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篇은 30세가 중 열네 번째 편으로 전국시대 魏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魏는 晉에서 분리되어 시작되었으며, 魏의 시조는 周武王의 동생인 畢公高이다. 그의 자손 畢萬은 晉의 獻公으로부터 魏에 봉해져 晉의 大夫가 되었고, 魏絳은 卿에 임명되어 晉 6경의 한 사람으로서 정권을 쥐었다. 기원전453년 魏桓子가 韓·趙와 더불어 晉을 3분하고, 기원전403년 주나라 威烈王으로부터 諸侯로서 독립이 공인되었다.
이편에서는 魏文侯, 魏惠王과 安釐王(: 안희왕)에 대해 주로 기술하였으며, 위문후는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灌漑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中山·大梁을 공략해서 멸망시켰으며, 楚를 공격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는 최강국이었다. 그러나 秦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면서 기원전361년 大梁으로 천도하고, 기원전329년 上郡 15縣을 秦에 헌상하여 화의를 청하였으며, 결국 기원전225년에 秦始皇帝에 의해 멸망하였다.
사마천은 太史公自序에서
“畢萬이 魏에 봉해졌고, 점쟁이는 이를 예언하였다. 魏絳이 秦悼公의 동생 楊干을 모욕하고, 山戎과 晉이 동맹을 맺도록 하였다. 魏文侯는 인의를 귀하게 여겨 子夏를 스승으로 모셨다. 魏惠王이 스스로 교만하여 齊와 秦의 공격을 받았다. 安釐王이 信陵君을 의심하자 제후들이 魏를 멀리하였다. 결국은 수도 大梁에서 秦에게 멸망되어 魏王 假는 포로로 잡혀 노복이 되었다. 晉文公의 패업 성취를 도운 魏武子를 칭송하며 제14편 ‘魏世家’를 지었다.
라고 기술하였다.
魏之先,畢公高之後也。
魏씨의 선조는 畢公高의 후예이다.
畢公高與周同姓。
필공 고는 周천자와 같은 姓이다.
武王之伐紂,而高封於畢,於是為畢姓。
周武王이 은나라 紂왕을 정벌하고 高를 畢에 봉하니, 이에 畢을 姓으로 삼았다.
其後絕封,為庶人,或在中國,或在夷狄。
그의 후대에 封爵이 끊어져 서민이 되어 중원에 살거나 夷狄지역에 살았다.
其苗裔曰畢萬,事秦獻公。
그의 후예 중에 畢萬이라고 있었는데 晉獻公을 섬겼다.
▶ 畢公高: 성은 姬이고, 이름은 高이다. 周나라 때 畢國의 군주로, 周文王 姬昌의 열다섯째 아들이자 周武王 姬發의 이복동생이다. 周무왕이 商나라를 멸망시킨 후에 畢땅에 봉해져 畢公高로 일컬어진다. 成王때 太史가 되었고, 성왕이 죽은 뒤 遺囑을 받아 太保 召公과 함께 康王을 보필하였다.
▶ 絕封: 封爵이 중단되다.
▶ 中國: 중원지역의 각 제후국.
▶ 夷狄: 고대 중국에서 이민족의 지배를 포함해 중국 대륙을 지배한 왕조는 스스로를 '中國' 또는 '中華'라고 불렀다. 또 중화의 사방으로 거주하며 조정에 귀순하지 않는 주변 민족을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라 불렀고 '四夷' 혹은 '夷狄'이라고 총칭하였다.
▶ 苗裔: 후대. 자손.
▶ 畢萬: 춘추시대 晉 사람. 畢公高의 후예로, 晉獻公을 섬겼다. 헌공을 도와 耿과 霍, 魏를 멸망시켰다. 魏地에 봉해져서 大夫가 되었다. 이후 韓魏趙가 晉을 三分하였다.
▶ 獻公: 晉獻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詭諸이고, 武公의 아들이다. 士蔿의 계책을 써서 晉의 公子들을 모두 죽이고 처음으로 絳에 도읍을 정하였다. 헌공16년 二軍을 설치해 霍과 魏, 耿을 멸망시켰다.
22년 虞에게 길을 빌려 虢을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虞도 멸망시켰다.
獻公之十六年,趙夙為御,畢萬為右,以伐霍、耿、魏,滅之。
晉헌공16년(기원전661년)에 趙夙은 전차를 몰고 필만은 호위를 담당하여 霍, 耿, 魏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以耿封趙夙,以魏封畢萬,為大夫。
耿을 조숙에게 봉하고, 魏를 필만에 봉하여 대부로 삼았다.
卜偃曰:
「畢萬之後必大矣,萬,滿數也;魏,大名也。
以是始賞,天開之矣,天子曰兆民,諸侯曰萬民。
今命之大,以從滿數,其必有眾。」
卜筮를 담당하는 卜偃이 말하였다.
“필만의 후손들은 틀림없이 크게 될 터이니, 萬은 가득 찬 숫자이고 魏는 큰 이름이다.
이런 魏 땅을 상으로 주었으니 하늘이 계시한 것이며, 천자가 통치하는 백성을 兆民이라 하고, 제후가 통치하는 萬民이라 한다.
지금 큰 이름에다 가득 찬 숫자까지 딸리게 하였으니 그는 틀림없이 많은 사람을 얻으리라.”
初,畢萬卜事晉,遇屯之比。
당초 필만이 晉을 섬김에 대하여 점을 쳤더니, <屯>괘가 <比>괘로 변하였다.
辛廖占之,曰:
「吉。
屯固比入,吉孰大焉,其必蕃昌。」
辛廖가 점괘를 말하였다.
“길하다.
둔괘는 단단하고, 비괘는 들어간다는 뜻이니 이보다 더 길한 괘가 어디 있겠는가. 그 후손이 틀림없이 번창하겠다.
▶ 趙夙: 晉獻公 16년에 霍, 魏, 耿을 공격할 때 장수가 되어 霍을 공격하였다. 趙夙이 헌공의 병거를 몰고, 畢萬은 호위를 담당하여 虢, 魏, 耿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 右: 車右. 고대에 전차를 타고 오른쪽에서 호위하는 무사.
▶ 卜偃: 郭偃. 卜筮를 맡은 晉大夫
▶ 魏: 巍와 통용된다. 높고 큰 모양. 魏字의 명칭은 그 뜻이 ‘大’ 이다
▶ 遇屯之比: 屯卦(☵☳)가 比卦(☵☷)로 변한 卦를 만났다. 屯은 險難의 象이므로 堅固가 되고, 比는 親密의 象이므로 進入이 된다. 屯卦가 변하여 比卦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을 규합하여 견고히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필만은 魏땅에 봉해져 대부가 되었다.
▶ 辛廖: 晉 대부.
畢萬封十一年,晉獻公卒,四子爭更立,晉亂。
필만이 봉지를 받은 지 11년(기원전651년), 晉헌공이 죽었으며, 네 아들이 서로 군주의 자리를 다투어 晉이 혼란스러웠다.
而畢萬之世彌大,從其國名為魏氏。
필만의 후대들은 점점 커져서 그 나라 이름을 좇아 魏氏라 하였다.
生武子。
武子를 낳았다.
魏武子以魏諸子事晉公子重耳。
魏武子는 위씨 자손들과 晉의 공자 重耳를 섬겼다.
晉獻公之二十一年,武子從重耳出亡。
진헌공21년(기원전657년)에 무자는 중이를 따라서 망명했었다.
十九年反,重耳立為晉文公,而令魏武子襲魏氏之後封,列為大夫,治於魏。
19년 만에 돌아와서 중이는 晉文公으로 즉위하여 위무자에게 위씨 후대의 봉작을 세습하게 하고, 대부의 반열에 올려서 魏를 다스리게 하였다.
生悼子。
위무자가 悼子를 낳았다.
▶ 四子: 奚齊, 悼子(: 卓子), 重耳, 夷吾를 말한다. 진헌공에게는 아들이 여덟 있었는데 태자 申生, 공자 重耳, 夷吾 등이 모두 현명하다는 명성이 있었다. 나중에 嬖妾 驪姬를 총애하여 그의 아들 奚齊를 세우고자 태자 신생을 죽였다. 공자 중이와 이오는 외국으로 달아났다. 마침내 晉은 혼란에 빠졌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世: 후대.
▶ 彌大: 더욱 더 커지다.
▶ 諸子: 아들들.
魏悼子徙治霍。
魏悼子는 霍읍에 도읍하였다.
生魏絳。
魏降을 낳았다.
魏絳事晉悼公。
위강은 晉悼公을 섬겼다.
悼公三年,會諸侯。
도공3년(기원전570년)에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悼公弟楊干亂行,魏絳僇辱楊干。
도공의 동생 楊干이 軍陣의 대열을 어지럽히자 위강이 양간의 마부를 죽였다.
悼公怒曰:
「合諸侯以為榮,今辱吾弟!」
將誅魏絳。
도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제후들과 만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내 동생을 욕보이다니!”
라며 위강을 죽이려 하였다.
或說悼公,悼公止。
누군가가 도공을 설득하자 도공이 그만두었다.
卒任魏絳政,使和戎、翟,戎、翟親附。
마침내 위강에게 정치를 맡겨 戎, 狄과 우호를 맺게 하니 융과 적이 직접 귀부하였다.
▶ 魏悼子: 魏武子의 아들.
▶ 魏絳: 춘추시대 晉의 大夫. 시호는 莊 또는 昭다. 魏莊子로도 불린다. 魏犨의 아들이다. 처음에 中軍司馬에 임명되었다. 晉悼公이 제후들을 불러모았을 때 도공의 동생 楊幹이 軍陣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을 소탕하였다.
▶ 晉悼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周 또는 糾이고, 襄公의 증손이다. 欒書가 厲公을 살해하고 周나라에서 맞이하여 14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功業을 닦고 덕정을 베풀면서, 제후를 모아 여러 차례 楚와 鄭을 두고 전쟁을 벌였는데, 鄭이 항복하자 楚도 감히 다투지 못하였다. 魏絳을 보내 戎과 화해하니 戎人이 직접 歸附하였다. 晉이 다시 覇者가 되었다.
15년 동안 재위하였다.
▶ 行: 軍陳의 隊伍.
▶ 魏絳僇辱楊干: 魏絳이 中軍司馬였는데, 양간의 마부가 수레로 軍의 行列을 어지럽혔으니 마부의 죄로 여겨 마부를 죽였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翟: 狄과 통용된다.
悼公之十一年,曰:
「自吾用魏絳,八年之中,九合諸侯,戎、翟和,子之力也。」
晉도공11년(기원전562년)에 도공이 말하였다.
“내가 위강을 기용하고부터 8년 동안 제후들을 아홉 번 회합하고, 융 · 적과 화합했으니 그대의 힘이다.”
賜之樂,三讓,然後受之。
女樂을 위강에게 하사하자 세 번 사양하고 받았다.
徙治安邑。
위강은 安邑에 도읍하였다.
魏絳卒,謚為昭子。
위강이 죽자 시호를 昭子라 하였다.
生魏嬴。
魏嬴을 낳았다.
嬴生魏獻子。
위영은 魏獻子를 낳았다.
▶ 賜之樂: 도공이 魏絳에게 8사람씩 1줄로 이룩된 女樂士와 노래할 때 쓰는 編鐘 1벌을 주었다.
▶ 三讓: 세 번 사양하다.
▶ 徙治: 도읍하다.
▶ 魏獻子: 魏舒. 춘추시대 晉의 大夫.
獻子事晉昭公。
魏獻子는 晉昭公을 섬겼다.
昭公卒而六卿彊,公室卑。
소공이 죽자 晉의 6경이 강성해지고 공실은 쇠약해졌다.
▶ 獻子: 魏獻子. 魏舒. 춘추시대 晉의 大夫. 시호가 獻이어서 위헌자라고 한다. 저명한 군사개혁가이다.
▶ 晉昭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이고, 平公의 아들이다. 재위하는 중에 晉의 육경이 강해지고 公室은 약화되었다. 6년 동안 재위하였다.
▶ 六卿: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 6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晉은 결국 이들 중 韓魏趙 3姓에 의해 3분되었다
▶ 公室: 춘추전국시대 제후의 가족 또는 제후국의 정권을 말한다.
晉頃公之十二年,韓宣子老,魏獻子為國政。
晉頃公 12년(기원전514년)에 韓宣子가 노령으로 사직하자 魏獻子가 국정을 맡았다.
晉宗室祁氏、羊舌氏相惡,六卿誅之,盡取其邑為十縣,六卿各令其子為之大夫。
晉의 종실인 祁氏와 羊舌氏가 서로를 미워하자 육경이 그들을 죽이고, 그 읍을 모두 빼앗아 열 개의 현으로 만들어서 육경이 각자 자신의 자식들을 그곳의 대부로 삼았다.
獻子與趙簡子、中行文子、范獻子并為晉卿。
위헌자는 趙簡子, 中行文子, 范獻子와 함께 晉의 卿이 되었다.
▶ 老: 노령으로 퇴직하다. 告老.
▶ 韓宣子: 韓起. 춘추시대 晉의 大夫.
▶ 魏獻子: 魏舒. 춘추시대 晉의 大夫.
▶ 祁氏: 晉의 大夫인 祁奚집안으로 손자 祁盈때 멸족되었다.
▶ 羊舌氏: 楊氏. 叔向의 食邑이 楊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楊食我로 稱하였으며, 伯石(: 楊石)이다. 羊舌職집안으로, 증손 羊舌食我 때 멸족되었다.
其後十四歲而孔子相魯。
그 후 14년(기원전500년)에 孔子가 魯의 재상이 되었다.
後四歲,趙簡子以晉陽之亂也,而與韓、魏共攻范、中行氏。
그로부터 4년 후에 趙簡子가 晉陽의 난으로 韓씨, 魏씨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를 공격하였다.
魏獻子生魏侈。
위헌자는 魏侈를 낳았다.
魏侈與趙鞅共攻范、中行氏。
위치는 趙鞅과 함께 범씨와 중항씨를 공격하였다.
▶ 趙簡子: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 사람으로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中行氏: 춘추시대 晉의 6경의 하나로 기원전632년 성립하여 기원전490년 패망하였다. 중항씨의 선조는 中行桓子이며 중항씨가 荀氏에서 나왔으므로 荀林父라고 한다.
▶ 晉陽之亂: 晋定公 15년(기원전497년) 11월에 荀櫟, 韓不信, 魏侈는 범길사와 중항인과는 원수지간이라 軍士를 이동시켜 범길사와 중항인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범씨, 중항씨가 오히려 진정공을 공격하여 진정공이 반격하자 범씨, 중항씨가 패하여 朝歌로 달아났다. 한불녕과 위치는 조앙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다. 12월 조앙이 絳城으로 들어와 정공의 궁에서 맹약하였다. <사기 세가 권43. 조세가>
▶ 魏侈: 위간자의 아들. 魏襄子. 전국시대 晉 위씨의 領袖가 된다.
魏侈之孫曰魏桓子,與韓康子、趙襄子共伐滅知伯,分其地。
魏侈(: 위양자)의 손자가 魏桓子인데, 韓康子, 趙襄子와 함께 知伯을 공격하여 멸하고 그 땅을 나누었다.
▶ 魏桓子: 기원전453년에 晉의 3卿인 韓虎 韓康子, 魏駒 魏桓子, 趙孟 趙襄子가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 瑤를 죽이고 知氏를 멸문시킨 다음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晉을 삼분하였다.
▶ 趙襄子: 毋卹. 趙簡子의 아들. 춘추시대 晉의 대부가 되며 조씨 가문의 수령으로 전국시대에 趙의 창시자가 된다. 시호가 양이므로 조양자라고 칭한다.
桓子之孫曰文侯都。
魏桓子의 손자가 文侯都(: 斯)이다.
魏文侯元年,晉靈公之元年也。
위문후 원년(기원전424년)은 晉靈公의 원년이다.
與韓武子、趙桓子、周威王同時。
韓武子, 趙桓子, 周威王과 동시대이다.
▶ 魏文侯: 전국시대 魏의 초대 제후로 성은 姬, 씨는 魏, 이름은 ‘斯’, 또는 ‘都’이다.
李悝·吳起·樂羊·西門豹 등 인재를 등용하였고, 魏를 전국시대 최초로 패국으로 만들었다.
六年,城少梁。
위문후 6년에 少梁에 성을 쌓았다.
十三年,使子擊圍繁、龐,出其民。
위문후13년에 子擊에게 繁과 龐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여 그곳의 백성을 내쫓았다.
十六年,伐秦,筑臨秦元裏。
위문후16년에 秦을 공격하여 臨秦과 元里에 성을 쌓았다.
▶ 子擊: 魏의 태자. 위문후의 아들로 이름은 擊이다. 전국시대 晉의 대부로 훗날의 魏武侯이다.
十七年,伐中山,使子擊守之,趙倉唐傅之。
위문후17년에 中山을 공격하여 子擊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고 趙倉唐에게 보좌하게 하였다.
子擊逢文侯之師田子方於朝歌,引車避,下謁。
자격이 위문후의 스승 田子方을 朝歌에서 만나니, 수레를 한쪽으로 비켜 세우고 내려서 뵈었다.
田子方不為禮。
전자방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子擊因問曰:
「富貴者驕人乎?
且貧賤者驕人乎?」
이에 자격이 물었다.
“부귀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합니까?
아니면 빈천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합니까?”
▶ 傅: 보좌하다.
▶ 謁: 알현하다. 만나 뵙다.
▶ 田子方: 魏의 현인으로 이름은 無擇이며 魏文侯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데 공자의 제자인 子夏계열의 유학자로 추정된다.
<참고> <莊子外篇第21篇 田子方>
▶ 不為禮: 예의에 어긋나다.
子方曰:
「亦貧賤者驕人耳。
夫諸侯而驕人則失其國,大夫而驕人則失其家。
貧賤者,行不合,言不用,則去之楚、越,若脫屣然,柰何其同之哉!」
자방이 대답하였다.
“역시 빈천한 사람이 남에게 교만하다.
무릇 제후가 남에게 교만하면 그 나라를 잃고, 대부가 남에게 교만하면 그 집안을 잃는다.
빈천한 자는 행동이 서로 맞지 않고 말이 쓰이지 않으면, 떠나서 楚, 越로 가기를 신발 벗듯이 하나니, 이 둘을 어떻게 같게 보겠는가!”
子擊不懌而去。
자격이 불쾌해하며 떠났다.
西攻秦,至鄭而還,筑雒陰、合陽。
서쪽으로 秦을 공격하여 鄭까지 이르렀다가 돌아왔으며, 洛陰과 合陽에 성을 쌓았다.
▶ 屣: 신. 如脫弊屣 :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 뜻으로, 아깝게 여기지 않고 버림을 이르는 말
▶ 懌: 기뻐하다. 즐거워하다.
二十二年,魏、趙、韓列為諸侯。
위문후22년(기원전403년)에 魏, 趙, 韓이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二十四年,秦伐我,至陽狐。
위문후24년(기원전401년)에 秦이 魏를 공격하여 陽狐에 이르렀다.
二十五年,子擊生子罃。
위문후25년(기원전400년)에 子擊이 罃(앵)을 낳았다.
文侯受子夏經藝,客段干木,過其閭,未嘗不軾也。
魏문후가 子夏에게서 經書를 배우고, 段干木을 손님의 예로 대하면서 그의 마을을 지날 때 수레의 가로댄 나무를 잡고 목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秦嘗欲伐魏,或曰:
「魏君賢人是禮,國人稱仁,上下和合,未可圖也。」
秦이 魏를 공격하려 하자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魏의 군주는 현인을 예우하여 國人이 모두 그의 인덕을 칭찬하고 상하가 화목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
文侯由此得譽於諸侯。
문후가 이로 인해 제후들에게 명예를 얻었다.
▶ 魏, 趙, 韓列為諸侯: 기원전403년 주 威烈王이 韓趙魏의 三家에게 모두 諸侯의 작위를 내렸다.
▶ 罃: 魏惠王. 梁惠王으로도 불린다.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罃이고, 武侯의 아들이다.
▶ 子夏: 전국시대의 학자. 공자의 제자로 孔門十哲의 한 사람이다. 그의 학문은 시와 예에 통하였다. 또 주관적 내면성을 존중하는 曾子 등과 달리 禮의 객관적 형식을 존중하는 것이 특색이다.
▶ 經藝: 經書. 6경 또는 六藝.
▶ 段干木: 段干生. 전국시대 초기 魏의 학자이며 성은 段干이고 이름은 木이다. 魏文侯가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 閭: 마을. 뒷골목.
▶ 軾: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 수레 앞의 횡목에 의지하여 경의를 표하다
任西門豹守鄴,而河內稱治。
西門豹를 鄴의 태수로 임용하자 河內가 잘 다스려진다고 알려졌다.
▶ 西門豹: 전국시대의 魏 정치가. 12개의 수로를 파서 논으로 강물을 끌어들이는 관개사업을 하여, 농업생산 증대에 이바지하였다. 또 그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미녀를 골라 강물에 던지는 폐습을 일소하였다.
[史記列傳]권126滑稽列傳
▶ 鄴: 河北省 臨漳縣 서쪽.
▶ 河内: 춘추전국시대에 황하 이북지역을 河內라고 칭하였다.
魏文侯謂李克曰:
「先生嘗教寡人曰
『家貧則思良妻,國亂則思良相』。
今所置非成則璜,二子何如?」
위문후가 李克에게 말하였다.
“선생께서 일찍이 과인에게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하게 된다. ’
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재상으로 삼을만한 사람으로는 魏成이 아니면 翟璜이니 두 사람이 어떠합니까?”
李克對曰:
「臣聞之,卑不謀尊,疏不謀戚。
臣在闕門之外,不敢當命。」
이극이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비천한 사람은 존귀한 사람을 논하지 않고, 먼 사람은 친척에 대하여 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은 궁궐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文侯曰:
「先生臨事勿讓。」
문후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이 일에 사양하지 마십시오.”
▶ 李克: 晉의 대부. 전국시대 초기 魏의 사람. 子夏의 제자다. 魏文侯가 中山을 멸하고 태자 擊을 中山君에 임명했을 때 翟璜이 천거해 中山相이 되었다.
▶ 成: 魏成子. 위문후의 동생.
▶ 璜: 翟璜. 전국시대 초기의 魏의 재상으로 위문후를 보좌하였다. 중산국을 멸하는 데 앞장서서 상경에 올랐다.
▶ 闕門: 궁전을 말한다. 闕門의 밖에 있다는 것은 疎遠함을 말한다.
李克曰:
「君不察故也。
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
이극이 말하였다.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그가 친한 이를 살피고, 부귀함에 어울리는 자를 살피고, 현달함에 추천하는 자를 살피고, 궁핍함에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가난함에 취하지 않는 것을 살펴야 하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극의 대답을 왜 기다리십니까!”
文侯曰:
「先生就舍,寡人之相定矣。」
문후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관사로 돌아가십시오, 과인의 재상을 결정했습니다.”
▶ 居: 평소. 보통 때.
▶ 與: 교제하다. 왕래하다.
▶ 達: 지위가 높고 귀하다.
李克趨而出,過翟璜之家。
이극이 종종걸음으로 나와 翟璜의 집에 들렀다.
翟璜曰:
「今者聞君召先生而卜相,果誰為之?」
적황이 말하였다.
“지금 듣자하니 군주께서 선생을 불러 재상을 고르게 하였다는데 과연 누가 되었습니까?”
李克曰:
「魏成子為相矣。」
이극이 말하였다.
“魏成子가 재상이 되었습니다.”
翟璜忿然作色曰:
「以耳目之所睹記,臣何負於魏成子?
西河之守,臣之所進也。
君內以鄴為憂,臣進西門豹。
君謀欲伐中山,臣進樂羊。
中山以拔,無使守之,臣進先生。
君之子無傅,臣進屈侯鮒。
臣何以負於魏成子!」
적황이 忿然히 안색을 바꾸며 말하였다.
“귀와 눈이 보고 기억하는 바로,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西河의 군수 吳起를 제가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마음속으로 업현을 걱정하셔서 제가 서문표를 추천했습니다.
군주께서 중산을 공격하려고 하셨으므로 제가 樂羊을 추천했습니다.
중산을 함락하고는 지킬 사람이 없어 제가 선생을 추천했습니다.
군주의 아들에게 사부가 없어 제가 屈侯鮒를 추천했습니다.
신이 어찌 위성자만 못합니까!”
▶ 趨: 종종걸음치다. 존경과 예의의 표시로 잔걸음으로 빨리 걷는 것을 말한다.
▶ 卜: 선택하다.
▶ 西河: 황하의 서쪽 지역. 魏가 처음에 吳起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吳起: 吳子로 불리우며, 전국시대 군사 지도자이며 정치가였다. 魏 사람으로 魯, 魏, 楚를 섬겼다. 魏에서 많은 큰 전투를 지휘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며, 후에 楚로 도주하여 悼王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李克曰:
이극이 말하였다.
「且子之言克於子之君者,豈將比周以求大官哉?
君問而置相
『非成則璜,二子何如』?
克對曰:
『君不察故也。
居視其所親,富視其所與,達視其所舉,窮視其所不為,貧視其所不取,五者足以定之矣,何待克哉!』
“그렇다면 그대가 이극을 군주께 천거함이 어찌 장차 한패가 되어 큰 벼슬을 구하려 함이란 말입니까?
군주께서 재상을 두는 일에 관해 묻기를,
‘위성 아니면 적황인데 두 사람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군주께서 살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그가 친한 이를 살피고, 부귀함에 어울리는 자를 살피고, 현달함에 추천하는 자를 살피고, 궁핍함에 하지 않는 일을 살피고, 가난함에 취하지 않는 것을 살펴야 하나니, 이 다섯 가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데, 이극의 대답을 왜 기다리십니까!’라고 했을 뿐입니다.
是以知魏成子之為相也。
그래서 위성자가 재상이 될 줄 알았습니다.
且子安得與魏成子比乎?
그리고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습니까?
魏成子以食祿千鐘,什九在外,什一在內,是以東得卜子夏、田子方、段干木。
위성자는 녹봉 1천 鍾 중에서 9/10는 밖에다 나누어 주고 1/10만 안에서 썼으며, 이 때문에 동쪽으로 卜子夏, 田子方, 段干木을 얻었습니다.
此三人者,君皆師之。
이 세 사람은 군주가 모두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子之所進五人者,君皆臣之。
그대가 추천한 다섯 사람은 군주께서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子惡得與魏成子比也?」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翟璜逡巡再拜曰:
「璜,鄙人也,失對,願卒為弟子。」
적황이 주저하다가 재배하고 말하였다.
“이 적황이 천박한 놈입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평생 제자가 되겠습니다.”
▶ 比周: 한패가 되다. 파당을 짓다. 周는 친밀하다.
▶ 千鐘: 봉록이 많음을 말한다. 鐘은 고대 용량의 단위로 10釜를 1종이라 하며, 1부는 6말 4되이다.
▶ 惡: 어찌.
▶ 逡巡: 머뭇거리다. 주저주저하다.
二十六年,虢山崩,壅河。
위문후26년(기원전420년)에 虢山이 무너져 황하를 막았다.
三十二年,伐鄭。
위문후32년(기원전414년)에 鄭을 공격하였다.
城酸棗。
酸棗에 성을 쌓았다.
敗秦于注。
注城에서 秦을 물리쳤다.
三十五年,齊伐取我襄陵。
위문후35년(기원전411년)에 齊가 魏의 襄陵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三十六年,秦侵我陰晉。
위문후36년(기원전410년)에 秦이 魏의 陰晉을 침공하였다.
▶ 壅: 막다.
三十八年,伐秦,敗我武下,得其將識。
위문후38년(기원전408년)에 秦을 공격하여 武下城에서 패퇴시키고 그 장수 識을 생포하였다.
是歲,文侯卒,子擊立,是為武侯。
이해에 魏문후가 죽고, 아들 子擊이 즉위하니 그가 武侯이다.
魏武侯元年,趙敬侯初立,公子朔為亂,不勝,奔魏,與魏襲邯鄲,魏敗而去。
위무후 원년(기원전386년)에 趙敬侯가 막 즉위하고 공자 朔이 난을 일으켜 성공하지 못하고 魏로 도망쳐 와서 魏와 함께 趙의 邯鄲을 습격했으나 魏軍이 패하여 물러났다.
▶ 子擊立: 魏武侯. 전국시대 魏의 제2대 후작이다. 성은 姬. 씨는 魏. 이름은 撃이다. 魏文侯의 아들이다.
▶ 趙敬侯: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章이고, 烈侯의 아들이다. 즉위한 해 처음으로 수도를 邯鄲으로 정하였다. 경후11년 趙, 魏, 韓 세 나라가 함께 晉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땅을 나눠가졌다.
▶ 公子朔為亂: 趙경후 원년(기원전386년), 武公의 아들 朝가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魏로 달아났다. <趙世家>에는 공자 ‘朔’이 아니라 공자 ‘朝’로 기록되어 있다.
二年,城安邑、王垣。
위무후2년(기원전385년)에 安邑과 王垣에 성을 쌓았다.
七年,伐齊,至桑丘。
위무후7년(기원전380년)에 齊를 공격하여 桑丘邑에 이르렀다.
九年,翟敗我于澮。
위무후9년(기원전378년)에 翟이 澮水에서 魏를 패퇴시켰다.
使吳起伐齊,至靈丘。
吳起에게 齊를 공격하게 하여 靈丘에 이르렀다.
齊威王初立。
齊威王이 막 즉위하였다.
十一年,與韓、趙三分晉地,滅其後。
위무후11년(기원전403년)에 韓, 趙와 함께 晉 땅을 셋으로 나누고 그 후손을 끊었다.
十三年,秦獻公縣櫟陽。
위무후13년(기원전401년)에 秦獻公이 櫟陽으로 천도하였다.
十五年,敗趙北藺。
위무후15년(기원전399년)에 魏가 北藺에서 趙를 패퇴시켰다.
▶ 秦獻公: 전국시대의 秦의 제24대 군주로 성은 嬴, 이름은 師隰, 혹은 連이다. 전국시대 당시 6국에게 멸시받던 나라의 부흥을 위하여 힘을 쏟았다. 雍城에서 櫟陽으로 도읍을 옮기고 東方經略을 꾀하였다.
▶ 秦獻公縣櫟陽 : 진헌공2년(기원전383년), 櫟陽에 성을 쌓고 도읍을 옮겼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櫟陽: 진獻公 때 雍에서 옮겨 수도로 삼았으며, 秦孝公 때 商鞅이 변법을 실시하면서 수도를 咸陽으로 옮겼다.
十六年,伐楚,取魯陽。
위무후16년(기원전398년)에 楚를 공격하여 魯陽을 점령하였다.
武侯卒,子罃立,是為惠王。
무후가 죽고 아들 罃이 즉위하니 그가 惠王이다.
▶ 惠王: 위혜왕. 梁惠王으로도 불린다.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罃이고, 武侯의 아들이다. 즉위한 뒤 안읍에서 大梁으로 천도하였다. 趙와 韓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齊軍에 의해 馬陵에서 대패하였다. 여러 차례 秦과의 전투에서도 패하였다. 逢澤회의를 소집해 侯에서 王으로 호칭을 바꾸었다.
惠王元年,初,武侯卒也,子罃與公中緩爭為太子。
혜왕 원년(기원전370년)에 당초 위무후가 죽었을 때, 子罃과 公中緩이 태자가 되려 다투었다.
公孫頎自宋入趙,自趙入韓,謂韓懿侯曰:
「魏罃與公中緩爭為太子,君亦聞之乎?
今魏罃得王錯,挾上黨,固半國也。
因而除之,破魏必矣,不可失也。」
公孫頎가 宋에서 趙로 왔다가 趙에서 韓로 가서 韓懿侯에게 말하였다.
“위앵과 공중완이 태자가 되려 다투는데 군주께서도 들으셨습니까?
지금 위앵은 王錯을 얻어 上黨을 차지하고 있는데 실로 나라 절반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그를 없앤다면 魏는 틀림없이 깨질 터이니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 子罃與公中緩: 위무후가 태자를 세우지 않고 죽었으므로 아들 罃이 公中緩과 왕위를 다투어 나라 안이 어지러워졌다.
▶ 公孫頎: 魏의 대부. 위문후의 치세로 전국시대 초기 최강국이었던 魏의 세력을 본격적으로 붕괴시킨 濁澤전투를 제안하였다. 趙와 韓이 연합해서 魏를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탁택전투이다.
▶ 挾: 보유하다. 가지다.
▶ 韓懿侯: 전국시대 韓의 제6대 군주. 시호는 昭侯인데, 韓釐侯 또는 韓昭僖侯로도 전해진다. 이름은 若山이다. 기원전374년 韓嚴이 韓哀侯를 시해하여 아들인 懿侯가 즉위하였다.
懿侯說,乃與趙成侯合軍并兵以伐魏,戰于濁澤,魏氏大敗,魏君圍。
韓懿侯가 기뻐하며 趙成侯와 군사를 합해 魏를 공격하여 濁澤에서 싸웠으며, 魏가 대패하고 魏의 군주가 포위당하였다.
趙謂韓曰:
「除魏君,立公中緩,割地而退,我且利。」
趙가 韓에게 말하였다.
“魏의 군주 앵을 죽이고, 공중완을 세운 다음 땅을 나누고 물러남이 우리에게 이롭겠소.”
韓曰:
「不可。
殺魏君,人必曰暴;
割地而退,人必曰貪。
不如兩分之。
魏分為兩,不彊於宋、衛,則我終無魏之患矣。」
한의후가 말하였다.
“안 됩니다.
魏의 군주를 죽이면 사람들이 분명 포악하다 할 터이고,
땅을 나누고 물러나면 사람들이 틀림없이 탐욕스럽다 할 터이오.
둘로 나누는 것만 못하오.
魏를 둘로 나누면 宋이나 衛보다 강하지 않을 터이니, 우리에게 영원히 魏로 인한 근심이 없을 터이오.
趙不聽。
조성후가 듣지 않았다.
韓不說,以其少卒夜去。
韓은 기분이 상하여 軍士를 빼어 밤중에 철수해버렸다.
▶ 說: 悦과 같다. 기뻐하다.
▶ 濁澤: 韓 땅. 지금의 河南省長葛縣서쪽.
▶ 魏君圍: 安邑을 포위 당하다.
惠王之所以身不死,國不分者,二家謀不和也。
魏혜왕의 몸이 죽지 않았고, 나라도 쪼개지지 않은 까닭은 두 나라의 모의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若從一家之謀,則魏必分矣。
만약 어느 한쪽의 계획을 따랐더라면 魏는 필시 쪼개졌을 터이다.
故曰「君終無適子,其國可破也」。
그러므로
“군주가 죽음에 嫡子가 없으면, 그 나라가 망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 이 내용은 資治通鑑綱目에서 태사공이 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適: 嫡과 같다. 嫡子.
二年,魏敗韓于馬陵,敗趙于懷。
혜왕2년(기원전368년)에 魏가 馬陵에서 韓을 패퇴시켰고, 懷읍에서 趙를 패퇴시켰다.
三年,齊敗我觀。
혜왕3년(기원전367년)에 齊가 觀城에서 魏를 물리쳤다.
五年,與韓會宅陽。
혜왕5년(기원전365년)에 魏와 韓이 宅陽에서 회맹하였다.
城武堵。
武堵에 성을 쌓았다.
為秦所敗。
秦에게 패하였다.
六年,伐取宋儀臺。
혜왕6년(기원전364년)에 宋의 儀臺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九年,伐敗韓于澮。
혜왕9년(기원전361년)에 澮水에서 韓을 패퇴시켰다.
與秦戰少梁,虜我將公孫痤,取龐。
秦과 少梁에서 싸웠는데, 秦이 魏의 장수 公孫座를 포로로 잡고 龐城을 탈취하였다.
秦獻公卒,子孝公立。
秦헌공이 죽고 아들 孝公이 즉위하였다.
▶ 惠王: 위혜왕. 梁惠王으로도 불린다.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罃이고, 武侯의 아들이다.
十年,伐取趙皮牢。
혜왕10년(기원전360년)에 趙를 공격해서 皮牢를 점령하였다.
彗星見。
혜성이 출현하였다.
十二年,星晝墜,有聲。
혜왕12년(기원전358년)에 유성이 낮에 떨어지며 큰 소리를 냈다.
十四年,與趙會鄗。
혜왕14년(기원전356년)에 趙성후와 鄗에서 회맹하였다.
十五年,魯、衛、宋、鄭君來朝。
혜왕15년(기원전355년)에 魯, 衛, 宋, 鄭의 군주들이 조회하였다.
十六年,與秦孝公會社[杜]平。
혜왕16년(기원전354년)에 秦효공과 杜平에서 회맹하였다.
侵宋黃池,宋復取之。
宋의 黃池를 침공하여 점령했으나 宋이 다시 빼앗아 갔다.
▶ 見: 現과 같다. 출현하다.
▶ 鄭君: 韓의 군주를 말한다. 韓哀侯가 鄭을 멸망시키고 합변한 후 新鄭으로 천도하였으므로 韓을 鄭이라고 한 것이다.
十七年,與秦戰元裏,秦取我少梁。
혜왕17년(기원전353년)에 秦과 元里에서 교전하였으며, 秦이 魏의 소량을 탈취하였다.
圍趙邯鄲。
魏가 趙의 한단을 포위하였다.
十八年,拔邯鄲。
혜왕I8년(기원전352년)에 趙의 한단을 함락시켰다.
趙請救于齊,齊使田忌、孫臏救趙,敗魏桂陵。
趙가 齊에 구원을 요청하자 齊는 田忌와 孫臏에게 趙를 구원하게 하여 桂陵에서 魏를 물리쳤다.
十九年,諸侯圍我襄陵。
혜왕19년(기원전351년)에 제후들이 연합하여 魏의 襄陵을 포위하였다.
筑長城,塞固陽。
장성을 쌓고 固陽에 요새를 두었다.
二十年,歸趙邯鄲,與盟漳水上。
혜왕20년(기원전350년)에 한단을 趙에 되돌려주고, 趙성후와 漳水 가에서 회맹하였다.
二十一年,與秦會彤。
혜왕21년(기원전349년)에 彤에서 秦과 회맹하였다.
趙成侯卒。
趙성후가 죽었다.
二十八年,齊威王卒。
혜왕28년(기원전342년)에 齊위왕이 죽었다.
中山君相魏。
中山君이 魏의 재상이 되었다.
▶ 桂陵: 당시 魏의 땅으로 지금의 山東省 荷擇縣에 있다. 田忌가 孫臏의 계책을 따르자 魏軍 은 趙의 도성 邯鄲을 떠나 齊軍과 桂陵에서 교전하게 되었고 魏軍은 대패하였다.
[史記列傳]권65孫子吳起列傳
▶ 中山君: 魏文侯가 중산국을 멸망시키고 그의 아들을 중산군으로 임명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戰國策제32권에 기록되어 있다.
三十年,魏伐趙,趙告急齊。
혜왕30년(기원전340년)에 魏가 趙를 공격하자 趙가 齊에 위급함을 알렸다.
齊宣王用孫子計,救趙擊魏。
齊宣王이 손자의 계책을 활용하여 趙를 구원하고 魏를 물리쳤다.
魏遂大興師,使龐涓將,而令太子申為上將軍。
魏는 이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 龐涓을 장수로 삼고 태자 申을 상장군으로 삼았다.
過外黃,外黃徐子謂太子曰:
「臣有百戰百勝之術。」
外黃을 지나는데, 외황의 徐子라는 자가 태자에게 말하였다.
“신에게 백전백승의 전술이 있습니다.
太子曰:
「可得聞乎?」
태자가 말하였다.
“들어 볼 수 있겠소?”
客曰:
「固願效之。」
객이 말하였다.
“본래 태자께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曰:
「太子自將攻齊,大勝并莒,則富不過有魏,貴不益為王。
若戰不勝齊,則萬世無魏矣。
此臣之百戰百勝之術也。」
“태자께서 친히 장군이 되어 齊를 공격하여 대승하고 莒를 병합하여도, 그 富는 魏를 소유함을 넘지 못하며, 그 존귀함은 왕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만약 싸워서 齊를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魏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신의 백전백승 전술입니다.
▶ 孫子: 孫臏. 전국시대의 전략가로 兵家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孫武의 5대손이고, 孫武와 같이 孫子로 불린다. 臏이란 이름은 무릎뼈를 도려내는 형벌을 받아서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史記列傳권65孫子吳起列傳>
▶ 齊宣王用孫子計: 孫臏이 전기에게 趙로 구원하러 가지 말고 魏의 대량을 공격하게 하였다.
魏軍이 趙의 한단 공격을 중단하고 齊軍과 계릉에서 교전하여 魏가 대패하였다. <史記列傳권65孫子吳起列傳
▶ 龐涓: 전국시대 魏의 장수. 귀곡산장에 은거한 鬼谷子 밑에서 손빈과 같이 수학을 하였다. 손빈의 재능을 질투한 방연은 손빈이 자신의 앞길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출세하여 魏의 대장군이 되고, 손빈이 魏로부터 등용되자, 방연은 손빈을 齊의 간첩으로 무고하여 손빈의 무릎 연골을 손상시키고, 다리를 못쓰게 하는 빈형을 받게 하여 손빈에게 해를 가하였다.
▶ 效: 바치다. 드리다.
▶ 益: 초과하다.
太子曰:
「諾,請必從公之言而還矣。」
태자가 말하였다.
“좋소, 공의 말에 따라 꼭 철수하도록 청하겠소.”
客曰:
「太子雖欲還,不得矣。
彼勸太子戰攻,欲啜汁者眾。
太子雖欲還,恐不得矣。」
객이 말하였다.
“태자께서 돌아가려고 해도 안 될 터입니다.
태자가 전투하기를 권하는 저 사람들은 국물을 마시려는 자가 많습니다.
태자께서 비록 돌아가고 싶어도 아마 어려울 터입니다.
太子因欲還,其御曰:
「將出而還,與北同。」
태자가 돌아가려 하자 그의 마부가 말하였다.
“장수가 출정했다가 돌아감은 패배와 같습니다.
太子果與齊人戰,敗於馬陵。
태자는 결국 齊와 싸웠고 馬陵에서 패하였다.
齊虜魏太子申,殺將軍涓,軍遂大破。
齊가 태자 申을 포로로 잡고 장수 龐涓을 죽이니 魏軍이 마침내 대패하고 말았다.
▶ 啜汁: 남은 국물을 마시다. 남에게 붙어 공적을 세우려 하다 啜은 마시다. 汁은 국물.
▶ 御: 마부.
▶ 北: 패하다. 도망치다.
▶ 敗於馬陵: 魏가 마릉에서 패하다. 馬陵은 魏 땅으로 지금의 山東省 鄄城縣. 마릉전투, 또는 馬陵大戰은 전국시대 중기에 일어났던 전투로 전국시대의 대표적인 전투로 꼽힌다. 손빈과 방연의 대결로도 유명한 전투이며 방연은 이 전투에서 패전하며 자살하였다. 전국시대 초기의 패권국이었던 魏가 몰락하는 단초로 작용하였고, 齊가 패권을 쥐며 전국시대의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다.[史記列傳]권65孫子吳起列傳
三十一年,秦、趙、齊共伐我,秦將商君詐我將軍公子卬而襲奪其軍,破之。
혜왕31년(기원전339년)에 秦, 趙, 齊가 함께 魏를 공격하였는데, 秦의 장수 商君(: 상앙)이 魏의 장군 공자 卬을 속이고 그 軍士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秦用商君,東地至河,而齊、趙數破我,安邑近秦,於是徙治大梁。
秦이 상군을 기용함에 동쪽으로 땅이 황하에 이르렀으며, 齊와 趙가 여러 차례 魏를 깨뜨렸고, 安邑이 秦에 가까워져서 이에 魏는 大梁으로 도읍을 옮겼다.
以公子赫為太子。
공자 赫을 태자로 삼았다.
▶ 商君: 商鞅. 전국시대 法家를 대표하는 인물로 衛 공실의 후예로 魏에서 관직을 구하다 쓰이지 않자, 秦으로 가서 孝公에게 패업을 달성하는 방법을 유세하고 큰 신임을 얻어 左庶長에 임명되었다. 河西의 전쟁 중에 공을 세워 商邑을 하사받아서 商君, 혹은 商鞅으로 일컫게 되었다. 그는 秦의 富國強兵을 위해 變法을 시행하였다. <사기 권68 <商君列傳>>
▶ 商君詐我將軍公子卬: 공자 앙과 상앙은 한때 절친한 친구였는데, 상앙이 한 통의 편지를 써서 공자 앙을 연회에 초청하고 군사를 매복시켜 공자 앙을 기습하여 사로잡았다. 장수를 잃은 魏軍는 크게 흔들렸고 결국 대패했으며, 상앙은 공자 앙을 잡아 秦으로 돌아갔다.
三十三年,秦孝公卒,商君亡秦歸魏,魏怒,不入。
혜왕33년(기원전337년)에 秦효공이 죽고, 상군이 秦에서 도망쳐서 魏로 귀순하려 했으나 魏가 화가 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三十五年,與齊宣王會平阿南。
혜왕35년(기원전335년)에 齊선왕과 平阿의 남쪽에서 회맹하였다.
▶ 亡秦: 秦에서 도망쳐 나오다.
▶ 歸: 귀순하다. 몸을 의탁하다.
▶ 入: 받아들이다.
아래의 내용은 맹자집주 梁惠王章句上에 기록되어 있다.
惠王數被於軍旅,卑禮厚幣以招賢者。
혜왕이 여러 차례 전쟁에서 손실을 입자 공손한 예절과 넉넉한 예물로 유능한 현자들을 초청하였다.
鄒衍、淳于髡、孟軻皆至梁。
鄒衍, 淳于髡, 孟軻 등이 모두 梁(: 魏)으로 왔다.
梁惠王曰:
「寡人不佞,兵三折於外,太子虜,上將死,國以空虛,以羞先君宗廟社稷,寡人甚丑之,叟不遠千里,辱幸至獘邑之廷,將何利吾國?」
梁惠王이 말하였다.
“과인이 못나 국외에서 세 번이나 전쟁에 패하여 태자는 포로가 되고 상장군은 죽었습니다.
나라가 이 때문에 텅 비었고 선군과 종묘사직이 수치를 끼쳤으니 과인은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노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어려움을 참고 친히 우리 조정에 오셨는데 장차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시렵니까?”
▶ 軍旅: 軍. 전쟁.
▶ 被: 손실을 입다.
▶ 梁: 魏가 大梁으로 천도 후 梁이라고 칭하였다.
▶ 梁惠王: 魏惠王. 전국시대 魏의 제3대 군주로 惠成王으로 불리기도 한다. 맹자에서는 梁惠王으로 기록되었고, 장자에는 文惠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은 姬. 씨는 魏. 휘는 罃이다. 대량으로 천도하고 왕을 칭하였으며 시호는 惠이다. 혜왕35년(기원전335년)에 유능한 현자들을 초청하자 맹자가 梁으로 왔다.
▶ 不佞: 자신에 대한 謙稱으로 재주가 없는 사람이란 뜻이다.
▶ 丑: 부끄럽다.
▶ 辱: 상대방이 참고 ~해 주시다.
▶ 幸: 친히 참석하다.
孟軻曰:
「君不可以言利若是。
夫君欲利則大夫欲利,大夫欲利則庶人欲利,上下爭利,國則危矣。
為人君,仁義而已矣,何以利為!」
맹가가 말하였다.
“군주께서는 그렇게 이익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무릇 군주가 이익을 원하면 대부들도 이익을 원하고, 대부들이 이익을 원하면 평민들도 이익을 원하니, 위아래가 이익을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울 터입니다.
군주된 사람에게는 인의가 있을 뿐인데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 庶人: 평민.
三十六年,復與齊王會甄。
혜왕36년(기원전334년)에 다시 齊의 왕과 甄에서 회맹하였다.
是歲,惠王卒,子襄王立。
이해에 혜왕이 죽고 아들 襄王이 즉위하였다.
▶ 襄王: 魏襄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嗣이고, 惠王의 아들이다. 秦이 여러 차례 魏를 공격해 魏가 자주 패하였다. 처음에 河西의 땅을 秦에 주었는데, 결국 上郡의 영토가 모두 秦의 수중에 들어갔다.
襄王元年,與諸侯會徐州,相王也。
양왕 원년(기원전334년), 제후들과 徐州에서 회맹하여 서로 칭왕하자고 하였다.
追尊父惠王為王。
양왕의 아버지인 혜왕을 왕으로 추존하였다.
▶ 襄王: 魏襄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嗣 혹은 赫이라고도 한다. 惠王의 아들이다. 기원전318년에 즉위하여 기원전296년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소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므로 양왕 원년의 기록에서 哀王원년 이전의 기록은 위혜왕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위혜왕의 재위기간은 기원전370~31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司馬溫公은 자치통감강목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史記》 〈六國表〉에는 ‘魏惠王은 재위36년에 죽었고, 襄王은 재위16년에 죽었고, 哀王은 23년에 죽었다.’라고 하였고,
《竹書紀年》에는 ‘혜왕은 36년에 改元하여 1년으로 칭하고 16년 뒤에 죽었다.’라고 하였다.
杜預와 和嶠는 모두 ‘《史記》가 착오로 혜왕의 시대를 나누어 두 왕의 연대로 표기하였다.’라고 하였다.” <資治通鑑綱目제1권 기원전334년>
▶ 相王: 스스로 서로 왕으로 높이는 것.
▶ 追尊父惠王為王: 혜왕은 생전에 왕을 칭하였으므로 추존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오류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五年,秦敗我龍賈軍四萬五千于雕陰,圍我焦、曲沃。
5년(기원전330년)에 秦이 魏의 龍賈가 이끈 軍45, 000명을 雕陰에서 패퇴시키고 魏의 焦와 曲沃을 포위하였다.
予秦河西之地。
秦에 河西땅을 바쳤다.
▶ 五年: 5년(기원전330년), 위혜왕 後元 5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予秦河西之地: 秦이 魏를 공격하니 魏가 少梁과 河西의 땅을 秦에 바쳤다. <자치통감강목 제1권 기원전330년>
六年,與秦會應。
6년(기원전329년)에 秦과 應에서 회맹하였다.
秦取我汾陰、皮氏、焦。
秦이 魏의 汾陰, 皮氏, 焦를 탈취하였다.
魏伐楚,敗之陘山。
魏가 楚를 공격하여 陘山에서 패퇴시켰다.
七年,魏盡入上郡于秦。
7년(기원전328년)에 魏가 上郡을 전부 秦에게 바쳤다.
秦降我蒲陽。
秦이 魏의 蒲陽을 함락시켰다.
八年,秦歸我焦、曲沃。
8년(기원전327년)에 秦이 魏의 초와 곡옥을 돌려주었다.
▶ 陘山: 楚의 지명.
▶ 秦取我汾陰: 秦이 魏를 공격하여 汾陰과 皮氏를 빼앗고 焦를 함락하였다. 汾陰縣은 河東郡에 속하고, 皮氏縣은 옛 耿國이다. 邑名에 氏를 붙인 것은 모두 氏로 인하여 이름을 지은 것을 말한다.
▶ 秦降我蒲陽: 秦의 客卿 張儀가 魏를 공격하여 蒲陽을 빼앗았다. 얼마 뒤에 돌려주니 魏가 上郡을 모두 바치면서 감사해하였다. <자치통감강목 제1권 기원전328년>
十二年,楚敗我襄陵。
12년(기원전323년)에 楚가 襄陵에서 魏를 패퇴시켰다.
諸侯執政與秦相張儀會齧桑。
제후들의 집정 대신들과 秦의 相 張儀가 齊의 齧桑에서 회맹하였다.
十三年,張儀相魏。
13년(기원전322년)에 장의가 魏의 재상이 되었다.
魏有女子化為丈夫。
魏에 여자에서 남자로 변한 사람이 있었다.
秦取我曲沃、平周。
秦이 魏의 곡옥과 平周를 빼앗았다.
▶ 張儀: 전국시대 魏의 모사. 소진의 주선으로 秦에서 벼슬살이를 하였고 진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韓魏趙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秦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 齧桑: 齊의 땅. 지금의 강소성 폐현 서남쪽이며 梁과 彭城사이에 있다.
十六年,襄王卒,子哀王立。
16년(기원전319년)에 양왕이 죽고, 아들 哀王이 즉위하였다.
張儀復歸秦。
장의가 다시 秦으로 돌아갔다.
▶ 襄王: 魏襄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嗣 혹은 赫이라고도한다. 惠王의 아들이다. 기원전318년에 즉위하여 기원전296년에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소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므로 양왕 원년의 기록에서 哀王원년 이전의 기록은 위혜왕의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애왕이 즉위한 것은 이때 양왕이 즉위한 것이다.
杜預와 和嶠는 모두 ‘《史記》가 착오로 혜왕의 시대를 나누어 두 왕의 연대로 표기하였다. ’라고 하였다. <資治通鑑綱目제1권 기원전334년>
즉, 魏惠王이 죽고, 아들 襄王이 즉위한 것이다.
哀王元年,五國共攻秦,不勝而去。
애왕 원년(기원전318년)에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秦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 五國: 韓, 魏, 楚, 趙, 燕의 연합군이 秦 공격에 나서 函谷關을 공격하였는데, 秦이 출병하여 맞아 싸우니 다섯 나라의 연합군이 모두 패주하였다. <秦本紀>
二年,齊敗我觀津。
2년(기원전317년)에 齊가 觀津에서 魏를 패퇴시켰다.
五年,秦使樗里子伐取我曲沃,走犀首岸門。
5년(기원전314년)에 秦이 樗里子에게 魏의 곡옥을 쳐서 취하게 하고 岸門에서 犀首 公孫衍을 내쫓았다.
六年,秦求[來]立公子政為太子。
6년(기원전313년)에 秦이 공자 政을 태자로 삼았다.
與秦會臨秦。
秦과 臨秦에서 회맹하였다.
七年,攻齊。
7년(기원전312년)에 齊를 공격하였다.
與秦伐燕。
秦과 함께 燕을 쳤다.
▶ 觀津: 당시 魏의 땅.
▶ 樗里子: 秦惠文君의 이복동생인 영질. 秦의 왕자가 저리에 살았으므로 저리자라고 하였다.
▶ 走: 쫓아버리다.
▶ 犀首: 관직명. 당시 公孙衍이 서수였다.
八年,伐衛,拔列城二。
양왕8년(기원전311년)에 衛를 공격해서 인접한 두 성을 함락하였다.
衛君患之。
衛의 군주가 이를 걱정하였다.
如耳約斬趙,趙分而為二,所以不亡者,魏為從主也。
魏의 대부 如耳가 趙의 분할을 도모하고, 趙를 둘로 나누고도 멸망시키지 않은 까닭은 魏가 맹주였기 때문이었다.
今衛已迫亡,將西請事於秦。
지금 衛는 이미 멸망에 임박하여, 장차 서쪽의 秦을 섬기기를 청하려는 참이었다.
與其以秦醳衛,不如以魏醳衛,見衛君曰:
「請罷魏兵,免成陵君可乎?」
秦이 衛를 구함이 魏가 衛를 구함만 못하였기 때문에 如耳가 衛의 군주를 알현하고 말하였다.
“제가 魏의 군대를 철수시키고 魏의 成陵君을 면직시켜도 되겠습니까?”
衛君曰:
「先生果能,孤請世世以衛事先生。」
衛의 군주가 말하였다.
“선생께서 과연 그렇게 하신다면 저는 대대로 선생을 衛에서 섬기겠소.”
如耳見成陵君曰:
「昔者魏伐趙,斷羊腸,拔閼與,衛之德魏必終無窮。」
여이가 성릉군을 만나 말하였다.
“예전에 魏가 趙를 쳐서 羊腸으로 가는 길을 끊고 閼與를 함락시켰으니 魏의 은덕에 衛는 끝없이 감격할 터입니다.”
成陵君曰:
「諾。」
성릉군이 말하였다.
“좋소.”
▶ 衛: 周武王의 동생 康叔을 시조로 하는 諸侯國이다. 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강국인 秦·魏 사이에 끼어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기원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의 2세황제에 의해 멸망되었다.<史記世家권37.衛康叔世家>
▶ 如耳: 魏 大夫였으나 뒤에 衛에서 벼슬하였다가 다시 韓의 신하가 되었다. <戰國策 秦策4‧趙策2>
▶ 約: ~하려고 하다.
▶ 斬: 분할하다
▶ 從主: 합종맹약의 맹주.
▶ 成陵君: 魏의 大臣.
▶ 醳: 釋과 통용된다. 구하다. 구출하다.
▶ 羊腸: 羊腸坂의 준말. 山西省 壺關縣 남동쪽과 山西省 晉城市 남쪽의 두 곳에 있는 길이다.羊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如耳見魏王曰:
「臣有謁於衛。
衛故周室之別也,其稱小國,多寶器。
今國迫於難而寶器不出者,其心以為攻衛醳衛不以王為主,故寶器雖出必不入於王也。
臣竊料之,先言醳衛者必受衛者也。」
여이가 魏王을 알현하고 말하였다.
“신이 衛의 군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衛는 본래 주나라 왕실의 한 갈래이며, 小國이라 칭하지만 보물이 많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고도 보물을 내놓지 않는데, 衛를 공격함과 衛를 구원함을 왕께서 주도하지 않는다고 여기므로, 비록 보물을 내놓더라도 왕께 오지 않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신이 삼가 따져보니 衛를 구원하자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틀림없이 衛의 뇌물을 받은 사람일 터입니다.”
如耳出,成陵君入,以其言見魏王。
여의가 나가고 성릉군이 들어와 여이가 한 말대로 위왕을 뵙고 철군을 건의하였다.
魏王聽其說,罷其兵,免成陵君,終身不見。
위왕이 그 말을 듣고는 군대를 철수시키는 한편 성릉군을 면직시키고 평생토록 보지 않았다.
▶ 别: 분파.한 갈래.
▶ 受衛: 衛의 뇌물을 받다.
九年,與秦王會臨晉。
양왕9년(기원전310년)에 위양왕이 秦王과 임진에서 회동하였다.
張儀、魏章皆歸于魏。
장의와 魏章이 모두 魏로 귀의하였다.
魏相田需死,楚害張儀、犀首、薛公。
魏의 상국 田需가 죽자, 楚는 張儀 · 犀首 · 薛公이 魏의 상국이 됨을 해롭게 여겼다.
楚相昭魚謂蘇代曰:
「田需死,吾恐張儀、犀首、薛公有一人相魏者也。」
楚의 재상 昭魚가 蘇代에게 말하였다.
“전수가 죽은 후 나는 장의, 서수, 설공 중 누구 하나가 魏의 상국이 될까 걱정이오.”
代曰:
「然相者欲誰而君便之?」
소대가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상국이 되면 그대에게 유리하다고 여깁니까?”
昭魚曰:
「吾欲太子之自相也。」
소어가 말하였다.
“나는 태자가 스스로 상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代曰:
「請為君北,必相之。」
소대가 말하였다.
“청컨대 그대를 위해 북쪽으로 가서 태자를 상국으로 삼게 하지요.”
昭魚曰:
「柰何?」
소어가 말하였다.
“어떻게 할 작정이오?”
對曰:
「君其為梁王,代請說君。」
소대가 말하였다.
“그대가 梁王(: 魏王)이라 하고 제가 그대에게 유세해보겠습니다.”
昭魚曰:
「柰何?」
소어가 말하였다.
“어떻게 말입니까?”
▶ 張儀, 魏章: 秦武王 원년(기원전310년), 장의와 魏章이 秦을 떠나서 동쪽 魏로 갔다.
▶ 田需: 魏의 中臣.
▶ 蘇代: 전국시대의 종횡가로 蘇秦의 동생.
▶ 張儀, 犀首, 薛公: 張儀는 秦을 위해 魏에 머물고 있었다. 犀首는 韓의 公孫衍. 薛公은 齊의 公族인 孟嘗君 田文이다.
▶ 害: 두려워하다. 꺼리다
▶ 昭魚: 昭奚恤, 혹은 昭獻이라고도 하며 楚의 相國을 지냈다.
▶ 說: 유세하다.
▶ 太子: 후일의 위 魏昭王 遫이다.
對曰:
소대가 대답하였다.
「代也從楚來,昭魚甚憂,曰:
『田需死,吾恐張儀、犀首、薛公有一人相魏者也。』
“이 소대가 楚로부터 오던 중에 소어를 만났는데 그가 매우 걱정하며 말하기를
‘전수가 죽었으니 나는 장의, 서수, 설공 중 한 사람이 魏의 상국이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습니다.
代曰:『梁王,長主也,必不相張儀。
張儀相,必右秦而左魏。
犀首相,必右韓而左魏。
薛公相,必右齊而左魏。
梁王,長主也,必不便也。』
소대가 대답합니다
‘양왕께서는 현명한 군주이시니 틀림없이 장의를 상국으로 삼지 않으십니다.
장의가 상국이 되면 틀림없이 秦을 우대하고 魏를 얕볼 터입니다.
서수가 상국이 되면 틀림없이 韓을 우대하고 魏를 얕볼 터입니다.
설공이 상국이 되면 틀림없이 齊를 우대하고 魏를 얕볼 터입니다.
양왕은 현명한 군주이시니 틀림없이 魏에 불리하게 하지 않을 터입니다.’
王曰:
『然則寡人孰相?』
왕은 물을 터입니다.
‘그러면 과인이 누구를 상국으로 삼아야 하오?’
代曰:
『莫若太子之自相。
太子之自相,是三人者皆以太子為非常相也,皆將務以其國事魏,欲得丞相璽也。
以魏之彊,而三萬乘之國輔之,魏必安矣。
故曰莫若太子之自相也。』」
소대가 대답합니다.
‘태자 스스로 상국이 되도록 하는 편이 낫습니다.
태자가 스스로 상국이 되면, 세 사람은 모두 태자가 오랫동안 상국으로 있을 수 없다고 여겨서, 모두 장차 그 본국이 魏를 섬기도록 힘쓰고, 승상의 도장을 얻으려 할 터입니다.
魏의 강함에다 세 萬乘之國의 도움을 받고 魏는 틀림없이 안정될 터입니다.
그런 까닭에 태자가 스스로 상국이 되는 편이 가장 낫습니다.’”
遂北見梁王,以此告之。
그러고는 북쪽으로 가서 양왕을 만나 이 말을 아뢰었다.
太子果相魏。
태자가 과연 魏의 상국이 되었다.
▶ 長主: 賢君.
▶ 右秦而左魏: 출신국인 秦은 높이고 魏를 낮춘다는 뜻.
▶ 丞相: 당시 秦은 丞相, 楚는 令尹, 기타 나라는 相國이라 불렀다.
▶ 得丞相璽: 승상의 지위를 얻는다는 뜻. 璽는 도장.
▶ 三萬乘之国: 秦‧齊‧韓 세 나라의 大國. 萬乘은 전차가 1만 대인 대국을 말한다.
十年,張儀死。
양왕10년(기원전309년)에 장의가 죽었다.
十一年,與秦武王會應。
양왕11년(기원전308년)에 秦武王과 應에서 회맹하였다.
十二年,太子朝於秦。
양왕12년(기원전307년)에 태자가 秦에 조회하였다.
秦來伐我皮氏,未拔而解。
秦이 魏의 皮氏로 와서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十四年,秦來歸武王后。
양왕14년(기원전305년)에 秦이 무왕후를 魏로 돌려보냈다.
十六年,秦拔我蒲反、陽晉、封陵。
양왕16년(기원전303년)에 秦이 魏의 蒲反, 陽晉, 封陵을 함락하였다.
十七年,與秦會臨晉。
양왕17년(기원전302년)에 秦과 임진에서 회맹하였다.
秦予我蒲反。
秦이 魏의 포반을 돌려주었다.
十八年,與秦伐楚。
양왕18년(기원전301년)에 魏가 秦과 연합하여 楚를 공격하였다.
二十一年,與齊、韓共敗秦軍函谷。
양왕21년(기원전298년)에 齊, 韓과 함께 秦의 군대를 函谷關에서 패퇴시켰다.
▶ 秦來歸武王后: 秦武王은 秦의 제27대 군주로 힘겨루기를 좋아해 力士인 孟說과 청동으로 된 큰 솥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진무왕은 魏 여자를 왕비로 삼았는데 무왕이 죽자 秦이 悼武后(: 武王의妃)를 魏로 돌려보낸 것이다.
二十三年,秦復予我河外及封陵為和。
양왕23년(기원전296년)에 秦이 다시 河外와 封陵을 돌려주고 강화하였다.
哀王卒,子昭王立。
애왕이 죽고 아들 昭王이 즉위하였다.
▶ 河外: 魏의 황하 서쪽과 남쪽 지역.
▶ 昭王: 魏昭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遫이고, 襄王의 아들이다.
昭王元年,秦拔我襄城。
소왕원년(기원전295년)에 秦이 魏의 襄城을 함락시켰다.
二年,與秦戰,我不利。
소왕2년(기원전294년)에 秦과 교전하였으나 魏가 불리하였다.
三年,佐韓攻秦,秦將白起敗我軍伊闕二十四萬。
소왕3년(기원전293년)에 韓을 도와 秦을 공격했으나 秦의 장수 白起가 伊闕에서 韓과 魏의 軍 24만 명을 참수하였다.
六年,予秦河東地方四百里。
소왕6년(기원전290년)에 秦에 河東지방 400리의 땅을 주었다.
芒卯以詐重。
芒卯가 교묘한 계략으로 魏에 중용되었다.
七年,秦拔我城大小六十一。
소왕7년(기원전289년)에 秦이 魏의 크고 작은 성 61개를 함락시켰다.
八年,秦昭王為西帝,齊湣王為東帝,月餘,皆復稱王歸帝。
소왕8년(기원전288년)에 秦昭王이 西帝를 칭했고, 齊湣王은 東帝를 칭했으나, 한 달여 만에 모두 稱帝를 취소하고 칭왕에 복귀하였다.
九年,秦拔我新垣、曲陽之城。
소왕9년(기원전287년)에 秦이 魏의 新垣과 曲陽성을 함락시켰다.
▶ 昭王: 魏昭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遫(: 속)이고, 襄王의 아들이다.
▶ 白起: 戰國時代秦의 名將. 진소왕13년에 백기는 左庶長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韓의 新城을 공격하였다. 진소왕14년에 백기는 左更이 되어 伊闕에서 韓, 魏를 공격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었으며, 魏의 장수 公孫喜를 포로로 잡았고 성 다섯 개를 함락시켰다. 진소왕15년에 백기는 大良造가 되었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我軍: 韓과 魏의 軍士를 말한다.
▶ 芒卯: 孟卯로도 쓴다. 전국시대 魏의 장수이다. 기원전273년 秦이 魏를 공격하자 韓魏趙의 軍士를 통솔하여 秦에 대항하였으나 화양에서 秦장군 백기가 이끌던 진군과의 싸움에서 패하여15만 대군이 참수되고 그는 달아났다. 달아난 후의 행적을 알 수 없었다. <史記列傳권78春申君列傳>
▶ 詐: 교묘하게 속이다.
▶ 重: 중용되다.
十年,齊滅宋,宋王死我溫。
소왕10년(기원전286년)에 齊가 宋을 멸망시키니 宋康王이 魏의 溫읍에서 죽었다.
十二年,與秦、趙、韓、燕共伐齊,敗之濟西,湣王出亡。
소왕12년(기원전284년)에 秦, 趙, 韓, 燕과 함께 齊를 공격하여 濟西에서 패퇴시켰으며 齊湣王은 도망쳤다.
燕獨入臨菑。
燕이 단독으로 臨菑로 진입하였다.
與秦王會西周。
秦왕과 西周에서 회맹하였다.
▶ 宋王: 宋康王偃. 기원전329년 척성군이 무도하다는 이유로 아우 언의 습격을 받아 싸우다가 져서 齊로 달아났고, 언이 宋의 군주가 되었다. 偃은 辟公의 아들이며 剔成의 동생이다. 형을 죽이고 자립하여 宋君이라 하였다가 11년 만에 왕을 칭하여 康王이라 하였다. 성질이 포악무도하여 제후들이 桀宋이라 불렀다. 전국시대 宋의 최후의 군주로 齊, 楚, 魏의 연합군에 의해 宋이 멸망했으며 송강왕은 달아났으나 魏의 온읍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世家]권38. 宋微子世家
▶ 齊湣王: 전국시대 齊의 군주로 성은 田씨고, 이름은 地 또는 遂다. 齊閔王 또는 齊愍王이라고도 부른다. 宣王의 아들이다. 재위하면서 孟嘗君을 재상으로 삼고, 匡章을 장군으로 삼았다. 제 민왕15년 宋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제민왕17년 燕과 秦, 楚, 三晉이 연합해 齊를 공격하고 燕의 장수 樂毅가 臨淄에서 齊軍을 대파하자 莒로 달아났다.
▶ 西周: 전국시대 작은 제후국을 말한다.
十三年,秦拔我安城。
소왕13년(기원전283년)에 秦이 魏의 安城을 함락하였다.
兵到大梁,去。
秦軍이 大梁에까지 이르렀다가 철수하였다.
十八年,秦拔郢,楚王徙陳。
소왕18년(기원전278년이 秦이 楚의 수도 郢을 함락시켰고, 초왕은 陳城으로 천도하였다.
▶ 秦拔郢: 초 경양왕21년(기원전278년), 秦의 장수 백기가 楚의 郢都를 쳐서 빼앗고 先王의 무덤이 있는 夷陵에 불을 질렀다. 초 경양왕의 軍은 흩어져 더이상 싸울 수 없어 동북으로 물러나 陳城을 지켰다. 陳城은 지금의 河南省 淮陽縣. 楚가 秦과 싸울 때 이곳으로 피해 잠시 도읍으로 정하였었다. <史記世家권40. 楚世家>
十九年,昭王卒,子安釐王立。
소왕19년(기원전277년)에 소왕이 죽고, 아들 安釐王이 즉위하였다.
安釐王元年,秦拔我兩城。
안희왕원년(기원전276년)에 秦이 魏의 두 성을 함락시켰다.
二年,又拔我二城,軍大梁下,韓來救,予秦溫以和。
안희왕2년(기원전275년)에 秦이 또 魏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大梁에 軍士를 주둔함에, 韓이 구원하러 왔으나 秦에 溫읍을 주고 강화하였다.
三年,秦拔我四城,斬首四萬。
안희왕3년(기원전274년)에 秦이 魏의 성 네 곳을 함락시키고 4만 명을 참수하였다.
▶ 安釐王: 安釐王, 安僖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姬. 씨는 魏,이름은 圉이다. 魏昭王의 아들이며, 전국시대 魏의 6대 군주이다.
<사기>에서는 사마천의 할아버지 司馬僖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僖를 釐로 기록한 경우가 다수 보인다.
▶ 秦拔我四城: 秦昭襄王 33년(기원전274년), 客卿 胡陽이 魏의 卷城, 蔡陽, 長社를 공격하여 빼앗았다.
四年,秦破我及韓、趙,殺十五萬人,走我將芒卯。
안희왕4년(기원전273년)에 秦이 魏와 韓, 趙를 격파하고 15만 명을 죽였으며, 魏의 장수 芒卯는 달아났다.
魏將段干子請予秦南陽以和。
魏의 장수 段干子가 南陽을 바치며 秦에 강화를 청하였다.
蘇代謂魏王曰:
「欲璽者段干子也,欲地者秦也。
今王使欲地者制璽,使欲璽者制地,魏氏地不盡則不知已。
且夫以地事秦,譬猶抱薪救火,薪不盡,火不滅。」
蘇代가 위왕에게 말하였다.
“재상의 도장을 탐내는 자는 단간자이고, 魏의 땅을 욕심내는 것은 秦입니다.
지금 왕께서 땅을 욕심내는 자에게 벼슬을 통제하게 하고, 벼슬을 탐내는 자에게 땅을 통제하게 하시니 魏의 땅이 다 사라져도 모를 판입니다.
또 땅을 가지고 秦을 섬김은 땔나무를 끌어안고 불을 끔에 비유할 수 있으니, 땔나무가 다하지 않으면 불은 꺼지지 않을 터입니다.
▶ 段干子: 段干崇. 魏의 臣下. <전국책 제24권魏策>
秦이 華陽에서 芒卯를 공격하여 물리치고15만 명을 참수하였다. 魏는 남양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였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昭襄王>
▶ 蘇代: <戰國策 趙策>에는 孫臣으로 기록되어 있다. 孫臣은 魏의 신하이다.
▶ 制: 억제하다. 규제하다.
▶ 薪: 땔나무.
▶ 薪不盡,火不滅 :
“왕의 토지는 유한한데 秦의 요구는 끝이 없을 터이니, 이것이야말로 섶으로 불길을 돋워주는 셈입니다.”<전국책 제24권 魏策>
王曰:
「是則然也。
雖然,事始已行,不可更矣。」
왕이 말하였다.
“그대 말이 옳다.
그렇지만 일이 이미 시행되었으니 바꿀 수 없다.”
對曰:
「王獨不見夫博之所以貴梟者,便則食,不便則止矣。
今王曰
『事始已行,不可更』,
是何王之用智不如用梟也?」
소대가 대답하였다.
“왕께서는 博이란 노름에서 梟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를 모르십니까?
유리하면 상대의 말을 잡아먹고, 불리하면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왕께서
‘일이 이미 시행되었는데 바꿀 수 없다. ’
라고 말씀하시니, 왕께서 지혜를 씀이 ‘梟’를 쓰는 것만 못합니까?”
▶ 博: 樗蒲와 한 가지로 중국에서 전하여진 가장 오랜 노름의 한가지. 5개의 윷짝으로 주사위를 만드는데 그것을 던지어 엎어지고 자빠지는 모양에 따라 梟ㆍ盧ㆍ雉ㆍ犢ㆍ塞의 等級을 매기고 局위의 말을 움직여 勝負를 定하던 노름이다. 옛날 樗蒲놀이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梟라 하고, 그 다음을 盧라 하였다. 梟를 얻으면 말을 마땅히 움직여야 하나, 만약 편치 않으면 움직임을 미룬다.
▶ 食: 상대방의 말을 잡아먹다.
九年,秦拔我懷。
안희왕9년(기원전268년)에 秦이 魏의 懷를 함락시켰다.
十年,秦太子外質於魏死。
안희왕10년(기원전267년)에 魏에 인질로 있던 秦의 태자가 죽었다.
十一年,秦拔我郪丘。
안희왕11년(기원전266년)에 秦이 魏의 郪丘를 함락시켰다.
秦昭王謂左右曰:
「今時韓、魏與始孰彊?」
秦昭王이 측근에게 말하였다.
“지금의 韓과 魏의 처음과 비교했을 때 언제가 더 강한가?”
對曰:
「不如始彊。」
측근이 대답하였다.
“처음만큼 강하지 못합니다.
王曰:
「今時如耳、魏齊與孟嘗、芒卯孰賢?」
소왕이 말하였다.
“지금의 如耳와 魏齊를 예전의 孟嘗君과 芒卯에 견주면 누가 더 현명한가?”
對曰:
「不如。」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맹상군과 망묘의 현명함만 못합니다.
王曰:
「以孟嘗、芒卯之賢,率彊韓、魏以攻秦,猶無柰寡人何也。
今以無能之如耳、魏齊而率弱韓、魏以伐秦,其無柰寡人何亦明矣。」
소왕이 말하였다.
“맹상군과 망묘의 현명함으로 강대한 韓과 魏를 이끌고 秦을 공격하여도 오히려 과인을 어떻게 하지 못할 터이다.
그런데 지금의 무능한 여이와 위제로 약한 韓과 魏를 이끌고 秦을 공격하니 과인을 어떻게 하지 못함이 또한 분명하다.
左右皆曰:
「甚然。」
측근들이 모두 말하였다.
“아주 옳으신 말씀입니다.
▶ 秦昭王: 전국시대 秦의 군주로 이름은 稷이며, 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시호는 昭襄王이며, 昭王이라고도 부른다. 원교근공 정책을 쓰고 魏冉‧范雎‧白起등을 등용, 산동 여섯 제후국의 합종 세력을 깨뜨리고 강성한 국가를 만들어 후일 통일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 如耳: 원래 魏 大夫였으나 뒤에 衛에서 벼슬하였다가 다시 韓의 신하가 되었다.
▶ 魏齊: 魏의 公族으로 秦昭王때 재상이 되었다. 일찍이 范雎를 매질했다가 범저가 秦재상이 되자 보복이 두려워 趙로 도망쳤다. 秦昭王이 趙王에게 편지를 보내 위제를 요구하자 大梁에 가서 信陵君의 도움을 받아 楚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秦을 두려워한 신릉군이 만나주지 않자 자살하였다. <史記列傳권79范睡·蔡澤列傳>
▶ 孟嘗: 戰國時代의 정치가로 전국시대의 戰國四君(: 全國4公子)의 한 사람이다. 성은 嬀, 氏는 田, 諱는 文이며, 맹상군은 그의 諡號이다.
▶ 芒卯: 전국시대 齊 사람으로, 孟卯로도 쓴다. 魏에서 벼슬하여 재상이 되었다.
中旗馮琴而對曰:
中旗가 거문고에 기대어 있다가 대꾸하였다.
「王之料天下過矣。
“왕께서 천하를 헤아림이 지나칩니다.
當晉六卿之時,知氏最彊,滅范、中行,又率韓、魏之兵以圍趙襄子於晉陽,決晉水以灌晉陽之城,不湛者三版。
당초 晉의 6경이 집정했을 때 知氏가 가장 강성하여 范氏와 中行氏를 멸하고, 다시 한씨와 魏씨의 軍士를 이끌고 趙襄子를 진양에서 포위하여 晉水의 물을 터서 진양성을 잠기게 하니 물이 잠기지 않은 것이 三版 정도였습니다.
知伯行水,魏桓子御,韓康子為參乘。
知伯이 물가를 순시할 때에 魏桓子는 수레를 몰고, 韓康子는 지백을 호위했습니다.
知伯曰:
『吾始不知水之可以亡人之國也,乃今知之。
汾水可以灌安邑,絳水可以灌平陽。』
지백이 말하였습니다.
‘내가 당초에 물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음을 몰랐는데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汾水로는 安邑을 잠기게 할 수 있고, 絳水로는 平陽을 잠기게 할 수 있구나.’
魏桓子肘韓康子,韓康子履魏桓子,肘足接於車上,而知氏地分,身死國亡,為天下笑。
위환자가 팔꿈치로 한강자의 옆구리를 찌르자, 한강자는 발로 위환자의 발을 밟아 알았다는 뜻을 표했는데, 수레 위에서 팔꿈치와 발이 오가자 지백의 땅이 분할되고 몸은 죽고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今秦兵雖彊,不能過知氏;
韓、魏雖弱,尚賢其在晉陽之下也。
지금 秦軍이 비록 강하지만 지백을 능가할 수 없고,
韓과 魏가 비록 약하지만 아직도 진양성 아래에 있을 때보다는 강합니다.
此方其用肘足之時也,願王之勿易也!」
지금이 바로 팔꿈치와 발을 쓸 때이니 왕께서는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옵소서!”
於是秦王恐。
이에 진 소왕은 두려움을 품었다.
▶ 中旗: 申旗. 전국시대 秦의 辯士.
▶ 馮: 기대다. 의지하다.
▶ 六卿之時: 춘추시대 말기 晉의 六卿이 집권하던 시대를 말한다. 六卿은 智氏‧范氏‧中行氏‧韓氏‧魏氏‧趙氏를 이른다.
▶ 知氏: 荀瑤 또는 知伯. 전국시대 晉 사람. 이름은 瑤이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 말기 유력 씨족들이 분열해서 서로 다투게 됐을 때 자체 세력을 형성하여 趙襄子를 공격했지만 자신이 멸망하였다.
▶ 圍趙襄子於晉陽: 智伯이 趙襄子에게 땅을 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자 晉陽을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지백과 한씨와 위씨 세 나라가 진양을 1년 넘게 공격하다 汾水의 물을 끌어다 성으로 흘려보내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벽이 三版(: 24자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史記世家권43. 趙世家>
▶ 晉水: 山西省 太原市 서남쪽 懸甕山에서 발원하여 汾水로 흘러든다.
▶ 不湛者三版: 성의 三板 정도만 물에 잠기지 않았다. 版은 고대 성벽을 다져 쌓을 때 양옆에 대는 널빤지로 一版은 여덟 尺이므로 3판은 24자를 말한다. 湛은 잠기다.
▶ 行水: 물의 기세를 순찰하다. 行은 순찰하다.
▶ 魏桓子御: 魏桓子가 수레를 몰다. 위환자는 춘추 말기의 晉 大夫로, 이름은 駒이다. 智伯이 땅을 요구하자 1만 호의 고을을 주어 비위를 맞추었다가 뒤에 韓康子‧趙襄子와 함께 지백을 멸한 후 그 땅을 삼분하였다.
▶ 韓康子爲參乘: 韓康子가 호위하여 모시고 타다. 韓康子는 춘추 말기 晉 大夫로 이름은 虎이다.
▶ 汾水可以灌安邑: 汾水는 山西省 寧武縣 管涔山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平陽을 지나 黃河로 유입하는 강이다. 安邑은 위환자의 封邑으로, 지금의 山西省 夏縣에 있었다.
▶ 絳水可以灌平陽: 絳水는 山西省 屯留縣의 북서쪽 盤秀口에서 발원하여 潞城縣 경계의 濁漳水로 흘러드는 강이다. 平陽은 韓康子의 봉읍으로, 지금의 山西省 臨汾市 남쪽에 있었다.
▶ 肘: 팔꿈치로 찌르다.
▶ 履: 밟다.
▶ 賢: ~보다 낫다.
이 내용은 전국책 제25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齊、楚相約而攻魏,魏使人求救於秦,冠蓋相望也,而秦救不至。
齊와 楚가 서로 약조하고 魏를 공격하자, 魏가 사신을 보내 秦에 구원을 청하니, 오가는 사신들의 冠과 수레덮개가 서로 보일 정도로 이어졌으나 秦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魏人有唐雎者,年九十餘矣,謂魏王曰:
「老臣請西說秦王,令兵先臣出。」
魏에 나이가 90살이 넘은 唐雎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위왕에게 말하였다.
“老臣이 서쪽으로 가서 진왕에게 유세하여, 저보다 먼저 秦軍을 출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魏王再拜,遂約車而遣之。
위왕이 재배하고 수레를 준비하여 그를 보냈다.
唐雎到,入見秦王。
당저가 秦에 도착하여 입궁하여 秦왕을 알현하였다.
秦王曰:
「丈人芒然乃遠至此,甚苦矣!
夫魏之來求救數矣,寡人知魏之急已。」
진왕이 말하였다.
“노인장께서 피곤하게 멀리서 여기까지 오시느라고 참 힘드셨겠습니다!
魏의 구원 요청이 여러 차례 있어서 과인이 魏의 위급함은 알고 있습니다.”
▶ 冠蓋相望: 사신들이 길에서 끊임없이 왕래하다. 冠蓋는 관모와 수레 덮개.
▶ 唐雎: 전국시대 때 魏 사람. 唐且로 더 많이 알려졌다.
▶ 約: 준비하다.
▶ 丈人: 노인에 대한 존칭.
▶ 芒然: 피곤한 기색.
唐雎對曰:
당저가 대답하였다.
「大王已知魏之急而救不發者,臣竊以為用策之臣無任矣。
“대왕께서 이미 魏의 위급함을 알고 계시면서도 아직 구원병을 보내지 않음은, 신이 삼가 생각해보니 계책을 내는 신하들이 책임을 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夫魏,一萬乘之國也,然所以西面而事秦,稱東藩,受冠帶,祠春秋者,以秦之彊足以為與也。
무릇 魏는 만승의 대국인데도 서쪽으로 秦을 섬기고 동쪽의 藩國이라 일컬으며 冠帶를 귀국으로부터 받고 봄가을로 제사 물품을 바치는 것은 秦이 강하여 충분히 동맹국이 될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今齊、楚之兵已合於魏郊矣,而秦救不發,亦將賴其未急也。
지금 齊와 楚의 軍隊가 이미 魏의 교외에 합류했는데도 秦이 구원병을 보내지 않음은 아직 급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使之大急,彼且割地而約從,王尚何救焉?
아주 위급해져 그들이 땅을 떼어주고 합종하면, 그때에는 왕께서 무엇을 구원하시렵니까?
必待其急而救之,是失一東藩之魏而彊二敵之齊、楚,則王何利焉?」
필경 급해지기를 기다렸다가 구원한다면, 하나의 東藩인 魏를 잃고 두 적국인 齊와 楚를 강하게 만들 터인데 왕께 무슨 이득이 되겠습니까?”
於是秦昭王遽為發兵救魏。
이에 진소왕은 급히 軍士를 보내 魏를 구원하였다.
魏氏復定。
魏는 다시 안정되었다.
▶ 無任: 임무를 다하지 못함. 무능함.
▶ 東藩: 동쪽의 藩國.
▶ 冠帶: 衣帽. 벼슬아치들의 公服.
▶ 祠春秋: 봄과 가을에 秦에 제사용품을 보내다. 祠는 제사.
▶ 與: 동맹국.
▶ 遽: 급히.
趙使人謂魏王曰:
「為我殺范痤,吾請獻七十里之地。」
趙가 사신을 보내 위 안희왕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위해 范痤를 죽여주면 우리가 70리의 땅을 바치겠습니다.”
魏王曰:
「諾。」
위왕이 말하였다
“좋소.”
使吏捕之,圍而未殺。
관리를 보내 범좌를 체포하게 하였는데 포위하였으나 아직 죽이지 못하였다.
痤因上屋騎危,謂使者曰:
「與其以死痤市,不如以生痤市。
有如痤死,趙不予王地,則王將柰何?
故不若與先定割地,然後殺痤。」
범좌가 지붕으로 올라가 용마루를 타고 앉아 사자에게 말하였다.
“죽은 범좌로 거래함보다 산 범좌로 거래함이 낫습니다.
만일 나를 죽였다가 趙가 왕께 땅을 주지 않으면 왕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땅을 분할하는 절차를 정하고 나서 범좌를 죽임이 낫습니다.
魏王曰:
「善。」
위왕이 말하였다.
“좋다.”
▶ 范痤: 전국시대 종횡가로 魏의 재상.
▶ 危: 용마루.
▶ 市: 매매하다. 거래하다.
▶ 有如: 만일.
痤因上書信陵君曰:
「痤,故魏之免相也,趙以地殺痤而魏王聽之,有如彊秦亦將襲趙之欲,則君且柰何?」
범좌가 이에 信陵君에게 편지를 올려 말하였다.
“저는 원래 魏의 면직된 재상으로 趙가 땅을 조건으로 나를 죽이려 하는데, 위왕께서 이를 좇으니, 만일 강한 秦이 趙의 방법을 답습하면 군께서는 어찌하시겠습니까?”
信陵君言於王而出之。
신릉군이 위왕에게 말해 범좌를 석방하였다.
▶ 信陵君: 전국시대 魏의 公子 無忌. 魏昭王의 庶子이며 安釐王의 아우로 3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으며, 趙 平原君을 구한 일이 있다. 전국시대 四公子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史記列傳권77魏公子列傳>
▶ 襲: 답습하다. 물려받다.
▶ 出: 석방하다.
魏王以秦救之故,欲親秦而伐韓,以求故地。
위왕은 秦이 魏를 구원해 준 까닭에 秦을 가까이해서 韓을 공격하여 옛 땅을 찾고자 하였다.
無忌謂魏王曰:
無忌가 위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欲親秦而伐韓: 魏가 齊‧楚의 공격을 받게 되자 秦이 魏를 도왔다. 마침 秦은 趙와 약정하여 韓을 치려고 했는데, 魏는 秦의 고마움을 생각해서 秦‧趙의 연합군에 가담해서 韓을 친 후 잃은 땅을 회복하려 하였다.
▶ 無忌: 魏公子 무기. 전국시대 魏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276년 信陵에 봉해지면서 信陵君으로 불리었다.
<전국책·魏策>에는 朱己로 기록되어 있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秦與戎翟同俗,有虎狼之心,貪戾好利無信,不識禮義德行。
“秦은 戎, 狄과 풍속이 같고,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갖고 있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이익만 밝히고 신의가 없어 예의와 덕행 따위는 모릅니다.
茍有利焉,不顧親戚兄弟,若禽獸耳,此天下之所識也,非有所施厚積德也。
만일 이익이 된다면 친척 형제도 돌아보지 않아 금수와 같으니, 이는 천하가 다 아는 바로 후하게 은혜를 베풀거나 덕행을 쌓을 바가 아닙니다.
故太后母也,而以憂死;
穰侯舅也,功莫大焉,而竟逐之;
兩弟無罪,而再奪之國。
그러므로 그 나라 태후는 왕의 어머니이면서도 근심으로 죽었고,
穰侯는 외삼촌으로 그 공이 막대함에도 결국 축출하였으며,
두 동생은 죄 없이 두 번이나 봉지를 빼앗겼습니다.
此於親戚若此,而況於仇讎之國乎?
친척에게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원수의 나라에야 오죽하겠습니까?
今王與秦共伐韓而益近秦患,臣甚惑之。
지금 왕께서 秦과 함께 韓을 공격하여 秦이라는 근심거리에 더욱 가까워지니, 신은 매우 의혹합니다.
而王不識則不明,群臣莫以聞則不忠。
왕께서 모르고 계셨다면 이는 명석하지 못함이요, 신하들이 아뢰지 않았다면 불충입니다.
▶ 戎翟: 西戎과 北狄. 翟은 狄과 같다.
▶ 戾: 포악하다. 사납다.
▶ 茍: 만약. 단지.
▶ 施厚: 은혜를 후하게 베풀다.
▶ 太后: 宣太后. 秦惠文王의 후비이며, 昭襄王의 어머니. 楚 출신이며, 羋八子라 불리었다. 어린 소양왕이 즉위하자 섭정하였다. 범수의 계략에 의해 폐위되었다. <史記列傳권79范睡·蔡澤列傳>
▶ 穰侯: 진 소양왕의 어머니인 선태후의 동생. 상국의 지위에 올랐으나 范睡의 계략에 의해 陶땅으로 축출되었다.
▶ 兩弟: 涇陽君과 高陵君. 모두 진 소양왕과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동생이다.
▶ 仇讎: 원수.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今韓氏以一女子奉一弱主,內有大亂,外交彊秦魏之兵,王以為不亡乎?
지금 韓은 여자 하나가 어린 군주를 받들고 있어 안에는 크게 혼란하고, 밖으로는 강한 秦과 魏의 軍隊와 교전하고 있는데도 왕께서는 韓이 망하지 않을 터라고 생각하십니까?
韓亡,秦有鄭地,與大梁鄴,王以為安乎?
韓이 망하면 秦이 옛 鄭의 땅과 대량 부근까지 차지할 터인데, 왕께서는 평안하리라 생각하십니까?
王欲得故地,今負彊秦之親,王以為利乎?
왕께서 옛 땅을 얻고자 강한 秦과 친해짐에 의지하려 하시는데, 왕께서는 그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韓氏以一女子奉一弱主: 韓의 桓惠王이 어려서 즉위한 9년 동안 母后가 집정하였다.
▶ 鄴: 鄰. 부근.
▶ 鄭地: 기원전375년에 鄭은 韓의 침략을 받아 陽翟에서 新鄭으로 도읍을 옮겼다.
▶ 負: 의지하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秦非無事之國也,韓亡之後必將更事,更事必就易與利,就易與利必不伐楚與趙矣。
秦은 아무 일 없이 평화스럽기를 바라는 나라가 아니며, 韓이 멸망한 후에는 틀림없이 다시 일을 벌일 터인데, 다시 일이 벌어지면 분명 쉽고 이득이 되는 일을 찾을 터이고, 쉽고 이득이 되는 일이 楚와 趙를 공격함은 분명 아닐 터입니다.
是何也?
이는 왜 그렇겠습니까?
夫越山踰河,絕韓上黨而攻彊趙,是復閼與之事,秦必不為也。
무릇 태행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韓의 상당을 거쳐 강한 趙를 공격하고자 한다면, 閼與의 전투가 거듭되니 秦은 결코 하지 않을 터입니다.
若道河內,倍鄴、朝歌,絕漳滏水,與趙兵決於邯鄲之郊,是知伯之禍也,秦又不敢。
만약 河內를 거쳐 鄴城과 朝歌땅을 등지고, 漳水와 滏水를 가로질러 趙軍과 邯鄲의 교외에서 결전한다면, 智伯이 입었던 패배이기 때문에 秦 또한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터입니다.
▶ 絶: 지나가다. 넘어가다.
▶ 閼與之事: 閼與는 韓의 지명으로 훗날 趙로 넘어갔다. 기원전270년에 秦이 韓의 閼與를 공격하자 韓이 趙에 도움을 요청하니, 趙奢를 시켜 구원병을 보냈다. 趙奢는 奇兵을 써 秦軍을 격파하였다.
▶ 道: 거쳐가다. 경유하다.
▶ 倍鄴, 朝歌: 鄴과 朝歌를 등지다. 鄴은 河南省臨漳縣, 朝歌는 河南省淇縣.
▶ 漳滏: 漳水의 옛 물길은 鄴, 邯鄲‧成安 등지였으며, 滏水는 그 支流이다.
▶ 智伯之禍: 智伯이 기원전591년 韓氏‧魏氏를 대동하고 趙氏를 공격할 때 물길을 터 趙의 도읍 晉陽을 포위하자 趙襄子가 도리어 韓氏, 魏氏와 밀약하여 智伯의 군내로 물길을 돌려 결국 智氏는 망하고 晉은 韓‧魏‧趙의 三晉으로 분리되었다.
伐楚,道涉谷,行三千里。
楚를 공격하려 한다면 涉谷을 거쳐 3천리를 행군해야 합니다.
而攻冥阸之塞,所行甚遠,所攻甚難,秦又不為也。
冥厄이란 요새를 공격해야 하는데, 길이 너무 멀고 공격하기 심히 어려워 秦이 하지 않습니다.
若道河外,倍大梁,右蔡左[上蔡]、召陵,與楚兵決於陳郊,秦又不敢。
만약 河外를 경유해서 대량을 등지고 오른쪽으로는 上蔡와 召陵을 끼고, 楚軍와 陳城의 교외에서 결전함도 또한 秦은 감히 하지 않을 터입니다.
故曰秦必不伐楚與趙矣,又不攻衛與齊矣。
그렇기 때문에 秦은 결코 楚나 趙를 공격하지 않을 터이고, 또 衛와 齊도 공격하지 않을 터이라는 말씀입니다.
▶ 道: 거쳐가다. 경유하다.
▶ 涉谷: 楚로 통하는 험한 길.
▶ 冥阸之塞: 冥阨은 地名으로 石城山이라고도 한다. 楚의 요새이다.
▶ 倍: 등질 ‘패’. 등지다. 배반하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夫韓亡之後,兵出之日,非魏無攻已。
韓이 망한 후에 秦이 출병하는 때에는 魏 이외에는 공격 대상이 없을 터입니다.
秦固有懷、茅、邢丘,城垝津以臨河內,河內共、汲必危;
有鄭地,得垣雍,決熒澤水灌大梁,大梁必亡。
秦은 본래 懷, 茅, 邢丘를 점유하고 있는 데다 垝津에 성을 쌓아 河內와 바싹 접근하면 魏 하내의 共과 汲땅이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秦이 옛 鄭땅을 차지하여 垣雍을 얻고 熒澤의 물길을 터서 대량을 잠기게 한다면 대량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 共, 汲: 魏의 邑名.
▶ 鄭地: 옛 鄭의 땅. 成皐와 滎陽을 가리킨다.
▶ 垣雍: 魏의 읍명.
王之使者出過而惡安陵氏於秦,秦之欲誅之久矣。
왕의 사신이 秦으로 가서 그릇되게도 安陵氏를 헐뜯으니 秦이 許땅을 갖고 싶어 한 지가 오래됩니다.
秦葉陽、昆陽與舞陽鄰,聽使者之惡之,隨安陵氏而亡之,繞舞陽之北,以東臨許,南國必危,國無害已[乎]?
秦의 葉陽, 昆陽은 魏의 舞陽과 인접해 있으니 秦이 사신의 중상하는 말을 좇는다면 안릉씨는 망할 터이고, 秦이 무양의 북쪽을 돌아가 동진하여 許땅에 임한다면 南國은 틀림없이 위험해질 터이니 우리나라에 피해가 없겠습니까?
▶ 過: 과실.
▶ 惡: 비방하다. 중상하다.
▶ 安陵氏: 魏襄王의 동생 成侯의 封地. 安陵은 河南省鄢陵縣.
▶ 誅: 許. 춘추시대 허나라의 옛 땅. <전국책>에는 ‘許’로 기록하고 있다.
▶ 舞陽: 당시 魏의 땅.
▶ 南國: 許땅의 남쪽. 韓의 땅. 魏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南國이라 칭하였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夫憎韓不愛安陵氏可也,夫不患秦之不愛南國非也。
韓을 미워하면서 안릉씨를 좋아하지 않음은 괜찮습니다만, 秦이 남국을 좋아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잘못입니다.
異日者,秦在河西秦,國去梁千里,有河山以闌之,有周韓以閒之。
종전에 秦이 하서의 秦 땅에 있었을 때는 大梁까지는 천 리나 떨어져 있고, 강과 산이 있어 가로막아 주었으며, 周나라와 韓이 가로막아 주었습니다.
從林鄉軍以至于今,秦七攻魏,五入囿中,邊城盡拔,文臺墮,垂都焚,林木伐,麋鹿盡,而國繼以圍。
林鄕에서 전투한 이후 지금까지 秦이 魏를 일곱 차례 공격하여 다섯 차례는 囿中으로 들어왔고, 변경의 성들은 다 함락되어 文臺는 부서지고, 垂都가 불탔으며 숲이 다 베어져 사슴들도 사라져 버렸으며, 뒤이어 국도까지 포위당하게 되었습니다.
▶ 河西: 춘추시대 및 전국시대 초기에 秦은 陝西, 甘蕭省의 黃河 以西에 불과한 좁은 땅이었다.
▶ 蘭: 가로막다.
▶ 閒: 가로막다. 분리하다.
▶ 林鄕: 지금의 河南省新鄭縣부근.
▶ 囿中: 지명. 圃田澤。
▶ 堕: 무너뜨리다. 훼손하다.
▶ 文臺墮垂道焚: 文臺는 부서지고 垂都는 불타다. 文臺는 魏의 臺이름. 지금의 山東省荷澤縣, 垂都는 魏의 읍이름.
▶ 國繼以圍: 國은 魏의 국도인 大梁.
又長驅梁北,東至陶衛之郊,北至平監。
또 秦은 멀리 진군하여 대량의 북쪽에 이르렀고, 동쪽으로 陶와 衛의 교외에까지 이르렀고, 북쪽으로는 平監에까지 이르렀습니다.
所亡於秦者,山南山北,河外河內,大縣數十,名都數百。
秦에게 잃은 땅이 산남 산북과 하외 하내의 큰 현이 수십 개요, 이름난 도성은 수백 개입니다.
秦乃在河西秦,去梁千里,而禍若是矣,又況於使秦無韓,有鄭地,無河山而闌之,無周韓而閒之,去大梁百里,禍必由此矣。
秦이 하서의 秦의 옛 땅에 있어서 대량과 천 리인데도 그 화가 이와 같은데, 또 하물며 秦이 韓을 멸하고, 鄭의 옛 땅을 차지하고, 산과 강이란 장애가 사라지고, 주나라와 韓이 가로막는 역할이 없어지면, 대량까지는 1백 리밖에 되지 않으므로, 화가 틀림없이 이것에서 비롯될 터입니다.
▶ 陶衛: 陶는 지금의 山東省定陶縣. 衛는 춘추시대 衛의 도읍이었던 楚丘이며, 지금의 河南省滑縣.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異日者,從之不成也,楚、魏疑而韓不可得也。
종전에는 合縱이 이루어지지 않아 楚와 魏가 서로 의심하고 韓은 맹약에 가담할 수 없었습니다.
今韓受兵三年,秦橈之以講,識亡不聽,投質於趙,請為天下鴈行頓刃,楚、趙必集兵,皆識秦之欲無窮也,非盡亡天下之國而臣海內,必不休矣。
지금 韓은 秦에게 3년 동안 공격을 받고 있고, 秦은 韓에게 굴종하라며 강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韓은 망할 줄 알기 때문에 따르지 않고, 趙에 인질을 보내 천하가 연합해서 대열을 이루고 함께 대항하기를 청하였습니다. 楚와 趙가 반드시 軍士를 모아야 함은 秦의 욕심이 끝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니, 秦은 천하의 나라들을 모조리 멸망시켜 해내의 백성을 신하로 삼지 않고는 결코 싸움을 멈추지 않을 터입니다.
▶ 橈: 굴종하다. 굽히다.
▶ 講: 강화하다.
▶ 投質: 인질로 보내다.
▶ 鴈行頓刃: 雁行은 기러기가 진을 치고 가는 모습. 頓刃은 칼날을 가지런히 하다. 즉 韓과 趙가 연합하여 秦의 공격을 막는다는 뜻.
是故臣願以從事王,王速受楚趙之約,趙[而]挾韓之質以存韓,而求故地,韓必效之。
이런 까닭에 신은 합종으로 군왕을 모시고 왕께서는 속히 楚와 趙와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韓의 인질을 잡아두어 韓을 존속시키면서 옛 땅을 요구하면 韓은 틀림없이 옛 땅을 바칠 터입니다.
此士民不勞而故地得,其功多於與秦共伐韓,而又與彊秦鄰之禍也。
이것은 백성을 힘들이지 않고 옛 땅을 얻는 것이니, 그 공로가 秦과 함께 韓을 공격함보다 많고, 또 강한 秦을 이웃하는 화도 없을 터입니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24권 魏策에 기록되어 있다.
夫存韓安魏而利天下,此亦王之天時已。
무릇 韓을 보존하고 魏를 안정시키며 천하를 이롭게 함이니, 이것은 왕께서 천시를 얻음입니다.
通韓上黨於共、甯,使道安成,出入賦之,是魏重質韓以其上黨也。
韓의 上黨과 우리의 共城, 寧邑의 도로를 개통하여 출입할 때 세금을 거두면 이는 魏가 韓의 상당을 저당잡는 것과 같습니다.
今有其賦,足以富國。
지금 세금을 거두게 되면 나라를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韓必德魏愛魏重魏畏魏,韓必不敢反魏,是韓則魏之縣也。
韓은 틀림없이 魏에 감격하고, 魏를 좋아하고, 魏를 존중하고, 魏를 두려워하여 절대로 감히 魏를 배반하지 않을 터이니, 韓이 魏의 縣이 되는 것입니다.
魏得韓以為縣,衛、大梁、河外必安矣。
魏가 韓을 현으로 삼으면 衛, 大梁, 河外는 필경 안정될 터입니다.
今不存韓,二周、安陵必危,楚、趙大破,衛、齊甚畏,天下西鄉而馳秦入朝而為臣不久矣。
만일 韓을 보존하지 않으면 서주, 東周, 안릉이 위태로워지고, 楚와 趙가 깨어지면 衛와 齊가 몹시 두려워할 터이니, 천하 제후가 서쪽으로 향하여 달려가서 秦에 입조하여 신하가 될 날이 멀지 않겠습니다.”
▶ 賦: 세금을 징수하다.
▶ 質: 저당하다.
▶ 鄕: 向과 같다. 향하다.
二十年,秦圍邯鄲,信陵君無忌矯奪將軍秦鄙兵以救趙,趙得全。
안희왕20년(기원전257년)에 秦이 한단을 포위하자 신릉군 위무기가 왕명이라고 속이고 장군 秦鄙의 軍士를 거두어 趙를 구원하니 趙가 보전되었다.
無忌因留趙。
이 때문에 위무기는 趙에 머물렀다.
二十六年,秦昭王卒。
안희왕26년(기원전251년)에 秦소왕이 죽었다.
▶ 信陵君無忌矯奪將軍秦鄙兵: 秦이 趙 한단을 포위하자 魏의 信陵君은 趙를 구원하기 위해 侯生의 계책으로 如姬를 통해 虎符를 훔쳐 朱亥로 하여금 진비를 살해하게 하여 魏의 병권을 빼앗아 趙를 구원하였다. <史記列傳권77魏公子列傳>
▶ 秦昭王: 秦昭襄王. 전국시대 秦의 제28대 군주이자 제3대 왕이다.
三十年,無忌歸魏,率五國兵攻秦,敗之河外,走蒙驁。
안희왕30년(기원전247년)에 위무기가 魏로 돌아와서 五國의 軍士를 이끌고 秦을 공격하여 河外에서 승리하고 蒙驁를 내쫓았다.
魏太子增質於秦,秦怒,欲囚魏太子增。
魏 태자 增이 秦에 인질로 있었는데, 진왕이 화가 나서 魏 태자 증을 가두려고 하였다.
或為增謂秦王曰:
「公孫喜固謂魏相曰
『請以魏疾擊秦,秦王怒,必囚增。
魏王又怒,擊秦,秦必傷』。
今王囚增,是喜之計中也。
故不若貴增而合魏,以疑之於齊、韓。」
누군가가 增을 위해 진왕에게 말하였다.
“公孫喜가 본래 魏 재상에게 말하기를,
‘魏軍으로 신속히 秦을 공격하라고 청하시면 진왕이 노하여 틀림없이 증을 가둘 터입니다.
魏왕도 노하여 秦을 치면 秦은 분명 태자 증을 해칠 것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지금 왕께서 증을 가둠은 공손희의 계략이 적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증을 더 잘 대해주고 魏와 화합하여 齊와 韓이 의심하게 함이 낫습니다.”
秦乃止增。
진왕이 비로소 증의 일을 중지하였다.
▶ 蒙驁: 전국시대 말기 秦의 장수. 蒙恬의 아버지이다.
▶ 河外: 滹沱河의 바깥 지역을 말한다. 호타하는 河北省서쪽 지역을 흐르는 강이다. 일설에는‘外’는 ‘北’의 誤字로, 黃河의 북쪽인 齊 북쪽 지역을 이른다고 한다.
▶ 魏太子增: 위 안희왕의 아들로 훗날의 魏景湣王이 된다. 이름은 증 또는 午라고도 한다.
▶ 公孫喜: 전국시대 魏의 장수.
三十一年,秦王政初立。
안희왕31년(기원전246년)에 진왕 政이 새로 즉위하였다.
三十四年,安釐王卒,太子增立,是為景湣王。
안희왕34년(기원전243년)에 安釐王이 죽고, 태자 增이 즉위하니, 그가 景湣王이다.
信陵君無忌卒。
신릉군 위무기가 죽었다.
景湣王元年,秦拔我二十城,以為秦東郡。
경민왕원년(기원전242년)에 秦이 魏의 20개 성을 함락하고 秦의 東郡으로 삼았다.
二年,秦拔我朝歌。
경민왕2년(기원전241년)에 秦이 魏의 朝歌를 함락하였다.
衛徙野王。
衛가 野王으로 도읍을 옮겼다.
三年,秦拔我汲。
경민왕3년(기원전240년)에 秦이 魏의 汲을 함락하였다.
五年,秦拔我垣、蒲陽、衍。
경민왕5년(기원전238년)에 秦이 魏의 垣, 蒲陽, 衍을 함락하였다.
十五年,景湣王卒,子王假立。
경민왕15년(기원전228년)에 경민왕이 죽고, 아들 魏王 假가 즉위하였다.
▶ 秦王政: 嬴政. 후일의 秦始皇.
▶ 景湣王: 魏景湣王. 위 안희왕의 아들로 이름은 增 또는 午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기원전242년부터 기원전228년까지 재위하였다.
▶ 野王: 衛는 이미 秦의 속국이 되었으므로 衛 元君이 그 종족을 거느리고 野王으로 옮겨가 살았다. <自治通監>
▶ 魏王假: 성은 姬이고, 氏는 魏, 이름은 假이며 경민왕의 아들이다. 전국시대 魏의 마지막 군주이다. 기원전225년에 秦의 장군 王贲이 黄河의 물을 끌어와 수공으로 大梁城을 공격하자 위왕이 투항하고 魏는 멸망하였다.
王假元年,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秦王覺之。
위왕 가 원년(기원전225년)에 燕의 태자 丹이 荊軻를 보내 진왕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진왕이 이를 알아챘다.
▶ 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 燕太子 丹은 燕의 마지막 태자로 燕王 喜의 아들이다. 秦의 政(: 후일 진시황제)은 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燕태자 丹과 함께 趙에 볼모로 있으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귀국하여 즉위한 다음 태자 단을 무시하자, 태자 丹은 진왕 政에게 복수를 꾀하면서 荊軻에게 진왕 정을 죽이도록 했으나 형가가 실패하였다.
[史記列傳]권86刺客列傳⑤荊軻>
三年,秦灌大梁,虜王假,遂滅魏以為郡縣。
위왕 가3년(기원전225년)에 秦이 대량을 물에 잠기게 하고 위왕 假를 포로로 잡고 魏를 멸망시키고 秦의 군현으로 만들었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吾適故大梁之墟,墟中人曰:
“내가 대량의 옛 성을 들렀는데 그곳의 사람이 말하였다.
「秦之破梁,引河溝而灌大梁,三月城壞,王請降,遂滅魏。」
‘秦이 대량을 공격할 때 강물을 끌어들여 대량성을 잠기게 하니, 3개월이 지나자 성이 무너져 魏왕이 투항하였고 그리하여 魏를 멸하였다.’
說者皆曰魏以不用信陵君故,國削弱至於亡,余以為不然。
평론가들이 모두 말하기를
‘魏가 신릉군을 기용하지 않은 탓에 나라가 쇠약해져 멸망에 이르렀다.’
라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天方令秦平海內,其業未成,魏雖得阿衡之佐,曷益乎?
하늘이 바야흐로 秦에게 천하를 평정하게 하여 그 대업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魏가 阿衡伊尹의 보좌를 받는다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大梁之墟: 大梁의 폐허가 된 옛 성.
▶ 阿衡: 伊尹. 商나라를 개국한 湯王의 재상으로 尹은 관명인 尹正의 尹이고 이름은 摯이다. 阿衡의 관직을 맡고 탕왕을 보좌하여 하나라 桀王을 공격하고 商나라를 개국하였다. <史記本紀권03. 殷本紀>
▶ 曷: 어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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