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記/世家

世家45-韓世家(한세가)

耽古樓主 2023. 7. 1. 11:12

이篇은 30세가 중 15번째 편으로 전국시대 韓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韓은 戰國時代 七雄의 하나로 韓氏는 晉을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춘추시대부터 존재하여 韓武子의 3대손 韓厥(: 韓獻子) 및 아들 韓起(: 韓宣子)는 함께 晉의 6卿의 한 사람이었다. 기원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魏氏와 함께 晉의 知伯을 멸하고 영토를 3분하여, 기원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제후로 승인되어 독립국이 되었다.
기원전355년 昭侯는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책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서 부상하여, 기원전325년에는 王號를 칭하였으나, 얼마 후 秦과 楚의 압박을 받아 合從策·連衡策을 거친 후 기원전233년에는 韓非를 秦으로 보내 秦의 공격을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한비는 李斯 등에게 살해되고 기원전230년 마침내 秦에게 멸망되어 그 땅은 潁川郡으로 되었다.
사마천은 태자공 자서에서
“韓厥의 음덕으로 趙武가 조씨 집안을 다시 일으켰으며 끊어진 대를 잇게 하고 폐지된 제사를 회복케 하니 晉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韓昭侯가 열후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申不害를 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왕 安이 韓非를 의심하여 믿지 않으니 秦이 공격해왔다.
韓厥이 晉을 돕고 周천자를 수호한 일을 칭송하여 제15편 ‘韓世家’를 지었다."

라고 기술하였다.

 

韓之先與周同姓姓姬氏
의 선조는 천자와 同姓 姬氏이다.

其後苗裔事晉得封於韓原曰韓武子
그 후예들은 을 섬겨 韓原에서 봉토를 받아 韓武子라고 칭하였다.

武子後三世有韓厥從封姓為韓氏
한무자의 3대 후손에 韓厥이 있었는데, 봉토의 명칭을 좇아 韓氏라 하였다.

▶ 苗裔: 후대의 자손.
▶ 韓武子: 韓萬. 춘추시대 曲沃사람으로 이름은 萬이다. 시호가 ‘武’였으므로 한무자라고 불린다.
▶ 韓厥: 춘추시대 晉 사람으로 이름은 厥이며 시호가 獻이어서 韓獻子 또는 獻子로도 불린다. 韓萬의 玄孫이고, 韓起의 아버지다. 춘추시대 晉의 卿大夫에 올랐다. 齊를 공격한 공으로 新中軍將이 되었고, 都岸賈가 趙氏를 멸할 때 살아남은 趙朔의 아들 趙武를 도와 조씨의 田邑을 되찾게 하였다.

韓厥晉景公之三年晉司寇屠岸賈將作亂誅靈公之賊趙盾
한궐이 있던 晉景公 3(기원전597),  司寇 屠岸賈가 난을 일으켜 靈公 賊臣 趙盾을 죽이려고 하였다.

趙盾已死矣欲誅其子趙朔
당시 조돈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들 趙朔을 죽이려 하였다.

韓厥止賈賈不聽
한궐이 도안가를 말렸으나 도안가는 듣지 않았다.

厥告趙朔令亡
한궐이 조삭에게 알려 그에게 도망치라고 하였다.

朔曰
子必能不絕趙祀死不恨矣。」
조삭이 말하였다.
그대가 틀림없이 조씨의 제사를 끊어지지 않게 해준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소.”

韓厥許之
한궐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及賈誅趙氏厥稱疾不出
도안가가 조씨를 죽일 때 한궐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程嬰公孫杵臼之藏趙孤趙武也厥知之
程嬰 公孫杵臼가 조씨 고아 趙武를 숨겼고, 한궐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司寇: 정치와 법률을 다루는 관직.
▶ 屠岸賈: 晉경공 시기의 간신. 暗君인 晉景公에게 부화뇌동해 온갖 아첨과 술수, 참소 등을 일삼으면서 晉 조정을 혼란과 퇴폐로 이끌었다. 기원전584년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趙朔을 비롯해 趙氏 일문을 몰살하는 일대 참극을 벌였다.
▶ 趙盾: 趙宣子. 趙宣盟. 이름은 盾이며, 시호는 宣,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조최의 아들이다.
襄公 7년 中軍元帥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양공이 죽자 先蔑과 士會를 시켜 공자 公子 雍을 秦에서 맞으려 했는데 양공의 부인 穆嬴으로 인하여 靈公(: 이고)을 세우고 공자 옹을 세우려는 秦軍을 방어하였다. 영공이 즉위하여 음란하고 폭압을 일삼자 간언을 올렸지만 뜻이 맞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조돈의 동생 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여 晉으로 돌아왔다.
[史記世家]권43. 趙世家 (02/23 <趙衰, 趙盾, 趙朔>
▶ 趙朔: 晉景公때 조돈이 죽자 시호를 宣孟이라고 하였으며, 아들 朔이 뒤를 이었다. 趙朔은 晉 성공의 누나를 부인으로 맞았다.
▶ 公孫杵臼: 趙朔의 門客이다.
▶ 程嬰: 晉의 재상인 趙朔의 친구.
▶ 趙孤趙武: 趙氏孤兒趙武. 趙文字 또는 趙孟으로도 불린다. 趙朔의 아들이다. 晉景公때 屠岸賈가 조씨 집안을 誅滅할 때 조삭의 아내 莊姬가 유복자로 낳았다. 程嬰과 公孫杵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고 어머니 장희를 따라 公宮에서 양육되었다. 나중에 조씨의 後嗣로 세워졌다. 晉悼公이 즉위하자 卿에 임명되었다. 진도공10년 國政을 장악했고, 12년 楚의 屈建, 子木과 함께 終戰의 회합을 주최하였다. 시호는 文이다.

景公十一年厥與郤克將兵八百乘伐齊敗齊頃公于鞍獲逢丑父
경공11(기원전589), 한궐과 郤克 8 의 전차로 를 공격하여, 頃公 에서 패퇴시키고 逢丑父를 사로잡았다.

於是晉作六卿而韓厥在一卿之位號為獻子
이 당시  6경을 설치하였는데 한궐이 의 한 자리를 차지했고, 獻子라 하였다.

▶ 卻克(극극/각극): 郤献子. 성은 姬, 씨는 郤, 이름은 克이다. 춘추시대 晉의 정경이었다. 몸이 불구였으나 장군으로 齊와 鞍땅의 전투에서 齊를 대패시켰다
▶ 鞍: 齊 땅.
▶ 逢丑父: <제태공세가>에는 逄丑父로 기록되어 있다. 방추보는 춘추시대 齊의 대부로 韓과 전투 중 齊가 위급해지자, 逄丑父는 경공이 잡힐까 걱정되어 전차에서 자리를 바꾸어, 경공이 오른쪽 자리를 잡았으나 전차가 나무에 걸려 멈추고 말았다. 방추보가 거짓으로 경공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하니 경공은 도망쳐 나와 齊軍으로 돌아갔다. <史記世家권32. 齊太公世家>

晉景公十七年卜大業之不遂者為祟
진경공17(기원전583), 진경공이 병이 나서 점을 치니
대업의 후손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빌미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韓厥稱趙成季之功今後無祀以感景公
한궐이 趙成季(: 조최)의 공을 거론하면서 지금 제사가 끊어졌다고 하여 경공의 마음을 움직였다.

景公問曰
尚有世乎?」
경공이 물었다.
그 후손이 아직 남아 있는가?”

厥於是言趙武而復與故趙氏田邑續趙氏祀
한궐이 이에 趙武에 관하여 말하자 다시 옛 조씨의 봉지를 회복시켜 주고 조씨의 제사를 잇도록 하였다.

▶ 祟: 빌미. 귀신이 사람에게 내리는 재앙.
▶ 趙成季: 趙衰. 춘추시대 晉 사람으로 시호가 成이라 趙成으로도 불린다. 또 趙成子 또는 成季등으로도 썼다. 公子 重耳를 따라 외국에서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온갖 고생과 위험을 극복했고, 중이가 귀국해 晉文公으로 즉위하자 中軍長이 되어 진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史記世家]권43. 趙世家
▶ 世: 후손.
▶ 田邑: 封地.

晉悼公之十[]年 韓獻子老
晉悼公 7(기원전566), 한헌자가 나이가 많아 물러났다.

獻子卒子宣子代
헌자가 죽자 아들 宣子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宣字徙居州
선자가 州邑으로 옮겼다.

▶ 老: 노령으로 퇴직하다. 告老.
▶ 韓宣子: 韓起. 춘추시대 晉의 大夫.

晉平公十四年吳季札使晉
晉國之政卒歸於韓趙矣。」
平公 14(기원전544),  季札 에 사신으로 와서 말하였다.
의 정권이 끝내는 , , 씨 세 집안에게 돌아가겠습니다.”

晉頃公十二年韓宣子與趙魏共分祁氏羊舌氏十縣
頃公 12(기원전514), 韓宣子가 조씨, 위씨와 함께 祁氏, 羊舌氏의 열 개 현을 나누었다.

晉定公十五年宣子與趙簡子侵伐范中行氏
 定公 15(기원전497), 한선자와 趙簡子 范氏, 中行氏를 공격하였다.

宣子卒子貞子代立
선자가 죽고 아들 貞子가 작위를 계승하였다.

貞子徙居平陽
정자는 거처를를 平陽으로 옮겼다.

▶ 晉平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彪이며, 悼公의 아들이다.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淫樂을 즐겼다.
▶ 季札: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왕의 자리를 넘겨주려 했으나, 계찰은 이를 받지 않고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 祁氏: 晉의 大夫인 祁奚집안으로 손자 祁盈 때 멸족되었다.
▶ 羊舌氏: 楊氏이다. 叔向의 食邑이 楊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楊食我로 稱하였으며, 伯石(: 楊石)이다. 羊舌職집안으로, 증손 羊舌食我 때 멸족되었다.
▶ 趙簡子: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貞子卒子簡子代
정자가 죽고 아들 簡子가 뒤를 이었다.

簡子卒子莊子代
간자가 죽고 아들 莊子가 뒤를 이었다.

莊子卒子康子代
간자가 죽고 아들 莊子가 뒤를 이었다.

康子與趙襄子魏桓子共敗知伯分其地地益大大於諸侯
韓康子 趙襄子, 魏桓子와 함께 知伯을 물리치고 그 땅을 나누어 땅이 더욱 커지니 제후들보다도 컸다.

▶ 貞子: 韓貞子. 춘추시대 晉 韓씨의 領袖. 한선자 한기의 아들.
▶ 康子: 韓康子. 이름은 虎이다. 춘추전국시대 晉 한씨의 영수로 한장자의 아들이다.
▶ 康子與趙襄子: 기원전453년에 晉의 3卿인 韓虎 韓康子, 魏駒 魏桓子, 趙孟 趙양자가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 瑤를 죽이고 知氏를 멸문한 다음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晉을 삼분하였다

康子卒子武子代
강자가 죽고 아들 武子가 직위를 계승하였다.

武子二年伐鄭殺其君幽公
무자2, 을 공격하여 의 군주 幽公을 죽였다.

十六年武子卒子景侯立
무자16, 무자가 죽고 아들 景侯가 즉위하였다.

▶ 武子: 韓武子. 춘추시대 晉 한씨의 領袖. 한강자 韓虎의 아들. 韓 선조인 韓萬(: 한무자)과 시호가 같다.
▶ 幽公: 鄭幽公. 정공공31년(기원전424년)에 공공이 죽자, 아들 幽公 已가 즉위하였다. 유공원년(기원전423년)에 韓武子가 鄭을 공격하여 유공을 죽였다.

景侯虔元年伐鄭取雍丘
경후  원년(기원전408), 을 공격하여 雍丘를 탈취하였다.

二年鄭敗我負黍
경후 건2(기원전407),   負黍에서 패퇴시켰다.

▶ 景侯虔: 韓景侯. 韓虔. 晉의 卿인 韓武子의 아들이다. 韓景侯 때인 기원전403년에 晉이 韓, 魏, 趙로 삼분되어 정식으로 韓이 건립되었다.
▶ 負黍: 韓의 읍 이름.

世家45-韓世家(한세가)

 

六年與趙魏俱得列為諸侯
경후 건6(기원전403),  · 와 함께 제후의 반열에 올랐다.

▶ 列為諸侯: 기원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제후로 승인되어 韓 · · 趙가 독립국이 되었다.

九年鄭圍我陽翟
경후 건9(기원전400),   陽翟을 포위하였다.

景侯卒子列侯取立
경후가 죽고 아들 列侯 取가 즉위하였다.

▶ 列侯: 韓列侯. 이름은 取이며 한경후의 아들로 전국시대 韓의 군주이다.
▶ 陽翟: 韓의 도읍. 지금의 河南省禹縣.



列侯三年聶政殺韓相俠累
열후3(기원전397), 聶政 의 재상 俠累를 죽였다.

九年秦伐我宜陽取六邑
열후9(기원전391),   宜陽을 공격하여 6개 읍을 탈취하였다.

十三年列侯卒子文侯立
열후13(기원전387), 열후가 죽고 아들 文侯가 즉위하였다.

是歲魏文侯卒
이 해에 魏文侯가 죽었다.

▶ 聶政殺韓相俠累: 聶政은 魏 사람으로 일찍이 사람을 죽여 도망 끝에 어머니를 모시고 齊에서 백정이 되었다. 자신을 후대한 韓의 卿인 嚴仲子가 엄중자의 원수인 韓 재상 俠累(: 韓傀)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자신의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고 거절하였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의리를 지켜 협루를 죽이고 자살하였다. 섭정이 죽은 후 그의 누나가 섭정의 시체를 안고 따라 죽었다.
[史記列傳]권86刺客列傳
▶ 韓相俠累: 韓의 재상 협루. 한애후 때의 재상으로 전국책에는 韓傀로 기록되어 있다. 俠累(: 韓傀)가 韓 재상이 되고 嚴遂가 임금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둘은 서로 害를 끼쳤다. 엄수가 정사를 토론할 때 손가락질을 하면서 협루의 과실을 거론하자, 협루는 이 때문에 조정에서 심하게 질책하였다. 엄수가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으나 주위 사람들이 구해주었다. 이에 엄수는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워 국외로 도망하였다. <戰國策 韓策>
▶ 魏文侯: 전국시대 魏의 초대 제후로 성은 姬, 씨는 魏, 이름은 ‘斯’, 또는‘都’이다. 李悝·吳起·樂羊·西門豹등 인재를 등용하였고, 魏를 전국시대 최초로 패국으로 만들었다.

文侯二年伐鄭取陽城
문후2(기원전385), 을 공격해서 陽城을 탈취하였다.

伐宋到彭城執宋君
을 쳐서 彭城에 이르러 의 군주를 사로잡았다.

七年伐齊至桑丘
문후7(기원전380), 를 쳐서 桑丘에 이르렀다.

鄭反秦
 에 반란을 일으켰다.

九年伐齊至靈丘
문후9(기원전378), 를 쳐서 靈丘에 이르렀다.

十年文侯卒子哀侯立
문후10(기원전377), 문후가 죽고 아들 哀侯가 즉위하였다.

▶ 哀侯: 韓哀侯. 전국시대 韓의 제4대 군주이며, 이름은 屯蒙. 아버지인 한문후가 죽고, 그 뒤를 이었다. 이 당시에 鄭을 멸망시켰다.



哀侯元年與趙魏分晉國
애후 원년(기원전376), 韓魏趙 三家 을 나누었다.

二年滅鄭因徙都鄭
애후2(기원전375), 을 멸망시키고 도성을 新鄭으로 옮겼다.

▶ 哀侯: 韓哀侯. 전국시대 韓의 제4대 군주이며, 이름은 屯蒙으로 韓景侯의 증손이다. 왕위를 이은 초기에 趙, 魏와 晉을 삼분하고, 애후2년에 鄭을 멸망시켰다. 韓嚴에게 살해당하였다.



六年韓嚴弒其君哀侯
애후6(기원전371), 韓嚴이 그의 군주 애후를 시해하였다.

而子懿侯立
아들 懿侯가 즉위하였다.

▶ 懿侯: 韓懿侯. 전국시대 韓의 제6대 군주. 시호는 昭侯인데, 韓釐侯 또는 韓昭僖侯로도 전해진다. 이름은 若山이다. 기원전374년 韓嚴이 韓哀侯를 시해하여 아들인 懿侯가 즉위하였다.

懿侯二年魏敗我馬陵
의후2(기원전369),   馬陵에서 패퇴시켰다.

五年與魏惠王會宅陽
의후5(기원전366), 魏惠王 宅陽에서 회맹하였다.

九年魏敗我澮
의후9(기원전362),   澮水에서 패퇴시켰다.

十二年懿侯卒子昭侯立
의후12(기원전359), 의후가 죽고 아들 昭侯가 즉위했다.

昭侯元年秦敗我西山
소후원년(기원전358),   西山에서 패퇴시켰다.

二年宋取我黃池
소후2(기원전357),   黃池를 탈취하였다.

魏取朱
  朱邑을 탈취하였다.

六年伐東周取陵觀邢丘
소후6(기원전353),  東周를 공격하여 陵觀 邢丘를 점령하였다.

八年申不害相韓修術行道國內以治諸侯不來侵伐
소후8(기원전351), 申不害 의 재상이 되었으며, 군주가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과 치국의 도를 실행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니, 제후들이 감히 침범하지 않았다.

▶ 申不害: 韓의 명재상이며, 형명지학의 대가였다. 법가 사상 중 術을 강조하였으며, 韓의 昭侯밑에서 재상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史記列傳권63老子韓非列傳>
▶ 術: 法家의 형명법술의 학문.

世家45-韓世家(한세가)



十年韓姬弒其君悼公
소후10(기원전349), 韓姬가 그의 군주 悼公을 시해하였다.

十一年昭侯如秦
소후11(기원전348), 소후가 에 갔다.

二十二年申不害死
소후22(기원전337), 신불해가 죽었다.

二十四年秦來拔我宜陽
소후24(기원전335), 이 공격하여  宜陽을 함락하였다.

▶ 悼公: 韓의 군주에는 悼公이 없다. 일설에는 멸망한 秦의 靜公이라고도 한다.
▶ 如: 가다.


二十五年作高門
소후25(기원전334), 가뭄이 들었는데 高門을 짓기 시작하였다.

屈宜臼曰
昭侯不出此門
何也
不時
吾所謂時者非時日也人固有利不利時
昭侯嘗利矣不作高門
往年秦拔宜陽今年旱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而顧益奢此謂時絀舉贏』。」
屈宜臼가 말하였다.
소후는 이 문을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소위 때라는 것은 時日이 아니니, 사람에게는 본디 이로운 때와 이롭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소후께서 일찍이 이로웠지만 고문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이 의양을 함락시켰고, 올해는 가뭄이 들었는데 소후가 이러한 때에 백성을 구휼하는 급한 일을 돌보지 않고 도리어 더욱 사치하니, 이것이 이른바
나라의 형편이 좋지 않은데도 사치한 일을 벌인다.’라는 것입니다.”

二十六年高門成昭侯卒果不出此門
소후26(기원전333), 고문이 완성되었는데 소후가 죽으니 과연 그 문을 나가지 못하였다.

子宣惠王立
아들 宣惠王이 즉위하였다.

▶ 高門: 높고 큰 성문.
▶ 屈宜臼: 楚 大夫. 그 당시 韓에 있었다.
▶ 卹: 恤. 구제하다.
▶ 顧: 도리어.
▶ 時絀舉贏: 시국의 상황이 쇠퇴하였는데 사치한 일을 벌이는 것을 말한다. 絀은 부족하다. 赢은 남다.
▶ 宣惠王: 韓宣惠王. 韓威侯, 韓宣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康이며 韓昭侯의 아들이다. 기원전323년 정식으로 왕을 칭하였다.



宣惠王五年張儀相秦
선혜왕5(기원전328), 張儀 의 재상이 되었다.

八年魏敗我將韓舉
선혜왕8(기원전325),  의 장수 韓擧를 패퇴시켰다.

十一年君號為王
선혜왕11(기원전322), 君號 이라 칭하였다.

與趙會區鼠
 區鼠에서 회맹하였다.

十四秦伐敗我鄢
선혜왕14(기원전319),   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 宣惠王: 韓宣惠王. 韓威侯, 韓宣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康이며 韓昭侯의 아들이다. 기원전323년 정식으로 왕을 칭하였다.
▶ 張儀: 전국시대 魏의 모사. 蘇秦의 주선으로 秦 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韓魏趙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秦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十六年秦敗我修魚虜得韓將鯁申差於濁澤
선혜왕16(기원전317),   脩魚에서 물리치고, 탁택에서 의 장수  申差를 포로로 잡았다.

韓氏急公仲謂韓王曰
與國非可恃也
今秦之欲伐楚久矣王不如因張儀為和於秦賂以一名都具甲與之南伐楚此以一易二之計也。」
이 위급해지니 公仲 왕에게 말하였다.
동맹국도 믿을 바가 아닙니다.
지금  를 공격하려고 한 지 오래되었으니, 왕께서는 張儀를 통해서 과 화친하고 이름난 성 하나를 뇌물로 주고, 武備하여 과 함께 남쪽으로 를 공격함이 나를 터이니, 이것이 하나를 둘로 바꾸는 계략입니다.

韓王曰
。」
한왕이 말하였다.
좋소.

乃警公仲之行將西購於秦
공중에게 행동을 경계토록 하고 서쪽으로 과 강화하려 하였다.

▶ 濁澤: 韓 땅. 지금의 河南省 長葛縣서쪽.
▶ 公仲: 韓公叔. 韓의 재상 公仲侈.
▶ 與國: 동맹국.
▶ 恃: 믿다. 의지하다.
▶ 具甲: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다.
▶ 警: 경계하다.
▶ 購: 강화하다. 화친하다.

楚王聞之大恐,召陳軫告之。
초왕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며 陳軫을 불러 알려주었다.

陳軫曰:
진진이 말하였다.

「秦之欲伐楚久矣,今又得韓之名都一而具甲,秦韓并兵而伐楚,此秦所禱祀而求也。
 를 공격하려 한 지 오래이니, 지금 또 의 이름난 성 하나를 얻고 軍備하여  과 병력을 합쳐 를 공격함은 이 간절히 바라던 바입니다.

今已得之矣,楚國必伐矣。
지금 그 기회를 얻었으니 를 틀림없이 공격할 터입니다.

王聽臣為之警四境之內,起師言救韓,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使信王之救己也。
왕께서는 신의 의견대로 사방 국경에 경계령을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을 구원한다고 말씀하시어 전차를 도로에 가득 차게 하고, 믿을 만한 사신을 보내시되 많은 수레와 넉넉한 예물을 딸려 보내 왕께서 자신들을 구원한다고 믿게 하십시오.

▶ 陳軫: 춘추시대 陳의 후손. 뛰어난 유세객으로 처음 秦을 섬겼는데, 당시 秦의 사자로 齊에 왔다가 昭陽을 軍中에서 만나 담판하였다. 뒤에 楚에서 벼슬하여 재상이 되었으며 潁川侯에 봉해졌다.
▶ 禱祀: 소원이 있어 신께 제사 드리다.
▶ 四境之内: 국내. 사방 변경.
▶ 幣: 예물.

縱韓不能聽我,韓必德王也,必不為鴈行以來,是秦韓不和也,兵雖至,楚不大病也。
이 우리 말을 따르지 않더라도 은 틀림없이 왕의 은덕에 감사할 터이며, 절대로 과 합심하여 공격하지는 않을 터이니, 이것은  의 불화이므로 軍隊가 쳐들어오더라도 에 큰 우환이 되지 않겠습니다.

為能聽我絕和於秦,秦必大怒,以厚怨韓。
이 우리 말을 듣고 과 단교한다면 은 분명 크게 노하여 에 대한 원망이 깊어질 터입니다.

韓之南交楚,必輕秦;
輕秦,其應秦必不敬:
是因秦、韓之兵而免楚國之患也。」
이 남으로 와 친교하면 분명 을 가벼이 여길 터이고,
을 가벼이 여기면 에 대한 응대도 불경스러울 터입니다.
이것이   軍士를 이용하여 의 우환을 면하는 방법입니다.”

▶ 雁行: 기러기 줄처럼 두 軍隊가 열을 이루어 진격함.

 

楚王曰:
「善。」
왕이 말하였다.
좋소.”

乃警四境之內,興師言救韓。
이에 나라 안에 경계령을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을 구원한다고 발표하였다.

命戰車滿道路,發信臣,多其車,重其幣。
전차를 도로에 가득 채우도록 명령하고 믿을 만한 신하를 보내면서 많은 수레와 귀중한 예물을 딸려 보냈다.

謂韓王曰:
「不穀國雖小,已悉發之矣。
願大國遂肆志於秦,不穀將以楚殉韓。」
초왕이 왕에게 말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작지만 이미 모든 것을 동원했습니다.
원컨대 대국에서 에 대해 하시는 대로,  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韓王聞之大說,乃止公仲之行。
한왕이 듣고 크게 기뻐하며 으로 보내려던 公仲의 행차를 중지시켰다.

▶ 不穀: 제후가 자신을 칭하는 겸손한 말. 나.
▶ 肆志: 뜻대로 하다. 생각대로 하다.

公仲曰:
公仲이 말하였다.

「不可。
안 됩니다.

夫以實伐我者秦也,以虛名救我者楚也。
실제로 우리를 공격할 자는 이고, 빈말로 우리를 구하겠다는 자는 입니다.

王恃楚之虛名,而輕絕彊秦之敵,王必為天下大笑。
왕께서 의 빈말만 믿고, 경솔하게 이라는 강적과의 관계를 끊으면 왕께서는 분명 천하의 큰 웃음거리가 될 터입니다.

且楚韓非兄弟之國也,又非素約而謀伐秦也。
또한  은 형제의 나라도 아니며, 또 평소에 약속하여 을 공격하기로 모의한 것도 아닙니다.

已有伐形,因發兵言救韓,此必陳軫之謀也。
공격의 형세가 있으니까 가 군사를 일으켜 을 구원하겠다고 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陳軫의 계략일 터입니다.

且王已使人報於秦矣,今不行,是欺秦也。
또 왕께서 사람을 보내어 에 알려놓고, 이제 와서 행하지 않음은 을 속이는 것입니다.

夫輕欺彊秦而信楚之謀臣,恐王必悔之。」
무릇 강한 을 경솔히 속이고  謀臣을 믿으니, 왕께서는 필시 후회하실 터입니다.”

▶ 已有伐形: 韓이 秦과 연합하여 楚를 공격하려는 형세.

韓王不聽,遂絕於秦。
왕은 듣지 않고 끝내  絶好하였다.

秦因大怒,益甲伐韓,大戰,楚救不至韓。
은 이 때문에 대노하여 軍士를 늘려 을 공격하여 크게 싸웠으나 의 구원병은 에 오지 않았다.

十九年,大破我岸門。
선혜왕19(기원전314),  岸門에서 을 대파하였다.

太子倉質於秦以和。
태자  에 인질로 보내 강화하였다.

▶ 益甲: 병력을 증가시키다. 甲은 軍.

 

 

二十一年,與秦共攻楚,敗楚將屈丐,斬首八萬於丹陽。
선혜왕21(기원전312), 과 함께 를 공격하여 의 장수 屈丐를 패퇴시키고, 丹陽에서 8만 명의 목을 베었다.

是歲,宣惠王卒,太子倉立,是為襄王。
이 해에 선혜왕이 죽고 태자 이 즉위하여 襄王이 되었다.

襄王四年,與秦武王會臨秦。
양왕4(기원전308), 秦武王 臨秦에서 회맹하였다.

其秋,秦使甘茂攻我宜陽。
그해 가을,  甘茂에게  宜陽을 공격하게 하였다.

五年,秦拔我宜陽,斬首六萬。
양왕5(기원전307),  의 의양을 함락하고 6만을 참수하였다.

秦武王卒。
秦武王이 죽었다.

六年,秦復與我武遂。
양왕6(기원전306),   武遂를 돌려주었다.

九年,秦復取我武遂。
양왕9(기원전303), 이 다시 의 무수를 빼앗았다.

十年,太子嬰朝秦而歸。
양왕10(기원전302), 태자  에 조회하고 돌아왔다.

十一年,秦伐我,取穰。
양왕11(기원전301),  을 쳐서 을 빼앗았다.

與秦伐楚,敗楚將唐眛。
 를 쳐서 의 장수 唐昧를 패퇴시켰다.

▶ 襄王: 韓襄王. 전국시대 韓의 군주로 이름은 倉이고, 宣惠王의 아들이다. 16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襄이다.
▶ 甘茂: 전국시대 秦의 정치가로 秦惠王에 인정받아 군장이 되고 이어서 武王, 昭王의 重臣으로서 정권을 좌우하고 諸國평정에 성공했으나 참소를 입어 실각하였다. <사기 권71. 樗里子甘茂列傳>
▶ 唐眛: 전국시대 楚의 장수. 소양왕8년(기원전299년), 장군 羋戎에게 楚를 공격하게 하여 新市를 빼앗았다. 齊는 章子를, 魏는 公孫喜를, 韓은 暴鳶을 보내 함께 楚의 方城을 공격해 唐眛를 사로잡았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十二年,太子嬰死。
양왕12(기원전300), 태자 이 죽었다.

公子咎、公子蟣蝨爭為太子。
공자 와 공자 蟣蝨이 태자가 되려고 다투었다.

時蟣蝨質於楚。
이때 기슬은 에 인질로 있었다.

蘇代謂韓咎曰:
「蟣蝨亡在楚,楚王欲內之甚。
今楚兵十餘萬在方城之外,公何不令楚王筑萬室之都雍氏之旁,韓必起兵以救之,公必將矣。
公因以韓楚之兵奉蟣蝨而內之,其聽公必矣,必以楚韓封公也。」
蘇代 韓咎에게 말하였다.
기슬이 에 망명 중인데, 초회왕은 그를 귀국시켜 복위해 주려고 매우 애씁니다.
지금 의 병사 10여만 명이 方城 밖에 주둔하고 있는데, 공은 어찌 초왕에게 雍氏땅 옆에다 만호의 도성을 세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은 분명 군사를 일으켜 막을 터이고 그대는 분명 장수가 될 터입니다.
그 틈에 그대는   軍士로 기슬을 받들어 맞아들이면, 그는 분명 그대의 말을 들을 터이고,  도 분명 그대에게 봉토를 줄 터입니다.”

韓咎從其計。
한구가 그 계략을 따랐다.

▶ 公子咎: 韓咎. 韓 公子咎.
▶ 蟣蝨: 韓의 태자로 楚에 망명하고 있었다. 蟣虱, 蟣瑟로도 쓴다.
▶ 方城: 楚와 韓 국경 근처의 요새.
▶ 内: 받아들이다. 귀국시키다.
▶ 雍氏: 韓 땅.

 

 

楚圍雍氏,韓求救於秦。
 雍氏를 포위하자  에 구원을 청하였다.

秦未為發,使公孫昧入韓。
이 출병하지 않고 公孫昧 에 보냈다.

公仲曰:
「子以秦為且救韓乎?」
공중이 말하였다.
그대는 장차  을 구원한다고 여깁니까?”

對曰:
「秦王之言曰
『請道南鄭、藍田,出兵於楚以待公』,
殆不合矣。」
공손매가 대답하였다.
진왕께서 말씀하시기를
南鄭 藍田의 길을 거쳐 로 출병하여 그대의 軍士를 기다리겠소.’
라고 하셨으나 아마 합류할 것 같지 않습니다.

▶ 公孫昧: 秦 신하.
▶ 公仲: 韓公叔. 韓 재상 公仲侈.
▶ 南鄭‧藍田: 지금의 陝西省의 南鄭縣과 藍田縣.
▶ 道: 거치다. 통하다.

公仲曰:
「子以為果乎?」
공중이 물었다.
그대는 과연 그럴 것이라고 봅니까?”

對曰:
공손매가 대답하였다.

「秦王必祖張儀之故智。
 왕은 틀림없이 장의의 예전 지략을 본받을 터입니다.

楚威王攻梁也,張儀謂秦王曰:
『與楚攻魏,魏折而入於楚,韓固其與國也,是秦孤也。
不如出兵以到之,魏楚大戰,秦取西河之外以歸。』
楚威王 (: )를 공격함에 장의가 왕에게 말하기를,
' 와 함께 를 공격하면 는 좌절하여 에게 귀속되고, 은 원래부터 와 동맹국이니 이 고립됩니다.
출병하여 도착하되  가 크게 싸울 때 은 서하 바깥을 탈취하여 돌아오느니만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今其狀陽言與韓,其實陰善楚。
지금 상황은 겉으로는 을 구원한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실은 몰래 와 친선하려는 것입니다.

▶ 祖: 본받다.
▶ 故智: 과거에 사용했던 계략.
▶ 梁: 魏가 大梁으로 천도후 梁나라라고 칭하였다.
▶ 折: 좌절하다. 실패하다.
▶ 到: 속이다. 기만하다.
▶ 西河: 魏의 郡.
▶ 陽言: 겉으로 하는 거짓말.

公待秦而到,必輕與楚戰。
그대는 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 틀림없이 경솔하게 와 전투를 벌일 터입니다.

楚陰得秦之不用也,必易與公相支也。
  을 돕지 않음을 은밀히 알게 되어, 틀림없이 쉽게 싸움을 지속할 터입니다.

公戰而勝楚,遂與公乘楚,施三川而歸。
그대가 싸워 에 승리하면 은 그대와 함께 를 압도하며 三川지방에 시위를 하고 돌아갈 터입니다.

公戰不勝楚,楚塞三川守之,公不能救也。
그대가 싸워 에 승리하지 못하면 는 삼천을 가로막고 지킬 터이니 그대를 구원하지 못할 터입니다.

竊為公患之。
그대를 위해 이런 점을 걱정해봅니다.

司馬庚三反於郢,甘茂與昭魚遇於商於,其言收璽,實類有約也。」
司馬庚이 세 차례나  을 다녀왔고, 감무와 昭魚  에서 만나 말로는  軍符를 거둔다고 했지만 실은 어떤 밀약이 있었을 터입니다.

▶ 相支: 서로 버티다.
▶ 乘: 능가하다. 앞도하다.
▶ 三川: 韓의 땅으로 黃河‧洛水‧伊水유역
▶ 施: 과시하다.
▶ 塞: 가로막다.
▶ 司馬庚: 秦의 大夫.
▶ 璽: 장군의 도장.

 

公仲恐,曰:
「然則柰何?」
공중이 두려워하며 물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소?”

曰:
「公必先韓而後秦,先身而後張儀。
公不如亟以國合於齊楚,齊楚必委國於公。
公之所惡者張儀也,其實猶不無秦也。」
공손매가 말하였다.
그대는 반드시 을 먼저 생각하고 을 뒤로 하시고, 자신을 먼저하고 장의를 뒤로 하십시오.
그대는 서둘러 , 와 연합함이 나으며,  는 분명 그대에게 나라를 맡길 터입니다.
그대가 미워하는 것은 장의이지, 사실은 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於是楚解雍氏圍。
이에 는 옹지의 포위를 풀었다.

▶ 無秦: 秦을 무시하다.


이 내용은 전국책 韓策에 기록되어 있다.

蘇代又謂秦太后弟羋戎曰:
소대는 또 秦太后의 동생 羋戎에게 말하였다.

「公叔伯嬰恐秦楚之內蟣蝨也,公何不為韓求質子於楚?
公叔 伯嬰  가 기슬을 귀국시킴을 두려워하는데, 그대는 어찌 을 위해 에게 인질을 돌려보내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楚王聽入質子於韓,則公叔伯嬰知秦楚之不以蟣蝨為事,必以韓合於秦楚。
초왕이 인질을 로 돌려보내 주면, 공숙과 백영은   蟣蝨의 일에 관심이 없음을 알게 되어, 으로써는 틀림없이 , 와 연합할 터입니다.

秦楚挾韓以窘魏,魏氏不敢合於齊,是齊孤也。
  을 끼고 를 몰아붙이면 는 감히 와 연합할 수 없게 되어 는 고립됩니다.

公又為秦求質子於楚,楚不聽,怨結於韓。
그대가 또 을 위해 에 있는 인질을 요구하는데 가 들어주지 않으면 과 원한을 맺게 됩니다.

韓挾齊魏以圍楚,楚必重公。
  를 끼고 를 포위하면 는 분명 그대를 중시할 터입니다.

公挾秦楚之重以積德於韓,公叔伯嬰必以國待公。」
그대가  가 중시함을 끼고 에 은덕를 쌓으면 공숙과 백영은 필시 나라 일을 맡기며 대우할 터입니다.”

於是蟣蝨竟不得歸韓。
이에 기슬은 끝내 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韓立咎為太子。
 를 태자로 삼았다.

齊、魏王來。
왕과 왕이 왔다.

▶ 秦太后弟羋戎: 전국책 한책에는 新城君으로 기록하고 있다.
▶ 公叔: 韓의 재상으로 楚에 망명 중인 기슬을 죽이려 하였다.
▶ 伯嬰: 태자 嬰. 한양왕의 아들.
▶ 蟣蝨: 韓의 태자였으나 楚에 망명하고 있었다. 蟣虱, 蟣瑟로도 쓴다.
▶ 質子於楚: 楚에 있는 인질. 즉 蟣蝨을 말한다.
▶ 公子咎: 韓咎. 韓 公子咎.



十四年,與齊、魏王共擊秦,至函谷而軍焉。
양왕14(기원전298),  · 의 왕과 함께 을 공격하여 함곡관에 이르러 주둔하였다.

十六年,秦與我河外及武遂。
양왕16(기원전296),   河外와 무수를 돌려주었다.

襄王卒,太子咎立,是為釐王。
양왕이 죽고 태자 가 즉위하니 그가 釐王이다.

▶ 軍: 주둔하다.
▶ 釐王: 韓釐王. 전국시대 韓의 군주로 이름은 咎이고, 襄王의 아들이다. 당시 秦이 강대하여 여러 차례 韓을 침략했는데, 韓 영토는 날마다 깎여나갔고 병사의 손실도 날마다 커져 갔다. 23년 동안 재위하였다.

 

釐王三年,使公孫喜率周、魏攻秦。
이왕3(기원전293), 公孫喜에게 주나라와  軍士를 이끌고 을 공격하게 하였다.

秦敗我二十四萬,虜喜伊闕。
 의 군사 24만 명을 패퇴시키고 伊闕에서 공손희를 포로로 잡았다.

五年,秦拔我宛。
이왕5(기원전291),   宛城을 함락하였다.

六年,與秦武遂地二百里。
이왕6(기원전290), 에 무수 땅 2백 리를 주었다.

十年,秦敗我師于夏山。
이왕10(기원전286),   軍士 夏山에서 패퇴시켰다.

十二年,與秦昭王會西周而佐秦攻齊。
이왕12(기원전284), 秦昭王 西周에서 회맹하고 을 도와 를 공격하였다.

齊敗,湣王出亡。
는 패했고, 湣王은 도망쳤다.

十四年,與秦會兩周閒。
이왕14(기원전282), 과 함께 東周 西周 사이에서 회맹하였다.

二十一年,使暴捐救魏,為秦所敗,捐走開封。
이왕21(기원전275), 暴鳶에게 를 구원하게 했으나 에 패하여 폭연은 開封으로 도망쳤다.

▶ 釐王: 韓釐王. 전국시대 韓의 군주로 이름은 咎이고, 襄王의 아들이다. 당시 秦이 강대하여 여러 차례 韓을 침략했는데, 韓 영토는 날마다 깎여나갔고 병사의 손실도 날마다 커져 갔다. 23년 동안 재위하였다.
▶ 公孫喜: 韓의 장수.
▶ 秦敗我二十四萬: 진소양왕14년(기원전293년), 左更 白起가 韓과 魏를 伊闕에서 공격하여 24만 명을 참수하고 公孫喜를 포로로 잡았으며, 다섯 개 성을 점령하였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兩周: 소제후국이 된 동주와 서주. 전국시대에 周나라의 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東西로 분열되었다.
▶ 暴鳶: 暴烝이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韓의 명장.

 

 

二十三年,趙、魏攻我華陽。
이왕23(기원전273),    華陽을 공격하였다.

韓告急於秦,秦不救。
 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은 구원하지 않았다.

韓相國謂陳筮曰:
「事急,願公雖病,為一宿之行。」
의 상국이 陳筮에게 말하였다.
사태가 급박하니, 그대가 비록 병중이나 밤을 새워서 에 다녀오십시오.”

陳筮見穰侯。
진서가 穰侯를 만났다.

穰侯曰:
「事急乎?
故使公來。」
양후가 말하였다.
사태가 급한 모양이죠?
그래서 공을 보냈군요.”

陳筮曰:
「未急也。」
진서가 대답하였다.
아직 급하지 않습니다.”

穰侯怒曰:
「是可以為公之主使乎?
夫冠蓋相望,告敝邑甚急,公來言未急,何也?」
양후가 성을 내며 말하였다.
공이 그러고도 군주의 사신 노릇을 할 수 있겠소?
사신들이 끝없이 오가며 저희나라가 아주 급하다고 알려 놓고, 공이 와서는 급하지 않다고 하니 왜 그렇소?”

▶ 穰侯: 魏冉. 전국시대 秦 大臣이며 秦昭襄王의 외숙이다. 惠王 때에 관직을 맡아 집정하였다. 昭襄王이 즉위하자, 그는 장군이 되었으며 소양왕16년, 수촉이 면직되자 다시 위염을 승상으로 삼고, 위염을 穰에 봉한 다음 다시 陶를 더 봉해 穰侯라 불렀다. <사기 권72. 穰侯列傳>
▶ 冠蓋相望: 사신들이 길에서 끊임없이 왕래하다. 冠蓋는 관모와 수레 덮개.

陳筮曰:
「彼韓急則將變而佗從,以未急,故復來耳。」
진서가 말하였다.
저희 이 위급하였다면 마음을 바꾸어 다른 나라에 의지하였을 것이나, 위급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

穰侯曰:
「公無見王,請今發兵救韓。」
양후가 말하였다.
공은 왕을 뵐 필요가 없소, 지금 내가 軍士를 일으켜 을 구원하겠소.”

八日而至,敗趙、魏於華陽之下。
 軍隊 8일 만에 와서  를 화양에서 패퇴시켰다.

是歲,釐王卒,子桓惠王立。
이 해에 희왕이 죽고 아들 桓惠王이 즉위하였다.

▶ 佗: 他와 통용된다. 다른.
▶ 桓惠王: 韓桓惠王. 한이왕의 아들로 이름은 然이다. 환혜왕 때 장평대전이 일어나 趙가 몰락하였다.



桓惠王元年,伐燕。
환혜왕원년(기원전272) 을 공격하였다.

九年,秦拔我陘,城汾旁。
환혜왕9(기원전263),   을 함락하고 汾水 가에 성을 쌓았다.

十年,秦擊我於太行,我上黨郡守以上黨郡降趙。
환혜왕10(기원전262),   太行山에서 공격하니  上黨郡守가 상당군을 바치며 에 투항하였다.

十四年,秦拔趙上黨,殺馬服子卒四十餘萬於長平。
환혜왕14(기원전258), 이 상당을 빼앗고, 長平에서 馬服君의 아들 조괄의 병졸 40만여 명을 생매장하였다.

十七年,秦拔我陽城、負黍。
환혜왕17(기원전255),  의 양성과 부서를 함락하였다.

二十二年,秦昭王卒。
환혜왕22(기원전251), 진소왕이 죽었다.

二十四年,秦拔我城皋、滎陽。
환혜왕24(기원전249),   城皐 滎陽을 함락하였다.

二十六年,秦悉拔我上黨。
환혜왕26(기원전247),  의 상당군을 모두 차지하였다.

二十九年,秦拔我十三城。
환혜왕29(기원전244),   13개 성을 함락하였다.

▶ 馬服子: 마복군 趙奢의 아들 趙括. 趙奢는 전국시대 趙의 관료이자 장군으로 趙 말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명장으로 손꼽힌다. 馬服君의 칭호를 받았다.
▶ 長平: 趙 上黨郡의 읍. 長平大戰은 기원전262년에서 기원전260년에 걸쳐 秦과 趙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다. 秦이 長平에서 趙의 40만 대군을 패퇴시켰다. 중국의 전국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趙의 몰락을 가져왔다.

 

三十四年,桓惠王卒,子王安立。
환혜왕34(기원전239), 환혜왕이 죽고 아들 王安이 즉위하였다.

王安五年,秦攻韓,韓急,使韓非使秦,秦留非,因殺之。
한왕안5(기원전234),  을 공격하자 이 급해져 韓非 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이 한비를 억류하였다가 죽였다.

▶ 韓非: 韓非子. 전국시대 말기 韓 출신이며 法家의 사상을 집대성한 정치 사상가이다. 한비자는 法治主義를 주창한 韓非와 그 일파의 論著이다. 한비는 말더듬이라 달변가는 아니었지만 논리 정연한 글 솜씨에 진왕이 감탄하였으나 李斯와 姚賈가 한비자를 질투하여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어 독살하였다.
[史記列傳]권63老子韓非列傳

 

九年,秦虜王安,盡入其地,為潁州郡。
한왕안9(기원전230), 이 한왕 안을 포로로 잡고 의 땅을 전부 에 귀속시켜 穎川郡으로 삼았다.

韓遂亡。
이 마침내 멸망하였다.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韓厥之感秦景公,紹趙孤之子武,以成程嬰、公孫杵臼之義,此天下之陰德也。
韓厥 秦景公을 감동시켜 조씨 孤兒 趙武로 하여금 조씨의 대를 잇게 함으로써 程嬰 公孫杵臼의 의로움이 성취되었으니 이는 천하의 음덕이다.

韓氏之功,於秦未睹其大者也。
한씨의 공업으로 秦에 대하여는 큰 것을 보지 못한다.

然與趙、魏終為諸侯十餘世,宜乎哉!
그러나 , 와 함께 제후로서 10여 대를 이어간 것은 마땅하도다!”

▶ 韓厥: 춘추시대 晉 사람으로 이름은 厥이며 시호가 獻이어서 韓獻子 또는 獻子로도 불린다. 韓萬의 玄孫이고, 韓起의 아버지다. 춘추시대 晉의 卿大夫에 올랐다. 齊를 공격한 공으로 新中軍將이 되었고, 都岸賈가 趙氏를 멸할 때 살아남은 趙朔의 아들 趙武를 도와 조씨의 田邑을 되찾게 하였다.
[史記世家]권45. 韓世家 (01/06 <韓의 선조>
▶ 紹: 잇다. 계승하다.
▶ 程嬰: 秦의 재상인 趙朔의 친구.
▶ 公孫杵臼: 趙朔의 門客.
▶ 趙孤之子武: 趙氏孤兒趙武. 趙文字 또는 趙孟으로도 불린다. 趙朔의 아들이다. 秦景公때 屠岸賈가 조씨 집안을 誅滅할 때 조삭의 아내 莊姬가 유복자로 낳았다. 程嬰과 公孫杵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고 어머니 장희를 따라 公宮에서 양육되었다. 나중에 조씨의 後嗣로 세워졌다. 秦悼公이 즉위하자 卿에 임명되었다. 진도공10년 國政을 장악했고, 12년 楚의 屈建, 子木과 함께 終戰의 회합을 주최하였다.
▶ 陰德: 남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숨은 德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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