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列傳

列傳권68.商君列傳(상군열전)

耽古樓主 2023. 7. 21. 09:17

 

商鞅(기원전 390년 기원전 338)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 의 法家를 대표하는 중요한 정치가였다을 분봉받아 후작이 되어 상앙으로 부르며 본래의 은 는 공公孫이름은 이다또 다른 별칭으로 의 公族이라서 衛鞅이라 불렸다주나라 왕족과 위 공족의 후예였으며車裂刑의 창시자였는데 후일 그 자신이 거열형으로 처형된다.


사상적인 면은 의 이회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오가작통법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什伍制를 만들었다또한동양 최초로 노예 제도의 부분적 폐지를 주장하였다.

 

부국강병의 술책으로 진효공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좌서장을 거쳐 총리 격인 大良造로 승진하여 정치개혁의 총설계자가 되었다두 차례의 변법을 성공시켜 약소국 을 일약 강대국으로 만들어냈다저서로는 商君書》 29편이 있으며병법 지식도 박식하여 병서兵書인 公孫鞅》 27편을 짓기도 했다.

 

 

商君者衛之諸庶孼公子也.
상군은 의 庶孼公子이다.

名鞅姓公孫氏其祖本姬姓也.
이름은 이고성은 公孫氏이며 그 조상은 본디 주나라 왕족과 같은 姬姓이다.

鞅少好刑名之學事魏相公叔座爲中庶子.
공손앙은 젊어서부터 形名學을 좋아하였고魏 재상인 公叔座를 섬겨 中庶子(공족을 관장하는 벼슬가 되었다.

公叔座知其賢未及進.
공숙좌는 그가 현명함을 알았으나아직 왕에게 천거할 기회가 없었다.

姓氏: 중국의 고대에는 를 구별했는데, 성은 가족 계통을 기준으로 한 칭호이고, 씨는 종족집단을 지칭하는 칭호이다.
公叔座: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위혜왕 10년인 기원전 361년에 죽었다. 성은 이고 씨는 이고 이름은 이다. 공족 출신으로 魏武侯 田文의 뒤를 이어 의 재상이 되었다. 王錯과 함께 吳起를 모함하여 오기가 로 달아나게 하였다.
위혜왕 8년 기원전 362년 그는 魏軍을 이끌고 출전하여 澮水 북안에서 , 두 나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으로 진공하여 皮牢의 땅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땅인 少梁을 공격해 오자 공손좌는 군사를 이끌고 다시 출전하여 싸웠으나 秦軍에 포로가 되었다. 후에 으로부터 석방되어 돌아와 의 재상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中庶子; 주나라가 설치한 관직으로 제후나 . 大夫들의 자식 중 서자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후에 춘추와 전국을 거치면서 제후들도 따라서 설치하였다.

會座病魏惠王親往問病曰 :
「 公叔病有如不可諱將柰社稷何 
마침 공숙좌가 병이 났을 때 위혜왕이 몸소 찾아와 문병하고 말하였다.
공숙의 병으로 죽으면 장차 사직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

公叔曰 :
「 座之中庶子公孫鞅年雖少有奇才願王擧國而聽之
공숙좌가 말하였다
저의 家臣인 中庶子 공손앙이 나이는 비록 젊지만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니왕께서는 나라를 온통 들어 그의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病有如不可諱: ‘병환에 말하지 못할 일이 생기면병으로 죽으면

王嘿然.
위왕은 말이 없었다.

王且去座屛人言曰 :
「 王卽不聽用鞅必殺之無令出境
왕이 가려고 하자공숙좌가 주위를 물리치고 말하였다.
대왕께서 공손앙을 쓰지 않으시려면 반드시 그를 죽여서국경 밖으로 내보내지 마십시오.”

王許諾而去
위왕이 허락하고 떠났다.

 

公叔座召鞅謝曰 :
「 今者王問可以爲相者我言若王色不許我.
我方先君後臣因謂王卽弗用鞅當殺之王許我.
汝可疾去矣且見禽
공숙좌가 공손앙을 불러 사과하였다.
지금 대왕께서 재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묻기에나는 그대를 천거하였는데대왕의 안색이 내 말을 허락하지 않을 듯하였다.
나는 임금을 우선하고 신하를 뒤로해야 하기에 대왕에게 말하기를, ‘공손앙을 등용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죽여야 합니다.’라고 했더니 왕이 내 말을 허락하였다.
그대는 빨리 떠나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잡혀 죽을 터이다.”

: ~하지 않으면. 허사 참조

[한문의 허사] - 한문의 허사(虛詞) 且

 

한문의 허사(虛詞) 且

한문의 허사(虛詞) 且 且猶 ~조차 且又 또한 且는 부사, 접속사, 어기사, 대명사 등으로 쓰인다. 부사로서의 且는 당송시대에 “단지” “의연히” “겨우” 등의 새로운 뜻이 생겨났다. 접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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鞅曰 :
彼王不能用君之言任臣又安能用君之言殺臣乎 
공손앙이 말하였다.
저 대왕께서 상공의 말씀을 채용하여 저를 임명하지 않는데또 어찌 상공의 말을 듣고 저를 죽이겠습니까?”

卒不去.
끝내 떠나지 않았다.

惠王旣去而謂左右曰 :
「 公叔病甚悲乎欲令寡人以國聽公孫鞅也豈不悖哉 
혜왕은 대궐로 가자 측근에게 말하였다.
공숙좌의 병이 위중하니 슬프도다 !
과인에게 국사를 공손앙에게 듣고 처리하라고 하니어찌 망령된 소리가 아니겠소 ? ”

公叔旣死公孫鞅聞秦孝公下令國中求賢者將修繆公之業東復侵地迺遂西入秦因孝公寵臣景監以求見孝公.
공숙좌가 죽자공손앙은 秦孝公이 나라 안에서 賢者를 구한다고 명령을 내려장차 秦繆公의 유업을 계승하여 동쪽의 침략 당한 땅을 회복하려 함을 알고마침내 서쪽으로 에 들어가서 효공의 寵臣인 景監을 통하여 효공을 뵙고자 하였다.

秦穆(繆公: 기원전 659년부터 621년까지 재위한 춘추 때 陝秦의 군주다. 춘추오패 중의 한 사람으로 재위 기간 중 다음과 같은 치적을 올렸다.
1. 百里奚蹇叔 등의 謀臣을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 즉위 초에 동쪽의 중원으로 진출하여 패업을 이룩하기 위해 친히 군사를 이끌고 唐晉을 공격하여 河曲에서 싸웠다.
3. 주양왕 원년, 기원전 651河西 河外五城을 섬진에게 할양한다는 제안을 수락하고 군사를 동원 진헌공의 아들 夷吾를 귀국시켜 그 군주자리에 올렸다. 이가 진혜공이다.
4, 기원전 645년 당진의 혜공이 약속을 파기하고 섬진에게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자 그는 즉시 군사를 이끌고 당진을 공격하여 韓原에서 당진군을 대파하고 혜공을 포로로 잡았다. 당진의 혜공은 옛날 약속한 대로 하서의 땅 8개의 성을 섬진에게 할양한 다음 석방되었다.
5. 기원전 641, 이민족이 세운 지금의 섬서성 韓城市 남쪽에 있었던 大荔縣 부근의 를 멸하고 섬진의 영토에 병합하였다.
6. 그 전에 당진의 헌공과 혜공의 핍박으로 중원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공자 重耳를 기원전 636, 섬진으로 초치하여 후하게 대접한 다음, 군사를 내어 당진으로 귀국시켜 그 군주자리에 앉혔다. 이가 晉文公이다.
7. 다시 진문공이 국내의 반대세력이 일으킨 반란으로 쫓겨오자, 진목공은 군사를 내어 반란을 진압하고 그 정권을 안정시켰다.
8. 기원전 628년 진문공이 죽자 건숙과 백리해의 간하는 말을 뿌리치고 을 기습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다. 공격을 성공하지 못하고 중도에 회군하는 섬진군은 그 다음 해인 기원전 627년에 효산에서 당진군의 매복에 걸려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9. 이에 진공 방향을 서쪽으로 돌린 진목공은 내사 의 계책을 이용하여 戎王과 그 신하를 이간시켜 그 결과 섬진국에 항복해 온 由餘의 계책을 이용, 융국을 포함한 서융의 20여 개 나라를 병탄하여 천여 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에 진목공은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10. 그러나 그가 이루었던 패업도 기원전 621년 그가 죽을 때 170명에 달하는 섬진의 대소 신료들을 순장시킴으로써 허사가 되었다.

孝公旣見衛鞅語事良久孝公時時睡弗聽.
효공이 의 공손앙을 만났으나말이 장황하고 지루하여 효공이 때때로 졸면서 듣지 않기도 하였다.

罷而孝公怒景監曰 :
子之客妄人耳安足用邪 !
공손앙이 물러가자 효공이 노하여 경감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빈객은 망령된 사람일 뿐인데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景監以讓衛鞅.
경감이 이 때문에 의 공송앙을 나무랐다.

衛鞅曰 「 吾說公以帝道其志不開悟矣
위앙이 말하였다
“ 제가 군주에게 帝道를 가지고 말씀드렸는데그 뜻을 깨닫지 못하셨습니다.”

後五日復求見鞅.
그 후 5경감이 효공에게 다시 위앙을 만나보기를 권하였다.

鞅復見孝公益愈然而未中旨.
위앙이 다시 효공을 뵙고 더욱 열심히 유세했으나 효공의 뜻에 맞지 않았다.

罷而孝公復讓景監景監亦讓鞅.
위앙이 물러가자 효공은 다시 경감을 꾸짖었고경감도 위앙을 나무랐다.

鞅曰 :
「 吾說公以王道而未入也請復見鞅
위앙이 말하였다.
내가 군주께 王導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만마음에 들이지 않았습니다다시 저를 만나보게 해주십시오.”

鞅復見孝公孝公善之而未用也.
공손앙이 다시 효공을 뵈었는데효공은 좋다고 하면서도 그를 등용하지는 않았다.

罷而去.
위앙이 물러나와 떠났다.

孝公謂景監曰 :
「 汝客善可與語矣
효공이 경감에게 말하였다.
“ 네 빈객은 훌륭하여 함께 대화할 만하다. ”

鞅曰 :
「 吾說公以霸道其意欲用之矣.
誠復見我我知之矣 
위앙이 말하였다.
“ 나는 군주에게 霸道를 설명하였더니속으로 그것을 채용하려고 합니다.
꼭 다시 저를 만나보게 해주십시오내가 군주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

衛鞅復見孝公.
위앙이 다시 효공을 알현하였다.

公與語不自知膝之前於席也.
효공은 함께 대화함에열중한 나머지 그의 무릎이 자리 앞으로 나온 줄도 몰랐다.

語數日不厭.
며칠 동안 이야기를 대화함에 싫증을 내지 않았다.



景監曰 「 子何以中吾君 ?
吾君之驩甚也
경감이 말하였다.
그대는 무엇으로 우리 군주의 마음을 맞추었소?
군주께서 매우 기뻐하시오. ”

鞅曰 :
「 吾說君以帝王之道比三代而君曰 :
'久遠吾不能待.
且賢君者各及其身顯名天下,安能邑邑待數十百年以成帝王乎 ?'
故吾以彊國之術說君君大說之耳然亦難以比德於殷周矣」」
공손앙이 말하였다.
나는 군주께 帝王의 로써 三代에 비길 수 있다고 말씀드렸더니군주께서 말하시기를,
‘ 너무 멀어서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소.
또 현명한 군주라면 각기 그 당대에 이름을 천하에 떨치려 하지어찌 답답하게 수십 년수백 년 동안 기다려야만 성취할 수 있는 제왕의 도를 이루겠는가?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국강병책을 말씀드렸더니 군주께서 매우 기뻐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부국강병책은 은·주의 덕치에 견주기는 어렵습니다. ”

 

孝公旣用衛鞅鞅欲變法恐天下議己.
효공이 위앙을 등용하자위앙은 국법을 바꾸려 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자기를 비방할까 두려웠다.

衛鞅曰 :
「 疑行無名疑事無功.
且夫有高人之行者固見非於世 有獨知之慮者必見敖於民.
愚者闇於成事知者見於未萌.
民不可與慮始而可與樂成.
論至德者不和於俗成大功者不謀於衆.
是以聖人苟可以彊國不法其故 苟可以利民不循其禮
위앙이 말하였다.
의심하는 행동에는 명예가 없고의심스러운 일에는 공로가 없습니다.
또 대체로 고상한 사람의 행동은 본래 세상의 비난을 받고홀로 지혜로운 자의 생각은 틀림없이 백성들에게 오만하다고 여겨집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도 어둡고지혜로운 사람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도 미리 압니다.
백성이란 시작할 때 의논할 수는 없지만 성공을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높은 덕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타협하지 않으며큰 공을 이루는 자는 대중과 모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진실로 나라를 강하게 할 수 있다면옛것을 본보기로 하지 않으며진실로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절을 따르지 않습니다. ”

孝公曰 :

「 
효공이 말하였다.
좋소.”

甘龍曰 :
「 不然.
聖人不易民而敎知者不變法而治.
因民而敎不勞而成功 ;
緣法而治者吏習而民安之
그러자 甘龍이 말하였다.
“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은 백성의 풍속을 바꾸지 않고 교화하며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바꾸지 않고도 다스립니다.
백성들을 풍속에 따라서 교화하면 힘들이지 않고도 공을 이루며,
종래의 법으로 다스림에관리들은 익숙하여 백성이 편안해할 터입니다. ”

衛鞅曰 :
「 龍之所言世俗之言也.
常人安於故俗學者溺於所聞.
以此兩者居官守法可也非所與論於法之外也.
三代不同禮而王五伯不同法而霸.
智者作法愚者制焉 賢者更禮不肖者拘焉
위앙이 말하였다.
“ 감룡의 말은 세속의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옛 풍속에 편안해하고학자는 자기가 아는 것에만 빠져듭니다.
이 두 부류는 관리가 되어 법을 지킴에는 알맞으나법 밖의 큰 문제를 함께 논할 자는 아닙니다.
三代는 예가 같지 않았지만 임금 노릇을 하였고다섯 霸者(제환공·송양공·진문공·진목공·초장왕는 법이 같지 않았지만 패자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재를 받으며현명한 사람은 예를 고치고못난 사람은 예에 구애됩니다. ”

杜摯曰 :
「 利不百不變法 功不十不易器.
法古無過循禮無邪
杜摯가 말하였다.
“ 이로움이 백배가 아니면 법을 고치지 않고공적이 열배가 되지 않으면 을 바꾸지 않습니다.
옛 법을 따르면 허물이 없고옛날의 예를 따르면 사악함이 없게 됩니다. ”

衛鞅曰 :
「 治世不一道便國不法古.
故湯武不循古而王夏殷不易禮而亡.
反古者不可非而循禮者不足多
위앙이 말하였다.
세상을 다스림에 한 가지 도만 있지 않으며나라에 편리하다면 옛것을 본받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은 옛것을 따르지 않고도 왕업을 이루었고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를 바꾸지 않고도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니 옛것에 반한다고 해서 그르다고 할 수 없으며예를 쫓음이 칭찬하기에는 부족합니다.”

孝公曰 :
「 
효공이 말하였다.
좋다.”

以衛鞅爲左庶長卒定變法之令.
위앙을 左庶長으로 삼고 마침내 변법의 법령을 제정하였다.

左庶長: 관직의 명칭. 의 관직은 모두 20 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좌서장은 그 중 10등급의 직위로써 군사의 일을 관장하였다

令民爲什伍而相牧司連坐.
백성을 열 집이나 다섯 집을 한 조로 짜서 서로 감시하여 연좌의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不告姦者腰斬告姦者與斬敵首同賞匿姦者與降敵同罰.
부정을 고발하지 않으면 허리를 베는 형에 처하며부정을 고발하는 사람은 적의 수급을 벤 사람과 동일하게 상주고부정을 감춘 자는 적에게 항복한 사람과 같게 벌하였다.

民有二男以上不分異者倍其賦.
민가에 두 명 이상의 남자가 있으면서 분가하지 않으면그 세금을 배로 물렸다.

有軍功者各以率受上爵 爲私鬪者各以輕重被刑大小.
軍功이 있는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나은 벼슬을 받았고 ;
사사로이 싸운 자는 각각 경중에 따라 크고 작은 형벌을 내렸다.

僇力本業耕織致粟帛多者復其身.
본업에 힘을 다하여 밭갈이나 베짜기를 하여 곡식과 비단의 생산이 많은 사람은 자신의 노역과 부세를 면제하였다.

事末利及怠而貧者擧以爲收孥.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자는 전 가족을 잡아들여 노비로 만들었다.

宗室非有軍功論不得爲屬籍.
종실이어도 군공이 없으면 공족의 족보에 올릴 수 없었다.

明尊卑爵秩等級各以差次.
존비와 작위와 봉록의 등급을 분명하게 하고 각각 차등을 두었다.

名田宅 臣妾衣服以家次有功者顯榮無功者雖富無所芬華.
이름난 전답과 저택노비의 수의복의 종류 등도 작위의 등급에 따라 정했으며공로가 있는 자는 영화로운 생활을 하고공이 없으면 비록 부자라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令旣具未布恐民之不信.
법령이 이미 갖추어졌으나 아직 반포하지 않았으니백성이 믿지 않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이었다.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이에 330자 높이의 나무를 도성의 남문 거리에 세우고백성에게 모으고그 나무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 10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民怪之莫敢徙.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겨 감히 옮기는 자가 없었다.

復曰
能徙者予五十金.
다시 말하였다.
이 나무를 북문에다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

有一人徙之輒予五十金以明不欺.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옮기자즉시 50금을 주어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음을 밝혔다.

卒下令.
마침내 법령을 반포하였다.

令行於民朞年秦民之國都言初令之不便者以千數.
백성에 법령을 시행된 지 한 해가 되자秦 백성이 도성으로 와서 새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於是太子犯法.
이때 태자가 법을 어겼다.

衛鞅曰 :
「 法之不行自上犯之
위앙이 말하였다.
“ 법이 잘 시행되지 않음은 위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이다. ”

將法太子.
태자를 처벌하려고 하였다.

太子君嗣也不可施刑刑其傅公子虔黥其師公孫賈.
태자는 임금의 후사이므로 형을 가할 수 없어 사부 공자 건을 처형하고 그 스승인 공손고를 경형에 처하였다.

明日秦人皆趨令.
다음 날부터 秦 사람들은 모두 법령을 따랐다.

(): 비율, 정도

 

行之十年秦民大說道不拾遺山無盜賊家給人足.
법을 시행한 지 10秦 백성은 새로운 법을 매우 기뻐하고길바닥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았으며산에는 도둑이 없어졌고집집마다 모두 넉넉하고 사람마다 모두 만족하였다.

民勇於公戰怯於私鬪鄕邑大治.
백성들은 공적인 전쟁에서는 용감하되사사로운 싸움을 두렵게 여기니 시골이나 도시가 잘 다스려졌다.

秦民初言令不便者有來言令便者.
秦 백성 중에 처음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하다가이제는 법령이 편리하다고 말하러 온 자가 있었다.

衛鞅曰 :
「 此皆亂化之民也
위앙이 말하였다.
“ 이런 자들이 백성들의 교화를 어지럽힌다. ”

盡遷之於邊城.
그들 모두를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其後民莫敢議令.
그 후에는 백성 중에 감히 법령에 대해 의론하는 자가 없었다.

於是以鞅爲大良造.
이에 위앙을 大良造로 삼았다.

將兵圍魏安邑降之.
군사를 이끌고 의 안읍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居三年作爲築冀闕宮庭於咸陽秦自雍徙都之.
3년이 지나함양에 궁궐과 기궐을 새로 축조하고진은 옹에서 함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而令民父子兄弟同室內息者爲禁.
법령을 공포하여 백성의 부자 형제가 같은 방에서 생활함을 금하였다.

而集小都鄕邑聚爲縣置令·凡三十一縣.
작은 도시와 읍과 향촌을 모아 현으로 만들고 현령과 현승을 두니모두 31현이었다.

爲田開阡陌封疆而賦稅平.
정전를 폐지하고 새로이 남북동서로 경계선을 삼아 황무지의 개간을 장려하여 부세의 부담을 공평하게 하였다.

平斗桶權衡丈尺.
용량을 재는 말·되와 무게를 재는 저울, 길이를 재는 丈尺을 통일하였다.

大良造 :전국시대 초기에 秦 軍政의 최고 책임자였다. 뒤에 작위로 바뀌었는데 20등급의 작위 중 16번째다.
居三年: 기원전 350년을 말한다. 이 해에 은 상앙의 2차 변법을 시행하여 내정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주요한 조치들은
1 함양 천도,
2 전국을 현으로 개편하고 을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3 井田을 폐하고 阡陌을 개간하여 농지를 확대하였다.
4 度量衡을 통일하였다.
5 부자나 형제가 같은 집에서 거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冀闕: 옛날 궁문의 양쪽에 설치했던 觀樓로써 법령을 기록하여 발표했던 했던 곳이다. 와 통한다. 象魏 혹은 象闕이라고도 한다. 은 법률을 의미하고 는 높다는 뜻이다.
同室內息: 당시 은 서융의 풍속이 남아 있어 성인이 되어도 남녀가 함께 같은 방에서 혼숙하며 살았다.
縣丞: 縣令 밑에서 경제와 사법을 관장하고 양식과 마초를 징발 및 현의 중요한 안건을 직접 심문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阡陌: 은 남북으로, 은 동서로 난 전답의 경계선을 말한다.
斗桶: 곡식을 재는 용기로 16말이다.
權衡: 은 저울추, 은 저울을 말한다.
▶ 丈尺: 열 자 길이로 만든 자. 丈과 尺

行之四年公子虔復犯約劓之.
법령을 시행한 지 4公子 虔이 다시 법령을 어겨 코를 베는 의형에 처하였다.

居五年秦人富彊,
다시 5년이 지나자의 백성이 부강해졌다.

天子致胙於孝公諸侯畢賀.
나라 천자가 조상제사에 쓴 고기를 효공에게 하사하니제후들도 모두 축하하였다.

其明年齊敗魏兵於馬陵虜其太子申殺將軍龐涓.
이듬해에 가 를 마릉에서 무찌르고 그 太子 申을 포로로 잡고그 장수 龐涓을 죽였다.

其明年衛鞅說孝公曰 「 秦之與魏譬若人之有腹心疾非魏幷秦秦卽幷魏.
何者 ?
魏居領阨之西都安邑與秦界河而獨擅山東之利.
利則西侵秦病則東收地.
今以君之賢聖國賴以盛.
而魏往年大破於齊諸侯畔之可因此時伐魏.
魏不支秦必東徙.
東徙秦據河山之固東鄕以制諸侯此帝王之業也
그 이듬해 위앙이 효공를 설득하였다.
“ 이 와 함께함은비유하자면 사람이 배나 심장에 병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가 을 병합하지 않으면 이 를 병합할 터입니다.
왜냐?
는 험준한 산악 지형 서쪽에 위치하여 安邑에 도읍하고과 황하를 경계로 하며 태행산 동쪽의 이점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리하면 서쪽으로 을 침략하고 피폐하면 동쪽으로 땅을 빼앗습니다.
지금 우리 은 군주의 성스럽고 어진 덕으로 나라가 번성합니다.
그러나 는 지난해 에 대패하여 제후가 배반하므로이때를 이용하여 를 공격해야 합니다.
가 의 공격을 지탱하지 못하고 틀림없이 동쪽으로 옮겨갈 터입니다.
가 옮겨가면 은 황하와 효산의 험지에 웅거하여 동쪽으로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이것이 帝王의 大業입니다. ”

孝公以爲然,
효공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使衛鞅將而伐魏.
위앙을 장수로 삼아 를 공격하였다.

魏使公子卬將而擊之.
는 公子卬을 장수로 삼아 공격하였다.

軍旣相距衛鞅遺魏將公子卬書曰 :
「 吾始與公子驩今俱爲兩國將不忍相攻可與公子面相見樂飮而罷兵以安秦魏
양군이 서로 對峙하자위앙이 魏將 公子卬에게 편지를 보내 일렀다.
“ 나는 원래 공자와 친하다가 지금은 모두 양국의 장수가 되었으니차마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하니 공자와 직접 대면하여 맹약을 맺고즐겁게 술잔을 기울인 후에 철군한다면과 는 안전할 터입니다. ”

魏公子卬以爲然.
魏公子 앙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會盟已飮而衛鞅伏甲士而襲虜魏公子卬因攻其軍盡破之以歸秦.
맹약을 맺고 술을 마셨는데위앙이 甲兵을 매복시켰다가 공자 앙을 습격하여 포로로 잡고그의 군사를 공격하여 모조리 쳐부수고 으로 개선하였다.

魏惠王兵數破於齊秦國內空日以削恐乃使使割河西之地獻於秦以和.
魏惠王은 군대가 여러 차례 와 에 패하여 국내는 재력과 병력이 비어 있고 날로 영토는 깎이어 두려웠다이에 사신을 보내어 황하 서쪽의 땅을 떼어 에 바치고 강화하였다.

而魏遂去安邑徙都大梁.
그리고 는 마침내 安邑을 버리고 大梁으로 도성을 옮겼다.

齊敗魏兵於馬陵: 기원전 342두 나라 군사가 馬陵에서 교전하였다. 전기와 손빈이 이끄는 제군이 방연이 이끌던 위군을 마릉에서 대파하였다. 이로써 전국 초기에 패자로 군림했던 는 약소국으로 전락하자 상앙의 변법으로 국세가 비약적으로 신장된 의 세력이 대두하여 곧 이어 에게 하서와 하동 지역의 땅을 빼앗기고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
其明年, 衛鞅說孝公曰: 상앙이 출전하여 공자앙이 이끌던 하동의 위군을 공격하여 격파한 해는 기원전 340년이고, 가 동진하는 의 세력에 위협을 느끼고, 당시 내정을 일신하여 중원으로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던 와의 패권 투쟁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그 도성을 안읍에서 大梁으로 옮긴 때는 秦孝公이 즉위하던 기원전 361년이다. 이 부분은 魏世家의 기록과 함께 사마천의 착오다.
魏遂去安邑, 徙都大梁: 가 그 도성을 安邑에서 大梁으로 옮긴 후부터 국호를 으로 불렀다.

梁惠王曰 :「 寡人恨不用公叔座之言也
양혜왕이 말하였다.
“ 과인이 公叔座의 말을 듣지 않음이 한이 되는구나. ”

衛鞅旣破魏還秦封之於商十五邑號爲商君.
위앙이 를 격파하고 개선하자은 ()와  등 15읍을 封地로 주고위앙을 商君이라 칭하였다.

商君相秦十年宗室貴戚多怨望者.
상군이 의 재상이 된 지 10종실과 귀척 중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趙良見商君.
이때 趙良이라는 사람이 상군을 방문하였다.

商君曰 :
「 鞅之得見也從孟蘭臯今鞅請得交可乎 
상군이 말하였다.
내가 당신을 만나게 됨은 孟蘭臯의 소개에 따른 것입니다.
이제 나는 교류를 트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趙良曰 :
「 僕弗敢願也.
孔丘有言曰
推賢而戴者進聚不肖而王者退.
僕不肖故不敢受命.
僕聞之曰 非其位而居之曰貪位非其名而有之曰貪名.
僕聽君之義則恐僕貪位貪名也.
故不敢聞命
조량이 대답하였다.
제가 어찌 감히 바라지 못합니다.
공구의 말씀에 현명한 사람을 주군으로 추대하는 자는 진보하고못난 자들을 모아서 왕이 된 자는 몰락한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못났으므로 감히 명을 받지 못합니다.
저는 또 듣기를,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자가 자리에 있음이 貪位이고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자가 명성을 얻음이 貪名이다.’라고 합니다.
제가 상공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아마 저는 貪位하고 貪名하는 자가 될 터입니다.
그래서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商君曰 :
「 子不說吾治秦與 ? 」
상군이 말하였다.
그대는 내가 을 다스림이 탐탁지 않습니까?”

趙良曰 :
「 反聽之謂聰, 內視之謂明, 自勝之謂彊.
虞舜有言曰 :『 自卑也尙矣
君不若道虞舜之道無爲問僕矣
조량이 말하였다.
“ 반성하면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임을 이라 하고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봄을 이라 하며자신을 이김을 이라고 합니다.
순임금이 말씀하시기를, ‘ 자신을 낮추면 남으로부터 숭상을 받게 된다. ’라고 하였습니다.
상공께서 순임금의 도를 말씀하심이 낫지저에게 물으셔도 아무 도움이 없겠습니다

商君曰 「 始秦戎翟之敎父子無別同室而居.
今我更制其敎而爲其男女之別大築冀闕營如魯衛矣.
子觀我治秦也孰與五羖大夫賢 
상군이 말하였다.
“ 처음에 은 戎翟(북방 오랑캐의 제도를 본받아 부자간에 분별이 없고한 방에 남녀가 같이 기거하였습니다.
지금 내가 그런 제도를 고쳐서 남녀를 구별하고양에 冀闕을 크게 축조하여처럼 문화를 알게 경영하였소.
그대가 내 을 다스림을 보기에五羖大夫(진목공의 재상 百里奚와 비교하면 누가 더 현명합니까? ”

趙良曰 :
「 千羊之皮不如一狐之掖 千人之諾諾不如一士之諤諤.
武王諤諤以昌殷紂墨墨以亡.
君若不非武王乎則僕請終日正言而無誅可乎 
조량이 말하였다.
“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이 ’ 하며 아부하는 말이한 선비의 기탄없는 직언만 못합니다.
周武王은 기탄없는 직언을 들어서 번창하였고은주왕은 신하의 간언을 막아서 망하였습니다.
재상께서 무왕이 그릇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제가 終日 直言하고도 주살되지 않고자 합니다가능하겠습니까 ?”

商君曰 :
「 語有之矣貌言華也至言實也苦言藥也甘言疾也.
夫子果肯終日正言鞅之藥也.
鞅將事子子又何辭焉 
상군이 말하였다.
이런 말이 있지요.
겉으로 하는 말은 화려하고지극한 말은 진실되며나를 괴롭히는 말은 약이 되고달콤한 말은 병이 된다.
선생이 과연 종일 직언을 하려 하시니나에게는 약이 될 터이오.
내가 그대를 모시려 하는데그대는 또 어찌하여 사양하시오?”

趙良曰 :
조량이 말하였다.

「 夫五羖大夫荊之鄙人也.
“ 무릇 五羖大夫(백리해는 (초나라 땅의 보잘것없는 사람이었습니다.

聞秦繆公之賢而願望見行而無資自粥於秦客被褐食牛.
秦繆公이 어짊을 알고 만나러 가려 했으나여비가 없었으므로에서 온 손님에게 자신을 팔아서褐衣(베옷를 입고 소를 길렀습니다.

期年繆公知之擧之牛口之下而加之百姓之上秦國莫敢望焉.
일 년이 되어진목공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진목공은 그를 소의 입 아래에서 만백성의 위로 올려놓았으되의 사람 중에 감히 원망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相秦六七年而東伐鄭三置晉國之君一救荊國之禍.
에 재상이 된 지 6, 7년에동으로 을 치고세 번 의 혜공회공문공를 세우고한 번 (의 재난을 구원하였다.

發敎封內而巴人致貢 施德諸侯而八戎來服.
나라에 교화를 펴니 巴人도 조공을 바쳤으며제후에게 덕을 베푸니 8개 융족이 복속하였습니다.

由余聞之款關請見.
由余가 이를 듣고 관문을 두드리며 뵙고자 하였습니다.

五羖大夫之相秦也勞不坐乘暑不張蓋行於國中不從車乘不操干戈功名藏於府庫德行施於後世.
五羖大夫가 에서 재상이 됨에피곤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으며날씨가 더워도 수레
에 덮개를 치지 않았고나라를 순행할 때 수레를 거느리지 않았고무기를 든 호위병을 쓰지 않았으므로그의 공로와 명성을 기록하여 부고에 보관하였고덕행은 후세까지 미쳤습니다.

五羖大夫死秦國男女流涕童子不歌謠舂者不相杵.
五羖大夫가 죽자 의 남녀들이 눈물을 흘렸고童子들도 가요를 부르지 않았고방아를 찧는 사람들까지도 방아 노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此五羖大夫之德也.
이것이 五羖大夫의 덕입니다.

今君之見秦王也因嬖人景監以爲主非所以爲名也.
지금 상공께서는 秦王(진효공을 뵈옴에왕이 총애하는 신하인 景監을 주인으로 삼고 그를 통하였으니이것을 명예롭다고 여길 바가 아닙니다.

相秦不以百姓爲事而大築冀闕非所以爲功也.
의 재상이 됨에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冀闕을 크게 지었으니이것을 공적이라고 여길 바가 아닙니다.

刑黥太子之師傅殘傷民以駿刑是積怨畜禍也.
태자의 사부를 묵형에 처했으며잔혹한 형벌로 백성들을 상하게 했으니백성의 원한을 사고 재난을 蓄積한 것입니다.

敎之化民也深於命民之效上也捷於令.
백성을 교화함에 왕명보다 준엄하고백성이 위를 따름에 법령보다 민첩합니다.

今君又左建外易非所以爲敎也.
지금 상군께서는 左建外易(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권위를 세우고 법도를 변혁함)하나 그것은 교화라고 여길 바가 아닙니다.

君又南面而稱寡人日繩秦之貴公子.
더욱이 상군께서는 南面하여 과인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매일 의 공자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詩曰 :
『 相鼠有體人而無禮 ;
人而無禮何不遄死
[시경》〈용풍상서에 일렀습니다.
쥐의 낯짝에도 체면이 있거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
사람으로서 예가 없다면 어찌하여 빨리 죽지 않겠는가?’

以詩觀之非所以爲壽也.
이 시를 보건대상공은 天壽를 누릴 분이 아닙니다.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君又殺祝懽而黥公孫賈.
공자 건은 두문불출한 지 벌써 8년 이며상공께서는 또 祝懽을 죽였고 공자 건의 스승인 공손가에게 墨刑을 가하였습니다.

詩曰 :
『 得人者興失人者崩』 此數事者非所以得人也.
시경에 이르기를,
인심을 얻은 자는 일어나고인심을 잃은 자는 망한다. '라고 했습니다.
이 몇 가지 일은 도저히 인심을 얻는 도리가 아닙니다.

君之出也後車十數從車載甲多力而騈脅者爲驂乘持矛而操闟戟者旁車而趨.
상공께서 외출함에뒤따르는 수레가 10여 대를 넘는데 그 수레에는 甲士를 싣고힘이 세고 위협하는 자를 驂乘으로 삼으며창으로 무장한 자를 수레 옆에서 달리게 합니다.

此一物不具君固不出.
그중 한 가지라도 갖추지 않으면 상공께서는 결코 외출하지 않습니다.

書曰 『 恃德者昌恃力者亡
서경에 이르기를,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라고 하였습니다.

君之危若朝露尙將欲延年益壽乎 ?
상공의 위태함이 마치 아침 이슬과 같은데오히려 延年益壽(해를 늘리고 수명을 더함하려 하십니까 ?

則何不歸十五都灌園於鄙勸秦王顯巖穴之士養老存孤敬父兄序有功尊有德可以少安.
어찌하여 의 15 고을을 반납하고시골로 돌아가 정원에 물을 주지 않습니까?
진왕에게 권하여巖穴之士를 顯揚하고노인과 고아는 봉양하고 보살피며부모와 형제를 공경하게 하고공을 세운 자를 순서에 따라 상주고有德者를 존중한다면조금은 백성을 안심시킬 수 있을 터입니다.

君尙將貪商於之富寵秦國之敎畜百姓之怨秦王一旦捐賓客而不立朝秦國之所以收君者豈其微哉 ?
亡可翹足而待
상공께서는 오히려 ·의 부유함을 탐하고에 시행한 법령을 애착하여 백성의 원한을 쌓고 있으니만약 진왕이 하루아침에 빈객을 버리어 조정에 세우지 않는다면에서 상공을 체포하려는 사람의 수가 어찌 적은 숫자이겠습니까?
상공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순식간의 일일 터입니다.”

商君弗從.
상군은 따르지 않았다.

商於: 은 지금의 섬서성 商縣 동남, 는 하남성 內鄕縣이다.
五羖大夫: 진목공 때 재상을 지낸 百里奚를 말한다.
원래 춘추 초기 의 대부였으나 唐晉假道滅虢 작전으로 우를 멸함으로써 포로가 되었고 이어서 진목공에게 시집가는 목희의 몸종으로 에 보내졌다.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한 백리해는 에 호송 도중 도망쳐 로 들어갔다.
그가 소를 기르데 특별한 재주가 있음 안 는 그를 말을 기르는 微官에 임명하였다.
이것을 안 진목공이 초나라에 암양가죽 다섯 장을 주고 代贖하고 데려와 대부로 삼았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백리해는 蹇叔, 由余 등과 함께 의 국정을 보좌하여 진목공이 패자가 되게 하였다.
東伐鄭: 좌전 魯僖公 32년 즉 기원전 627을 지켜주기 위해 주둔하고 있던 秦軍의 장수 杞子가 진목공에게 편지를 보내, 이 그에게 정나라의 도성 신정성의 수비를 맡도록 했기 때문에 만일 이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 기습한다면 을 점령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진목공은 백리해의 아들 孟明視 등의 세 장수에게 군사를 주어 정을 기습하도록 하였다.
다음 해인 33년 맹명시 등이 이끌던 秦軍에 가까운 지금의 하남성 偃師市 부근에 있었던 滑國에 이르렀을 때 秦軍의 행군이 발각되어 이 방어를 강화하자, 기습전이 아니고 정면으로 신정성을 공격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싸움에서 이기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대신 활국을 멸하였다.
활국을 멸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갖고 귀환하던 500승의 달하는 군사들은 효산의 험지에서 唐晉軍의 매복에 걸려 모두 전사하고 세 장수는 당진국의 포로가 되었다.
三置晉國之君: 진목공 9년 기원전 651년 당진의 獻公이 죽자, 그 대부 里克이 난을 일으켜 어린 군주 奚齊를 살해하였다. 이에 타국에 망명하고 있던 당진의 공자 夷吾가 사람을 보내 자기가 당진국의 군주자리에 오름을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진목공이 허락하여 백리해로 하여금 군사들과 함께 이오를 호송하여 당진국의 군주 자리에 앉히게 하였다. 이가 晉惠公이다.
진목공 23년 기원전 537년 섬진에 인질로 와 있던 당진국의 태자 가 혜공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태자 어가 도망친 것은 자기가 없을 때 혜공이 죽기라도 한다면 그 군주 자리가 다른 공자에게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해인 기원전 536년 진혜공이 죽자 태자 어가 그 뒤를 이어 당진의 군주 자리에 올랐다. 이가 晉懷公이다. 태자가 도망침에 분노한 진목공은 당시 초에 망명하고 있던 당진국의 또 다른 공자 重耳를 섬진국으로 데려온 다음 귀국시켜 당진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晉文公이다. 섬진국이 옹립한 세 명의 군주는 惠公,懷公, 文公을 말한다.
一救荊國之禍: 기원전 632唐晉사이에 벌어진 城濮大戰에서 당진국을 도와 세력의 북진을 저지한 것을 말한다.
기원전 633년 겨울 , , 등의 위성국을 이끈 초가 을 공격하였다.
이에 이 위급함을 당진국에 알려 구원을 요청하였다. 해가 바뀐 다음 해에 先軫의 계책을 채용한 당진국은 陝秦 양국과 항초동맹을 체결하였다. 진목공은 그의 아들 에게 군사를 주어 참전하여 당진군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해 여름 당진, , , 섬진 등의 4국 연합국은 성복에서 초군과 싸운 결과 대승을 거두고 을 구원하고 의 북진을 저지시켰다. 救荊國之禍荊國 의 침략으로부터 을 구원했다는 뜻이다. 성복에서 초군을 대파한 것은 재상이었던 백리해와는 크게 관계가 없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당진국과 그 장수 선진의 활약으로 인한 것이다. 또한 당진국의 군주를 처음 세운 것은 진목공 9년 중에 있었던 일이고, 의 군사를 물리치고 을 구한 것은 진목공 28년에, 秦軍이 동쪽의 을 공격했던 일은 진목공 33년의 일로써 모두 24년 동안 일어난 일이다.
본문의 백리해가 재상이 되고 6-7이라는 기술은 역사적인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진목공이 다섯 장의 암염소 가죽을 주고 백리해를 대속하고 으로 데려온 해는 진목공 5년 즉 기원전 655년의 일로 목공은 백리해와 3일 밤낮으로 대화를 나누며 크게 기뻐한 나머지 국정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그때 백리해의 나이는 이미 70이 넘어선 상태였으며 동쪽의 정벌군을 일으킨 해는 진목공 23년의 일로써 그때는 백리해의 나이는 근 100살이나 아니면 100살을 넘어섰을 때였다.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봤을 때 본문에서 조량이 한 말은 역사적인 사실에 맞지 않으며 사마천은 백리해의 나이를 소흘히 한 결과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 같다.
由余: 춘추 때 섬진국의 진목공의 대부다. 그 조상은 당진국 출신으로 으로 들어가 융왕을 모셨다.
진목공 34년 기원전 626년 융왕에 의해 섬진에 사자로 온 유여를 진목공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계책을 세워 그로 하여금 섬진에 귀의토록 한 다음 대부로 임명하였다. 진목공은 융족의 지리에 밝은 유여의 계책을 이용하여 12개에 달하는 융족의 나라를 평정하고 그 1,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넓혔다. 이로써 진목공은 서융의 패자가 되었다. <由余>라는 3편의 저서가 지금까지 전한다.
勞不坐乘: 옛날 중국 고대에는 통상적으로 일반인이 수레를 이용할 때는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다녔고 좌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들은 군주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사에 한하였다.
백리해는 앉아서 다닐 수 있는 수레를 이용할 수 있는 신분이었지만 겸손하여 그것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相鼠有體: 詩經 鄘風 相鼠3절 중 마지막 절이다. 쥐가 사람을 보면 앞다리를 서로 맞잡은 모양이 마치 사람이 두 손을 모아 인사를 하는 것처럼 보여 예를 알고 있다는 뜻에서 禮鼠라고도 한다.
처음의 두 절은 다음과 같다.
相鼠有皮 人而無儀(보건대 쥐도 가죽이 있거늘 사람임에도 예의가 없구나
人而無儀 不死何爲(사람이 예의가 없으니 어찌 죽지 않겠는가?
相鼠有齒 人而無止(보건대 쥐도 이빨이 있거늘 사람임에도 버릇이 없구나
人而無止 不死何俟(사람이 버릇이 없으니 어찌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 않겠는가?
得人者興: 이 시는 실전되어 시경에 보이지 않는다.
: 지금의 섬서성 華縣에 있었다. 원래 춘추 때 은 이곳에 봉해졌다가 주나라가 낙읍으로 동천하자, 도 같이 봉국을 옮겨 新鄭이라 한 것이다.
黽池: 彤池의 잘못이다. 彤池는 지금의 섬서성 화현 서남에 彤恩이라고 있다.
商君書: 상앙이 죽자 후세의 법가들이 그의 변법을 시행하는데 동원된 이론을 편찬하고 이름을 상군서라 지었다. 한서 예문지에 모두 29편이 언급되어 있는데 지금은 24편 만이 전해지고 있다.
<開塞>7편이고 <耕戰> <農戰>3편이다.
: 쓰다
左建外易: 用不正当的手段建立威权变革法度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 권위를 세우고 법도를 변혁함
: 애착하다.

後五月而秦孝公卒太子立.
다섯 달 후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公子虔之徒告商君欲反發吏捕商君.
공자 건의 무리가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告變하자진왕은 관리를 보내 상군을 체포하게 하였다.

商君亡至關下欲舍客舍.
상군은 도망하여 函谷關에 이르러객사에 묵으려 하였다.

客人不知其是商君也曰 :
「 商君之法舍人無驗者坐之
객사의 주인은 그가 상군임을 모르고 말하였다.
상군의 법에숙박인에 신원이 증명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죄에 연루됩니다.”

商君喟然歎曰 :
嗟乎爲法之敝一至此哉 !
상군이 喟然히 탄식하였다.
“ 내가 만든 법의 폐해가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구나! ”

去之魏.
상군은 로 갔다.

魏人怨其欺公子卬而破魏師弗受.
魏 사람들은 그가 公子 卬을 속여 군을 쳐부수었음을 원망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商君欲之他國.
상군이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魏人曰 :
商君秦之賊.
秦彊而賊入魏弗歸不可.
의 군주가 말하였다.
상군은 에 역적이다.
은 강한 나라이니역적이 에 들어왔는데도 송환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遂內秦.
결국 으로 들여보냈다.

商君旣復入秦走商邑與其徒屬發邑兵北出擊鄭.
상군은 에 입국하자 商邑으로 도망쳐서 그를 따르던 무리와 함께 봉지의 군사를 일으켜 을 공격하였다.

秦發兵攻商君殺之於鄭黽池.
은 군사를 보내 상군을 공격하여 의 黽池에서 그를 죽였다.

秦惠王車裂商君以徇曰 :
「 莫如商鞅反者 
秦惠王은 상군을 車裂刑에 처하고백성에게 돌려 보이며 말하였다.
상앙처럼 반역자가 되지 말라. ”

遂滅商君之家.
마침내 상군의 가문을 멸족시켰다.

喟然: 탄식하는 모양.
: 마침내. 결국. 寡人之过一至于此乎

太史公曰 :
商君其天資刻薄人也.
跡其欲干孝公以帝王術挾持浮說非其質矣.
且所因由嬖臣及得用刑公子虔欺魏將卬不師趙良之言.
亦足發明商君之少恩矣.
余嘗讀商君開塞耕戰書與其人行事相類.
卒受惡名於秦有以也夫 !
태사공은 말한다
“ 상군은 타고난 성품이 각박한 사람이다.
제왕의 술로써 효공에게 벼슬하려 함을 살펴보면허황한 말을 늘어놓았지그의 본바탕이 아니었다.
또 총애하는 신하를 통하여 등용되고공자 건에게 형벌을 가하고魏將 앙을 속이고조량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이것들은 상군에게 은덕이 없음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내가 상군이 저술한 상군서》 중의 開塞과 耕戰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내용이 그의 행적과 비슷하였다.
상군이 결국 에서 악명을 얻음에는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 기준으로 삼고 따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