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列傳

列傳권103-萬石張叔列傳(만석장숙열전)

耽古樓主 2023. 9. 9. 17:38

萬石張叔列傳은 萬石君 石奮衛綰直不疑周文張叔의 合傳이다이 편의 인물들은 前漢 때 신중하고 성실한 품행을 갖춘 인물들이다.



1.石奮

石奮은 前漢의 관료로 河内郡 溫縣 사람이다.
아버지는 본래 趙 사람인데趙 멸망 후 온현으로 이주하였다석분은 열다섯 살의 나이로 말단 벼슬아치가 되어 高祖 유방을 섬겼다.
 
이후 공로를 쌓아 文帝 때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景帝 때에는 九卿의 반열에 올랐다
석분은 공손하고 신중한 면에서는 견줄 이가 없었으며 그의 네 아들도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가져 모두 2천 석의 녹봉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다
이에 景帝가 석분을 萬石君이라 호칭하여 萬石君 石奮으로 불리게 되었다.

萬石君名奮,其父趙人也,姓石氏。
萬石君의 이름은 이며그의 부친은 趙 사람으로 성은 石氏이다.

趙亡,徙居溫。
가 멸망하자 溫縣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高祖東擊項籍,過河內,時奮年十五,為小吏,侍高祖。
高祖가 동진하여 項籍을 공격하려 河內郡을 들렀을 적에석분의 나이는 15세로 하급 관리가 되어 高祖를 모셨다.

高祖與語,愛其恭敬,問曰:
「若何有?」
高祖가 함께 대화함에 그의 공경함을 좋아하여 물었다.
너의 식구에 누가 있는가?”

對曰:
「奮獨有母,不幸失明。
家貧。
有姊,能鼓琴。」
대답하였다.
신에게 단지 모친이 계시는데 불행하게도 실명하셨습니다.
집안이 아주 가난합니다.
누이가 계신데 거문고를 탈 수 있습니다.”

高祖曰:
「若能從我乎?」
高祖가 말하였다.
너는 나를 따르겠느냐?”

曰:
「願盡力。」
석분이 말하였다.
원컨대 힘을 다하겠습니다.”

於是高祖召其姊為美人,以奮為中涓,受書謁,徙其家長安中戚裏,以姊為美人故也。
이에 高祖가 그의 누이를 궁전으로 불러 美人으로 삼고石奮을 中涓에 임명하여 명함을 접수하게 하고그의 집을 長安城의 戚里로 옮겼는데그의 누이가 미인이기 때문이다.

其官至孝文時,積功勞至大中大夫。
그의 관직은 孝文帝 때까지 공로를 쌓아 太中大夫에 이르렀다.

無文學,恭謹無與比。
문학은 없었으나공손하고 삼감에 견줄 자가 없었다.

高祖 : 漢高祖 劉邦.

▶ 語 : 담화.
▶ 恭敬 : 공손하다.
▶ 若 : 너.
▶ 美人 : 妃嬪의 칭호.
▶ 中涓 : 시종관. 궁중에 있으면서 깨끗이 소제하는 것을 맡은 직책.
▶ 受書謁 : 名帖;书写名帖。명함. 명함을 작성함
▶ 戚里 : 漢 때 장안에 외척들이 살던 곳.
▶ 孝文 : 孝文帝.

文帝時,東陽侯張相如為太子太傅,免。
文帝 때 東陽侯 張相如가 太子太傅에서 면직되었다.

選可為傅者,皆推奮,奮為太子太傅。
태부가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함에모두가 石奮을 천거하매 석분이 태자태부가 되었다.

及孝景即位,以為九卿;
迫近,憚之,徙奮為諸侯相。
景帝가 즉위하여 석분은 九卿에 올랐는데너무 공손하므로 꺼리어석분을 전근하여 제후의 相國으로 삼았다.

奮長子建,次子甲,次子乙,次子慶,皆以馴行孝謹,官皆至二千石。
석분의 長子는 石建이고次子는 石甲, 3는 石乙, 4남은 石慶이었는데모두 행실이 착하고 효성스러우며 신중하여 관직이 모두 二千石에 이르렀다.

於是景帝曰:
「石君及四子皆二千石,人臣尊寵乃集其門。」
이에 경제가 말하였다.
石君(:석분)과 네 아들이 모두 2천석의 관원이니신하로서의 존귀와 총애가 그 가문에 다 모였도다.”

號奮為萬石君。
석분을 萬石君이라 불렀다.

孝景帝季年,萬石君以上大夫祿歸老于家,以歲時為朝臣。
景帝 晚年에 만석군이 上大夫의 봉록을 받고 늙음을 구실로 고향으로 돌아갔지만歲時에는 조정의 신하로 참가하였다.

過宮門闕,萬石君必下車趨,見路馬必式焉。
宮門을 지날 때 만석군이 반드시 수레에서 내려 종종걸음쳤으며길에서 황제의 御駕를 보면 반드시 (수레 앞을 잡고 경의를 표함)하였다.

子孫為小吏,來歸謁,萬石君必朝服見之,不名。
자손이 하급 관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뵘에만석군이 반드시 朝服을 입고 만나되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子孫有過失,不譙讓,為便坐,對案不食。
자손에게 잘못이 있어도 꾸짖지 않되별실에 거처하면서 밥상을 대하여도 음식을 먹지 않았다.

然後諸子相責,因長老肉袒固謝罪,改之,乃許。
그런 뒤에 아들들이 서로 잘못을 저지른 자를 꾸짖고연장자가 肉袒하고 한사코 사죄하며 잘못을 고치겠다고 하면비로소 허락하였다.

 

子孫勝冠者在側,雖燕居必冠,申申如也。
자손에 관을 쓴 자가 곁에 있으면비록 한가롭게 거처할 때라도 반드시 관을 썼으며기뻐하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僮仆訢訢如也,唯謹。
하인들에게는 화목하고 기쁘게 대하며 오직 삼가하였다.

上時賜食於家,必稽首俯伏而食之,如在上前。
황제가 때때로 음식을 그의 집에 하사하면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며 몸을 굽히고 먹으니황제의 면전에 있는 듯하였다.

其執喪,哀戚甚悼。
喪禮를 거행함에매우 슬프게 애도하였다.

子孫遵教,亦如之。
자손도 가르침을 준수하여 역시 그와 같았다.

萬石君家以孝謹聞乎郡國,雖齊魯諸儒質行,皆自以為不及也。
만석군 일가는 효도하고 근신함으로 郡國에 명성을 떨쳤으며비록 ·의 유학자라도 질박한 행실에 있어서 모두 스스로 미칠 수 없다고 여겼다.

▶ 九卿 : 아홉 가지 고관을 일컫는 명칭으로 太常, 鴻臚, 宗正, 郎中令, 衛尉, 太僕, 廷尉, 少府, 大司農을 말한다.
▶ 迫近 : 너무 가까이함. 다가오다.
▶ 憚 : 꺼리다. 어렵게 여기다.
▶ 相 : 승상.
▶ 甲 : 이름을 알 수 없어 甲과 乙로 기록한 것이다.
▶ 馴行 : 선하고 착한 행실.
▶ 官皆至二千石 : 녹봉이 이천 석으로 중앙의 九卿과 지방의 郡守에 해당한다.
▶ 季年 : 晚年.
▶ 歲時 : 매년 돌아오는 한 해 중의 특정한 때. 24절기 및 명절.
▶ 朝臣 : 조정의 관리.
▶ 趨 : 예의의 표시로 종종걸음 치다.
▶ 路馬 : 천자의 어가.
▶ 式 : 軾과 통한다. 수레 앞의 횡목에 의지하여 경의를 표하다.
▶ 朝服 :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
▶ 不名 : 이름을 부르지 않다.
▶ 譙讓 : 꾸짖다. 질책하다.
▶ 便坐 : 옆방에 편히 앉아 있다.
▶ 因長老 : 나이가 많고 노련한 사람에게 의탁하여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함
▶ 肉袒 : (사죄의 뜻으로) 윗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다.

▶ 燕居 : 하는 일 없이 한가히 있음.
▶ 申申如也 : 기뻐하고 만족하는 모습.
▶ 訢訢如也 : 화목하고 기쁜 모습.
▶ 稽首 : 공경하는 뜻으로 머리를 조아림.
▶ 執喪 : 상복을 입는다는 말과 같다.
▶ 哀戚 :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
▶ 質行 : 質樸한 행실. 소박한 행실.
▶ 雖 : 설령 ~라 하더라도.

 

建元二年,郎中令王臧以文學獲罪。
建元 2(서기전 139), 郎中令 王臧이 죄를 지었다.

皇太后以為儒者文多質少,今萬石君家不言而躬行,乃以長子建為郎中令,少子慶為內史。
皇太后가 생각하기에학자들은 가식이 많고 질박함이 적으나만석군의 집안은 말하지 않으면서 실천한다고 하매장자인 석건을 낭중령으로 삼았으며막내아들인 석경을 內史로 삼았다.

建老白首,萬石君尚無恙。
石建이 늙어서 백발이 되어도만석군이 여전히 병 없이 잘 지냈다.

建為郎中令,每五日洗沐歸謁親,入子舍,竊問侍者,取親中帬廁牏,身自浣滌,復與侍者,不敢令萬石君知,以為常。
석건이 낭중령이었으나휴일에 목욕하고 집으로 가서 양친의 안부를 살핌에子舍에 들어가서 몰래 시종에게 문안하고부친의 속옷과 요강을 가져다 몸소 씻고 다시 시종에 주면서 감히 아버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였는데항상 이렇게 하였다.

建為郎中令,事有可言,屏人恣言,極切;
至廷見,如不能言者。
석건이 낭중령으로서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 일이 있으면사람들을 물리치고 서슴지 않고 말하여 매우 간절하였으나조정에서 알현할 때는 말하지 못하는 듯하였다.


是以上乃親尊禮之。
이 때문에 황제가 친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예우하였다.

▶ 建元二年 : 漢武帝 2년(기원전 139년). 建元은 漢武帝의 첫 번째 연호이며, 기원전 140년에서 기원전 135년까지 6년 동안 사용하였다.
▶ 文學獲罪 : 竇太后가 黃老의 說을 좋아하고 儒學을 좋아하지 않으니, 趙綰과 王臧이 太后宮에 일을 아뢰지 말자고 청하자, 태후가 크게 노하여 조관과 왕장이 부정하게 이익을 취한 일을 은밀히 찾아내어 조관과 왕장을 獄吏에게 내리니, 모두 자살하였다.
▶ 皇太后 : 竇太后. 景帝의 어머니.
▶ 躬行 : 몸소 행하다.
▶ 無恙 : 병이 없다. 건강하다. 恙은 질병.
▶ 五日洗沐 : 휴식일. 漢 제도에 관원들은 5일에 한 번 목욕하고 쉬도록 하였다.
▶ 子舍 : 침실 옆 작은 방.
▶ 中裙 : 속옷.
▶ 廁牏 : 요강. 매화틀.
▶ 屏人 : 좌우의 사람을 물러 가게 함.
▶ 恣言 : 하고 싶은 말을 다하다.
▶ 尊禮 : 존중하며 예우를 하다.

萬石君徙居陵裏。
만석군이 陵里로 거처를 옮겼다.

內史慶醉歸,入外門不下車。
內史인 석경이 술에 취하여 귀가함에마을 어귀의 문에 들어서도 수레를 내리지 않았다.

萬石君聞之,不食。
만석군이 듣고 음식을 먹지 않았다.

慶恐,肉袒請罪,不許。
석경이 두려워서 肉袒하고 벌주기를 청하였으나허용하지 않았다.
舉宗及兄建肉袒,萬石君讓曰:
「內史貴人,入閭里,里中長老皆走匿,而內史坐車中自如,固當!」
모든 식구와 형인 석건이 肉袒하니만석군이 꾸짖었다.
內史는 존귀한 사람이매 마을로 들어오면 마을의 어른들이 모두 달아나거나 회피하기 마련인데내사가 수레에 앉아서 태연자약함이 참으로 마땅한가!”

乃謝罷慶。
이에 석경을 물러가게 하였다.

慶及諸子弟入里門,趨至家。
석경과 자제들이 마을 문을 듦에종종걸음으로 귀가하였다.

萬石君以元朔五年中卒。
만석군이 元朔 5(기원전 124)년에 죽었다.

長子郎中令建哭泣哀思,扶杖乃能行。
長子인 낭중령 石建이 슬퍼하고 사모하여 통곡하며 우매지팡이를 짚고서야 걸을 수 있었다.

歲餘,建亦死。
일 년여 뒤에 석건도 죽었다.

諸子孫咸孝,然建最甚,甚於萬石君。
자손들이 모두 효성스러웠으나석건이 가장 심하여 만석군보다 심하였다.

建為郎中令,書奏事,事下,建讀之,曰:
「誤書!
『馬』者與尾當五,今乃四,不足一。
上譴死矣!」
석건이 낭중령일 때 상주함에황제의 회답이 내려와서 석건이 그것을 읽다가 말하기였다.
잘못 썼구나!
’ 는 꼬리에 반드시 5획으로 써야 하는데도네 획으로 한 획이 부족하다.
폐하께서 견책하면 죽어 마땅하구나!”

甚惶恐。
매우 황공하게 여겼다.

其為謹慎,雖他皆如是。
그의 신중함은 비록 다른 일이라고 해도 모두 이와 같았다.

萬石君少子慶為太仆,御出,上問車中幾馬,慶以策數馬畢,舉手曰:
「六馬。」
만석군의 막내아들 석경이 太僕으로 황제의 수레를 몰고 외출함에황제가 묻기를 수레에 말이 몇이냐고 하자석경이 채찍으로 말을 세어보고 손을 들어 보이며 말하였다.
여섯 필입니다.”

慶於諸子中最為簡易矣,然猶如此。
석경이 아들 중에 가장 간단하고 쉬웠는데도 이와 같았다.

為齊相,舉齊國皆慕其家行,不言而齊國大治,為立石相祠。
석경이 의 상국 되었는데齊 사람들이 모두 그 집안의 행실을 흠모하여 말하지 않아도 가 잘 다스려졌으며그를 위하여 <石相祠>를 세웠다.

元狩元年,上立太子,選群臣可為傅者,慶自沛守為太子太傅,七歲遷為御史大夫。
무제 元狩 元年(기원전 122), 황제가 태자를 세우자신하 중에서 태자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선발하였는데석경이 沛郡太守에서 태자태부가 되었으며, 7년 후에는 御史大夫로 승진되었다.

▶ 外門 : 마을 어귀의 문.
▶ 肉袒 : (사죄의 뜻으로 윗옷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다.
▶ 舉宗 : 전 가족.
▶ 閭里 : 마을.
▶ 自如 : =自若. 태연자약하다.
▶ 謝 : 분부하다. 명령하다.
▶ 趨 : (예의의 표시로) 종종걸음치다.

▶ 元朔五年 : 기원전 124년. 元朔은 漢武帝의 세 번째 年號이다.
▶ 咸 : 전부. 모두.8.
▶ 誤書 : 글자를 잘못 씀.
▶ 『馬』者與尾當五 : 당시의 통행하는 隸書에서는 「馬」字의 아래 부분이 5획이었다.
▶ 譴 : 꾸짖다. 질책하다.
▶ 太僕 : 황제의 車馬를 관장하는 직책.
▶ 御 : 황제의 수레.
▶ 策 : 말채찍.
▶ 治 : 안정되다.
▶ 元狩元年 : 기원전 122年。元狩는 漢武帝의 연호이다.
▶ 遷 : 승진.

元鼎五年秋,丞相有罪,罷。
武帝 元鼎 5(기원전 112가을승상 趙周가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制詔御史:
「萬石君先帝尊之,子孫孝,其以御史大夫慶為丞相,封為牧丘侯。」
황제가 어사대부에게 칙명을 내렸다.
만석군을 선제께서 존경하였고자손이 효성스러우매어사대부 석경을 승상에 임명하고 牧丘侯에 봉한다.”

是時漢方南誅兩越,東擊朝鮮,北逐匈奴,西伐大宛,中國多事。
이때 은 바야흐로 남쪽으로 南越과 東越을 토벌하고동쪽으로 朝鮮을 공격하고북쪽으로 흉노를 내쫓고서쪽으로 大宛을 정벌하는 등 중원에 사건이 많았다.

天子巡狩海內,修上古神祠,封禪,興禮樂。
황제가 전국을 巡狩하면서 上古시대의 神祠를 수리하였고封禪하였고禮樂을 일으켰다.

公家用少,桑弘羊等致利,王溫舒之屬峻法,兒寬等推文學至九卿,更進用事,事不關決於丞相,丞相醇謹而已。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桑弘羊 등에게 이윤을 도모하게 하고王溫舒의 무리에게 준엄하게 법을 집행하게 하고兒寬 등에게 유학을 추존하게 하여 그들의 관직이 九卿에 이르게 하고 교대로 승진하여 정사를 담당하게 하니국사가 굳이 승상에게서 결정되지 않았으므로 승상이 충후하고 신중하면 그만이었다.

在位九歲,無能有所匡言。
9년 동안 승상으로 재직하는 중에 시국을 바로잡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嘗欲請治上近臣所忠、九卿咸宣罪,不能服,反受其過,贖罪。
일찍이 황제의 近臣인 所忠과 구경인 咸宣의 죄행을 治罪하자고 청하였지만그들을 服罪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징계를 받으매 贖罪하였다.

元封四年中,關東流民二百萬口,無名數者四十萬,公卿議欲請徙流民於邊以適之。
元封 4(기원전 107), 關東에 유민이 2백만 명이고호적이 없는 사람이 40만이매공경이 상의하고 유민을 변경으로 이주시켜 보내자고 주청하였다.

上以為丞相老謹,不能與其議,乃賜丞相告歸,而案御史大夫以下議為請者。
황제가 승상이 연로하고 신중하매 그 논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여기고승상에게 휴가를 주고이 안건을 상의하여 주청한 어사대부 이하의 관리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丞相慚不任職,乃上書曰:
「慶幸得待罪丞相,罷駑無以輔治,城郭倉庫空虛,民多流亡,罪當伏斧質,上不忍致法。

願歸丞相侯印,乞骸骨歸,避賢者路。」
승상이 직무를 맡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매상서하여 말하였다.
신 석경이 총애를 받아 승상의 직책에 있으나노둔한 말처럼 재능이 부족하여 정사를 보좌하여 다스리지 못하였으며성곽과 창고가 비었고유랑하는 백성이 많아졌으니그 죄가 斧質에 엎드림에 해당하지만폐하께서는 법대로 치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라옵건대 승상과 후작의 을 돌려 드리고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며현명한 사람에게 승상의 직위를 양보하고 싶습니다.”

▶ 元鼎五年 : 기원전 112년. 元鼎은 漢武帝의 年號.
▶ 丞相 : 趙周를 말한다. 승상 조주는 열후들이 제사 비용으로 바치는 酎金이 적은 것을 알고도 탄핵하지 않은 죄에 걸려 하옥되자 자살하였다.
▶ 制詔 : 황제의 칙명.
▶ 兩越 : 南越과 東越. 越은 고대 남방민족의 이름.
▶ 大宛 : 고대 西域의 나라 이름.
▶ 巡狩 : 황제가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님.
▶ 封禪 : 옛날 군왕이 태산에 가서 천지에 제사 지내는 일.
▶ 兒寬 : 千乘 사람으로 倪寬이라고도 불린다. 西漢 시대의 大臣이며. 尚書를 연구하였다.
▶ 推文學 : 유학을 높이 받들다. 推는 推尊. 높이 받들다. 문학은 儒家의 학술을 말한다.
▶ 更 : 교체하다.
▶ 用事 : 정권을 장악하다.
▶ 醇謹 : 온후하고 신중하다.
▶ 匡言 :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언행.

▶ 元封四年 : 기원전 107년. 元封은 漢武帝의 연호.
▶ 名數 : 戶籍을 말한다.
▶ 適 : 謫과 통하여 귀양 보내다. 즉 이주시키다.
▶ 與 : 참여.
▶ 案 : 按과 통하여 ‘조사하여 처리하다’.
▶ 慚 : 부끄러워하다.
▶ 待罪 : 죄를 기다리다. 옛날 관리가 자기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겸손하게 이른 말.
▶ 罷駑 : 지치고 둔한 馬로 재능이 低下한 사람을 비유한다. 罷는 疲와 통한다.
▶ 斧質 : 고대 戮刑 刑具. 斧鉞의 형과 椹質의 형을 말한다. 도끼로 참수하는 형을 말한다.
▶ 致法 : 죄를 다스려 벌을 주다.
▶ 乞骸骨 : 관리가 연로함을 이유로 퇴직을 요청하는 것으로 자신의 해골이 고향에 돌아가 장사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말이다. '乞骸', '賜骸骨'이라고도 한다.
▶ 避賢者路 : 현명한 자에게 진출할 길을 비켜줌.

天子曰:
「倉廩既空,民貧流亡,而君欲請徙之,搖蕩不安,動危之,而辭位,君欲安歸難乎?」
황제가 말하였다.
곡식 창고는 이미 텅 비었고백성은 곤궁해져서 유랑하고 있어서그대가 변경으로 이주시키자고 청하여세상이 뒤숭숭하고 인심은 불안하고사회적 동요가 국가의 위기를 일으키는데처하였는데직위를 사임하겠다니 그대는 그 책망이 누구에게 돌리려 하는가?”

以書讓慶,慶甚慚,遂復視事。
조서로 석경을 책망하자 석경이 심히 부끄러워하고 결국 다시 정사를 보았다.

慶文深審謹,然無他大略,為百姓言。
석경이 사려가 세밀하고 處事가 신중하였지만 원대한 계책을 세워 백성을 위한 발언은 하지 못하였다.

後三歲餘,太初二年中,丞相慶卒,謚為恬侯。
3년 남짓 후 太初 2(기원전 103)에 승상 석경이 죽자시호를 恬侯라 하였다.

慶中子德,慶愛用之,上以德為嗣,代侯。
석경의 차남은 石德인데 석경이 그를 사랑하여 맡기매황제가 석덕을 후사로 삼아 侯爵을 계승하게 하였다.

後為太常,坐法當死,贖免為庶人。
훗날 석덕은 太常이 되었으나법을 어겨서 사형당할 처지가 되었는데贖罪하고 庶人이 되었다.

慶方為丞相,諸子孫為吏更至二千石者十三人。
석경이 승상이 되었을 무렵자손들이 관리가 되어 번갈아 2천석이 13명이나 되었다.

及慶死後,稍以罪去,孝謹益衰矣。
석경이 죽은 후에 자손들은 점차 죄를 범하여 면직되어효성스럽고 신중하던 석경의 가풍은 더욱 衰落하였다.

▶ 倉廩 : 곳간.
▶ 難 : 따져 책망하다.
▶ 視事 : 집무하다.▶ 文深 : 사려깊고 세심함.
▶ 審謹 : 세밀하고 신중하며 고지식하다.
▶ 大略 : 원대한 계책.
▶ 太初二年 : 기원전 103년. 太初는 前漢 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이다
▶ 嗣 : 후계자.
▶ 稍 : 점차.

 

2.衛綰

 

衛綰은 代郡 大陵縣 사람으로 수레를 가지고 부리는 기예로 郞官이 되어 文帝를 섬겨 中郞將이 되었다.
景帝가 즉위하여 청렴하고 충성스러운 것이 다른 장수와 견줄 수 없다고 하여 河間王太傅에 임명하였다.
경제 3년 오초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조서를 받아 장수가 되어 河間王의 병사를 이끌고 싸워 공을 세웠고, 中尉가 되었으며 경제 6년에 군공으로 건릉후에 봉해졌다.
그 후 太子太傅가 되고, 어사대부로 옮긴 뒤 丞相까지 올랐다.
위관은 처음에 관리가 되어 승상에 오를 때까지 이렇다할만한 제안을 올리거나 책임질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나 경제는 그가 돈후하여 어린 군주를 잘 보좌할 수 있다고 여겨 그를 존중하고 총애하였으며, 武帝가 즉위하자 사직하고 물러났다.

建陵侯衛綰者,代大陵人也。
建陵侯 衛綰은 代郡의 大陵 사람이다.

綰以戲車為郎,事文帝,功次遷為中郎將,醇謹無他。
위관은 수레 위에서 雜技를 연출하여 郎官이 되어문제를 섬겼다부단히 공을 세워 中郎將으로 승진하였는데성품이 온후하고 신중한 외에 다른 장점은 없었다.

孝景為太子時,召上左右飲,而綰稱病不行。
孝景帝가 태자이었을 때황제의 근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었는데위관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었다.

文帝且崩時,屬孝景曰:
「綰長者,善遇之。」
문제가 붕어할 무렵 경제에게 당부하였다.
衛綰은 長者이니잘 대우하여라.”

及文帝崩,景帝立,歲餘不噍呵綰,綰日以謹力。
문제가 붕어하고 경제가 즉위한 후 한 해 남짓위관을 꾸짖지 않았으며위관은 날마다 신중히 책무를 다하였다.

景帝幸上林,詔中郎將參乘,還而問曰:
「君知所以得參乘乎?」
경제가 上林苑에 행차하면서 중랑장 위관에게 驂乘하라고 명하고돌아올 때 물었다.
그대는 짐이 동승시켰던 까닭을 아는가?”

綰曰:
「臣從車士幸得以功次遷為中郎將,不自知也。」
위관이 말하였다.
신은 소소한 수레꾼으로 총애를 얻었고공을 쌓아서 순차적으로 중랑장으로 승진되었을 뿐이니스스로 알지 못합니다.”

上問曰:
「吾為太子時召君,君不肯來,何也?」
황제가 물었다.
짐이 태자였을 때 그대를 불렀으나그대는 오지 않았는데 무엇때문이었는가?”

對曰:
「死罪,實病!」
위관이 말하였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실제로 병이 났었습니다!”

 

上賜之劍。
황제가 보검을 하사하였다.

綰曰:
「先帝賜臣劍凡六,劍不敢奉詔。」
위관이 아뢰었다.
선제께서 신에게 하사하신 보검이 모두 여섯 자루인데감히 검을 받지 못합니다.”

上曰:
「劍,人之所施易,獨至今乎?」
황제가 말하였다.
보검이란 사람들이 선물하거나 교환하는 것인데설마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는가?”

綰曰:
「具在。」
위관이 아뢰었다.
모두 남아 있습니다.”

上使取六劍,劍尚盛,未嘗服也。
황제가 여섯 자루의 보검을 가져오게 하니보검은 아직도 칼집에 있었고사용한 적이 없었다.

郎官有譴,常蒙其罪,不與他將爭;
有功,常讓他將。
낭관에 견책이 생기면 항상 그들의 죄를 덮어썼고다른 중랑장과 다투지 않았고,
공로가 있으면 항상 다른 장수에게 양보하였다.

▶ 戲車 : 수레 위에서 하는 곡예.
▶ 醇謹 : 온후하고 신중하다.
▶ 功次 : 功이 이어져, 功이 누적되어
▶ 無他 : 장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 稱病 : 병을 핑계하다.
▶ 屬 : 囑과 통하여 분부하다. 부탁하다.
▶ 噍呵 : 꾸짖다. 질책하다.
▶ 幸 : 행차하다.
▶ 參乘 : 陪乘. (윗사람을 모시고 함께 타다.)
▶ 施易 : 주거나 교환하다.
▶ 盛 : 칼이 칼집에 있다는 뜻. 盛은 담다.
▶ 服 : 사용하다.
▶ 蒙 : 덮어쓰다.

上以為廉,忠實無他腸,乃拜綰為河閒王太傅。
황제가 청렴하고 충실하며 다른 마음이 없다고 여기매위관을 河間王의 太傅로 삼았다.

吳楚反,詔綰為將,將河閒兵擊吳楚有功,拜為中尉。
·의 난에조서를 내려 위관을 장군으로 삼으니河間의 군대를 이끌고 오와 초를 공격하여 공로를 세우매中尉로 승진시켰다.

三歲,以軍功,孝景前六年中封綰為建陵侯。
3년 후 군공으로 景帝 前元 6(기원전 151)에 위관을 建陵侯로 봉하였다.

其明年,上廢太子,誅栗卿之屬。
그 이듬해경제는 太子 劉榮을 폐위하고태자의 장인이었던 栗卿의 무리를 주살하였다.

上以為綰長者,不忍,乃賜綰告歸,而使郅都治捕栗氏。
황제가 위관이 長者라서 이 사건을 차마 처리하지 못하리라 여겨서휴가를 주어 귀가하게 하고郅都를 시켜 栗氏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既已,上立膠東王為太子,召綰,拜為太子太傅。
사건이 끝나자 황제가 膠東王 劉徹을 태자로 세웠으며위관을 불러 太子太傅로 임명하였다.

久之,遷為御史大夫。
오래되어 어사대부로 승진하였다.

五歲,代桃侯舍為丞相,朝奏事如職所奏。
5년 후桃侯 劉舍를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는데조정에서는 직분 내의 일만 보고하였다.

然自初官以至丞相,終無可言。
그러나 처음 출사하여 승상에 오를 때까지 이렇다 할 일이나 책임질 일을 하지 않았다.

天子以為敦厚,可相少主,尊寵之,賞賜甚多。
황제는 그가 돈후하여 어린 군주를 잘 보좌할 수 있겠다고 여기매존중하고 총애하였으며상으로 하사한 매우 물건이 많았다.

為丞相三歲,景帝崩,武帝立。
승상이 된 지 3경제가 붕어하였고 武帝가 즉위하였다.

建元年中,丞相以景帝疾時諸官囚多坐不辜者,而君不任職,免之。
建元 연간에 경제가 병들었을 때 여러 관서의 죄인들이 무고하게 연좌된 자가 많음에 승상의 신분이매직무를 다하지 못하였다 하여 면직되었다.

其後綰卒,子信代。
그 후 위관이 죽자아들인 衛信이 작위를 계승하였다.

坐酎金失侯。
酎金의 규정을 어겨서 작위를 잃었다.

▶ 河間王 : 劉元. 전한의 제후왕. 하간효왕 유경의 아들이다.
▶ 吳楚反 : 吳楚七國의 반란
▶ 孝景前六年 : 孝景帝 前元 6년. 기원전 151년.
▶ 廢太子 : 태자 劉榮. 栗姬의 소생. 임강민왕 臨江閔王 劉榮. 경제와 율희의 맏아들로 태자였으나 폐위되어 왕이 되었고, 금령을 어겨 자결하였다. 어머니의 성과 직위를 따 栗太子라고도 한다.
▶ 栗卿 : 태자의 장인.
▶ 郅都 : 임강민왕 유영이 종묘의 영역을 침범하여 궁궐을 지은 죄로 경제에게 소환되었을 때 유영은 서울에 이르러 중위부로 가서 심문을 받았는데, 중위 질도가 매우 엄하게 꾸짖자 두려워하여 자결하였다.
▶ 治捕 : 체포하여 죄를 다스림.
▶ 膠東王 : 劉徹. 景帝의 둘째 아들.

▶ 桃侯舍 : 劉舍. 桃安侯 劉襄의 아들. 경제 기원전 143년에 지진과 일식이 일어났고, 일식이 일어난 지 이틀 후에 면직됐다
▶ 相 : 보좌하다.
▶ 官囚 : 관청의 죄인들.
▶ 坐不辜 : 죄없는 사람이 연좌됨.
▶ 酎金 : 漢시대 종묘의 제사에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3.直不疑

直不疑는 南陽 사람으로 文帝 때 郞官으로 있었다.
억울한 의심을 받아도 자신을 위해 변명하지 않는 덕망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 太中大夫가 되었으며, 오초 반란을 평정한 공로로 어사대부가 되었으며 塞侯에 봉해졌다. 武帝 때 과실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周文의 이름은 仁이며 의술이 뛰어나 景帝가 태자일 때 舍人으로 임명되었고 文帝 때는 태중대부가 되었다.
경제가 즉위한 후 낭중령이 되었다. 신중한 사람으로 남들의 말을 누설하지 않아 경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렴결백했다.

 

張歐의 字는 叔으로 개국공신 張說의 서자이다.
형명학을 연구하여 문제의 태자를 섬겼으며 경제 즉위 후에는 항상 관직이 九卿의 지위에 있었다.
장구는 벼슬한 이래 죄인을 문초할 것을 상주한 적이 없었고, 관원들은 장구를 어진 자라고 생각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늙어서 병이 위중해져 관직을 사퇴하길 청하였고, 무제는 上大夫의 봉록을 내려 陽陵의 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형이 없는데 형수와 私通하였다고?

塞侯直不疑者,南陽人也。
塞侯 直不疑는 南陽 사람이다.

為郎,事文帝。
郎官이 되어 문제를 섬겼다.

其同舍有告歸,誤持同舍郎金去,已而金主覺,妄意不疑,不疑謝有之,買金償。
그와 같은 방을 쓰던 사람이 휴가를 얻어 귀향함에같은 방을 쓰던 낭관의 금을 오인하고 가지고 갔다.
나중에 금의 주인이 알고 직불의를 제멋대로 의심하였다.
직불의가 사과하고 황금을 사서 보상하였다.

而告歸者來而歸金,而前郎亡金者大慚,以此稱為長者。
그런데 휴가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서 금을 돌려주자예전에 금을 잃어버렸던 낭관이 크게 부끄러워하매이 일로 직불위는 長者라 일컬어졌다.

文帝稱舉,稍遷至太中大夫。
문제도 칭찬하고 발탁하였으며 점차 승진하여 太中大夫에 이르렀다.

朝廷見,人或毀曰:
「不疑狀貌甚美,然獨無柰其善盜嫂何也!」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 어떤 사람이 헐뜯었다.
직불의의 용모는 훌륭하지만유독 형수를 좋아하여 사통한 사건은 어떻게 처리할 방법이 없다!”

不疑聞,曰:
「我乃無兄。」
직불의가 듣고 말하였다.
나에게는 형이 없다.”

然終不自明也。
그러나 끝까지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吳楚反時,不疑以二千石將兵擊之。
·의 난에 직불의가 2천석의 관리 신분으로 병사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景帝後元年,拜為御史大夫。
경제 後元 元年(기원전 143), 어사대부로 임명하였다.

天子修吳楚時功,乃封不疑為塞侯。
황제가 ·의 반란 때 공적을 총결산 함에 직불의를 塞侯로 봉하였다.

武帝建元年中,與丞相綰俱以過免。
武帝 建元 연간에는 승상 衛綰과 더불어 과실로 인하여 면직되었다.

不疑學老子言。
직불의는 老子의 학설을 익혔다.

其所臨,為官如故,唯恐人知其為吏跡也。
그가 부임한 곳마다 관리를 전과 같이 두되단지 그가 관리로서 남긴 치적을 남들이 알까 근심하였다.

不好立名稱,稱為長者。
명성을 세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매長者라고 칭송되었다.

不疑卒,子相如代。
직불의가 죽자아들 直相如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孫望,坐酎金失侯。
손자 直望이 酎金의 죄를 지어 작위를 잃어버렸다.

▶ 同舍 : 한 방에서 동거하다.
▶ 告歸 : 휴가를 청하여 귀향하다.
▶ 妄意 : 제멋대로 의심하다.
▶ 謝 : 사과하다.
▶ 盜嫂 : 형수와 사통하다.
▶ 自明 : 자기를 위하여 변호하다.

▶ 景帝後元年 : 경제 후원 원년. 기원전 143년.
▶ 臨 : 다스리다.
▶ 名稱 : 名聲.
▶ 酎金 : 漢시대에 종묘의 제사에 제후가 황제에게 바치는 貢金.

 

 

4. 周仁

 

郎中令周文者,名仁,其先故任城人也。
郎中令 周文의 이름은 인데그의 선조는 원래 任城 사람이었다.

以醫見。
의술로 황제를 알현하였다.

景帝為太子時,拜為舍人,積功稍遷,孝文帝時至太中大夫。
경제가 태자였을 때 舍人으로 임명되었고공로를 쌓아 차츰 승진하여 文帝 때 태중대부에 이르렀다.

景帝初即位,拜仁為郎中令。
경제 즉위 초기에 周仁을 낭중령으로 임명하였다.

仁為人陰重不泄,常衣敝補衣溺袴,期為不絜清,以是得幸。
周仁은 爲人이 주의 깊고 신중하여 남의 말을 누설하지 않았고언제나 해지고 기운 옷과 오줌으로 찌든 속바지를 입었는데불결하게 처신하여 청렴을 기하매이 때문에 총애를 받았다.

景帝入臥內,於後宮祕戲,仁常在旁。
경제가 침궁에 들어가서 후궁에서 은밀하게 희롱할 때 주인은 항상 곁에 있었다.

至景帝崩,仁尚為郎中令,終無所言。
경제가 붕어할 때까지 周仁은 낭중령이었으며 끝내 비밀을 지켰다.

上時問人,仁曰:
「上自察之。」
황제가 때로 남에 관하여 물으면 周仁은 말하였다.
폐하께서 친히 관찰하십시오.”

然亦無所毀。
그리고 또 헐뜯지 않았다.

以此景帝再自幸其家。
이 때문에 경제가 두 번이나 친히 그의 집으로 행차하였다.

家徙陽陵。
주인은 陽陵으로 집을 옮겼다.

上所賜甚多,然常讓,不敢受也。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 매우 많았으나 늘 사양하며 감히 받지 않았다.

諸侯群臣賂遺,終無所受。
제후와 신하들이 뇌물을 주면 끝까지 받지 않았다.

武帝立,以為先帝臣,重之。
武帝가 즉위하자 선제의 신하이었으므로 존중하였다.

仁乃病免,以二千石祿歸老,子孫咸至大官矣。
주인이 병으로 사직함에 2천석의 봉록으로 고향에 돌아가서 노후를 보내게 하였으며자손들이 모두 大官에 이르렀다.

▶ 陰重 : 주의깊고 신중하다.
▶ 敝補 : 해지고 깁다.
▶ 溺褲 : 오줌으로 찌든 속바지.
▶ 卧內 : 침실.
▶ 祕戲 : 남녀의 성교를 달리 이르는 말.
▶ 讓 : 사양하다.

 

 

5. 張叔

 

御史大夫張叔者,名歐,安丘侯說之庶子也。
御史大夫 張叔의 이름은 이니 安丘侯 張說의 庶子이다.

孝文時以治刑名言事太子。
孝文帝 때에 刑名學을 연구하였고 태자를 섬겼다.

然歐雖治刑名家,其人長者。
張歐는 비록 刑名家를 연구하였으나그의 인품은 長者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景帝時尊重,常為九卿。
경제 때에 그를 존중하여 항상 九卿의 지위에 있었다.

至武帝元朔四年,韓安國免,詔拜歐為御史大夫。
무제 元朔 4(기원전 125)에 이르러 韓安國을 면직시키고조서를 내려서 張歐를 어사대부로 임명하였다.

自歐為吏,未嘗言案人,專以誠長者處官。
장구가 어사대부가 되고부터 남을 처벌하자고 말한 적이 없이오로지 성실한 장자로서 벼슬살이하였다.

官屬以為長者,亦不敢大欺。
官屬들도 장자로 섬기매또한 감히 크게 속이지 못하였다.

上具獄事,有可卻,卻之;
不可者,不得已,為涕泣面對而封之。
황제가 獄事를 지시하면 각하할 만한 것은 각하하고각하해서 안 될 것은 부득이 처리하였는데눈물을 흘리며 문서를 面對하고 친히 밀봉하였다.

其愛人如此。
그가 사람을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老病甐,請免。
늙고 병이 위독해지자 사직을 청하였다.

於是天子亦策罷,以上大夫祿歸老于家。
그래서 천자도 조서를 내려 파직하되上大夫의 봉록으로 귀향하여 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家於陽陵。子孫咸至大官矣。
그의 집은 陽陵에 있었고자손들은 모두 大官이 되었다.

▶ 治 : 연구하다.
▶ 刑名 : 刑은 形과 같다.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과 기술. 刑은 形과 통하여 ‘형체’ 또는 事實을 말하며 名은 언론 또는 주장을 말한다.
▶ 元朔四年 : 武帝 元朔 4년. 기원전 125년.
▶ 韓安國 : 漢 城安 사람. 처음에 梁孝王을 섬겨 中大夫가 되고, 후에 한나라의 御史大夫, 丞相 대행, 材官將軍이 되었다.
▶ 案人 : 조사하여 처벌하다.
▶ 誠長者 : 성실하고 온후한 태도.
▶ 具 : 준비하다.
▶ 卻 : 물러나다. 물리치다.
▶ 病甐 : =病篤. 병이 위독하다.
▶ 策 : 문자를 기록한 대나무 조각. 황제의 명령의 일종으로 봉토와 작위를 수여할 때 쓰는 명령이다.

 

太史公曰:
仲尼有言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其萬石、建陵、張叔之謂邪?
是以其教不肅而成,不嚴而治。
塞侯微巧,而周文處讇君子譏之,為其近於佞也。
然斯可謂篤行君子矣!
태사공은 말한다.
孔子께서, ‘君子는 말은 어눌하게 하고 행동하는 데는 민첩하고자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그것이 萬石君 石奮建陵侯 衛綰張叔을 이르는가?
이 때문에 그들의 政敎는 엄숙하지 않아도 이루어졌고그들의 시책은 호되게 하지 않아도 잘 다스려졌다.
塞侯 직불의에게는 교묘함이 없고 周文은 지나치게 공손하여 군자가 그들을 기롱하였는데그들의 언행이 아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실하게 행동하는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

▶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 군자는 말을 하는 데 어눌하고 행동하는 데 민첩하고자 한다. 즉, 당시 사람들의 행동이 말과 부합하지 않음을 미워한 것이다.<論語·里仁 24> 訥은 굼뜸이고 敏은 재빠름이다.

 

 

論語集註 里仁 第四(논어집주 이인 제사) 第二十四章

▣ 第二十四章 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孔子께서 말씀하셨다. “君子는 말은 더디게 하고, 實行에는 민첩하고자 한다.” 謝氏曰: 「放言易,故欲訥;力行難,故欲敏。」 謝氏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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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肅 : 성급하고 모질다. 엄하다.
▶ 嚴 : 호되다. 매섭다.
▶ 讇 : 아첨하다. 알랑거리다.
▶ 譏 : 비방하다. 비웃다.
▶ 佞(녕) : 아첨하다.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 篤行 : 독실한 행실. 성실히 실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