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篇은 30世家 중 열세 번째 편으로 춘추전국시대 趙의 흥망과정을 기록한 내용이다.
趙는 춘추시대 晉의 귀족 가문의 하나였으며 기원전5세기에 이르러 韓씨·魏씨와 함께 三晉이라고 일컬어지며 晉을 3분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기원전403년에 제후국으로서 공인되었다.
趙의 전성기는 武靈王시대로 周나라보다 강력해졌고, 기마전법을 채용하고 무력적 정복을 거듭하여 북변에 도읍을 설치하였다. 아들 惠文王시대에 이르자 秦의 침공이 격심해져 도읍을 晉陽에서 邯鄲으로 옮겼다. 기원전228년 秦軍에게 점령되고 망명한 왕자 趙嘉가 代로 쫓겨가 代에서 왕위에 올랐으나 시황제의 침공으로 기원전222년에 멸망하였다.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명마 驥와 騄耳를 周목왕에게 바친 造父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趙夙은 晉獻公을 섬겼고, 조숙의 아들 趙衰가 유업을 계승하였다. 조최는 晉文公을 覇者의 지위에 오르게 하여 마침내 晉의 공신이 되었다. 趙襄子는 知伯에게 곤욕을 치른 뒤 지백을 사로잡았다. 主父 武靈王은 沙丘宮에 산채로 갇혀 참새를 잡아 배고픔을 때우다 굶어죽었다. 趙王 遷은 편벽되고 음탕하여 훌륭한 장수를 배척하였다. 趙鞅이 周왕실의 난을 공격한 공을 기리며 제13편 ‘趙世家’를 지었다.”
라고 하였다.
趙氏之先,與秦共祖。
趙氏의 선조는 秦과 조상을 같이한다.
至中衍,為帝大戊御。
中衍에 이르러 상나라 帝太戊의 수레를 몰았다.
其後世蜚廉有子二人,而命其一子曰惡來,事紂,為周所殺,其後為秦。
그의 후대 蜚廉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惡來라고 하여 紂王을 섬기다가 周에게 살해되었으며, 그 후손이 秦이 되었다.
惡來弟曰季勝,其後為趙。
오래의 동생은 季勝이라 했는데 그 후손이 趙가 되었다.
▶ 與秦共祖: 秦의 선조는 顓頊의 후대 손녀인 女修이며, 후손인 柏翳가 舜임금으로부터 嬴姓을 하사받았다. 또한 造父가 周목왕의 총애를 받아 趙城을 봉읍받아 趙氏를 가지게 되었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中衍: 嬴姓. 伯益의 장남. 大廉의 후예. 상나라 太戊왕의 마부였다.
▶ 帝太戊: 太戊. 상나라의 제9대 왕으로 성은 子이며, 이름은 太戊, 王號는 中宗이다. 현인 伊陟을 재상으로 삼아 상나라를 부흥시켰다.
▶ 御: 수레. 마부.
▶ 蜚廉: 商나라 말기의 장군이며, 紂왕의 충신이다. 字가 處父이다. 蜚廉은 飛廉으로도 표기하며, 飛廉과 惡來는 부자지간으로 상나라 紂王을 섬긴 신하들인데 악명이 높았다.
▶ 惡來: 惡來革. 상나라의 대신이다. 비렴의 아들로 아버지와 함께 은나라 紂왕을 섬겼다. 주 무왕이 은나라를 공격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고 오래를 죽였다.
中潏이 蜚廉을 낳고 蜚廉이 惡來를 낳았다. 惡來는 힘이 장사였고 蜚廉은 달리기를 잘하였다. 부자가 재능과 용력을 갖추어 殷나라 紂王을 섬겼는데, 周武王이 紂王을 공격할 때 惡來를 함께 죽였다.
▶ 事: 섬기다.
▶ 季勝: 비렴의 아들. 오래의 동생. 계승은 孟增을 낳았다. 후손이 趙氏가 되었다.
季勝生孟增。
계승은 孟增을 낳았다.
孟增幸於周成王,是為宅皋狼。
맹증은 주成王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가 宅皐狼이다.
皋狼生衡父,衡父生造父。
皐狼은 衡父를 낳고, 형보는 造父를 낳았다.
造父幸於周繆王。
조보는 주繆王의 총애를 받았다.
造父取驥之乘匹,與桃林盜驪、驊騮、綠耳,獻之繆王。
조보는 준마가 끄는 수레를 가져다 목왕에게 바쳤는데, 桃林의 盜驪, 驊騮, 綠耳 등이었다.
繆王使造父御,西巡狩,見西王母,樂之忘歸。
목왕은 조보에게 수레를 몰게 하여 서쪽을 순시하여 西王母를 만나 즐겁게 놀다가 돌아감을 잊었다.
而徐偃王反,繆王日馳千里馬,攻徐偃王,大破之。
이때 徐偃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목왕은 천리마로 하루를 달려와 서언왕을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乃賜造父以趙城,由此為趙氏。
이에 조보에게 趙城을 하사하니 이로 인해 趙씨가 되었다.
▶ 孟增: 宅皋狼. 孟增이 皋狼현에 살았으므로 택고랑이라고 하였다.
▶ 幸: 총애하다.
▶ 造父: 전국시대의 뛰어난 마부로 趙氏의 조상이다. 周穆王에게 八駿馬를 바쳐 총애를 받았다. 목왕이 그에게 말을 몰게 하여 서쪽으로 巡狩가서 西王母를 만나 즐거움에 빠져 돌아올 줄 몰랐다. 그때 徐偃王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가 말을 몰아 하루에 천리를 달려 대파하였다. 이로 인해 목왕이 그에게 趙城을 봉읍하여 조씨가 되었다.
▶ 乘匹: 周나라 때에는 말 4마리가 끄는 수레를 乘, 2마리가 끌면 匹이라 하였다.
▶ 盜驪, 驊騮, 綠耳: 모두 준마의 이름. 八駿馬는 주목왕이 사랑하던 여덟 마리의 준마로 華騮, 綠耳, 赤驥, 白義, 踰輪, 渠黃, 盜驪, 山子를 말한다. 華騮는 驊騮, 綠耳는 騄駬, 盜驪는 溫驪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 周繆王: 周穆王. 주나라의 제5대 왕으로 성은 姬, 이름은 滿이다. 周소왕의 아들이다. 소왕이 楚의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자, 임시로 왕위에 즉위했고 이후 소왕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 西王母: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며, 곤륜산에 산다고 한다. 성은 楊, 이름은 回라고 한다. <목천자전>에 周목왕이 서쪽으로 가 곤륜산에 이르러 서왕모를 만나 사랑했다고 한다.
▶ 徐偃王: 西周때 徐나라의 國君. 동이족의 마지막을 전성기를 이끈 왕이라고도 한다.
自造父已下六世至奄父,曰公仲,周宣王時伐戎,為御。
조보로부터 6대 이후 奄父는 公仲이라고 했는데, 주宣王이 戎을 공격할 때 수레를 몰았다.
及千畝戰,奄父脫宣王。
千畝전투에서 엄보는 선왕을 탈출시켰다.
奄父生叔帶。
엄보는 叔帶를 낳았다.
叔帶之時,周幽王無道,去周如晉,事晉文侯,始建趙氏于晉國。
숙대 때 주幽王이 無道하자 주나라를 떠나 晉에 가서 文侯를 섬기니 처음으로 晉에서 趙씨 가문을 세웠다.
▶ 戎: 고대 중국의 서부지역의 소수민족. 여기서는 晉 남쪽의 姜戎을 말한다.
▶ 叔帶: 嬴姓, 趙氏. 조씨의 시조인 造父의 7대손.
自叔帶以下,趙宗益興,五世而生[至]趙夙。
叔帶 이래 조씨 종족은 더욱 흥성하여 5대가 지나 趙夙에 이르렀다.
趙夙,晉獻公之十六年伐霍、魏、耿,而趙夙為將伐霍。
조숙은 晉獻公 16년(기원전661년)에 霍, 魏, 耿을 공격할 때 장수가 되어 霍을 공격하였다.
霍公求奔齊。
霍公求는 齊로 달아났다.
晉大旱,卜之,曰
「霍太山為祟」。
晉에 크게 가뭄이 들어 점을 치자
“霍太山의 신이 재앙을 내린다.”
라고 하였다.
使趙夙召霍君於齊,復之,以奉霍太山之祀,晉復穰。
조숙으로 하여금 齊에 있는 霍君을 불러들여 복위시키고 곽태산의 제사를 드리니 晉에 다시 풍년이 들었다.
晉獻公賜趙夙耿。
晉獻公이 조숙에게 耿의 땅을 하사하였다.
▶ 趙夙: 晉獻公 16년에 霍, 魏, 耿를 공격할 때 장수가 되어 霍를 공격하였다. 趙夙이 헌공의 병거를 몰고, 畢萬은 호위를 담당하여 虢, 魏, 耿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 霍, 魏, 耿: 당시 제후국의 이름.
▶ 霍太山: 蜚廉은 紂王의 石棺을 만들기 위하여 북방에 있다가 북방에서 돌아왔으나 紂王이 이미 죽임을 당하여 보고할 사람이 없자 霍太山에 제단을 쌓고 자기가 그동안 하고 온 일을 고하였다. 蜚廉이 죽자 그를 霍太山에 장사지냈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祟: 빌미. 귀신이 사람에게 내리는 재앙.
夙生共孟,當魯閔公之元年也。
조숙이 共孟을 낳으니, 魯閔公 원년(기원전661년)이었다.
共孟生趙衰,字子餘。
공맹은 趙衰를 낳았는데 자를 子餘라고 하였다.
▶ 趙衰: 孟子餘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晉 사람. 시호가 成이라 趙成으로도 불린다. 또 趙成子 또는 成季 등으로도 썼다. 公子 重耳를 따라 외국에서 19년 동안 유랑하면서 온갖 고생과 위험을 극복했고, 중이가 귀국해 晉文公으로 즉위함을 도왔다.
趙衰卜事晉獻公及諸公子,莫吉;
卜事公子重耳,吉,即事重耳。
趙衰가 晉獻公과 공자들 중 누구를 섬길지 점쳤으나 길하지 않더니, 공자 重耳를 섬김을 점쳤더니 길하다고 나와 곧 중이를 섬겼다.
重耳以驪姬之亂亡奔翟,趙衰從。
중이는 驪姬의 난 때문에 翟으로 도망쳤는데 조최가 따랐다.
翟伐廧咎如,得二女,翟以其少女妻重耳,長女妻趙衰而生盾。
翟이 嗇咎如를 공격하여 두 여자를 얻었는데 翟이 어린 여자를 중이의 처로 삼고고, 장녀를 조최의 처로 삼게 하였는데 趙盾을 낳았다.
▶ 趙衰: 孟子餘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晉 사람. 시호가 成이라 趙成으로도 불린다. 또 趙成子 또는 成季 등으로도 썼다. 公子 重耳를 따라 외국에서19년 동안 유랑하면서 온갖 고생과 위험을 극복했고, 중이가 귀국해 晉文公으로 즉위하자 中軍長이 되어 진문공의 패업 성취를 도왔다.
▶ 驪姬之亂: 驪姬는 춘추시대 晉獻公의 妃이다. 원래는 이민족인 驪戎군주의 딸이지만 헌공이 驪戎을 공격하였을 때 사로잡혀 동생과 함께 진헌공의 後宮이 되었다. 헌공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된 뒤 태자인 申生을 모함하여 죽이며 정치의 혼란을 가져왔다. 자신의 자식인 奚斉를 태자로 삼으려고 태자인 申生을 비롯해 重耳, 夷吾 등을 모함하여 차례로 죽이려 하였다. 결국 태자인 신생은 죽었고 아버지인 晉獻公이 자신의 두 아들인 중이와 이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면서 晉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다. <춘추좌씨전 魯僖公 4년, 기원전656년>
▶ 翟: 狄. 고대 중국의 북쪽에 있던 야만의 종족. 翟, 北狄. 貉狄을 말한다. 翟은 咎如를 공격하고 그의 두 딸을 포로로 잡아왔다.
▶ 咎如: 廧咎如. 赤狄의 別種으로 隗姓이다.
▶ 得二女: 翟은 叔隗와 季隗를 포로로 잡아와서 공자 중이에게 바쳤다. <춘추좌씨전魯僖公23기원전637년>
▶ 趙盾(조돈: zhào dùn): 趙宣子. 趙宣盟. 이름은 盾이며,시호는 宣,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조최의 아들이다.
初,重耳在晉時,趙衰妻亦生趙同、趙括、趙嬰齊。
당초 중이가 晉에 있을 때 조최의 본처 역시 趙同, 趙括, 趙嬰齊를 낳았다.
趙衰從重耳出亡,凡十九年,得反國。
조최는 중이를 따라 망명하여 총 19년이 되자 귀국할 수 있었다.
重耳為晉文公,趙衰為原大夫,居原,任國政。
중이는 晉문공이 되고, 조최는 原의 大夫가 되어 原城에 살면서 국정을 맡았다.
文公所以反國及霸,多趙衰計策,語在晉事中。
문공이 환국하여 패자가 됨에 조최의 계책이 많았으며, 이 일은 <晉世家>에 있다.
▶ 語在晉事中: 진세가. <史記世家권39. 晉世家>
趙衰既反晉,晉之妻固要迎翟妻,而以其子盾為適嗣,晉妻三子皆下事之。
조최가 晉으로 돌아온 후, 晉의 본처가 翟의 아내를 데려오라고 한사코 요구하여, 그의 아들 조돈을 嫡嗣로 삼고 晉妻의 세 아들은 모두 조돈을 섬기게 하였다.
晉襄公之六年,而趙衰卒,謚為成季。
晉襄公 6년(기원전622년)에 조최가 죽으니, 시호는 成季였다.
▶ 要: 요구하다.
▶ 晉襄公: 춘추시대 晉의 25대 군주이다. 이름은 歡인데, 驩으로도 쓴다. 晉文公의 아들이다. 秦穆公이 軍士를 일으켜 鄭을 습격하자, 晉文公이 죽어 장례도 치르지 않은 상태에서 상복을 입은 채 출병하여 殽에서 秦軍을 공격해 秦의 장군 셋을 사로잡았다. 전쟁이 끝난 뒤 세 장군을 秦으로 돌려보냈다. 나중에 秦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7년 동안 재위하였다.
趙盾代成季任國政二年而晉襄公卒,太子夷皋年少。
조돈이 성계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은 지 2년 만에 晉양공이 죽었는데, 태자 夷皐는 나이가 어렸다.
盾為國多難,欲立襄公弟雍。
조돈은 국정에 어려움이 많다 하여 襄公의 동생 雍을 군주로 세우려 하였다.
雍時在秦,使使迎之。
옹은 이때 秦에 있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맞이하려 하였다.
太子母日夜啼泣,頓首謂趙盾曰:
「先君何罪,釋其適子而更求君?」
태자의 어머니가 낮밤으로 울며 조돈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선군께 무슨 죄가 있기에 適子를 놔두고 다른 군주를 찾는다는 말입니까?”
趙盾患之,恐其宗與大夫襲誅之,乃遂立太子,是為靈公,發兵距所迎襄公弟於秦者。
조돈이 이를 걱정하기를, 그의 종친과 대부들이 자신을 습격하여 죽일까 두려워 마침내 태자를 옹립하니 그가 靈公이며, 軍士를 보내 양공의 동생을 맞이하여 오는 秦 일행을 저지하였다.
靈公既立,趙盾益專國政。
영공이 즉위한 후 조돈은 국정을 더욱 전횡하였다.
▶ 趙盾(조돈: zhào dùn): 趙宣子. 趙宣盟. 이름은 盾이며,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趙衰의 아들이다. 襄公 7년 中軍元帥가 되어 국정을 장악하였다. 양공이 죽자 先蔑과 士會를 시켜 공자 公子 雍을 秦에서 맞으려 했는데 양공의 부인 穆嬴으로 인하여 靈公(: 이고)을 세우고 공자 옹을 세우려는 秦軍을 방어하였다. 영공이 즉위하여 음란하고 폭압을 일삼으며 간언하여도 듣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고 하자 도망하여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아직 국경을 넘지 않았을 때 조돈의 동생 趙穿이 영공을 시해하자 晉으로 돌아왔다.
▶ 夷皐: 晉靈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皐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 雍: 晉襄公의 동생. 진문공의 아들.
▶ 太子母: 繆嬴. 진양공의 부인. 夷皐(: 진영공)의 어머니.
▶ 釋: 포기하다.
▶ 距: 저지하다.
靈公立十四年,益驕。
영공은 즉위하고 14년(기원전607년)에 갈수록 교만해졌다.
趙盾驟諫,靈公弗聽。
조돈이 여러 차례 간했으나 영공은 듣지 않았다.
及食熊蹯,胹不熟,殺宰人,持其尸出,趙盾見之。
언젠가는 곰발바닥 요리를 먹다가 제대로 익지 않았다고 요리사를 죽이고 그 시체를 들고 나감을 조돈이 보았다.
靈公由此懼,欲殺盾。
영공이 이 때문에 겁을 먹고 조돈을 죽이려 하였다.
盾素仁愛人,嘗所食桑下餓人反捍救盾,盾以得亡。
조돈이 평소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여,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리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준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몸을 돌려 막으며 조돈을 구원하여, 조돈이 도망갈 수 있었다.
未出境,而趙穿弒靈公而立襄公弟黑臀,是為成公。
조돈이 晉의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趙穿이 영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동생 黑臀을 세우니 그가 成公이다.
▶ 驟: 여러 차례. 자주.
▶ 胹: 삶다.
▶ 熊蹯: 곰발바닥.
▶ 宰人: 요리사.
▶ 捍: 막다. 방어하다. 이 일은 진세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趙穿: 춘추시대 晉의 대부. 趙盾의 조카이다.
▶ 成公: 晉成公. 晉文公의 아들이며 襄公의 동생으로 이름은 黑臀이다. 趙穿이 靈公을 죽이고 周나라에 인질로 있던 그를 맞아 세웠다.
趙盾復反,任國政。
조돈은 다시 돌아와 국정을 맡았다.
君子譏盾
「為正卿,亡不出境,反不討賊」,故太史書曰
「趙盾弒其君」。
군자들이 조돈을 기롱하기를,
“正卿의 신분으로 도망치다 국경을 넘지 않았고, 되돌아와서도 역적을 공격하지 않았다.”
라고 나무랐기 때문에 太史는
“조돈이 그의 군주를 시해하였다. ”
라고 썼다.
晉景公時而趙盾卒,謚為宣孟,子朔嗣。
晉景公때 조돈이 죽자 시호를 宣孟이라고 하였으며, 아들 朔이 뒤를 이었다.
▶ 故太史書曰: 晉의 太史 董狐가
“조돈이 그 국군을 시해하였다. ”
라고 적어 조정의 신하들에게 이를 보여주었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趙朔,晉景公之三年,朔為晉將下軍救鄭,與楚莊王戰河上。
趙朔은 晉경공3년(기원전597년)에 晉의 下軍을 거느리고 鄭을 구원하러 갔다가 楚莊王과 황하 가에서 싸웠다.
朔娶晉成公姊為夫人。
趙朔은 晉 성공의 누나를 부인으로 맞았다.
▶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제26대 군주로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晉景公之三年,大夫屠岸賈欲誅趙氏。
晉景公 3년(기원전597년)에 대부 屠岸賈가 조씨를 誅戮하려 하였다.
初,趙盾在時,夢見叔帶持要而哭,甚悲;已而笑,拊手且歌。
당초 조돈이 살았을 때, 꿈에서 叔帶가 허리를 잡고 매우 슬프게 곡하다가 얼마 뒤에는 웃고 박수치며 노래를 부름을 보았다.
盾卜之,兆絕而後好。
조돈이 점을 쳐보니 龜甲에 나타난 균열이 끊어졌다가 뒤에 좋아졌다.
趙史援占之,曰:
「此夢甚惡,非君之身,乃君之子,然亦君之咎。
至孫,趙將世益衰。」
趙의 사관 援이 점괘를 풀이하였다.
“이 꿈은 매우 나쁜데 그대가 아닌 그대의 아들에 미치지만, 역시 그대의 근심거리입니다.
손자에 이르면 조씨 집안이 더욱 쇠약해지겠습니다. ”
▶ 晉景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獳이다. 據라는 설도 있다. 진성공의 아들로 아버지가 楚와 강화한 陳을 공격하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출전했다가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 屠岸賈: 晉경공 시기의 간신. 暗君인 晉景公에게 부화뇌동해 온갖 아첨과 술수, 참소 등을 일삼으면서 晉 조정을 혼란과 퇴폐로 이끌었다. 기원전584년에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趙朔을 비롯해 趙氏 일문 전체를 몰살하는 일대 참극을 벌였다.
▶ 叔帶: 趙氏의 시조인 趙 造父의 7대손이다. 周幽王이 무도하자, 周나라를 떠나 晉에 들어와 文侯를 섬겨 조씨 가문을 처음 晉에 세웠다.
▶ 要: 腰와 같다. 허리.
▶ 拊: 손바닥으로 치다.
▶ 兆: 조짐. 거북의 등딱지를 불에 지져서 생기는 균열로 길흉을 점치는 일을 말한다.
▶ 史援: 이름이 援인 사관.
屠岸賈者,始有寵於靈公,及至於景公而賈為司寇,將作難,乃治靈公之賊以致趙盾,遍告諸將曰:
「盾雖不知,猶為賊首。
以臣弒君,子孫在朝,何以懲罪?
請誅之。」
도안가는 당초 晉靈公의 총애를 받았으며 진경공 때에 이르러 도안가는 司寇가 되었는데, 난을 일으키려고 함에 영공을 시해한 역적을 다스린다며 조돈을 연루시키고 장수들에게 두루 알렸다.
“조돈이 비록 몰랐지만 그래도 역적의 우두머리이오.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고도 자손이 조정에 있으니 죄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겠소?
그들을 죽이기를 청하오. ”
▶ 晉靈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夷皐이며 襄公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장성하자 사치하고 난폭해져 마구 사람을 죽였다. 조돈의 동생 趙穿에게 살해당하였다.
▶ 作難: 반란을 일으키다.
▶ 致: 연루시키다.
▶ 盾雖不知: 조천이 영공을 시해할 때 조돈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기원전607년에 晉大夫 趙穿이 靈公을 시해하였다. 영공이 趙盾을 죽이려고 하자 조돈은 달아났다. 조돈의 아우인 趙穿이 영공을 시해한 뒤에 영공의 동생 黑臀(: 成公)을 옹립하였다.
韓厥曰:
「靈公遇賊,趙盾在外,吾先君以為無罪,故不誅。
今諸君將誅其後,是非先君之意而今妄誅。
妄誅謂之亂。
臣有大事而君不聞,是無君也。」
韓厥이 말하였다.
“영공이 역적을 만났을 때 조돈은 외지에 있었으므로, 우리 선군이 무죄라고 여겨
죽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 후손을 죽이려는 함은 선군의 뜻이 아닌데도 함부로 죽이려는 것이오.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亂이라 합니다.
신하가 큰일을 행하며 군주께 보고하지 않음은 군주를 무시하는 것이오. ”
屠岸賈不聽。
도안가는 듣지 않았다.
韓厥告趙朔趣亡。
한궐이 조삭에게 급히 도망치라고 알렸다.
朔不肯,曰:
「子必不絕趙祀,朔死不恨。」
조삭은 뜻이 없어 말하였다.
“그대가 틀림없이 조씨 제사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면 이 삭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소. ”
韓厥許諾,稱疾不出。
한궐이 허락하고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賈不請而擅與諸將攻趙氏於下宮,殺趙朔、趙同、趙括、趙嬰齊,皆滅其族。
도안가는 경공에게 청하지 않고 마음대로 장수들과 下宮에서 조씨를 공격하여 趙朔, 趙同, 趙括, 趙嬰齊를 죽이고 그 일족을 모두 멸하였다.
▶ 韓厥: 춘추시대 晉의 卿이다. 韓獻子 또는 헌자라 한다. 齊를 공격한 공으로 新中軍將이 되었고, 都岸賈가 趙氏를 멸할 때 살아남은 趙朔의 아들 趙武를 도와 조씨의 田邑을 되찾게 하였다.
▶ 趣: 재촉하다. 빨리.
▶ 下宮: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당. 後宮.
▶ 趙同, 趙括, 趙嬰齊: 조최의 아들들.
趙朔妻成公姊,有遺腹,走公宮匿。
조삭의 아내는 성공의 누나로 유복자를 임신 중이었다가, 경공의 궁으로 달아나 숨었다.
趙朔客曰公孫杵臼,杵臼謂朔友人程嬰曰:
「胡不死?」
조삭의 문객인 公孫杵臼가 조삭의 친구 程嬰에게 물었다.
“어째서 아직 죽지 않았는가?”
程嬰曰:
「朔之婦有遺腹,若幸而男,吾奉之;
即女也,吾徐死耳。」
정영이 말하였다.
“조삭의 부인께서 유복자를 가진지라, 만약 다행히 사내아이를 낳으면 내가 기르고, 딸이면 내가 천천히 죽으면 그만이오. ”
居無何,而朔婦免身,生男。
얼마 뒤 조삭의 아내가 분만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屠岸賈聞之,索於宮中。
도안가가 이를 알고 궁 안을 수색하였다.
▶ 趙朔妻成公姊: 조삭의 처는 성공의 누이로 莊姬이다.
▶ 公孫杵臼: 趙朔의 門客이다.
▶ 程嬰: 晉의 재상인 趙朔의 친구.
▶ 程嬰과 公孫杵臼 두 사람은 춘추시대 晉의 義人으로 程嬰은 晉의 재상인 趙朔의 친구이며, 公孫杵臼는 조삭의 門客이다. 晉 대부 屠岸賈는 晉景公에게 온갖 아첨과 참소 등을 일삼으면서 晉 조정을 혼란과 퇴폐로 이끌었으며, 진경공3년(기원전584년)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던 趙朔을 비롯해 趙氏 일문을 몰살하는 일대 참극을 벌였다. 이 당시 조삭의 아내 莊姬가 유복자를 낳자 程嬰과 公孫杵臼가 계략을 세웠으니, 공손저구가 남의 자식을 조씨 孤兒(: 조무)로 속이고 함께 죽는 비상수단을 써서 조삭의 유복자 趙武를 구사일생으로 구출하였다. 정영이 조무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가 15년 후에 韓厥의 도움으로 조무를 조씨의 後嗣로 세우게 하였다
훗날 동진의 시인 陶淵明은 공손저구와 정영의 일을 讀史述九章에 기록하여 칭송하였다.
[陶淵明集]讀史述九章중 제4장-陶淵明
▶ 免身: 분만하다.
夫人置兒叱罅祝曰:
「趙宗滅乎,若號;即不滅,若無聲。」
부인이 아이를 바지 속에 감추고 빌었다.
“조씨 종족이 망하려면 네가 크게 울고, 망하지 않으려면 네가 소리 내지 말라.”
及索,兒竟無聲。
수색했지만 아이는 끝내 소리내지 않았다.
已脫,程嬰謂公孫杵臼曰:
「今一索不得,後必且復索之,柰何?」
위기에서 벗어나자 정영이 공손저구에게 말하였다.
“오늘 한 번 수색으로 찾지 못했지만, 훗날 틀림없이 다시 뒤질 터인데 어쩌면 좋겠소?”
公孫杵臼曰:
「立孤與死孰難?」
공손저구가 말하였다.
“고아를 기르는 것과 죽는 것 중 어느 쪽이 어렵소?”
程嬰曰:
「死易,立孤難耳。」
정영이 말하였다.
“죽는 것은 쉽지만 고아를 기르는 일은 어렵소. ”
公孫杵臼曰:
「趙氏先君遇子厚,子彊為其難者,吾為其易者,請先死。」
공손저구가 말하였다.
“조씨의 선군이 그대를 후대하였으니 그대가 어려운 일에 힘을 쓰고, 나는 쉬운 일을 맡아 먼저 죽겠소.”
乃二人謀取他人嬰兒負之,衣以文葆,匿山中。
이에 두 사람이 모의해서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져다 업고 무늬가 있는 강보를 씌우고 산속에 숨었다.
▶ 罅: 裤子. 바지.
▶ 若: 너.
▶ 文葆: 무늬가 있는 襁褓. 文은 紋과 같다. 葆는 褓와 통용된다.
程嬰出,謬謂諸將軍曰:
「嬰不肖,不能立趙孤。
誰能與我千金,吾告趙氏孤處。」
정영이 나와서 장군들에게 거짓으로 말하였다.
“정영은 불초해서 趙氏孤兒를 기를 수 없다.
누가 내게 천금을 주면 내가 조씨 고아가 있는 곳을 말하겠다. ”
諸將皆喜,許之,發師隨程嬰攻公孫杵臼。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고 군사를 보내 정영을 따라 공손저구를 공격하였다.
杵臼謬曰:
「小人哉程嬰!
昔下宮之難不能死,與我謀匿趙氏孤兒,今又賣我。
縱不能立,而忍賣之乎!」
공손저구도 거짓으로 말하였다.
“소인배 정영아!
지난날 하궁의 난리에서 죽지 않고 나와 조씨 고아를 숨기기로 해놓고는 지금 또 나를 팔아먹는구나.
아무리 기를 수 없기로서니 아이를 팔아먹는단 말인가!”
抱兒呼曰:
「天乎天乎!
趙氏孤兒何罪?
請活之,獨殺杵臼可也。」
저구가 아이를 끌어안고 외쳤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조씨 고아가 무슨 죄입니까?
그를 살리시고 이 저구만 죽이소서. ”
諸將不許,遂殺杵臼與孤兒。
장수들은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공손저구와 고아를 죽였다.
諸將以為趙氏孤兒良已死,皆喜。
장수들은 조씨 고아가 확실히 죽은 줄 알고 모두들 좋아하였다.
然趙氏真孤乃反在,程嬰卒與俱匿山中。
그러나 진짜 조씨 고아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정영이 결국 함께 산으로 들어가 숨었다.
▶ 謬: 가장하다. 속이다.
▶ 趙孤: 趙氏孤兒. 趙武
▶ 良: 확실히.
居十五年,晉景公疾,卜之,大業之後不遂者為祟。
15년 뒤에 진경공이 병들어 점을 치니 점괘에 ‘大業의 후손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한 자가 빌미가 되었다.’라 하였다.
景公問韓厥,厥知趙孤在,乃曰:
「大業之後在晉絕祀者,其趙氏乎?
夫自中衍者皆嬴姓也。
中衍人面鳥噣,降佐殷帝大戊,及周天子,皆有明德。
下及幽厲無道,而叔帶去周適晉,事先君文侯,至于成公,世有立功,未嘗絕祀。
今吾君獨滅趙宗,國人哀之,故見龜策。
唯君圖之。」
경공이 한궐에게 물으니, 그는 조씨 고아가 살아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대업의 후손으로 晉에서 제사가 끊긴 자는 조씨가 아닙니까?
中衍으로부터 그 후손들은 모두 嬴姓이었습니다.
중연은 사람의 얼굴에 새부리 입을 갖고 있었는데 그 후손은 은나라의 태무를 보좌하고 周천자까지 보좌하여 밝은 덕행이 있었습니다.
그 후대에 이르러 幽王과 厲王이 無道하자 叔帶는 주나라를 떠나 晉으로 와서 선군 문후를 섬겼고, 성공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공을 세우면서 제사가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군주에 이르러 유독 조씨 종족을 멸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를 애통해하여 龜策의 점괘에 나타난 것입니다.
군주께서 이 일을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
▶ 韓厥: 춘추시대 晉 사람. 韓獻子 또는 獻子로도 불린다. 韓萬玄의 손자고, 韓起의 아버지다. 처음에 司馬가 되어 晉楚 사이에 벌어진 邲전투에 참여하였다. 景公 11년 郤克을 따라 齊를 공격하여 齊軍士를 격파하였다. 다음 해 新中軍將이 되고, 卿에 올랐다. 屠岸賈가 권력을 휘저으면서 趙氏를 마구 죽이자 간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에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으면서 고아가 된 趙武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경공 말년에 경공에게 조무에 대해 말하여 조씨의 田邑을 회복시켰다. 晉悼公이 즉위하자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다시 諸侯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 祟: 빌미. 귀신이 사람에게 내리는 재앙.
▶ 噣: 부리.
▶ 龜策: 고대에 거북이의 등껍질과 蓍草로 점을 치는 것을 말한다. 蓍草는 가새풀로 점을 치는 데 사용한 것을 말하며 후에는 대나무를 깎아 시초 대신 점을 쳤으므로 筮竹이란 말이 생기게 되었다.
<참고>[史記列傳]권128龜策列傳
▶ 幽厲: 周나라 幽王과 厲王을 말한다. 幽王은 周宣王의 아들로 周나라12대왕이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여흥과 주색만을 탐닉하다 西周왕실을 망하게 하였다. 厲王은 주나라10대왕으로 이름은 胡이다. 재물을 탐하고 비방하는 사람을 감시하는 등 포학과 사치로 폭동이 일어나자 彘로 달아나 그곳에서 죽었다.
景公問:
「趙尚有後子孫乎?」
경공이 물었다.
“조씨 집안에 아직 후손이 남아 있는가?”
韓厥具以實告。
한궐이 빠짐없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於是景公乃與韓厥謀立趙孤兒,召而匿之宮中。
이에 경공은 한궐과 모의하여 조씨 고아를 키우기로 하고 그를 불러 궁중에 숨겼다.
諸將入問疾,景公因韓厥之眾以脅諸將而見趙孤。
장수들이 입궐하여 문병하자 경공은 한궐의 무리를 이용하여 장수들을 위협하여 조씨 고아를 만나게 하였다.
趙孤名曰武。
조씨 고아의 이름은 武였다.
諸將不得已,乃曰:
「昔下宮之難,屠岸賈為之,矯以君命,并命群臣。
非然,孰敢作難!
微君之疾,群臣固且請立趙後。
今君有命,群臣之願也。」
장수들이 어쩔 수 없어 말하였다.
“지난번 하궁의 난은 도안가가 한 짓으로, 君命이라 사칭하여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난을 일으키겠습니까!
군주의 병이 아니었으면, 신하들은 본래 조씨 후손을 세우라고 청하려던 참입니다.
지금 군주께서 명령하심이 신하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
於是召趙武、程嬰遍拜諸將,遂反與程嬰、趙武攻屠岸賈,滅其族。
이에 趙武와 정영을 불러 장수들에게 두루 절을 올리게 하니, 장수들이 마침내 돌아가서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가를 공격하여 일족을 멸하였다.
復與趙武田邑如故。
조무에게 원래의 땅과 읍을 회복시켜 주었다.
▶ 矯: 사칭하다.
▶ 微: 만약 그렇지 않다면.
▶ 趙武: 趙氏孤兒. 趙文字 또는 趙孟으로도 불린다. 趙朔의 아들이다. 晉景公 때 屠岸賈가 조씨 집안을 誅滅할 때 조삭의 아내 莊姬가 유복자로 낳았다. 程嬰과 公孫杵臼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하고 어머니 장희를 따라 公宮에서 양육되었다. 나중에 조씨의 後嗣로 세워졌다. 晉悼公이 즉위하자 卿에 임명되었다. 진도공10년 國政을 장악했고, 12년 楚의 屈建, 子木과 함께 終戰의 회합을 주최하였다. 시호는 文이다.
及趙武冠,為成人,程嬰乃辭諸大夫,謂趙武曰:
「昔下宮之難,皆能死。
我非不能死,我思立趙氏之後。
今趙武既立,為成人,復故位,我將下報趙宣孟與公孫杵臼。」
趙武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자 程嬰은 대부들과 작별하고 조무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하궁의 난리 때, 다들 따라 죽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조씨의 후손을 기를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조무가 이미 계승하고 성인이 되어 복위하였으니, 나는 지하에 가서 趙宣孟과 공손저구에게 보고하고자 합니다. ”
▶ 趙武: 趙盾의 손자이자 趙朔의 아들.
▶ 冠: 冠禮. 고대 귀족의 자제가 만20세가 되면 성년이 되었다는 표시로 관을 쓰는 의식.
▶ 程嬰: 晉의 재상인 趙朔의 친구. 정영이 조무를 데리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가 15년 후에 韓厥의 도움으로 조무를 조씨의 後嗣로 세우게 하였다
▶ 趙宣孟: 趙盾. 趙宣子. 이름은 盾이며 존칭으로 조맹 혹은 선맹이라 불리었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로 趙衰의 아들이다.
趙武啼泣頓首固請,曰:
「武願苦筋骨以報子至死,而子忍去我死乎!」
조무가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한사코 청하여 말하였다.
“이 武가 죽을 때까지 분골쇄신 보답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은 냉정하게 저를 버리고 죽으려 하십니까?”
程嬰曰:
「不可。
彼以我為能成事,故先我死;
今我不報,是以我事為不成。」
정영이 말하였다.
“안됩니다.
공손저구는 내가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겨서 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하지 않으면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여길 터입니다. ”
遂自殺。
그리고는 자살하였다.
趙武服齊衰三年,為之祭邑,春秋祠之,世世勿絕。
조무는 3년 齊衰를 입었고, 그를 위해 제사용 땅을 내어 봄가을로 제사를 드리며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 苦筋骨: 근육과 뼈를 깎는 고통.
▶ 齊衰(자최, 재최): 조금 굵은 생베로 지어, 아랫단을 좁게 접어서 꿰맨 喪服으로 五服의 하나이다.
※五服 : 초상을 당했을 때 亡者와의 혈통관계의 원근에 따라 다섯 가지로 구분되는 유교의 喪服制度. 3년 상복의 斬衰, 1년 상복의 齊衰, 9개월 상복의 大功, 5개월 상복의 小功, 3개월 상복의 緦麻를 말한다.
趙氏復位十一年,而晉厲公殺其大夫三郤。
조씨가 작위를 회복한 지 11년 후에 晉厲公이 郤氏집안의 대부 셋을 죽였다.
欒書畏及,乃遂弒其君厲公,更立襄公曾孫周,是為悼公。
欒書는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군주인 진여공을 시해하고 양공의 증손 周를 옹립하니 그가 悼公이다.
晉由此大夫稍彊。
晉은 이로부터 대부들이 점점 강해졌다.
▶ 大夫三郤: 三郤大夫.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 기원전574년 晉厲公이 교만하고 사치에 빠져 寵姬를 여럿 거느리고, 大夫들을 모두 내쫓고 총희의 형제들로 채웠으며, 총희의 오빠 胥童을 卿으로 삼고, 대부 郤錡와 郤犫, 郤至를 살해하였다. 진여공은 결국 欒書와 中行偃에게 살해당하였다.
▶ 欒書: 欒武子. 춘추시대 晉의 大夫. 欒枝의 손자다. 여공이 정치를 잘못하자 中行偃과 함께 사람을 시켜 여공을 죽이고 悼公을 옹립하였다. 시호는 武子이다.
▶ 悼公: 晉도공.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周이며 晉襄公의 증손자이다. 황음무도한 폭군 晉 厲公이 난서, 순언 등의 음모에 의해 시해되자 晉의 경대부들의 요청에 의해 본국으로 돌아와 열네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趙武續趙宗二十七年,晉平公立。
趙武가 조씨 집안을 이은 지 27년에 晉平公이 즉위하였다.
平公十二年,而趙武為正卿。
평공12년(기원전546년)에 조무는 正卿이 되었다.
十三年,吳延陵季子使於晉,曰:
「晉國之政卒歸於趙武子、韓宣子、魏獻子之後矣。」
평공13년(기원전545년)에 吳의 延陵季子가 晉에 사신으로 와서 말하였다.
“晉의 정권이 결국 趙武子, 韓宣子, 魏獻子의 후손에게 돌아가겠구나. ”
趙武死,謚為文子。
조무가 죽으니 시호를 文子라 하였다.
▶ 晉平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彪이며, 悼公의 아들이다.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고 백성들의 형편을 돌보지 않았으며, 淫樂을 즐겼다.
▶ 延陵季子: 季札. 춘추시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로 延陵에 봉해져 延陵季子라고 부른다.
▶ 趙武子: 吳의 연릉계자가 晉에 사신으로 가서 趙文子, 韓宣子, 魏獻子와 이야기를 나누고 말하였다.
“晉의 정권이 끝내 이 세 집안에게 돌아갈 터이오. ”<史記권39. 晉世家>. 晉世家에 기록되어 있듯이 조무자가 아닌 趙文子(: 趙武)가 되어야 한다.
▶ 韓宣子: 韓起. 춘추시대 晉의 大夫.
▶ 魏獻子: 魏舒. 춘추시대 晉의 大夫.
文子生景叔。
문자는 景叔을 낳았다.
景叔之時,齊景公使晏嬰於晉,晏嬰與晉叔向語。
경숙 때에 齊景公이 晏嬰을 晉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안영은 晉의 叔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嬰曰:
「齊之政後卒歸田氏。」
안영이 말하였다.
“齊의 정권이 끝내는 田氏에게로 돌아갈 터이오. ”
叔向亦曰:
「晉國之政將歸六卿。
六卿侈矣,而吾君不能恤也。」
숙향 또한 말하였다.
“晉의 정권은 六卿에게로 돌아갈 터이오.
육경이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도 우리 군주는 걱정도 하지 않습니다. ”
▶ 景叔: 趙武의 아들.
▶ 晏嬰: 晏子. 춘추시대 齊의 명재상으로 자는 仲, 시호는 平이다.
▶ 叔向: 춘추시대 晉의 정치가이다. 晉平公의 사부로서 박학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辭令에 밝았다. 子産, 晏嬰과 더불어 춘추시대의 명현으로 손꼽힌다.
▶ 六卿: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 6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晉은 결국 이들 중 한·위·조 3姓에 의해 3분되었다.
▶ 侈: 제멋대로 하다. 방자하다.
▶ 恤: 근심하다.
趙景叔卒,生趙鞅,是為簡子。
조경숙이 죽고 趙鞅이 태어났는데 그가 簡子이다.
趙簡子在位,晉頃公之九年,簡子將合諸侯戍于周。
趙簡子 재위 때인 晉頃公 9년(기원전517년), 조간자는 제후들과 周나라에서 회합을 갖고 주나라를 지켰다.
其明年,入周敬王于周,辟弟子朝之故也。
그 이듬해에 주敬王을 주나라 조정으로 들여보냈는데 周경왕의 동생 子朝를 피해 외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 趙簡子: 趙鞅. 춘추시대 말기 晉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 周敬王: 춘추시대 주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丐이다. 周景王이 죽자 왕자 丐와 왕자 朝가 왕위를 놓고 다투었으며, 사대부들이 景王의 큰아들 猛을 왕으로 옹립했으나 왕자 朝가 맹을 공격하여 죽였다. 晉頃公이 제후의 軍士를 이끌고 경왕을 왕성으로 들게 하고 자조를 축출하였다. <사기 본기 권04. 주본기>
▶ 辟: 避와 같다.
晉頃公之十二年,六卿以法誅公族祁氏、羊舌氏,分其邑為十縣,六卿各令其族為之大夫。
晉경공 12년(기원전588년)에 六卿이 법에 따라 公族인 祁氏와 羊舌氏를 죽이고, 그들의 읍을 열 개 縣으로 나누어 육경이 각각 자신의 친족들을 대부로 삼았다.
晉公室由此益弱。
晉 왕실은 이때부터 더욱 허약해졌다.
▶ 六卿: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 6姓을 말한다. 이들 6성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는데, 晉은 결국 이들 중 한·위·조 3姓에 의해 3분되었다
▶ 公族: 제후국 군주의 一族.
▶ 祁氏: 晉의 大夫인 祁奚집안으로 손자 祁盈때 멸족되었다.
▶ 羊舌氏: 楊氏이다. 叔向의 食邑이 楊이기 때문에 그 아들은 楊食我로 稱하였으며, 伯石(: 楊石)이다. 羊舌職집안으로, 증손 羊舌食我때 멸족되었다.
後十三年,魯賊臣陽虎來奔,趙簡子受賂,厚遇之。
13년 뒤에 魯의 賊臣 陽虎가 晉으로 도망쳐 왔는데 조간자가 뇌물을 받고 그를 후대하였다.
▶ 陽虎: 춘추시대 말기 魯 사람. 자는 貨이고, 얼굴이 孔子와 닮았다고 한다. 季氏의 家臣으로, 季平子를 섬겼다. 계평자가 죽자 권력을 장악하였다. 일찍 季桓子를 잡아 강제로 동맹을 맺게 하였다. 魯定公 8년에 三桓을 제거하고 삼환의 嫡子들을 모두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陽關으로 달아났다. 다음 해에 삼환이 양관을 공격하자 齊로 달아났고, 다시 晉으로 달아났다. 趙盾에게 귀의하여 趙簡子의 謀臣이 되었다.
<[史記世家]권33. 魯周公世家>
趙簡子疾,五日不知人,大夫皆懼。
조간자가 병들어 닷새 동안 사람을 못 알아보자 대부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醫扁鵲視之,出,董安于問。
의사 扁鵲이 조간자를 살펴보고 나오니 董安于가 병세를 물었다.
扁鵲曰:
「血脈治也,而何怪!
在昔秦繆公嘗如此,七日而寤。
寤之日,告公孫支與子輿曰:
『我之帝所甚樂。
吾所以久者,適有學也。
帝告我:
「晉國將大亂,五世不安;
其後將霸,未老而死;
霸者之子且令而國男女無別。」』
편작이 말하였다.
“혈맥이 정상인데 그대는 어찌 그리 괴이하게 여깁니까!
전에 秦繆公도 이런 증세를 보이다가, 7일이 되어 깨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깨어난 날 公孫支와 子輿에게 말하기를,
‘내가 상제가 계신 곳에 가서 아주 즐거웠소.
내가 오래 머문 것은 마침 상제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오.
상제가 내게 알려주시기를 ‘晉은 장차 큰 난이 일어나 5대 동안 불안해진다.
그 후손이 패권을 잡겠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터이다.
패주의 아들이 나라를 다스리게 되나 남녀 분별이 없게 될 터이다. ’라고 했습니다.
▶ 扁鵲: 전국시대 뛰어난 의사로 성은 秦이고 이름은 越人이며 渤海사람이다. 長桑君에게 秘方을 전수받고 名醫가 되어 齊와 越 사이를 오가며 환자를 치료하다가 秦에 들어갔는데, 秦 太醫令李醯가 편작의 뛰어난 의술을 시기하여 자객을 시켜 암살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사기열전 편작창공열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史記列傳]권105. 扁鵲倉公列傳
▶ 董安于: 춘추시대 晉의 正卿으로 趙簡子의 가신이다. 字는 阏于.
▶ 治: 정상. 평화롭다.
▶ 而: 너. 그대.
▶ 秦缪公: 秦穆公. 嬴任好. 춘추시대 秦의9대 군주이다. 춘추시대 주나라 襄王때 晉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다.
▶ 公孫支: 秦 穆公때 大夫가 되어 百里奚를 천거하여 霸業을 이룩하게 하였다.
▶ 之: 도착하다. ~에 이르다.
▶ 適: 마침.
▶ 五世: 五代. 晉獻公, 奚齊, 卓子, 惠公, 懷公의 五代를 말한다.
▶ 霸: 晉 文公은 春秋五覇로 칭하여지게 되었다.
▶ 男女無別: 남녀유별의 예의가 없어지다.
公孫支書而藏之,秦讖於是出矣。
공손지가 이 말을 기록하여 보관해두어 秦의 讖言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獻公之亂,文公之霸,而襄公敗秦師於殽而歸縱淫,此子之所聞。
晉獻公 때 내란이 일어났고 文公 때에 패주가 되었으나, 문공의 아들 襄公이 殽山에서 秦의 軍士를 물리치고 돌아온 후 음란해졌으니 이것은 그대도 들은 바이겠습니다.
今主君之疾與之同,不出三日疾必閒,閒必有言也。」
지금 주군의 병도 그와 같으니 사흘이 지나지 않아 틀림없이 병이 나을 터이고, 병이 나으면 분명 말씀이 있을 터입니다. ”
▶ 讖: 길흉화복에 대한 예언.
▶ 獻公之亂: 진헌공은 晋나라의 21대 군주이다. 말년에 첩 여희와 그 아들 해제를 총애하여 해제의 즉위에 방해되는 다른 아들들을 탄압했다가 진 문공 즉위 전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단초를 만들었다.
▶ 襄公敗秦師於殽: 晉襄公元年(: 기원전627년) 晉이 殽山에서 秦軍을 섬멸하고 秦의 세 장수를 생포하였다. 秦穆公의 딸이자 晉文公의 부인인 文嬴은 친정 나라의 세 장수가 생포되어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진양공에게 풀어주기를 청하였다. 진양공이 결국 문영의 청을 들어주었다.
▶ 閒: 병이 낫다. 쾌유하다.
居二日半,簡子寤。
이틀하고 반나절이 지나자 조간자가 깨어났다.
語大夫曰:
「我之帝所甚樂,與百神游於鈞天,廣樂九奏萬舞,不類三代之樂,其聲動人心。
有一熊欲來援我,帝命我射之,中熊,熊死。
又有一羆來,我又射之,中羆,羆死。
帝甚喜,賜我二笥,皆有副。
간자가 대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상제가 있는 곳에 갔었는데 아주 즐거웠소, 하늘 복판에서 신선들과 노닐 때, 각종 악기로 다양한 음악과 여러 가지 춤을 추었는데, 옛적 三代의 음악과 달라서 그 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었소.
또 곰 한 마리가 나를 잡아가려 하는데 상제께서 내게 곰을 활로 쏘라 하시기에 맞혀 죽였소.
또 큰곰이 나타났는데, 내가 또 활로 쏘아 맞추어 큰 곰까지 죽였소.
상제께서 몹시 기뻐하시며 내게 대나무 바구니 두 개를 하사하셨는데 모두 보조바구니가 들어있었소.
▶ 鈞天: 하늘의 중앙. 九天의 하나.
▶ 廣樂: 웅장하고 성대한 음악.
▶ 九奏: 여러 차례 연주하다.
▶ 萬舞: 주나라 때 규모가 큰 무용의 명칭.
▶ 三代: 夏, 殷, 周의 삼대를 말한다.
▶ 援: 잡다.
▶ 羆: 큰곰.
▶ 笥: 대바구니.
吾見兒在帝側,帝屬我一翟犬,曰:
『及而子之壯也,以賜之。』
帝告我:
『晉國且世衰,七世而亡,嬴姓將大敗周人於范魁之西,而亦不能有也。
今余思虞舜之勳,適余將以其胄女孟姚配而七世之孫。』」
내가 상제 곁에 아이가 있음을 보았는데, 상제께서는 내게 翟땅의 개 한 마리를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네 아들이 장성하면 주어라.’
고 했소.
상제께서는 또 말하기를
‘晉은 장차 대대로 쇠약해져서 7대에 이르면 망하고, 嬴姓이 주나라 사람들을 范魁의 서쪽에서 크게 무찌르나 역시 그 땅을 차지하지는 못할 터이다.
지금 내가 舜임금의 공적을 생각하여 적당한 때에 내가 우순의 후손인 孟姚를 너의 7대 후손과 짝을 지어주마. ’라고 하셨소. ”
董安于受言而書藏之。
董安于가 이 말을 받아 적어 보관하였다.
以扁鵲言告簡子,簡子賜扁鵲田四萬畝。
이에 편작의 말을 조간자에게 보고하니 조간자는 편작에게 전답 4만 畝를 하사하였다.
▶ 屬: 부탁하다.
▶ 翟: 狄. 고대 북방 민족의 명칭.
▶ 世衰: 대대로 쇠약해지다.
▶ 嬴姓: 趙氏를 말한다. 조씨의 선조는 嬴姓이다.
▶ 周人: 衛를 말한다. 衛의 선조 강숙은 주무왕의 동생이다.
▶ 范魁之西趙: 기원전372년 조 성후3년, 趙가 衛를 공격하여 都鄙 73개를 취하였다.
▶ 胄女: 우순의 후손인 여자. 孟姚는 趙武靈王의 아내가 된다. 胄는 고대 제왕 또는 귀족의 후대를 말한다.
▶ 孟姚: 전국시대 趙 吳廣의 딸이다. 스스로 舜임금의 후예라 하여 맹요라 불렀다. 趙 武靈王이 꿈에 처녀가 거문고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는 것을 보았는데, 여러 차례 꿈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람을 만나기를 기대하였다. 오광이 그 말을 듣고 왕에게 맹요를 바쳤다.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녀가 바로 惠后이다. 아들 何(: 혜문왕)를 낳았다.
▶ 七世之孫: 7대 후손. 즉 武靈王을 말한다. 그러나 무령왕은 조간자의 10대 후손이다.
他日,簡子出,有人當道,辟之不去,從者怒,將刃之。
훗날 간자가 출타하는데 누군가 길을 막고 쫓아도 가지 않자, 시종이 화를 내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當道者曰:
「吾欲有謁於主君。」
길을 막은 사람이 말하였다.
“내가 주군을 뵙고자합니다. ”
從者以聞。
시종이 이를 알렸다.
簡子召之,曰:
「譆,吾有所見子晣也。」
간자가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아, 내가 그대 子晣을 본 적이 있다. ”
當道者曰:
「屏左右,願有謁。」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좌우를 물리쳐 주십시오.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
簡子屏人。
간자가 사람들을 물리쳤다.
當道者曰:
「主君之疾,臣在帝側。」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주군께서 병이 나셨을 때 신이 상제의 곁에 있었습니다. ”
簡子曰:
「然,有之。
子之見我,我何為?」
간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그랬었지. 그대가 나를 봤을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當道者曰:
「帝令主君射熊與羆,皆死。」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상제께서 주군께 곰과 큰곰을 쏘라고 하니 모두 죽였습니다. ”
簡子曰:
「是,且何也?」
간자가 말하였다.
“그랬지. 또 뭘 했지?”
當道者曰:
「晉國且有大難,主君首之。
帝令主君滅二卿,夫熊與羆皆其祖也。」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晉에 장차 큰 어려움이 생기는데 일이 주군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하셨습니다.
상제께서 주군에게 두 卿을 없애라고 명령하셨는데, 곰과 큰곰이 모두 그들의 조상입니다. ”
▶ 辟: 물리치다.
▶ 譆: 嘻와 통용된다. 감탄사.
▶ 子晣: 人名. 조간자가 꿈속에서 만난 사람.
▶ 屏: 물러나 피하다.
▶ 二卿: 范氏와 中行氏를 말한다.
簡子曰:
「帝賜我二笥皆有副,何也?」
간자가 말하였다.
“상제께서 내게 작은 상자가 딸린 대나무 상자 두 개를 주셨는데 무슨 뜻인가?”
當道者曰:
「主君之子將克二國於翟,皆子姓也。」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주군의 아들이 장차 翟 땅에서 두 나라를 이길 터인데 그들은 모두 子姓입니다. ”
簡子曰:
「吾見兒在帝側,帝屬我一翟犬,曰
『及而子之長以賜之』。
夫兒何謂以賜翟犬?」
간자가 물었다.
“내가 상제 곁에 있는 아이를 보았는데 상제께서 내게 翟 땅의 개 한 마리를 주면서 ‘네 아들이 장성하면 주어라’
라고 하셨다.
왜 내 아들에게 적 땅의 개를 주라고 했는가?”
當道者曰:
「兒,主君之子也。
翟犬者,代之先也。主君之子且必有代。
及主君之後嗣,且有革政而胡服,并二國於翟。」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그 아이는 주군의 아들입니다.
적 땅의 개는 代 군주의 선조입니다.
주군의 아들이 장차 틀림없이 代를 차지할 터입니다.
또 주군의 후손이 정치를 개혁하고 胡服을 입고 적 땅에서 두 나라를 합병할 터입니다. ”
簡子問其姓而延之以官。
간자가 그의 성을 묻고 관리로 초빙하려 하였다.
當道者曰:
「臣野人,致帝命耳。」
길을 막은 자가 말하였다.
“신은 野人으로 상제의 명을 전할 뿐입니다. ”
遂不見。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았다.
簡子書藏之府。
간자가 이 일을 기록하여 기록실에 보관하였다.
▶ 主君之子將克二國於翟: 훗날 조간자의 아들 趙襄子가 代와 知氏를 멸하여 조씨의 땅으로 삼았다.
▶ 革政而胡服: 훗날 무령왕이 胡服을 입고 기마전법을 채용하였다.
▶ 二國: 중산국과 胡.
▶ 延: 초빙하다.
異日,姑布子卿見簡子,簡子遍召諸子相之。
훗날 姑布 子卿이 간자를 알현하니 간자가 아들을 두루 불러 관상을 보게 하였다.
子卿曰:
「無為將軍者。」
자경이 말하였다.
“장군이 될 사람이 없습니다. ”
簡子曰:
「趙氏其滅乎?」
간자가 말하였다.
“조씨가 멸망한단 말이오?”
子卿曰:
「吾嘗見一子於路,殆君之子也。」
자경이 말하였다.
“제가 길에서 한 아이를 보았는데 아마 그대의 아들일 터입니다. ”
簡子召子毋卹。
간자가 아들 毋恤을 불렀다.
毋卹至,則子卿起曰:
「此真將軍矣!」
무휼이 오자 子卿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였다.
“이 아이가 진짜 장군입니다!”
簡子曰:
「此其母賤,翟婢也,奚道貴哉?」
간자가 말하였다.
“이 아이의 어머니는 천한 翟의 여종인데 어찌 귀하다는 말이오?”
子卿曰:
「天所授,雖賤必貴。」
자경이 말하였다.
“하늘이 내린 분은 비록 천해도 반드시 귀해집니다. ”
▶ 姑布子卿: 春秋時代에 晋나라의 관상가로 孔子의 상을 보고 장차 大聖人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 無為將軍者: 제후국의 軍는 正卿이 통솔하였으므로 卿을 장군이라 칭하였다. 조씨가 끊어진 다는 것은 조간자의 뒤를 이어 정경의 지위까지 오를 사람이 없느냐는 뜻이다.
▶ 毋恤: 趙簡子의 아들 중에 큰아들은 伯魯이며, 작은 아들은 無恤이다. 無恤은 본래 毋卹로 쓴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가 되며 조씨 가문의 수령으로 전국시대에 趙의 창시자가 된다. 시호가 양이므로 조양자라고 칭한다.
自是之後,簡子盡召諸子與語,毋卹最賢。
이후에 간자는 아들을 전부 불러 대화해 보니 무휼이 가장 현명하였다.
簡子乃告諸子曰:
「吾藏寶符於常山上,先得者賞。」
간자가 아들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常山에 귀중한 符節을 숨겨두었는데 먼저 찾은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 ”
諸子馳之常山上,求,無所得。
아들들이 상산으로 달려가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毋卹還,曰:
「已得符矣。」
무휼이 돌아와 말하였다.
“부절을 찾았습니다. ”
簡子曰:
「奏之。」
간자가 말하였다.
“내놓아 보거라.”
毋卹曰:
「從常山上臨代,代可取也。」
무휼이 말하였다.
“상산 위에서 代를 내려다보았더니 代를 빼앗을 수 있더군요. ”
簡子於是知毋卹果賢,乃廢太子伯魯,而以毋卹為太子。
간자가 이에 무휼이 과연 현명함을 알고, 태자 伯魯를 폐하고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 寶符: 조정의 증표인 符節. 信標.
後二年,晉定公之十四年,范、中行作亂。
2년 뒤인 晉定公 14년(기원전498년), 范氏와 中行氏가 난을 일으켰다.
明年春,簡子謂邯鄲大夫午曰:
「歸我衛士五百家,吾將置之晉陽。」
이듬해 봄에 간자가 邯鄲대부 趙午에게 말하였다.
“衛의 백성 500家를 내게 돌려주면 내가 그들을 晉陽으로 옮기겠다.”
午許諾,歸而其父兄不聽,倍言。
조오가 허락하고 돌아갔으나, 그곳 부형들이 동의하지 않아 말을 어기게 되었다.
趙鞅捕午,囚之晉陽。
趙鞅은 趙午를 잡아 진양에다 가두었다.
乃告邯鄲人曰:
「我私有誅午也,諸君欲誰立?」
그리고는 조앙이 한단 사람들에게 고하였다.
“내가 개인적으로 午를 죽이려는데 여러분들은 누구를 세우고 싶은가?”
遂殺午。
조오를 죽였다.
趙稷、涉賓以邯鄲反。
趙稷과 涉賓이 한단에서 반발하였다.
晉君使籍秦圍邯鄲。
晉定公이 籍秦에게 한단을 포위하게 하였다.
荀寅、范吉射與午善,不肯助秦而謀作亂,董安于知之。
荀寅과 范吉射은 趙午와 잘 지냈기에 籍秦을 돕지 않고 난을 일으키려 했으나 董安于가 이를 알게 되었다.
▶ 定公: 晉定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午이며, 頃公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15년 趙鞅과 中行寅, 范吉射등 三卿이 內訌을 일으키자,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범씨와 중항씨를 격퇴했지만, 조앙의 자리는 회복시켰다. 黃池의 會盟에서 吳의 夫差와 우두머리를 다투다가 조앙의 도움을 받아 吳가 晉을 받들게 되었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范, 中行作亂: 范氏와 中行氏의 난. (기원전497~489년) 晉의 强臣인 智·范·中行·韓·魏·趙씨를 六卿이라 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었다. 기원전497년 범씨와 중항씨가 卿의 항렬에서 제외되자 원한을 품고 조간자를 공격하였다.
※中行氏: 荀氏를 말한다. 荀寅의 조부 荀偃이 中軍을 통솔하였으며, 중군이 中行으로 개칭되어 荀氏는 中行氏로 칭하게 되었다.
▶ 午: 趙午. 춘추시대 晉의 대부.
▶ 衛士五百家: 晉定公 10년에 趙鞅이 衛를 포위하자, 衛가 겁이 나서 5백 家를 바치니, 조앙은 그 5백 家를 데리고 와서 邯鄲에 두었었는데, 그 5백 가를 晉陽으로 옮겨 정착시키고자 한 것이다. 晉陽은 趙鞅의 읍이다.
▶ 倍: 背와 통용된다. 위배하다.
▶ 趙稷: 趙午의 아들.
▶ 籍秦: 晉의 上軍司馬.
▶ 荀寅, 范吉射與午善: 趙午는 荀寅의 甥姪이고 荀寅은 范吉射의 사돈이다.
▶ 荀寅: 中行寅. 中行文子로도 불린다. 춘추시대 晉6경의 한 사람. 荀吳之의 아들이다. 頃公 때 下卿이 되어 中軍을 관할하였다. 定公 15년 范吉射과 조앙을 공격하여 晉陽에서 포위하였다. 荀躒등이 정공의 명을 받들어 순인과 범길석을 치자 朝歌로 달아났다.
▶ 范吉射(범길사: 범길석): 范昭子. 范氏,이름은 吉射. 范氏는 士氏로부터 나왔으므로 士吉射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晋나라의 6경의 하나인 범씨의 종주인 范鞅의 아들이다.
▶ 董安于: 춘추시대 晉의 正卿으로 趙簡子의 가신이다. 字는 阏于.
十月,范、中行氏伐趙鞅,鞅奔晉陽,晉人圍之。
10월에 범씨와 중항씨가 조앙을 공격하여 조앙이 진양으로 달아나자, 晉 사람들이 진양을 포위하였다.
范吉射、荀寅仇人魏襄等謀逐荀寅,以梁嬰父代之;逐吉射,以范皋繹代之。
범길석과 荀寅의 원수인 魏襄 등이 순인을 몰아내고 梁嬰父를 대신 그 자리에 앉히고, 범길석을 몰아내고 范皐繹(: 범고이)을 대신하고자 모의하였다.
荀櫟言於晉侯曰:
「君命大臣,始亂者死。
今三臣始亂而獨逐鞅,用刑不均,請皆逐之。」
荀櫟이 晉 정공에게 말하였다.
“군주께서 대신들에게 명하시길 난을 처음 일으킨 자는 죽인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세 신하가 반란을 먼저 일으킨 자들인데 조앙만 내쫓음은 형벌이 공평하지 않으니 모두 내쫓으십시오. ”
▶ 魏襄等謀逐荀寅: 范皐夷, 梁嬰父, 知文子, 韓簡子, 魏襄子등 다섯 사람이 모의하여 荀寅을 축출하고서 梁嬰父를 대신 그 자리에 앉히고, 范吉射을 축출하고 范臯夷를 대신 그 자리에 앉히고자 하였다.
范臯夷는 范吉射(: 范昭子)에게 총애를 받지 못하여 范氏의 종족에게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였고, 梁嬰父는 知文子(: 荀躒)에게 총애를 받아, 지문자가 양영보를 卿으로 삼고자 하였고, 韓簡子(: 韓不信)와 中行文子(: 荀寅)는 서로 사이가 나빴고, 魏襄子도 范昭子(: 범길석)와 서로 사이가 나빴다.
▶ 三臣: 세 신하. 趙鞅, 荀寅, 范吉射.
十一月,荀櫟、韓不佞、魏哆奉公命以伐范、中行氏,不克。
11荀櫟, 韓不佞, 魏哆가 명을 받고 범씨, 중항씨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范、中行氏反伐公,公擊之,范、中行敗走。
범씨, 중항씨가 오히려 定公을 공격하여 정공이 반격하자 범씨, 중항씨가 패하여 달아났다.
丁未,二子奔朝歌。
정미일, 두 사람은 朝歌로 달아났다.
韓、魏以趙氏為請。
한불녕과 위치는 조앙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다.
十二月辛未,趙鞅入絳,盟于公宮。
12월 신미일에 조앙이 絳城으로 들어와 정공의 궁에서 맹약하였다.
▶ 荀櫟, 韓不佞, 魏侈: 荀櫟은 荀躒으로도 쓰며 知文子를 말하며, 韓不佞(한불녕: 한불신)은 한간자이며 한기의 손자이다. 魏侈는 魏曼多, 위양자이며 전국시대 晉 魏씨의 영수이다. ,
▶ 晉陽: 趙鞅의 봉읍.
▶ 二子: 范吉射과 荀寅을 말한다.
其明年,知伯文子謂趙鞅曰:
「范、中行雖信為亂,安于發之,是安于與謀也。
晉國有法,始亂者死。
夫二子已伏罪而安于獨在。」
그 이듬해에 知伯文子(: 순력)가 조앙에게 말하였다.
“범씨와 중항씨가 비록 난을 일으킨 것은 틀림없지만 董安于가 도발하였으니 동안우도 함께 꾀한 것입니다.
晉의 법에 난을 먼저 일으킨 자는 사형에 처합니다.
두 사람은 이미 죄를 인정하였고 동안우만 남았습니다. ”
趙鞅患之。
조앙이 이를 근심하였다.
安于曰:
「臣死,趙氏定,晉國寧,吾死晚矣。」
동안우가 말하였다.
“신이 죽으면 조씨가 안정되고 晉이 평안해질 터인데 저의 죽음이 늦었습니다. ”
遂自殺。
하며 자살하였다.
趙氏以告知伯,然後趙氏寧。
조씨가 이를 지백에게 알리자 이후 조씨는 평안해졌다.
▶ 董安于: 춘추시대 晉의 正卿으로 趙簡子의 가신이다.
▶ 發: 도발하다. 일으키다.
▶ 二子已伏罪: 范氏와 中行氏는 이미 죄를 인정하고 달아났다는 말이다.
孔子聞趙簡子不請晉君而執邯鄲午,保晉陽,故書春秋曰
「趙鞅以晉陽畔」。
孔子는 조간자가 晉 군주에게 청하지 않고 한단의 조오를 체포하고, 진양을 지켰음을 알았으므로 <春秋>에
“조앙이 진양을 근거지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
라고 썼다.
趙簡子有臣曰周舍,好直諫。
조간자에게 周舍라는 신하가 直諫을 좋아하였다.
周舍死,簡子每聽朝,常不悅,大夫請罪。
주사가 죽자 간자가 조회를 할 때마다 늘 기분이 좋지 않으니, 대부들이 잘못을 빌었다.
簡子曰:
「大夫無罪。
吾聞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諸大夫朝,徒聞唯唯,不聞周捨之鄂鄂,是以憂也。」
간자가 말하였다.
“대부들에게는 죄가 없소.
내가 듣기에 양가죽 천장이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가죽만 못하오.
대부들이 조회함에 그저 네, 네 하는 소리만 들리고 주사의 바른말이 들리지 않으니 이것이 걱정하는 까닭이오. ”
簡子由此能附趙邑而懷晉人。
간자가 이러했기에 趙邑 사람들이 따랐고, 晉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 畔: 叛과 통용된다.
▶ 周舍: 조간자의 家臣으로 直諫을 좋아하였다.
▶ 唯唯: 네네. 응답하는 소리.
▶ 鄂鄂: 직언하는 모양. 鄂은諤(곧은 말할 ‘악’)과 통용된다.
▶ 千羊之皮不如一狐之腋: 〈商君列傳〉에 商君이 趙良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보기에 내가 秦을 다스리는 것이 五羖大夫(: 百里奚)와 견주어 누가 더 나은가?”
라고 하니, 趙良이 말하기를
“양가죽 천장이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가죽만 못하고, 천 사람이 아첨을 떠는 것은 한 사람의 선비의 바른말만 못 합니다.”
라고 하였다. <사기 권68. 상군열전>
▶ 附: 순종하다.
晉定公十八年,趙簡子圍范、中行于朝歌,中行文子奔邯鄲。
晉定公 18년(기원전495년), 조간자가 범씨와 중항씨를 朝歌에서 포위하니, 中行文子는 邯鄲으로 달아났다.
明年,衛靈公卒。
이듬해에 衛靈公이 죽었다.
簡子與陽虎送衛太子蒯聵于衛,衛不內,居戚。
간자와 陽虎는 衛태자 蒯聵를 衛로 보냈으나 衛에서 들이지 않으니 戚城에 머물게 하였다.
▶ 晉定公: 춘추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午이고, 頃公의 아들이다. 재위한 지 15년 趙鞅과 中行寅, 范吉射三卿이 內訌을 일으키자 나라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범씨와 중항씨를 격퇴했지만, 조앙의 자리는 회복시켰다. 黃池의 會盟에서 吳의 夫差와 우두머리를 다투었는데, 조앙의 도움을 받아 吳가 晉을 받들게 되었다.
▶ 中行文子: 荀寅. 中行寅으로도 불린다
▶ 衛靈公: 춘추시대 衛의 군주로 이름은 元이고, 獻公의 손자이다.
39년 태자 蒯聵가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하였다. 영공의 노여움을 두려워한 괴외가 宋나라로 달아나고, 얼마 뒤 晉으로 들어갔다. 태자의 出奔에 화가 난 영공이 少子郢을 세우려고 했는데, 영이 사양하였다. 얼마 뒤 죽었다.
▶ 衛太子蒯聵: 蒯聵. 또는 蕢聵. 춘추시대 衛의 國君. 衛靈公의 아들이다. 태자로 있을 때 영공의 부인 南子를 죽이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晉으로 달아났다. 영공이 죽자 그의 아들 輒을 세우니 그가 出公이다. 晉에서 괴외를 보냈지만 衛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공 13년 괴외가 누이 孔伯姬의 도움을 얻어 衛에 들어와 출공을 핍박해 魯로 내쫓고는 군주가 되었으며, 군주가 된 후 晉을 배반하였다. 晉이 衛를 포위하자 괴외는 나라사람들에게 쫓겨났다. [史記世家]권37. 衛康叔世家
▶ 内: 納과 같다. 받아들이다.
晉定公二十一年,簡子拔邯鄲,中行文子奔柏人。
진정공21년(기원전489년)에 간자가 한단을 공격하자 중항문자는 柏人으로 도망갔다.
簡子又圍柏人,中行文子、范昭子遂奔齊。
간자가 다시 백인을 포위하자 중항문자와 范昭子는 齊로 도망쳤다.
趙竟有邯鄲、柏人。
조씨가 결국 한단과 백인을 차지하였다.
范、中行餘邑入于晉。
범씨와 중항씨의 남은 읍은 晉에 편입되었다.
趙名晉卿,實專晉權,奉邑侔於諸侯。
조씨는 명분상 晉의 卿이지만 실제로는 晉의 정권을 專行하였고, 封邑은 제후와 같았다.
▶ 柏人: 옛날의 地名. 지금의 河北省 柏鄕縣부근이다.
▶ 奉邑: 領地.
▶ 侔: 같다.
晉定公三十年,定公與吳王夫差爭長於黃池,趙簡子從晉定公,卒長吳。
진정공30년(기원전482년)에 정공이 黃池에서 吳王 夫差와 맹주를 놓고 다툼에, 조간자가 晉정공을 수행하여 결국 (진정공이) 오왕에게 맹주가 되었다.
定公三十七年卒,而簡子除三年之喪,期而已。
정공이 재위37년(기원전475년) 만에 죽으니, 간자는 3년상을 폐지하고 1년상으로 마쳤다.
是歲,越王句踐滅吳。
이해에 越王 句踐이 吳를 멸망시켰다.
▶ 吳王夫差: 吳의 군주로 오왕 闔閭의 아들. 아버지가 越王 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그 유언을 받들어, 臥薪하며 복수를 다짐하였다. 마침내 기원전494년 越을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고 굴복시켰다.
▶ 爭長: 제후의 우두머리를 다투다. 長은 盟主.
▶ 黄池: 지명. 지금의 河南省 封丘縣 서남쪽.
▶ 卒長吳:오왕 부차14기원전482년. 오왕은 북쪽으로 나아가 제후들을 黃池에 소집하여 주실을 등에 업고 패자의 자리에 앉으려고 하였다. <國語 吳語>
<[史記世家]권31. 吳太伯世家>
▶ 期: 1주년.
晉出公十一年,知伯伐鄭。
晉出公 11년(기원전464년)에 知伯이 鄭을 공격하였다.
趙簡子疾,使太子毋卹將而圍鄭。
조간자는 병이 나서 태자 무휼을 장수로 삼아 鄭을 포위하게 하였다.
知伯醉,以酒灌擊毋卹。
지백이 술에 취해, 강제로 술을 먹이다가 무휼을 때렸다.
毋卹群臣請死之。
무휼의 신하들이 지백을 죽이자고 하였다.
毋卹曰:
「君所以置毋卹,為能忍。」
무휼이 말하였다.
“주군께서 이 무휼을 택하심은 치욕을 참을 수 있기 때문이오. ”
然亦慍知伯。
그러나 지백에게 화가 나 있었다.
知伯歸,因謂簡子,使廢毋卹,簡子不聽。
지백이 돌아와 이 일로 간자에게 무휼을 폐하라고 했으나 간자는 듣지 않았다.
毋卹由此怨知伯。
이 일로 무휼은 지백에게 원한을 품었다.
▶ 知伯: 智伯. 춘추시대 말 전국시대 초기의 晉 사람으로 이름은 瑤이고, 智襄子라고도 부른다. 晉出公 17년에 趙, 韓, 魏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邑으로 삼았다. 趙襄子가 한씨, 위씨와 함께 知氏를 멸족시켰다.
▶ 知伯醉,以酒灌擊毋卹. : 조양자가 아버지 簡子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릴 때 知伯과 같은 소속이었는데, 知伯이 襄子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하였으나 먹지 않자, 뺨을 때리고 돌아와서, 아버지 簡子에게 襄子를 후계자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세우라고 하였다.
▶ 灌: 마시게 하다.
▶ 慍: 화를 내다. 원망하다.
晉出公十七年,簡子卒,太子毋卹代立,是為襄子。
晉출공17년에 간자가 죽고 태자 무휼이 뒤를 이으니 그가 襄子이다.
趙襄子元年,越圍吳。
조양자 원년(기원전457년), 越이 吳를 포위하였다.
襄子降喪食,使楚隆問吳王。
양자는 상중에 들던 음식보다 그 가짓수를 줄이고, 楚隆을 보내 오왕을 위문하였다.
▶ 襄子: 毋恤. 趙簡子의 아들. 無恤은 본래 毋卹로 쓴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이며 조씨 가문의 수령으로 전국시대에 趙의 창시자가 된다. 시호가 양자이므로 조양자라고 칭한다.
▶ 趙襄子: 毋卹. 趙簡子의 아들. 춘추시대 晉의 대부가 되며 조씨 가문의 수령으로 전국시대에 趙의 창시자가 된다. 시호가 양자이므로 조양자라고 칭한다
▶ 喪食: 禮로 정한 喪人의 疏食을 이른다. 이때 無恤은 아버지 趙簡子의 상중에 있어 疏食을 들고 있었는데, 吳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더욱 줄인 것이다. 吳가 포위되어 멸망할 형세에 있는데도 자기가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부친의 상중에 들던 음식보다 등급을 낮춘 것이다.
▶ 楚隆: 趙襄子의 家臣.
襄子姊前為代王夫人。
양자의 누나는 전에 代王의 부인이었다.
簡子既葬,未除服,北登夏屋,請代王。
양자가 장례를 치르고 상복을 벗기 전에 북쪽 夏屋山에 올라 代王을 초청하였다.
使廚人操銅枓以食代王及從者,行斟,陰令宰人各以枓擊殺代王及從官,遂興兵平代地。
요리사를 시켜 쇠 국자를 들고 대왕과 그 수행원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고 술을 따를 때, 몰래 요리사 各을 시켜 국자로 代王과 그 수행원을 쳐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代 땅을 평정하였다.
其姊聞之,泣而呼天,摩笄自殺。
그의 누나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다가 비녀를 갈아 자살하였다.
代人憐之,所死地名之為摩笄之山。
代 사람들이 가엾게 여겨, 그가 죽은 곳의 이름을 摩笄山이라 하였다.
遂以代封伯魯子周為代成君。
이어 대 땅을 伯魯의 아들 趙周에게 봉하여 代成君으로 삼았다.
伯魯者,襄子兄,故太子。
백로는 조양자의 형으로 원래 태자였다.
太子蚤死,故封其子。
태자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봉한 것이다.
▶ 銅枓: 놋쇠 국자.
▶ 行斟: 술을 따르다.
▶ 摩: 갈다.
▶ 笄: 비녀.
襄子立四年,知伯與趙、韓、魏盡分其范、中行故地。
양자 즉위4년(기원전472년)에 知伯이 趙, 韓, 魏와 함께 범씨와 중항씨의 옛 땅을 전부 나누어 가졌다.
晉出公怒,告齊、魯,欲以伐四卿。
진출공이 노하여 齊와 魯에 알리고 四卿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四卿恐,遂共攻出公。
四卿이 두려워하여 함께 출공을 공격하였다.
出公奔齊,道死。
출공은 齊로 도망가다가 길에서 죽었다.
知伯乃立昭公曾孫驕,是為晉懿公。
이에 지백은 昭公의 증손 驕를 세우니 그가 晉懿公이다.
▶ 晉出公: 전국시대 晉의 군주로 이름은 鑿이고, 定公의 아들이다. 출공17년 韓·趙·魏가 지백 智伯 瑤와 함께 范氏와 中行氏의 땅을 나눠 食邑으로 삼았다. 출공이 노하여 齊와 魯에 알리면서 四卿을 치려고 하였다. 사경이 두려워하여 출공을 공격하니 齊로 달아났고, 도중에 길에서 죽었다.
▶ 四卿: 知伯, 趙鞅, 韓不信, 魏侈.
▶ 懿公: <史記> ‘晉世家’에는 哀公으로 기록되어 있다.
知伯益驕。
지백은 날이 갈수록 교만해졌다.
請地韓、魏,韓、魏與之。
韓과 魏 양가에 영지를 분할해 달라고 요구하니, 한씨와 위씨는 지백에게 땅을 내주었다.
請地趙,趙不與,以其圍鄭之辱。
조씨에게도 땅을 요구했으나 조씨는 주지 않았는데, 鄭을 포위했을 때 조간자가 당한 치욕 때문이었다.
知伯怒,遂率韓、魏攻趙。
지백이 화를 내고 한씨와 위씨를 이끌고 조씨를 공격하였다.
趙襄子懼,乃奔保晉陽。
조양자가 겁을 먹고 달아나 晉陽을 지켰다.
▶ 以其圍鄭之辱: 조양자가 일찍이 아버지 簡子를 대신해서 군사를 거느릴 때 知伯과 같은 소속이었는데 知伯이 襄子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려 하였으나 먹지 않자 뺨을 때리고 돌아와서 아버지 簡子에게 襄子를 후계자로 삼지 말고 다른 사람을 세우라고 한 적이 있었다.
原過從,後,至於王澤,見三人,自帶以上可見,自帶以下不可見。
原過가 양자를 따르며 뒤쳐지다가, 王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의 허리띠 위는 보였지만 허리띠 아래는 볼 수가 없었다.
與原過竹二節,莫通。曰:
「為我以是遺趙毋卹。」
원과에게 양쪽이 막힌 두 마디로 된 대나무 통을 주면서 말하였다.
“우리 대신 이것을 조무휼에게 갖다 주어라. ”
原過既至,以告襄子。
원과가 도착한 후 양자에게 보고하였다.
襄子齊三日,親自剖竹,有朱書曰:
「趙毋卹,余霍泰山山陽侯天使也。
三月丙戌,余將使女反滅知氏。
女亦立我百邑,余將賜女林胡之地。
至于後世,且有伉王,赤黑,龍面而鳥噣,鬢麋髭髯,大膺大胸,修下而馮,左袵界乘,奄有河宗,至于休溷諸貉,南伐晉別,北滅黑姑。」
양자는 3일 동안 재계하고 몸소 대나무를 갈라 보니, 붉은 글씨로 써 있었다.
“조무휼, 우리는 霍泰山 山陽侯의 천사들이다.
3월 병술일에 우리는 네가 도리어 지백을 멸망시키도록 하겠다.
네가 백 개의 성읍에 우리 사당을 세우면, 우리도 너에게 林胡의 땅을 줄 터이다.
후대에 이르러 강력한 왕이 나타날 터이니, 그는 검붉은 피부에 용의 얼굴을 하고 새의 부리와 같은 입에, 짙은 귀밑머리와 진한 눈썹, 콧수염과 구레나룻이 있고, 넓은 큰 가슴에 하체는 길고 상체는 장대하며, 왼쪽으로 옷깃을 여민 채 갑옷을 입고 말을 몰며 河宗땅을 차지하고 休溷지역과 여러 貉族에까지 이르고, 남쪽으로는 晉의 다른 성읍을 공격하고 북쪽으로는 黑姑를 멸할 터이다. ”
襄子再拜,受三神之令。
양자는 再拜하고 三神의 명을 받들었다.
▶ 原過: 趙襄子의 家臣.
▶ 齋: 齋戒하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다.
▶ 百邑: 卿이어야 1백 개의 邑을 소유할 수 있었다.
▶ 伉: 강하다. 굳세다.
▶ 鬢麋: 귀밑머리와 눈썹. 麋는 眉(미: 눈썹)과 통용된다.
▶ 髭髯: 콧수염과 구레나룻.
▶ 膺: 가슴.
▶ 修下而馮: 하체는 길고 상체는 장대하다. 수는 길다. 馮은 장대하다.
▶ 左袵: 왼쪽 옷 섶.
▶ 界乘: 갑옷을 입고 말을 타다. 界는 介와 같다. 갑옷. 乘은 말을 타다.
▶ 奄: 덮다. 덮어씌우다.
▶ 河宗: 黄河 중류 일대. 기원전302년, 趙武靈王이 河宗 땅과 休溷, 貉族 땅을 점령하여 2군을 설치하였다.
三國攻晉陽,歲餘,引汾水灌其城,城不浸者三版。
지백과 한씨와 위씨 세 나라가 진양을 1년 넘게 공격였는데, 汾水의 물을 끌어다 성으로 흘려보내니 물에 잠기지 않은 성벽이 三版(: 24자)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城中懸釜而炊,易子而食。
성 안에서는 솥을 걸고 불을 땠으며, 자식을 바꾸어 먹었다.
群臣皆有外心,禮益慢,唯高共不敢失禮。
신하들이 모두 배반할 마음을 품었고, 양자에 대한 예의가 갈수록 느슨해졌으나 오직 高共 만은 감히 예를 잃지 않았다.
襄子懼,乃夜使相張孟同私於韓、魏。
양자가 두려워하며 한밤중에 재상 張孟同을 보내 비밀리에 한씨와 위씨에게 가게 하였다.
韓、魏與合謀,以三月丙戌,三國反滅知氏,共分其地。
한씨 · 위씨와 함께 모의하여 3월 병술일에 세 나라가 반대로 지씨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함께 나누어 가졌다.
▶ 灌之: 汾水의 물을 끌어 성안을 물바다로 만든 것이다.
▶ 三版: 版은 고대 성벽을 쌓는 널빤지로 一版은 여덟 尺이므로 3판은 24자를 말한다.
▶ 城中懸釜而炊: 智伯이 韓과 魏의 軍士를 인솔하여 분수의 물을 터서 포위하니, 城이 잠기지 않은 면적이 겨우 3版(24尺)이었기 때문에 솥을 매달아 밥을 짓고,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
▶ 張孟同: 張孟談計. <戰國策> ‘趙策’에는 張孟談으로 기록하고 있다. 장맹동은 몰래 韓과 魏의 두 군주를 만나
“듣자하니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脣亡則齒寒)’라고 합니다. 지금 智伯이 당신네 두 나라軍士를 인솔하여 우리 趙를 치고 있으니, 趙는 망할 터입니다. 우리 趙가 망하고 나면 두 임금의 나라가 다음 차례가 됩니다.”라고 설득하여 결국 韓·魏 두 군주는 지백을 배반하고 韓·魏·趙가 동맹하여 晉을 쳐서 멸망시켰다.
기원전453년에 晉의 3卿인 韓虎 韓康子, 魏駒 魏桓子, 趙孟 趙無恤이 당시 晉의 최대 실권자이자 최대의 영토를 보유한 知伯瑤를 죽이고 知氏일문을 멸문하고 그 영토를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사실상 晉을 삼분하였다.
於是襄子行賞,高共為上。
이에 양자가 行賞하며 高共을 으뜸으로 하였다.
張孟同曰:
「晉陽之難,唯共無功。」
장맹동이 말하였다.
“진양의 난에서 고공만 공이 없었습니다. ”
襄子曰:
「方晉陽急,群臣皆懈,惟共不敢失人臣禮,是以先之。」
양자가 말하였다.
“진양이 위급해지자 신하들은 모두 해이해졌지만 오로지 고공만이 감히 신하의 예를 잃지 않았으니 그 때문에 그를 앞에 두었다. ”
於是趙北有代,南并知氏,彊於韓、魏。
이로써 조씨는 북쪽으로 代를 차지하고, 남쪽으로 지씨를 합병하니 한씨와 위씨보다 강성해졌다.
遂祠三神於百邑,使原過主霍泰山祠祀。
드디어 백 개의 성읍에 삼신 사당을 지어 제사드렸는데, 原過에게 곽태산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其後娶空同氏,生五子。
그 후 조양자는 空同氏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들 다섯을 낳았다.
襄子為伯魯之不立也,不肯立子,且必欲傳位與伯魯子代成君。
양자는 伯魯가 즉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고, 기필코 백로의 아들 代成君에게 傳位하려고 하였다.
成君先死,乃取代成君子浣立為太子。
대성군이 일찍 죽자, 대성군의 아들 浣을 태자로 세웠다.
襄子立三十三年卒,浣立,是為獻侯。
양자가 재위33년 만에 죽고, 浣이 즉위하니 그가 獻侯이다.
▶ 獻侯: 趙獻侯. 趙獻子. 전국시대 趙의 영수이며 이름은 완이다. 趙襄子의 형인 조백로의 손자, 즉 伯魯의 아들인 趙周의 아들이다. 獻侯(: 獻子)
獻侯少即位,治中牟。
헌후는 어려서 즉위하였으며 中牟를 도읍으로 삼았다.
襄子弟桓子逐獻侯,自立於代,一年卒。
양자의 동생 桓子가 헌후를 내쫓고 대 땅에서 侯로 즉위했으나 1년 만에 죽었다.
國人曰桓子立非襄子意,乃共殺其子而復迎立獻侯。
趙 사람들이 환자가 즉위함은 조양자의 뜻이 아니라고 말하고, 함께 조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다시 獻侯를 맞아들여 옹립하였다.
▶ 獻侯: 趙獻侯. 趙獻子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趙의 領袖이며 이름은 浣이다. 趙襄子의 형인 趙伯魯의 손자, 즉 伯魯의 아들인 대성군 趙周의 아들이다. 代땅의 조양자의 동생 조환자가 헌후를 축출하고 대 땅에서 즉위하였으나 1년 후 조환자가 죽자 국인들이 조환자의 아들을 죽이고 완을 다시 즉위시켰다. 완의 아들 조열후가 아버지를 헌후로 추존하였다.
▶ 治: 도읍하다.
▶ 中牟: 전국시대 趙의 邑. 춘추시대에는 晉의 읍이었으나 晉이 분열된 이후에 趙 영토가 되어 한때 수도가 되었다. 현재의 河南省 鶴壁 서쪽이다.
▶ 桓子: 趙桓子. 전국시대 晉 조씨의 영수로 趙襄子의 동생이며 이름은 嘉이다. 헌후를 축출하고 대 땅에서 즉위하였으나 1년 후 죽었다.
十年,中山武公初立。
헌후10년(기원전414년)에 中山國의 武公이 처음으로 즉위하였다.
十三年,城平邑。
헌후13년(기원전411년)에 平邑에 성을 쌓았다.
十五年,獻侯卒,子烈侯籍立。
헌후15년(기원전409년)에 헌후가 죽고 그의 아들 烈侯 趙籍이 즉위하였다.
烈侯元年,魏文侯伐中山,使太子擊守之。
열후원년(기원전408년), 魏文侯가 중산국을 공격하고 태자 擊에게 지키도록 하였다.
六年,魏、韓、趙皆相立為諸侯,追尊獻子為獻侯。
열후6년(기원전403년)에 魏, 韓, 趙가 모두 서로 잇따라 제후가 되었고, 열후는 아버지 獻子를 獻侯로 추존하였다.
▶ 中山武公: 중산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북방 유목민족인 白狄의 鮮虞部가 河北省중부에 기원전506년에 세운 나라로, 기원전296년 趙에 의해 멸망되었다. 중산국은 기원전494년 齊, 魯, 衛 등과 함께 晉을 공격하여 棘蒲, 지금의河北省 趙縣를 점령하였다. 기원전489년부터 중산국은 끊임없이 晉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457년에는 도읍인 중인성이 점령되기도 하였다. 기원전414년 武公은 동부 평원으로 이동하여 顧를 새로운 도읍으로 하여 정치와 군사 제도를 정비하였다.
▶ 烈侯: 趙烈侯.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籍이고, 獻侯의 아들이다. 公仲連을 임용해 재상으로 삼았다.
烈侯好音,謂相國公仲連曰:
「寡人有愛,可以貴之乎?」
열후가 음악을 좋아해 相國 公仲連에게 말하였다.
“과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귀하게 해줄 수 있겠소?”
公仲曰:
「富之可,貴之則否。」
공중련이 대답하였다.
“부유하게 할 수는 있지만 존귀하게 하여서는 안 됩니다. ”
烈侯曰:
「然。
夫鄭歌者槍、石二人,吾賜之田,人萬畝。」
열후가 말하였다.
“그렇구려.
鄭의 가수 槍과 石 두 사람에게 한 사람당 1만 무의 땅을 내리시오.”
公仲曰:
「諾。」
공중련이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
不與。
땅을 주지 않았다.
居一月,烈侯從代來,問歌者田。
한 달이 되어 열후가 代에서 돌아와 가수에게 주기로 한 땅에 대해 물었다.
公仲曰:
「求,未有可者。」
공중련이 말하였다.
“찾고 있는데 괜찮은 땅이 없습니다.”
有頃,烈侯復問。
얼마 뒤 열후가 다시 물었다.
公仲終不與,乃稱疾不朝。
공중련은 끝내 주지 않고 병을 핑계로 입조하지 않았다.
▶ 相國公仲連: 公仲連은 姓公仲이며 이름은 連이다. 전국시대 초기의 조열후 때의 상국으로 조열후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相國은 재상의 별칭. 相國의 벼슬이 여기서 비롯되었는데, 秦과 漢나라가 이를 따랐다.
▶ 搶, 石(창, 석: 가수의 이름)
番吾君自代來,謂公仲曰:
「君實好善,而未知所持。
今公仲相趙,於今四年,亦有進士乎?」
番吾君이 代에서 와서 공중련에게 말하였다.
“군주가 정말 잘하려고 하나 실천할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공중련 그대가 趙에서 상국이 되어 지금까지 4년, 인재를 추천한 적이 있습니까?”
公仲曰:
「未也。」
공중련이 말하였다.
“없습니다. ”
番吾君曰:
「牛畜、荀欣、徐越皆可。」
파오군이 말하였다.
“牛畜, 荀欣, 徐越 모두가 천거할 만합니다. ”
公仲乃進三人。
공중련은 곧 세 사람을 추천하였다.
及朝,烈侯復問:
「歌者田何如?」
공중련이 입조하자 열후가 다시 물었다.
“가수들의 땅은 어찌 되었소?”
公仲曰:
「方使擇其善者。」
공중련이 대답하였다.
“이제야 사람을 보내 좋은 땅을 고르게 했습니다. ”
▶ 番吾君: 전국시대 조열후에게서 番吾 땅을 봉지로 받은 귀족. 공중련에게 牛畜, 荀欣, 徐越등 세 사람의 현사를 추천하였다.
▶ 持: 집행하다. 실행하다.
▶ 進: 추천하다.
牛畜侍烈侯以仁義,約以王道,烈侯逌然。
牛畜은 열후에게 인의의 도리를 권유하고, 왕도로 다스리도록 요구하니 열후가 흡족해 하였다.
明日,荀欣侍,以選練舉賢,任官使能。
다음 날 荀欣은 현명한 인재를 천거하고 유능한 관리를 선택하고 능력 있는 관리를 임용하라고 권유하였다.
明日,徐越侍,以節財儉用,察度功德。
다음 날 徐越은 재물을 절약하는 도리와 공덕을 살피고 헤아리는 일을 권유하였다.
所與無不充,君說。
세 사람이 건의한 일들이 모두 타당하지 않음이 없으니 열후가 기뻐하였다.
烈侯使使謂相國曰:
「歌者之田且止。」
열후가 상국에게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가수에게 내리기로 한 땅을 잠시 멈추시오. ”
官牛畜為師,荀欣為中尉,徐越為內史,賜相國衣二襲。
우축을 師로 삼고, 순흔을 中尉로 삼고, 서월을 內史로 삼았으며, 상국 공중련에게는 의복 두 벌을 하사하였다.
▶ 侍: 권유하다.
▶ 逌然(유연): 흡족한 모양. 즐거워하며 너그러운 모습.
▶ 練: 유능하고 노련하다.
▶ 說: 悦과 같다.
▶ 襲: 의복 上下를 모두 갖춘 것을 襲이라 한다
九年,烈侯卒,弟武公立。
열후가 재위9년 만에 죽고, 동생 武公이 즉위하였다.
武公十三年卒,趙復立烈侯太子章,是為敬侯。
무공이 재위13년 만에 죽자, 趙는 다시 열후의 태자 章을 옹립하니 그가 敬侯이다.
是歲,魏文侯卒。
이해에 魏文侯가 죽었다.
▶ 武公: 趙武公 혹은 趙武侯. 전국시대의 趙의 제2대 군주로 이름은 기록이 남지 않아 알 수 없다. 趙烈侯의 동생이다. 기원전400년, 열후가 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웠을 때 어린 아들인 趙章이 아닌 성년이 된 동생에게 군위를 주었다. 열후는 무공에게 후계자로는 자신의 아들인 趙章에게 군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하였다. 그러나 재위한 지 13년 만에 무공이 죽기 전에 열후의 유언을 어기고 무공은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무공의 사후에 趙는 군위를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다.
▶ 敬侯: 趙敬侯.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章이고, 烈侯의 아들이다.
▶ 魏文侯: 韓虎, 趙孟과 함께 晉 공실을 삼분해 魏를 세운 開祖이다.
敬侯元年,武公子朝作亂,不克,出奔魏。
경후원년(기원전386년), 武公의 아들 朝가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魏로 달아났다.
趙始都邯鄲。
趙가 처음으로 邯鄲에 도읍하였다.
▶ 敬侯: 趙敬侯.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章이고, 烈侯의 아들이다. 즉위한 해 처음으로 수도를 邯鄲으로 정하였다. 경후11년 韓魏趙 세 나라가 함께 晉을 공격해 멸망시킨 뒤 그 땅을 나눠 가졌다.
▶ 武公: 趙武公. 趙武侯. 전국시대의 趙의 제2대 군주로 이름은 기록이 없다. 趙烈侯의 동생이다.
기원전400년 열후가 병에 걸려서 병상에 누웠을 때, 趙 제후가 된 지 3년이 지나 나라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어린 아들인 趙章이 아닌 성년이 된 동생에게 군위를 주되, 무공의 후계자로는 趙章으로 하라고 유언하였다. 그러나 재위한 지 13년에 무공이 사망하자, 열후의 유언을 어기고 무공은 자신의 아들 朝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무공의 사후에 趙는 군위를 다투는 쟁탈이 벌어졌다.
二年,敗齊于靈丘。
경후2년(기원전385년), 靈丘에서 齊를 물리쳤다.
三年,救魏于廩丘,大敗齊人。
경후3년(기원전384년), 廩丘에서 魏를 구원하고 齊를 대파하였다.
四年,魏敗我兔臺。
경후4년(기원전383년), 魏가 兎臺에서 趙를 무찔렀다.
筑剛平以侵衛。
趙는 剛平에 성을 쌓고 衛 공략의 교두보로 삼았다.
五年,齊、魏為衛攻趙,取我剛平。
경후5년(기원전382년), 齊와 魏가 衛를 위해 趙를 공격하여 강평을 탈취하였다.
六年,借兵於楚伐魏,取棘蒲。
경후6년(기원전381년), 楚에서 군사를 빌려 魏를 쳐서 棘蒲를 빼앗았다.
八年,拔魏黃城。
경후8년(기원전379년), 魏의 黃城을 함락하였다.
九年,伐齊。
경후9년(기원전378년), 齊를 공격하였다.
齊伐燕,趙救燕。
齊가 燕을 공격하자 趙가 燕을 구원하였다.
十年,與中山戰于房子。
경후10년(기원전377년)에 중산국과 房子縣에서 교전하였다.
十一年,魏、韓、趙共滅晉,分其地。
경후11년(기원전376년)에 韓魏趙가 함께 晉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가졌다.
伐中山,又戰於中人。
중산국을 공격하여 또 中人땅에서 교전하였다.
十二年,敬侯卒,子成侯種立。
경후12년(기원전375년)에 경후가 죽고 아들 成侯 趙種이 즉위하였다.
▶ 兎臺: 地名. 지금의 河北省 成安縣 서쪽.
成侯元年,公子勝與成侯爭立,為亂。
성후원년(기원전374년), 공자 趙勝이 성후와 군위를 다투며 반란을 일으켰다.
二年六月,雨雪。
성후2년(기원전373년) 6월에 눈이 내렸다.
三年,太戊午為相。
성후3년(기원전372년)에 太戊午가 相國이 되었다.
伐衛,取鄉邑七十三。
衛를 공격하여 73개 향읍을 빼앗았다.
魏敗我藺。
魏가 藺에서 趙를 패퇴시켰다.
四年,與秦戰高安,敗之。
성후4년(기원전371년), 秦과 高安에서 싸워 패퇴시켰다.
五年,伐齊于鄄。
성원5년(기원전370년), 鄄에서 齊를 공격하였다.
魏敗我懷。
魏가 懷에서 趙를 패퇴시켰다.
攻鄭,敗之,以與韓,韓與我長子。
鄭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韓에 점령한 땅을 주니 韓은 長子땅을 趙에 주었다.
▶ 成侯: 趙成侯.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種이며, 敬侯의 아들이다. 재위기간 중에 齊, 魏, 秦, 衛와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다. 성후16년 韓, 魏와 晉을 삼분하였다.
▶ 雨雪: 눈이 내리다.
▶ 長子: 지명.
六年,中山筑長城。
성후6년(기원전369년), 중산국이 長城을 쌓았다.
伐魏,敗湪澤,圍魏惠王。
魏를 공격해 喙澤(: 濁澤)에서 패퇴시키고 魏惠王을 포위하였다.
七年,侵齊,至長城。
성후7년(기원전368년), 齊를 침공하여 장성에까지 이르렀다.
與韓攻周。
韓과 함께 周나라를 공격하였다.
八年,與韓分周以為兩。
성후8년(기원전367년)에 韓과 함께 周나라를 둘로 나누었다.
九年,與齊戰阿下。
성후9년(기원전366년)에 齊와 阿城아래에서 싸웠다.
十年,攻衛,取甄。
성후10년(기원전365년)에 衛를 공격해 甄城을 탈취하였다.
十一年,秦攻魏,趙救之石阿。
성후11년(기원전364년), 秦이 魏를 공격하니 趙가 石阿에서 구원하였다.
十二年,秦攻魏少梁,趙救之。
성후12년(기원전363년), 秦이 魏의 小梁을 공격하니 趙가 구원하였다.
十三年,秦獻公使庶長國伐魏少梁,虜其太子、痤。
성후13년(기원전362년), 秦獻公이 庶長國에게 魏의 소량을 공격하게 하여 魏의 태자와 公孫痤를 포로로 잡았다.
魏敗我澮,取皮牢。
魏가 澮水에서 趙를 패퇴시키고 皮牢를 탈취하였다.
成侯與韓昭侯遇上黨。
성후가 韓昭侯와 上黨에서 만났다.
十四年,與韓攻秦。
성후14년(기원전361년)에 韓과 함께 秦을 공격하였다.
十五年,助魏攻齊。
성후15년(기원전360년)에 魏를 도와 齊를 공격하였다.
▶ 湪澤: 濁澤. 지금의 河南省 長葛縣 서쪽.
十六年,與韓、魏分晉,封晉君以端氏。
성후16년(기원전359년), 趙가 韓, 魏와 함께 晉을 나누어 갖고 晉의 군주를 端氏縣에 봉하였다.
十七年,成侯與魏惠王遇葛孽。
성후17년(기원전358년)에 성후가 魏惠王과 葛孽에서 만났다.
十九年,與齊、宋會平陸,與燕會阿。
성후19년(기원전356년)에 齊와 宋을 平陸에서 회맹하고, 燕과는 阿에서 회맹하였다.
二十年,魏獻榮椽,因以為檀臺。
성후20년(기원전355년)에 魏가 좋은 목재를 보내와 그것으로 檀臺를 만들었다.
二十一年,魏圍我邯鄲。
성후21년(기원전354년)에 魏가 趙의 한단을 포위하였다.
二十二年,魏惠王拔我邯鄲,齊亦敗魏於桂陵。
성후22년(기원전353년)에 위혜왕이 趙의 한단을 함락하였으나, 齊 역시 桂陵에서 魏를 무찔렀다.
二十四年,魏歸我邯鄲,與魏盟漳水上。
성후24년(기원전351년)에 魏가 趙에 한단을 돌려주니, 魏와 漳水에서 회맹하였다.
秦攻我藺。
秦이 趙의 藺을 공격하였다.
二十五年,成侯卒。
성후가 재위25년(기원전350년) 만에 죽었다.
公子紲太子肅侯爭立,紲敗亡奔韓。
공자 緤과 태자 肅侯가 자리를 다투었으나 설이 패해 韓으로 달아났다.
▶ 榮椽: 좋은 목재로 서까래로 사용하였다.
▶ 肅侯: 趙肅侯. 전국시대 趙의 제5대 군주로 이름은 語이며 조성후 조종의 아들이다.
肅侯元年,奪晉君端氏,徙處屯留。
숙후원년(기원전349년), 晉 군주가 있는 端氏縣을 빼앗고 屯留로 옮겼다.
二年,與魏惠王遇於陰晉。
숙후2년(기원전348년), 魏혜왕과 陰晉에서 만났다.
三年,公子范襲邯鄲,不勝而死。
숙후3년(기원전347년), 공자 趙范이 한단을 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四年,朝天子。
숙후4년(기원전346년), 주나라 천자에게 조회하였다.
六年,攻齊,拔高唐。
숙후6년(기원전344년), 齊를 공격해 高唐을 빼앗았다.
七年,公子刻攻魏首垣。
숙후7년(기원전343년), 공자 刻이 魏의 首垣을 공격하였다.
十一年,秦孝公使商君伐魏,虜其將公子卬。
숙후11년(기원전339년), 秦孝公이 商君(: 상앙)에게 魏를 공격하게 하여 魏將 공자 卬을 포로로 잡았다.
趙伐魏。
趙가 魏를 공격하였다.
十二年,秦孝公卒,商君死。
숙후12년(기원전338년), 秦孝公이 죽고 商君도 죽었다.
十五年,起壽陵。
숙후15년(기원전335년), 壽陵을 축조하였다.
魏惠王卒。
魏혜왕이 죽었다.
▶ 肅侯: 趙肅侯. 전국시대 趙의 제5대 군주로 이름은 語이며 조성후 조종의 아들이다.
▶ 奪晉君端氏: 기원전376년 晉은 靜公 때 韓·魏·趙의 三晉에게 멸망하여 단지현에 봉해졌었다. 端氏는 지금의 山西省 沁水縣 동북쪽이다.
[史記世家]권39. 晉世家
▶ 商君: 商鞅. 전국시대 法家를 대표하는 인물로 衛 공실의 후예로 魏에서 관직을 구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자 秦으로 가서 孝公에게 패업을 달성하는 방법을 유세하고 큰 신임을 얻어 左庶長에 임명되었다.
河西의 전쟁 중에 공을 세워 商邑을 하사받아서 商君, 혹은 商鞅으로 일컫게 되었다. 그는 秦의 富國強兵을 위해 變法을 시행하였다.
十六年,肅侯游大陵,出於鹿門,大戊午扣馬曰:
「耕事方急,一日不作,百日不食。」
숙후16년(기원전334년), 숙후가 大陵을 유람하려고 鹿門을 나서는데, 재상 大戊午가 말을 가로막으면서 말하였다.
“농사일이 한창 시급하니 하루 일하지 않으면 100일을 먹지 못합니다. ”
肅侯下車謝。
숙후가 수레에서 내려 사죄하였다.
▶ 大戊午: 趙의 재상.
▶ 扣馬(구마): 말고삐를 당기다. 扣: 치다, 당기다.
▶ 作: 경작하다.
▶ 謝: 사죄하다.
十七年,圍魏黃,不克。
숙후17기원전333년, 魏의 黃城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筑長城。
장성을 쌓았다.
十八年,齊、魏伐我,我決河水灌之,兵去。
숙후18년(기원전332년), 齊와 魏가 趙를 공격했고, 趙는 황하의 물을 터서 대니, 적군이 물러갔다.
二十二年,張儀相秦。
숙후22년(기원전328년), 張儀가 秦의 재상이 되었다.
趙疵與秦戰,敗,秦殺疵河西,取我藺、離石。
趙疵가 秦과 싸워 패하자 秦은 조자를 하서에서 죽이고 趙의 藺과 離石을 탈취하였다.
二十三年,韓舉與齊、魏戰,死于桑丘。
숙후23년(기원전327년) 韓擧가 齊, 魏와 싸우다 桑丘에서 전사하였다.
▶ 張儀: 전국시대 魏의 모사. 蘇秦의 주선으로 秦혜문왕 때 재상이 되었다. 연횡책을 주창하면서, 韓魏趙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秦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다.
▶ 趙疵: 전국책에는 趙莊으로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328년 趙가 秦에게 패하자 조장은 하서에서 秦에 의해 죽었다. <전국책 趙策>
二十四年,肅侯卒。
숙후24년(기원전326년)에 숙후가 죽었다.
秦、楚、燕、齊、魏出銳師各萬人來會葬。
秦, 楚, 燕, 齊, 魏가 정예병을 각 1만 명씩을 보내 장례에 참가하였다.
子武靈王立。
아들 武靈王이 즉위하였다.
▶ 武靈王: 전국시대 趙 군주로 이름은 雍으로 조숙후의 아들이다.
秦의 원교근공책으로 다른 나라들을 압박하자 무령왕은 胡와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갔다. 胡服을 입고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권장하는 정책을 펼쳐 국력이 커졌다.
武靈王元年,陽文君趙豹相。
무령왕 원년(기원전325년)에 陽文君 趙豹가 재상이 되었다.
梁襄王與太子嗣,韓宣王與太子倉來朝信宮。
梁襄王과 태자 嗣, 韓宣王과 태자 倉이 信宮에 와서 조회하였다.
武靈王少,未能聽政,博聞師三人,左右司過三人。
무령왕이 어려서 정사를 처리할 수 없으므로, 견문이 넓은 관리 세 사람과 좌우 司過 세 사람을 두었다.
及聽政,先問先王貴臣肥義,加其秩;
國三老年八十,月致其禮。
정사를 처리하게 되니, 먼저 선왕 때의 대신인 肥義에게 물어보고 그들의 봉록을 높여 주었고, 나라 안의 나이 80이 넘은 三老에게 매달 예물을 보냈다.
▶ 武靈王: 趙武靈王.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雍이고, 肅侯의 아들이다. 무령왕19년 胡服을 입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시행해 유목 부족을 방어하였다. 中山을 공격해 멸망시키고, 林胡와 樓煩을 격파하는 등 국세를 크게 신장시켰다. 군사개혁을 시도했고, 변방을 개척해 나갔다. 무령왕27년 둘째 아들 何(: 趙惠文王)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맏아들 章을 代安陽君에 봉하자 장이 불만을 품고 병사를 일으켜 왕위를 다투다 실패하고 달아나 주보가 사는 沙丘宮에 머물렀다. 李兌가 주보의 저택을 석 달 동안 포위하자 공자 장이 먼저 죽고 무령왕도 자신의 궁에 유폐된 채 굶어 죽었다.
▶ 陽文君 趙豹: 조 무령왕 재위 초기의 趙의 재상으로 양문군에 봉해졌다.
▶ 梁襄王: 魏襄王. 전국시대 魏의 군주로 이름은 嗣이고, 魏惠王의 아들이다. 秦이 여러 차례 魏를 공격해 魏가 자주 패하였다. 처음에 河西의 땅을 秦에 주었는데, 결국 上郡의 영토가 모두 秦 수중에 들어갔다.
▶ 梁: 魏. 기원전340년 魏는 齊와의 전쟁에 패하여 安邑에서 동쪽인 大梁으로 천도하게 되며, 그 이후 魏는 梁으로 불리게 되었다.
▶ 韓宣王: 전국시대 韓의 군주로 韓宣惠王. 韓威侯라고도 하며 이름은 康이다. 기원전323년 公孫衍의 縱橫論에 따라 魏, 越, 燕, 中山国등이 王을 칭하고 韓과 연합하여 秦에 대항하였다.
▶ 司過: 신하들의 잘못을 시정하는 관리.
▶ 肥義: 선군의 貴臣.
▶ 秩: 녹봉. 등급.
▶ 三老: 퇴임한 老臣이나 덕망이 높은 세 명의 노인.
三年,城鄗。
무령왕3년(기원전323년)에 鄗城을 修築하였다.
四年,與韓會于區鼠。
무령왕4년(기원전322년)에 韓과 區鼠에서 회맹하였다.
五年,娶韓女為夫人。
무령왕5년(기원전321년)에 韓女를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八年,韓擊秦,不勝而去。
무령왕8년(기원전318년)에 韓이 秦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五國相王,趙獨否,曰:
「無其實,敢處其名乎!」
다섯 나라가 서로 王을 칭하려 함에, 趙의 군주만 칭왕하지 않고 말하였다.
“알맹이도 없으면서 감히 그런 명분만 自處하겠는가!”
令國人謂已曰「君」。
趙 사람들에게 자신을 <君>으로 부르라고 명하였다.
▶ 五國相王: 전국시대 칠웅 중 秦과 楚를 제외한 다섯 나라. 기원전323년에 燕은 齊를 견제하기 위해 韓, 趙, 魏, 中山國과 서로 王이라 부르기로 하는 이른바 ‘五國相王’이라는 동맹을 맺었다. 燕도 易王이 이때부터 王號를 사용하였다.
九年,與韓、魏共擊秦,秦敗我,斬首八萬級。
무령왕9년(기원전317년)에 韓, 魏와 함께 秦을 공격했으나, 秦은 물리치고 8만의 首級을 베었다.
齊敗我觀澤。
齊가 觀澤에서 趙를 물리쳤다.
十年,秦取我中都及西陽。
무령왕10년(기원전316년)에 秦이 趙의 中都와 西陽을 빼앗았다.
齊破燕。
齊가 燕과 싸워 이겼다.
燕相子之為君,君反為臣。
燕의 재상 子之가 군주가 되고 군주가 도리어 신하가 되었다.
十一年,王召公子職於韓,立以為燕王,使樂池送之。
무령왕11년(기원전315년)에 무령왕이 韓에서 公子 職을 불러 燕王으로 세우고 樂池에게 호송케 하였다.
十三年,秦拔我藺,虜將軍趙莊。
무령왕13년(기원전313년)에 秦이 趙의 藺을 함락시키고 장군 趙莊을 포로로 잡았다.
楚、魏王來,過邯鄲。
楚왕과 魏왕이 한단을 방문하였다.
十四年,趙何攻魏。
무령왕14년(기원전312년)에 趙何가 魏를 공격하였다.
▶ 燕相子之為君: 子之는 전국시대 燕의 權臣. 姬姓. 燕王噲의 재상이 되었는데 권력을 장악하고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였다. 연왕 쾌가 蘇代와 鹿毛壽의 말만 듣고 그에게 왕위를 양위하였다. 자지가 왕위에 오른 일은 燕 지배층의 불만을 샀고, 子之는 兵權을 장악하고 신진 세력을 대거 등용하며 귀족들의 반발을 억누르려 했지만, 기원전314년 噲의 太子인 姬平과 귀족들이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子之는 반란을 진압했지만, 燕의 국력은 크게 쇠퇴하였다. 齊宣王이 燕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쳐들어오면서 燕은 도읍인 薊城이 함락되었고, 齊 사람이 자지를 잡아 젓을 담고 연왕 噲는 자살하였다. <[史記世家]권34. 燕召公世家>
▶ 王召公子職於韓: <燕世家>에는
“조왕이 代의 재상 趙固에게 공자 稷을 燕에서 맞아들여 호송하여 진왕으로 옹립하게 하니 그가 秦昭王이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史記世家]권34. 燕召公世家>
十六年,秦惠王卒。
무령왕16년(기원전310년)에 秦惠王이 죽었다.
王遊大陵。
무령왕이 大陵을 유람하였다.
他日,王夢見處女鼓琴而歌詩曰:
「美人熒熒兮,顏若苕之榮。
命乎命乎,曾無我嬴!」
후일 무령왕이 꿈에서 처녀를 보았는데 비파를 타고 시를 지어 노래하였다.
“미인에게 윤기가 흐르도다, 얼굴은 활짝 핀 능소화 같구나.
운명이다, 운명이로다. 누구도 나 嬴을 알아주지 않는구나!”
異日,王飲酒樂,數言所夢,想見其狀。
다음 날에 왕이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몇 번이나 꿈을 말하며 그 상황을 그리워하였다.
吳廣聞之,因夫人而內其女娃嬴。孟姚也。
吳廣이 이를 듣고 부인을 통해 그의 딸 娃嬴을 궁중으로 들여보내니 그녀가 孟姚이다.
孟姚甚有寵於王,是為惠后。
맹요가 왕의 총애를 듬뿍 받으니 그녀가 惠后이다.
▶ 熒熒: 광채가 곱고 아름답다.
▶ 苕: 능소화.
▶ 孟姚: 靈吳女. 娃嬴. 趙 武靈王의 王后이다.
당초 무령왕은 韓왕의 딸을 인으로 삼았는데, 그 부인이 아들인 章을 낳으니, 그 부인을 왕후로 삼고 아들 章을 태자로 삼았다. 그후 맹요를 얻어 맹요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何이다. 무령왕은 왕후와 태자를 폐하고, 맹요를 왕후로 세워 惠后라 하고, 何를 태자로 삼으니 그가 惠文王이다.<列女傳>
十七年,王出九門,為野臺,以望齊、中山之境。
무령왕17년(기원전309년)에 왕이 九門을 나와 野臺를 쌓아 齊와 중산국 변방의 국경을 살폈다.
十八年,秦武王與孟說舉龍文赤鼎,絕臏而死。
무령왕18년(기원전308년)에 秦武王이 孟說과 용무늬로 장식된 붉은 鼎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끊어져 죽었다.
趙王使代相趙固迎公子稷於燕,送歸,立為秦王,是為昭王。
조왕이 代의 재상 趙固에게 공자 稷을 燕에서 맞아들여 秦으로 호송하여 진왕으로 옹립하게 하니 그가 秦昭王이다.
▶ 秦武王: 秦의 제27대 군주로 성은 嬴, 名은 蕩이다. 시호는 武王이다. <사기> ‘秦始皇本紀’에는 悼武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秦의 제26대 군주인 惠文王의 아들이며, 제28대 昭襄王의 이복형이다. 힘겨루기를 좋아했던 무왕은 力士인 孟說과 청동으로 된 큰 솥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臏: 정강이뼈.
▶ 昭王: 秦昭王. 성은 嬴, 名은 則이며, 稷이라고도 한다. 시호는 昭襄王이며, 昭王이라고도 부른다. 秦의 제26대 군주인 惠文王의 아들이며, 제27대 武王의 이복동생이다. 소양왕은 기원전307년 무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무왕에게 아들이 없었으므로 당시 燕에 인질로 가 있던 이복동생 소양왕이 왕위를 잇게 되었다.
十九年春正月,大朝信宮。
무령왕19년 봄 정월에 信宮에서 조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다.
召肥義與議天下,五日而畢。
肥義를 불러 천하의 일을 의논하고, 5일 만에 끝났다.
王北略中山之地,至於房子,遂之代,北至無窮,西至河,登黃華之上。
무령왕은 북쪽으로 중산국과의 경계를 순시하여 房子縣에 이르러 代 땅에 까지 갔으며, 북쪽으로 無窮에까지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러 黃華山정상에 올랐다.
▶ 略: 순시하다.
召樓緩謀曰:
「我先王因世之變,以長南藩之地,屬阻漳、滏之險,立長城,又取藺、郭狼,敗林人於荏,而功未遂。
今中山在我腹心,北有燕,東有胡,西有林胡、樓煩、秦、韓之邊,而無彊兵之救,是亡社稷,柰何?
夫有高世之名,必有遺俗之累。吾欲胡服。」
樓緩을 불러 계획을 말하였다.
“우리 선왕은 세상의 변화에 따라 남쪽 屬國의 땅을 넓히고, 漳水와 滏水의 험난한 지세를 연결하여 장성을 쌓았으며, 또 藺과 郭狼을 빼앗고 荏에서 林胡를 무찌르셨으나 그 공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지금 중산은 우리 뱃속 가운데에 있고, 북쪽으로는 燕이 있고, 동쪽으로는 東胡가 있으며, 서쪽은 林胡, 樓煩, 秦, 韓의 변경이니, 강한 병력의 지원이 없으면 사직이 망하게 생겼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세상에 뛰어난 명성을 가지면 틀림없이 세속의 비난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胡服을 입고자 한다. ”
樓緩曰:
「善。」
누완이 말하였다.
“좋습니다.”
群臣皆不欲。
신하들은 모두 원치 않았다.
▶ 樓緩: 전국시대 조 무령왕의 대신. 유세객으로 趙에 벼슬하다가 후에 秦에 가서 相國이 되었다.
▶ 藩: 屬國. 속지.
▶ 屬: 잇다. 연결시키다.
▶ 胡: 중국 동북쪽의 유목민족. 東胡. 훗날의 鮮卑.
▶ 遺俗: 습속. 옛날부터 전해온 풍속.
▶ 累: 얽매이다. 견제하다.
<아래의 내용은<戰國策>趙策에 기록되어 있다. >
於是肥義侍,王曰:
「簡、襄主之烈,計胡、翟之利。
為人臣者,寵有孝弟長幼順明之節,通有補民益主之業,此兩者臣之分也。
今吾欲繼襄主之跡,開於胡、翟之鄉,而卒世不見也。
為敵弱,用力少而功多,可以毋盡百姓之勞,而序往古之勳。
夫有高世之功者,負遺俗之累;
有獨智之慮者,任驁民之怨。
今吾將胡服騎射以教百姓,而世必議寡人,柰何?」
이때 肥義가 왕을 모셨는데 왕이 말하였다.
“簡子와 襄子 두 주군의 공적을 염두에 두고 胡와 翟의 이로움을 따지고 있다.
신하된 자는 총애를 받음에 장유에 따른 사양의 예절을 가지며, 현달함에는 백성을 돕고 군주를 이롭게 하는 사업을 가져야 하니, 이 두 가지가 신하의 본분이다.
이제 나는 襄主의 업적을 이어받아 胡와 翟의 거주지를 개척하고자 하는데, 세상을 다 돌아보아도 인물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적을 쇠약하게 하여 적은 힘으로 큰 공을 이루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도 지난날과 같은 공훈을 시작하고 싶다.
무릇 세상에 뛰어난 공훈을 이루는 자는 습속을 위배한다는 비난을 받고, 독특한 지혜를 고려하는 자는 오만하다는 백성의 원망을 받는다.
지금 내가 백성들에게 호복을 입히고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법을 백성에게 가르치려고 하는데, 世人은 틀림없이 과인을 의논 거리로 삼을 터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 於是: 당시.
▶ 肥義: 趙 대부. 惠文王때의 재상,
▶ 簡, 襄主: 趙簡子와 趙襄子. 趙簡子는 趙鞅으로 춘추시대 말기 秦의 大夫. 趙孟 또는 志父로도 불린다. 晉 내부에서 6卿이 세력 다툼을 벌일 때 2경인 范氏와 中行氏를 몰아내고 趙를 일으키는 바탕을 마련하였다. 趙襄子는 毋卹이며 趙簡子의 아들이다. 춘추시대 晉의 대부가 되며 조씨 가문의 수령으로 전국시대에 趙의 창시자가 된다. 시호가 양이므로 조양자라고 칭한다.
▶ 烈: 공업. 공적.
▶ 胡, 翟: 胡狄. 북방의 두 소수민족.
▶ 寵: 전국책 조책에는 ‘窮’으로 기록되어 있다.
▶ 通: 현귀하다. 지위가 높고 귀하다.
▶ 跡: 업적. 사적.
▶ 卒世: 온 세상. 죽을 때까지.
▶ 序: 차례. 순서.
▶ 驁: 傲와 통용된다. 오만하다. 거만하다.
肥義曰:
「臣聞疑事無功,疑行無名。
王既定負遺俗之慮,殆無顧天下之議矣。
夫論至德者不和於俗,成大功者不謀於眾。
昔者舜舞有苗,禹袒裸國,非以養欲而樂志也,務以論德而約功也。
愚者闇成事,智者睹未形,則王何疑焉。」
비의가 대답하였다.
“신이 듣기에 의심하는 일에는 하면 공이 없고, 의심하는 행동에는 명성을 없다고 합니다.
왕께서 이미 세속의 염려를 감당하겠다고 정하셨으니, 천하의 논의는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지극한 덕을 논하는 자는 세속과 화합하지 않으며, 큰 공을 이루려고 하는 자는 대중과 謀議하지 않는 법입니다.
옛날 순임금은 有苗땅에서 그들의 춤을 추었고, 우임금은 裸國에서 상의를 벗었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즐기려는 뜻이 아니고, 덕을 논하여 공적을 추구함을 힘썼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을 성취함에 어둡고, 지혜로운 자는 형상이 있기 전에 아는 법인데, 왕께서는 무엇을 의심하십니까?”
▶ 舜舞有苗: 순임금이 三苗를 정복할 때 有苗에서 兵舞의 춤을 추었다. 有苗는 삼묘를 말하며 남방의 부족 이름이다.
▶ 禹袒裸國: 우임금이 상의를 벗고 裸國으로 들어갔다. 裸國은 중국의 서남쪽이 있는 나라로 기후가 더워 나체로 다니는 나라이므로 裸國이라 하였다.
▶ 約功: 공적을 추구하다.
▶ 闇: 暗과 같다. 어둡다.
王曰:
「吾不疑胡服也,吾恐天下笑我也。
狂夫之樂,智者哀焉;愚者所笑,賢者察焉。
世有順我者,胡服之功未可知也。
雖驅世以笑我,胡地中山吾必有之。」
무령왕이 말하였다.
“나는 호의 服飾을 의심하지 않고, 천하가 나를 비웃을까 염려한다.
우둔한 자가 즐거워함을 슬기로운 자는 슬퍼하고, 어리석은 자가 비웃음을 현명한 사람은 살피게 된다.
세상에 내 뜻을 따르는 자라고 해서 胡服의 功效를 아직 알 수는 없다.
비록 세상 사람을 몰아 나를 비웃더라도, 호의 땅과 중산 땅을 나는 반드시 차지하겠다. ”
於是遂胡服矣。
이에 왕은 마침내 호복을 입었다.
▶ 狂夫: 우둔한 사람.
▶ 驅: 몰아내다.
使王紲公子成曰:
「寡人胡服,將以朝也,亦欲叔服之。
家聽於親而國聽於君,古今之公行也。
子不反親,臣不逆君,兄弟之通義也。
今寡人作教易服而叔不服,吾恐天下議之也。
制國有常,利民為本;從政有經,令行為上。
明德先論於賤,而行政先信於貴。
今胡服之意,非以養欲而樂志也;
事有所止而功有所出,事成功立,然後善也。
今寡人恐叔之逆從政之經,以輔叔之議。
且寡人聞之,事利國者行無邪,因貴戚者名不累,故願慕公叔之義,以成胡服之功。
使紲謁之叔,請服焉。」
이어 王緤을 시켜 공자 成에게 전하였다.
“과인은 호복하고 조회하려고 하니 숙부께서도 호복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집에서는 어버이의 말씀을 따르고, 나라에서는 군주의 말을 따름이 고금의 공인된 준칙입니다.
자식이 어버이를 반대하지 않고, 신하가 군주를 거역하지 않음은 형제간의 통용되는 도리입니다.
지금 과인이 호복으로 바꾸도록 명령을 제정하였는데, 숙부께서 입지 않으신다면 천하가 의논 거리로 삼을까 염려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원칙은 백성을 이롭게 함을 근본으로 삼고, 정무를 처리하는 원칙은 명령이 실행됨을 으뜸으로 삼아야 합니다.
덕을 밝히는 일은 천민에게서 먼저 논하고, 정사를 펴는 일은 귀족에게서 먼저 신의를 얻어야 합니다.
지금 호복의 뜻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 즐기려는 뜻이 아닙니다.
일이란 도달해야 하는 목적이 있고, 공이란 드러나는 결과가 있어야 하니, 일이 성사되고 공을 세운 다음이라야 잘된 것입니다.
지금 과인은 숙부께서 정치의 원칙을 거슬러스, 공숙들의 의견을 도움까 걱정됩니다.
또 과인이 듣기에
‘나라에 이롭도록 일함에는 행동에에 사악함이 없어야 하고, 貴戚에 의지해 일함에는 명성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니, 과인은 공숙의 충의에 의존해 호복의 공효를 성취하고자 합니다.
이에 왕설을 숙부께보내어 호복을 입으시라고 청합니다.”
▶ 王紲: 趙의 대부.
▶ 公子成: 무령왕의 숙부.
▶ 兄弟: 전국책 조책에는 ‘先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 通義: 통용되는 도리.
▶ 教: 政令. 명령.
▶ 經: 원칙.
▶ 因: ~에 의지하다.
▶ 慕: 의존하다.
公子成再拜稽首曰:
「臣固聞王之胡服也。
臣不佞,寢疾,未能趨走以滋進也。
王命之,臣敢對,因竭其愚忠。
曰:臣聞中國者,蓋聰明徇智之所居也,萬物財用之所聚也,賢聖之所教也,仁義之所施也,詩書禮樂之所用也,異敏技能之所試也,遠方之所觀赴也,蠻夷之所義行也。
今王捨此而襲遠方之服,變古之教,易古人道,逆人之心,而怫學者,離中國,故臣願王圖之也。」
공자 성은 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은 이미 왕께서 호복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신은 무능한 데다 병석에 오래 누워있어 달려가 자주 여쭙지 못했습니다.
왕께서 명령을 내리셨으니 신이 감히 그에 대해 어리석으나마 충심을 피력하겠습니다.
‘신이 듣기에 중국이라는 곳은 대체로 총명과 지혜가 있는 사람이 거하는 곳이요, 만물과 재화가 모여드는 곳이며, 현자와 성인이 가르치는 곳이요, 인의가 베풀어지는 곳이며, <詩>, <書>, <禮>, <樂>이 쓰이는 곳이요, 기이하고 영민함과 기능이 시험되는 곳이며, 먼 곳에서 우러러보고 찾아오는 곳이며, 蠻夷가 의를 따라 행하는 곳입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런 것들을 버리고 먼 곳의 복식을 입어 옛날의 교화를 변경하고, 옛날의 법도를 바꾸고, 인심을 거역하고, 학자들의 가르침을 위배하여 중국의 풍속을 멀리하시니, 이러한 까닭에 신은 왕께서 이 일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 稽首: 머리를 조아리다.
▶ 不佞: 무능하다. 자신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 滋進: 거듭 말씀을 올리다. 滋는 많이.
▶ 義行: 본받다.
▶ 怫(불): 거스르다. 위배하다.
使者以報。
사신 설이 이 말을 보고하자 왕이 말하였다.
王曰:
「吾固聞叔之疾也,我將自往請之。」
“내가 본래 숙부의 병환을 들었으니, 내가 직접 가서 청해야겠다. ”
王遂往之公子成家,因自請之,曰:
무령왕은 공자 成의 집에 가서 그에게 청하였다.
「夫服者,所以便用也;禮者,所以便事也。
“무릇 옷이란 편하게 쓰는 것이고, 예의란 일을 편하게 하는 것입니다.
聖人觀鄉而順宜,因事而制禮,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성인께서는 고을을 살펴보고 그곳에 마땅함을 따르며, 일에 따라 예를 제정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 나라를 부유하게 하였습니다.
夫翦發文身,錯臂左衽,甌越之民也。
단발과 文身, 착비와 좌임은 甌越 사람의 풍속입니다.
黑齒雕題,卻冠秫絀,大吳之國也。
이를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먹물을 새기고, 물고기 껍질로 된 모자를 쓰고, 거친 옷을 입음은 大吳의 풍속입니다.
▶ 翦發文身: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하는 남방 민족의 풍속. 翦은 剪과 같다. 文은 紋과 같다.
▶ 錯臂左衽: 錯臂는 어깨에 문신을 새기는 것이며, 左衽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
▶ 甌越: 地名. 지금의 海南島 남쪽 지역.
▶ 黑齒雕題: 이빨을 검게 물들이고 이마에 검은 먹물을 넣는 일. 題는 이마.
▶ 卻冠秫絀: 물고기 껍질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붉은색의 차조 줄기를 어설프게 엮어 꿰맨 옷을 입다. 卻冠은 물고기 껍질로 만든 모자. 秫은 붉은색의 차조 줄기. 絀은 꿰매다.
▶ 大吳: 춘추시대의 吳를 가리킨다. 周나라 太王의 아들인 太伯이 왕위를 동생에게 넘기기 위해 荊蠻으로 도망하여 문신단발하고 吳의 시조가 되었다.
故禮服莫同,其便一也。
古禮에도 예의와 복장은 같지 않았지만, 그 편함은 한결같습니다.
鄉異而用變,事異而禮易。
고을이 다르면 쓰임이 달라지고, 일이 다르면 예가 바뀌는 법입니다.
是以聖人果可以利其國,不一其用;
果可以便其事,不同其禮。
이 때문에 성인은 결과적으로 그 나라에 이로우면 한 가지 방법에만 얽매이지 않았고, 그 일에 편리하다면 그의 예절을 달리하였습니다.
儒者一師而俗異,中國同禮而教離,況於山谷之便乎?
儒家에서 스승은 하나지만 습속은 다르며, 중국의 예의는 같지만 가르침은 다른데, 하물며 山谷의 편리함이겠습니까?
故去就之變,智者不能一;
遠近之服,賢聖不能同。
그러므로 거취의 변화는 지혜로운 자라도 한결같이 하지 못하였으며, 遠近의 복장은 성현이라도 같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窮鄉多異,曲學多辯。
구석진 곳에 괴이함이 많고, 편파적인 학문에 궤변이 많은 법입니다.
不知而不疑,異於己而不非者,公焉而眾求盡善也。
알지 못한다고 의심하지 않고, 자신과 다르다고 그릇되다 여기지 않는 것이, 공정하여 많은 것 중에서 가장 좋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 山谷: 산골짜기.
▶ 曲學: 편파적이고 식견이 얕은 학설.
今叔之所言者俗也,吾所言者所以制俗也。
지금 숙부의 말씀은 습속을 따름이요, 저의 말씀은 습속을 제정하는 것입니다.
吾國東有河、薄洛之水,與齊、中山同之,無舟楫之用。
우리나라는 동쪽으로 황하와 薄洛津을 齊와 중산국과 더불어 공유하면서도 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自常山以至代、上黨,東有燕、東胡之境,而西有樓煩、秦、韓之邊,今無騎射之備。
常山에서 代, 上黨에 이르는 동쪽에 燕, 동호의 국경이 있고, 서쪽에 樓煩, 秦, 韓의 국경이 있지만,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병의 방비는 없습니다.
▶ 薄洛之水: 하수의 한 나루. 薄洛津. 漳水의 별칭.
▶ 舟楫: 배.
▶ 東胡: 匈奴의 동쪽 종족.
▶ 樓煩: 北狄의 이름, 지금의 山西城寧武縣일대.
故寡人無舟楫之用,夾水居之民,將何以守河、薄洛之水;
變服騎射,以備燕、三胡、秦、韓之邊。
그 때문에 과인은 배를 사용하지 않고 물가에 사는 백성들이 앞으로 어떻게 황하와 薄洛津을 지킬까 걱정하여, 복장을 바꾸고 말을 타고 활을 쏨으로써 燕, 三胡, 秦, 韓의 국경을 지키려 합니다.
且昔者簡主不塞晉陽以及上黨,而襄主并戎取代以攘諸胡,此愚智所明也。
하물며 예전에 조간자께서 晉陽과 上黨에 요새를 설치하지 않았으나, 조양자께서 戎을 병합하여 代를 취하여 胡族들을 몰아냈으니, 이것은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가 명백히 아는 바입니다.
先時中山負齊之彊兵,侵暴吾地,系累吾民,引水圍鄗,微社稷之神靈,則鄗幾於不守也。
지난날 중산국이 齊의 강한 軍士를 등에 업고 우리 땅을 침범하여 우리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가고, 河水를 끌어들여 鄗城을 포위하였을 때, 사직의 신령들이 아니었더라면 호성은 하마터면 지키지 못하였을 터입니다.
▶ 三胡: 林胡, 樓煩, 東胡.
▶ 塞: 요새를 설치하다.
▶ 負: 의지하다.
▶ 系累: 속박하다. 구속하다.
先王丑之,而怨未能報也。
선왕들께서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셨으나, 아직 그 원한을 갚지 못하고 있습니다.
今騎射之備,近可以便上黨之形,而遠可以報中山之怨。
지금 騎射(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의 방비로서, 가깝게는 上黨의 형세를 편하게 할 수 있고, 멀리는 중산국에 대한 원한을 갚을 수 있습니다.
而叔順中國之俗以逆簡、襄之意,惡變服之名以忘鄗事之丑,非寡人之所望也。」
그런데 숙부께서는 중국의 습속에 따르시느라 간자와 양자의 뜻을 거스르고, 복장을 바꾸었다는 汚名을 싫어하여 鄗城에서의 치욕을 잊고 계시니 이는 과인이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
公字成再拜稽首曰:
「臣愚,不達於王之義,敢道世俗之聞,臣之罪也。
今王將繼簡、襄之意以順先王之志,臣敢不聽命乎!」
공자 성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신이 어리석어 왕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감히 세속의 소문을 말씀드렸으니 신의 죄입니다.
지금 왕께서 간자와 양자의 뜻을 이어서 선왕의 뜻을 따르고자 하시는데 신이 어찌 감히 왕명을 듣지 않겠습니까!”
再拜稽首。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乃賜胡服。
이에 호복을 내렸다.
明日,服而朝。
다음 날 이것을 입고 조회에 나왔다.
於是始出胡服令也。
이에 胡服令을 처음으로 내렸다.
▶ 丑: 추하다. 부끄러워하다.
趙文、趙造、周袑、趙俊皆諫止王毋胡服,如故法便。
趙文, 趙造, 周祒, 趙俊이 모두 왕에게 호복하지 말 것과 옛날과 같이 법을 변경하자고 아뢰었다.
王曰:
무령왕이 말하였다.
「先王不同俗,何古之法?
“선왕들의 습속이 다 같지 않은데 무엇이 古法인가?
帝王不相襲,何禮之循?
제왕들이 서로 이어받지 않았는데 어떤 예를 따르자는 말인가?
虙戲、神農教而不誅,黃帝、堯、舜誅而不怒。
伏羲와 神農은 교화하되 주벌하지 않았으며, 黃帝, 堯, 舜은 주벌하였으나 천하 사람이 화내지 않았다.
及至三王,隨時制法,因事制禮。
三王에 이르기까지 때에 맞춰 법을 만들고 일에 맞춰 禮를 제정하였다.
法度制令各順其宜,衣服器械各便其用。
법령과 제도는 각각 그 마땅함을 따랐고, 의복이나 기계는 각각 사용하기에 편리하였다.
故禮也不必一道,而便國不必古。
그러므로 禮란 꼭 한 가지 방법일 필요가 없으며, 나라를 편리하게 함에 반드시 옛것일 필요는 없다.
▶ 趙文, 趙造: 趙의 公族大夫.
▶ 虙戲: 伏羲. 중국 고대의 전설상의 제왕 또는 신.
3황5제 중 중국 최고의 제왕으로 친다.
'복희'라는 이름은 《역경》 〈계사전〉의 복희가 팔괘를 처음 만들고, 그물을 발명하여 어획·수렵의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 神農: 중국 고대 三皇 중의 한 사람으로 흔히 炎帝神農氏라고 불린다.
▶ 三王: 중국 古代의 세 임금. 곧 夏나라의 禹王과 殷나라의 湯王과 周나라의 文王<또는 武王>을 일컫는다.
聖人之興也不相襲而王,夏、殷之衰也不易禮而滅。
성인이 일어남에는 서로 답습하지 않아도 왕노릇할 수 있었으나, 하와 은의 쇠미에는 예를 바꾸지 않아 망하였다.
然則反古未可非,而循禮未足多也。
따라서 古法에 반한다고 하여 그르다 하여서는 안 되며, 古禮를 따른다고 해서 칭찬할 것도 못 된다.
且服奇者志淫,則是鄒、魯無奇行也;
俗辟者民易,則是吳、越無秀士也。
또 복장이 기이하여 그 뜻이 제멋대로라고 하면, 鄒와 魯에는 기이한 행동이 없었을 터이고,
풍속이 편벽다고 백성이 바뀐다면, 吳와 越에는 우수한 인물이 없을 터이다.
▶ 多: 칭찬하다.
▶ 辟: 僻과 같다. 치우치다. 편벽되다.
且聖人利身謂之服,便事謂之禮。
또 성인께서는 몸을 이롭게 함을 服이라 하였고, 일을 편히 하기 위함을 禮라고 하셨다.
夫進退之節,衣服之制者,所以齊常民也,非所以論賢者也。
나아가고 물러나는 節度와 의복의 제정은 백성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지 현자들을 논하려는 것이 아니다.
故齊民與俗流,賢者與變俱。
그러므로 백성들을 습속과 일치시키고, 현명한 사람은 변화와 함께한다.
故諺曰
『以書御者不盡馬之情,以古制今者不達事之變』。
속담에 일렀다.
‘책에 쓰인 대로만 수레를 모는 자는 말의 능력을 샅샅이 알 수 없고, 古法으로 지금을 통제하려는 자는 일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循法之功,不足以高世;
法古之學,不足以制今。
옛법을 따르는 공효는 세상에 높게 드러날 수 없고,
옛날을 본받는 학문으로는 현재를 통제하기 부족하다.
子不及也。」
그대들은 이 점에 미치지 못하였다. ”
遂胡服招騎射。
이리하여 호복하고 騎兵과 射兵을 모집하였다.
▶ 齊: 가지런하다. 동등하다.
▶ 齊民: 평민.
二十年,王略中山地,至寧葭;
西略胡地,至榆中。
무령왕20년(기원전306년)에 왕은 중산의 땅을 순시하며 寧葭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胡 땅을 순시하여 楡中에 이르렀다.
林胡王獻馬。
林胡의 왕이 말을 바쳤다.
歸,使樓緩之秦,仇液之韓,王賁之楚,富丁之魏,趙爵之齊。
돌아와서 樓緩을 秦에, 仇液을 韓에, 王賁을 楚에, 富丁을 魏에, 趙爵을 齊에 사신으로 보냈다.
代相趙固主胡,致其兵。
代의 宰相 趙固가 胡 땅을 관할하면서 호 땅의 병사를 모집하였다.
▶ 略: 순시하다.
▶ 致: 모집하다.
二十一年,攻中山。
무령왕21년(기원전305년)에 중산국을 공격하였다.
趙袑為右軍,許鈞為左軍,公子章為中軍,王并將之。
趙袑가 우군, 許鈞이 좌군, 공자 章이 중군이 되었고, 무령왕이 삼군을 통솔하였다.
牛翦將車騎,趙希并將胡、代。
牛翦은 전차와 기병을 지휘하고, 趙希는 胡와 代의 병사를 거느렸다.
趙與之陘,合軍曲陽,攻取丹丘、華陽、鴟之塞。
趙希는 軍士를 이끌고 골짜기를 통과하여 曲陽에서 군을 합류시켰고 丹丘, 華陽, 鴟의 요새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王軍取鄗、石邑、封龍、東垣。
왕의 軍隊는 鄗, 石邑, 封龍, 東垣을 탈취하였다.
中山獻四邑和,王許之,罷兵。
중산국이 4개의 읍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왕이 이를 허락하고 撤軍하였다.
▶ 陘: 골짜기. 산줄기가 끊어진 곳.
二十三年,攻中山。
무령왕23년(기원전303년)에 중산을 공격하였다.
二十五年,惠后卒。
무령왕25년(기원전301년)에 惠后가 죽었다.
使周袑胡服傅王子何。
周袑에게 호복을 입고 왕자 趙何를 가르치게 하였다.
二十六年,復攻中山,攘地北至燕、代,西至雲中、九原。
무령왕26년(기원전300년)에 다시 중산을 공격하여 북쪽으로 燕과 代까지, 서쪽으로는 雲中과 九原에 이르는 땅을 빼앗았다.
▶ 周袑: 周紹로도 쓴다. 왕자 趙何의 스승.
▶ 傅: 스승.
▶ 王子何: 趙何. 무령왕의 아들.
二十七年五月戊申,大朝於東宮,傳國,立王子何以為王。
무령왕27년(기원전299년) 5월 무신일에 동궁에서 왕위를 조회를 성대하게 열어, 傳國하고 왕자 何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王廟見禮畢,出臨朝。
왕은 종묘에 참배하는 예를 마치고 나와 조정의 일에 임하였다.
大夫悉為臣,肥義為相國,并傅王。
대부들이 모두 신하가 되었고 肥義는 상국 겸 왕의 스승이 되었다.
是為惠文王。
그가 惠文王이다.
惠文王,惠后吳娃子也。
혜문왕은 혜후 吳娃의 아들이다.
武靈王自號為主父。
무령왕은 자신을 主父라 칭하였다.
▶ 傳國: 왕위를 전하다. 당초 武靈王이 장자 章을 태자로 삼았는데, 후에 吳廣의 딸 孟姚를 들이고 총애하여 아들 何를 낳았다. 何를 사랑하여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즉위시키려고 하여 마침내 章을 폐하고 하에게 나라를 전하였다.
▶ 廟見禮: 종묘에 참배하는 禮.
▶ 吳娃: 조하의 어머니는 吳廣의 장녀로 孟姚라 불린다.
▶ 主父: 나라 주인의 아버지라는 뜻.
▶ 惠文王: 趙惠文王. 전국시대 趙의 제7대 군주로 趙에서 최초로 ‘王’의 칭호를 사용하였다. 성은 嬴, 씨는 趙, 이름은 何이다.
武靈王의 왕호는 追號한 것이다.
主父欲令子主治國,而身胡服將士大夫西北略胡地,而欲從雲中、九原直南襲秦,於是詐自為使者入秦。
주부는 아들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자신은 호복을 입고 병사와 대부들을 거느리고 서북의 호 땅을 순행하고, 운중과 구원에서 곧장 남쪽으로 秦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이에 자신을 사신이라 속이고 秦으로 들어갔다.
秦昭王不知,已而怪其狀甚偉,非人臣之度,使人逐之,而主父馳已脫關矣。
秦昭王은 몰랐으나, 얼마 뒤 그의 모습이 대단히 당당하여 신하의 풍도가 아님을 이상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뒤쫓게 했으나 주부는 말을 달려 이미 관문을 벗어난 후였다.
審問之,乃主父也。
자세히 물었더니 바로 주부였다.
秦人大驚。
秦 군주가 크게 놀랐다.
主父所以入秦者,欲自略地形,因觀秦王之為人也。
주부가 秦에 들어간 까닭은 친히 지형을 살피고 그 틈에 秦왕의 사람됨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 審問: 자세히 묻다.
惠文王二年,主父行新地,遂出代,西遇樓煩王於西河而致其兵。
혜문왕2년(기원전297년)에 주부가 새로 점령한 땅을 순행하다가 代땅을 나와 서쪽 西河에서 樓煩王을 만나 그의 군사를 징발하였다.
三年,滅中山,遷其王於膚施。
혜문왕3년(기원전296년)에 중산을 멸망시키고 그 왕을 膚施縣으로 옮겼다.
起靈壽,北地方從,代道大通。
靈壽城을 축조하니 북쪽 땅이 趙에 속하게 되고, 代로 가는 길이 크게 열렸다.
還歸,行賞,大赦,置酒酺五日,封長子章為代安陽君。
주부는 돌아와 行賞하고 대사면을 행하면서 닷새 동안 술자리를 열었고, 큰아들 章을 代의 安陽君에 봉하였다.
章素侈,心不服其弟所立。
장은 바탕이 사치스럽고, 마음으로 그 동생이 즉위함에 승복하지 않고 있었다.
主父又使田不禮相章也。
주부는 또 田不禮를 章의 相으로 임명하였다.
▶ 行: 巡行하다.
▶ 酒酺: 술자리를 열다.
▶ 章: 趙章. 무령왕의 장남.
▶ 田不禮: 宋康王의 대신이었으나 趙에 사신으로 왔다가 조 무령왕이 공자 章을 代의 安陽君에 봉하면서 안양군의 相으로 임명하였다.
李兌謂肥義曰:
李兌가 肥義에게 말하였다.
「公子章彊壯而志驕,黨眾而欲大,殆有私乎?
“공자 章이 장년이 되고 마음이 교만한 데다 무리를 모으고 야심이 크니, 사심을 가졌지 않겠습니까?
田不禮之為人也,忍殺而驕。
田不禮는 사람됨이 잔인하고 오만합니다.
二人相得,必有謀陰賊起,一出身徼幸。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치면 틀림없이 반란 음모를 꾸며 한번 나서서 요행을 바랄 터입니다.
夫小人有欲,輕慮淺謀,徒見其利而不顧其害,同類相推,俱入禍門。
무릇 소인이 욕심을 품으면 생각이 가볍고 계획이 천박하여 한갖 그 이익만 보지 그 피해는 돌보지 않는데, 같은 부류가 밀어주니 모두 재앙의 문으로 들어설 터입니다.
以吾觀之,必不久矣。
제가 보기에 분명 멀지 않았습니다.
子任重而勢大,亂之所始,禍之所集也,子必先患。
그대는 책임이 무겁고 권세가 크니, 반란의 시작처요, 재앙의 집결처가 되리니, 그대는 반드시 환란에 미리 손을 써야 합니다.
▶ 李兌: 趙의 大夫. 惠王 4년, 주부와 아들 혜문왕이 沙丘의 행궁으로 놀러 갔을 때 맏아들 章이 난을 일으켰다. 그때 혜문왕의 숙부인 公子成과 대부인 李兌가 동조하여 主父(: 武靈王)를 행궁에 석 달 남짓 가두어 버렸는데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이미 마른 해골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 肥義: 趙 대부. 惠文王 때의 재상,
▶ 彊壯: 장년이 되다.
▶ 忍殺: 잔인하다.
▶ 相得: 서로 투합하다.
▶ 出身: 앞장서서 난을 일으키다.
▶ 相推: 서로 종용하다.
仁者愛萬物而智者備禍於未形,不仁不智,何以為國?
어진 사람은 만물을 사랑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화가 드러나기 전에 대비하는 법인데, 어질지도 지혜롭지도 않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子奚不稱疾毋出,傳政於公子成?
그대는 어찌 병을 핑계대고 두문불출하고, 정치를 공자 成에게 맡기지 않습니까?
毋為怨府,毋為禍梯。」
원망의 근원지도 재앙의 유래도 되지 마십시오. ”
▶ 府: 사물이 모이는 곳.
▶ 禍梯: 재앙의 원인. 禍階
肥義曰:
비의가 말하였다.
「不可,昔者主父以王屬義也,曰:
『毋變而度,毋異而慮,堅守一心,以歿而世。』
義再拜受命而籍之。
“안 됩니다.
예전에 主父께서 혜문왕을 이 비의에게 부탁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법도를 바꾸지 말고, 너의 생각을 바꾸지 말며, 한마음으로 굳게 지켜서 너의 일생을 마쳐라’
라고 하셨소.
이 비의는 재배하며 그 명을 받아 기록해 두었소.
今畏不禮之難而忘吾籍,變孰大焉。
지금 전불례의 난을 두려워하여 내가 기록한 바를 잊는다면, 이보다 큰 변절이 무엇이겠소!
進受嚴命,退而不全,負孰甚焉。
나아가 엄명을 받고도 물러나 온 힘을 다하지 않으면, 이보다 심한 배신이 무엇이겠소!
變負之臣,不容於刑。
변절하고 배신하는 신하를 형법이 용납하지 않소.
▶ 籍: 책에 기록하다.
▶ 變: 변절하다.
▶ 負: 은혜를 배반하다. 신의를 저버리다.
諺曰
『死者復生,生者不愧』。
속담에 이르기를,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을 때, 산 사람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라고 하였소.
吾言已在前矣,吾欲全吾言,安得全吾身!
나는 이미 전에 말해 두었고 나의 말을 온전하게 하고자 하니, 어찌 내 몸을 온전하게 할 수 있겠소!
且夫貞臣也難至而節見,忠臣也累至而行明。
또 정조가 있는 신하는 난이 닥쳐야 그 절개가 드러나고, 충신은 폐단이 닥쳐야 그 행동이 분명해지는 법이오.
子則有賜而忠我矣,雖然,吾有語在前者也,終不敢失。」
당신이 내게 충고를 주시지만, 나는 내가 전에 한 말을 죽을 때까지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 累: 얽매다. 누를 끼치다.
李兌曰:
「諾,子勉之矣!
吾見子已今年耳。」
涕泣而出。
이태가 말하기를,
“알겠소, 그대는 애쓰십시오!
그대를 보는 것도 올해뿐이겠군요.”
라며 눈물을 흘리며 나갔다.
李兌數見公子成,以備田不禮之事。
이태는 공자 성을 여러 차례 만나 전불례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異日肥義謂信期曰:
후일 비의가 信期에게 말하였다.
「公子與田不禮甚可憂也。
“공자 章과 전불례가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其於義也聲善而實惡,此為人也不子不臣。
그들은 義理에 있어서 소리는 착하되 실상은 모질고, 그 사람됨이 자식답지도 신하답지도 않습니다.
吾聞之也,姦臣在朝,國之殘也;讒臣在中,主之蠹也。
제가 듣기에 간신이 조정에 있음은 나라의 화근이고, 참언하는 신하가 궁중에 있음은 군주의 좀벌레라고 합니다.
此人貪而欲大,內得主而外為暴。
이런 자들은 탐욕스럽고 야심이 커서 안으로는 군주의 총애를 얻고 밖으로는 포악하게 굽니다.
矯令為慢,以擅一旦之命,不難為也,禍且逮國。
명령을 사칭하여 무례하게 굴다가, 갑자기 멋대로 명령을 내리는 짓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 재앙이 나라에 미칠 터입니다.
▶ 残: 화근. 재난.
▶ 蠹: 좀벌레.
▶ 矯令: 君令을 사칭하다.
▶ 慢: 무례하다.
▶ 逮: 미치다. 이르다.
今吾憂之,夜而忘寐,饑而忘食。
지금 나는 이것을 걱정하여 밤에는 잠을 못 자고 굶주려도 먹는 것을 잊을 정도입니다.
盜賊出入不可不備。
도적이 오가니 방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自今以來,若有召王者必見吾面,我將先以身當之,無故而王乃入。」
지금부터 왕을 부르면 반드시 나를 먼저 만나라고 하여, 내가 먼저 몸으로 막아서서 별일 없으면 왕께서 드시도록 하겠습니다.”
信期曰:
「善哉,吾得聞此也!」
신기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듣게 되다니!”
▶ 當: 막다. 저지하다.
四年,朝群臣,安陽君亦來朝。
혜문왕4년(기원전295년)에 신하들을 입조하게 하니 安陽君도 조회에 왔다.
主父令王聽朝,而自從旁觀窺群臣宗室之禮。
주부는 왕에게 조정 일을 맡게 하고 자신은 곁에서 신하들과 종친들의 예의를 관찰하였다.
見其長子章傫然也,反北面為臣,詘於其弟,心憐之,於是乃欲分趙而王章於代,計未決而輟。
맏아들 章이 실의한 모습으로 오히려 북면하여 신하로서 자기 동생에게 복종함을 보고 마음속으로 가련하게 여기고, 趙를 나누어 章을 代의 왕으로 삼으려 했으나, 계획을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어두었다.
▶ 安陽君: 무령왕의 맏아들 趙章.
▶ 傫然: 실망한 모양. 傫는 지칠 ‘루’. 실망하는 모양. 뜻을 얻지 못한 모습.
▶ 詘: 굴복하다.
主父及王游沙丘,異宮,公子章即以其徒與田不禮作亂,詐以主父令召王。
주부와 혜문왕이 沙丘로 놀러 갔을 때 서로 다른 궁에 묵었는데, 공자 장이 곧 그 무리와 전불례를 동원하여 난을 일으키고 주부의 명이라 속여 혜문왕을 불렀다.
肥義先入,殺之。
비의가 먼저 들어오자 그를 죽였다.
高信即與王戰。
高信은 즉시 혜문왕과 함께 공자 장과 싸웠다.
公子成與李兌自國至,乃起四邑之兵入距難,殺公子章及田不禮,滅其黨賊而定王室。
공자 成과 이태가 도성에서 달려와 네 개 읍의 병사를 일으켜 난을 막고, 공자 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그 잔당을 誅滅하여 왕실을 안정시켰다.
▶ 國: 都城.
▶ 距難: 변란을 막다.
※沙丘之亂: 기원전295년, 趙 武靈王은 秦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만 전념하겠다고 왕위를 태자인 何에게 물려주니 그가 바로 惠文王이다. 그리고 자신을 主父라고 칭하였다.
당초 태자를 정할 때 長子인 章을 세웠으나, 章을 폐위하고 王子 何를 군주로 세우자, 맏아들인 章이 원한을 품었고, 惠王 4년에 父子 세 사람이 沙丘의 행궁으로 놀러 갔을 때, 태자 장이 난을 일으켰다. 그때 도성에 있던 公子 成과 대부인 李兌가 동조하여 主父(: 武靈王)를 沙宮에 석 달여 가두어 버렸는데 후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더니 이미 마른 해골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公子成為相,號安平君,李兌為司寇。
공자 성이 재상이 되어 安平君이라 불렸고, 이태는 司寇에 임명되었다.
公子章之敗,往走主父,主父開之,成、兌因圍主父宮。
공자 장이 패함에 주부에게로 도망하였는데 주부가 문을 열어주었으며, 공자 성과 이태가 그로 인해 주부의 궁을 포위하였다.
公子章死,公子成、李兌謀曰:
「以章故圍主父,即解兵,吾屬夷矣。」
공자 장이 죽자 공자 성과 이태가 상의하며 말하였다.
“공자 장 때문에 주부를 포위했으니 즉시 병력을 해산하면 우리는 멸족될 터이오. ”
乃遂圍主父。
이에 계속 주부의 궁을 포위하였다.
令宮中人
「後出者夷」,宮中人悉出。
궁중의 사람들에게 영을 내려
“늦게 나오는 자는 멸족하겠다. ”
라고 하니 궁중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主父欲出不得,又不得食,探爵鷇而食之,三月餘而餓死沙丘宮。
주부는 나가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었고 또 먹지도 못해, 참새 새끼를 찾아서 먹다가 석 달여 만에 沙丘宮에서 굶어 죽었다.
主父定死,乃發喪赴諸侯。
주부가 죽은 것이 확실하자 제후들에게 죽음을 알렸다.
▶ 開之: 문을 열어 공자 장을 받아들이다.
▶ 夷: 멸족을 당하다.
▶ 爵鷇: 爵은 雀과 같다. 鷇는 새의 새끼.
▶ 赴: 訃告하다.
是時王少,成、兌專政,畏誅,故圍主父。
당시 왕이 어렸으므로 공자 성과 이태가 정치를 전담했는데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주부를 포위했던 것이다.
主父初以長子章為太子,後得吳娃,愛之,為不出者數歲,生子何,乃廢太子章而立何為王。
주부는 당초 맏아들 장을 태자로 삼았다가 그 후 오왜를 얻고어 그녀를 사랑하여 오왜의 궁에서 몇 년을 나오지 않다가 아들 何를 낳자 태자 章을 폐하고 趙何를 왕으로 세웠다.
吳娃死,愛弛,憐故太子,欲兩王之,猶豫未決,故亂起,以至父子俱死,為天下笑,豈不痛乎!
오왜가 죽자 조하에 대한 사랑이 식어서, 원래의 태자를 가엾게 생각해 둘 다 왕으로 만들려다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는 바람에 난이 일어났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죽음에 이르러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主父死惠文王立立五年,與燕鄚、易。
주부가 죽고 혜문왕이 즉위하고 5년(기원전294년)에 趙가 燕에 鄚과 易땅을 주었다.
八年,城南行唐。
혜문왕8년(기원전291년)에 南行唐에 성을 쌓았다.
九年,趙梁將,與齊合軍攻韓,至魯關下。
혜문왕9년(기원전290년), 趙梁이 軍士를 이끌고 齊와 연합하여 韓을 공격하여 魯關아래에 이르렀다.
及十年,秦自置為西帝。
혜문왕10년(기원전289년)이 되자 秦이 西帝라 자칭하였다.
十一年,董叔與魏氏伐宋,得河陽於魏。
혜문왕11년(기원전288년)에 董叔이 魏氏와 연합하여 宋을 공격하여 魏로부터 河陽을 얻었다.
秦取保陽。
秦이 梗陽을 탈취하였다.
▶ 自置: 자칭.
▶ 秦自置為西帝: 진소왕19년(기원전288년), 秦昭王이 西帝를, 齊閔王이 東帝를 칭했다가 모두 취소하였다.
[史記本紀]권05. 秦本紀
▶ 保陽: 秦이 趙를 공격하여 梗陽을 함락하였다. <資治通鑑綱目>
梗陽은 太原郡楡次縣의 경계에 있다.
十二年,趙梁將攻齊。
혜문왕12년(기원전287년)에 趙梁이 군사를 이끌고 齊를 공격하였다.
十三年,韓徐為將,攻齊。
혜문왕13년(기원전286년)에 韓徐가 장군이 되어 齊를 공격하였다.
公主死。
공주가 죽었다.
十四年,相國樂毅將趙、秦、韓、魏、燕攻齊,取靈丘。
혜문왕14년(기원전285년)에 상국 樂毅가 趙, 秦, 韓, 魏, 燕을 이끌고 齊를 공격해 靈丘를 빼앗았다.
與秦會中陽。
秦과 中陽에서 회맹하였다.
十五年,燕昭王來見。
혜문왕15년(기원전284년)에 燕昭王이 와서 혜문왕을 만났다.
趙與韓、魏、秦共擊齊,齊王敗走,燕獨深入,取臨菑。
趙가 韓, 魏, 秦과 함께 齊를 공격하니 齊왕이 패주하였는데, 燕이 홀로 깊이 들어가서 臨菑를 차지하였다.
▶ 樂毅: 戰國時代에 활약한 燕의 무장. 조·초·한·위·연의 군사를 이끌고 당시 강대국이던 齊를 공격하였다. 燕혜왕이 즉위하자 齊 전단의 이간책으로 趙로 달아났다 연·조 두 나라의 客卿이 되었다.
[史記列傳]권80樂毅列傳
▶ 臨菑: 臨淄.
十六年,秦復與趙數擊齊,齊人患之。
혜문왕16년(기원전283년), 秦이 다시 趙와 함께 여러 차례 齊를 공격하니 齊의 군주가 걱정하였다.
蘇厲為齊遺趙王書曰:
蘇厲가 齊를 위해 趙 혜문왕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였다.
▶ 蘇厲為齊遺趙王書曰: 蘇厲가 齊를 위하여 趙 惠文王에게 올린 글이다. 蘇秦은 일개 서생 출신으로 智謀辯舌로써 공명부귀를 얻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고 秦을 위해 連衡策을 썼던 장의와 함께 전국시대 策士의 제1인자로 竝稱되었다.
그의 동생 蘇代·蘇厲도 역시 유세가로서 알려졌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18권 趙策에 실려 있다.
臣聞古之賢君,其德行非布於海內也,教順非洽於民人也,祭祀時享非數常於鬼神也。
“신이 듣건대 옛날 어진 군주들은 그 덕행이 海內에만 베푸는 것이 아니며, 가르침이 민간에까지 보급되는 것이 아니며, 제사와 時享을 귀신에게 항상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甘露降,時雨至,年穀豐孰,民不疾疫,眾人善之,然而賢主圖之。
甘露가 내리고, 비가 때맞추어 이르고,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를 좋아했지만 어진 군주는 이를 경계했다고 합니다.
▶ 海內: 四海의 안을 말하며, 여기서는 나라 안을 지칭한다.
▶ 教順: 敎訓. 교화.
▶ 洽: 보편적으로.
▶ 時享: 사계절의 제물. 음력2월, 5월, 8월, 11월에 사당에 지내는 제사.
▶ 甘露: 단 이슬, 감로수로 ‘하늘에서 내려주는 不老長生의 신비한 약’으로,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祥瑞로운 징후로 내려주는 것이라고 한다.
▶ 孰: 熟과 같다. 익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18권 趙策에 실려 있다.
今足下之賢行功力,非數加於秦也;
怨毒積怒,非素深於齊也。
지금 족하의 어진 행위와 공적을 秦에게 자주 베풀지 않았고, 축적된 원한과 분노를 평소 齊에 깊이 심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秦趙與國,以彊征兵於韓,秦誠愛趙乎?
秦이 趙와 동맹국이 되어 韓에 강한 정벌군을 출병함이 秦이 진정으로 趙를 아껴서 그랬겠습니까?
其實憎齊乎?
齊를 확실히 미워해서 그랬겠습니까?
物之甚者,賢主察之。
일이 과분해지면 현명한 군주는 이를 잘 살핍니다.
秦非愛趙而憎齊也,欲亡韓而吞二周,故以齊餤天下。
秦은 趙를 아끼거나 齊를 미워서가 아니라 韓을 멸망시켜 동주와 서주를 삼키고자 하여 齊를 천하에 미끼로 삼았습니다.
恐事之不合,故出兵以劫魏、趙。
일이 성공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출병함으로써 魏와 趙를 협박하는 것입니다.
恐天下畏己也,故出質以為信。
또 천하가 그들을 두려워할까 걱정하여 인질을 보내 믿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恐天下亟反也,故徵兵於韓以威之。
천하가 성급히 반대할까 두려워 군사를 징발하여 韓을 위협한 것입니다.
聲以德與國,實而伐空韓,臣以秦計為必出於此。
동맹국에 덕을 베푼다고 떠벌리면서 실제로는 텅 빈 韓을 공격하니, 신은 秦의 계책이 틀림없이 이런 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 怨毒: 원한.
▶ 與國: 동맹국.
▶ 餤: 미끼를 먹이다.
▶ 劫: 협박하다.
▶ 亟: 성급하다.
夫物固有勢異而患同者,楚久伐而中山亡,今齊久伐而韓必亡。
무릇 사물이란 본디 형세는 다르지만 재앙은 같아서, 楚가 오랫동안 공격당할 때 중산이 趙에게 망했으며, 지금 齊가 오랫동안 공격당하니 韓이 분명 망할 터입니다.
破齊,王與六國分其利也。
齊를 깨뜨리면 왕과 여섯 나라는 그 이익을 나누어야 합니다.
亡韓,秦獨擅之。
韓이 망하면 秦이 그것을 마음대로 합니다.
收二周,西取祭器,秦獨私之。
동주와 서주를 거두면 천자의 제기를 서쪽으로 가져가서 秦이 그것을 독차지합니다.
賦田計功,王之獲利孰與秦多?
받은 땅과 공을 계산해 보면, 왕께서 얻는 이익이 秦과 비교하여 어느 쪽이 많겠습니까?
▶ 楚久伐而中山亡: 기원전300년, 趙는 中山國을 공격하여 기원전296년에 멸망시켰다.
▶ 祭器: 주나라 종묘의 제기. 周왕조가 멸망함을 말한다.
▶ 賦田: 땅을 받다.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18권 趙策에 실려 있다.
說士之計曰:
「韓亡三川,魏亡秦國,市朝未變而禍已及矣。」
유세객이 따져보고 말하기를,
‘韓이 三川을 잃고 魏가 秦에 망하면 趙의 시장과 조정이 변화하기도 전에 재앙이 미칠 터이다’
라고 했습니다.
燕盡齊之北地,去沙丘、鉅鹿斂三百里,韓之上黨去邯鄲百里,燕、秦謀王之河山,閒三百里而通矣。
燕이 齊의 북쪽 땅을 모두 차지하면, 趙는 沙丘와 鉅鹿까지 대략300리 거리이며, 韓의 上黨에서 한단까지는100리 거리이며, 燕과 秦이 왕의 산천을 도모할 경우 소로로 300리로 통합니다.
秦之上郡近挺關,至於榆中者千五百里,秦以三郡攻王之上黨,羊腸之西,句注之南,非王有已。
秦의 上郡은 趙의 挺關과 가깝고 楡中까지는 1,500리이며, 秦이 세 개 군의 병력으로 왕의 上黨을 공격한다면 羊腸 서쪽과 句注山 남쪽의 땅은 왕의 차지가 되지 못할 터입니다.
▶ 說: 유세하다.
▶ 三川: 黃河‧洛水‧伊水유역.
▶ 秦國: 원래 秦에 속했던 땅.
▶ 市朝未變: 시장과 조정이 변하기 전에. 짧은 시간을 말함. 朝는 朝廷.
▶ 斂: 줄잡아. 대략.
▶ 閒: 小路.
踰句注,斬常山而守之,三百里而通於燕,代馬胡犬不東下,昆山之玉不出,此三寶者亦非王有已。
秦이 句注를 넘어 常山의 통행을 끊어 지키면 300리가 燕과 통하게 되어, 代馬와 胡犬이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崑崙山의 옥도 생산할 수 없게 되어 이 세 보물 또한 왕이 차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王久伐齊,從彊秦攻韓,其禍必至於此。
왕께서는 오랫동안 齊를 공격해왔고, 강한 秦을 따라 韓을 공격하여 그 화가 결국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願王孰慮之。
원하옵건대 왕께서는 잘 생각하십시오.
▶ 斬: 끊다.
▶ 代馬胡犬: 代의 좋은 말과 胡의 좋은 개.
▶ 昆山: 崑崙山.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18권 趙策에 실려 있다.
且齊之所以伐者,以事王也;
天下屬行,以謀王也。
또 齊가 지금까지 공격을 당한 이유는 왕을 섬겼기 때문으로,
천하가 軍士를 집결하여 왕을 도모하려 합니다.
燕秦之約成而兵出有日矣。
燕과 秦의 동맹이 성사되면 출병은 시간문제입니다.
五國三分王之地,齊倍五國之約而殉王之患,西兵以禁彊秦,秦廢帝請服,反高平、根柔於魏,反坙分、先俞於趙。
다섯 나라가 왕의 땅을 셋으로 나누자고 맹약하였으나, 齊는 五國과의 맹약을 어기고 趙의 재앙을 위해 죽겠습니다. 서쪽으로 출병하여 강한 秦을 막으면 秦은 帝號를 폐하고 굴복을 청할 터이며, 高平과 根柔를 魏에 돌려주고, 巠分과 先兪를 趙에 돌려줄 터입니다.
齊之事王,宜為上佼,而今乃抵罪,臣恐天下後事王者之不敢自必也。
齊는 왕을 섬김을 가장 으뜸의 친분으로 여겼는데 지금 죄에 저촉되니, 신은 이후 천하에 왕을 섬기려는 자들이 결코 스스로 기필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願王孰計之也。
왕께서는 깊이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 屬行:軍士를 집결하다.
▶ 五國: 秦, 燕, 韓, 魏, 齊를 말한다.
▶ 佼: 佼는 交와 통용된다. 친분.
아래 내용은 전국책 제18권 趙策에 실려 있다.
今王毋與天下攻齊,天下必以王為義。
지금 왕께서 천하와 함께 齊를 공격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틀림없이 왕을 의롭다고 여길 터입니다.
齊抱社稷而厚事王,天下必盡重王義。
齊는 사직을 끌어안고 두텁게 왕을 섬길 터이고, 천하도 분명 왕의 의로움을 매우 중시할 터입니다.
王以天下善秦,秦暴,王以天下禁之,是一世之名寵制於王也。」
왕께서는 천하를 거느리고 秦과 잘 지내되, 秦이 포악하면 왕께서는 천하를 거느리고 금지하면 되니, 한 시대의 명예와 영광이 왕에게서 지어질 터입니다.”
於是趙乃輟,謝秦不擊齊。
이에 趙는 공격을 멈추고 秦을 사절하고 齊를 공격하지 않았다.
▶ 寵: 영광.
王與燕王遇。
혜문왕과 연왕이 만났다.
廉頗將,攻齊昔陽,取之。
廉頗가 군사를 이끌고 齊의 昔陽을 공격해 탈취하였다.
▶ 廉頗: 趙의 명장으로 秦과 魏 등과 싸워 여러 차례 적을 물리쳤으며 信平君의 칭호를 받았다. 趙惠文王 16년(기원전283년), 염파는 趙 장수가 되어 齊를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陽秦땅을 빼앗아 上卿이 되었으며, 그 용맹함은 제후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史記列傳]권81廉頗藺相如列傳
十七年,樂毅將趙師攻魏伯陽。
혜문왕17년(기원전282년)에 樂毅가 趙의 軍士를 이끌고 魏의 伯陽을 공격하였다.
而秦怨趙不與己擊齊,伐趙,拔我兩城。
秦은 趙가 자기들과 함께 齊를 공격하지 않았음에 원한을 품고 趙를 공격하여 성 두 개를 함락시켰다.
十八年,秦拔我石城。
혜문왕18년(기원전281년)에 秦이 趙의 石城을 빼앗았다.
王再之衛東陽,決河水,伐魏氏。
혜문왕은 다시 衛의 東陽으로 가서 황하의 물을 터서 魏를 공격하였다.
大潦,漳水出。
큰 비가 내려 漳水가 범람하였다.
魏冉來相趙。
秦의 魏冉이 와서 趙의 재상이 되었다.
十九年,秦敗[取]我二城。
혜문왕19년(기원전280년)에 秦이 趙의 두개의 성을 탈취하였다.
趙與魏伯陽。
趙가 백양을 魏에게 돌려주었다.
趙奢將,攻齊麥丘,取之。
趙奢가 군사를 이끌고 齊의 麥丘를 공격하여 취하였다.
▶ 樂毅: 전국시대 魏 출신으로 燕의 명장이다. 燕昭王은 악의를 대장군으로 등용하고, 제후들과 연합군을 편성하여 齊를 공격해서 70여 성을 함락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昭王이 죽고 태자인 惠王이 즉위하였는데, 혜왕이 齊의 反間計에 말려들어 樂毅를 의심하고 대장군의 직위를 박탈하자, 樂毅는 趙로 망명하였다. <사기 권80. 樂毅列傳>
▶ 潦: 큰비. 장마.
▶ 魏冉: 전국시대 秦 大臣이며 秦昭襄王의 외숙이다. 惠王 때에 관직을 맡아 집정하였다. 昭襄王이 즉위하자 장군이 되었으며 소양왕16년, 수촉이 면직되자 다시 위염을 승상으로 삼고, 위염을 穰에 봉한 다음 다시 陶를 더 봉해 穰侯라 불렀다. <사기 권72. 穰侯列傳>
▶ 趙奢: 전국시대 趙의 관료이자 장군이다. 趙 말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명장으로 손꼽힌다. 趙括의 아버지이다. 馬服君의 칭호를 받았다.
二十年,廉頗將,攻齊。
혜문왕20년(기원전279년)에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齊를 공격하였다.
王與秦昭王遇西河外。
혜문왕이 秦昭王과 西河밖에서 만났다.
二十一年,趙徙漳水武平西。
혜문왕21년(기원전278년)에 趙가 漳水의 물길을 바꾸어 武平 서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二十二年,大疫。
혜문왕22년(기원전277년)에 돌림병이 크게 돌았다.
置公子丹為太子。
공자 丹을 태자로 삼았다.
▶ 徙漳水: 장수의 물길을 바꾸다.
▶ 公子 丹: 혜문왕의 아들로 후일 孝成王에 즉위한다.
二十三年,樓昌將,攻魏幾,不能取。
혜문왕23년(기원전276년)에 樓昌이 군사를 이끌고 魏의 幾읍을 공격했으나 탈취하지 못하였다.
十二月,廉頗將,攻幾,取之。
12월에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다시 기읍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二十四年,廉頗將,攻魏房子,拔之,因城而還。
혜문왕24년(기원전275년)에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魏의 房子縣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성을 쌓은 다음 돌아왔다.
又攻安陽,取之。
다시 安陽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二十五年,燕周將,攻昌城、高唐,取之。
혜문왕25년(기원전274년)에 燕周가 군사를 이끌고 齊의 昌城과 高唐을 공격하여 취하였다.
與魏共擊秦。
魏와 함께 秦을 공격하였다.
秦將白起破我華陽,得一將軍。
秦의 장수 白起가 趙의 華陽을 격파하고 趙의 장수 하나를 사로잡았다.
二十六年,取東胡歐代地。
혜문왕26년(기원전273년)에 東胡를 몰아내고 다시 代땅을 탈취하였다.
▶ 樓昌: 趙의 重臣.
▶ 白起: 전국시대 秦의 명장.
▶ 東胡歐代地: 동호를 협박하여 반란을 일으킨 代땅을 다시 탈취하였다. 歐는驅와 통용되며‘몰아내다’.
二十七年,徙漳水武平南。
혜문왕27년(기원전272년)에 漳水의 물길을 바꾸어 武平남쪽으로 흐르게 하였다.
封趙豹為平陽君。河水出,大潦。
趙豹를 平陽君에 봉하였다. 황하가 범람해 큰 홍수가 났다.
▶ 趙豹: 平陽君. 平原君趙勝의 동생이며, 孝成王의 숙부이다.
二十八年,藺相如伐齊,至平邑。
혜문왕28년(기원전271년)에 藺相如가 齊를 공격하여 平邑에 이르렀다.
罷城北九門大城。
북쪽 九門縣에 큰 성을 쌓는 일을 중지하였다.
燕將成安君公孫操弒其王。
燕의 장수 成安君 公孫操가 그의 왕을 시해하였다.
二十九年,秦、韓相攻,而圍閼與。
혜문왕29년(기원전270년)에 秦이 韓과 협조하여 趙를 공격하여 閼與를 포위하였다.
趙使趙奢將,擊秦,大破秦軍閼與下,賜號為馬服君。
趙는 趙奢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秦을 공격하여 연여성 아래에서 秦의 軍士를 대파하자 조사에게 馬服君이라는 号를 하사하였다.
▶ 藺相如: 전국시대 趙의 재상으로서, 秦이 속임수를 써서 뺏으려던 和氏璧을 지켜내고, 趙 장수 廉頗와 합심하여 趙를 굳건하게 지켜낸 일로 유명하다.
[史記列傳]권81廉頗藺相如列傳
▶ 公孫操: 전국시대 燕의 장수. 호는 成安君으로 기원전271년 燕惠王을 시해하였다.
▶ 相攻: 서로 협조하여 공격하다.
▶ 閼與: 지금의 山西省和順의 서쪽.
三十三年,惠文王卒,太子丹立,是為孝成王。
혜문왕33년(기원전266년)에 혜문왕이 죽고, 태자 丹이 즉위하니 그가 孝成王이다.
▶ 孝成王: 趙孝成王.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丹이고, 惠文王의 아들이다. 秦과 長平에서 일전을 벌였는데, 趙가 대패해 전사한 장병이 40여 만에 이르렀다.
孝成王元年,秦伐我,拔三城。
효성왕 원년(기원전265년), 秦이 趙를 공격하여 성 세 개를 함락시켰다.
趙王新立,太后用事,秦急攻之。
조왕이 새로 즉위하여 태후가 정사를 돌보자 秦이 서둘러 공격한 것이다.
趙氏求救於齊,齊曰:
「必以長安君為質,兵乃出。」
趙가 齊에 구원을 청하자 齊가 말하였다.
“長安君을 인질로 보내야만 출병하겠다.”
太后不肯,大臣彊諫。
태후가 허락하지 않자 대신들이 강력하게 간하였다.
太后明謂左右曰:
「復言長安君為質者,老婦必唾其面。」
태후가 좌우의 신하들에게 명백하게 말하였다.
“다시 長安君을 인질로 보내자고 말하는 자에게는 이 늙은이가 틀림없이 그 얼굴에 침을 뱉을 터이다. ”
▶ 用事: 권력을 장악하다. 효성왕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집정하였음을 말한다.
▶ 太后: 惠文后. 효성왕의 어머니로 아버지인 혜문왕의 부인이다.
▶ 長安君: 惠文后의 막내아들.
左師觸龍言願見太后,太后盛氣而胥之。
左師 觸龍이 태후를 뵙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태후는 성이 나서 그를 기다렸다.
入,徐趨而坐,自謝曰:
「老臣病足,曾不能疾走,不得見久矣。
竊自恕,而恐太后體之有所苦也,故願望見太后。」
좌사가 대전으로 들어와 종종걸음쳐서 앉으며 사과하였다.
“늙은 신하가 발에 병이 나서 빨리 걸을 수 없어서 오랫동안 뵙질 못했습니다.
삼가 용서하시고, 태후께서 몸이 아프신지 걱정되어 태후를 뵙길 청하였습니다.”
太后曰:
「老婦恃輦而行耳。」
태후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는 가마에 의지하여 다닙니다. ”
曰:
「食得毋衰乎?」
좌사가 말하였다.
“드시는 것은 줄지 않으셨습니까?”
曰:
「恃粥耳。」
태후가 대답하였다.
“죽에만 의지하고 있습니다. ”
曰:
「老臣閒者殊不欲食,乃彊步,日三四里,少益嗜食,和於身也。」
좌사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는 요즘 유달리 식욕이 없었으나, 하루에 3, 4리를 억지로 걸었더니 식욕이 조금 나아지고 몸도 좋아졌습니다. ”
太后曰:
「老婦不能。」
태후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는 그렇게 못한답니다. ”
太后不和之色少解。
태후의 편치 않았던 기색이 조금 풀렸다.
▶ 胥: 기다리다.
▶ 嗜食: 식욕.
左師公曰:
「老臣賤息舒祺最少,不肖,而臣衰,竊憐愛之,願得補黑衣之缺以衛王宮,昧死以聞。」
좌사공이 말하였다.
“老臣의 못난 막내아들 舒祺라는 놈이 있는데 재주가 없으나, 신이 쇠약해지면서 그 녀석이 마음속으로 가엾고 사랑스러워지니, 바라옵건대 자리가 나면 흑의를 입는 왕궁의 시위나 시켜 주십사하고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
太后曰:
「敬諾。年幾何矣?」
태후가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요. 나이가 몇입니까?”
對曰:
「十五歲矣。
雖少,願及未填溝壑而託之。」
좌사가 대답하였다.
“열다섯 살입니다.
비록 어리지만 신이 땅에 묻히기 전에 그놈을 부탁드립니다.”
太后曰:
「丈夫亦愛憐少子乎?」
태후가 물었다.
“남자들도 막내 자식을 사랑하고 가련해합니까?”
對曰:
「甚於婦人。」
좌사가 대답하였다.
“부인들보다 더합니다. ”
太后笑曰:
「婦人異甚。」
태후가 웃으며 말하였다.
“부인들이 특별히 심하지요. ”
對曰:
「老臣竊以為媼之愛燕后賢於長安君。」
좌사가 대답하였다.
“노신은 삼가 태후께서는 장안군보다 燕后를 더 사랑하시는 듯합니다. ”
太后曰:
「君過矣,不若長安君之甚。」
태후가 말하였다.
“공이 틀렸습니다. 장안군에 대한 깊은 사랑만은 못하지요. ”
▶ 息: 자손.
▶ 黑衣: 왕궁을 지키는 衛士의 복장.
▶ 昧死: 죽기를 무릅쓰고 말함.
▶ 填溝壑: 죽어서 필시 고랑을 메우게 될 것이니 죽기 전에 막내아들을 부탁한다는 것을 겸손하게 말한 것이다.
▶ 媼: 여자 노인에 대한 호칭.
▶ 燕后: 燕으로 시집 간 조태후의 딸.
▶ 賢: ~보다 낫다.
左師公曰:
「父母愛子則為之計深遠。
媼之送燕后也,持其踵,為之泣,念其遠也,亦哀之矣。
已行,非不思也,祭祀則祝之曰『必勿使反』,豈非計長久,為子孫相繼為王也哉?」
좌사공이 말하였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을 위한 계책이 심원합니다.
태후께서 연후를 시집보내실 때 연후의 발을 붙들고 우셨으니, 멀리 보냄을 염려하셨고 또 불쌍히 여겼습니다.
떠난 뒤에 그리워하지 않음은 아니지만, 제사를 지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절대 돌아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라고 축원하셨으니, 멀리 내다보시고 그 자손이 대를 이어가며 왕이 되길 바란 것이겠지요?”
太后曰:
「然。」
태후가 말하였다.
“그렇지요. ”
左師公曰:
「今三世以前,至於趙主之子孫為侯者,其繼有在者乎?」
좌사공이 말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대 이전에 趙 군주의 자손으로 候가 되어 아직 그 지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曰:
「無有。」
태후가 대답하였다.
“없지요.”
曰:
「微獨趙,諸侯有在者乎?」
좌사가 말하였다.
“趙뿐만 아니라 다른 제후국에는 있습니까?”
曰:
「老婦不聞也。」
태후가 말하였다.
“이 늙은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
曰:
「此其近者禍及其身,遠者及其子孫。
豈人主之子侯則不善哉?
位尊而無功,奉厚而無勞,而挾重器多也。
今媼尊長安君之位,而封之以膏腴之地,多與之重器,而不及今令有功於國,一旦山陵崩,長安君何以自託於趙?
老臣以媼為長安君之計短也,故以為愛之不若燕后。」
좌사가 말하였다.
“이것은 가까운 화는 자신의 몸에 미치고, 먼 곳의 화는 자손에게 미쳤기 때문입니다.
어찌 군주의 자손으로서 侯가 됨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지위는 높아도 공은 없어도 되고, 녹봉은 많아도 노고는 없어도 되고, 귀한 보물만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태후께서 장안군의 지위를 높여서 비옥한 땅에 봉하고 귀한 보물을 많이 주셨으나, 지금 그가 趙에 공을 세우게 하지 않으니, 태후께서 돌아가셨을 때 장안군이 무엇으로 趙에 자신을 의탁하겠습니까?
老臣은 장안군을 위하는 태후의 계책이 짧기 때문에, 연후에 대한 사랑만 못하다고 말하였습니다. ”
▶ 重器: 귀중한 보물.
▶ 膏腴: 비옥하다.
▶ 一旦山陵崩: 하루아침에 산릉이 무너지다. 군주의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이다.
太后曰:
「諾,恣君之所使之。」
태후가 말하였다.
“좋습니다. 그대가 하라는 대로 하겠소. ”
於是為長安君約車百乘,質於齊,齊兵乃出。
이에 장안군을 위해 수레 약 100대를 준비하여 齊에 인질로 보내니 齊가 비로소 출병하였다.
▶ 恣: 마음대로. 맡기다.
▶ 約: 준비하다.
子義聞之,曰:
「人主之子,骨肉之親也,猶不能持無功之尊,無勞之奉,而守金玉之重也,而況於予乎?」
子義가 듣고 말하였다.
“군주의 자식은 골육지친이라, 공적 없는 높은 자리와 공로가 없는 녹봉을 가질 수는 없어도, 귀한 보물을 지킬 수 있는데 하물며 나 같은 자야 어떻겠는가?”
齊安平君田單將趙師而攻燕中陽,拔之。
齊의 安平君 田單이 趙의 軍士를 거느리고 燕의 中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又攻韓注人,拔之。
또 韓의 注人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二年,惠文后卒。
효성왕2년(기원전264년)에 惠文后가 죽었다.
田單為相。
전단이 재상이 되었다.
▶ 安平君 田單: 田單. 원래 齊의 疏族으로 처음에는 수도 臨淄의 小吏였으나 燕과의 전쟁 때 卽墨싸움에서 火牛陣의 전법으로 燕의 軍士를 대패시키고 齊를 수복하여 安平君에 봉해지고 相國이 되었다. <史記권82田單列傳>
四年,王夢衣偏裻之衣,乘飛龍上天,不至而墜,見金玉之積如山。
효성왕4년(기원전262년)에 왕이 꿈꾸기를, 좌우의 색깔이 다른 옷을 입고 비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다가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떨어졌더니 金玉이 산처럼 쌓인 것이 보였다.
明日,王召筮史敢占之,曰:
「夢衣偏裻之衣者,殘也。
乘飛龍上天不至而墜者,有氣而無實也。
見金玉之積如山者,憂也。」
이튿날 왕이 筮史 敢을 불러 점치게 하니 말하였다.
“꿈에 좌우 색깔이 다른 옷을 입었음은 불완전함입니다.
비룡을 타고 하늘로 오르다 이르지 못하고 떨어짐은 기세만 있고 실리가 없음입니다.
금옥이 산처럼 쌓인 것을 봄은 근심입니다.”
▶ 偏裻之衣: 좌우 색깔이 다른 옷. 裻은 등솔기.
▶ 筮史: 占을 담당하는 史官.
▶ 敢: 筮史의 이름.
後三日,韓氏上黨守馮亭使者至,曰:
「韓不能守上黨,入之於秦。
其吏民皆安為趙,不欲為秦。
有城市邑十七,願再拜入之趙,財王所以賜吏民。」
사흘 후 韓의 上黨태수 馮亭의 사신이 와서 말하였다.
“韓은 상당을 지킬 능력이 없어 秦에 바치려고 합니다.
상당의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趙가 되기를 원하고 秦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성의 市邑이 열일곱 개인데, 趙에 바치기를 엎드려 바라오니, 왕께서는 재량껏 관리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실 수 있을 터입니다. ”
王大喜,召平陽君豹告之曰:
「馮亭入城市邑十七,受之何如?」
왕이 크게 기뻐하며 平陽君 趙豹를 불러 알렸다.
“풍정이 城의 市邑 열일곱 개를 바치겠다고 하니 받음이 어떻겠는가?”
對曰:
「聖人甚禍無故之利。」
조표가 대답하였다.
“성인은 까닭 없는 이익을 큰 재앙으로 여깁니다.”
▶ 馮亭: 韓馮亭. 원래 韓의 上黨의 太守가 되었는데, 秦의 위협적인 공격으로 인하여 上黨을 趙에 바치고 귀순하니, 趙에서 그를 봉하여 華陽君으로 삼았으며 장평대전의 단초가 되었다.
▶ 財: “裁”와 통한다. 결재하다.
▶ 平陽君: 趙豹. 平原君 趙勝의 동생이며, 孝成王의 숙부.
<史記列傳]권76平原君虞卿列傳>
王曰:
「人懷吾德,何謂無故乎?」
왕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나의 덕을 사모하는데 어째서 까닭이 없다고 하는가?”
對曰:
「夫秦蠶食韓氏地,中絕不令相通,固自以為坐而受上黨之地也。
韓氏所以不入於秦者,欲嫁其禍於趙也。
秦服其勞而趙受其利,雖彊大不能得之於小弱,小弱顧能得之於彊大乎?
豈可謂非無故之利哉!
且夫秦以牛田之水通糧蠶食,上乘倍戰者,裂上國之地,其政行,不可與為難,必勿受也。」
조표가 대답하였다.
“秦이 韓의 땅을 잠식하여 중간을 끊음으로써 서로 통할 수 없게 하여, 본래 자신은 가만히 앉아서 上黨의 땅을 접수하려 하였습니다.
韓이 상당을 秦에게 바치지 않는 이유는 그 화를 趙에게 轉嫁하려 함입니다.
秦이 힘을 들이고 趙가 그 이익을 취함이니, 비록 강대국이라도 약소국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없는데, 약소국이 어찌 강대국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 어찌 까닭 없는 이익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게다가 秦은 牛田의 수로로 양식을 운반하며 韓을 잠식하고, 上等의 전차를 타고 분발하여 전투하며, 韓의 땅을 분할하여 秦의 정치를 행하고 있어 대적할 수 없으니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 ”
▶ 嫁其禍: 재앙을 남에게 전가시키다.
▶ 上乘: 고급의 병거.
▶ 倍戰: 분발하여 전투를 하다.
王曰:
「今發百萬之軍而攻,踰年歷歲未得一城也。
今以城市邑十七幣吾國,此大利也。」
왕이 말하였다.
“지금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해를 넘기고 몇 년을 지나도록 성 하나 얻지 못하였다.
지금 성의 시읍 열일곱 개를 우리나라에 예물로 바치니 이는 큰 이득이다. ”
趙豹出,王召平原君與趙禹而告之。
조표가 나가자 왕은 平原君 趙勝과 趙禹를 불러 이를 말해 주었다.
對曰:
「發百萬之軍而攻,踰歲未得一城,今坐受城市邑十七,此大利,不可失也。」
대답하였다.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공격했지만 해를 넘겨도 성 하나 얻지 못했는데, 지금 앉아서 성시읍 열일곱 개를 받음은, 큰 이익으로 놓쳐서는 안 됩니다. ”
王曰:
「善。」
왕이 말하였다.
“좋소.”
乃令趙勝受地,告馮亭曰:
「敝國使者臣勝,敝國君使勝致命,以萬戶都三封太守,千戶都三封縣令,皆世世為侯,吏民皆益爵三級,吏民能相安,皆賜之六金。」
이에 趙勝에게 땅을 접수하게 하니 조승이 풍정에게 고하였다.
“우리나라는 저 조승을 사신으로 보내 君命을 받들게 하시기를, 1만 호의 도성 세 개를 태수에게 봉하고, 1천 호의 도성 세 개를 현령에게 봉하여, 대대로 모두 侯가 되게 하고, 관리와 백성들에게는 모두 세 등급씩 작위를 올려 주고, 관리와 백성들이 편안하게 지내라고 모두에게 황금 여섯 근을 내려주셨습니다. ”
▶ 幣: 예물을 바치다.
▶ 平原君: 趙勝. 武靈王의 아들로 惠文王의 동생이다.
▶ 萬戶都三: 1만호의 인구인 성읍3개.
馮亭垂涕不見使者,曰:
「吾不處三不義也:
為主守地,不能死固,不義一矣;
入之秦,不聽主令,不義二矣;
賣主地而食之,不義三矣。」
풍정은 눈물을 흘리며 사신을 보지 않은 채 말하였다.
“저는 세 가지 의롭지 못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군주의 땅을 지킴에 죽음으로 지킬 수 없음이 첫 번째 不義요,
秦에 땅을 바치라는 군주의 명을 듣지 않음이 두 번째 不義요,
군주의 땅을 팔아서 거기서 먹고 사는 것이 세 번째 不義입니다. ”
趙遂發兵取上黨。
趙는 마침내 출병하여 상당을 점령하였다.
廉頗將軍軍長平。
염파가 군을 이끌고 장평에 주둔하였다.
▶ 死固: 목숨을 걸고 고수하다.
七年[月], 廉頗免而趙括代將。
7월에 염파가 면직되고 趙括이 대신하여 장수가 되었다.
秦人圍趙括,趙括以軍降,卒四十餘萬皆阬之。
秦의 軍隊가 조괄을 포위하자 조괄이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으며, 병졸 40여만 명이 모두 생매장을 당하였다.
王悔不聽趙豹之計,故有長平之禍焉。
효성왕은 조표의 계책을 듣지 않아 장평의 禍가 일어났다며 후회하였다.
▶ 七月: 趙孝成王 6기원전260년 7월.
▶ 趙括: 趙의 장군 趙奢의 아들이다. 性情이 경망하여 병법을 배운 뒤 천하에 자기를 당할 자가 없다고 늘 자부하였으므로 아버지가 趙의 軍士를 망칠 사람은 틀림없이 括일 것이라는 경계하였다. 秦이 趙를 공격하여 장평에서 대치하였는데, 秦의 反間計에 따라 조괄이 廉頗 대신 장수가 되었으나 秦軍을 경시하다가 결국 秦 장군 白起에게 크게 패하여 자신은 죽고 趙軍 40만은 항복했다가 모두 구덩이에 묻혀 죽었다. <史記 卷81廉頗藺相如列傳>
▶ 阬: 坑과 같다. 생매장하다.
▶ 長平: 地名. 趙 上黨郡의 읍. 長平大戰은 기원전262년에서 기원전260년에 걸쳐 秦과 趙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투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다. 장평의 승리는 秦이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趙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王還,不聽秦,秦圍邯鄲。
왕이 돌아와 秦의 요구를 듣지 않자 秦은 한단을 포위하였다.
武垣令傅豹、王容、蘇射率燕眾反燕地。
武垣의 현령 傅豹와 王容, 蘇射은 燕의 무리를 거느리고 燕으로 돌아갔다.
趙以靈丘封楚相春申君。
趙는 靈丘를 楚의 春申君에 봉해주었다.
▶ 春申君: 전국시대 楚의 정치가이며, 성은 黃, 이름은 歇이다. 戰國四君의 한 사람으로 식객 수천을 거느렸다. 楚의 태자 完과 秦에 볼모로 갔었으며, 뒤에 完이 돌아와 즉위하여 考烈王이 되자 春申君이 되었다. <史記列傳권78春申君列傳>
八年,平原君如楚請救。
효성왕8년(기원전258년)에 평원군 조승이 楚에 가서 구원을 청하였다.
還,楚來救,及魏公子無忌亦來救,秦圍邯鄲乃解。
돌아오자 楚가 구원하러 왔으며, 魏公子 無忌도 구원하러 오자, 秦의 한단 포위가 이에 풀렸다.
▶ 平原君: 平原君 조승은 戰國時代 趙의 公子이며 정치가이다. 武靈王의 아들로 惠文王의 동생이다. 휘하의 食客을 모아 형인 혜문왕과 조카 孝成王을 보좌하였다.
[史記列傳]권76平原君虞卿列傳
▶ 魏公子 無忌: 위무기. 전국시대 魏의 저명한 군사가로 기원전276년 信陵에 봉해지면서 信陵君으로 불리었다. 齊의 孟嘗君 田文, 趙의 平原君 趙勝, 楚의 春申君 黃歇과 함께 전국시대의 4공자로 불린다.
十年,燕攻昌壯,五月拔之。
효성왕10년(기원전256년)에 燕이 昌壯城을 공격하여 5월에 점령하였다.
趙將樂乘、慶舍攻秦信梁軍,破之。
趙의 장수 樂乘과 慶舍가 秦의 장수 信梁의 軍士를 격파하였다.
太子死。
趙의 태자가 죽었다.
而秦攻西周,拔之。
秦이 西周를 공격해 점령하였다.
徒父祺出。
徒父祺가 출정하였다.
十一年,城元氏,縣上原。
효성왕11년(기원전255년)에 元氏에 성을 쌓고 上原을 현으로 삼았다.
武陽君鄭安平死,收其地。
武陽君 鄭安平이 죽자 그 땅을 거두었다.
十二年,邯鄲廥燒。
효성왕12년(기원전254년)에 한단의 곳간이 불탔다.
十四年,平原君趙勝死。
효성왕14년(기원전252년), 평원군 조승이 죽었다.
▶ 樂乘: 전국시대 趙의 장군으로 명장 樂毅와 그의 아들인 樂間과는 친척이며, 趙 말기에 廉頗와 함께 활약하였다. 武襄君의 칭호를 받았다.
▶ 秦攻西周: 기원전256년에는 赧王이 秦昭王에게 항복하여 서주가 멸망하고, 7년 후 秦莊襄王이 동주를 멸망시켜 주나라는 기원전249년 秦에 의해 완전히 멸망되었다.
▶ 廥(괴): 여물을 저장하는 곳간.
十五年,以尉文封相國廉頗為信平君。
효성왕15년(기원전251년)에 尉文땅을 상국 염파에게 봉하고 信平君으로 삼았다.
燕王令丞相栗腹約驤,以五百金為趙王酒,還歸,報燕王曰:
「趙氏壯者皆死長平,其孤未壯,可伐也。」
燕王 喜가 승상 栗腹을 趙에 보내 우호적 맹약을 맺게 하였으며, 조왕의 생일잔치에 황금 5백 근을 예물로 바치도록 하였는데 율복이 돌아와 연왕에게 보고하였다.
“趙의 장정들은 長平의 싸움에서 모두 죽었고, 그 고아들은 아직 장성하지 않았으니 공격할 만합니다. ”
▶ 相國廉頗: 趙는 尉文에 염파를 봉하고 信平君으로 삼았으며, 임시 상국으로 삼았다. <史記列傳권81廉頗藺相如列傳>
▶ 燕王: 연왕 燕王 喜. 孝王의 아들로 이름은 喜이다. 燕 마지막 왕으로 荊軻에게 秦始皇을 암살하게 시킨 것으로 유명한 태자 丹의 아버지이다.
▶ 約驤: 約歡. 우호적인 맹약을 맺다. 驤은 歡과 통용된다.
▶ 栗腹: 燕의 재상. 燕王 喜가 栗腹에게 1백 금을 주어 趙 孝成王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삼았다. 율복은 趙에서 사흘 동안의 잔치를 끝내고 돌아와 이렇게 보고하였다.
“趙 백성들은 나이가 壯年인 자는 모두 장평 싸움에서 죽고, 그 유족 어린애들은 아직 자라지 않아 칠 만합니다.”
율복에게 40만 군으로 趙의 鄗땅을 공격하게 하고 慶秦에게는 20만으로 代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자 趙에서는 이에 맞서 廉頗에게 8만 군사로 䧚에서 율복을 맞아 싸우도록 하고, 樂乘에게는 5만 군으로 代에서 경진을 막도록 하였다. 싸움은 燕이 크게 패하였다. <戰國策31卷 燕策>
[史記世家]권34. 燕召公世家
王召昌國君樂閒而問之。
연왕이 昌國君 樂間을 불러 이에 대해 물었다.
對曰:
「趙,四戰之國也,其民習兵,伐之不可。」
악간이 대답하였다.
“趙는 사방으로 전쟁을 치르는 나라로 그 백성들이 싸움에 익숙하므로 공격하면 안 됩니다. ”
王曰:
「吾以眾伐寡,二而伐一,可乎?」
연왕이 말하였다.
“우리가 많은 수로 적은 수를 공격하려는데 두 명으로 한 명을 치면 되겠소?”
對曰:
「不可。」
악간이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
王曰:
「吾即以五而伐一,可乎?」
왕이 물었다.
“우리가 다섯 명으로 한 명을 치면 되겠소?”
對曰:
「不可。」
악간이 대답하였다.
“안 됩니다. ”
燕王大怒。
연왕이 크게 노하였다.
群臣皆以為可。
신하들은 모두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燕卒起二軍,車二千乘,栗腹將而攻鄗,卿秦將而攻代。
燕이 마침내 두 부대와 전차 2000乘을 동원하고, 율복을 장수로 삼아 鄗를 공격하게 했고, 卿秦에게는 군사를 이끌고 代를 공격하게 하였다.
廉頗為趙將,破殺栗腹,虜卿秦、樂閒。
염파가 趙의 장수가 되어 율복을 격파하여 죽이고 경진과 악간을 포로로 잡았다.
▶ 昌國君樂閒: 樂間. 樂毅의 아들로 악의가 받은 封號를 그 아들 악간이 이어받았다. 악간과 악승은 燕이 자신들의 계책을 들어주지 않음을 원망해 趙로 갔다. 趙는 악승을 武襄君에 봉하였다.▶ 四戰之國: 趙의 동쪽에는 燕이 있고 서쪽에는 秦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魏와 韓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흉노가 있으므로 四戰이라 한 것이다.
▶ 破殺栗腹,虜卿秦, 樂閒. : 樂乘은 代에서 卿秦을 격파했으며 樂閒은 趙로 달아났다. <史記世家권34. 燕召公世家>
十六年,廉頗圍燕。
효성왕16년(기원전250년)에 염파가 燕의 도성을 포위하였다.
以樂乘為武襄君。
악승을 武襄君으로 삼았다.
十七年,假相大將武襄君攻燕,圍其國。
효성왕17년(기원전249년)에 임시로 재상을 맡은 大將 무양군이 燕을 공격해 도성을 포위하였다.
十八年,延陵鈞率師從相國信平君助魏攻燕。
효성왕18년(기원전248년)에 延陵의 鈞이 軍士를 거느리고 상국 신평군 염파를 따라서 魏를 도와 燕을 공격하였다.
秦拔我榆次三十七城。
秦이 趙의 楡次 등 37城을 빼앗았다.
十九年,趙與燕易土:
以龍兌、汾門、臨樂與燕;燕以葛、武陽、平舒與趙。
효성왕19년(기원전247년)에 趙와 燕이 땅을 바꾸었다.
趙는 龍兌, 汾門, 臨樂을 燕에 주고, 燕은 葛, 武陽, 平舒를 趙에 주었다.
▶ 廉頗圍燕: 廉頗는 燕 군사를 鄗땅에서 크게 격파하여 栗腹을 죽이고 드디어 燕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燕이 城 다섯을 떼어 강화를 청하므로 이에 받아들였다. <史記 卷81廉頗藺相如列傳>
▶ 假相: 상국의 代理.
▶ 易土: 영토를 교환하다.
二十年,秦王政初立。
효성왕20년(기원전246년)에 진왕 政이 처음 즉위하였다.
秦拔我晉陽。
秦이 趙의 晉陽을 함락하였다.
二十一年,孝成王卒。
효성왕21년(기원전245년)에 효성왕이 죽었다.
廉頗將,攻繁陽,取之。
염파가 장수가 되어 魏의 繁陽을 공격하여 탈취하였다.
使樂乘代之,廉頗攻樂乘,樂乘走,廉頗亡入魏。
악승으로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가 악승을 공격하여 악승은 달아나고 염파는 魏로 망명하였다.
子偃立,是為悼襄王。
아들 偃이 즉위하니 그가 悼襄王이다.
▶ 秦王政: 嬴政. 후일의 秦始皇. 통일 秦의 開國皇帝이자 탁월한 정치가, 전략가, 개혁가이다. 秦莊襄王의 아들로 趙의 수도인 邯鄲에서 출생하였다.
13세에 王位를 계승했고, 39세에 皇帝를 칭하였다.
▶ 廉頗亡入魏: 조 효성왕이 죽고 아들 趙 悼襄王이 즉위하자 염파를 대신하여 악승을 장군에 임명하였다. 염파가 노하여 악승을 공격하자 악승이 달아났다. 염파도 결국 魏의 大梁으로 달아났다. <史記列傳권81廉頗藺相如列傳>
▶ 悼襄王: 전국시대 趙의 군주로 이름은 偃이고, 孝成王의 아들이다. 도양왕2년에 李牧을 기용해 장군으로 삼아 燕의 武遂와 方城을 공격해 빼앗았다.
悼襄王元年,大備魏。
도양왕원년(기원전244년)에 魏와 친선을 위해 성대한 예를 갖추었다.
欲通平邑、中牟之道,不成。
魏의 平邑과 中牟의 도로를 개통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 大備魏: 魏와 친선을 위해 성대한 예를 갖추다.
二年,李牧將,攻燕,拔武遂、方城。
도양왕2년(기원전243년)에 李牧이 군사를 이끌고 燕을 공격하여 武遂와 方城을 함락시켰다.
秦召春平君,因而留之。
秦이 春平君을 불러들여 그를 억류하였다.
泄鈞為之謂文信侯曰:
「春平君者,趙王甚愛之而郎中之,故相與謀曰
『春平君入秦,秦必留之』,故相與謀而內之秦也。
今君留之,是絕趙而郎中之計中也。
君不如遣春平君而留平都。
春平君者言行信於王,王必厚割趙而贖平都。」
秦 대부 泄鈞이 춘평군을 위해 文信侯(: 여불위)에게 말하였다.
“춘평군은 조 도양왕이 매우 아끼는 인물이나, 郎中들이 시기하고 있는 까닭에 서로 모의하기를,
‘춘평군이 秦에 들어가면 秦이 틀림없이 억류할 터이다. ’
라고 하면서 秦에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군께서 그를 억류하면 趙와는 사이가 끊어지고 낭중들의 계략에 걸려듭니다.
군께서는 춘평군을 보내 주시고 平都侯를 잡아둠이 낫겠습니다.
춘평군의 언행은 조왕에게 신임을 받으므로 趙 왕은 분명 趙 땅을 후하게 떼어 평도후의 몸값을 치를 터입니다. ”
文信侯曰:
「善。」
因遣之。
문신후는 “좋다.”라고 하며 춘평군을 보냈다.
城韓皋。
趙가 韓皐에 성을 쌓았다.
▶ 李牧: 趙의 장수로 북쪽 변경을 수비하면서 匈奴와 東胡를 대파하였다. 秦이 趙의 郭開를 이용해 반간계를 써서 이목을 죽게 하고 秦의 왕전이 趙를 공격해서 趙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春平君: 春平侯. 趙의 태자.
▶ 泄鈞: 世鈞. 秦의 大夫.
▶ 文信侯: 呂不韋. 秦莊襄王 때 승상이 되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여불위의 친자식이라고 기록된 태자 政이 왕위에 올랐으며 그가 진시황제이다. 이에 여불위는 재상직을 지냈다. <史記列傳권85呂不韋列傳>
▶ 郎中之: <戰國策> 趙策에는 郞中甚妬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 平都: <戰國策·趙策>에는 ‘平都侯’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름은 未詳이며 春平君을 따라 秦에 갔던 사람이다.
▶ 贖: 속죄하다. 죄를 면하기 위해 돈을 바치다.
三年,龐煖將,攻燕,禽其將劇辛。
도양왕3년(기원전242년)에 龐煖이 군사를 이끌고 燕을 공격하여 장수 劇辛을 포로로 잡았다.
四年,龐煖將趙、楚、魏、燕之銳師,攻秦蕞,不拔;移攻齊,取饒安。
도양왕4년(기원전241년)에 방난이 趙, 楚, 魏, 燕의 정예병을 거느리고 秦의 蕞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하고, 이동하여 齊를 공격하고 饒安을 탈취하였다.
五年,傅抵將,居平邑;
慶舍將東陽河外師,守河梁。
도양왕5년(기원전240년)에 傅抵가 군사를 이끌고 平邑에 주둔하였다.
慶舍가 東陽과 황하 가의 군사를 이끌고 황하의 다리를 지켰다.
六年,封長安君以饒。
도양왕6년(기원전239년)에 饒를 長安君에게 봉해 주었다.
魏與趙鄴。
魏가 鄴을 趙에게 주었다.
▶ 龐煖: 전국시대 趙의 장수.
▶ 禽: 擒과 같다. 포로. 사로잡다.
▶ 劇辛: 전국시대 趙 사람으로 燕昭王이 賢者를 초빙할 때 趙에서 燕으로 와 국정을 맡고, 秦과 楚, 三晋을 연합시켜 齊를 공격하였다. 燕王 喜 13년 燕의 장수가 되어 趙를 공격하다가, 趙 장수 龐煖에게 살해당하였다.
九年,趙攻燕,取貍、陽城。
도양왕9년(기원전236년)에 趙가 燕을 공격하여 貍와 陽城을 탈취하였다.
兵未罷,秦攻鄴,拔之。
군대가 철수하지 않았는데 秦이 鄴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悼襄王卒,子幽繆王遷立。
도양왕이 죽고 아들 幽繆王 遷이 즉위하였다.
▶ 秦攻鄴: 기원전236년, 秦이 趙의 땅 鄴의 9개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 幽繆王遷: 趙王 遷. 趙遷. 趙 최후의 군주로 시호는 幽繆이다.
幽繆王遷元年,城柏人。
유목왕 천 원년(기원전235년)에 柏人에 성을 쌓았다.
二年,秦攻武城,扈輒率師救之,軍敗,死焉。
유목왕 천 2년(기원전234년)에 秦이 武城을 공격하여, 扈輒이 군사를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軍은 패하고 호첩은 전사하였다.
▶ 柏人: 옛날의 地名. 지금의 河北省 柏鄕縣부근이다
▶ 秦攻武城: 秦이 趙를 공격하여 宜安, 平陽, 武城을 탈취하였다. <자치통감강목>
三年,秦攻赤麗、宜安,李牧率師與戰肥下,卻之。
유목왕 천 3년(기원전233년)에 秦이 赤麗와 宜安을 공격했으며, 李牧이 군사를 이끌고 肥城 아래에서 싸워 秦軍을 물리쳤다.
封牧為武安君。
이목을 武安君에 봉하였다.
四年,秦攻番吾,李牧與之戰,卻之。
유목왕 천 4년(기원전232년)에 秦이 番吾를 공격했으며, 이목이 그들과 싸워 물리쳤다.
▶ 李牧: 趙의 장수로 북쪽 변경을 수비하면서 匈奴와 東胡를 대파하였다. 秦이 趙의 郭開를 이용해 반간계를 써서 이목을 죽게 하고 秦의 왕전이 趙를 공격해서 趙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五年,代地大動,自樂徐以西,北至平陰,臺屋墻垣太半壞,地坼東西百三十步。
유목왕 천 5년(기원전231년)에 代에 큰 지진이 발생하여 樂徐 서쪽에서부터 북쪽 平陰에 이르기까지 누대, 가옥, 담장 태반이 무너지고, 땅이 동서로 130보나 갈라졌다.
六年,大饑,民訛言曰:
「趙為號,秦為笑。
以為不信,視地之生毛。」
유목왕 천 6년(기원전230년)에 대기근이 들자 민간에서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趙는 울고 秦은 웃는다네.
못 믿겠거든 땅에서 나는 풀을 보라. ”
▶ 坼: 갈라지다.
▶ 訛言: 流言蜚語. 謠言.
▶ 毛: 땅 위의 풀 또는 논밭의 모,
七年,秦人攻趙,趙大將李牧、將軍司馬尚將,擊之。
유목왕 천7년(기원전229년)에 秦이 趙를 공격하자 趙의 대장 이목, 장군 司馬尙이 군사를 이끌고 반격하였다.
李牧誅,司馬尚免,趙怱及齊將顏聚代之。
이목은 죽임을 당하고 사마상은 파면되었으며, 趙怱과 齊의 장수 顔聚가 그들을 대신하였다.
趙怱軍破,顏聚亡去。
조총의 軍은 패하고, 안취는 도망쳤다.
以王遷降。
趙王遷이 항복하였다.
八年十月,邯鄲為秦。
유목왕 천 8년(기원전228년) 10월에 한단이 秦이 되었다.
▶ 秦人攻趙: 秦이 王翦으로 하여금 趙를 공격하자 趙에서는 李牧과 司馬尙에게 秦을 방어하게 하였다. 王翦은 秦始皇의 천하 통일을 도운 장수.
▶ 李牧誅,司馬尚免: 秦의 王翦이 趙 장군 李牧을 미워하여 여러 차례 조왕의 총신인 郭開 등에게 뇌물을 바쳐 반간계를 쓰자, 곽개가 조왕에게
“이목과 사마상은 秦에 붙어 趙를 배반하여, 秦으로부터 많은 봉지를 받으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조왕 천은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趙葱과 顔㝡를 대신 장수로 삼았으며, 이목을 죽이고 사마상을 廢해 버렸다. <전국책 조책> <자치통감강목>
▶ 王遷降: 王翦이 趙軍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마침내 邯鄲을 점령하여 趙王 遷을 사로잡았다.<通鑑節要>
太史公曰。
태사공은 말한다.
吾聞馮王孫曰:
「趙王遷,其母倡也,嬖於悼襄王。
悼襄王廢適子嘉而立遷。
遷素無行,信讒,故誅其良將李牧,用郭開。」
“나는 馮王孫에게 들었다.
‘조왕 천의 어머니는 노래하는 여자로 도양왕의 총애를 받았다.
도양왕은 適者 嘉를 폐하고 遷을 세웠다.
천은 평소 품행이 좋지 않았고, 아첨하는 말을 믿은 까닭에 훌륭한 장수 이목을 죽이고 郭開를 기용하였다. ’
豈不繆哉!
이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秦既虜遷,趙之亡大夫共立嘉為王,王代六歲,秦進兵破嘉,遂滅趙以為郡。
秦이 천을 포로로 잡은 후 도망간 趙의 대부들이 함께 嘉를 왕으로 옹립하니, 代에서 6년 동안 왕 노릇을 했으며, 秦이 軍士를 진격시켜 嘉를 격파하고 마침내 趙를 멸망시키고 秦의 郡으로 삼았다. ”
▶ 倡: 가수. 가무인.
▶ 嬖: 총애하다.
▶ 適: 嫡과 통한다. 嫡子.
▶ 嘉為王: 趙 公子嘉가 스스로 즉위하여 代의 왕이 되고, 燕과 연합하여 上谷에 주둔하였다. <자치통감강목, 기원전228년>
▶ 秦進兵破嘉: 秦 王賁이 燕을 멸망시키고 燕왕 喜를 포로로 잡았으며, 다시 代를 멸망시키고 代왕 嘉를 포로로 잡았다. <자치통감강목, 기원전2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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