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裒 字偉元 父儀爲魏安東將軍司馬昭 司馬.
王裒의 자는 偉元으로 어버지 왕의는 魏安東將軍 司馬昭의 司馬이었다.
東關之敗 昭問於衆曰
近日之事 誰任其咎?
東關의 패전에서 사마소가 대중에게 물었다.
“근일의 일을 누가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는가?”
儀對曰
責在元帥.
왕의가 대답하였다.
“원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昭怒曰
司馬欲委罪於孤耶?
사마소가 노하여 말하였다.
“司馬는 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가?”
遂引出斬之 《晉書》〈孝友列傳〉
마침내 끌어내어 죽였다.
【集說】
陳氏曰
上司馬覆姓 下司馬官名.
東關之敗 魏嘉平四年 吳諸葛恪 敗魏師于東興 是也.
元帥謂昭 孤昭自稱也
陳氏가 말하였다.
“위의 司馬는 覆姓이요, 아래의 司馬는 관명이다.
東關의 패배는 魏나라 嘉平 4년에 吳나라 諸葛恪이 魏軍을 東興에서 패퇴시킴이 이것이다.
元帥는 昭를 이르고, 孤는 昭가 자신을 칭한 것이다.”
裒痛父非命 於是 隱居敎授 三徵七辟 皆不就 廬于墓側 旦夕 常至墓所 拜跪 攀柏悲號 涕淚著樹 樹爲之枯.
王裒는 아버지가 비명에 죽었음을 애통히 여겼으매, 은거하여 제자들을 교수하여, 조정에서 세 번이나 부르고 郡國에서 일곱 번이나 불렀는데도 모두 나아가지 않고, 묘 옆에 廬幕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항상 묘에 이르러 절하여 무릎을 꿇고 잣나무를 잡고 슬피 울어 눈물이 나무에 묻으니, 나무가 그 때문에 말라 죽었다.
讀詩 至哀哀父母生我劬勞 未嘗不三復流涕.
《詩經》을 읽다가 〈蓼莪篇〉의 “슬프고 슬프다. 우리 부모여! 나를 낳으시느라 수고하였다.”라는 대목에 이르면 세 번 반복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門人受業者 並廢蓼莪之篇.
門人으로서 수업하는 자들은 모두 〈蓼莪扁〉을 폐하고 읽지 않았다.
【集說】
陳氏曰
朝廷召曰徵 郡國擧曰辟.
哀哀父母生我勞 蓼莪詩之辭.
三復 謂再三反覆誦之.
廢蓼莪篇者 恐其師哀感 故舍之而不誦也.
陳氏가 말하였다.
“조정에서 부름을 徵이라 하고, 郡이나 國[서울]에서 천거함을 辟이라 한다.
哀哀父母 生我劬勞는 蓼莪詩의 말이다.
三復은 두세 번 반복하여 외움을 이른다.
〈蓼莪篇〉을 폐기하였음은 그 스승이 슬픔을 느낄까 염려하여, 빼버리고 읽지 않은 것이다.”
家貧躬耕 計口而田 度身而蠶.
집이 가난하여 몸소 땅을 경작하되 식구를 헤아려 농사를 지으며 몸을 헤아려 누에를 쳤다.
或有密助之者 裒皆不聽.
혹 은밀히 도와주는 자가 있어도 王裒는 모두 듣지 않았다.
及司馬氏簒魏 終身未嘗西向而坐 以示不臣于晉.
司馬氏가 魏나라를 찬탈하자, 王裒는 종신토록 서쪽을 향해 앉지 않음으로써, 晉나라에 신하노릇하지 않음을 보였다.
【增註】
逆而奪取之曰簒.
衣食不求裕 而坐不面闕 皆痛父非命 不忍故爾.
역적질하여 탈취함을 簒이라 한다.
衣食에 풍부함을 구하지 않고, 앉음에 대궐을 향하지 않음은 모두 아버지의 非命을 애통히 여기매 차마 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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