕王噲가 왕위를 정승인 子之에게 禪讓하였다가 나라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리하여 齊의 침공을 받아 燕王噲가 죽고 나라가 거의 망하게 되었는데, 燕 사람들이 태자 平을 세우니, 이가 바로 昭王이다. 당시 齊湣王은 宋을 멸망시키고 자만에 빠져 기고만장하였다. 燕昭王은 齊에 복수하기 위해 樂毅를 대장군으로 등용하고, 제후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齊를 공격해서 70여 성을 함락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이 齊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로 망명하였다.
樂毅者,其先祖曰樂羊。
樂毅의 先祖는 樂羊이다.
樂羊為魏文侯將,伐取中山,魏文侯封樂羊以靈壽。
악양은 魏文侯의 장수가 되어 中山國을 침공하여 빼앗고, 위문후는 악양을 靈壽땅에 봉하였다.
樂羊死,葬於靈壽,其後子孫因家焉。
악양이 죽자 영수 땅에 장사지냈으므로 그 후 자손이 그곳에 살았다.
中山復國,至趙武靈王時復滅中山,而樂氏後有樂毅。
중산국이 다시 일어났으나 趙武靈王 때에 이르러 다시 중산국을 멸망시켰는데, 악씨 후손에 樂毅가 있었다.
樂毅賢,好兵,趙人舉之。
악의는 현명하고 병법을 좋아하여 趙 사람이 천거하였다.
及武靈王有沙丘之亂,乃去趙適魏。
趙武靈王에게 沙丘의 난이 발생하자 趙를 떠나 魏로 갔다.
聞燕昭王以子之之亂而齊大敗燕,燕昭王怨齊,未嘗一日而忘報齊也。
子之의 난으로 인하여 齊가 燕을 크게 무찌르자 燕昭王이 齊를 원망하여 하루도 齊에 보복하기를 잊지 않음을 알았다.
燕國小,辟遠,力不能制,於是屈身下士,先禮郭隗以招賢者。
燕은 나라가 작고 窮僻하여 국력이 齊를 제압할 수 없었으므로, 屈身下士(몸을 굽혀 선비에 자신을 낮춤)하였는데, 먼저 郭隗를 예우하여 현자를 불러들였다.
樂毅於是為魏昭王使於燕,燕王以客禮待之。
악의가 魏昭王에 의해서 燕에 사자로 갔는데, 燕昭王은 빈객의 예로 대접하였다.
樂毅辭讓,遂委質為臣,燕昭王以為亞卿,久之。
악의가 사양하다 마침내 예물을 바치며 신하가 되니, 燕昭王이 亞卿으로 삼고 오랜 세월이 지났다.
▶ 樂羊為魏文侯將,伐取中山: 기원전408년에 魏文侯가 樂羊을 시켜 中山을 쳐부수게 하였다. 그때 악양의 아들이 중산국에 있었는데, 중산국의 임금은 악양의 아들을 삶아 그 국물을 악양에게 보내었다. 악양은 幕下에 앉아 이를 받아 한 잔을 모두 마셔 버렸다. 결국 악양이 중산국을 깨뜨리자 문후는 그 공으로 상을 주면서도 악양의 마음을 의심하였다. <戰國策 魏策>
▶ 中山: 周나라의 諸侯國으로 전국시대에 中山國이었다. 趙武靈王에게 멸망되었다.
▶ 趙 武靈王: 전국시대 趙의 왕으로 성은 嬴, 씨는 趙, 휘는 雍, 사기색은에는 據, 肅侯의 아들이다. 胡服騎射로 대표되는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도입·응용하여 조를 軍士대국으로 성장시켰다. 사마천은 무령왕을 가리켜 "후계만 감싸다 굶어 죽어서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은가[爲天下笑、豈不痛乎]"라는 엄한 평가를 내렸다.
▶ 沙丘之亂: 기원전295년, 趙 武靈王은 秦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만 전념하겠다고 왕위를 태자인 何에게 물려주니 하가 바로 惠文王이다. 그리고 무령왕 자신은 主父(: 太上王과 같음)의 자리에 앉았다. 애초 태자를 정할 때 長子인 章을 세웠으나 章을 버리고 王子 何를 임금으로 세운 바 있었다. 장자 章이 원한을 품어 惠王 4년에 父子 세 사람이 沙丘의 행궁으로 놀러 갔을 때 난을 일으켰다. 그때 서울에 있던 다른 公子 成과 대부인 李兌가 동조하여 主父(: 武靈王)를 행궁인 沙宮에 석 달 남짓 가두었는데 후에 문을 열어 보았더니 이미 마른 해골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史記 卷43趙世家>,
<史記 卷79范雎蔡澤列傳>
▶ 子之之亂: 기원전314년,燕王噲가 정승인 子之에게 나라를 선양하자 燕이 큰 혼란에 빠졌는데, 齊가 이 틈을 타 공격하니, 燕軍은 싸우지도 않고 성문을 닫지도 않았다. 이에 齊가 燕을 점령하였다. <史記 卷34燕召公世家>
▶ 辟: 僻과 같다. 외지다. 궁벽하다.
▶ 屈身: 자기를 낮추다.
▶ 先禮郭隗以招賢者: 燕昭王은 즉위한 뒤, 賢士들을 많이 초빙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려 하였는데, 郭隗를 스승으로 초빙한 것을 계기로 많은 賢人이 모여들었다. 이때 樂毅가 魏로부터 왔고, 鄒衍이 齊로부터 왔고, 劇辛이 趙로부터 오는 등 선비들이 다투어 燕으로 달려왔다.
▶ 委質: 고대에 신하가 군주에게 헌신의 표시로 바치는 예물. 質은 贄(폐백 ‘지’)와 통한다.
▶ 亞卿: 卿이 되기 전의 벼슬.
當是時,齊湣王彊,南敗楚相唐眛於重丘,西摧三晉於觀津,遂與三晉擊秦,助趙滅中山,破宋,廣地千餘里。
당시에 齊湣王이 강성하여, 남쪽으로 重丘에서 楚將 唐眛을 무찌르고, 서쪽으로 觀津에서 三晉을 꺾어서 마침내 삼진과 함께 秦을 치고, 趙를 도와서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宋을 무찔렀으며, 땅을 천 리나 넓혔다.
與秦昭王爭重為帝,已而復歸之。
秦昭王과 세력을 다투어 稱帝하였다가 얼마 뒤에 다시 원래대로 복귀하였다.
諸侯皆欲背秦而服於齊。
제후가 모두 秦을 배반하고 齊에 복종하려고 하였다.
湣王自矜,百姓弗堪。
齊湣王이 자만하니 백성이 견디지 못하였다.
於是燕昭王問伐齊之事。
이에 燕昭王이 齊를 공격할 일을 물었다.
▶ 楚相: 楚相은 楚將의 오류이다. <史記志疑> 제후들이 楚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그 장수 당말을 죽였다. <史記 卷84屈原賈生列傳>
▶ 三晉: 韓, 魏, 趙를 가리킨다. 이들은 춘추시대 晉의 卿이었는데 전국시대 초기 晉을 3등분하여 차지하고 성씨를 따라 각각 나라를 세웠으므로 三晉이라 칭한 것이다. 여기서는 魏와 趙를 말한다.
▶ 爭重為帝: 기원전288년, 秦昭王은 西帝라 칭하였고, 齊湣王은 東帝라 칭하였다.
▶ 湣王自矜: 齊湣王은 성질이 고집스럽고 난폭하였으며, 宋을 멸망시킨 뒤에는 더욱 교만해져 남쪽으로 楚를 침략하고 서쪽으로 三晉을 공격하고, 天子國인 周나라와 東周를 겸병하여 天子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자주 전쟁에 동원하였고, 열국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 自矜: 자만하다. 자기자랑을 하다.
▶ 堪: 견디다. 감당하다.
樂毅對曰:
「齊,霸國之餘業也,地大人衆,未易獨攻也。
王必欲伐之,莫如與趙及楚、魏。」
악의가 대답하였다.
“齊는 霸國이 남긴 遺業이라서, 땅은 넓고 백성은 많아 홀로 공격함은 쉽지 않습니다.
왕께서 기필코 齊를 치고자 하신다면 趙와 楚、魏와 동맹을 맺음이 낫겠습니다.”
於是使樂毅約趙惠文王,別使連楚、魏,令趙嚪說秦以伐齊之利。
이에 악의를 보내서 趙惠文王과 約條하고, 楚、魏에는 따로 사자를 보내서 연합했으며, 趙를 시켜서 秦에게 齊를 공격함의 利點을 설득하게 하였다.
諸侯害齊湣王之驕暴,皆爭合從與燕伐齊。
제후가 齊湣王의 교만함과 포악함을 꺼렸으므로 모두 다투어 燕과 합종하여 齊를 치기로 하였다.
樂毅還報,燕昭王悉起兵,使樂毅為上將軍,趙惠文王以相國印授樂毅。
악의가 돌아와서 보고하자 연소왕은 全軍을 일으켜 악의를 上將軍으로 삼았으며, 조혜문왕은 상국의 인수를 악의에게 주었다.
樂毅於是并護趙、楚、韓、魏、燕之兵以伐齊,破之濟西。
악의는 이에 趙、楚、韓、魏、燕의 군대를 아울러 齊를 쳐서, 濟水 서쪽에서 齊를 깨뜨렸다.
諸侯兵罷歸,而燕軍樂毅獨追,至于臨菑。
제후의 군대는 罷軍하였으나, 燕軍의 악의는 홀로 추격하여 臨淄에 이르렀다.
齊湣王之敗濟西,亡走,保於莒。
齊湣王은 濟西에서 패하고 도망쳐 달아나서 莒땅을 지켰다.
樂毅獨留徇齊,齊皆城守。
악의의 軍은 홀로 머물며 齊를 둘러쌌으나, 齊는 모두 성을 지키기만 하였다.
樂毅攻入臨菑,盡取齊寶財物祭器輸之燕。
악의가 임치를 공격해 들어가서 齊의 보물과 재물, 제기를 모조리 빼앗아 燕으로 보냈다.
燕昭王大說,親至濟上勞軍,行賞饗士,封樂毅於昌國,號為昌國君。
燕昭王이 크게 기뻐하면서 친히 제수 강변까지 가서 軍士를 위로하고, 상을 주고 대접하였으며, 악의를 昌國에 봉하여 昌國君이라 칭하였다.
於是燕昭王收齊鹵獲以歸,而使樂毅復以兵平齊城之不下者。
燕昭王은 齊의 전리품을 거두어 돌아가면서, 악의를 시켜 다시 군대로 齊의 성으로 점령하지 못한 곳을 평정하게 하였다.
▶ 餘業: 조상이 대대로 남겨놓은 일.
▶ 嚪說: 이익이 있다고 남을 꾀는 말. 嚪은 속이다. 꾀다.
▶ 驕暴: 교만하고 포악함.
▶ 罷歸: 공격을 끝내고 본국으로 돌아감. 일을 끝마치고 돌아감.
▶ 饗士: 軍士에게 음식을 먹임.
▶ 鹵獲: 전리품.
樂毅留徇齊五歲,下齊七十餘城,皆為郡縣以屬燕,唯獨莒、即墨未服。
악의가 齊에 머물며 5년 동안 포위하여 齊의 70여 城을 항복시키고, 모두 군현으로 삼아 燕에 귀속시켰으나, 오직 莒、即墨만이 복종하지 않았다.
會燕昭王死,子立為燕惠王。
마침 燕昭王이 죽고 아들이 즉위하여 燕惠王이 되었다.
惠王自為太子時嘗不快於樂毅,及即位,齊之田單聞之,乃縱反閒於燕,曰:
「齊城不下者兩城耳。
然所以不早拔者,聞樂毅與燕新王有隙,欲連兵且留齊,南面而王齊。
齊之所患,唯恐他將之來。」
惠王은 태자일 때부터 항상 악의를 불쾌하게 여기다가 즉위하자, 齊의 田單이 알고 燕에 반간계를 풀었다.
“齊의 城에 함락되지 않은 것은 두 성뿐이다.
그런데 서둘러서 함락시키지 않는 이유는, 악의가 燕의 새 왕과 사이가 나빠서 전쟁을 끌면서 齊에 머무르다 南面하여 齊의 왕이 되려 함이라는 소문이 있다.
齊가 우려하는 바는, 오직 다른 장수가 오는 것이다.”
▶ 反閒: =反間.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것으로 ≪孫子兵法≫ 〈用間〉에 “反間은 적의 첩자를 이용하는 것이다. 무릇 적의 軍士와 성읍을 공격하려거나 적장을 제거하려 할 때는 반드시 적의 守將과 대상 인물을 알아낸 다음, 자기편의 첩자로 하여금 자국에 와서 활동하는 적국의 첩자를 찾아내어 자기 측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유도해서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국의 첩자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反間者 因敵間而用之也……故反間可得而用也]”하였다.
▶ 連兵: 集结军队.
於是燕惠王固已疑樂毅,得齊反閒,乃使騎劫代將,而召樂毅。
燕惠王은 본래 악의를 의심한 데다 齊의 반간을 듣고, 騎劫을 보내 장수를 대신하고 악의를 불러들였다.
樂毅知燕惠王之不善代之,畏誅,遂西降趙。
악의는 燕惠王이 자신을 싫어하여 기겁으로 교체하였음을 알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서쪽으로 趙에 투항하였다.
趙封樂毅於觀津,號曰望諸君。
趙는 악의를 觀津 땅에 봉하고 望諸君으로 불렀다.
尊寵樂毅以警動於燕、齊。
악의를 높이고 총애하여 燕과 齊를 놀라게 하였다.
齊田單後與騎劫戰,果設詐誑燕軍,遂破騎劫於即墨下,而轉戰逐燕,北至河上,盡復得齊城,而迎襄王於莒,入于臨菑。
齊의 田單은 후에 騎劫과 싸웠는데, 끝내 燕軍에게 속임수를 사용하여 마침내 即墨城 아래에서 기겁을 무찌르고, 전장을 옮기며 燕을 몰아내고, 북쪽으로 黃河에 이르기까지 齊城을 모조리 수복하고, 莒 땅에서 齊襄王을 맞이하여 임치로 들어갔다.
▶ 燕惠王固已疑樂毅: 燕惠王은 昭公의 아들인데 태자로 있을 때부터 樂毅를 좋아하지 않았다. 昭王의 뒤를 이어 즉위한 惠王은 齊의 反間計을 듣고는 악의를 소환하고 대신 騎劫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 田單: 원래 齊의 疏族으로 처음에는 수도 臨淄의 小吏였으나 燕과의 전쟁 때 卽墨싸움에서 火牛陣의 전법으로 燕軍을 대패시키고 齊를 수복하여 安平君에 봉해져 相國이 되었다. <史記권82田單列傳>
▶ 騎劫: 燕惠王은 樂毅를 소환하고 騎劫을 장수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樂毅가 趙로 도망하자 燕軍은 혜왕의 처사에 크게 불만을 품고 전의를 상실하였다. 기겁은 전단에게 죽었다.
▶ 設詐誑燕軍:田單은 갑옷 입은 軍士들은 모두 숨기고 노약자와 부녀자들을 성으로 올려보내 항복할 것을 약속하게 하니 燕軍은 더욱 해이해졌다. 전단은 은밀히 성 밑으로 굴을 뚫어 燕軍을 향하는 큰 지하갱도를 만들어놓았으며, 성 안에 있는 소를 모두 수색하여 천여 마리를 얻어, 소의 몸에는 비단으로 용의 문채를 입히고 뿔에는 칼날을 묶어 매고 꼬리에는 갈대로 만든 횃불을 묶은 다음,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한밤중에 지하갱도로 燕軍을 향해 달려나가게 하고 軍士들이 뒤따르게 하였다. 소들이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내어 燕軍에게 달려드니, 燕軍은 불의의 야간 기습공격에 놀라 대패하였다. 火牛計라고 한다. <史記 卷82田單列傳>
▶ 迎襄王於莒: 淖齒가 湣王을 죽이자 莒의 사람들은 민왕의 아들 法章을 즉묵 땅에서 田單과 합세해 명실상부하게 왕으로 옹립하니, 이가 齊襄王이다.
燕惠王後悔使騎劫代樂毅,以故破軍亡將失齊;
又怨樂毅之降趙,恐趙用樂毅而乘燕之獘以伐燕。
燕惠王은 기겁으로 악의를 대신한 탓에 군대를 깨뜨리고 장수를 잃고 齊 땅을 잃었음을 후회하였다.
또 악의가 趙에 항복하였음을 원망하고, 趙가 악의를 등용하여 燕이 피폐한 틈에 燕을 공격할까 근심하였다.
燕惠王乃使人讓樂毅,且謝之曰:
燕惠王은 사자를 보내 악의를 꾸짖으면서 아울러 사과하였다.
「先王舉國而委將軍,將軍為燕破齊,報先王之讎,天下莫不震動,寡人豈敢一日而忘將軍之功哉!
“선왕께서 나라를 들어 장군에게 맡기자 장군은 燕을 위해 齊를 무찔러 선왕의 원수를 갚으니, 천하에 떨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과인이 어찌 감히 하루라도 장군의 공을 잊겠소!
會先王棄群臣,寡人新即位,左右誤寡人。
마침 선왕께서 신하들을 버리고 세상을 떠서, 과인이 갓 즉위하자 측근이 과인을 그르쳤소.
寡人之使騎劫代將軍,為將軍久暴露於外,故召將軍且休,計事。
과인이 기겁으로 장군을 대신하게 함은 장군이 오랫동안 국외에서 비바람에 고생하기 때문에 장군을 불러 잠시 쉬게 하고 일을 계획하려던 것이오.
將軍過聽,以與寡人有隙,遂捐燕歸趙。
장군은 과인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오해하고, 燕을 버리고 趙로 가버렸소.
將軍自為計則可矣,而亦何以報先王之所以遇將軍之意乎?」
장군 자신을 위한 계략으로는 좋으나, 무엇으로 선왕이 장군을 대우한 뜻을 무엇으로 보답할 터이오?”
樂毅報遺燕惠王書曰:
악의는 燕惠王에게 답장을 보내었다.
臣不佞,不能奉承王命,以順左右之心,恐傷先王之明,有害足下之義,故遁逃走趙。
신은 재주가 없어 왕명을 받들지 못하고 측근의 뜻에 따르지 못하여, 선왕의 밝으심을 손상시키고 足下의 의로움을 해칠까 두려워 趙로 달아났습니다.
今足下使人數之以罪,臣恐侍御者不察先王之所以畜幸臣之理,又不白臣之所以事先王之心,故敢以書對。
지금 足下는 사신을 보내 여러 번 죄를 꾸짖으셨으나, 신은 왕을 모시는 자들이 선왕께서 신을 사랑하신 이치를 살피지 못할까 두렵고, 또 신이 선왕을 섬긴 마음을 밝히지 못할까 두려워서 감히 글로 대답하겠습니다.
臣聞賢聖之君不以祿私親,其功多者賞之,其能當者處之。
신이 듣기에, 현명하고 성스러운 군주는 사사로이 친하다며 녹봉을 주지 않고, 공이 많은 자에게 상을 주고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처리하게 한다고 합니다.
故察能而授官者,成功之君也;
論行而結交者,立名之士也。
그러므로 능력을 살펴 관직을 주는 자가 성공하는 군주이며,
품행을 논하여 교우를 맺는 자는 명예를 세우는 선비입니다.
臣竊觀先王之舉也,見有高世主之心,故假節於魏,以身得察於燕。
신이 삼가 선왕의 인재 등용을 살펴보고, 세상의 군주보다 높은 뜻을 가졌음을 알았으므로 魏의 부절을 빌려서 燕에서 몸으로 관찰하였습니다.
先王過舉,廁之賓客之中,立之群臣之上,不謀父兄,以為亞卿。
선왕께서 과분하게 등용하여 빈객에 포함시키고, 신하들의 윗자리에 세우고, 종실의 대신과 상의도 없이 亞卿으로 삼으셨습니다.
臣竊不自知,自以為奉令承教,可幸無罪,故受令而不辭。
신은 삼가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나, 명령을 받들고 가르침을 받으면 무죄를 바랄 수 있으리라 여기고, 명령을 받음에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先王命之曰:
「我有積怨深怒於齊,不量輕弱,而欲以齊為事。」
선왕께서 명하시었습니다.
“나에게 齊에 대한 누적된 원한과 깊은 분노가 있으니, 燕의 힘이 약함을 따지지 말고, 齊의 일을 大事로 삼고 싶소.”
臣曰:
「夫齊,霸國之餘業而最勝之遺事也。
練於兵甲,習於戰攻。
王若欲伐之,必與天下圖之。
與天下圖之,莫若結於趙。
且又淮北、宋地,楚魏之所欲也,趙若許而約四國攻之,齊可大破也。」
신은 대답하였습니다.
“무릇 齊는 霸國이 남긴 遺業이라 전쟁에서 가장 잘 이긴 事績이 있습니다.
병사와 무기를 단련하였고, 전투에도 익숙합니다.
왕께서 만약 齊를 치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천하와 함께 도모해야 합니다.
천하의 제후과 함께 도모하려면 趙와 동맹을 맺는 것이 최선입니다.
또 淮水북쪽과 宋 땅은 楚와 魏가 욕심내는 땅이니, 趙가 허락하여 네 나라가 맹약을 맺고 齊를 공격하면 齊를 크게 무찌를 수 있습니다.”
▶ 讓: 책망하다. 꾸짖다.
▶ 謝: 사과하다.
▶ 棄群臣: 군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표현.
▶ 暴露: 비바람에 露出됨.
▶ 過聽: =誤聽. 잘못 들음. 틀린 말을 곧이 듣다. 오해하다
▶ 遺: 전하다.
▶ 不佞: 재주가 없다. 무능하다.
▶ 足下: 귀하.
▶ 侍御者: 군주의 시종.
▶ 畜: 받아들이다.
▶ 白: 明白.
▶ 論行: 품행을 헤아림.
▶ 高世主: 일반 군주보다 매우 뛰어남.
▶ 假節於魏王: 樂毅는 먼저 魏왕을 섬겼으나 燕昭王이 현사를 부른다 하므로, 魏昭王과 거짓으로 모의한 후 그 符節을 들고 燕에 가서 魏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假는 빌리다. 節은 符節.
▶ 父兄: 宗室의 大臣.
▶ 承教: 가르침을 받다.
▶ 輕弱: 燕의 국력이 약함.
▶ 最勝; 여러 차례 승리함.
▶ 遺事: 전해 내려오는 事蹟.
▶ 莫若: ~만 같은 것이 없음.
▶ 淮北宋地: 淮北은 淮水의 북쪽. 齊의 남쪽. 宋地는 지금의 河南省 商丘縣과 江蘇省 徐州市 일대. 이때 宋은 아직 망하지 않았고, 樂毅가 齊를 공격하기 2년 전에 齊에게 망하였다.
先王以為然,具符節南使臣於趙。
선왕께서는 옳다고 여기시고 부절을 준비하여, 신을 남으로 趙에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顧反命,起兵擊齊。
돌아와서 복명하고 軍을 일으켜 齊를 쳤습니다.
以天之道,先王之靈,河北之地隨先王而舉之濟上。
하늘의 引導와 선왕의 영험함으로 河北의 땅이 선왕을 따르니, 濟上을 함락하려 하였습니다.
濟上之軍受命擊齊,大敗齊人。
濟上의 軍隊가 명령을 받아 齊를 공격하여 齊軍을 크게 무찔렀습니다.
輕卒銳兵,長驅至國。
날랜 병사와 정예병으로 멀리 쫓아가서 齊의 도성에 이르렀습니다.
齊王遁而走莒,僅以身免;
珠玉財寶車甲珍器盡收入于燕。
齊王은 숨어서 거 땅으로 달아났으니, 근근이 몸만 빠져나왔으며,
주옥과 財寶, 수레와 무기, 진귀한 그릇을 모두 거두어 燕에 들였습니다.
▶ 具: 준비.
▶ 反命: =返命. 복명하다. 명을 수행하고 보고함.
▶ 天之道: 하늘이 인도함. 道는 導와 같으며 引導하다.
▶ 河北之地: 황하의 북쪽으로 趙와 魏의 땅.
▶ 舉之: 전부 모이다. 擧는 全部, 之는 到.
▶ 長驅: 먼 거리를 신속하게 진군하다.
齊器設於寧臺,大呂陳於元英,故鼎反乎磿室,薊丘之植植於汶篁,自五伯已來,功未有及先王者也。
齊의 器物을 寧臺에 두었고, 大呂는 元英宮에 진열했으며, 옛날 빼앗겼던 솥은 磿室宮으로 돌아오고, 齊 汶水 숲의 대나무는 薊땅의 언덕에 옮겨 심었으니, 五霸이래 공로로 선왕에 미칠 자는 없었습니다.
先王以為慊於志,故裂地而封之,使得比小國諸侯。
선왕께서는 뜻에 만족하시어 땅을 떼어 봉하여, 소국의 제후에 견주게 하였습니다.
臣竊不自知,自以為奉命承教,可幸無罪,是以受命不辭。
신은 삼가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나, 명령을 받들고 가르침을 받으면 무죄를 바랄 수 있으리라 여기고, 이 때문에 명령을 받음에 사양하지 않았습니다.
▶ 寧台: 燕의 台이름.
▶ 大呂: 齊의 鍾이름.
▶ 元英: 燕의 궁전명. 寧台아래에 있다.
▶ 磿室 : 역실궁. 燕의 궁전명.
▶ 汶篁: 齊의 문수 가에서 나는 대나무.
▶ 五伯: 五霸. 春秋五覇를 말하며, 齊桓公, 晉文公, 宋襄公, 楚莊王, 秦穆公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慊: 만족.
趙에 망명한 후 燕惠王의 편지를 받고 악의가 자신을 버린 燕惠王에게 답장을 쓴 편지를 일명<報燕王書>라고 하며, 戰國策燕策에도 실려 있다.
태사공 사마천은
“齊의 蒯徹과 主父偃은 악의가 燕 왕에게 쓴 글을 읽고 책을 덮고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臣聞賢聖之君,功立而不廢,故著於春秋;
蚤知之士,名成而不毀,故稱於後世。
신이 듣기에, 현명하고 성스러운 군주는 공을 세우고 廢하지 않기 때문에 春秋에 드러나며,
先見之明이 있는 선비가 명예를 이루면 훼손하지 않기 때문에 후세에 칭송받는다고 합니다.
若先王之報怨雪恥,夷萬乘之彊國,收八百歲之蓄積,及至棄群臣之日,餘教未衰,執政任事之臣,修法令,慎庶孽,施及乎萌隸,皆可以教後世。
선왕께서 원한을 갚고 치욕을 씻었고, 萬乘의 강대국을 평정하고, 800년 동안 축적한 진귀한 보물들을 거두셨고,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도 생전의 가르침이 조금도 쇠하지 않았으니, 정무를 쥐고 일을 맡은 신하는 법령을 손질하고 서얼을 신중히 대우하며 백성에게 은혜가 베풀어지도록 하면 모두 후세에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 春秋: 編年體의 역사서.
▶ 蚤知: 先見之明. 蚤(조: 벼룩는 早와 같으며 早知는 일찍 안다는 뜻)
▶ 夷: 평정하다.
▶ 雪恥: 치욕을 씻다. 설욕하다.
▶ 八百歲之蓄積: 齊가 개국하여 연소왕 때까지 800년간 쌓아 두었던 진기한 보물.
▶ 餘教: 남겨놓은 훈시.
▶ 慎庶孽: 서얼을 신중히 대우하다.
▶ 萌隸: 백성.
臣聞之,善作者不必善成,善始者不必善終。
신이 들으니, 일을 잘 꾸미는 자가 꼭 잘 달성하지는 않으며,
시작을 잘한 자가 꼭 잘 끝마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昔伍子胥說聽於闔閭,而吳王遠跡至郢;
夫差弗是也,賜之鴟夷而浮之江。
옛날 伍子胥의 주장을 闔閭가 따르니, 吳王은 멀리 郢땅까지 족적을 남겼으며,
夫差는 그렇지 않았으니, 가죽부대를 내려 장강에 띄웠습니다.
吳王不寤先論之可以立功,故沈子胥而不悔;
子胥不蚤見主之不同量,是以至於入江而不化。
오왕 부차는 먼저 올린 논의로 공을 이룰 수 있다고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오자서를 강에 가라앉히고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오자서도 군주의 局量이 같지 않음을 일찍 알지 못하였으므로 강에 들어갈 때까지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 說: 주장.
▶ 鴟夷: 말가죽으로 만든 가죽 부대.
▶ 先論: 오자서가 부차에게 월왕의 항복을 거절하라고 건의한 일을 말한다.
▶ 鴟夷而浮之江: 鴟夷는 가죽부대. 夫差는 越王 구천을 용서함에 극력 반대하는 오자서를 죽여 가죽 부대에 넣어 강에 띄워 버렸다.
夫免身立功,以明先王之跡,臣之上計也。
화를 모면하고 공을 세워서 선왕의 공적을 밝힘이 신의 上計입니다.
離毀辱之誹謗,墮先王之名,臣之所大恐也。
헐뜯고 욕하는 비방을 당하여 선왕의 명성을 떨어뜨림은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臨不測之罪,以幸為利,義之所不敢出也。
예측하지 못한 죄를 얻고도 요행으로 이로움으로 삼음은 도의상 감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 免身: 자신의 화를 모면하다.
▶ 跡: 공적.
▶ 離: 罹와 통하여 ‘당하다’.
▶ 毀辱: 헐뜯고 욕함.
▶ 墮: 隳(무너뜨릴 ‘휴’와 같으며 훼손하다. )
臣聞古之君子,交絕不出惡聲;
忠臣去國,不絜其名。
신이 듣기에, 옛날의 군자는 교류를 끊겨도 나쁜 말을 하지 않고,
충신은 나라를 떠나도 그 명예를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臣雖不佞,數奉教於君子矣。
신은 비록 재주가 없으나 몇 번이나 군자에게 가르침을 받들었습니다.
恐侍御者之親左右之說,不察疏遠之行,故敢獻書以聞,唯君王之留意焉。
시종과 친하고 측근의 말을 들어서, 멀리 내쳐진 신의 행동을 살피지 못할까 염려하여 감히 글을 올려 아뢰오니, 부디 군왕께서 유의하십시오.”
於是燕王復以樂毅子樂閒為昌國君;
而樂毅往來復通燕,燕、趙以為客卿。
이에 燕惠王은 다시 악의의 아들 樂閒을 창국군으로 삼고,
악의는 왕래하며 다시 燕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燕과 趙가 그를 客卿으로 삼았다.
樂毅卒於趙。
악의는 趙에서 세상을 떠났다.
▶ 惡聲: 좋지 못한 평판.
▶ 不絜其名: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억울함을 호소함
索隱言忠臣去離本國,不自絜其名,云己無罪,故禮曰「大夫去其國,不說人以無罪」是也。正義言不絜己名行而咎於君,若箕子不忍言殷惡是也。
【索隱】 충신은 본국을 떠나가더라도 스스로 그 이름을 결백하다 하여 자기의 죄 없음을 말하지 않는다. 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기』 곡례 하에 “대부는 그 나라를 떠나면 자신은 죄가 없다고 남에게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正義】 자기의 이름과 행실을 결백하다 하면서 임금을 허물하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기자가 차마 은나라의 나쁜 점을 말하지 않은 것 따위가 이것이다.
▶ 昌國君: 樂毅가 받은 封號로 그 아들 악간이 이어받았다
▶ 通: 사이좋게 지냄.
樂閒居燕三十餘年,燕王喜用其相栗腹之計,欲攻趙,而問昌國君樂閒。
樂閒이 燕에 산 지 30여 년, 연왕 喜가 相國 栗腹의 계책을 써서 趙를 치려고 하며, 창국군 악간에게 물었다.
樂閒曰:
「趙,四戰之國也,其民習兵,伐之不可。」
악간이 말하였다.
“趙는 사방의 적과 싸우는 나라이라서, 백성이 전쟁에 익숙하니, 정벌은 불가합니다.”
燕王不聽,遂伐趙。
연왕이 듣지 않고 마침내 趙를 정벌하였다.
趙使廉頗擊之,大破栗腹之軍於鄗,禽栗腹、樂乘。
趙는 廉頗에게 명하여 燕을 치니, 鄗땅에서 율복의 軍을 대파하고 율복과 樂乘을 사로잡았다.
樂乘者,樂閒之宗也。
악승은 악간의 일족이다.
於是樂閒奔趙,趙遂圍燕。
이에 악간이 趙로 달아나고 趙는 연을 포위하였다.
燕重割地以與趙和,趙乃解而去。
燕이 많은 땅을 떼어주고 趙와 강화하니 趙가 이내 포위를 풀고 떠났다.
▶ 燕王 喜: 孝王의 아들로, 이름은 喜이다.
▶ 燕王喜用其相栗腹之計: 邯鄲의 포위가 풀린 지 5년 만에 燕이 趙의 장정들은 長平의 패전에서 모두 죽고 고아들은 아직 장성하지 못했으니, ‘趙를 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한 丞相 栗腹의 계책을 받아들여 軍을 일으켜 趙를 치자, 趙가 廉頗로 하여금 軍을 거느리고 치게 하니, 廉頗는 燕軍을 鄗땅에서 크게 격파하여 栗腹을 죽이고 드디어 燕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燕이 城 다섯을 떼어 강화를 청하므로 이에 받아들였다. <史記 卷81廉頗藺相如列傳〉
▶ 廉頗: 趙 장수. 藺相如와 함께 열전이 있다.
▶ 鄗: 趙의 邑. 지금의 河北省柏鄕縣북쪽.
▶ 樂乘: 樂毅, 樂間의 일족이다.
▶ 禽: 擒과 같으며‘사로잡다’.
▶ 宗: 一族.
燕王恨不用樂閒,樂閒既在趙,乃遺樂閒書曰:
연왕 희는 樂閒의 의견을 채용하지 않았음을 뉘우쳤으나, 악간은 이미 趙에 있으므로 악간에게 편지를 보냈다.
「紂之時,箕子不用,犯諫不怠,以冀其聽;
商容不達,身祇辱焉,以冀其變。
“은나라 紂王때 箕子는 자신의 의견이 쓰이지 않았음에도 무례하게 간언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주왕이 들어주기를 바랐으며,
商容도 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에도 몸에 치욕을 당하면서도 주왕이 바뀌기를 기대했소.
及民志不入,獄囚自出,然後二子退隱。
백성의 마음이 흩어지고 죄수들이 스스로 탈출할 지경이 돼서야 두 사람은 물러나서 숨어버렸소.
故紂負桀暴之累,二子不失忠聖之名。
그러므로 주왕은 포악하다는 허물을 뒤집어썼으나, 두 사람은 충성스럽고 성스럽다는 이름을 잃지 않게 되었소.
何者?
其憂患之盡矣。
무슨 까닭이겠소?
이들은 끝까지 나라를 걱정했기 때문이오.
今寡人雖愚,不若紂之暴也;
燕民雖亂,不若殷民之甚也。
지금 과인은 비록 어리석으나 주왕처럼 포악하지 않으며,
燕 백성은 비록 어지러우나 은나라 백성만큼 심하지는 않소.
室有語,不相盡,以告鄰里。
집에 할 말이 있는데 서로 다 말하지 않고, 이웃 마을에 고하는 것이오.
二者,寡人不為君取也。」
이 두 가지 일은 과인이 보기에 그대가 취할 바가 아니오.”
▶ 箕子: 商: 殷나라 말의 폭군 紂의 숙부. 이름은 胥餘. 太師였으며 子爵, 箕땅에 봉해져 기자라 하였다. 紂가 무도하여 충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며 숨었다.
▶ 犯諫: 무례하게 간언하다.
▶ 商容: 殷나라 紂왕에게 忠諫을 하다가 유배를 당한 은나라 대부.
▶ 祇:只와 같다. 단지. 오직.
▶ 民志不入: 민심이 흩어지다.
▶ 桀暴: 포악하다.
樂閒、樂乘怨燕不聽其計,二人卒留趙。
악간과 악승은 燕이 그들의 계책을 듣지 않음을 원망하였고, 두 사람은 끝내 趙에 머물렀다.
趙封樂乘為武襄君。
趙는 악승을 武襄君에 봉하였다.
其明年,樂乘、廉頗為趙圍燕,燕重禮以和,乃解。
그 이듬해, 악승과 염파가 趙를 위해 燕을 포위하자, 燕이 정중한 예의로 화친을 청해 포위를 풀었다.
後五歲,趙孝成王卒。
5년 후, 趙孝成王이 卒하였다.
襄王使樂乘代廉頗。
趙襄王이 악승으로 염파를 대신하게 하였다.
廉頗攻樂乘,樂乘走,廉頗亡入魏。
염파가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은 달아났고, 염파는 魏로 망명하였다.
其後十六年而秦滅趙。
그로부터 16년 후에 秦이 趙를 멸망시켰다.
其後二十餘年,高帝過趙,問:
「樂毅有後世乎?」
그 후 20여 년, 漢高祖가 趙를 지남에, 물었다.
“악의에게 후손이 있는가?”
對曰:
「有樂叔。」
이에 대답하였다.
“樂叔이 있습니다.”
高帝封之樂卿,號曰華成君。
高帝는 그를 樂卿에 봉하고 華成君으로 불렀다.
華成君,樂毅之孫也。
화성군은 악의의 손자다.
而樂氏之族有樂瑕公、樂臣公,趙且為秦所滅,亡之齊高密。
악씨의 일족으로는 樂瑕公과 樂臣公이 있는데, 趙가 秦에게 멸망하자 齊의 高密로 도망하였다.
樂臣公善修黃帝、老子之言,顯聞於齊,稱賢師。
악신공은 黃帝와 老子의 학문에 정통하여 齊에 명성을 떨쳤고 어진 스승으로 칭송받았다.
▶ 亡: 도망하다.
▶ 黃帝老子之言: 黃老之學을 말한다. 黄老는 黄帝와 老子. 황노사상은 전국시대 중후기부터 漢나라 시대까지 약 400년 동안 유행하던 하나의 사상이다. 황제는 전설상의 인물이지만 각종 법률과 규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상징되며 노자는 도가사상의 뿌리이자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황노사상은 보통 법가와 도가가 융합된 사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始齊之蒯通及主父偃讀樂毅之報燕王書,未嘗不廢書而泣也。
일찌기 齊의 蒯徹과 主父偃은 악의의 <報燕王書>를 읽음에, 책을 덮고 울지 않은 적이 없었다.
樂臣公學黃帝、老子,其本師號曰河上丈人,不知其所出。
악신공은 황제와 노자를 배웠는데, 그의 원래 스승은 河上丈人으로 불리나 출신을 알 수 없다.
河上丈人教安期生,安期生教毛翕公,毛翕公教樂瑕公,樂瑕公教樂臣公,樂臣公教蓋公。
하상장인은 安期生을 가르치고, 안기생은 毛翕公을 가르쳤으며, 모흡공은 樂瑕公을 가르치고, 악하공은 樂臣公을 가르쳤으며, 악신공은 蓋公을 가르쳤다.
蓋公教於齊高密、膠西,為曹相國師。
합공은 齊 고밀과 膠西에서 가르쳤는데 상국 曺參의 스승이다.
▶ 蒯通: 漢나라의 劉邦과 楚의 項羽가 천하를 다투던 시절 韓信의 策士로 본명은 蒯徹이다
▶ 主父偃: 漢武帝 때의 문신으로 臨淄사람이다. 主父는 복성이고 偃은 이름이다. 출신이 빈천하였으나 총명하여 어려서 縱橫家를 배우고 뒤에 周禮, 春秋및 百家의 학설을 두루 익혔다.
▶ 廢: 내려놓다.
▶ 本師: 宗師. 모든 사람이 높이 우러러보는 스승.
▶ 蓋公: 漢나라 초기의 학자이며 膠西사람으로 黃老學에 조예가 깊었다. 蓋公은 성명이 아니고 公은 그에 대한 존칭으로 이름을 전하지 않는바, 蓋자는 姓이나 地名으로 쓸 경우에는 ‘합’으로 읽는다.
※蘇軾은 樂毅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樂毅가 趙로 간 뒤 수십 년 동안, 그 아들과 손자들의 功名이 없어지지 않았고, 漢高帝가 일어나 천자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사모하여 찾아갔으니, 대략 樂毅의 풍격이 또한 천하 사람들을 경동시킬 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남은 풍격이 쇠하지 않은 것이다. (樂毅去趙後 累數十年 其子與孫 功名不滅 而漢高帝之興 猶向往之 大略毅之風度 亦似可傾動天下者 故其餘風不衰.”<宋大家蘇文忠公文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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